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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과 말씀
본문<요4:43~54>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은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아주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이유가 나오죠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목적이 나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단어가 네개가 나오지요
예수 그리스도, ㅎ님의 아들, 믿음, 생명 이 네 단어에요.
이게 아주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은 -ㅎ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은혜의 복음이 핵심이지요.
이 말은 이 요한복음의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사역 그리고 그 사역의 열매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 표적이 등장합니다.
첫번째 표적이 뭐죠?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사건입니다.
두번째 표적이 오늘 본문인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는 사건이구요
세번째 표적이 다음 주에 나눌 38년된 병자를 고치는 사건,
그리고 네번째 표적이 오병이어의 사건,
다섯번째 표적이 바다 위를 걸으시는 사건,여섯번째 표적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시는 사건이고
일곱번째 표적이 그 유명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입니다.
그 표적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향해 흘러가고 있는 지를 보면 아주 흥미로운 걸 발견하실 수 있어요. 표적이 가나에 혼인잔치에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으로 이렇게 흘러가서 끝난다 말입니다.그 뜻은 지금 일곱 가지의 표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는 구원이 설명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IX의 보혈로 말미암아 잔치가 잔치되게 하는 게 가나의 혼인잔치였잖아요 그렇죠?그리고 맨 마지막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사건~ 이렇게 연결이 되는 것이지요.그러니까 이 표적들은~예수 그리스도의 그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는 구원이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 이어서 주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 사건을 예수님의 두 번째 표적이라고 지칭합니다. 본문 54절 보세요.(요4: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그러나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 동안에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이미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을 두 번째 표적이라고 불렀을까요?
요한은 은혜의 복음을 유효적절하게 설명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표적들 가운데 일곱 개의 표적만을 나열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설명한 것입니다.그렇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주님이 행하신 수많은 표적 중에 자신이 고른 두 번째 표적이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본문 속에서도 우리는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 속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담겨있는지 지금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인 43절 이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주 공부한 41절과 42절을 보면 오늘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내용에 관해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요4:41-42)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여기는 지난 시간에 공부한 부분입니다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는 사건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마리아 사람들의 믿음의 동기가 ‘말씀’이었습니다.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이나 기적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끝이 나고,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두 파트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앞부분인 43~45절은 표적을 보고 갈릴리에서 예수를 영접했다는 내용이고, 뒷부분은 말씀으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려주는 내용이지요. 기적과 말씀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가짜고 하나는 진짜라는 것이지요.
성경은 본문을 통해, 천연적인 죄인들은 눈에 보이는 표적을 봐야만 ㅎ님을 믿는 척 하지만, 자신들에게 유익한 일이 없으면 언제든지 ㅎ님을 배신하는 성향을 고발하기 위해, 말씀만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말미에,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본문 44절과 45절을 보시겠습니다.
(요4:44-45) 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이 두 구절은 얼핏 보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44절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 받지 못해-배척받아, 그런데 정작 45절은 고향 갈릴리에 오시니 웬일로 영접하네? 이유는?(주님의 많은 표적을 보고)
-즉, 고향 갈릴리인들이 예수를 영접한 것은 말씀 때문이 아니라 껍데기로 나타나는 기적을 보고 한 것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은 실제로 고향에서 많은 배척을 당하셨습니다.(여기저기 많은 기록이..한군데만 보면)(마13:54-58) 고향으로 돌아 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갈릴리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환영한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주님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2장에도 나옵니다.
(요2:23-24)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예수님이 행하시는 어떤 신기한 기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는 당신의 몸을 의탁하지 않으십니다.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믿는 것은 자기믿음이지 ㅎ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직후에 갈릴리에서 표적을 본 사람들이 주님을 환영하며 영접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건 가짜 영접이라는 것이지요. 성경은 그들의 영접이 가짜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기적을 보고 싶어 하고 그 기적들로 신앙생활의 척도로 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직접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배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13장에 보면 세 존재가 등장(붉은 용과 두 짐승)~사단이 3위 ㅎ님(성부 성자 성령)을 흉내 내어 일하는 모습을 모방한 것입니다(사단은 패러디의 천재). 사단을 상징하는 붉은 용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전권을 주어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합니다. 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죽었다가 살아나기도 합니다. IX를 흉내 내고 있는 짝퉁 예수입니다.
