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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순례의 향기(12)
◉ 순례 장소 :죽림동성당(춘천) ➟곰실공소(춘천)➟양근성당(수원) 풍수원성당(원주)➟매괴성당(청주)➟죽산성지(수원)
웃음으로 시작하여
각자 소개와 더불어 경주에서 온 자매님과 부녀지간 온 자매님으로 순례를 화기한 분위기로 시작하여 회장님의 순례시작은 4년 전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79세 ‘야고보 순례단 ’을 이끌어오고 순교자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의 길을 피정의 마음으로 묵상기도와 희망을 걸고 순례 하면서 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무한정 조건 없는 사랑으로 발걸음 시작 영혼과 육신으로 봉헌 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고 처음 오신 회원님들과 아픈 가족들 하나하나 기억하여 치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간 곳
● 죽림동성당
6·25 전쟁 때 공산군에게 피살당한 성직자들의 묘소 보존한 곳으로 춘천 죽림동 주교좌성당은 춘천 지방을 신앙의 요람지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준 외국인 성직자들이 낯선 땅 타국의 전쟁 포화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다가 끝내는 공산군에 의해 끌려가 피살, 주검이 되어 사목하던 교우들의 품으로 돌아와 누워 있는 곳이다.
춘천 지방은 천주교가 늦게 전파되어 다른 지방처럼 피로 얼룩진 박해가 없었다. 그러나 6·25 때는 공산당에 의해 성직자와 신자들을 잃는 불운을 겪어야 하였다. 6·25 전쟁이 터지고 남침이 시작된 바로 다음 주일인 7월 2일 퀸란(Quinlan, 具仁蘭, 토마스) 신부가 본당 미사를 드리는데 인민군이 들이닥쳐 성당 안에서 공포를 쏜 후 20여 명의 교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보좌였던 캐나반(Canavan, 孫 프란치스코) 신부와 함께 연행하였다.
소위 이 죽음의 행진으로 교황사절 번(Byrne, 方溢恩) 주교를 비롯한 외국인 사제, 수녀, 개신교 목사 등 수백 명이 끌려가 평안북도 어느 험한 산비탈에 강제 수용되었는데, 캐나반 신부도 번 주교처럼 그곳에서 모진 고생과 추위를 못 이겨 선종하였다. 묵호 성당의 레일리(Reilly, 羅, 파트리치오) 신부, 소양로 성당의 콜리어(Collier, 高, 안토니오) 신부, 삼척 성당의 맥긴(McGinn, 陳, 야고보) 신부 등 이 세 명의 성직자는 콜롬반 수도회 소속으로 6.25 직후 자기 본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모두 피살되었다. 현재 이들 성직자들의 묘는 죽림동 성당 내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당시 교구장(지목구장)이었던 퀸란 토마스 신부는 1950년 북한으로 납치당하였다가 4년 후 민간 포로 석방 때 무사히 생환하였다. 수용소에서 살아온 퀸란 신부는 순교하신 번 주교의 뒤를 이어 한동안(1953~1957) 교황 사절 서리를 겸하고 있었는데, 1955년 9월 20일 춘천이 지목 구에서 대목구로 승격되자 11월 23일에 초대 춘천대목구장으로 부임하면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한국의 교우들을 위하여 동분서주 전교하다가 1970년 영면하였다.
현재의 죽림동 성당은 김유룡 신부와 엄주언 마르티노 회장이 이끈 곰실 공소 교우들이 애써 마련한 아랫터에 보태어 퀸란 신부가 매입한 언덕 위에 건립하고, 그 기공식은 1949년 4월 5일에 있었다. 새 성당의 건립은 퀸란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한지 2년 후인 1941년에 감목대리직을 맡으면서 계획해 오던 것이지만 일제 치하의 외국인 구금 및 연금으로 착공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과 더불어 1946년에 그가 다시 복직하고 미군 부대의 도움을 얻어 1949년에 본격 착공하게 되었으나 6·25 전쟁으로 짓다 만 새 성당의 한쪽 벽이 무너지고 사제관 등 부속 건물이 대파되었다. 미군과 성청의 지원으로 1956년 6월 8일 예수 성심 대축일에 새로운 모습을 갖춘 주교좌성당의 축성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 퀸란(Quinlan, Thomas) 주교
퀸란(1896∼1970) 주교는 에이레 성 골롬반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초대 춘천교구장이다. 1917년 사제로 서품된 뒤 1920년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13년 동안 중국 전역에서 전교하였다. 1933년 성 골롬반 외방전교회가 전라도 지역의 사목을 관할하게 되자 이듬해 한국에 입국, 6년 동안 전라도 일대에서 사목하였고 1939년 춘천 성당으로 전임되어서는 강원도 지역의 교세 신장에 주력하여 1940년 춘천교구가 서울교구로부터 분할 창설되자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일제에 체포 구금되면서 교구장직을 사임하였으나 광복 후 다시 교구장에 부임하였고 6·25전쟁 중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교황 사절 번(Byrne) 주교와 함께 서울, 평양을 거쳐 만포에서 중강진까지 250리의 산길을 도보로 걷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겪기도 하였다.
