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열반 10주기 특별기획] ③ 고향을 떠나 목포로
중학생 ‘박재철’ 불교종립학교서 출가를 꿈꾸다
정광중은 1946년 목포서 개교
위치는 정광정혜원인 정광사
만암스님 친견 등 불교와
인연 맺었을 것으로 추측
등대지기 꿈 접고 쌍계사
대흥사 다니며 수행자들의
모습 보며 큰 감화 받은듯
법정스님이 고향 해남 선두리를 떠나 목포로 유학하며 입학한 정광중학교가 있었던 정광정혜원 전경. 이 학교는 만암스님이 지역 5개교구본사가 재원을 출연해 설립한 학교로 목포에 있다가 1948년 광주로 이전했다.
해남 선두리 우수영 초등학교를 졸업한 ‘박재철’(법정스님 속명)은 중학교로 진학을 할 시기가 됐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조차 사치에 가까웠다. 농촌의 어려운 살림살이도 그렇지만 공부를 해서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 교육열이 강한 집안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읍내 중학교에 보내는 정도로 만족하는 게 보통의 가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법정스님은 유학의 길을 걷게 된다. 해남 읍내가 아니라 목포라는 도회지로 말이다. 당시 목포는 해남보다는 더 큰 도시로 전라남도 지역에서 알아주는 교육도시의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여파로 항구도시 목포는 경제수탈지로 번성하기도 해 남도지방의 행정과 교육 문화 등의 중심도시 역할을 했다.
법정스님의 할머니의 장손에 대한 교육열도 목포유학길에 오르는데 큰 역할을 한듯하다. 집안의 장손이기도 한 법정스님을 번듯하게 공부시켜 출세시키고 싶었던 마음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아버지를 일찍 여읜 손자에 대한 애틋함도 자리하고 있었을 터다. 스님의 작은아버지의 사업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 목포로의 유학이 결정되지 않았나 싶었다.
항상 외부를 동경하던 ‘소년 박재철’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고향 해남 선두리 마을을 떠나 더 큰 세계로 향하게 됐다. 소설가 정찬주는 자신의 소설 <무소유>에서 법정스님의 목포행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소년은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등대지기 꿈을 접었다. 등대지기가 아니더라도 집을 떠날 수 있는 길이 생겼다. 할머니가 작은아버지를 졸라댄데다 작은아버지 역시 공부 잘하는 소녀에게 큰 기대를 걸고 목포로 유학을 보내주었던 것이다. 작은아버지는 선창 매표소에서 배표를 팔아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사람이었다. 하늘이 점점 푸른 빛깔로 바뀌었다. 선착장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완도에서 올라온 첫 여객선이 접안하고 있었다. 청년은 손을 들어 불이 꺼진 등대와 작별했다. 등대지기 추억마저 화장하여 재를 뿌리듯 바다에 버렸다. 그렇다고 이루지 못한 꿈의 그림자조차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빗물처럼 어디론가 스며들었다가 어느 날 문득 고독한 인연의 업이 될 터였다.”
목포에서 중학교 생활은 단편적 사실만 전할 뿐 상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스님의 행장소개에는 대부분 목포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다고 전한다. 당시 중학교는 고등학교 과정까지 6년 과정이 통합돼 있었기 때문에 목포상업학교(현 목상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님의 행장으로 소개되고 있다. 당시는 중고등학교가 통합과정으로 6년이었고 1950년에 중고등학교 과정이 분리됐다고 한다.
그런데 취재과정에서 만난 스님의 사촌동생 박성직 씨가 스님의 중학교 입학을 이야기하면서 ‘정광중학교’를 되뇌었다. 스님이 정광중학교에 다녔다는 말이었다. 정광중학교는 불교 종립학교인 정광학원에 소속된 학교로 광주광역시에 위치하고 있다. 박성직 씨의 입에서 정광중학교가 나오자 궁금증이 더해졌다. 목포에 정광중학교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지난 5월 20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로에 위치한 정광중학교를 찾아갔다. 이미 협조공문을 보내 놓은 상황이어서 중학교 교법사인 영일스님이 교감선생님과 행정담당자를 소개해 주었다. 교장선생님은 연수중이라 했다.