얼마나 그럴싸하면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반문/짝퉁 예수에게 현혹된 세상을 비꼼, 창세전 어린양 생명책 녹명 안되면 다 이 짐승을 경배한다는 것임, 불택자는 짝퉁 예수가 너무도 매력적으로 보여 져서 믿게 된다는 말임, 우상의 ㅎ님). 게다가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바다짐승을 위해 우상을 만들고 경배하라고 부추깁니다. 성령을 위장한 거짓 선지자를 상징합니다.
눈여겨 볼 대목은, 땅에서 올라 온 짐승은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면서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을 경배하게 합니다. 마치 오늘 날 예배당 안에서 기적들을 일으키면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외치고 있는 어떤 무리들과 대동소이 하지요. 한 영이니까요. 그래서 주님은 말세 때에 이적과 기사를 행하며 성도까지도 미혹하게 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누누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막13:22-2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23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고자 하는 자들, 기적을 좇고, 체험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참 신앙인이 아닙니다. 기적을 추구하고 체험을 좋아하며 자신의 경험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사라져 버리면 불안해서 못 견딥니다.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병이 치유, 문제 해결, 환상?, 음성?)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지요?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히11:1-3)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신앙의 정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된 것으로,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보이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을 말합니다. 즉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처럼 선명하게 인정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보이는 것을 보고 ‘그것이 이러하다‘라고 인정하는 것을 우리는 ’인식‘ 혹은 ’인지‘라고 부릅니다. ‘믿음‘과 ‘인식’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열심히 기적을 쫓아다니며 그 기적에 신기해하고 놀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열심히 무언가를 인식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 땅에서 성도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실까요?그냥 다 보여주시고 인식하게 만드시면 되지 왜 굳이 믿음이라는 것을 요구하시고 그 믿음이 있는 자들만을 천국에 들여보내시겠다고 하십니까? 무엇을 보고 만지고 인식하는 것은 누구다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러한 능력을 누군가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보여주면 믿겠노라‘는 세상 사람들과의 구별을 위해 ‘믿음’을 보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내 백성인지는 오직 믿음의 행사를 통해서만 구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보이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에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병을 낫게 해 준다든지, 예언을 해 준다든지, 은이빨을 금이빨로 바꾸어 준다든지 하는 그런 보이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나의 감정이나 기적의 체험이 없이도 믿음만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마귀는 그 믿음을 희석시키기 위해 눈에 보이는 기적들을 동원해서 ‘택한 백성들까지도 미혹’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기적은 정말 신기하고 놀랍기 때문입니다(초월성을 통해 미혹하는 것임). 마귀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놀라운 일들을 동원해서,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감동과 기쁨을 자꾸 보이는 것으로 인한 감동과 놀라움으로 대체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의 삶 속에 기적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기적처럼 건져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인도하시기 위함 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에 기적으로 간섭을 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게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성도는 거기에 마음을 두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의 삶에 나타나야 하는 진짜 기적, 성도의 신앙 성숙에 필요한 진짜 기적은 세상 것들이 부족하고 없는 상태에서도 다른 이들처럼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그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며 찬양하는 기적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그 속에서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에 베푸시는 진짜 기적인 것입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은 바로 그러한 관점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표적만을 보고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했던 갈릴리 사람들이 끝내는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조하는 것과는 다르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으로 예수를 믿게 되는 사건이 바로 왕의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요4: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예수님께서 갈리리 가나에 이르셨을 때, 가나에서 34km, 25마일 정도 떨어진 가버나움에서 헤롯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 왕의 신하가 찾아온 가나를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주님께서 가나에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과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했다시피 주님께서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진정한 혼인 잔치의 즐거움이란 이 세상의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잔치의 즐거움은 회복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만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비로소 완성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죽어 가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죽은 자를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설명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들었다‘라고 표현을 하지 않고 ’죽어 간다‘라로 표현을 한 것이고 ’그의 병이 나았다‘라고 표현을 하지 않고 ’그가 살았다‘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이 치유되는 사건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죄인들이 새사람으로 살아나게 되는 사건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이야기가 어떻게 흡사한지 보세요.
