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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정치시민넷 초청 대담
"이문용 전 하림 총괄사장"
지난 11월 26일 저녁 7시 좋은정치시민넷 사무실에서 이문용 전 하림 총괄사장을 초청하여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문용 사장은 16년 동안 하림을 이끌었던 분입니다. 2001년 하림 총괄 부사장을 시작으로, 2005년부터는 하림 총괄사장을 엮임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경영 일선에서는 물렀지만 지금도 회사에 출근하여 고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문용 전 사장은 중소기업이었던 하림을 대기업으로 키웠고, 국내 500대기업에 포함된 식품기업 최장수 CEO입니다, 국내 CEO 평균 수명이 4.1년 정도 되는 데 무려 12년을 근무한 식품업계의 입지적인 인물입니다.
이문용 전 사장을 초청하여 하림의 성장 배경과 익산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래 내용은 말씀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지면 상 다 기록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익산 왔을 때만 해도 하림의 모습은 중소기업이었습니다. 수도권에서 있을 수도 있었는데 사실 내려온 게, 그때 당시에 이 산업이 산업화 초기단계예요. 급속도로 성장은 했지만 내부적으로 시스템이 부족한 상태였었고......,
익산에 왔었을 때는 먹거리 산업 중에 성장산업인데 산업화가 되지 못한 산업을 제대로 산업화 시켜볼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의 흔적을 남길 수 있겠다. 해가지고 한 게 오랫동안 하게 되었고요. 그러다보니까 하나의 기업문화를 바꾼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대한민국 CEO들 평균수명이 4.1년이라고 하는데 그게 왜 그렇게 되느냐면 지속성장 보다는 순간순간에 실적 위주로 나가다 보니까 안 되면 잘라야 되잖아요.
축산업 분야 쪽에서는 연속성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10년 이상은 해야지 하나의 산업으로, 그 다음에 문화로 정착되어지고, 지속성장 할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실제 사장을 한 게 2001년입니다. 사장에 취임을 하고 잘 맞지 않아서 1년을 떠났다가 다시 2003년도 화재가 나서 일주일 만에 직장 포기하고 다시 오게 됩니다. 익산을 떠나게 된 이유에 대해 질문을 많이 받게 되었는데 사실은 와가지고 문화를 견디기가 어려웠어요.
익산이라는 동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똑 같은 경험을 했던 게 김해라고 하는 농업지역에서, 예전 직장에서 공장장을 제가 89년도 했을 때 똑같은 경우에 봉착을 하게 됩니다. 그게 문화적인 차이이기 때문에 우리가 극복해야할 대상인데…….
11월 달 월간조선을 보게 되면 중국길림성 경제학부 학장이 한 애기 중에 이런 애기를 똑같이 했어요. 저는 그런 이야기를 28년 전에 했었거든요. 중국이 산업화 된 것이 20년이 지났거든요. 그들은 그것을 상업문화라고 그러더라고요. ‘농경문화와 상업문화는 본질적으로 틀리다. 상업문화는 이성적인데 반해서 농경문화는 감성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도 감성에 젖어있다. 감성을 버리지 않고서는 절대 세계화 되지 못하고 변화가 될 수 없다.’ 이렇게 언어로 표시합니다. 제가 여러 곳을 다녔지만 농경문화의 체질이 아직도 강한 곳이 익산이거든요.
농경문화의 특정이 뭐냐면, 대충 어림잡아서 이야기 하고, 계량화되지 못한 이야기를 하죠. 감성적으로 이야기를 하죠. 그러면서도 안 될 때는 인간적으로, 인간존중의 사고를 하죠. 과정중심적인 이야기를 하고, 그런 면에 반해 기마문화라고 하는 것은 상업문화와 맥을 같이 하는데 그 쪽 문화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계급사회죠. 평등하지 못하고, 결과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조금 비인간적이고, 이런 모습들을 갈라놓게 되면 일반적으로 농업문화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기 때문에......, 감성적인 게 창의적일 수도 있는데, 구름사고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용기에 따라서 언제든지 변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사고를 농업문화라고 이야기 합니다. 기마문화, 상업문화를 화살문화라고 이야기 합니다. 과녁을 향해서 쏘아진 화살은 다시 회수할 수 없잖아요. 결과만 기대려야 되고,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봤을 때 익산의 문화는 철저하게 농업문화에 치우쳐져 있죠. 사실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잖아요. ‘너 누구 찍냐.’ 하다보면 한 쪽에 다 쏠려가지고 80%~95% 찍는 것이 익산의 문화잖아요.