학교 측은 “법정스님이 1947년 정광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이듬해인 1948년에 학교를 옮겼다”고 확인해 주었다. 자세한 생활기록부에 대한 부분은 교장선생님이 오면 협조해 주겠다고 했다. 교법사인 영일스님은 “스님이 열반에 들었을 때 학교 차원에서 동문인 스님을 추모하는 플래카드를 내 건 것으로 안다”고 기억했다. 스님은 기억을 더듬어 “학교성적도 상당히 우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예상이 맞았다. 정광중학교의 자세한 연혁을 영일스님에게 부탁했다. 지난 5월30일 학교법인 정광학원 세부연혁을 SNS로 보내왔다. “1946년 1월 10일. 만암(송종헌)스님 발기로 5대 본사(백양사, 대흥사, 선암사, 화엄사, 송광사) 토지 출연(108,876평)으로 법인 및 중학교 설립 합의. 1946년 3월 1일. 목포시 무안동 3번지 정광사에서 정광중학교 개교. 1946년 9월 24일. 3년제 중학교 인가(중학교 초대교장 만암스님 추대)-허인용 선생 직무대행.”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중광중학교는 목포 정광사에서 개교를 했다. 주소는 ‘목포시 무안동 3번지’였다. 현재 정광정혜원이 있는 주소(전남 목포시 무안동 3-1)와 거의 일치했다. 신도로명 주소는 ‘전남 목포시 영산로 75번길 3-2’이었다.
이런 관계를 종합해 볼 때 법정스님은 1947년 정광중학교가 설립 된 이듬해에 2회생으로 입학해 1948년 목포상업학교로 전학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48년 정광중학교는 광산군 송정읍 선암리 1번지(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로 이전을 한다. 정광중학교는 1987년 금호타어이 공장이 확장하면서 광산구 소촌동으로 이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주광역시에 위치한 현재의 중광중학교 전경.
1946년 정광중학교 개교 당시 위치와 현재 정광정혜원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
지난 3일 정광중학교 교법사인 영일스님으로부터 중요한 자료가 SNS를 통해 추가로 도착했다. 법정스님의 학적부였다. 그곳에는 스님의 한문 속명 ‘朴在喆’과 본적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1076’이 한문으로 적혀 법정스님이 정광중학교 학생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입학 전의 경력란’에 ‘우수영공립국민학교 고등과1년수료’라고 명기돼 있었다. 지금까지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스님의 행장이 새롭게 알려진 것이다. 스님의 불교와 인연은 중학교 입학 때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정광사는 현재 정광정혜원으로 사찰에 중학교가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중학교 2학년 때 진도 쌍계사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때가 정광중학교 재학시절인지 목포상업학교로 전학해서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사찰로 수학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을 유추해 보면 정광중학교 재학시절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다.
당시에는 담임선생님이 인솔했는데 8.15 해방 이후라 어려운 시절이어서 반에서 빠진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정찬주 작가는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에서 스님이 회고한 내용을 풀어내고 있다.
“쌍계사는 8·15 직후 우리 반 선생님이 인솔로 여남은이서 수행여행을 갔다가 하룻밤 묵고 온 인연 있는 절이다.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이었다. 자욱한 아침 안개 속에 묻힌 절을 뒤에 두고 떠나올 때, 나는 너무도 서운해서 뒤돌아보며 흐느껴 울던 기억이 있는 그런 절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생을 해도 알 수 없는 일은 하룻밤 쉬어 오는 절에 무슨 정이 그리 들어 어린 것이 그토록 서운해 하면서 울었을까하는 생각이다. 어쩌면 전생에 내가 그 절에 살았기 때문에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법정스님의 모친인 김인엽 여사의 생전 모습.(사진제공=박성직)
정찬주 작가는 그의 저서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에서 법정스님이 목포상고 시절 여름방학 때 대흥사 비구니 스님이 사는 암자를 찾아가 하룻밤 지낸 이야기도 언급한다.
“노스님이 달을 보고서 합장한 채 ‘월광보살, 월광보살’하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어찌나 아름답던지 눈에 선해요. 지금도 달만 보면 대흥사 암자의 그 노스님이 ‘월광보살’하고 합장하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라요.”
법정스님이 중학교 시절 수학여행을 갔다고 하는 진도 쌍계사.
어려운 시대에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나던 시절 법정스님은 목포로 유학생활을 했지만 주말이면 2시간여 동안 배를 타고 고향인 해남 선두리로 가서 작은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고향을 떠났지만 고향은 언제나 눈앞에 아른거렸고, 고향의 산천은 언제나 마음을 포근하게 해 주는 곳이었다.
전쟁 전후 모두가 가난해 공부조차 사치스럽게 생각했던 ‘소년 재철’ 역시 학교에 낼 등록금이 부족해 마음을 졸이는 일도 있었지만 도시에서 유학생활의 피곤함을 고향 선두리에 가서 풀고 간곤 했을 것이다. 그런 한편 ‘소년 박재철’의 사색의 폭은 점점 깊어져 ‘법정스님’으로 길을 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주·목포·진도=여태동 기자
※ 취재협조 : (사) 맑고향기롭게
[불교신문3494호/2019년6월12일자]
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