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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양의 문 들락거리는 출입증 자아의식>의 줄거리: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이르는 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양들만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그리고 이 문은 삶의 현장 어디에서도 열려있습니다. 삶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 무슨 문제를 당하든 양의 문으로 들어가시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만나게 됩니다. 먼저 세상 탈출 하늘행 동선에서 예수님을 따름으로 양이 되면 이 문이 보입니다.
양의 문 들락거리는 출입증 자아의식
(요한복음 10:7~10)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양의 문 들락거리는 출입증 자아의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양의 문 들락거리는 출입증 자아의식”
우리는 굉장히 많은 영역에서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아내를 염두에 둘 때는 남편이라는 자아의식을 갖습니다. 또 성도님들을 염두에 둘 때는 목사라는 자아의식을 갖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염두에 둘 때는 한국 사람이라는 자아의식을 갖습니다. 이렇게 자아의식은 그 내용이 굉장히 많습니다. “나는 무엇이다.” 혹은 “나는 누구다.”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내용이 자아의식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모든 자아의식의 내용은 “너”라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마주하는 대상에 따라서 자아의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제목에서 자아의식이 출입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남편이라는 자아의식을 예로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은 남편이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하는 한 여자의 삶에 개입하여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혼을 했다면 더 이상 남편이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는 곧 아내로 불리던 한 여자의 삶에 개입할 이유가 없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내에 대한 출입증이 사라진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홍길동의 친구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아의식은 홍길동이라는 친구의 영역에 개입해 들어갈 수 있는 출입증인 셈입니다. 이처럼 자아의식이란 상대에게 개입하여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출입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양의 문 들락거리는 출입증 자아의식”이라는 제목으로 본문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양의 문은 예수님의 자아의식입니다. 우리가 양으로서의 자아의식을 가질 때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드나들 수 있습니다. 양으로서의 자아의식의 내용이 무엇이고 그러한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에서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가는 자들은 다 도둑이고 강도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문지기는 밤새 양들을 지키다가 아침이 되어 목자가 오면 얼굴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목자라면 문을 열어주고 우리 안으로 들여보냅니다. 참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각각 이름을 부르며 양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러면 양들은 그 음성을 듣고 목자 앞으로 나오고 따라갑니다. 이러한 비유는 예수님이 양우리로 들어가시면서 당신이 참 목자인 것을 확증 받아야 되는 관문을 통과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또 다시 양과 연관된 비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풀이 자라는 들판이 있는 곳에는 곳곳에 임시로 사용되는 양의 우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붕 없이 양이 넘어가지 못할 정도로만 돌담으로 둘러친 우리입니다. 이러한 임시 우리에는 문을 달지 않고 출입구만 비워둡니다. 밤이 되면 목자들은 양들을 우리 안에 몰아넣고 문이 없는 출입구를 가로막고 잠을 잡니다. 목자가 문의 역할을 하며 양이 나가지 못하게 하고 다른 것들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목자를 양의 문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풍습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목자가 문 역할을 하는 모습을 비유로 삼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는 말씀은 특별히 가리키는 상황이 있습니다. 양 무리가 있는 장소는 돌담을 기준으로 안과 밖으로 구분됩니다. 들어감의 상황이 있고 나감의 상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습을 염두에 두시고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목자로 믿고 따르는 양들을 데리고 가시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이 기록된 10장에서만 세 번이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셨고, 15절에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으며, 17절에서도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양의 문입니다. 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안과 밖이 구분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양의 우리는 십자가 너머 부활과 승천을 통해 이르는 천국의 영역입니다. 십자가가 접점이 되어서 십자가를 기준으로 천국 쪽으로 양의 우리가 형성되는 반면, 세상 쪽으로는 양의 우리의 바깥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양들에게는 언제나 울타리 바깥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은 울타리 바깥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양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양은 목자를 따라가는 존재이듯 우리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만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는 동선을 따라 움직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동선이란 하늘에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세상을 탈출하시고 승천하셔서 천국으로 돌아가시는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동선을 따라 움직이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양이 되기 위해서는 동일한 동선을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따를 때 세상 밖으로 나가 부활의 자리로 나가게 됩니다. 