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묵이야기
임신서기석
석야 신웅순
임신서기석 탁본
이 ‘임신서기석’ 비는 1934년경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터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길이는 약 30㎝, 너비는 윗부분이 12.5㎝며 5줄로 74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보물 제1411호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석 첫머리에 ‘임신(壬申)’이라는 간지가 새겨져 있고 내용에 충성을 서약하는 글귀가 있어 ‘임신서기석(壬申誓記銘石)’이라 이름을 붙였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 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未年 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해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집지하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일을 잃으면 하느님께 큰 죄를 얻는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치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우면 가히 모름지기(충도를) 행 할 것을 맹서한다. 또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즉, 시·상서·예기·좌전을 차 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써 하였다
임신서기석은 6,7세기 당시 신라인들이 한자에 의한 문장을 어떻게 표기했는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비는 한자를 신라어의 어순에 따라 배열한 신라화된 문자체계로 되어 있다. 다만 ‘之’자가 동사의 종결형을 표시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두에서 볼 수 있는 문법 형태는 아직 나타나 있지 않다.
이기문의 『국어사 개설』(1979)에 이두와 서기체(임신서기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두란 쉽게 말해서 서기체 표기(임신서기석)에 문법 형태를 보충하여 그 문맥을 더욱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이두 자료 중에는 서기체에서 이두로 발전하는 과도기적인 것이 보인다, 그 일 예로 경주 남산 신성비(591)를 들 수 있다.
이 비문은 아직 완전한 해독이 이루어져 있지 않지만 그 대의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여기서 ‘之’자의 용법이 임신서기석의 그것과 일치하며 … 중략 …
이두는 자료가 빈곤하기는 하지만 남산 신성비와 갈항사 조탑기를 통해 볼 때 대체로 7세기에 이두가 체제를 갖춘 것이 아닌가 한다.
서기체, 구결, 이두, 향찰 같은 신라시대의 문자 표기는 우리 문자가 없던 시대에 한자를 이용한 자국어의 표기 방식이들이었다.
반면 박종대 대종언어연구소 소장은 훈석식(서기체?) 표기가 아닌 중국어 어순에 맞는 일반적인 한문 표기라고 말하고 있다.
훈석식 표기란 서술어(동사)-목적어 또는 서술어-부사어 순서인 중국식 표기와 달리 목적어-서술어 또는 부사어-서술어의 순서인 한국식 표기법을 말한다.
그는 임신서기석 비문이 훈석식 표기로 읽힌 것은 "원래 비문에는 없는 구두점을 후세에 잘못 찍으면서 그 구두점에 맞게 해석이 굳어졌기 때문"이라며 "구두점을 바르게 찍으면 일반적인 한 문표기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비문의 각 문장에서 서술어 서(誓)의 앞에 일반적인 대명사 '우리 두 사람(吾二人)'이 생략된 것이라는 점을 고문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 몰랐던 탓에 구두점이 잘못 찍혔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동안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해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二人幷誓記. 天前誓)'로 해석했던 부분은 '두 사람이 함께 하늘 앞에 맹세해 기록한다(二人幷誓記天前)'로 끊어 읽어야 하 며 '서(誓)'는 다음 문장의 서술어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연합뉴스 2010.6.13.)
그는 비문의 작자들이 스스로 밝힌 것처럼 이 글을 새기기 1년 전부터 시경과 상서, 예기 등을 공부해왔다면 한문 어법을 몰라 훈석식 표기를 썼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임신년은 세속오계 중 교우이신과 같은 충도 실천을 맹세한 것으로 보아 화랑도가 융성했던 진흥왕에서 문우왕의 신라 통일 이전인 552년(진흥왕 13) 또는 612년(진평왕 34)의 어느 한 해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신라 통일 이후 『시경』,『상서』,『예기』 등이 주요과목이 되어 있는 신라 국학이 설립된 682년(신문왕 2) 이후의 어느 임신년, 732년(성덕왕 31)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비는 조사 · 어미 등의 표기가 없고, 그 문장 구조가 이두와 비슷해 이두로의 발전 과정을 보여 주고 있으며 문체나 글씨 새김 방식 등에서「남한산성비(591)」와 비슷해 남북조의 해서체에 가까운 6세기 신라시대 금석문의 일반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정치사적 측면만이 아닌, 국어사적 측면, 서예사적 측면에서도 매우 귀중한 금석 기록 유산이다.
주간문학신문. 12.3(수)
첫댓글 좋은자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