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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집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 2022년 10월 16일 주일 예배
본문 / 창세기 35:1-15
국가대표 축구경기에서 해설자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극적으로 선취골을 넣고 이기고 있을 때 가장 위험하다는 겁니다. 아주 중요한 경기일수록 그런 말을 더 많이 합니다. 어려운 상대를 만났는데 먼저 골을 넣은 것입니다.
골을 넣자마자 경기가 끝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아직도 시간이 남은 것입니다. 비기고 있을 때에는 왜 위험하다는 말을 않다가 극적으로 골을 넣어 이기고 있을 때 위험하다고 난리를 치는 것일까요?
사람의 심리가 그렇습니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 비기고 있으면 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골을 넣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한 골을 넣어 이기게 되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이 마음과 정신력이 사라지는 겁니다.
감독은 골을 넣고 좋아 어쩔 줄을 모르는 선수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흥분하지 말라고 진정을 시키며 하던 대로 경기에 임하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선수들은 공격보다는 수비로 적극적인 자세에서 소극적으로 돌아서게 되는 겁니다.
괜히 공격하다가 한 골을 먹을까 두려운 것이고 한 골만 지키면 이긴다는 생각이 이제는 됐다! 라는 안일한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어떻게 변합니까? 선취골을 먹은 상대방은 거칠어지고 공격은 더 맹렬해집니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졸이던 경기는 아니나 다를까 어이없이 한 골을 내주고 맥 빠지게 끝나는 경기를 여러 번 보셨을 겁니다.
아주 유명한 야구 선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 내려 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치르는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자에게 돌아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면류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선언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믿음의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장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구원의 면류관을 쓰기 위해 믿음으로 싸우며 달려간다고 선언하던 바울은 나는 이제 싸움을 마쳤다. 나는 끝까지 믿음을 지켰고 이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순교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릴 시간에 왔다는 것과 이제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세상에서 믿음의 싸움을 마칠 때까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 구원의 면류관을 받는 것은 십자가를 만나 구원의 길을 가는 모든 성도들의 평생의 소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벧엘에 가기까지 즉 달려갈 길을 마칠 때까지 믿음으로 싸우며 자기 믿음을 지키는 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지 그 구원을 완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집인 벧엘에 올라가야 하는 겁니다.
본문 1절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그 안식의 땅으로 돌아가는 야곱을 가로막는 가장 큰 산은 형 에서였습니다. 자기 딴에는 형의 마음을 풀기 위해 선물도 보냈지만 사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는 에서를 생각할 때에 야곱은 두려워 어찌할 바가 없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씨름 즉 십자가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야곱이 죽어 이스라엘이 되자 넘을 수 없었던 큰 산이 갑자기 평지가 된 것입니다. 야곱도 놀랐을 겁니다. 에서가 마음을 풀고 자신을 환대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을 돌려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에게는 보통 큰 일이 아닌 겁니다. 원수가 죽이려고 달려왔습니다. 두려워 미치겠는 겁니다. 그런데 그 원수가 나를 보자 안고 환영을 하는 겁니다. 그때 어떨까요?
우리나라 국가대표 축구팀이 브라질을 한 번도 못 이겼습니다. 그 사람들이 축구하는 것을 보면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압니다. 선수들은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몸이 굳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기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 브라질을 경기 5분을 남겨놓고 한 골을 넣어 1:0으로 이기고 있다고 해봅시오. 아마 남은 5분이 50분 같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선수들은 절대로 하프라인을 넘어서 상대팀 진영으로 가지 않을 겁니다. 긴장이 되어 몸이 말을 안 들을 겁니다. 열한 명이 다 골키퍼가 될 것입니다. 공격을 하지 않는 겁니다. 싸우지 않는 겁니다. 그 상황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라는 난공불락과 같은 큰 산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지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싸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무장해제를 했습니다. 길과 목적지를 잃은 겁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가라고 지시한 곳은 벧엘인데 세겜에 땅을 사고 오랜 시간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구원을 이루어가는 그 과정에서 목적을 잃고 멈춰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큰 산을 넘었을 때, 고난과 시험이 사라졌을 때, 문제가 해결 되어 평안 할 때, 한 숨을 돌리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이제 좀 쉬었다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잠시 쉬자 라고 했지만 쉬어보면 싸우지 않는 그 안일함이 편해지고 익숙해지는 겁니다.
