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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후지꼬 (掛富士子)
꼬꾜요 하고 끼미기 목소리를 내는 이웃집의 수탉이 매일 새벽 이맘때가 되면 홰를 치면서 시간을 알려 준다.
괘종시계가 방금 전에 네 번을 울렸으니 날이 새려면 아직 멀었는데 잠을 더 청하려고 눈을 감았지만 통 잠이 오지를 않는다.
큰 아이가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매일같이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바람에 그가 올 때 까지 기다리다가 간식거리를 챙겨 주다 보면 어느새 12시가 지나고 그제야 잠을 자게 되니 잠은 늘 부족한 편이다.
매일 같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요즘의 일상이기도 하지만 어제는 학교를 갔다 온 중학교 2학년짜리 딸이 집으로 오자마자 엄마에게 초등학생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었다.
“ 엄마.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들어 주실 거지요.”
딸은 자못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엄마에게 다짐을 받으려는 것이다.
“무슨 일인데 생전 하지 않던 떼를 다 쓰는 것을 보니 네가 더욱 예뻐 보이는구나.”
“ 왜 내가 예쁘지 않다는 말이야.”
“ 왜 우리 딸이 예쁘지를 않아 천하를 주어도 바꾸지 않을 딸인데 .”
“ 정말이야, 우리 엄마가 역시 세상에서 최고야.”
“ 야, 오늘 딸 덕분에 비행기를 다 타는구나.”
" 엄마 진짜 비행기 제가 이다음에 꼭 태워드릴께요. 그 비행기 타고 일본의 외가댁에 같이 가요 네. “
“ 너의 외가댁엘 간다고 외가댁에는 비행기 내릴만한 비행장이 없는데 어떡하지.”
“ 엄마는 비행기가 뭐 집 마당에 내리나, 하네다 공항에 내리지.”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네가 요구하는 것이 뭔데 그리 호들갑을 떠는 게냐.”
“ 엄마 사실은 말이에요, 내일 학교에서 수업공개를 하는데 학부형 한분씩을 꼭 모셔 오래
요, 그러니 엄마가 가셔야 된단 말이에요.”
“ 엄마를 학교에? 그런데 엄마는 바빠서 갈 수가 없는데 .”
“그러게 엄마한테 꼭 들어달라는 말씀을 드린 것이지요. “
딸이 하도 조르는 바람에 이번만은 학교를 가기로 딸한테 약속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시아버지께서 아침에 일어나셔서 밥상 앞에 앉으시더니 밤 새 배가 아파서 주무시지를 못하였다고 하시며 조반을 전혀 잡숫지를 않는다.
올해 팔순이 넘으신 시아버지는 평소 건강하기도 하지만 아들이 하는 오이농사를 늘 거들어 주실 때에도 몸이 고단하시다거나 어디가 아프다는 말씀을 하신 바가 한 번도 없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음식에 대해서 한 번도 타박을 하시지 않았지만 특별히 맛이 있는 것을 해드리지 못하는 것이 늘 미안했는데 음식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속이 탈이 나신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은근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부득이 시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엘 가야 하니 딸의 약속은 들어 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후지 꼬’는 아침에 딸이 일어나서 밥을 먹는 동안 할아버지를 병월에 모시고 가게 되어 학교를 갈 수가 없다는 말을 해 준 것이다.
그러자 딸은 밥을 먹다 말고 금방 할아버지 방으로 쪼르르 건너가는 것이었다.
딸은 평소에도 할아버지를 무척 따르기도 하지만 할아버지 또한 집안에 귀한 손녀딸을 당신 혼자 둔 것처럼 아침에 일어나시면 손녀딸부터 찾으셨다.
“ 할아버지 어디가 아프시다면 서요,”
“ 응. 우리 상희구나. 어쩐 일로 이렇게 식전에 왔니.”
“할아버지가 아프시다고 엄마가 말씀을 하셔서 왔는데 어디가 아프셔요. “
“ 응. 별것 아닐 거야. 아무 걱정하지 말아. 아이들은 그런데 신경 쓰지 않는 것이란다.”
“ 아니야. 할아버지 저도 이제는 어른이 다 돼 가요, 오늘 병원엘 꼭 다녀오세요.”
상희는 말을 하더니 할아버지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난 후에 밥을 마주 먹고 책가방을 메는 것이다.
“ 허허. 그 녀석 어른이 다 돼간다고? 올해 열여섯이 되는 건가, 음, 그렇지 그래, 이팔청춘이 된다 이거지, 하긴 옛날 같으면 벌써 시집을 가서 애를 낳을 때도 되었지.”
문득 자신의 청년기의 쓰라렸던 과거가 생각이 나는 것이다.
때는 1943년 그가 열여덟 살 되던 해였다. 일제는 그때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터에 끌고 가기 위해 징용영장을 발부하였는데 할아버지는 일본의 혹가이도( 北海道)의 광부로 끌려갔으며 주어진 임무는 지하 일백오십m의 막장에서 탄을 캐는 일이었다.