1953년 3월 중강진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잠시 고국인 아일랜드에 머무르다가 다시 교황 사절 겸 춘천교구장으로 한국에 돌아와 1955년 12월 주교로 성성되었다. 1966년 노령으로 은퇴, 삼척 성 요셉 병원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사목하면서 말년을 보내던 중 1970년 12월 31일 사망하였다. 유해는 춘천교구 성내리. 성당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춘천 죽림동성당 구내의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 손 프란치스코(Francis Canavan) 신부 (1915.2.15.∼1950.12.06)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1915년 2월 15일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1940년 12월 21일 사제품을 받고 1949년 한국에 입국하였다.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구인란 토마스(Thomas F. Quinlan) 주교와 함께 춘천에서 사목활동을 준비하면서 한국말을 배우고 있었다.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춘천전투가 한창일 때, 미군 고문관 중 한명이 춘천에서 원주로 피난하면서 춘천교구장을 비롯한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신부들을 데리고 가려했다. 하지만 구인란 주교는 양들을 지키기 위해 피난을 거부하면서, 입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말이 익숙하지 않았던 손 프란치스코 신부에게는 떠날 것을 명령하였고,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떠나지 않고 주교와 함께 남아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일주일 후 구인란 주교가 죽림동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드리고 있을 때 공산군이 성당 안에까지 들어와, 미사를 봉헌하던 구인란 주교와 함께 있던 손 프란치스코 신부를 체포하여 감옥으로 데려 갔다.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다른 성직자․수도자들 및 프로테스탄트 선교사, 외교관 및 수백 명의 전쟁 포로들과 함께 기차로 혹은 트럭으로 북한 깊숙이 압송되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경험하였다. 이 죽음의 행진으로 많은 선교사들과 포로들이 죽었는데, 더러는 걸을 수 없게 되자 사살 당했으며 더러는 죽음의 행진 이후에 지쳐서 죽었다.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죽음의 행진 과정에서 1950년 12월 6일 폐렴으로 병사하였고, 그의 장상인 구인란 주교와 동료 포로들의 손에 의해 압록강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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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간 곳
● 곰실공소
춘천 최초의 공소로서 춘천교구가 세워질 때 그 모체가 된 곰실공소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구도의 길에 나선 열정적인 젊은이 엄주언 마르티노의 자발적인 신심과 열정으로 스스로 신앙교리를 찾아 그 가르침대로 살게 되면서 이루어 낸 신앙 공동체로 춘천 최초의 공소이며 춘천교구가 세워질 때 그 모체가 된 공소다.우리나라의 신앙 전래가 외국 선교사의 전교 없이, 스스로 신앙 교리를 찾아 그 가르침대로 살게 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듯이, 춘천 지역 또한 교회의 정착이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이 경우 역시 한 젊은이의 자발적인 신심과 열정이 훌륭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그 공로자는 엄주언 마르티 노이며, 그 신앙 공동체는 춘천 동천면의 곰실 공소로서 춘천 최초의 공소이며 춘천교구가 세워질 때 그 모체가 되었다.
