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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지구, 살지 말고 포용하자>의 줄거리:
지구는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지구를 포용하는 대신 살게 되면 75억 명 각 개인의 마음은 서로에게 시한폭탄이고 지뢰이며 동시에 서로에게 그 폭탄이 터지게 하는 뇌관이 되어줍니다. 내가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이웃에게 폭탄 됨을 피하려면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나 부모나 이웃을 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내 주변의 사람 하나하나를 포용하는 일은 이 지구 전체를 포용하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지구, 살지 말고 포용하자
(예레미야 41:1~18)
1. 일곱째 달에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요 느다냐의 아들로서 왕의 장관인 이스마엘이 열 사람과 함께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이르러 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2.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와 함께 있던 열 사람이 일어나서 바벨론의 왕의 그 땅을 위임했던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칼로 쳐죽였고
3. 이스마엘이 또 미스바에서 그다랴와 함께 있던 모든 유다 사람과 거기에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
4. 그가 그다랴를 죽인 지 이틀이 되었어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더라
5. 그 때에 사람 팔십 명이 자기들의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에 상처를 내고 손에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로부터 와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나아가려 한지라
6.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영접하러 미스바에서 나와 울면서 가다가 그들을 만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가자 하더라
7. 그들이 성읍 중앙에 이를 때에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기와 함께 있던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을 죽여 구덩이 가운데에 던지니라
8. 그 중의 열 사람은 이스마엘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밭에 감추었으니 우리를 죽이지 말라 하니 그가 그치고 그들을 그의 형제와 마찬가지로 죽이지 아니하였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지구, 살지 말고 포용하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지구를 살지 말고 포용하자’
올해 우리는 남은 삶을 “하나님 부자 되자!”라는 목표를 가지고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70년대부터 ‘잘 살아보세’를 모토로 삼고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 부자 되자’를 모토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대한민국 땅에 늘어가야 할 것입니다. 바알숭배의 왕국이 된 대한민국이 하나님 부자들의 나라로 바뀌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부자들은 이 세상에 대해 어떠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게 될까요?
참 이상하게도 하나님 부자가 되면 이 지구는 삶을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포용하는 대상이 됩니다. 내가 지구 전체를 포용하게 됩니다. 우리가 포용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다른 나라, 다른 계층, 다른 문화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포용과 관용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포용도 전략적 포용이 있고 체념적 수용이 있습니다. 전략적 포용은 내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념적 수용은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포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은 이와 다른 포용의 방법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지구를 포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부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범을 잡으려면 범의 굴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 마음이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마음이 지구에서 빠져나와서 하늘로 가게 되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으로 부자가 될수록 지구를 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게 지구가 포용되는 동안에 나와 관계된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살아가시게 됩니다. 복음이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으로 부자 되는 것은 그 자체로 정말로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은 삶의 목표를 ‘하나님 부자 되자’로 정한 것입니다. 세상의 재벌들도 나름대로의 격차가 존재하듯이 하나님 부자들 중에서도 더 많이 번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아무리 하나님을 많이 벌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부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일정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합니다. 그 조건이 바로 지구에 있는 어떤 가치의 욕구도 생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선민의 기본적인 목표이자 우리의 목표입니다. 지구에 있는 그 어떤 가치에 대해서도 침 흘리지 않을 만큼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하나님으로 부자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을 이길 정도로 하나님을 가지면 의도치 않게 주어지는 전리품이 있습니다. 지구를 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하나님 부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를 포용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지구에서 빠져나와서 하늘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본래 비어있기에 채워짐을 통해 기쁨과 만족을 얻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지구 안에 갇힌 마음은 지구 안의 가치를 통해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자꾸 막힙니다. 막힘을 경험하면서 마음에는 분노가 쌓이고 폭탄으로 변해갑니다. 이윽고 서로가 서로에게 뇌관이 되어서 마음을 폭파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신혼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랑과 신부의 마음이 지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오직 서로를 향해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참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서로가 서로를 폭발시키는 뇌관이 됩니다. 그렇게 불안정한 시간이 계속되다가 자녀가 태어나면 잠시나마 기뻐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자라남에 따라 원하는 만큼의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폭발시키는 뇌관이 됩니다. 이것은 자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려는 부모의 잔소리가 자녀의 마음을 폭발시키는 뇌관이 됩니다.