이 문화를, 기업에서 그것을 끊어서 50대 50으로 만드는데 정확하게 16년이 걸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두 개가 같이, 감성과 이성이 50대 50 균형을 맞추었을 때 비로소 생산성도 오르고 인간의 행복감도 느껴진다고 하거든요.
2005년에 3인 학습이라고 해서 직원들 공부를 시키는데, 공부를 시킨 다음에는 임원들의 경우에는 1주일에 한권씩 한사람씩 발표를 하게 됩니다. 읽고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다시 배우게 되잖아요. 그거를 지금 12년 했으니까 우리임원들이 본 책이 자금만치 500권이 넘을 겁니다.
제가 이 일을 언제 하게 되냐면, 2005년도에 전주에서 초대를 한 번 받았었어요. 초대를 받아서 갔더니 독서 클럽에 30명이 모여가지고, 멤버는 50정도 된다고 합니다. 거기 보니까 약사, 의사, 사업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어요. 오늘 여기 모이신분들보다 많은 숫자였어요. 강의를 하고 나서 조찬회 하고 나서 제가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부탁을 했죠. 이 모임이 성장되어서 전주에서 리더스 클럽으로 발전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0년 뒤인 2016년도에 제가 다시 초대를 받아 갔는데 깜짝 놀랐어요. 그 멤버가 300명으로 늘어 있더라고요. 강의 끝나고 났더니, ‘대박’, ‘대박’ 그러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전주 효사랑 병원 원장이 ‘우리 효사랑 병원도 하림처럼 키워주시면 안돼요.’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독서클럽이 단순하게 친목단체 뿐만 아니라 각자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전문지식 있잖아요. 지금 4차 산업 혁명시대라고 하는데 4차 산업시대는 한 가지 전문분야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융합이잖아요. 결과적으로……. 그러다 보게 되면 평생 학습을 할 수 밖에 없거든요.
평생학습조직을 어린 아이들도 그렇고, 여기 있는 분들도 그렇고, 누가 주축이 되가지고 만들어 주는 것이 굉장히 바람직하지 않느냐를 생각을 합니다.
제가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퍼실리테이터라고 있는데, 촉진자가 되가지고 교육받고 와가지고 직원들에 직접 강의를 하면서 직원들의 변화를 실제 유도 했었고,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림이 존재하는 한 3인 학습은 계속 진행될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서 얻지 못했던 전문지식이나 인문학지식이나 경영지식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읽는 모습들이 하림을 변화시키고 유지시키는데 밑바닥이 된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모여서 이야기 하는 것도 좋지만 학문적인이고 논리적인 뒷받침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우리들한테는 필요합니다. 농경문화와 기마문화가 50대 50이 좋은데 치우쳐진 농경문화를 기마문화로 바꾸면서,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인 측면, 좋은 보탬을 가져올 수 있다면, 좋은 모임이 이 사회를 바꾸는데 기본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깨진 유리창 언어를 쓰는데, 그것도 2005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어느 길거리 가다가 누군가가 전봇대 밑에 쓰레기 하나 갖다놓게 되면 그 다음날 보면 산더미가 되어 있잖아요. 그 것이 처음에 어떻게 됐냐면 뉴욕 지하철에 낙서가 워낙 많고, 범죄가 굉장히 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뉴욕시장이 사실은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고 낙서를 지웠던 것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범죄가 거의 절반이하로 줄어드는……. 다시이야기하면 사회가 정직하게 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현대 사회생활을 하면서 거짓말시키고 사기 치는 게 오히려 더 성공할 수 있는 확률에서 높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인데,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야기 할 때 성격하고 성품 두 가지를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빙산으로 따지게 되면 20% 위에 나와 있는 게 성격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옷 잘 입고, 말 잘하고, 험한 말 쓰고, 근데 언어는 어눌하지만 성숙되어지고 성실하고 나누어주면 더 큰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수면 밑에 있는 것을 우리는 성품이라고 이야기 하거든요. 영어로 이야기 하면 밑에가 캐릭터, 위에가 퍼실리테이터인데, 성품이 좋은 사람들은 성공하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에 반해서 퍼실리테이터가 강한 사람들은 다툼의 소지를 많이 만들어 냅니다.
