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지리산 천년 3암자길
 
 
 
카페 게시글
불교 경전과 이해 스크랩 능인선원 지광스님 천수경 강의
향상일로 추천 0 조회 378 15.02.06 20: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천수경【 千手經 】    

능인선원 지광스님 천수경 강의


한국불교는 관음신앙이 근본

천수경은`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경《千手千眼 觀自在菩薩 廣大圓滿 無碍大悲心 大陀羅尼經》?의 약칭입니다. 경의 이름에서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이 천수경은 관자재보살님【관세음보살의 별호】의 무애대비심을 펼쳐 보인 경 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무량무변한 대비심과 위신력을 펼쳐 보이시는 가운데 부처님 세계의 거룩하고 장엄함을 함께 공부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경입니다.

가끔 사람들이「스님! 관세음보살님은 누구이시고 부처님은 누구이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부처님의 거룩하신 마음 가운데 대자대비의 화신으로 부처님의 분신과 같은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은 한 몸의 다른 이름이라 이해하셔도 관계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이해하시기 좀더 편하실까요? 나라에 대통령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혼자서 나라를 다 다스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각 파트별로 책임자를 두어 그 부서만을 다스리게 됩니다. 외무부장관, 내무부장관,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대통령과 장관은 몸은 다르지만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한마음이 되어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과 부처님의 관계는 대충 그렇게 이해하시면 편하실 것입니다.

아무튼 천수경은 이러한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하신 소망이 가득히 담겨져 있는 경입니다. 그러기에 천수경을 독경하고 이를 실천하는 공덕은 참으로 무량한 것입니다.

그 내용 하나하나를 살펴 보면 관세음보살님의 중생들을 제도하시려는 뜨겁고도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득히 읽을 수 있습니다.

천수경을 통해 관세음보살님을 공부하면서 우리들은 거룩하고 장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천수경을 통해 참다운 수행자의 삶을 깨닫고 영원한 성불의 길을 걸어 나가시길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우선 천수경 본경에 들어가기 전에 천수경의 전반적인 내용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한국불교는 언제 어느 경우에서건 항상 천수경을 지송하고 있고 또 반야심경도 독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다 양이 조금 많긴 하지만 `관세음보살 보문품경?이라고 하는 중요한 경을 항상 공부합니다.

이들 세가지 경《經》은 모두 관세음보살님을 주된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경【요약해서 천수경】에서도 그렇고 반야심경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항상 공부하는 관음경의 내용도 역시 관세음보살님의 위신력을 예찬하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저 오랜 과거로부터 한국불교는 관음신앙이 주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제4권 자장율사조에 보면 자장율사의 아버지가 후사《後嗣》가 없어서 지극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분의 관음상《觀音像》을 조성한 뒤 자장율사를 얻었다고 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자장율사는 이렇게 불연《佛緣》이 두터운 집안에서 태어나 아주 대단한 명승으로 발돋움하신 분입니다.

또 신라 시대의 의상대사 역시 관음신앙의 대표적인 인물로 많이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저 낙산사의 홍련암은 의상대사와 관련 있는 설화가 지금도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습니다. 홍련암에서 의상대사가 목숨을 내건 기도를 한 끝에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다고 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의상대사의 백화도량발원문《百花道장發願文》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몸과 마음을 다해서 관음대성을 지극히 받들어 섬깁니다.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관세음보살 대비신주를 외우고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생각하며 다 함께 관세음보살님의 원통삼매에 들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은 스님들께서 관세음보살님 기도를 하기 전에 `나무원통교주 관세음보살, 나무 도량교주 관세음보살, 나무 원통회상 불보살?을 기도하시는 내용을 들으신 적이 계실 것입니다.

원통《圓通》이란 말은 그 분께 기도 드려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두루 다 통한다는 말입니다. 또 관음기도를 올릴 때에 `나무 보문시현 원력홍심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보살? 이렇게 정근하기도 합니다. 보문시현《普門示現》의 뜻은 언제 어느 곳에나 나투시지 아니하는 곳이 없으시다는 말씀입니다. 또 원력홍심《願力弘深》이란 원력이 대단히 넓고도 깊으셔서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시는 분 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 구고구난《救苦救難》 역시 모든 중생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고통과 액난을 소멸시켜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발원을 관세음보살님 전에 끊임없이 기도 올리면 두루 성취되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현실세계 모든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담겨져 있는 고통들을 제거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열반으로 이끌어 주시는 그러한 분이 바로 관세음보살님이십니다.




