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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종교현실이 천국현실을 죽인다>의 줄거리:
죄 속에 갇힌 저주받은 삶의 구체적인 내용은 바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현실이라고 느끼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구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이 현실로 느껴지는 상태이지요. 그런데 이런 저주와 죄악의 형태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종교 생활을 현실로 느끼면 천국 현실감의 필요성 자체가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종교 현실이 천국 현실을 죽인다
(사도행전 13:13~52)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종교 현실이 천국 현실을 죽인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종교 현실이 천국 현실을 죽인다’
본문의 앞부분에서는 1차 전도여행의 현황을 이야기하고, 17~41절까지는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설교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 13장 1~12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바울과 바나바의 구브로 섬에서의 전도여행을 살펴보았습니다. 저자인 누가는 총독 서기오 바울과 마술사 바예수를 비교하여 이방인들에게 제시하는 복음과 구원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드러냈습니다. 우리 또한 이방인으로 이 말씀을 통하여 받은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 기준을 따르자면 구원은 천국을 현실로 삼고 세상을 한 편의 영화처럼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선지자이자 마술사였던 바예수를 저주하였고 그 결과 바예수는 일시적으로 눈이 멀게 됩니다. 바예수의 눈이 멀게 된 사건은 상징적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자면 모든 사람들은 죄악 속에서 눈먼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누구도 눈이 멀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주받아 죄악 속에 갇혀 사는 삶이 무엇인가를 바예수의 눈이 머는 사건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스스로 눈먼 자임을 안다는 것은 저주받은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 때 복음을 통하여 구원받은 상태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죄악에 빠져있던 저주받은 삶이란 육체의 눈에 보이는 세상을 현실로 느끼며 사는 상태입니다. 마술사이자 박수였던 바예수의 관심은 사람들 눈에 보이는 놀라운 일을 벌이는 것에 있었습니다. 마술은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끌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죄악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죄악입니다. 이러한 바예수가 저주를 받아 눈이 멀게 되었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현실로 느끼는 것을 상징합니다.
구원을 통해 일어나는 일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육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을 현실감의 대상으로 느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객관적 사실들이 주어져 있지만 그 모든 사실들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마음을 주는 사실들만이 현실로 여겨지게 됩니다. 몸이 아프고, 가정에 문제가 있고, 직장생활이 어렵고, 돈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모두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면 인자 예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하나님을 보좌하고 있는 천국을 현실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현실로 여기며 사는 죄악과 저주의 삶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가 있고 인자 예수님과 성령님이 일체가 되어 계시는 천국을 현실로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구원을 이루는 일에 가장 고질적 방해가 되는 원인으로 종교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되 종교인이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인이란 결국 세상에서 종교와 관련된 일들을 현실로 느끼며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그 종교의 대표로서 유대종교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유대종교가 언급되고 있다고 해서 다른 종교들이 이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모든 종교는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종교를 통해 종교 일반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종교를 영적인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종교야말로 영적인 차원을 현실로 느끼는 일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원수이고 대적자입니다. 종교를 현실로 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현실로 느끼는 죄악 된 삶의 방식 중 하나일 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현실로 느끼는 죄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세상을 현실로 느끼기 위한 방식으로서의 종교 활동 또한 죄악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가장 위험하고 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견해가 아닌 본문 말씀이 제시하는 바입니다.
