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 한 편, 유튜브 영상] 원감충지의 <들소를 길들이는 노래(馴野牛頌)>
들소를 길들이는 노래(馴野牛頌)
원감충지(圓鑑冲止, 1226~1292)
들소의 천성은 본래 길들이기 어렵나니
부드러운 풀과 드넓은 벌판에서 자유로이 놀았건만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코에 밧줄이 꿰이어
사람의 손아귀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될 줄을
野牛天性本難馴 細草平田自在身 何意鼻端終有索 牽來牽去揔由人
[감상]
들소의 천성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自由)를 바탕으로 한 우리의 마음이고, 둘째는 방종(放縱)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감각기관입니다.
들소가 어느 날 어떤 사람에게 붙들려 일소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물푸레나무를 둥글게 만들어 소의 코에 꿰었습니다. 이제 소는 코뚜레를 묶은 줄이 끄는 대로 이리저리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줄이 끄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려 하면 코뚜레를 묶은 밧줄이 사정없이 코에 압박을 가합니다. 처음에는 저항해보기도 했지만, 차츰 복종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면 제법 맛있는 음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들소는 차츰 들에서 사는 것보다 집에서 사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는 줄을 묶어놓지도 않았는데, 들소는 나가지 않습니다. 마침내 들소는 자신이 들소가 아니라 집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인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생각은 방종에 빠지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 감각기관들은 쉽게 욕망에 빠져들어갑니다.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분노하게 됩니다. 그 욕망과 분노는 우리가 감각하는 것이 내 것이라는 어리석음 속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수행은 이러한 감각기관에 코뚜레를 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이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제어하는 것입니다.
이 두 의미가 수행을 상징하는 관점에서는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첫 번째 들소는 등따시고 배부른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감각기관에 코뚜레를 꿰어 날뛰지 못하게 된 두 번째 들소도 코뚜레를 꿰지 않아도 감각기관의 탐진치에 휘둘리지 않게 되면 마침내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오늘은 내 안의 들소 두 마리를 만나봅니다. 그 들소 두 마리를 어떻게 길들일지 성찰해봅니다.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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