깜깜한 어둠의 땅 속은 공기가 얼마나 탁한지 처음에는 숨이 막힐 정도였지만 참아가면서 곡괭이로 탄을 캐자니 땀은 나고 정말 힘이 들었지만 거기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1년을 열심히 일을 하자 반장의 책임을 맡게 되고 쉬는 날이면 자유롭게 행동을 할 수도 있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동안에 함께 갔던 동료 여러 명이 죽어나간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고향 만 리를 떠나와서 억울하게 죽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사람이 한번 나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이라지만 기왕이면 이 소굴을 벗어나서 도망이라도 가다가 죽는 것이 낫겠다는 결심을 은연중에 하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어느 쉬는 일요일 새벽을 택해서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혹가이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차를 이용하기 보다는 아무래도 검문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순전히 도보로 가기로 하였다.
막상 대담한 결심을 하고 떠나기는 하였지만 먹고 자는 일의 해결이 쉽지를 않았고 하루를 꼬박 굶어서 잔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를 악물고 일본 본토를 거슬러 내려와서 오사카까지 무사히 도착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니 그동안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야 말로 전쟁 중이라 일본 사람들 조차 먹고 살기가 어려웠음에도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잠자리와 밥을 제공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사카에서 며칠을 묶던 그는 이번에는 집에 가는 것이 막막하기만 하였는데 마침내 밀항선을 타고 고향으로 귀향할 수가 있었으니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살아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를 않았다.
그러한 쓰라린 과거로 인해서 일본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는데 어느 날 뜻밖에도 아들이 일본 여자에게 장가를 간다고 하였으니 처음에는 허용을 하고 싶지를 않았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그가 탄광에서 도망을 나올 때에 밥을 주고 잠자리까지 제공해주던 또 다른 일본사람들의 따뜻했던 인정을 생각하니 그들 모두가 다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반대를 하지 않은 것이다.
막내를 합쳐 셋이 학교엘 가고 나자 그제야 ‘후지 꼬’는 시어머니의 진지를 차려 드리고는 식전에 비닐하우스에 가서 일을 하는 남편을 부른 것이다.
서로가 늘 바쁜 나날이다 보니 몇 식구 되지 않으면서도 식구들이 한꺼번에 조반을 먹는 것도 쉽지를 않았다.
조반을 먹고 나자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말씀을 하신다.
“ 어멈아. 오늘 아버지 병원에 모시고 간다면서 돈은 마련이 되었냐?”
“ 예 .애들 아빠가 마련해 주겠지요.”
“ 얼마면 되는데 그래.”
그때 마구간에서 쇠여물을 퍼주던 남편이 아내를 향하여 한 말이다.
“ 나도 잘 모르는데요.”
“ 그러면 우선은 카드로 긁어요. 그리고 현금이 필요하면 농협에서 찾아서 쓰고.”
남편은 그리고는 바로 오이를 심은 비닐하우스로 가는 것이다.
아버지가 편치 않다고 하면 아들이 자세하게 그 증상을 여쭤봄직도 하건마는 평소에도 말이 적던 남편은 그날도 아버지에게 잘 다녀오시라는 말 한 마디뿐이었다.
술만 먹지 않으면 샌님도 그런 샌님이 없을 만큼 조용한 성품의 남편은 아침밥만 먹으면 밭에 나가는 것이 공무원 출근하듯 하지만 주기적으로 술을 먹었다 하면 어느 한날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로 부인에게 폭력을 가했던 것이다.
남편의 폭력은 다른 어떤 주정뱅이들처럼 세간을 부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말을 하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단지 아내를 강제적으로 꿇어앉히고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오기 전에 어떤 남자를 좋아하였는지에 대해서 고하라는 것이었다.
‘후지 꼬’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대꾸를 하지 않으면 그때에는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서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바람에 맞을 수박에 없었다.
어떤 때는 얼굴을 때려서 눈이 퉁퉁 부어올라 일어나지를 못해 밥도 제대로 하지를 못하였다.
그럴 때마다 시어머니가 야단을 치시고 시아버지는 작대기로 아들의 등때기를 후려치면서 주의를 주시지만 그때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 하고 잊을만하면 또 그 병이 도졌다.
어찌 보면 의처증을 가진 남자라고 할까 아무튼 ‘후지 꼬’가 무슨 일로 어디를 갔다 온 다음날에는 여지없이 술을 먹고는 무슨 짓을 하였느냐고 따지면서 손찌검을 하였다.
한번은 가을 타작을 다 하고나서 동네의 부인들이 동해바다로 관광을 간다고 하기에 ‘후지 꼬’도 모처럼 신청을 하였던 것이다.
시집을 온 이후에 처음으로 간다고 하자 시아버지는 용돈까지 주시면서 바다에 가거든 창난젓갈이나 사오라고 하셨는데 그날따라 남편은 저녁을 먹고 나서 슬그머니 어디로 살아지더니 새벽녘에야 술이 고주망태가 된 채 문지방을 겨우 넘어와서는 방바닥으로 나동그라지는 것이다.
관광버스는 새벽 5시에 출발을 한다고 해서 ‘후지 꼬’는 밥을 해서 밥상을 보아놓고는 조반도 먹을 사이도 없이 옷을 챙겨 입고 살며시 방을 나서랴 하자 남편이 잠꼬대를 하였다.
