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있은 후, 홍원교회는 점점 부흥을 하기 시작했다. 홍원교회는 홍등면 홍원리에 있었는데, 이웃 마을 화신리, 상원리, 모전리 등에서 1백 수십명의 어린이들이 주일학교에 적을 두고 교회생활을 했다. 교회에서 배운 찬송가는 어린이들의 입을 통해 마을마다 집집마다 마치 유행가처럼 울려 퍼졌다.
때마침 지방회장 목사가 우리 교회를 방문했다가 이런 상황을 보고 “우리 지방회 안에 이런 훌륭한 교회가 있다니!” 하면서 기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의외로 청년들이 떼를 지어 입교했다. 이에 교회는 순식간에 젊은이들로 주축을 이룬 활기찬, 그야말로 젊은 교회가 되었다. 그 때 홍원교회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던 학생들 가운데 목사가 된 사람이 성지현(成智鉉), 성두현(成斗鉉) 형제와 전병창(田炳昌)이었다.
젊은이 가운데 구항면 소재지에 살고 있는 한세환 씨는 자신의 고향인 홍원리를 내왕하면서 전도를 받고 30리 거리였지만 수개월 동안 열심히 홍원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우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하며 준비를 했다. 개척예배를 드려달라고 해서 나는 1952년 10월 5일 구항교회의 개척예배를 인도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시대는 이렇듯 신자가 곧 전도자요 개척자였던 것이다.
그 후 1개월간 예배인도를 하던 중, 11월 5일에 이덕흥 씨가 총회 전도부로부터 전도사 임명을 받고 이곳으로 부임해왔다. 그 당시는 교역자가 부족한 때였다. 그러므로 단독으로 목회자를 모시지 못하는 교회가 적지 않았다. 나 역시 화계(花溪)교회의 요청에 의하여 또 다시 겸임을 하게 되었다. 화계교회는 김재환(金在換) 집사가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
홍원교회는 1953년 장곡(長谷)면에 지교회를 개척했다. 가송리(佳松里)에서 출석하던 성도들(김기홍, 전병창, 전병순, 채영규 등)을 중심으로 10여 명이 지방유지인 최영태(崔永泰) 씨의 대궐 같은 집에서 개척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3개월간 예배를 인도하다가 그 해 4월에 부임한 유철주 전도사에게 사역을 맡겼다. 이로써 홍원교회는 2년 동안 두 개의 지교회를 세운 셈이다.
홍원교회에서 목회할 때, 나는 두 살 된 큰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다. 그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내색은 하지 않으셨지만, 매우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 같다. 시간이 날 때마다 딸아이를 묻은 곳에 가서 슬픔을 달랬다. 그 뒤 하나님은 둘째 딸과 네 아들을 선물로 주셨다.
홍원교회 송별기념(195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