결국 지구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마음은 분노라는 폭탄이 됩니다. 내가 느끼는 절망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분노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애착이고 집착에 불과합니다. 애착이나 집착은 일종의 믿음입니다. 상대를 통해 기쁨이 주어질 수 있다고 믿는 마음입니다. 상대를 나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붙잡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사랑합니다. 돈에 대해 집착합니다. 이렇게 돈을 믿는 이유는 돈이 마음의 빈 구석을 채워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지구의 포용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전혀 이런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은 곧 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내 마음을 채우고자 상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상대에 대한 포용입니다. 그런데 상대를 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이 채워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벌어서 하나님 부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부자가 되어야 마음은 지구를 빠져나가게 되고 비로소 상대를 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상대를 포용하려다보니 상대가 속해있는 지구 전체를 포용하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지구를 포용할 수 없다면 내 눈 앞에 있는 가족은 물론이고 직장 동료들 혹은 친구를 포용할 수도 없습니다.
한편 마음이 지구를 빠져나가지 못해도 어느 정도 포용의 형태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전략적 포용이거나 체념적 수용입니다. 전략적 포용은 서로에게 이득이 되리라 믿거나 상대를 속여서 이득을 취하는 모습입니다. 체념적 수용은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는 포용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러한 세상적인 포용으로는 근본적 기쁨과 만족은 절대 얻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참담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것보다도 동족 간에 일어나는 참상이 예레미야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다윗의 혈통에 속한 사람으로서 남 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종친이자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유다사회 내에서 막대한 혜택을 누리는 입장에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로열패밀리입니다.
한편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인품이 뛰어나고 명망이 있던 그다랴를 패망한 유다 나라의 질서를 잡는 행정 담당 총독으로 세웁니다. 그다랴는 예레미야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우호적으로 대해왔던 집안의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에 대해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통해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다랴가 명망이 있었기에 한때 각지에 흩어졌던 이스라엘의 군대나 백성들이 모여들었고 그나마 회복의 기운을 되찾아가게 됩니다. 시기는 예루살렘 함락으로부터 3개월째에 이르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던 이스마엘이 암몬으로 피신했다가 암몬 왕과 의기투합하여 열 명의 칼잡이를 지원받습니다. 당시에 그다랴는 각지에 흩어졌던 유다의 백성과 신하들을 모으고 있었기에 이스마엘 또한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요하난이라는 군대 장관이 이스마엘의 반역의 낌새를 느끼고 그다랴에게 충고를 하고 이스마엘을 제거하겠다는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그다랴는 요하난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사실상 나라가 이미 멸망한 시점에서 그다랴가 맡고 있었던 총독의 권한은 권력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흩어졌던 신하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으는 시점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결국 반란을 일으켰고 식사 자리에서 무방비 상태로 있던 그다랴를 죽입니다. 나중에 50년 만에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그다랴가 죽은 7월 3일을 슬퍼하여 금식을 선포하고 기념하였던 것을 보면 백성들은 이스마엘 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이어서 그다랴 편에 속했던 자들을 죽였고, 치안을 담당하던 소수의 바벨론 군인들도 죽입니다. 또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파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머리를 깎았던 북쪽에서 온 순례자들 80명 중에 70명도 죽였습니다. 그 중에서 10명은 살려두었는데 그 이유는 숨겨두었던 밀과 꿀과 기름과 보리를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남아있던 소수의 왕족이나 귀족들을 암몬 왕에게 바치려고 끌고 가던 중에 요하난의 추격을 받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칼잡이 중의 두 명을 잃고 나머지 여덟 명과 함께 암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이스마엘은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잃게 한 것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다랴의 인품과 명망 아래에 모여서 나라의 재건을 꿈꾸던 사람들의 회복의 싹을 무참히 잘라버렸던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테러로 말미암아 지도자를 잃게 된 유다 땅은 완전히 버려져서 50년간 폐허로 남게 됩니다.
이스마엘이 열 명의 칼잡이를 데리고 와서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을 섬기는 순례자 70명을 죽인 것이었고, 유다를 재건하려던 그다랴와 그를 돕던 참모들을 죽임으로써 유다의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대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이스마엘의 행동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닌 분노의 표현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스마엘은 다윗의 혈통이었고 왕의 종친이었고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유다 사회에서 엄청난 특혜를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쳐들어오면서 유다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바벨론에 대한 증오심, 유다 나라의 망함에 대한 원망, 바벨론에 의해 총독 자리에 오른 그다랴에 대한 혐오감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또 이전에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빈민들이 자기들의 포도원과 밭을 물려받아서 살게 된 상황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중에 마음이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 화가 시한폭탄이 되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살린 사람은 있었는데 오직 자신에게 이득이 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남겨두었다고 하니까 그것을 얻겠다고 살려준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이스마엘의 분노의 원인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다윗의 혈통이었습니다. 다윗의 혈통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혈연적으로 왕족을 일컫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는 마음 길을 발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 길을 달려가는 것이 다윗 혈통의 특징이어야만 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도 이와 같았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을 만드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승천은 곧 하늘로 가는 길을 닦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붙듦으로써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지구를 빠져나가는 것이 다윗 혈통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의 마음은 땅에 갇혀서 하늘로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럴 때에 반드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지구라는 땅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막히고 방해 받을 때면 분노가 나타나고 인격은 폭탄이 됩니다.
