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본 문 / 사도행전 17장 11∼12절
주 제 / 온 마음으로 설교를 듣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경건하고 고상한 사람이다.
작성일 / 2022년 12월 11일. 성서주일. (№ 22-50)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행 17:11∼12)
Ⅰ 불량한 사람과 경건한 사람 (행 17:1-9)
유대인들은 바벨론포로가 된 이후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성전제사가 불가능해졌기 신앙생활의 양식에 변화가 일어났다. ‘성전중심의 신앙생활’에서 ‘회당중심의 신앙생활’로 전환되었다. ‘제사중심의 신앙생활’에서 ‘기도와 말씀중심의 신앙생활’로 전환되었다. 그러면서 ‘메시아신앙’은 더욱 간절해졌다.
그런데 회당이 유대인들만의 공간은 아니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방인들도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바울’은 바로 그 ‘회당’을 선교의 교두보로 삼았다.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들어가서 오늘 날의 ‘주일예배’처럼 성경을 읽고, 그 본문을 풀어 설교했다. 언제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설교의 주제였다(행 17:3). 그런데 바울의 설교에 대하여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예수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사도행전 17장 4절을 보니,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이들은 바울을 적대시했다. 예수가 메시아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저잣거리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바울을 공격했고, 로마 당국에 고발했다. “가이사만이 유일한 왕이신데, 이들은 예수가 왕이라 주장하며 사회를 혼란케 합니다.” 공안사범으로 고발했다(행 17:6∼7). 제가 보기에 그들은 ‘불량한 종교인들’이 분명하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가 하면, ‘불량한 종교인들’도 있다. ‘알곡’과 ‘가라지’가 혼재된 상태이다. 잘 구별되지도 않는다. 불량한 종교인들도 입만 열면 “주여! 주여!”를 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가 되면 확연히 구별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날이 임하면 누가 ‘경건한 그리스도인’인지, 누가 ‘불량한 종교인’인지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경건한 그리스도인과 불량한 종교인의 구별방법’이 담겨있다. 믿음이 입술에 있는 사람은 ‘불량한 종교인’이다. 믿음이 생활에 있는 사람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다. ‘불량한 종교인들’에게는 독특한 논리가 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지,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행함이 강조되면 율법주의다.”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있다.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는 사람들이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약 2:26), 믿음은 행함으로 중명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약 2:18).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사람들이다(딤후 3:5).
Ⅱ 누가 경건하고 고상한 그리스도인인가? (행 17:10-14)
그렇다면,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 오늘의 본문이 대답한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여기서 ‘너그러워서’(유게네스)란 말을 개역성경은 ‘신사적이어서’로, 표준새번역은 ‘고상하여서’로 번역했다. 베뢰아 성도들은 ‘고상한 성도들’이었다는 말이다. 사도행전 17장 4절을 보니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가리켜 ‘경건한 사람들’이라 칭찬한다. ‘고상한 성도’, ‘경건한 성도’ 같은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경건한 성도’라 ‘고상한 성도’라 칭찬받게 되었을까?
첫째,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기 때문이다. (행 17:11b)
베뢰아 성도들은 설교를 들을 때에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다. 그래서 ‘고상한 성도’라 칭찬받았다. 여기서 ‘간절한 마음’(파세스 프로뒤미아스)이란 ‘소원하는 모든 것을 걸고’란 뜻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자, 그 밭을 가지려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았던 사람처럼(마 13:44), 설교를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신념으로 세상일 모두 내려놓고 설교를 들었다. 그래서 ‘고상한 그리스도인’이라 칭찬받은 것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이다. “…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살전 2:13)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태도가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 칭찬받게 했다.
둘째,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기 때문이다. (행 17:11c)
여기서 ‘상고하다’(아나크리노)란 말은 ‘조사하다’, ‘검토하다’, ‘심문하다’란 뜻이다. 탐구하고 연구했다는 말이다. 성경을 날마다 탐구하고 연구하였기 때문에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 ‘고상한 그리스도인’이라 칭찬받은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성경을 날마다 탐구하고 연구해야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성경은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운 감동을 준다. 날마다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준다. 그럼으로써 날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가꾸어지게 한다. 그러니 성경을 날마다 탐구하고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도행전 17장 11절의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란 단어는 ‘이 사람들’이란 지시대명사인데, ‘베뢰아에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설교를 듣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니 열매가 열렸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 17:12) 유대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이방인들도, 특히 도도한 헬라의 귀족들도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예수님이심을 믿게 되었다. 이방인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 내가 변하면 이웃도 변하는 법이다. 나를 변화시키는 능력은 말씀이다.
Ⅲ 성경에 대한 하나님의 집념 (렘 36:28, 32)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성경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고 기록되었다. 그 목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성경은 믿음의 근거이고, 구원의 통로이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믿음을 얻을 수 없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도 없다.
그래서 사탄은 성도와 성경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한다. ‘예레미야’가 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은 옥에 갇힌 예레미야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바룩’을 불러 자신이 불러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루마리에 기록하게 했다. 그리고 성전에서 낭독하게 했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왕 ‘여호야김’이 그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더니 ‘에후디’를 시켜 낭독하게 한다. 그리고 일정부분 읽으면 그 부분까지 찢어 화로에 던진다. 또 읽으면 또 그 부분까지 찢어 불에 던졌다. 사탄은 ‘예루살렘의 왕’까지 동원해서 성경을 없애려 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없어졌을까?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 애가’를 읽고 있다. 하나님이 복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바룩’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다시 기록하게 하셨다. 예레미야 36장 28절을 보라.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기록하고”(렘 36:28), 예레미야 36장 32절을 보라.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가 전하는 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 하였더라”(렘 36:28)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계시하시고, ‘예레미야’는 그 말씀 그대로 ‘바룩’에게 전하고 ‘바룩’은 그 말씀 그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했다. 성경이 완벽하게 복원된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성경만이 믿음의 근거요, 구원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믿음과 구원을 주시려고 성경을 완벽하게 복원하셔서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주셨다.
오늘은 ‘성서주일’이다. 성경이 많은 시대,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난을 당했으나. 오늘의 우리들에게 온전하게 전해진 사실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날이다. 무엇이 성경에 대한 감사일까? ‘고상한 그리스도인’,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설교를 듣고, 날마다 성경을 탐구함으로써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가꾸어져서 이웃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이 성경에 대한 감사이다.
<기도>
하나님, 영광교회 성도들 ‘고상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설교를 듣고, 날마다 성경을 탐구하여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가꾸어지게 하소서. (아멘)
첫댓글 캡쳐해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