“ 이봐 여기 한잔 따르란 말이야, 어서,”
“ 좋은 꿈을 꾸시는군.”
‘후지 꼬’는 어이가 없었지만 술을 먹고 와서 행패를 부리지 않은 것만 다행으로 여기며 관광차가 와 있을 리 사무소로 급하게 갔던 것이다.
결혼하고 17년이 되었지만 남편은 어떤 모임에 가기만 하면 언제나 외박을 하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차츰 크다 보니 이제는 본인도 잘못을 뉘우치는지 전보다는 폭력의 횟수가 줄어들었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은 어느 날의 극적인 사건 때문이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폭력을 쓰는 장면이 고등학교 다니는 큰아들에게 목격이 되자 아들은 아버지의 팔을 잡고는 술이 깰 때까지 몇 시간을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의 힘에 눌린 아버지는 그 날 호된 기압을 받은 것을 후회하는지 한동안은 술도 먹지를 않고 쥐 죽은 듯이 지내다가는 또다시 일을 벌였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아들의 잘못을 지적하지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것이어서 ‘후지 꼬’는 한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였지만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으로 시집을 왔던 그가 무슨 낯으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 후지 꼬’가 시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엘 가니 아침부터 웬일로 그리도 환자들이 많은지 한참을 기다린 후에 내과엘 들어가니 의사선생님은 증상으로 보아 위내시경이 필요하다고 해서 바로 하였는데 결과는 다음날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이튼 날 조반 후에 바로 병원으로 가니 사진을 판독하던 의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위암 2기로 접어들고 있어 조속히 수술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후지 꼬’는 그 소리에 충격을 받아 이를 어찌 시아버님께 말씀을 드리나 고민을 하다가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의 말에 따라 돌아오는 18일에 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 그래 병명은 뭐라더냐. 혹시 암은 아닌가 모르겠다. 요즘에는 병만 났다 하면 암이라고 한다던데 옛날보다 너무도 잘 먹어서 그런 병이 생기겠지.”
시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나자 며느리는 증상에 대해서 어떻게 전달을 해 드려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 아버님. 아직은 이렇다 할 병명이라기보다는 예방차원에서 수술을 하였으면 좋겠다고 하였어요.”
“ 거 봐라 내가 뭐라더냐, 암이 맞을 것이다. 그러니 수술을 하라고 하겠지, 사람들이 다 하는 수술을 나라고 못할 것도 없다 . 너무 걱정하지 말아, 운명은 재천이라고 하였듯이 나는 살만큼 살아서 이제 죽어도 원은 없지만 외국 타관에서 데려온 너와 오랫동안 함께 살지 못하는 것이 슬플 뿐이다.”
시아버지는 그 말씀을 하시다가 울컥 하시고는 돌아서시는데 옷섶으로 눈물이 뚝 떨어지는 것이다.
“ 아버님 그런 말씀은 하시지 마세요. 아버님은 백 살은 넘게 사셔야 ……,”
며느리도 그 말씀을 드리다가 목이 메어 말끝을 맺을 수가 없었다.
“ 그래. 네 마음이 정 그렇다면 나도 더 살고 싶구나. 아암. 더 살아야 하고말고. 허허.”
그 후 시아버님의 수술은 잘 되고 항암치료를 서너 달을 받고 나니 의사의 말씀으로는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1년여 동안 요양만 잘 하면 건강은 곧 회복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동안 ‘후지 꼬’가 시아버지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한 것은 만약 상태가 좋지를 않아서 누우시게 된다면 병간호로 인해 자기가 하는 일을 전혀 하지를 못하게 될까 봐서였다.
‘후지 꼬’는 지금 남편이 하는 오이 농사를 거들기도 하지만 매일같이 오후에는 초등학교에 출근을 해서 일어 특별반 지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어멈아 매일같이 죽만 먹으니 밥이 먹고 싶구나. 저녁에는 밥을 좀 해줄 수 없겠니.”
시아버지는 수술을 하신지 석 달이 넘자 어느 날부터 며느리를 조르는 것이다.
“ 아버님 조금만 참으세요, 제가 생각하건 대는 석 달 가지고는 부족할 것 같으니 부드러운 음식을 드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 의사선상님이 석 달간만 죽을 먹으라고 하던데 왜 네가 마음대로 죽을 더 먹으라는 게냐. 나는 이제 돌을 씹어 먹어도 소화를 잘 시킬 것 같단 말이다. “
“ 영감이 오래 살고 싶으면 며늘아기의 말대로 당분간 부드러운 죽을 자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시어머님이 한 말씀을 거들자 시아버지는 부엌에 들어왔다가 부지깽이로 얻어맞은 삽살개처럼 눈을 흘기면서 방으로 들어가시는 것이다.
이날 이후 ‘후지 꼬’는 하루 한 끼만은 쌀밥을 부드럽게 해드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쌀밥을 잡수시더니 죽을 잡수실 때보다는 훨씬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다.
“ 며늘애가 밥맛이 제법 돌아온 것을 보니 이제 내 병은 다 나은 것이야, 그러니 앞으로는 나한테 너무 신경 쓸 것도 없다.”