다만 이것을 천국에 입장에서 보자면 세상이라는 바깥에 머물고 있던 양이 양의 문을 지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몸은 여전히 이 세상에 살고 있는데 무엇이 천국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일까요? 의식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 반복해서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있음을 느끼는 의식이 있고 좋음을 확신하여 추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바로 이 의식과 마음이 천국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 한 분을 향하는 것이 천국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 상태입니다. 예배당이나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천국 출입문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양의 문입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세상과 천국이 안과 밖으로 나뉩니다.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 사건을 통해 천국 쪽으로 넘어왔다는 것은 천국 우리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님의 양들이 들어와 머물러야 될 양의 우리는 천국입니다. 그리고 이 천국의 문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세상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던 의식과 마음은 십자가를 통과함으로써만 천국 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양의 우리 안으로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9절에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음과 꼴을 얻음의 두 가지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십자가 안으로 들어와 구원을 얻은 사람이 십자가 안팎으로 드나들며 꼴을 얻게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먼저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부터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천국 입장에서 볼 때 십자가는 문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목자로 믿고 그 동선을 따라온 양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양의 문입니다. 예를 들어 천국의 관점에서 태승철이라는 사람을 봅니다. 태승철에게는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확신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나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따라 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상태는 태승철이라는 존재가 천국에 있게 된 상태이며, 또한 천국에서 태승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선을 따라 움직이시기에 우리는 그 동선을 따라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동선은 십자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나는 본래 세상에서 있음을 느끼던 의식과 좋음을 확신하던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 안쪽으로 들어와서 부활의 자리에서 승천하여 하늘로 가게 됩니다. 이제 나의 존재는 세상이 아닌 천국에서 확인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존재가 천국에 있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천국에서 존재가 확인된 것입니다. 이 상태를 보면 의식과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고 있는 동안에 몸은 여전히 십자가 바깥세상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태에서 어떠한 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일까요? 몸이 세상 바깥에 머무는 동안에 의식으로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천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양의 문인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의 의식과 마음은 천국 문 안쪽의 양의 우리 안으로 들어간 상태입니다. 이 사람의 몸이 가정에 있다면 가정에서 의식이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좋음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증거입니다.
한편 이렇게 구원받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바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 것입니다. 꼴은 말이나 소나 양 등의 초식동물들이 먹는 풀입니다. 먹음은 곧 배부름입니다. 들어가며 꼴을 얻음은 들어가며 배부름을 얻는다는 것이고, 나가며 꼴을 얻는다는 것은 나가며 배부름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들어가며 얻는 꼴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의식은 언제나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의식이 하나님으로 배부른 상태였던 것입니다. 의식의 배부름이 어떠한 것인지는 경험으로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남녀가 연애를 하게 되면 항상 서로의 있음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럴 때 있음을 의식하는 일은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상대가 나의 마음에 맞으면 존재감을 느끼는 일은 큰 행복입니다. 의식으로 있음을 느낌이 곧 채워짐입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좋다고 믿어지는 대상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확신하여 추구하는 마음이 십자가 문을 통과하면 하나님이라는 꼴로 배부르게 됩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십자가를 통과하여 천국 안으로 들어간 의식과 마음은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 좋음을 꼴로 삼아 날마다 배부르게 됩니다. 의식이 날마다 하나님의 있음으로 채워지고, 마음은 날마다 하나님의 좋음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것이 들어오며 얻는 꼴입니다.
그렇다면 나가면 꼴을 얻는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의식과 마음이 나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의식과 마음이 십자가 안쪽에 있을 때도 십자가 바깥에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몸은 여전히 세상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몸이란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천국에 들어간 상태에서는 몸과 지정의에도 하나님이라는 꼴이 주어지게 됩니다. 생각에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가고, 감정에 하나님의 감정이 드러나고, 의지에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몸에 채워지면서 행위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가면서 얻는 꼴입니다.