엄주언 마르티노는 1872년 12월 10일(음) 춘 성군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사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착하고 총명하던 그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우연히 《천주실의》와 《쥬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1893년 늦가을에 그는 맏형과 함께 일곱 식구를 모두 데리고 우리나라 천주교 발상지인 경기도 광주 천진 암을 찾아가 거기서 움막을 짓고 어렵게 지내면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에는 형과 함께 영세를 받았다.3년간의 광주 생활을 마칠 무렵인 1896년에는 나머지 가족이 다 영세한 후 굳은 전교 사명감을 품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마을에서 쫓겨나 외가의 도움으로 고은리 윗 너부랭이라는 곳에 폐가 한 채를 사서 겨우 정착하였다.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따돌림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맨손으로 어렵사리 화전을 일구며 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주경야독하며 근검하게 사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차츰 감동하여 가르침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윗 너부랭이에서 여러 해 땀 흘린 보람이 있어 살림과 농지를 늘려 아랫 너부랭이로 옮겼다가 다시 곰실공소로 옮긴 후 조촐한 강당까지 마련하여 공소 예절을 보게 되었다. 곰실공소 교우들은 엄 회장 지도하에 모범적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마침내 300명 가까운 수로 늘었다. 1920년에는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건립하고 엄 회장의 계속적인 노력으로 마침내 풍수원 본당에서 독립하여 곰실이 본당(춘천 본당)으로 설립되었고, 1920년 9월 초대 김유룡(金裕龍, 1892~1972, 필립보) 신부를 모시게 되었다.
곰실 공동체는 춘천 시내 진출을 위해 교우 전원이 애련 회와 계모임,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짚신 삼기 등을 통해 몇 해에 걸쳐 애써 모은 돈에 논까지 팔아 약사리 고개 현 죽림동성당 아래 골롬반 병원 터와 아랫마당, 그리고 수녀원 터를 사서 개조하여 1928년 5월부터 춘천의 옛 성당으로 쓰게 되었다. 현재의 죽림동성당(춘천교구 주교좌성당)은 김유룡 신부와 엄 회장이 이끈 곰실 교우들이 애써 마련한 아랫터에 보태어 구 토마스 신부가 매입한 언덕 위에 서게 되었다.
▒ 엄주언과 애련회
엄주언 마르티노는 윗 너부랭이에서 4, 5년간 열심히 노력한 결과 아래 너부랭이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땅을 늘려 재산도 모으게 되고 신자가 늘어감에 따라 집과 함께 강당을 지어 공소 예절을 갖춰 나갔다. 그는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권장하며, 금주ㆍ금연을 권했고 규율을 어길 때는 불량자 취체 령을 발동하여 벌을 받게 하고 50전의 벌금을 내게 하였다. 1920년 9월 초대 신부님을 모신 후에는 본당의 시내 진출을 도모하였다. 시내 진출의 바탕이 된 것은 애련회(사랑을 훈련시키는 회)였다. 15세 이상 된 신자는 모두 이 회에 가입했으며 회원은 종신회원으로 1인당 50전씩을 거두었고, 계를 조직하여 새 성당 건축 기금 마련에 노력했다. 또한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짚신 삼기(당시 한 켤레 당 5전)로 기금을 마련하여 애련회 소유 농토를 늘리고 여기에서 나온 쌀을 장리로 주기도 하여(한가마당 세 말) 기금을 늘려 나갔다.
세 번째 간 곳
● 양근성당
양근 지명은 고구려 시대에 근거를 둔 지명이며 ‘버드나무 뿌리’ 라는 의미이다.
예부터 남한강변에 버드나무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폭우와 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허기 위함이었다.
버드나무는 뿌리만 내리면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속성수이다. 버드나무는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나무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자 당대의 로마 황제들이 그리스도 교인들을 잡아들여 처형을 한다. 황제들은 그리스도를 받는 이들을 잡아 죽이면 그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순교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 되어 뿌리만 내리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버드나무처럼 계속 되었고, 순교자들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더욱 튼튼해졌다.
한편 양근이라는 말에서 양제 근기(楊提根基)라는 말이 파생된다.
이 말은 튼튼한 근원, 기초란 의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양근이라는 지명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한국 천주교 역사 안에서 양근성지의 의미와 일맥상통하다.
현재 양평이란 지명은 1908년 지평 군이 양근군과 합쳐지면서 양근의 '양'과 지평의 '평'이 합쳐서 된 지명이다.
양근성지는 신유박해 이전 천주교 도입기에 천진암 주어사 강학을 주도한 녹암 권철신과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권일신이 태어난 곳이다. 권철신과 권일신의 생가 터는 한때 강상면 대석리라고 하는 설이 있었으나 후손들과 교회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현재 양평읍사무소 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양근성지의 중요성을 몇 마디로 요약하자면
첫째로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고 전국으로 천주교 신앙이 퍼져나간 모태이다.
둘째로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난 곳이다.