이론적인 내용이었지만 저는 실제 결과를 얻었는데, 하림의 경우에 좋은 성품을 만들어내는 쪽에 지원들, 학습을 통해서 역량을 키우는 작업들을 시켰어요. 성품과 역량이라고 하는 것은 성공하는 열쇠거든요. 이게 신뢰를 주게 되고 신뢰를 준 것이 상호간에 신뢰도 그렇지만 대외적으로도 신뢰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그 작업을 한 결과는 한 5년쯤 지나니까 직원들이 다른데 팔려갈 때 보면 두 단계씩 올라가더라고요. 믿을 만하니까 데려 가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좋은 성품을 갖도록 만드는 것은 성실하다는 것과 성숙되어지는 모습, 좀 더 크게 볼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 가는 건데, 이게 하루아침에 되겠습니까? 10 몇 년 동안 사람을 바꾸는 작업을 근본적으로 했었고요.
그것이 기본이 되가지고 윤리경영이라는 거를 하게 됩니다. 제가 윤리경영을 해가지고 올 6월 30일에 공정거래위원회와 동반성장위원회 평가에서 양호를 받게 되는데, 첫 번째 들어가는 사업입니다. 정치적인 부분도 일부 있지만 그렇게 해서 윤리경영을 할 때 제일 중요 한 게, 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게 하려고 하면, 제일 첫 번째가 투명이라고 하는 것, 준법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발판이 되고요. 깨진 유리창을 통해서 회사에 그동안 쌓였던 찌꺼기를 제거하게 됩니다. 2007년도에 윤리경영을 선포하는데 윤리경영을 선포하기 전에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던 것 같아요.
제가 2,000명한테 메시지를 보냅니다. “장기기증을 한번 서로 해보면 어떠냐.” 77명이 지원을 하더라고요. 저까지 포함해가지고 78명이 장기기증 서약을 하면서 윤리경영이라는 첫발을 내리게 됩니다. 투명경영, 준법경영 이것이 기본적인 틀이고요. 그 다음이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는, 상생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쓰는데 실제적으로 제가 왔을 때 산업이라는 것이 혼자 갈수 없잖아요. 요즘은 기업의 이익도 빼가지고 줘라 하는 판인데 상생이라는 언어를 제가 쓴 게 2005도부터였습니다.
저희 농가들이 그 때 당시에 5천만 원이라는 수입 밖에 없었던 부분을 저희가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하림공동체를 만들겠고, 거기에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같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다고 했고, 2억의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올 해 아마 2억이 달성이 될 것 같습니다.
기업의 사회적인 역할로 나눔이 필요하게 되는데, 정리를 하게 되면 준법, 상생, 나눔이라는 세 개의 단어가 집행되는 것이 윤리경영의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온 결과는 직원들의 성장이고, 기업의 성장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직원들에게 목표를 주는데 목표라고 하는 것은, 제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토끼하고 거북이 싸움에서 분명히 토끼가 이겨야 했지 않습니까. 결과는 거북이가 이겼죠. 왜 그런 승부가 났을까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토끼는 거북이를 보고 뛰었죠. 그래서 자기가 빠르다는 자만심 때문에 잠을 잤었고, 거북이는 목표지점이 명확했기 때문에 그 목표 지점을 보고 우보이지만 걸어갔었고, 방향성이 정확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목표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은 굉장히 비참하죠. 달성을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목표가 없다는 그 자체만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국가의 장기 비전이 없다는 것, 어느 지역에 시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장기 비전이 없다는 것은 같이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이 없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런 모습들이 기업이든 국가기관이든 공동체 안에서는 진짜 문제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저희 같은 경우는 중장기 사업계획서를 5년 단위로 바꿔보면서 작업을 했었고, 올 1월 달에는 제가 과거 해왔던 15년의 시간 동안과 선을 긋고 두 번째 작업의 비전 체계를 만들어 줬습니다. 이게 왜 필요했냐면 공동의 작업을 위한 목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백세시대를 이야기 하지만 기업을 하시든 뭘 하시든 간에 할 수 있는 시간은 글쎄......, 저는 43년을 직장생활을 했거든요. 남들보다 굉장히 많이 한 편이죠. 지금은 건강상 일단 내려놨지만은, 우리 아이들 삶도 그렇고 기업의 모습도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 게, 이렇게 보면 된다고 해요.
