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에서 천안으로 오르는 길 시간 여유가 있어 지방도를 타다가 청양 청남에 들렀다
청남 왕진리는 외갓집이 있던 곳이고 아산리는 우리집이 한때 살던 곳이기도 하다(막내인 나는 빼고)
어릴때 외갓집에 자주 들렀던 그리움이 있는 곳이다
먼저 청양 장평(적곡)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어머니한테 어릴때 많이 듣던 지명인데 점심식사를 하며 주인 아주머니하고 이것저것 대화를 했다
30년 가까이 이곳에서 식당을 한단다 한때 장평 중대본부에 방위만 20명이 넘을 정도로 젊은이가 많았던 곳인데 이제 초등학생이 전교생 30명도 안되는 곳이란다 장평장도 열렸던 곳인데 없어진지 오래이고 청양에 수력발전으로 수몰시키는 곳들이 있어 요즘 민심이 술렁인단다
정말 고향에서 먹던 맛있는 청국장과 함께 인심 넉넉한 백반상을 대접받고 청남 몽뢰제각을 찾았다
몽뢰제각은 한양조씨 12세 참판공 휘 조준남 문중의 제각이다
예전에 한번 와 봤는데 그냥 스치듯 지나가 이번에 자세히 살펴보려 들렀다
나에게로는 외가쪽 15대 선조이다
때마침 관리하는 분이 내려와 있어 같이 담소하며 묘소까지 둘러보았다
손자를 데리고 놀러왔는데 아들 내외도 곧 내려온다하여 오늘 부여 백제문화재를 보러 간단다
이 참판공 문중은 서울에 빌딩을 두어 그 건물임대료로 매년 5억 정도 나오는데 그중 3억 정도를 사당 및 묘역 관리 시제 등 봉사경비로 할당하니 넉넉한 자금으로 후손들이 항상 많이 참여하고 성황리에 문중결집이 이루어진단다
봄 가을로 시제를 올리는데 참여자들이 대략 100여 명 오는 이들 모두에게 노자돈으로 10만원 정도씩 지급하니 조상숭배가 잘 이루어지는게 당연하다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조상봉사가 이루어지고 노자돈 같은 것은 과외이겠지만 그렇게 시대 변화에도 유연하게 대응하며 조상숭배에 최선을 다하고 같은 핏줄끼리 화목을 추구한다는 것이 더 중요한 부분일게다
제각을 간단히 살펴보고 같이 묘소로 올라갔다
남쪽에 금강을 두고 삼방으로 훤히 트여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살려 묘역을 이제는 공원화하고 그래서 후손들이 더 자주 찾을 수 있도록 하겠단다
묘역에서 가장 윗선대조는 한양조씨 9세 휘 조영걸이시다 6세 양경공 휘 조연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판관공 조운명 할아버지는 병참공 조련이시다
9세 조영걸 선조는 평택현감을 지내셨다
이어서 10세 휘 조수강 선조가 이으셨고
그 뒤를 11세 증도승지 휘 조위 선조께서 이으셨다 이분이 바로 참판공 조준남의 아버지시다
당시는 중종 때로 9촌 아저씨뻘인 정암 조광조가 기묘사화를 당하셔 한양조씨 문중 모두가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이 분은 11세 군수공 휘 조파 선조 이시다
다시 조영걸 선조 묘소의 왼편으로 13세 휘 조찬 선조의 묘소가 있다
증좌승지로 묘비에 새겨져 있다
묘역에서 바라다보이는 금강이 상당히 아름답다 이러하니 이곳을 공원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백제보가 생겨서 과거 모래톱이 대부분이었던 이곳 금강이 이렇게 꽉찬 물결로 이루어졌단다
그 아래로는 14세 지자 항렬의 선조님들이시다
우리는 좌승지공 조찬의 큰아들 부사과공 휘 조지안 선조의 후손이 된다
그리고 15세 휘 조전 선조님의 묘소이다 우리로는 12대조이시다
조전 선조님 상석 앞에 있는 석상이다 거북상인 것 같은데 왜 이 곳에 이렇게 있는지 모르겠다 모습 만큼은 앙증맞다
그리고 묘역 맨 아래쪽 동자석 두 기가 있는데 한 기는 머리가 없다
묘역에서 내려와 오른편 언덕엔 묘소 3기가 있는데 그중 한 묘소는 통덕랑 휘 조만장의 묘소이다 16세이다
그 옆으로 두 기의 묘소가 더 있는데 벌초가 덜 되어 있고 시간도 너무 지체되어 관리하시는 분과 인사하고 다시 천안으로 향했다
외가쪽 선조들의 묘소를 살펴보고 궁금한 것을 해결하니 마음이 새롭고 좋았다
참판공 조준남의 문중인데 정작 조준남 선조의 묘소는 이곳에 없다 파주에 있다고 하던가 하시던데 주의깊게 듣지 않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