시아버지가 수술 후에 후유증이 없이 건강이 회복하는 기미를 보이자 ‘후지 꼬’는 다음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그것은 술을 먹고 그렇게 주정을 하던 남편이 최근에 와서는 술 마시는 횟수가 줄고 밥도 조금밖에 먹지 않는데다가 잠을 제대로 자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하던 짓을 생각하면 밉살머리시려워서도 돌려다 보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상증상을 발견하였는데 모르는 체를 할 수가 없어서 벌써부터 병원엘 다녀오라고 하였으나 일을 핑계로 이제껏 한 번도 가지를 않았던 것이다.
‘후지 꼬’가 산 설고 물 설은 한국 땅으로 시집을 온 것은 17년 전의 일이다.
일본에서 열아홉 살까지 소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다닌 ‘후지 꼬’는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집이 어려워서 때를 굶을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기차역을 떠날 줄 모를 정도로 열심히 일만 하던 노동자였고 엄마는 식당의 조리사였는데 어떻게 두 사람이 눈이 맞아서 결혼을 하게 되고 아들과 딸을 낳았으나 아들은 열 살 때에 폐병으로 사망을 하고 외동딸인 ‘후지 꼬’만 자라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어느 날 밤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레일에 걸려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으로 한 달 만에 사망을 하였던 것이다.
그때 ‘후지 꼬’는 겨우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을 한 때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의 생계는 어머니가 맡으셨는데 어머니는 원래 처녀 때부터 몸이 약한데다가 출산이후에는 건강이 늘 좋지를 않았다.
더구나 어머니는 일을 많이 하시거나 어디를 멀리 갔다가 오시게 되면 숨이 차서 고생을 하셨는데 어머니의 병은 심장질환이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렇게 몸이 아프시다 보니 생계는 더욱 막막해져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을 하면서부터 ‘후지 꼬’는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신문을 돌리는 일이었다.
신문 돌리기를 처음 시작할 때에는 새벽 일찍 잠이 깨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기란 정말 힘이 들었지만 얼마동안을 하다 보니 이력이 생기고 요령도 터득을 할 수가 있었다.
그는 신문을 돌리면서 자기보다도 새벽 일찍 시장엘 나와서 상점 문을 여는 사람들을 보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어떻게 하던지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1년 일을 하다 보니 수입이 너무 적어서 다른 일을 찾겠다는 궁리를 하던 중에 하루는 빵집엘 들어가서 빵을 사먹다가 종업원을 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세히 알아보니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점원으로 일을 할 수 있는 학생을 구한다는 것이고 보수도 신문 배달보다 배는 받을 수가 있다고 하였다.
그날로 ‘후지 꼬’는 사장님을 뵙고 자신의 처지를 말씀드리자 마침 잘 되었다면서 다음날부터 출근을 하라는 것이다.
빵집의 일은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고 손님이 오게 되면 주문한 빵을 싸서 주거나 홀에서 먹는 이에게는 식탁에다 차려주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빵집이 가장 바쁠 때는 경축일이나 학교에서 소풍을 가고 관공서에서 체육대회를 할 때였는
데 그럴 때는 알바학생들이 일을 도와주었다.
딸이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어 오자 엄마는 그것을 대견해 하시며 그동안 보건소의 약을
꾸준히 복용하여 건강도 먼저보다는 훨씬 좋아지고 있었다.
빵집에서 내리 2년 동안이나 일을 하다 보니 어느덧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에 사장님은 그간 ‘후지 꼬’가 성실하게 근무하였다고 해서 그 보상으로 야간고등학교에
입학과 동시에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면서 경리업무까지 맡도록 하였
다.
‘후지 꼬’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속셈에 소질이 있고 속셈경시대회까지 나갈 정도로 수학
에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경리 업무를 맡게 되니 더욱 책임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날도 아침 일찍 출근을 해서 홀과 사무실을 쓸고 대걸레로 복도청소를 하는데 언젠가 본
듯 한 남학생이 혼자 빵집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후지 꼬’는 일을 하다 말고 어서 앉으라고 권하자 학생은 한참동안이나 주저하더니 아무
말도 없이 쪽지 한 장을 주고는 얼른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청소를 다 하고 난 뒤에 그 쪽지내용이 궁금하여 펴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던 것이니 첫머
리에 「사랑하는 후지 꼬에게」 라는 글이 씌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금방 누가 볼까봐서 얼른 쪽지를 접어서 주머니에다 넣었는데 갑자기 얼굴이 달아 오
르고 가슴이 후당당 뛰는 것이다.
‘ 후지 꼬’는 그날 하루 종일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여자 아이들과는 보통으로 어울리는 편이었지만 남학생들과는
초등학교 동문회 때에 나가서 만난 것이 고작이었다.
자기의 살아가는 형편이 언제 한가하게 친구들을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겨를도 되지
못하였지만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도 이성에 대한 호기심 같은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
아 왔던 것이다 .
이날 집으로 돌아온 ‘후지 꼬’는 낮에 받은 쪽지를 주머니에서 다시 꺼내보았다.
거기에는 남학생의 이름이 적혀 있고 빵집을 다니다가 ‘후지 꼬’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제발
한번만 만나달라는 애원이 섞인 내용이었다.