이 세상을 현실로 느끼며 사는 일반 사람들은 복음에 무관심할 수는 있어도 굳이 탄압하지는 않습니다. 복음은 반드시 종교에 의해 탄압을 받게 됩니다. 종교와 관련성을 가진 문화나 사회적 테두리 안에서 세상을 현실로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복음을 탄압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문에서는 유대종교가 언급되고 있지만 같은 종교라는 점에서 기독교 전체 또한 복음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기독교란 말 그대로 그리스도종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과 그리스도인은 그 성향이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리스도교인은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종교를 현실로 느끼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천국을 현실로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구분을 명확히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교인은 그리스도종교에 속한 사람이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광경들이 있습니다. 예배당 조직에 속해서 직분을 받고,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활동하며, 성경공부를 하고, 조직을 위해 봉사하고 충성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현실의 삶으로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당 조직에서의 활동을 현실로 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종교인에 불과한 것이고 절대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구원으로부터 가장 위험하게 떨어져 있습니다. 예배당 조직에 속한 종교인으로 사는 동안 영적인 차원의 필요성을 다 충족시키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종교의 현실이 아니라 천국의 현실을 얘기하면 탄압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는 유대교의 문제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바울과 바나바가 구브로 섬에서의 전도여행을 위해 동쪽 끝에 있는 살라미 항에서 출발하여 서쪽 끝에 있는 바보 항에 이르게 되었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 배를 타고 지금의 터키 남부지역의 항구도시인 앗달리아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륙지역으로 12km정도 이동하여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한편 바울과 바나바와 동행했던 자들 중에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있었습니다. 마가 요한이 바로 마가복음의 저자입니다. 그런데 마가 요한은 이 시점에 전도여행에서 하차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였던 안디옥이 아닌 집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점이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어서 그곳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43절을 보면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45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이라고 하였듯이 복음에 반대하는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이어서 50절을 보면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박해를 받던 바울과 바나바가 한 말이 상징적입니다. 46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마가 요한이 전도여행 중에 도중하차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과 유대인들이 바울의 두 번째 설교를 듣고 박해를 시작하게 된 이유가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먼저 마가 요한이 전도여행에서 하차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학자들 간의 이견이 많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후에 15장에서 2차 전도여행이 시작될 때에 바나바는 마가 요한과 함께 가기를 원했고, 바울은 마가 요한과 함께 가기를 거부합니다. 이로부터 바울과 바나바가 극심하게 다투는 사건도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은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바나바는 마가 요한과 함께 떠나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떠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주로 바울의 전도여행을 추적하며 기록하고 있지만 이러한 갈라짐의 원인이 바로 본문인 13장에서부터 제시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만을 보면 마가 요한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도 바울이 옹졸해 보이기도 합니다. 마가 요한이 힘들어서 1차 전도여행에서 하차했더라도 2차 전도여행 때에는 더욱더 격려해서 같이 갈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다만 바나바와 결렬이 이루어질 정도로 마가 요한과의 동행을 반대한 이유가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궁금증이 커질 뿐입니다. 그러나 그 답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맥락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마가 요한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반감을 품은 편견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 선교의 필요성을 느꼈기에 기꺼이 1차 전도여행에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도여행에서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상황을 보면서 시험에 들게 됩니다. 시험에 든 이유가 본문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박해 이유와 같은 맥락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바나바와 결별할 정도로 마가 요한과의 동행을 거부했던 이유도 단지 싫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거부했던 것입니다.
마가 요한의 전도여행 하차나 유대인들의 박해의 원인은 바로 종교 때문입니다. 다만 그 결과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마가 요한은 마음속의 갈등과 혼란을 극복하고 마가복음의 저자가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끝내 복음에 대한 반감을 극복하지 못한 채로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고 복음은 이방인들을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결과를 염두에 두고 우리는 마가 요한이 시험에 든 이유와 유대인들의 박해가 일어난 이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과 의롭게 여기심을 받는다고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원받을 때 나타나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삼위일체로 계시는 천국을 현실로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마음을 붙이고 살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됩니다. 영화 촬영장에서의 각본이나 감독의 지시로 비유될 수 있는 신의 소리를 따라서 주어진 배역을 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과 소원을 결정하는 현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본 마가 요한은 마음에서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선민들의 장구한 역사와 유산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2000년 선민의 역사는 곧 유대종교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유대종교의 유구한 역사가 구원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복음을 통해서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할례는 그 당시로써도 2000년을 이어온 전통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00년 동안의 애굽생활과 40년의 광야생활과 복지전쟁의 승리를 통하여 사사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사무엘을 거쳐 통일왕국 시대가 시작됩니다. 장구한 역사 속에서 지켜져 왔던 유대종교의 유산들은 유대인들의 자존심과 같았습니다. 할례전통, 성막과 성전의 존재,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들, 각종 절기와 의식들은 모두 하나님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길을 전함에 있어서 이러한 모든 일들이 일체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마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 동안 만들어진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나 유산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이름 하나를 붙잡고 예수님이 이루신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름으로써 구원받는 것은 자존심 강한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마가 요한 또한 이로부터 시험에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험에 든 것이 버가에 와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은 AD.47~49년의 2년간 이루어졌습니다. 구브로 섬에서 180km를 횡단하며 마을들을 순회한 기간 또한 약 1년에 걸친 대장정이었습니다. 1년 동안 바울과 바나바와 마가 요한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수많은 대화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마가 요한의 고민과 갈등 또한 표출되었을 것이고 사도 바울의 설득 또한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버가에 이르렀을 때 이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마가 요한은 전도여행에서 하차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복음은 오직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을 통해서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 요한은 마음에서 유대종교를 온전히 벗어버릴 수 없었기에 동행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예루살렘에 대한 향수와 2000년 선민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애착이 그만큼 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에서도 마가 요한과 동행을 반대합니다. 유대종교의 유산에 대한 애착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채로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에 나설 수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유대인들의 박해 이유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들의 하나님이어야 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이방인에게 전달하고자 한다면 자신들이 믿는 2000년 역사의 유대종교에 대한 존중 또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유대종교가 갖고 있는 모든 특징과 자부심을 제거하고 오직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만을 강조하였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제시하니 유대종교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로써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할례전통, 율법, 성전, 절기와 의식들은 유대종교에서 귀중한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이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유대종교인들로서는 이러한 복음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종교를 현실로 붙잡고 있는 한 십자가 복음을 전하며 천국을 현실로 여기라는 사도 바울의 전도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본문을 통해 바로 이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앞부분에서는 구원받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이 세상을 현실로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오르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지금 삼위일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천국을 현실로 느끼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은 오직 현실로 느끼는 천국으로부터 들려오는 신의 소리를 들으며 살게 됩니다. 영화를 촬영할 때에 배우들이 각본과 감독의 지시에 따르듯이 신의 소리를 들으며 주어진 역할을 수행해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배우자이자 부모로서, 직장에서는 직원으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배역을 수행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 종교가 방해합니다. 종교인이 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거짓말을 합니다. 기독교 종교라는 조직에 속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해서 천국을 현실로 살아야 될 사람들에게 기독교 종교를 현실로 살아가게 합니다. 기독교 종교를 현실로 살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끊임없이 종교 조직을 위한 헌신과 봉사를 강요합니다.