사람의 습관은 천성과 이성과 본성을 이긴다는 말을 합니다. 마음을 잡고 몸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이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나쁜 습관은 쉽게 빨리 들지만 좋은 습관은 더디고 느리게 들기 때문에 자신과 싸워야 하는 겁니다.
제가 코로나로 10일 동안 새벽기도회 인도를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병원이나 집에서 10일 동안 그냥 있으면 기도하는 습관이 약해질 것은 뻔합니다. 그게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회 시간에 여러분에게 말씀을 보내고 한 시간씩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병원에서도 말입니다. 두 시간을 기도하던 것을 10일 동안 전혀 하지 않다가 하려고 하면 벌써 기도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2년 6개월 정도는 한 주도 쉬지 않고 삼사일 운동을 했을 겁니다. 그 동안 운동을 쉴 만큼 아픈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코로나로 20일을 운동을 못했습니다. 운동할 만큼 회복이 안 되는 겁니다. 나중에는 안 하고 싶은 겁니다. 벌써 하고 싶지 않은 그 편안함이 습관이 들려고 하는 겁니다. 20일 쉬고 운동을 하니 2년 6개월을 운동한 게 맞나 싶었습니다. 힘들어서 전에 하던 만큼 못 하겠는 겁니다. 다음 날 알이 배어 아픈 겁니다.
영적인 믿음의 싸움도 똑 같습니다. 사람의 몸이 편함과 안일함에 습관이 되어 버리면 마음을 움직이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마음으로는 기도하고 성경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사람에게 새벽잠을 이기고 일어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잠자는 것이 편함과 마음의 안일함으로 굳어진 사람에게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은 마음을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신 겁니다.
야곱도 세겜에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야곱을 찾아오셔서 깨우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너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러 있을래! 하나님은 목적지를 잃고 안일함에 잠을 자던 야곱을 깨워 믿음의 최종의 목적지인 하나님의 집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싸움은 하나님의 집인 벧엘까지 가야 마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어떤 믿음의 승리와 영광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멈추면 길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이미 구원의 면류관을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벧엘이 아니라 세겜입니다. 세겜은 땅을 사고 집과 우릿간을 짓고 머물러 안주하는 곳이 아니라 잠시 지나가는 곳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벧엘을 향해 가는 성도들에게 너희는 이 세상에서 안개와 외국인이며 나그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는 곳이 벧엘인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내가 택한 자를 은혜로 구원하여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 벧델의 언약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야곱을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벧엘은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 약속을 성취하신 곳이 어디입니까? 골고다 언덕에 섰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의 대속물로 희생하여 그 공의와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 가야 합니까? 구원의 면류관을 쓰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쓰신 곳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예수님은 승리를 선언하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벧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집을 향해 가는 모든 성도들은 이 땅에서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처럼 나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는 그 십자가의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벨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고 내가 주님과 함께 죽는 그 십자가의 믿음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이 무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열심과 정성으로 드리는 예배와 헌금과 기도와 봉사가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일이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라면 다 나를 위한 자아숭배입니다.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십자가의 믿음밖에 없습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과 함께 나도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주인으로 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다하든지 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의를 쌓고 그것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칭찬을 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서 십자가의 대속과 믿음이란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여 주여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주인으로 있으면서 위해 자기 이름으로 예배하고 예물을 드리고 봉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벧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겜에 머물러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절에서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말씀합니다.
세겜에서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나의 옛 사람과 타락한 육체가 의지하던 것들을 땅에 묻어야 하는 겁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멸망할 세상에 있는 영광과 가치와 육체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까? 내 육체가 의지하는 것을 못을 박았습니까?
육체의 감정과 정욕과 세상의 탐심을 버리지 않고는 벨엘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죄의 짐과 십자가를 함께 지고 구원의 길을 가겠습니까? 어떻게 좁은 길을 내 마음대로 편하게 갈 수 있습니까?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한 우물에서 단 것과 쓴 것이 나오겠습니까?
육신의 것과 영적인 것은 서로 대적하기에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과 하나님과 우상이 함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세상을,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나를 동시에 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이 로또를 사겠습니까? 이 세상을 소망하니 사는 것입니다. 한 방 터뜨려서 인생 역전을 꿈꾸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그 부자가 되려하고 되게 해달라고 하는 성도들이 과연 천국에 소망이 있는 사람들일까요?