‘후지 꼬’는 그 쪽지를 보고서야 여학교 때에 또레들이 남학생의 사진을 서로 보여주기도
하고 함께 놀러 다닌다는 말을 하던 기억이 나는 것이다.
하기야 '후지 꼬' 또한 고등학교로 올라오면서부터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내릴 때에 남학생
들을 만나게 되면 이상야릇한 감정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학생은 벌써 여러 번째 이 빵집엘 드나든 것 같아서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 보니 생각나
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 학생은 키가 큰 편이고 얼굴이 유난히 흰데다가 안경을 썼는데 과학자처럼 외모가 또렸
한 학생이었다.
‘후지 꼬’는 쪽지를 받고 난 후에 어찌 할까 하다가 모르는 체 한다면 도리가 아닐 것 같
아서 한번 만나주기로 작정을 하였다.
마음을 그렇게 정하고 나자 이제나 저제나 하고 남학생이 언제 나타날까하는 기대를 하게
되면서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살펴보았지만 기다리는 학생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이러다 보니 마음을 잡지 못하고 어떤 때는 식탁모서리에 옆구리를 긁히기도 하고 또 한 번
은 의자 다리에 걸려 넘어져서 빵 접시까지 깨트릴 정도로 정신은 그 학생에게 가 있었던
것이니 손님들에게 민망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쪽지를 전한 학생이나 자기를 사랑한다는 학생이 둘 다 아무리 기다려
도 오지를 않는 것이다.
한주일이 가고 한 달이 지나도 나타나지를 않자 한편으로는 잘 알지도 못하는 학생을 생각
하는 자신이 우습기도 하면서 혹시 병이 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 한통이 걸려왔는데 그때 쪽지를 전한 학생이라고 하면서 ‘후지 꼬’에
게 쪽지를 쓴 학생이 지금 입원을 하고 있으니 한번만 와달라는 부탁이었다.
‘후지 꼬’는 마음이 착잡하면서도 그 학생이 무슨 병으로 입원하였는지가 궁금하긴 하였지만 그를 찾아 간다는 것이 도무지 마음에 쎙기지를 않았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니 모처럼의 부탁을 져버리는 것도 도리는 아닐 것 같아서 한번쯤 방문하기로 하고 병원으로 들어서니 먼젓번의 학생이 그를 맞았다.
“ 먼저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후지 꼬’씨를 사랑하던 친구가 오늘내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태에 놓여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 오늘 내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요. “
“ 급성폐혈증이라고 합니다.”
중환자실 안으로 들어가니 환자인 학생은 이미 혼수상태로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한쪽 의자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일어서는 것이다.
“ 학생이 ‘후지 꼬’상이에요. 이렇게 예뻐 놓으니…내가 아이의 엄마에요.”
아주머니는 ‘후지 꼬’를 붙들더니 눈물부터 흘렸다.
“우리 아이가 그렇게도 학생을 좋아했는데 갑자기 병이 나는 바람에 한번 소원을 풀지도 못하고 죽을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을 하였던 거예요,”
학생의 어머니는 중간 중간 말을 잇지 못하면서도 ‘후지 꼬’의 손을 잡은 채 널리 이해해 달라고 몇 번이나 말을 하였다.
‘후지 꼬’도 학생의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하자 가슴이 찡하면서 안됐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지만 어떤 위로의 말도 하지 못했다.
‘후지 꼬’가 잠시 침대 앞에 섰지만 학생은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 산소마스크는 요동이 없고 언젠가 유심히 본 듯한 얼굴색은 하얀 채로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후지 꼬’는 용기를 내서 그의 손을 가만히 만져보니 맥박은 있는 듯 하였지만 손의 감각은 애기 손처럼 부드러웠다,
한참동안이나 서 있던 ‘후지 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학생의 어머니는 ‘후지 꼬’의 손을 잡고는 찾아주어서 고맙다고 하였다.
그날 오후 학생은 ‘후지 꼬’가 병원을 다녀간 지 세시간만에 사망을 하였다는 소식을 다음 날에야 들을 수가 있었다.
그 말을 들으니 그의 모습이 떠오르며 그가 죽기 전 정신이 맑았을 때 자기의 이름을 몇 번인가 부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니 그가 너무도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지 꼬’는 그런 일이 있은 후에 한동안은 어떤 마력에 걸린 사람처럼 일이 손에 걸리지를 않고 학생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렸다.
그 학생에게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그가 세상을 하직하고 나니 ‘후지 꼬’의 마음은 밤마다 괴롭기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안면이 있는 한 아주머니가 ‘후지 꼬’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만나보니 그동안 학생으로 인해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을 소상하게 알고 있다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는 이따금 예기치 않은 난관에 부딪치기도 하니 그럴 때에는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곳으로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후지 꼬‘는 그런 곳이 있다면 따라가 보겠다고 하자 그곳이 한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통일교회‘라고 하였다.
‘한국의 통일교회?’
‘후지 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한국이요” 라고 하니 아주머니는 그렇다고 하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후지 꼬는 소학교 4학년 때의 일이 생각나는 것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던 어느 날 ‘후지 꼬’는 반이 갈리면서 새 선생님이 누구일까를 상상하며 교실로 들어가니 처음으로 그날 전학을 왔다는 ‘가네우미’라는 아이와 짝이 되어 앉게 되었다.
