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하는 꽃 기생 Gisaeng, the Talking Flower 송 기 호 (Ki-Ho Song)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약 력 | 조선시대 기생 이름에 ‘해어화(解語花)’ 가 보인다. "왕이 지시하기를, “오늘 뽑은 해어화·곡강춘·비천호·장중경·소표매 중에서 해어화가 비교적 괜찮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기개가 없어서 취할 만하지 못하다. 고운 얼굴은 분칠을 해서 만든 것이니, 어찌 분칠한 것을 진정한 미모라 할 수 있겠는가. 해어화란 ‘말을 알아듣는 꽃’ 이란 뜻으로 흔히 기생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지금은 기생이라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창기(娼妓), 기녀(妓女)란 말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기생은 천한 신분에 속하는 여자로서 노래와 춤을 익혀 잔치나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던 일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역할은 중국과 일본에도 있었다. 중국에서도 창기나 기녀 등으로 불렸으나 기생이란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게이샤(藝者), 게이기(藝妓)라 불렀으니, 영화‘게이샤의 추억’이 우선 떠오를 것이다.
또 경주 남쪽 30리에는 전화앵(囀花鶯)이란 기생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근래에 울산에서 추모제를 매년 열고 있다. 이들은 모두『동국여지승람』의 경주에 관한 기록에 나타나는데, 후대의 기록이라서 신빙성에 문제가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고대에도 기생들이 존재하였을 것이니, 멀리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그
그런가 하면 조선 초기에는 기생이 군인위안부로 시작되었다는 얘기가 자주 등장한다. 다음은 세종 때에 김종서가 여악(女樂)을 폐지하자고 건의한 데에 대해서 윤수가 왕에게 개진한 내용이다. "윤수가 아뢰기를, “이것뿐 아닙니다. 옛날에 이르기를, ‘기생이란 아내가 없는 군사를 접대하기 위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우리나라가 동남으로 바다에 이르고 북쪽으로 야인(野人)과 이어져 있어 방어하는 문제가 없는 해가 없으니, 여악을 어찌 갑자기 혁파하겠습니까.’고 하였다(세종실록 12년<1430> 7월 28일)." 이 설명은 중국 송나라 때에 편찬된『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에서 창기 유래에 대해서 언급한 것과 동일하다. 중국 고사에는 위안기(慰安妓)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오니 이를 근거로 한 주장이다. 그런데 갑자기 기생을 얘기하면서 여악 즉 여성 악공(樂工) 문제가 등장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 김종서가 아뢰기를, “대체로 음악이란 사악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내고 찌꺼기를 녹여 없애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여악과 같은 것은 어찌 사악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종께서 그 그릇된 점을 깊이 아시어 이웃나라 손님을 위한 잔치와 조정의 회례연(會禮宴)에서는 처음부터 여악을 사용하지 않고 남악으로 대신하였는데, 오직 중국 조정의 사신에 대한 잔치에서만 개혁하지 못하고 답습하고 있으니 실로 불편합니다.”고 하였다(문종실록 2년<1452> 3월 12일)." 회례연이란 새해 첫날과 동짓날에 임금과 신하가 모두 모여 여는 궁중 잔치를 말한다. 이 논의는 마땅히 대체할 음악이 없으니 좀 더 강구해보자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이처럼 여악이 자주 논란이 되면서도 실제로는 끝까지 없애지 못하였다.
‘청산리 벽계수야’라는 시조를 지은 황진이는 당시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다 실패하고 사제관계를 맺었 그림 1. 춘향전(민화)
"6월 정유일에 도당(都堂)에서 임밀과 채빈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기생이 채빈의 모자에 꽃을 똑바로 꽂지 못하자 채빈이 크게 노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시중 염제신을 광주로 유배보냈다. 도당은 고려후기의 최고행정기관을 말한다. 여기서 연 잔치에 기생이 잘못하여 최고위 재상이 유배를 가고, 명나라 사신은 화가 나서 귀국하려 하였던 사건이다.