가정폭력이 생기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바가지만 긁는 아내가 생겨나는 이유는 마음이 지구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기쁨과 만족의 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은 폭탄이 되어버립니다.
배우자와 마주 앉아서 밥을 먹지 못할 정도가 됩니다. 얼굴만 봐도 화가 납니다. 밥을 맛있게 잘 먹으면 오히려 더 화가 납니다. 남편 뒤통수만 보면 패주고 싶습니다. 발로 뻥 차서 내쫓고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싶습니다. 대체 왜 이런 마음이 생겼을까요?
마음이 지구 안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봐도 화가 납니다. 나라에 대해서도 화가 납니다. 정치는 화를 낼 공공연한 소재가 됩니다. 일본이나 중국에 화를 내고, 김정은과 트럼프에게 화를 냅니다. 이래도 화를 내고 저래도 화를 내는 폭탄이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상대를 대할 때에 또 상대방의 폭탄을 터뜨리는 뇌관이 됩니다. 서로 터트리고 터진 파편에 맞아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지구에서 빠져나와 하나님 부자가 되어서 지구를 포용해야만 합니다.
이스마엘이 하나님 부자가 되었다면 어땠을까요?
자신은 몰락했는데 바벨론은 그다랴를 총독으로 세웠고 빈민들이 밭과 포도원을 받아서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다윗의 혈통임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분노할지라도 다윗의 혈통인 자신은 마음을 이 상황과 지구에서 빼내어 하나님께 보내려 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에 대해 피난처와 산성과 피할 바위 되신다고 끊임없이 노래했던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상황이 막히고 힘들고 상실감이 느껴질 때마다 마음을 세상에 머물도록 두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빼내어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도망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도망가면 이 상황을 포함한 지구가 포용됩니다. 지구를 빠져 나가야만 지구를 포용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구를 포용하는 동안에 나와 관계된 사람과 상황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합한 방식과 속도로 일을 진행시켜 나가실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기쁨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빠져나와서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그러자 요셉이 처한 상황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일터가 되었습니다. 또 오해를 받고 감옥에 들어갔어도 요셉의 마음은 여전히 지구를 빠져나와서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그러자 그 상황에서 또 하나님이 역사하셨고 이 모든 오해와 위기를 계기로 삼아 요셉은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해서 지구를 포용하는 동안에만 하나님께서는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과 상황에 대해 일을 해나가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막힘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음이 더 이상 지구에 머물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구를 빠져나와서 지구를 포용해야 합니다. 지구를 포용할 때에 내 육체의 연관성 영역 안에 속한 모든 일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하나님의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유쾌함과 만족과 기쁨은 하늘의 하나님을 많이 벎으로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부자 되기를 바라시기에 세상일을 막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 변변찮고 신통찮다면 이유는 하나님이 막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재벌 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재벌 되는 것을 막으십니다. 그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지구를 빠져나오면 역설적으로 지구를 포용하게 됩니다. 이 놀라운 일을 경험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베가 망언을 할 때마다 속에서 화가 끓어오르십니까? 먼저 마음이 지구를 빠져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베를 놔두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더 이상 대한민국 안에서 기쁨을 찾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일본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때에 찾아오는 흐뭇함과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찾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지구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일본이나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해 나가실 것입니다. 이북과의 관계 미국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 한 사람부터 지구를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지구를 빠져나간 사람들의 마음이 많아질수록 육체의 연관성 영역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일하시는 공간은 넓어져갈 것입니다.
올 한 해 하나님 부자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지구를 포용하게 됩니다.
막혔던 것 같고 아닌 것 같던 모든 상황과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이 직접 일하시며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상관해야 할 것은 이 땅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지구를 빠져나가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구는 살라고 주신 곳이 아니라 포용하라고 주셨습니다.
지구 전체를 포용하기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승천하시면서 만들어 놓은 하늘 길을 따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내고 하나님을 벌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면 지구를 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육체와 연결된 영역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살아가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이루신 하나님 부자 되는 길은 지구를 포용하는 길입니다. 이 한 길을 줄기차게 걸어서 오늘도 하나님을 많이 벌게 해주시고 지구를 포용하게 해주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