‘가네우미’는 키는 작지만 순박하게 생기고 ‘후지 꼬’와 짝이 된 것을 무척 좋아하는 것이어서 이날 ‘후지 꼬’는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가네우미’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인데 어느 허름한 창고 같은 집안에서 순경 둘이 젊은 사람의 손을 묶어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에 이 광경을 본 세 사람이 “조센징이구먼.” 하면서 경멸의 눈으로 그 청년을 보는 것이었다.
‘후지 꼬’는 ‘조센징’이란 말에 대한 뜻을 잘 몰라서 집에 가서 어머니께 물어 보니 일본에는 ‘조센징’이 많이 살고 있는데 아득한 옛날부터라고 하셨다.
더구나 1905년에 한일 합방을 강제로 체결하면서 조선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며 1940년대에 일어난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일본이 조선의 청년들을 징용으로 끌어다가 홋카이도를 비롯하여 각 지방의 지하 탄광에서 탄을 캐는 광부로 부렸는가 하면 남양군도의 총알받이로 내몰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조선의 초등학교 고학년 소녀들을 강제로 끌어다가는 정신대라는 명칭으로 일본 군대의 성노리개로 삼았던 것이니 일본사람들은 두고두고 후회를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후지 꼬’는 그 다음부터 조선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장차 조선의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하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엘 가서 복도엘 들어서니 아이들 여럿이 한 아이를 둘러싸고 발길질을 하는데 알고 보니 그 아이가 ‘가네우미’여서 깜짝 놀랐다.
남자아이들은 발길질을 하다가 울고 있는 ‘가네우미’에게 침을 뱉고는 욕설까지 하였다.
“.야 조센징 이 더러운 계집애야. 다시는 우리 학교에 오지 말란 말이야.”
‘후지 꼬’는 자기의 짝이 놀림을 당하는 것을 보자 화가 나서 한 남자 아이의 궁둥이를 발길로 걷어 내차니 저만치 나가떨어지자 바로 일어나면서 이번에는 ‘후지 꼬’에게 욕을 하였다.
“야. 이 계집애야, 조센징과 짝이 되더니 조센징이 다 되었구나, 너 조센징이 그리 좋으면 이다음에 조선으로 시집이나 가거라. 알았냐.”
‘ 후지 꼬’는 그날 너무도 분해서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서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리자 어머니는 그 아이들이 좋지 않은 아이들이라고 하시며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 지금 바다 건너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 이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나뉘었는데 그 세 나라 중에서 일본은 백제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단다. 오늘의 일본 문화는 그렇게 해서 발전하였고 지금의 교토나 나라에는 백제의 전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데 일본의 왕족도 백제에서 건너온 분들이 많으며 너의 윗대할아버지도 그들의 후손이라는 말씀을 할아버지에게서 여러 번 들었단다.”
어머니는 그날 조선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그 소리를 들은 후에 아이들이 ‘가네우미’를 놀리게 되면 ‘후지 꼬’는 더욱 ‘가네우미’의 편이 되어서 아이들과 자주 싸웠던 것이다.
‘후지 꼬’는 가끔 ‘가네우미’네 집에도 가보았는데 집은 가난하고 어머니는 병석에 누워 계셨지만 ‘후지 꼬’를 보시고는 그렇게도 반기시며 꿀물까지 타서 주셨다.
그런데 어느 날 ‘가네우미’와 학교를 가는 도중인데 그가 말하기를 집안의 사정으로 인하여 1주일 후에 한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면서 나무로 만든 참빗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 너 정말 이사를 가는 거야. “
‘가네우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 이다음에 한국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후지 꼬’는 ‘가네우미’와 헤어지게 되는 것이 얼마나 서운한지 떠난다는 날 기차역까지 가서 배웅을 하였는데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아련하게 ‘가네우미’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주머니가 소개를 해서 알게 된 분은 ‘문선명‘ 통일교회의 선생님으로 일본의 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분의 평화정강에 대해서 지지를 보낸다고 하였다.
‘후지 꼬’는 그때까지 마음이 괴로운 상태여서 누구에게 의지를 하고 싶었는데 교회에 나가기 시작을 하니 차츰 그곳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것 같았다.
더구나 이곳을 통하여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독고노인들이 사는 곳에 가서 봉사활동도 하게 되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죽은 학생의 생각에서도 벗어나기 시작을 하였다.
‘후지 꼬’는 이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평소에 원하고 있던 간호사가 되기 위해서 6개월 단기코스 과정의 원서를 냈던 것이다.
그가 간호사 조무원의 원서를 낸 것은 어머니의 건강을 챙겨드리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장차 그의 희망 사항인 해외파견 봉사활동을 하는데도 필수적으로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6개월의 단기 코스지만 ‘후지 꼬’는 간호사자격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공부하는 중에 특히 전염병 예방 학을 선택하였고 간호사 자격을 획득한 후에는 요행이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서 근무를 하게 됨과 동시에 어머니를 간호해드릴 수가 있어서 너무도 좋았다.
그는 간호사가 되면서 그동안 후원해 주신 빵집 사장님께 너무도 많은 은혜를 입었다는 인사를 드리자 사장님은 ‘후지 꼬’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셨다.