셋째로 많은 분들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양근천이 한강과 만나는 오밋다리 부근 백사장에서 그들의 목이 잘리고 시신이 내버려진 곳이다.
한편 교회측 기록에는 1801년 3월에 양근에서 순교한 신자가 모두 13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윤유일의 삼촌 윤관수( ?~1801, 안드레아)는 양근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순교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1801년 5월경에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잔인하였던 양근 군수 정주성에 의해 이재몽(1747~1801)·이괘몽 형제와 두 딸, 김원성, 윤점혜와 활동한 이 아가타 등이 양근에서 처형되었고, 10월 초에는 양근 출신의 유명한 신자 조동섬(趙東暹, 1739~1830, 유스티노)의 아들 조상덕(趙尙德, ?~1801, 토마스)이 옥사하였다. 이와 같이 양근 지방은 순교 성인의 탄생지이고, 순교자들의 피로 신앙이 뿌려진 곳이다. 이곳 성지에서 우리는 윤점혜 아가타를 통하여 한국 교회의 수도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고, 조숙(베드로)ㆍ권천례(데레사) 동정부부를 통하여 성가정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는 곳이다.
◎동정녀(童貞女)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로서 종교적 목적을 위해 동정을 지키며 정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2세기말까지 초대 교회에서의 동정녀들은 기도와 금욕 생활을 위
모임을 가졌고, 과부들은 특수한 교회 활동을 위해모임을 가졌다.
그 후 3세기경에 이르러 동정녀들은 공식적인 축성식을 갖게 되고, 또한 동정녀들의 모임도 주교가 직접 관할하는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어 이후 동정녀들의 모임은 여자 수도회로 발전하였다. 한국 교회에 있어서도 교회 창설 이후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진출하기 전까지 많은 동정녀들이 나타나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한국 교회 최초의 동정녀 회장 윤점혜(尹占惠)를 비롯, 1839년 기해박해 때 동정으로 순교하여 성녀(聖女)가 된 김효임(金孝任)· 김효주(金孝珠) 자매, 이 인덕(李仁德), 이경이(李瓊伊) 등이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동정녀들이다.
넷 번째 간 곳
●풍수원 성당
강원도에 있는 성당으로, 원래 이곳은 조선 고종 3년(1866) 병인양요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천주교 신도들이 피난처로 삼아 모여 살던 곳이다.
고종 27년(1890) 프랑스인 르메르 신부가 1대 신부로 부임하여 초가 20칸의 본당을 창설하였다. 그 후 고종 33년(1896)에 부임한 2대 정규하(1893∼1943) 신부가 직접 설계하여 본당을 지었는데, 융희 1년(1907) 중국인 기술자와 모든 신도들이 공사에 참여하여 현재의 교회를 완공하였다.
건축 양식은 고딕식으로, 앞면에는 돌출한 종탑부가 있고 출입구는 무지개 모양으로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두꺼운 동판을 깔았고, 내부에는 기둥들이 줄을 지어 있는데, 벽돌 기둥처럼 보이게끔 줄눈을 그려 넣었다.
풍수원 천주교회는 한국인 신부가 지은 강원도 최초의 성당이며, 한국에서 4번째로 건립된 유서 깊은 절충식 고딕 건축물이다.
본 성당은 9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건재하며, 1920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성체현양대회 때면 전국에서 1,500여 명이 넘는 신도들이 이 교회로 찾아온다. 교회 본당 옆에 위치한 구 사제관은 원형이 비교적 잘 유지된 벽돌조 건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163호로 지정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1802년 혹은 1803년경 경기도 용인에서 신태보(베드로)를 중심으로 하여 40여명의 신자들이 팔 일 동안 피난처를 찾아 헤매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인 풍수원이다. 이 곳 풍수원에서 80여 년 동안 신자들은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영위해오다가 1888년 불란서 성직자 르메르 이 신부님을 맞이하여 정식으로 교회가 설립케 되었다.
1866년(고종 3년) 교회 대 박해(병인박해)와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 때 신자들이 피난처를 찾아 헤매던 중 산간벽지로서 산림이 울창하여 관헌들의 눈을 피하기에 알맞은 곳이라 사방으로 연락하여 신자들을 모아 한 촌락을 이루어 일부는 화전으로, 일부는 토기점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20년간을 지내다가 1888년 6월 20일 조선교구장 민 대주교께서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신부로 불란서 르메르(Le Merre) 이 신부가 부임하여 춘천, 화천, 양구, 홍천, 원주, 양평등 12개군을 관할하였으며 당시 신자 수는 약 2,000명이었고 초가집 20여간을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896년 2대 주임으로 정규하(아우구스띠노)신부가 부임하여 중국인 기술자 진베드로와 함께 현재의 성당(벽돌 연와조 120평)을 1905년에 착공, 1907년에 준공하여 1909년 낙성식을 가졌다.