오늘날 교회 안에는 주여 주여 하지만 하나님과 세상과 재물과 자신을 함께 섬기며 세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곳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세겜이 구원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왜 하나님이 야곱을 깨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겠습니까?
세겜에서는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해도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겜은 자신의 타락한 육적인 자아를 숭배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계명을 잘 지킨 부자 청년도 세겜에 머물러 있었던 겁니다.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벧엘로 올라가자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 청년은 영생도 얻고 싶었지만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상의 재물과 돈이었습니다. 세상의 영광과 힘이었습니다. 그걸 다 버리고 벧엘로 올라가는 것이 감당이 안 되는 겁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세겜에서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며 천국이 어떤 곳인지 지옥이 어떤지 하나님의 심판과 십자가의 은혜와 구원에 대하여 수도 없이 듣지만 자신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그 힘과 영광을 즉 자신의 자아숭배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버리고 주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사랑하는 벧엘로 올라가는 그 좁은 길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찾은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겉으로 보면 다 믿음이 있는 것 같고 다 구원을 받을 것 같지만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계명을 그렇게 잘 지키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 자인 줄 알았겠습니까? 저는 목사들은 과연 얼마나 구원을 받는지 이게 두렵습니다. 아마 심판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에서 알게 되면 충격일 겁니다.
예수님은 종교적인 열심과 행위로 포장된 그 부자 청년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자아를 숭배하며 세겜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 청년에게 영생을 얻기 원한다면 네가 의지하고 사랑하는 그 재산을 다 팔아버리고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야곱처럼 다 묻어버리고 주님을 따라갔습니까? 근심하며 돌아간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이 교회에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구원의 언약을 맺은 벧엘로 올라가는 길은 내가 죽어야 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면 다 구원을 받을 것 같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며 하나님과 십자가를 말하니 그럴 듯하지만 그 마음과 영에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마음에 있던 더러운 것들을 즉 자신의 육적인 자아를 숭배하던 그 우상단지들을 다 땅에 묻고 버리고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도 그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수도 없이 말씀을 들어도 안 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겁니다. 끝내 자신의 자아를 땅에 묻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지 못하고 하나님과 자신을 함께 섬기는 넓은 길로 가다가, 자기 마음대로 믿다가 심판대로 가는 겁니다. 그럼 지옥입니다.
야곱은 우상을 땅에 묻고는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말합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십자가는 옷을 갈아입는 것입니다. 그 옷을 예복, 흰 옷, 의의 옷,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어도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 것입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를 만나 회개하고 거듭날 때에 그 십자가에 나를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할 때에 성도는 흰 옷을 입고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런 저런 간증을 들어보았지만 교회에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불신자들은 검은 옷을 입고 심판대로 가고, 교회에 다니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회색 옷을 입고 심판대로 가는 겁니다. 회색 옷을 입은 교인들도 한 평생 검은 옷을 입고 산 불신자와 함께 심판을 받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데 교회에 흰 옷을 입은 성도들이 몇 십 명도 아니고 몇 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구원에 대해 엄청난 착각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구원의 길에서 계속해서 말씀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길 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네가 의지하고 너의 주인 됨을 섬기는 그 우상을 묻어야 한다.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에 나도 함께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주인으로 사시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믿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는 벧엘을 향해 가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벧엘을 향해 가는 성도들을 막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길을 함께 하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말씀합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지고 천국을 향해 가는 성도들의 그 마음은 두렵게 하고 몸은 괴롭히고 죽여도 주님이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신 그 영혼은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 안에 있는 영혼은 안전한 것입니다.
9절에서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 나를 기다리십니다. 믿으십니까? 그곳은 얼마나 좋은 곳일까요? 주님이 다스리시기에 죄가 없는 곳, 기쁨만 있는 곳, 질병과 슬픔과 눈물이 없는 곳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까요? 정말 온 마음으로 벧엘을 사모하고 목숨을 걸고 그 곳에 가기 원하십니까?
우리를 그 좋은 벧엘로 데려가시려고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숭배하는 세겜에 머물러 있으면 소망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까? 벧엘로 올라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야곱에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시는 것처럼 잠자는 자여 깨어 일어나 하나님의 집을 향해 가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어렵고, 가는 이들이 적어도,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육체의 정욕과 탐심과 온갖 자아숭배를 십자가에 못을 박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고 주님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집을 향해 함께 갑시다! 아멘!
영광스런 하나님의 집에서 몇 십 년 후에 다 함께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