그 무렵 교회를 소개해주던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에 그분은 생각지도 않은 제안을 하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한국 사람과 결혼을 하라는 것이다.
너무도 뜻밖의 제의에 ‘후지’꼬는 아무 대답도 하지를 못하고 있자 그 분은 단도직입적으로 신랑 깜이라는 사람의 사진까지 보여 주었는데 그의 외모는 반듯한 미남으로 키는 ‘후지 꼬’보다도 훨씬 크며 그에게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가 많다고 하였다.
이 일이야말로 ‘후지 꼬’ 로서는 평소에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일이어서 그날 저녁에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려드린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는 단지 딸 하나뿐인데 어떻게 너를 해외로 시집을 보내겠느냐면서 전적으로 반대를 하시는 것이었으니 ‘후지 꼬’ 또한 어머니의 판단이 맞는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도 아주머니는 한국에 대해서 좋게 설명을 해주시면서 계속해서 결혼 권고를 하더니 ‘후지 꼬’가 들은 체도 하지를 않자 그 다음에는 어머니를 만나서 어떻게 구슬렸는지 하루는 어머니가 네 소원대로 한국으로 시집을 가도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후지 꼬’는 그런 생각은 이미 머리에서 지운지 오래라고 말씀을 드리자 어머니는 전과는 달리 단호하게 말씀을 하셨다.
“ 아니다. 그것은 잠시 엄마가 잘못 생각을 한 것이다. 너의 뿌리는 분명히 한국이라고 하였으니 이제 너는 네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 맞는 말이다.”
“ 엄마 !”
딸은 그날 처음으로 어머니의 깊은 심정을 알 것 같아서 어린 아이처럼 어머니 품에서 오래도록 떨어질 줄 몰랐다.
사실 ‘후지 꼬’는 처음에는 어머니의 진심은 그게 아닐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고 그래서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어머니는 이미 그 여인에게 약속을 하였으며 어머니도 딸 덕에 한국엘 자주 가보고 싶다는 말씀까지 하는 것이다.
문득 ‘가네우미’가 울고 있을 때의 옛날의 일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 야! 너 조센징이 좋으면 조센징에게 시집가란 말이야.」
‘후지 꼬’는 드디어 12월 크리스마스전날 서울의 세종호텔에서 합동결혼식의 일원으로 면
사포를 썼던 것이다.
남편을 억지로 병원으로 데리고 가던 날 아침은 다른 날보다도 따야 할 오이가 너무 많아서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일이 끝나고 나서 겨우 남편을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가게 되니 얼마만의 외출인지 몰랐다.
남편은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를 않더니 병원엘 거의 다 도착할 무렵에 아내에게 한마디를 하였다.
“ 어디서 잠시만 쉬어서 갑시다.”
지금까지 남편이 이렇게 부드럽게 표현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는 일이어서 ‘후지 꼬’는 운전을 하면서도 슬쩍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후지 꼬’는 시간이 바빴지만 모처럼 쉬어가자는데 그냥 갈 수가 없어서 잠시 간이휴계소에 차를 세웠다.
그러자 남편은 화장실엘 갔다 오더니 커피를 한잔 먹고 싶다는 것이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두 사람이 커피를 빼가지고 의자에 앉자 남편은 한참동안이나 아내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손을 잡는 것이어서 ‘후지 꼬’는 소스라쳐 놀라고 말았다.
남편은 언젠 부턴가 다정하게 대한 적도 없거니와 말도 별로 하지 않는 가운데 한주일이 멀다하고 술을 마시기만 하면 맹수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로 변하던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남편의 모처럼의 행동을 그대로 받아드리기가 어려워서 ‘후지 꼬’는 손을 빼려고 하였지만 남편은 더욱 손아귀에 힘을 주면서 ‘후지 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후지 꼬’가 두 번째 놀란 것은 그의 눈에는 어느 결에 눈물이 그렁그렁 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여보 미안해. 그동안 내가 너무 잘못한 것이 많았어. 용서해 주어요,”
그의 말은 힘이 없었지만 그 순간만은 진심어린 말로 들리고 있었다.
‘후지 꼬’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나 같은 놈은 진작 죽었어야 하는 건데 이제껏 살아서 당신을 못살게만 하였으니 정말 미안해. 용서해 주어요.”
남편의 죽는다는 소리에 ‘후지 꼬’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까지 그의 폭력으로 인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서 최근에는「저런 인간이 왜 죽지를 않는 거야, 귀신은 뭘 먹고 살기에 데려가지 않는 거야 」하는 원망을 속으로 하긴 하였지만 그가 정말 죽어야 싸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를 않았던 그였다.
그런데 남편은 생전 처음으로 아내의 손을 잡고는 잘못해서 죽었어야 마땅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 후지 꼬’가 가만히 생각을 하니 지금까지 그에 대한 추억이라고는 결혼하고 한 1년간은 말을 배우느라 서로 손짓발짓을 해가면서 지난 것이 재미라면 재미였다.