신자들이 벽돌을 굽고 아름드리나무를 해오는 등 자재를 현지에서 조달했다. 강원도 전체와 경기도 일대의 성당은 풍수윈 성당에서 분당된 것이다. 그런데 본 성당은 지난 1982년 강원도에 의해 지방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바 있다. 아울러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기해 1920년에 제1회 성체대회가 실시되어 매년 행사가 치러지고 있다.(6.25동란으로 3년간 본 행사가 치러지지 못했다.) 신앙의 요람 터요 선조들의 얼이 담겨져 있는 역사의 현장인 이곳에서 30여명에 달하는 한국인 사제들이 탄생되어 풍수원은 참으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 하겠다.
풍수원 성당
한국 천주교회의 특징은
첫째, 성직자의 도움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창설했고
둘째, 학문 연구에서 출발한 것이 종교와 신앙으로 발전했으며
셋째, 신앙이 교우들에게 뿌리 내리면서 성직자를 영입하려 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11월 27일)]
다섯 번째 간 곳
● 매괴성당
성당 한 켠에서 있는 동상 앞엔 이런 문구가 있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51년 동안 매괴 성당에서 사목생활을 했던 임가밀로 신부는 1947년 "성모여, 저를 구하소서." 하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고한다.
평소에 한국민족을 사랑하는 맘이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말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이 가슴에 와 닿는 초겨울 매괴 순례지의 선교사의 음성이 귓전을 때린다.
감곡본당은 1896년 설립되어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초대 본당 임가밀로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93년 서품 후 받은 후 바로 입국하여 그다음해인 1894년 첫 본당으로 유서 깊은 교우촌, 신 학당이 있었던 여주 부엉 골에 부임하게 된다. 하지만 본당 사목지가 북쪽 끝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산지부락 이어서 본당 이전을 생각 하던 중 사목 방문차 여주를 지나 장호원에 이르러 산 밑에 대궐 같은 집을 보고 이곳이 본당 사목지로서 가장 적합 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 즉시 임가밀로 신부는 "성모님 만일 저 대궐 같은 집과 산을 저의 소유로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주보가 매괴 성모님이 되실 것입니다."라고 기도 하였으며, 부엉 골로 돌아가서 매괴 성모님께 끊임없이 청하였다.
당시 대궐 같은 집은 명성황후의 육촌 오빠인 민응식의 집이었고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피신해 왔던 곳이기도 하다.
1896년 5월 성모성월에 그 모든 집터와 산을 매입, 매괴성월인 10월7일 본당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결국 임가밀로 신부가 처음에 기도한대로 감곡본당을 성모님께 봉헌하여 이곳이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성당이 된 것이다.
웅장한 모습의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성당은 당초 명동성당과 쌍둥이 성당으로 지으려고 했지만 여러 사연으로 명동성당보다는작게 지어졌다 고한다.
1914년부터 성체 거동을 시작한 110년 역사의 유서 깊은 본당이다. 감곡 매괴 성모 성당은 처음부터 성모님께 봉헌된 곳이다. 또한 성모 신심과 성체 신심을 바탕으로 신앙의 못자리가 된 곳이며, 15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이기도 하다. 장호원 지역은 본래 부엉골 본당 관할 지역에 들어 있었다. 부엉골에 1885년 예수성심신학교가 설립되면서 교우 촌이 조성되었고, 1887년 신학교가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 뒤에도 얼마 동안 본당으로 남아 있었다. 1894년 봄 부엉골 본당 신부로 부임한 부이용(Bouillon, 任加彌, 1869~1947, 가밀로) 신부는 본당 위치가 적당치 않음을 깨닫고 1896년 5월 장호원의 매산 언덕에 자리 잡고 있던 한옥을 매입하여 본당 이전을 결행하였다. 이로써 부엉골 본당은 폐지되었다. 1903년 성당 신축을 시작하여 다음 해 9월에 이를 완공하였다.
