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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말씀 :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예레미야(예레미야 20:7~18)
* 본문요약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을 전하였다가
매일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사정을 하나님께 절규하며 아룁니다.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붙는 것같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고 하면서도
친한 벗까지도 그가 실족하기를 바라는 현실에 깊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그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탄식합니다.
찬 양 : 509장(새 456)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502장(새 445)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 본문해설
1. 예레미야의 절규(7~10절)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를 속이시므로 내가 주께 속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더 강하사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사방에서 수군거림)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그러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그를 덮쳐서)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7절) : 피티타니
‘권유하다’에 해당하는 ‘피티타니’는 ‘설득하다, 속이다, 유혹하다’라는 뜻으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설득당하여 고난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어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서 그를 속이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 골수에 사무치니(9절) : 아추르 베아츠모타이
‘골수에’에 해당하는 ‘베아츠모타이’는 ‘나의 뼈 안에’이고,
‘사무치니’에 해당하는 ‘아추르’는 ‘갇히다, 붙들리다’라는 뜻으로,
직역하면 ‘나의 뼈 안에 갇히니’가 됩니다.
격한 감정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 답답하여(9절) : 베닐에티
‘답답하여’로 번역된 ‘베닐에티’는 ‘녹초가 되다, 기진하다’라는 뜻으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의 마음이 타는 듯 끓어오르고 있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감사(11~13절)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힘센)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하시는 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치 못하므로 큰 수욕을 당하오리니
그 수욕은 영영히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그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수하심을 나로 보게 하옵소서.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3.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예레미야(14~18절)
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라면, 나의 어미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라면,
15)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아들을 낳았다’하며
나의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라면,
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같이 되었더라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고통의 소리,
낮에는 떠드는 전쟁의 함성을 듣게 하셨더라면 좋을 뻔하였나니,
17) 이는 그가 나를 모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의 배가 항상 부른 채로 있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18)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수치 속에서) 보내는고!
- 그의 배가 항상 부른 채로 있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17절) :
만일 예레미야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죽어서 나오지 못했다면,
그래서 어머니의 배가 자신의 무덤이 되었다면
어머니의 배가 항상 부른 채로 있게 되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 묵상 point
1. 예레미야의 절규 : 하나님께서 나를 속이셨나이다
1) 평안할 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의 고통(8절)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유다 백성들의 불의를 분명하게 밝혀야만 하고
그에 따른 참혹한 형벌(강포와 멸망)을 선포해야만 하는
자신의 사역에 큰 부담을 느낍니다.
예레미야가 처음 유다 멸망을 선포한 지 20년이 지나서야
바벨론에 의해 주도되는 위협의 현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엄청난 비극을 매일 선포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으므로
예레미야는 가는 곳마다 비웃음과 조롱(치욕과 모욕 거리)만 당하는 일을
적어도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매일 당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꼬임에 넘어갔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속이셨다고 불평하는 예레미야(7절)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권유(설득)하셔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다고 불평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권유했다는 말을
지나가는 처녀를 꾀어 유혹할 때 사용하는 낱말을 사용합니다.
자기가 어리숙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꼬임에 자신이 넘어갔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3) 사방에 두려움으로 가득 찬 예레미야(10절)
하나님께서 바스훌에게 ‘사방에 두려움이 있다’는 뜻의
‘마골밋사빕’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으나(렘 20:3),
지금의 현실은 바스훌이 아니라 바로 예레미야 자신이
마골밋사빕(사방에 두려움이 있는 상태)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전에 친한 친구였던 사람들까지도 그에게 유혹을 하여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유혹을 받으면 우리가 원수를 갚자’하고 말하는 현실에
예레미야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낍니다.
4)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예레미야 : 차라리 내가 나지 않았더라면(14~18절)
예레미야는 자신을 향한 이 모든 고통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일을 맡기신 하나님 책임이라고 불평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저주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그 대신 자신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자기가 태어나던 날이 복이 없어서 자기가 죽어서 태어났었더라면,
아들을 낳았다며 자기의 아비를 즐겁게 했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라면,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하지 않으시던
저 멸망의 성읍(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죽었더라면,
내 어머니의 배가 나의 무덤이 되었었더라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이라고 절규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고 지금 이렇게 살아서
이 모진 고통을 겪고 날마다 슬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5)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레미야(13절)
그러나 그가 비록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불평과 원망이 섞인 절규를 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지금도 여전히 오직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절규 속에서 짧게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절규는 하나님께서 가지신 이런 놀라운 권능을
왜 자기를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2. 절규를 하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멈추지 않는 예레미야
1) 심지어 친한 친구들조차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현실(10절)
예레미야는 심지어 어린 시절 가까운 친구였던 자들까지
그를 미혹하여 함정에 빠뜨려 죽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에 그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기셨다면서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리숙한 자신을 속이고 이 자리에까지 꾀었다고 말합니다.