모방의 단계입니다. 어린아이들이 경제연령에 도달할 때 까지 모방의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어찌 보면 30년을 거의 모방의 단계를 산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다음에 두 번째가 발전의 단계입니다. 자기의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사는 단계가 있습니다. 세 번째가 재창조의 시기거든요. 사람이든 기업이든 나눌 때 어떻게 나누냐면 모방, 발전, 창조로 나누게 됩니다. 과연 우리가 나누어서 살고 있는지 한 번 쯤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림의 경우에 하림이 현재 32주년인데 그 절반 16년을 제가 맡았었구요. 그 앞을 저희 회장이 맡았고, 대표이사를 올 7월 1일 부로 바꿨습니다.
재작년 10월 달에 연합뉴스 하고 인터뷰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생이든 기업이든 간에 세단계의 발전 단계를 거칩니다. 모방, 발전, 창조, 근데 제 역할은 이제 끝났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서 기업이 새로 재창조를 하지 않으면 지속성장은 불가능해 질것이고 그대로 사멸로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얘기를 2012년도에 한국능률협회에 주최하는 자리에 가서 850명 CEO들한테 하림의 과정을 설명을 했었고요. 기독교 방송들 다니면서 간증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주어진 게 뭐냐면 한국능률협회 명예의 전당에 두 번 들어가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 것은 저희 직원들이 저를 믿고 따라왔었던 결과물이었지 그것을 목표로 삼았던 아닙니다. 하지만 외부의 평가기관들이 그런 작업을 해서 평가를 해가지고 명예의 전당에 입성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고 경영자상이라든가 대통령 표창이 따라오는 부분이었고요.
제가 익산에 왔었고, 익산이라는 도시를 통해서 기업을 운영하면서 매진했던 결과물은 전라남북도에 사는 농민들이 생각지도 못한 부를 유지할 수 있는 그런 변화된 모습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게 하림에 있었던 16년간의 저희 흔적이었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근데 생활은 전혀 엉망이었던 거죠. 개인적으로 집하고 회사밖에 몰랐던 거고요. 사회생활도 빈번하게 한 것도 없고 한데......, 익산에 와서 느낀 건, 익산이 정말 사람 살 만한 곳인가? 이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었어요. 익산역이 KTX가 지나고, SRT가 지나게 되면 좋아질 것이라고 막연한 기대감이었지만, 그게 익산의 인구를 늘려주지도 않았잖아요. 오히려, 전에 시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상반기에 4천명이 줄었다고 하더라고요. 분명 익산이 살기 좋은 동네는 아닌 것 같아요. 인구가 계속 빠져나가고요.
익산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유네스코 등재되었잖습니까. 등재되었는데, 등재되고 나서 변화라고 하는 것은 거의 없잖아요. 관심을 가지고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익산의 정체성이 과연 뭐인지 대해서는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유네스코 등재되었다고 어메이징 이야기가 나오더니 어느 날 없어져 버렸고요. 최근에 뜨는 데가 온양이라고 하더라고요. 왜 그런가. 봤더니 온양은 세종대왕이 행궁을 세 번을 했어요. 부스럼 때문에, 여섯 명의 왕이 온양에 갔었더랍니다. 지금 행궁을 제대로 키우는 작업을 하고, 저도 과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온양이 비루백제의 시점이라고 보고, 온양이 비루백제 문화를 만드는 작업하고 행궁을 가지고 문화의 도시로 탈바꿈하는 노력을 지금 하더라고요.