그 후 아이를 낳느라 고생을 하고 남편의 농사일을 돕느라 할 줄도 모르는 키질이며 절구질을 하다가 손목이 신 적도 있고 가을 김장을 담굴 때에는 일본의 스모선수보다도 더 배가 부른 김치 독을 들어서 물로 닦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지 들다가 뒤로 나가자빠진 적도 있었다.
한번은 일꾼을 얻어서 산골 천수답에 모를 내기 위해서 함지박에다가 점심을 가득 담아서 이고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뜨거운 국 국물이 얼굴에 흘러서 화상을 입었는데 지금도 그 자리가 날이 춥거나 더우면 벌겋게 변하는 것이다.
‘후지 꼬’는 자라날 때부터 동네 어른들에게 착하고 귀엽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지만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미인대회에 나가 보라는 권유까지 받을 정도로 얼굴도 예뻤다.
그러나 언제 자신에 대해서 가꿀 사이도 없이 한국으로 시집을 와서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 산골에서 농사꾼의 아줌마가 된 것이다.
병원에 도착을 해서 의사의 진단을 받으니 의사는 즉각 시아버지처럼 내시경을 서두르라고 하여 다음날 내시경을 하고 나서 결과를 알아보니 남편은 간경화로 1년을 더 살지 못한다는 것이며 지금 상태로서는 수술도 할 수가 없다는 진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나자 ‘후지 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진작 그에 대한 건강관리를 챙겨주지 못한 것이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남편이 술을 먹은 지는 이미 오래 되었지만 날마다 일터에 나갈 때에는 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잘도 먹기에 건강에는 이상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 2년 전 부터 밥을 먹으면 속이 쓰리고 소화가 잘 안 된다는 말을 이따금씩 하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그냥 들어 넘겼던 것이다.
“ 간경화는 술로 인해 생긴 병이며 지금으로서는 호전된다는 기대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남편의 뒤를 따라 병원을 나오면서 얼마 안 있어 남편이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병원에 다녀온 이후 한동안은 말도 잘 하지를 않았으며 밥상을 차려도 식욕이 없다면서 수저를 대려하지 않았다.
한 주일에도 서너 차례 술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맥을 놓자 시부모님이 걱정을 여간 하는 것이 아니었다.
‘후지 꼬’도 매일같이 근심과 걱정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를 못하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남편이 보이지를 않았다.
근래에 와서는 늦잠을 자기도 하지만 밭에도 나가지 않던 사람이 보이지를 않자 시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다.
“ 아범이 없다니 간밤에 잠이나 제대로 자더냐.”
“ 예. 잠은 초저녁부터 내쳐서 잘 자는 것 같았어요.”
“ 날마다 누워 있다 보니 갑갑하기도 하겠지. 식전에 혹시 비닐하우스에 가지 않았을까.”
시아버지의 말씀마따나 비닐하우스에 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다섯 채의 비닐하우스를 하나하나 살피던 중 맨 나중의 하우스 문을 열던 ‘후지 꼬’는 고만 “악” 소리를 치며 기절을 하고 말았다.
시아버지가 그 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니 이게 웬일인가 ? 아들이 쓸어져 있는 주위에는 농약병이 놓여 있었다.
병원엘 갔다 온 이후 남편은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여보 이게 웬일에요. 누가 이렇게 하라고 하였어요. 네? “
‘후지 꼬’는 남편의 목을 끌어안고는 몸부림을 치면서 통곡을 하였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도 아들을 끌어안고 있는 며느리 곁으로 다가가서는 한참동안이나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셨다.
신문이나 티브이에서 생활고나 병고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자살을 시도한다는 소리를 듣긴 하였으나 남편이 그렇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였으랴!
나중에 경찰관이 와서 확인을 한 바에 의하면 메모 한 장이 주머니에서 나왔는데 “ 미안하오. 아이들이나 잘 보살펴 주시오” 라는 문구였던 것이다.
‘후지 꼬’는 남편이 유명을 달리하자 그것이 자기의 잘못으로 인한 일 인양 장사를 지낸 뒤에도 한동안 바깥출입도 하지를 않았다.
그런데 남편의 장사를 지나고 난지 열흘 만에 뜻밖에도 ‘후지 꼬’는 또 다른 비보를 들어야 했으니 일본의 단 한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였다.
“ 어머니. 어머니마저 가시다니요.”
‘후지 꼬’는 너무도 불쌍하게 사시다가 딸의 덕도 제대로 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하니 뼈가 녹아나는 것 같은 아픔이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었다.
한국으로 시집을 온지 벌써 17년이 되었지만 한번을 신랑하고 어머니를 뵙고자 찾아간 것 외에는 지금껏 가지를 못했으니 어머니가 얼마나 서운해 하셨을 것이랴!
타국으로 딸 하나 있는 것을 시집을 보내시면서 어머니는 속으로 많이도 우셨을 것이지만 겉으로는 너의 소원을 이루었으니 앞으로는 잘 살아달라고 차에 오르는 딸에게 몇 번이나 부탁을 하시던 어머니였다.
그런데 그 어머니를 이제는 지상에서는 다시 뵈올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 불효를 어떻게 용서를 받는단 말인가.
세 남매들이 외할머니 장사에 동행을 한다고 해서 함께 인천공항으로 떠나던 날 ‘후지 꼬’는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였다.
金 斗 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