종교를 현실로 생각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현실로 생각하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세상을 현실로 생각하는 유형 중에 가장 영적으로 죄질이 악한 것은 종교를 현실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현실감을 이 세상에 있는 종교를 현실로 느끼는 것으로 대체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현실로 느끼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유대종교가 구약성경을 토대로 서 있었던 것과 같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대한 극단적인 오해 위에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놓고 성경에 들어있는 진짜 의미를 다 제거해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의 설교는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의 핵심은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은 순교 현장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및 인자 예수님께서 우편에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은 인자 예수님 안에 마음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자 예수님의 자리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스데반 집사님이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앙의 선진들 또한 아브라함과 같이 예수님의 자리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현실로 느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리를 벗어나서 세상을 현실로 느꼈기에 결국 하나님을 등지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아브라함이 인자 예수님 안에 마음을 보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인자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면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와 순교 현장에서 드러나는 진리의 기준입니다. 사도 바울의 설교도 똑같습니다. 한 가지 보태진 것은 인자 예수님 안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상황을 죄 사함과 의롭게 여김을 받은 상태로 세분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세상보다 우선적인 현실로 느끼는 방법 또한 종교가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만이 죄 사함 받고 의롭게 여김을 받으며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의 역할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의 전도에서 유대종교의 의미는 말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유대종교를 현실로 삼고 있는 유대인들은 복음을 말살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교인을 위해서 종교는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국을 현실로 느끼는 상태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종교라는 조직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요소도 필요치 않습니다. 구원을 위해 오직 십자가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한 마음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길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삶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국을 현실로 느끼게 됩니다. 영화촬영 현장에서 배우가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페르소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교는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조직에 대한 봉사와 충성으로 속여 왔습니다. 유대종교가 그랬고 이러한 일은 개신교나 천주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을 현실로 느끼기보다 눈에 보이는 종교를 현실로 느끼게끔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눈에 보이는 종교에 묶어버림으로써 종교 활동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복음에 대적하는 종교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전달을 반대하는 세력은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모습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시험에 들어 전도여행에서 하차했던 마가 요한은 결국 종교로써의 유대교를 극복합니다. 그러한 결과가 마가복음에서 잘 드러납니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보면 그 특징이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를 서론으로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이러한 서론은 생략한 채 예수님의 활동을 다루고 있고 특별히 전체 16장에서 3분의 1을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사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때 유대종교의 유산에 마음이 걸려있던 마가는 시험에서 벗어나자 누구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집중하게 됩니다. 마치 사울이 앞장서 교회를 핍박하다가 편견이 깨어지자 누구보다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며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던 것과 같은 변화가 마가에게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마가 또한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마가복음을 집필할 때에는 어떤 복음서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올라가신 천국에 대한 현실감을 위하여 그리스도 연쇄과정 외에 주어진 길은 달리 없습니다. 저자인 누가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종교야말로 천국을 현실로 느끼며 사는 것을 방해하는 원인임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이 방해를 극복하고 당당하게 십자가 예수님 한 분만을 붙잡고 진리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종교인으로 살며 종교의 현실로 천국의 현실을 대체하고 살았던 시간이 너무나 길었습니다. 그 모든 죄악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연쇄과정만을 붙잡게 하셔서, 삶의 현장에서 어떤 종교적 요소에도 구애받지 않고 천국 현실감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