반도국가인 이탈리아든가 그리스라든가 보면 어디서 왔느냐고 하면 ‘나 그리스에서 왔다.’고 보통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는 거죠. 이탈리아도 똑 같이 이탈리아에서 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 로마에서 왔어, 피렌체에서 왔어.’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문화의 도시들의 특별한 장점이죠. 과연 우리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백제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과연 언제 쯤되면 ‘어디서 왔어?’,하면 ‘나 익산에서 왔어’를 자랑스럽게 애기를 할 수 있을지 이게 아마 새로운 숙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익산에 있으면서 익산의 정체가 뭔지, 미륵사지 석탑을 저렇게 가려 놓은 지 십 수 년이잖아요. 환장하겠어요. 이것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되겠고, 뭔가 장기 비전을 갖는 것을 공유 할 수 있지 않다 라면 아까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하림의 16년을 변화시켰던 것처럼 시도 사실은 시민들이 같이 노력해서 새로운 변화된 모습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저희 직원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돈 벌려고 직장에 나오지 마라, 회사를 늦게 망하고 영원히 망하지 않는 기업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해다오.”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미국사회를 이끄는 것이 NPO라는 집단이 있는데, NPO가 국내에는 6개 밖에 없어요. 미국에는 현재 움직이고 있는 NPO가 26만개가 있습니다. 26만개들이 퇴직한 사회저명인사들을 같이 묶어서 자기들의 목적된 바대로 지역사회를 위해서 또는 나눔을 위해서 만들거든요.
거기에 수많은 아이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신구가 조합되는 모습이여요. 미국사회의 기업도 아이들이 8개월에서 1년2개월 만에 이직을 하는데 NPO집단은 보통 10년에서 15년 동안 아이들이 이직을 하지 않습니다. 그 안의 특징이 뭐냐면 사명감을 가진 아이들이 그 안에 들어오게 되고요. 사명감이라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어떻게 살겠다고 하는 사명서를 써본 아이들이고,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고, 일의 성취에 대한 성취 만족감을 갖는 아이들의 집단이 거기거든요. 거기에 자원봉사들이 붙어가지고 NPO를 유지하게 되는데 NPO가 민간인들이 활달하게 움직이는 조직이기 때문에 미국이 활동력 있게 활달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겁니다.
미륵산에 올라갈 때마다 복창 터지는 게 이 넓은 8개 면을 두고 있으면서, 이 좁은 곳 안에서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륵산에 보면 저희가 사는 데가 한 점이여요. 이걸 넓게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도농복합도시를 만들었을 것인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을 보게 되면......,
지나간 이야기지만 웅포 옆에 과거에 저희 회사가 유락시설을 만드는 기획을 했었거든요. 근데 하림이 하면 안 된다는 거죠. 또 하나 있었어요. 용안, 거기에 어떤 제안이 있었냐면, 미래에 대한 것 때문에 100만평 정도를 농지를 합해가지고 순환농법 단지를 한 번 만들어 보자, 그래가지고 어느 정도 시하고도 이야기 되었는데, 추진력도 그렇고, ‘그거 우리가 하지’ 농민들이 그러면서 거부를 해버리는 상황이 왔거든요. 사실 아마 그런 부분도 어차피 농업인구는 줄게 되어 있고, 지금도 아마 계속 줄 겁니다. 70년 대 60년 대 말하면 농업인구 65%였잖습니까. 그게 지금 7%대 정도 되나요. 계속 줄어드는걸 알면서도 우리의 행동은 그렇게 좇아가지 못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보니까 이 넓은 땅덩어리를 뭐를 할지 모르고 그냥 진행되고 있는 부분들이, 시정을 움직이는 분들이 장기비전을 가지고 사실은 익산을 어떻게 끌고 가겠다고 하는 비전과 미션이 사실은 없기 때문에 이런 모습들이 계속 똑같이 재현되지 않는가. 4년 임기를 마치며 는 떠나가 버리면 그만인 시정 하시는 분들이 들어와 가지고는 절대 해결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17년 동안 있으면서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익산이 교통이 좋다는 애기 헐 이유가 없고, 사실은 돌아오는 도시를 만드는 방법을 아마 고민을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저는 익산이라는 도시를 와 본적이 없었습니다. 1977년 11월 이리폭발 사건당시에 제가 한화그룹에 근무했을 당신데 봉급의 20%를 3개월 동안 복구비로 냈던 기억밖에 없거든요. 제가 여기에 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들어왔는데 그 때 느낀 게 뭐냐면 여기 시내에 딱 들어오자마자 느끼는 게 저는 저층으로 아름다운 전원도시 풍으로 갈 줄 알았는데, 딱 들어오자마자 고층아파트가 보이더라고요.