요한복음 4장 3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과 만나신 이후에 제자들이 돌아와 식사를 권할 때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34절을 보면 이에 대해 설명하시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지쳐계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자 더 이상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갈증과 배고픔을 해소시킨 것은 하나님의 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양의 문으로 삼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천국에서 존재가 확인되는 것입니다. 의식과 마음은 천국에서 날마다 하나님을 꼴로 먹고, 세상에 남아있는 몸과 지정의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뜻이 나타나게 됩니다. 십자가 안에서는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십자가 바깥에서도 날마다 하나님으로 배부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해야 양의 문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양인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따라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바로 나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이유를 나에게서 찾을 때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 자아의식은 예수님 때문에 생긴 자아의식입니다. 이 자아의식이 있는 자만이 예수님의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앞서 남편의 자아의식을 예로 들어 말씀드렸습니다. 남편이라는 자아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한 여자의 인생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증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생애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증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8절에서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고, 10절에서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자아의식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의미가 이해되실 것입니다. 주석이나 성경연구가들은 “나보다 먼저 온 자”라는 말이 누구를 가리키느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강도며 절도라는 표현으로부터 먼저 온 자를 선지자들로 이해할 수는 없기에 유대종교의 지도자들이라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양의 문이시고 우리가 양으로서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더 포괄적이고 정확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유대종교의 지도자들을 비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자아의식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먼저 온 자라는 것은 예수님보다 앞서서 자아의식을 갖게 된 모든 대상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떤 자아의식을 갖고 있었는지는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아내를 상대로 남편이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녀를 상대로는 아빠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양이 아닌 남편이나 아빠로서의 자아의식을 갖게 하는 아내나 자녀는 도둑이고 강도입니다. 남편이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 아내의 삶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십자가라는 양의 문을 통하여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추구하는 마음이 넘어오기를 기다리는 천국의 입장에서는 남편이라는 자아의식은 장애물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서 천국으로 들어가야 될 의식과 마음이 한 여자의 인생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본의 아니게 남편의 의식과 마음을 뺏어버린 도둑이고 강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생긴 자아의식보다 아빠라는 자아의식을 먼저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천국 입장에서 양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확신하는 마음이 천국에서 존재를 등록하는 대신에 자녀라는 영역으로 들락거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본의 아니게 아빠의 의식과 마음을 땅에 묶어서 천국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서는 예수님으로부터 생긴 자아의식이 첫 번째가 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예수님의 양이라는 의식이 첫 번째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을 목자로 따라가는 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천국의 입장에서 이러한 자아의식은 십자가 문을 통과하여 양의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증이 됩니다.
자아의식은 정말 다양한 대상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대한민국이 너의 자리에 오면 한국 사람이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성별에 대해서는 남자나 여자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성도를 생각하면 목사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학생을 생각하면 선생이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다만 이러한 모든 자아의식들은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확신하는 마음을 세상에 묶어두는 역할을 합니다. 천국의 입장에서 보면 천국에서 존재를 확인할 수 없고 천국에서 존재를 훔쳐가는 도둑이고 강도인 셈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양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계시며 유일하게 좋음이신 하나님께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은 출입증입니다. 이 자아의식이 십자가 너머에 있는 예수님의 영역으로 출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졌다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예수님의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아의식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나에게는 여러 자아의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배우자, 부모, 형제자매, 친구, 대한민국, 소속된 단체가 자아의식의 상대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대상이 누구이든 무엇이든 그로부터 생겨난 자아의식에 대해서는 모두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오직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만이 남아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확신하는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늘에서 나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의식과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꼴로 먹는 동안에도 몸은 세상에 남아있습니다. 그럴 때 몸과 지정의에 대해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에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오고, 감정에 하나님의 감정이 들어오고, 의지에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옵니다. 그럼으로써 몸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천국이라는 양의 우리 안쪽에서 의식과 마음으로 하나님이라는 꼴을 먹고, 양의 우리 바깥인 세상에서 몸과 지정의는 성령이라는 꼴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들어와서 하나님의 꼴과 나간 상태에서 성령의 꼴을 먹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삶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이 주는 모든 자아의식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 자아의식이 천국에 들어가는 출입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들어간 의식과 마음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으로 채워집니다. 그리고 문밖에 있는 세상에 남아있는 몸과 지정의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복사하신 성령께서 채우시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대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삶에 대해서 시편 23편 1~2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있지만 진짜 상팔자는 양의 팔자입니다. 양의 문 되시는 십자가 예수님을 들락거리는 양의 팔자보다 나은 팔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들락거리는 출입증이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출입증으로 목에 걸게 하여 주시옵소서. 들어가도 꼴을 얻고 나가도 꼴을 얻는 상팔자의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우리의 것으로 실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