(요2: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요한은 가나의 혼인 잔치를 설명하면서 굳이 별로 필요할 것 같지 않은 ‘사흘’이라는 단어를 동원합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에도 똑같이 사흘이 등장합니다.
(요4: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이틀이 지나 사흘째 되는 날 주님께서 갈릴리 가나로 들어 가셨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사흘(세째 날)은 부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셋째날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존재들에게 성육신하신 예수가 오셔서 죽고 장사되고 부활한 날을 상징하고, 그 부활의 영을 입은 자들이 6째날에 남자를 품은 여자, 즉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3과 3의 배수 육에 담겨 있는 영적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흘이라는 단어 속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나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속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읽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이야기의 흡사한 점은 이 외에도 많습니다. 두 이적 다 주님께서 그 이적을 요구한 사람을 책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첫 번째의 경우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책망이었고 오늘 본문의 경우는 왕의 신하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다 주님께서 말씀만으로 표적을 만드십니다.그리고 결정적인 공통점은 두 사건 모두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생기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이 두 사건 모두 어떻게 예수를 믿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는가에 관한 이야기인 거죠 죽어 가는 아들을 살려달라는 왕의 신하에게 주님은 매몰차게 야단을 치십니다.
(요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사실 오늘 본문을 여는 키는 이 구절에 들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표적을 보고 주님을 영접한 갈릴리 사람들을 포함하여 기적을 바라고 찾아 온 왕의 신하를 책망하시는 말씀인 동시에,
죄인들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만 가능하다는 복음의 선포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표적‘(헬/세메이온)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첫 번째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보고 싶어 하고 경험하고 싶어 하는 기적과 이적’라는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표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상징하는 메세지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입니다.후자의 긍정적인 메세지 의미의 ‘표적‘이 쓰인 곳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오지요.
(요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오병이어로 배를 불린 무리가 주님을 찾아오자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오병 이어의 기적을 통해 표적을 보았어야 하는데 표적은 보지 못하고 배부른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책망인 것입니다. 여기서는 ‘표적을 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오병 이어의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될 하늘의 풍요를 설명하는 표적이었던 것입니다.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 기적 속에 숨어 있는 표적을 보지 못하고 단순히 그 기적만을 신기해하며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무리들에게 ‘제발 표적을 보아라, 그 속에 담긴 십자가의 복음을 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들은 전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주이신 것을 설명하여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표적은 반드시 보아야 하는 것들인 것입니다.
(마12:38) 이하를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자, 주님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질타를 하십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지요?
주님의 모든 표적들은 전부 요나의 표적,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로 인해 얻게 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46절에서 주님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을 하신 것을 의역을 하면 이러한 것입니다.=>‘너희는 너희들의 욕심을 따라 표적과 기사를 구하고 좇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너희는 반드시 표적을 보아야 한다. 너희는 그 표적과 기사 속에서 표적과 기사가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지 못하면 절대 나를 좇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만 해도 주님은 주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주님께서 하실 일이 무엇이며 그 일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알려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사야서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병자들을 고치신 것입니다.