감곡 성당에서만 51년간 사목하다 세상을 떠난 부이용 신부는 감곡 공동체의 주춧돌로 남아 있다. 그의 노력과 업적은 2002년 10월 개관한 유물관에 풍부하게 담겨 있다. 1914년 국내 첫 성체 거동 때부터 사용했던 성광과 금색 제의, 영대, 구두, 그리고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 순교자가 지은 《쥬교요지(主敎要旨)》 등 문서류, 본 당사를 개괄한 각종 사진 등 50여 점은 100여 년간의 신앙 발자취를 그대로 담고 있다.
감곡 성당의 성모 신심을 고찰하려면, 한국 교회 초창기부터 비롯된 성모 신심의 역사와 함께 부이용 신부의 성모 신심을 동시에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1830년대 이후 조선에 입국한 앵베르, 페레올, 다블뤼 등 역대 조선대목구장을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열심한 성모 신심과, 1869년 성모 발현지 루르드에서 불과 20㎞ 밖에 떨어지지 않은 프랑스 비에유 아되르에서 태어난 부이용 신부의 루르드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감곡에서 기도의 응답으로 꽃을 피우게 된다.
그 대표적 사례가 매산 중턱의 신사(神社) 건립 사건이다.
1943년 일본인들이 매산 중턱에 신사를 지으려 하자 이에 부이용 신부는 성당 뒤쪽 매산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무염 시태) 기적의 패’를 묻어 두고 성모님께 “이 공사를 중단하게 해 주신다면 이곳을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기도했다.
그러자 일인들이 공사를 진행하려 하면 여러 가지 기상 이변이 일어나고 큰 짐승이 출현하는 바람에 번번이 공사가 중단됐으며, 결국 2년 뒤 해방이 되면서 공사는 완전히 중단됐다고 전해진다. 그 뒤 1955년 8월 15일 매산 중턱은 성모 광장으로 봉헌됐고, 이후 성모 광장은 감곡 성당이 1914년부터 해마다 거행해 온 성체 거동 행사의 장소로 자리 잡았다.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2006년 10월 7일 본당 설정 110주년을 맞은 감곡 성당을 매괴 성모 순례지로 승인했다.
감곡본당 주보인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맞아 교서를 발표, 교회법 제1230조와 1232조에 따라 그 해 본당 설정 110주년을 맞은 감곡성당을 매괴 성모 순례지로 승인했다. 성모순례지 지정은 1991년 10월1일 성모께 봉헌된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에 이어 한국교회에서 두 번째다.
장 주교는 이날 '매괴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제목의 교서를 통해 "지난 110년간 감곡 매괴 성모 성당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전능이 성모님을 통해 끊임없이 드러난 은총의 자리가 돼 왔다"며 매괴 성모 순례지로 승인하는 바이다"고 밝혔다.
장 주교는 성모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은총의 표징들로 △성당 옆 매괴성모 광장이 일제 강점기 중 신사 참배 터로 지정돼 공사를 계획했으나 천둥과 소나기, 벼락으로 일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고 △1950년 한국전쟁 중에는 공산당원들이 성당 제대 중앙에 모셔진 매괴성모상에 총을 쏘았으나 7군데 탄흔이 남는 가운데서도 파괴되지 않아 지금까지 성모칠고를 묵상케 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또 △초대 주임 임 가밀로(Camillus Bouillon) 신부를 하느님께서 사제로 선택하고 감곡 성당에 파견, 감곡 본당 공동체에 성모께 대한 신심과 사랑이 전해져 150여명 성직자와 수도자를 통해 성모 신심이 오늘에까지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점도 꼽았다.
여섯 번째 간 곳
● 죽산성지
죽산은 현재 행정구역상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이다.
조선시대에는 도호부(都護府)에서 현(縣)으로 강등되기도 몇 차례 있었다. 조선시대 도호부(都護府)가 있을 때에는 그 면적이 상당히 넓어 지금의 안성시 일죽면, 죽산면, 삼죽면, 용인시 원삼면, 백암면 모두를 포함하고 충북 진천군 백곡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고종 32년(1895년) 지방관제개정에 의해 죽산도호부에서 죽산 군으로 되었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안성군으로 편입, 현재의 죽산면으로 개정되었다.