"왕명을 받든 관리가 지방에 나가면 기생을 거느리고 있는 각 관청에서 기생을 천침시키는 것이 예로 되어 있었다. 다만 감사(監司)는 풍속과 기강을 맡은 관료이기 때문에 비록 본읍(本邑)에서 기생을 천침시켜도 데리고 다니지 못하는 것이 또한 전례(前例)였다(이능화,『 조선해어화사』동문선, 252쪽)." 천침(薦枕)이란 윗사람을 모시고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을 이른다. 기생의 딸인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들지 않은 것을 들어 절개를 칭찬하지만, 그의 신분으로 본다면 수청을 들었어야 했다. 기생의 딸은 다시 기생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나이 13, 4세가 되면 맨 처음으로 서방이 된 자가 댕기를 풀어 쪽을 만들고 비녀를 꽂아서 신부처럼 꾸미는데, 세속에서는 ‘머리 얹는다’ 고 한다. 도내 각고을 수령이 일이 있어 감영에 가서 감사를 보면, 감사는 어린 기생을 보내 동침하게 하고 또 머리를 얹어주게 하니, 수령된 자가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를 얹어주고 돈이나 비단으로 상을 내리면 그 기생집에서는 머리 얹은 잔치를 베풀어서 기생들을 먹였다(이능화,『 조선해어화사』동문선, 141쪽)." 이 ‘머리 얹기’ 전통은 지금 골프장에서 살아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춘향이 처럼 수청을 거절하여 큰 사건으로 번진 경우도 있다. "전라도 도관찰사 허주가 나주판관 최직지를 파면시켰다. 만경현령 윤강이 일을 보기 위해 나주에 갔는데, 관기 명화가 수청을 들지 않는다고 화를 내자 최직지가 매질하여 3일만에 죽었다. 이리하여 그 집에서 원통함을 호소하였기 때문이다(태종실록 10년 <1410> 6월 25일)." 사내들은 기생의 치마폭에 빠져들 위험성이 항상 있었다. 어무적(魚無跡)이 연산군에게 “대체로 창기는 아양을 떨면서 여우처럼 사람을 홀리기 때문에 비록 행실이 높고 지조가 있다고 자처하는 선비일지라도 그 음란한 곳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적습니다”(연산군일기 7년<1501> 7월 28일).고 상소하였듯이 기생의 홀림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연당야유蓮塘野遊 신윤복 " 숙직하는 육조(六曹)의 낭관이 궁궐문 밖 큰길 위에서 기생을 끼고 다니면서 이것을 태평의 기상이라 자랑하고, 향교에서 학문을 닦는 유생이 공자 사당의 신성한 건물에서 기생을 데리고 놀면서 풍류남아의 운치 있는 일로 여겼다(이능화,『 조선해어화사』동문선, 172쪽)." 기생과 가까이 하다 보면 정이 들게 되고 자기만 독차지하고자 다툼을 벌이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김흥경이 창기 소근장을 사랑하고 남이 훔칠까 두려워하여 날마다 같은 패거리인 최인길을 시켜 엿보았다. 마침 이성림이 그 집에서 자는 것을 보고 보고하니 이튿날 김흥경이 희롱하여 “재상이 창기의 집에 자는 것이 옳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성림이 낯빛이 변하면서 “그런 일 없다.”고 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서로 미워하였다(『고려사』김흥경 전기)." 김흥경(金興慶?~1374)은 결국 이성림을 좌천시켜 지방으로 내보냈다. 아예 기생을 첩으로 데려와 사는 일도 자주 발생하였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대명률(大明律)』에 ‘관리로서 창기와 잔 자는 장(杖) 60대를 치고, 관리의 자손으로서 창기와 잔 자도 같은 죄로 다스린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위아래 관리가 모두 기생을 첩으로 삼아서 음란하고 더럽고 절개가 없을 뿐 아니라, 이 때문에 부부가 서로 미워하고 부자나 형제 사이가 갈라지게 됩니다. … 그밖에 의리를 저버리고 도덕을 상하게 하는 것은 일일이 들기가 어렵습니다. 빌건대 이제부터 기생을 첩으로 삼는 자는 일체 금지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관기는 국가의 재산이었는데도 이처럼 사사로이 자신의 첩으로 삼는 일이 많이 생겼다. "손순효가 또 아뢰기를, “대개 여러 고을의 기녀를 사대부가 첩으로 데리고 살면서 그와 나이가 비슷한 자기 여종을 몸값으로 물어냅니다. 그리고는 고을 아전에 청탁하여 그 여종이 죽은 것으로 확인증명을 불법으로 받은 다음에 남몰래 도로 데려와 부려먹고 있습니다. …”고 하였다(성종실록 19년<1488> 7월 24일)." 이렇게 편법으로 관청의 기생을 빼돌렸던 것이다. "하동군 정인지에게 관청 여종 1명을 하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 명령이 있게 되었다(세조실록 12년 <1466> 11월 13일)." 집안에 데려온 기생첩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본처를 구박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예장도감판관 신자형이 본처를 소박하고 기생 초요갱을 몹시 사랑하여, 오직 그녀 말만 듣고서 여종 두 사람을 때려서 죽이기에 이르렀습니다. … 이렇게 말을 꾸며 버티면서 자인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이 근본적인 윤리에 관계되는 것이니, 모름지기 끝까지 규명해야겠습니다. 청컨대 임명장을 거두고 그를 구속하여 국문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조실록 3년<1457> 6월 26일)." 기생 가운데에는 절개를 지켜 열녀가 된 경우도 있었다. "강계 기생 소상매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소설 속에서 춘향이도 절개를 지켜냈지만, 실제로 계월향(桂月香, ?~1592)은 임진왜란 때 적장에게 몸을 더럽히자 지아비로 하여금 복수하게 하고 자결하였다. 진주병사의 애첩으로서 적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든 논개는 의기(義妓)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성부에 명령하여 사대부 가운데 기생을 데리고 사는 자를 수색하여 아뢰게 하였다. … 밤 삼경(11~1시 사이)에 임금이 건명문에 나아가 기생을 데리고 살던 조정 관리와 유생들을 잡아들여 벼슬을 빼앗거나 시골로 쫓아버렸으며, 무인이나 중인·서얼의 경우에는 곤형(棍刑)에 처하거나 형벌을 가하였다(영조실록 45년<1769> 4월 16일)." 그러나 7개월 뒤에는 영조가 이 처분이 너무 지나쳤다고 후회하여 죄를 거두었다.
