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처형네와 남도로 향했다 대전을 거쳐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로 일단 내달렸다
오늘도 35도가 넘는 폭염으로 푹푹 찌었다 나라에선 이런 때 새만금 세계잼버리축제를 준비없이 개최해 역시 난리도 아니다
온열질환자 속출에 썩은 음식, 70년대 화장실 및 샤워실, 밤엔 모기 및 벌레, 응급체계혼란 등 후진국으로 추락 전 세계의 지탄을 받는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나라가 1년 사이 말세로 변했다
그런데 이것도 전정권 탓이라고 연일 윤정권 밑 기레기(언론)들은 편파 조작 방송이다
정말 하루하루 평범하게 지나가지 않는 나날이다
더우기 나라가 시끄러우니 서울 신림동 묻지마 칼부림 사건, 분당 서현역 일반인 상대 자동차돌진 칼부림 사건 등 흉흉하더니 오늘은 급기야 우리 가까이인 대전 송촌고 교사 칼부림 사건이 터졌다
우리가 송촌동에 오전 10시에 도착했으니 채 500미터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선 그 시간 그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참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차 타고 내려오는 내내 전화로 서로 그 관계 뉴스 상황을 가족들과 공유하며 내려왔다
점심 때가 되어 먼저 나주 영산포 철도공원 근처 식당을 찾았다
생선모듬구이인데 반찬이 어마어마하다 영산포의 별미 홍어도 조금 올라와 있다
영산포 나주철도공원 앞이라 공원 사진만 찍었다 너무 더워 구경하긴 어려웠다
이 철도공원은 2003년에 폐역된 영산포역에 들어섰다. 당초 박물관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었으나 2004년에에 무산되어서, 옛 역사는 철거되고 현재 증기 기관차 1량만이 있다.
폐쇄된 철도역이라 기차는 운행하지 않고 현재는 레일바이크만 철로 위로 운영하며 공원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철도공원 주변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걷기도 좋고, 인근에 국립 나주 문화재 연구소도 있어 함께 방문하기 좋다.
다시 예정된 여정지 해남 고산 윤선도유적지로 향했다
이곳은 조선조의 문신(文臣)이요 국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며 시조시인으로 일컫는 고산 윤선도(1587~1671) 선생의 박물관이다. 고산은 우리 동복오씨 참의공 오정 선조와 동서간이다 두 분이 남원 윤돈의 사위로 인연을 맺는다
처음 우리를 맞은 곳은 흰 연꽃이 피는 마을이라는 백련동에서 유래하여 이름 지은 백련지이다
고산 윤선도의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고산은 광해 4년(1612년)에 진사가 되고, 4년 후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 일파의 불의를 규탄하는 상소인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이다.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가 5대조부이다.
정철, 송순과 함께 조선 시조시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며, 오우가와 유배지에서 지은 시인 어부사시사로 유명하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정조의 홍재전서에는 제2의 무학(無學)이라는 별칭이 등재되기도 했고, 의사로 민간요법에 관련된 저서인 약화제(藥和劑)를 남기기도 했다. 수원화성의 터를 100여년 전 추천해 정조 때 이곳에 화성을 짓게 한다
또 이곳에도 백련지 아래쪽 마을앞의 허한 기운을 막기 위해 이렇게 비보기능의 소나무 숲과 대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광해 15년(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이곳 해남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인조 6년(1628년)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왕자사부가 되고 한성서윤과 예조정랑을 역임하는 등 수차에 걸쳐 나라에 중용되었다.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29년(인조 6년)부터는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발탁되어 소현세자를 보도하였다.
그는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 윤휴와 함께 예송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예송 논쟁 당시 선봉장이었다.
서인(西人) 송시열과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집권당 출신인 송시열은 승승장구하는데 북인의 후예 남인 계보인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후일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현대에 와서도 민주당 계보인 문재인 정권에는 대부분 기득권이 반기를 들고 비협조적이면서 국민의짐 계보인 같잖은 윤석렬 정권에는 온 기레기들과 대기업들이 후원하듯 당시도 그렇게 정치는 합리적이거나 조선 선비들이 이야기하는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자신이 삼수(三水)에 유배되어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현대에도 법은 형평성 없이 기득권인 검찰의 손에 좌지우지 되듯 당시도 남인이기에 이런 수모와 고통을 당해야 했다.
녹우당 현판. 성호 이익의 형 옥동 이서가 윤두서와 절친이었는데 그를 위해 써 준 현판이라 한다 윤두서는 고산의 증손이다 고산은 다행히 조선 효종과 현종의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사람이었던 덕에 사형은 모면되고 유배형만 받았다.
결국 그런 고통의 시간과 사색으로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지은 시가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인 것이다.
이는 유배지에서 가사문학과 저서를 남긴 송강 정철, 20여 년간의 유배지에서 수십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 등과 비견된다고 후세 사학자들은 본다.
그러나 난 정철 같은 재벌2세가 지은 송강문학과 이 고산의 고통과 한의 문학을 이렇게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싫다 바로 후세 사학자들이 송강 정철 같은 기득권당 서인 후세이기에 송강의 철부지 가식적 문학을 고산이나 다산의 고상하고 참된 문학에 끼어 맞추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쨌든 고산 윤선도의 학문과 시맥은 송곡 이서우를 통해 성호 이익과 번암 채제공에게로 이어지고 결국 채제공과 외증조부인 윤두서를 통해 다산 정약용에게까지 그 맥이 이어진다고 보면 된다.
윤선도 생전에 타던 거문고로, 그는 자신의 거문고를 아양 이라 이름붙였다
그렇게 윤선도는 많은 세월 유배지에서 보내다가 만년엔 여생을 한적하게 보내다 1671년 7월 16일(현종 12년 음력 6월 11일) 현 전라남도 해남군 보길도 낙서재(樂書齋)에서 사망하게 된다. 사망 당시 향년 85세였다. 서인들은 현종실록에서 그의 졸기를 뺐고, 현종개수실록에 그의 졸기를 실었지만 '윤선도가 죽었다'라는 몇 글자만 실어놓았다.
죽은 뒤 1675년(숙종 1년) 남인이 집권하자 죄가 풀려 신원되고, 증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다. 이 시문집의 하별집(下別集)에 시조 및 단가 75수가 <산중신곡>(山中新曲) 18수,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2수, 기타 6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 <몽천요>(夢天謠) 5수, <우후요>(雨後謠) 1수 순서로 실려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