2) 이 고통의 절규는 예레미야가 아직 사명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예레미야의 이 고통스러운 절규는
그만큼 그가 하나님께 충성된 종이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죄가 가득한 시대에 그도 함께 죄 가운데 거하였다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시련과 핍박과 고통이 있으면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고통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 묵상 :
혹 당신도 주님의 사역을 담당하다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지금은 어려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더욱 큰 기쁨으로 지켜보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3. 설교는 반드시 청중의 호응이 있어야만 하는가?
1) 청중들에게 전혀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예레미야(7~8절)
가는 곳마다 그를 향한 비난과 조롱이 있었다는 것보다
예레미야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의 설교가 청중들에게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회개를 외쳤지만
그 어디에서도 통회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영적 각성은 고사하고 오직 조롱과 비난의 소리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모든 인간관계는 단절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실패자라는 좌절감과 함께 외톨이가 된 고독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기에 이릅니다.
2) 설교는 반드시 청중들의 호응을 얻어야만 하는 것입니까?
청중들의 호응과 하나님의 말씀 선포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최근 설교학에서는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청중들에게 바르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청중의 호응을 얻는 설교법을 가르칩니다.
예화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재미있는 설교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물론 설교자가 자기만 아는 내용으로 설교하여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청중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면
결코 좋은 설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가는 설교의 전달 과정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연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역시 설교는 전달 과정보다는
설교의 내용이 되는 말씀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메시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➀ 예레미야가 청중의 호응을 얻기 위해 파멸과 멸망을 부르짖지 않는다면(8~9절)
세상에 자기들이 파멸과 멸망을 당한다고 하는 말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매 주일 설교 때마다 이런 저주의 소리를 듣는다면
그런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그랬습니다.
그런 설교를 할 때마다 비웃음과 조롱하는 소리만 들으니 견딜 수 없어
다시는 이런 설교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견딜 수 없어 다시 나가 또 조롱당하게 될 그 설교를 합니다.
➠ 만일 예레미야가 고통당하는 것이 싫어 주께서 명하시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거짓 선지자가 되고 맙니다.
➁ 주께서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7절)
‘주께서 나보다 더 강하셨다’는 것은
청중들로부터 조롱당할 그 설교를 하지 않으려는 예레미야의 다짐보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설득이 더 강하여,
곧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때마다 예레미야는 단 한 사람도 귀담아듣지 않는
지독히도 호응 없는 설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때로 그 말씀의 뜻을 청중들이 다 이해하였지만,
그 말씀의 내용은 거부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전하고자 하는 설교의 내용이 청중들의 저항이 예상된다고 할지라도
그 설교의 내용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바르게 파악한 것이라면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이 부담된다고 할지라도 전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비록 그 설교의 결과로 예레미야처럼 고통스럽게 된다고 할지라도
강하고 담대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4. 말씀을 듣는 태도를 바르게 하십시오.
• 설교를 듣는 자의 태도 : 입에 쓴 약이 몸에 좋습니다.
설교의 내용이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까?
혹 오늘 들은 설교가 당신을 공격했다고 생각되십니까?
설교를 듣고 이렇게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되었을 때
당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설교가 말씀에 합당한 설교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설교가 말씀의 핵심을 담고 있는 설교였다면
당신의 마음이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혹 설교를 불평했다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묵상 : 만일 그들이 예레미야의 설교를 듣고 불평하지 않고 회개했더라면~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설교를 듣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듣고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그 설교가 말씀을 바르게 전한 것이라면
아무리 당신을 당황하게 했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그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기뻐하십니다.
* 기도제목
1. 힘들고 어렵더라도 맡겨 주신 사역에
충성하게 하옵소서.
2. 말씀을 들을 때에 겸손한 태도로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게 하옵소서.
3. 중보기도 :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모든 사역자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