1패기생은 지금까지 언급한 본래 의미의 기생이다. 2패기생은 은근짜라 하였는데 양갓집 규수처럼 보이면서 몰래 몸을 파는 기생이었고, 3패기생은 공공연히 몸을 파는 최하층의 매춘부였다.
드라마 주제로 자주 삼는 연산군의 애첩 장녹수(張綠水)는 원래 집이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먹고 살다가 노비의 아내가 되었고, 다시 노래와 춤을 배워 기생이 되었다가 연산군의 눈에 들어 후궁으로 들어간 인물이다. "양인과 천인 여자들이 돌아다니며 직산(稷山)의 홍경원(弘慶院) 등지의 원우(院宇)에 임시로 거처하면서 여행객에게 공공연히 음란행위를 하며 생활하는데, 세속에서 이를 유녀라고 부릅니다(성종실록 18년<1487> 1월 5일)." 홍경원은 충남 직산에 있던 절이다. 사찰이나 여관을 돌아다니면서 매춘을 하는 유녀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유녀란 뜻으로 화랑(花郞)이란 말도 사용되었다. 신라시대 화랑의 전통은 사라지고 퇴영적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요즈음 들으니 음란한 여자가 전에는 양성현(陽城縣) 가천(加川)에만 있었는데, 이제는 사방의 원(院)·관(館)·영(營)·진(鎭) 사이에도 많이 있어, 봄과 여름에는 어량세(魚梁稅)를 거두는 곳으로 달려가고 가을과 겨울에는 산간의 승려 거처에 놀러가 음란한 짓을 자행하여 교화를 오염시킨다고 합니다. 어량은 통발을 놓아서 고기를 잡던 곳을 가리킨다.
"사헌부에서 … 또 아뢰기를, “성곽 밖의 비구니 거처는 이미 이단을 배척하는 뜻에 어긋나는 것인데, 여기에 이중으로 된 방과 어두컴컴한 실내는 여염집 과부들이 음탕한 일을 하는 소굴이 되고 있으니, 동대문 밖의 두 비구니 거처는 모두 한성부로 하여금 즉시 없애버리도록 하소서(영조실록 14년 <1738> 12월 21일)." 이 글에서 비구니가 사는 곳이 비밀스런 매음굴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왜인이 거주하던 부산포에는 매음을 직업적으로 하던 유녀(遊女)들이 있었다. "부산포에 와서 거주하는 왜인에 장사치라 부르거나 유녀라 부르는 자들이 있는데, 일본 손님과 장사하는 왜선이 정박하면 서로 모여 뒷바라지하면서 남녀가 섞여 즐깁니다(태종실록 권 35, 18년<1418> 3월 2일)." 일본에서 공적으로 매춘을 하던 ‘유조(遊女)’ 들이 한반도의 왜인 거주지에까지 침투해 들어온 것을 볼 수 있다. 마르코 폴로에 의하면 원나라 수도에는 매춘부가 무려 2만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또 남쪽 도시인 항주(杭州)의 경우에 매춘부는 시내 어디에서나 살고 있었는데, 문 입구의 조명 위에 대나무로 만든 삿갓이 걸려 있는 것이 매음굴의 표시였다고 한다.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늙은 기생’ 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붉은 얼굴 어느새 꽃 떨어진 가지가 되었으니 기획 : 남경필 편집간사 대한토목학회 THE MAGAZINE OF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
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