익산시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정체성이 그 때부터 무너진 거 아닌가. 저도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인사를 잘 안 해요. 예전의 우리의 모습은 그렇지 않은 생활이었을 것 아니어요. 정체성이 뭔지 정해지지 않고 잃어 벌이니까 생각 없이 고층으로 짓고 동쪽으로만 흘러가는데, 실제 익산의 문화 어떻게 만들지를 고민할 수 있는 이러한 모임들이 만들어지는 게 기업을 하는 거 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회사에서 전 김복현 문화원장에게 백제문화 강의를 부탁했었거든요. 실제 익산에 있는 친구들 백제문화 하면 잘 모릅니다. 역사적으로 배경이 깔려주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자부심 갖는 익산시민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이런 일을 관련 문화단체가 전혀 못하고 있잖아요.
유네스코에 등재가 되었으면 국정교과서에는 없더라도 익산 자체 시민단체가 역사 강좌를 끊임없이 해서 익산시민들은 자신 있게 외부에서 오면 익산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 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이거 생각해봐야 할 문제여요.
인구변화가 지금 5천만이 이 땅에 살고 있지만 1인 가구가 520만 가구 정도 되고, 맞벌이 부부 가구가 500만이 넘어요. 1천20만 정도가 2인 가족 정도 되는 쪽이잖아요. 그런데 60세 이상이 현재 전체 인구의 10% 정도 되는데 베이비부머 쪽에 58년생들이 퇴직을 벌써 했고, 62년생까지 내년, 내후년 까지 나올 건데 이들이 60세 이상으로 합류가 되잖아요. 10년 쯤 지나며는 대한민국의 20 몇%가 60세 바뀝니다.
이 라이프 스타일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실은 어떻게 바뀔 것인지 이야기를 못합니다. 젊은 아이들 빠져 나갈 것이고, 안 돌아오잖아요. 노인인구들은 금융자산의 40%를 가졌다는데 안 쓰잖아요. 독거로 사시 분들도 많고,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서울시에서 가장 60세 이상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실버타운이 어디에 있냐면 건대 야구장 자리에 실버타운 30층짜리가 있는데 거기 제일가고 싶어 하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아래 3층에 병원이 다 있는데, 건대까지 4분에 갈 수 있는 골든타임이 형성된 가장 안전한 곳 이여요. 남들보다 안 죽는다는 겁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다 몰려, 익산에 원광대학병원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는가? 익산에 계신 분들, 제가 만나는 분들 이야기 하면 어디냐면 삼성, 아산, 서울대 병원입니다. 이 문제도 아마 익산에 원광대가 있으면서 유리한 조건인데도 살리지 못하는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교통이 좋다고 하면 익산만큼 좋은데 없죠. 1시간이면 내려오잖아요. 근데 많은 실버산업들이 서울근교에 세워졌지만 다 망해버린 이유가 있는 게, 아이들이 안가요. 그 분들은 교통이 나쁘니까 못나오고, 지금 굉장히 어려운 게 뭐냐면 서울 근교에 세워진 실버들, 이주단지에 이주했던 분들이 들어오고 싶어도 서울에 못 들어옵니다. 익산이 교통은 좋은데 좋은 교통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찾아져야 한다는 거죠. 저도 서울에 집이 있고, 여기에 집이 있고 그러는데 어디에 살아야 될 것인지를 못 잡겠어요. 이런 문제 해결될 수 있는 고민을 진짜 해야 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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