죽산은 죽산 박씨, 죽산 한 씨의 관향이기도 하며,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는 당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친, 유명한 시인 박인량(朴寅亮)의 고향이기도 하며,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는 송문주(宋文冑)장군이 죽주산성(竹州山成)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또 임진왜란 때는 망암(望菴)변이중(邊以中)이 화포(火砲)를 제작, 왜적을 물리치기도 했다.
잡혀 온 사람들은 죽산관아(현재 죽삼면사무소)감옥에서 이진터로 끌고 가 처형했다고 한다. 신자들 사이에서는 이진터로 끌려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여‘잊은 터’라고 불렸다고 한다.
삼죽면에는 ‘두둘기’라는 삼거리가 있다.
이곳에 주막이 있었는데 포졸들이 신자들을 잡아가지고 오다가 이 주막에 들려 술을 마시고 돈을 내라고 심하게 두들겨서 이 마을 이름이 ‘두둘기’라고 한다고도 전해진다. 또 달리 전하는 말로는 이곳이 진흙길이라 신발에 많이 달라붙어 진흙을 털어내려고 신발을 두드려 두둘기라는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이처럼 병인박해로 인해 박해의 잔학상의 일면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죽산에서는 1866년 병인박해부터 1871년 신미양요 때까지 스물 네 명이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께 목숨을 바쳤다. 단 한 사람이 주님을 위해 피를 흘리며 목숨을 바쳐도 우리는 그 땅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린 곳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24위나 되는 분이 순교의 거룩한 피를 흘린 죽산이다.
병인박해를 전후하여 죽산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죽산 교우 촌으로는 고초골, 남풍리(속칭 남굉이), 용촌, 양대리 등이 있다. 죽산 지역 순교자들은 이름은 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순교자들의 행적을 연구하는 작업은 죽산순교성지의 역사적 의의와 깊이를 더해 줄 것이다. 여러 자료들과 현지답사를 통해 살펴본 죽산순교자들은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최제근 안드레아와 방 데레사 부부, 조치명 타대오와 김 우보로시나 부부, 여기중, 여정문과 부인, 아들 일가, 문 막달레나, 한치수 프란치스코, 유 베드로, 이희서, 홍천여, 정덕구 야고보, 최성첨과 그의 장남, 이희서와 그의 사위 이진오, 김회장 도미니코, 김인원, 홍치수, 정 토마스, 금 데레사로 모두 24위이다.
그 순교의 땅이 오랜 동안 황무지로 버려져 있다가 1994년 강정근(마티아)신부가 죽산성당에 주임신부로 부임하면서 성지 성역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죽산성당은 안성 구포동성당에서 분리돼 나온 성당이다. 죽산성당을 건축한 이는 수원교구 이정운 몬시뇰으로 죽산성당을 무명 순교자 성당으로 봉헌하고 죽산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을 위한 기념비를 성당 한 구석에 건립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순교자들의 순교 사실이 자꾸만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져가는 형편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강정근(마티아)신부가 매달 죽산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미사를 이진터 앞, 성원목장 도로변에서 드리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비포장도로여서 먼지와 소음 속에 제대로 된 미사와 강론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소음과 먼지 속에서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제대로 묵상 할 수가 없어 강정근(마티아)신부는 이진터를 성지로 개발하기로 결심하고 하느님께 간구하며 노침초사하였으나 시골 본당의 힘만으로는 역부족 이였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신자들과 일심동체가 되어 황무지에 호박을 심어 팔기도 하고, 신자들 집에서 생산 된 포도를 서울 각 성당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아, 거기서 얻은 수익금으로 성지 개발기금을 조성하는 한편, 교구내 각 성당을 순회하며 성지 개발을 호소, 성지 개발 후원 회원을 모집, 그 성금으로 성지 개발에 필요한 땅을 구입하여 1차적으로 성지 개발을 하게 되었고, 현재의 죽산성지로 성장 한 것이다.
2번째
순례의 향기의 소감의 글은 내 개인 생각은 접어두고
순례지의 특징, 중요성, 순교자의 생애의 글을 중점으로 글을 써 보았다.
여기에 쓴 글과 사진들은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및 ‘굿 뉴스 ’에서 따온 글임을 밝히면서 많은 ‘청주교구 사도성 야고보 순례단 ’ 회원님들의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앞으로도 계속 이런 형식의 글을 쓰려고 노력을 할 것 입니다.
2016. 5. 7 . 성지순례를 마치며
김홍숙 혜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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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두번째 순례기 -춘천 ,원주, 수원, 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