(사35:5-6)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러한 이사야서의 예언은 단순히 메시아가 오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저는 자를 뛰게 하고, 귀머거리의 귀를 여는 치유의 사역을 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죽음의 포로가 되어 버린 영적 소경이요 귀머거리요 절름발이의 상태인 죄인들을 자유롭게 해방시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사역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한 상징적인 의미에서 주님은 병자들을 고치신 것입니다. (이런 걸 모르고 지금도 병자를 고친다고 모방한다?-사단의 종)
뿐만 아니라 주님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죄인들을 살리러 오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 죽었던 자들을 살려 내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자연에게조차 명령을 내리시는 그런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바다의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바다 위를 걷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주님을 그저 나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기적이나 일으켜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믿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그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이 살아나는 표적이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4:49-50) 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여기에 등장하는 왕의 신하는 왕족이거나 왕과 깊은 관계가 있는 아주 높은 귀족입니다.그러한 귀족이 25마일을 걸어서 나사렛의 목수를 찾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미천한 목수에게 죽어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절박했겠습니까? 다 자란 고관대작의 외아들이 지금 열병에 걸려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불원천리 25 마일을 걸어서 찾아 온 사람에게 네 아들이 살았으니 그냥 가라고 하십니다. 그 신하는 주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셔서 자기 아들에게 안수를 하던 치료를 하던 무엇인가를 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계속 자기 아들이 죽기 전에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냥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신하가 ‘그래도 표적을 보기 위해 왔으니 표적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않고 말씀을 믿고 자기 집으로 떠납니다. 그 왕의 신하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내려간 것이 맞습니다.
지금 이 왕의 신하의 이야기와 갈릴리 사람들의 이야기는 표적을 보고 믿으려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와 아울러 오직 말씀에 의해서만 주어지게 되는 믿음의 대조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끝까지 표적만을 좇다가 망하게 되지만 표적을 보지 못하고도 말씀만을 믿고 돌아간 자에게 그 말씀이 실제로 실현이 되고 온 가족이 믿음의 자리로 부르심을 입게 된 것입니다.
(요4:51-53)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52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온 가족이 다 믿으니라.
가나에서 가버나움 까지는 34키로 입니다. 잰 걸음으로 쉬지 않고 걸으면 8~9시간 거리 이지요. 게다가 당시의 거리는 비포장입니다. 애타는 심정으로 쉬지도 못하고 돌아가도 꽤나 걸리는 거리 이지요. 신하는 부랴부랴 주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아들을 보러 집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다가 도중에 집에서 오는 종들을 만나 기쁜 소식을 접합니다. 살았다는 말입니다. 어제 7시쯤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혹자는 어제라는 말에 잡혀서 아비되는 자가 예수님의 말을 믿지 못해서 다른 방도를 구하느라고 늦다보니 하루가 지났다는 해석을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만, 어리석은 관점입니다. 유대인의 하루 시작은 저녁부터입니다(오후 5시가 시작). 왕의 신하는 유대력 7시(오후 1시)에 말씀을 듣고 집으로 가다가 보니 저녁이 되었기에 유대력으로 다음날이 된 셈이지요. 그런데 아들의 치유를 빨리 주인에게 알리기 위해 종들은 올라오고, 아비는 내려가던 길에 조우하여 소식을 들은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이 아니라 어제 제 7시쯤에 열기가 ~(이해 되시나요?)
성경은 이렇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표적만을 좇는 자들에 대한 경고와 함께 말씀의 중요성을 함께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렇게 표적을 보지 않고도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이 곧 현실이라는 것을 굳게 붙들고 갔던 신하는 정말 그 말씀을 현실로 보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이 눈에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이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도 믿음만을 가지고 끝까지 걷는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마8장에 보면, 로마의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중풍 병에 걸렸으니 주님께서 말씀으로 낫게 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가셔서 고쳐 주시겠다고 하시자 백부장은 손사래를 치면서 그냥 말씀만 하시면 그게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음을 보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그와 같은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말씀에 근거한 것이어야지 표적이나 이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왕의 신하의 가족들이 믿음을 얻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랑하는 외아들의 열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열병으로 죽어갈 때에 그 가족들은 아마 세상에서 자기들이 가장 불행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그 아들의 질병 때문에 주님을 찾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온 가족이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 아람의 나아만 장군)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확인만 되었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 주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며 감사함으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ㅎ님의 일하심을 배우게 되니까요..
그러므로 기적을 쫓아다니며 나의 욕구를 채우려는 것은 무속 신앙입니다. 무속 신앙은 나의 소원은 이룰 수 있을지 몰라도 나의 구원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후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 이로라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우리가 정말 믿음이 있는 자들이 맞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늘 확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만일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기적을 믿고 그 분이 이 땅에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채워주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