자력문, 타력문

관음신앙에는 대체로 두 가지 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력문《自力門》이고 또 하나는 타력문《他力門》입니다. 현실을 살아가는데 우리가 정말로 열심히 기도 정진하게 되면 깨우침이 돈독해집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참회 기도를 하게 되면 마음 가운데 스스로를 개선 광명 시켜 주는 힘이 발동됩니다. 마음이 세척되고 정화되어지는 그런 능력이 생겨납니다. 그 같은 수행문이 바로 자력문입니다.

자력문을 열심히 닦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고 공부가 부족하며 제대로 닦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타력문도 함께 펼쳐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관세음보살님께 끊임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 속에 정말로 관세음보살님과 하나되는 마음이 일어나고, 그 결과 관세음보살님의 가호지묘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타력문의 경우를 이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바위 덩어리를 그대로 바닷물에 던져 넣으면 풍덩 소리를 내며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거운 바위라 하더라도 배위에 실으면 빠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죄와 업장이 무거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관세음보살님이라는 배를 타게 되면 고통의 바다를 건너 부처님의 세계에 닿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加被力》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타력문도 따지고 보면 자력을 바탕으로 한 타력입니다.

우리 불교는 이렇게 자력문 타력문의 모든 차원이 다 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불교에서와 같은 자력문의 차원은 전혀 부정됩니다.「인간이 어떻게 인간의 죄를 소멸시켜 줄 수 있겠는가?」하는 사도 바울의 말 그대로 말입니다. 신교와 구교,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점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들의 종교가 마음이라고 하는 세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의 피조물이기에 신의 뜻이 아니면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상은 인간 스스로의 자력문을 철두철미하게 부정합니다. Creator【창조주】에 의한 Creature【피조물】은 아무러한 권한도 없습니다. 철두철미한 2원론은 인간의 가능성을 결단코 부정합니다. 불교는 투철한 일원론이기에 마음과 우주의 동질성 속에서 자력문과 타력문 양자를 인정합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의미

의상대사의 백화도량발원문을 보더라도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신라 시대 때부터 관음신앙이 주조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무량한 선조들은 모두 관세음보살님 전에 끊임없이 기도하고 정진하는 마음을 통해서 영원의 길을 걸어갔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수경의 주류를 이루는 사상들은 대승불교의 대도인이라고 하는 용수《龍樹》라거나 제바《提婆》라고 하는 분들도 다 옹호를 했습니다.

천수경은 참으로 대승과 소승의 모든 생활불교의 고전이며, 참회와 서원을 통한 현세구복《現世求福》불교, 모든 사람들의 액난과 고통 등의 속박으로 부터 해탈시켜주는 대승불교의 실천적 내용이 모두 담겨져 있는 경전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천수경에 나오는 내용들 가운데 천수경에 들어있는 천수대다라니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가질 것을 말씀 드립니다. 이 천수대다라니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요즘 학자들 가운데 왕왕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 천수경에 나오는 다라니는 산스크리트어인데 이 산스크리트어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는 과정 가운데 언어의 표현상 원어의 음을 많이 손상한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한국의 불교는 천수경을 산스크리트어에 가깝게 독송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학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결코 올바른 관점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님의 심심미묘한 세계인 천수다라니의 세계는 이른바 부처님의 무상심심미묘한 세계이고, 인간의 언어로는 해석이 불가해한 세계입니다.

그리고, 다라니 속에는 미묘 불가사의한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 내용이 어떠한 내용이건 간에 우리 선조들은 이 천수대다라니를끊임없이 독송하셨고 과거에도 무량한 도인들이 이 경을 통하여 도인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산스크리트어 원어로 정확히 독송한다고 해서 더 잘 들으실 수 있으실까요? 분명한 사실은 독송하는데 마음의 정성스러움이 얼마나 깃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언젠가 법회 시간에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멸치를 기둥에 끼워 넣은 뒤 그 기둥을 향해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기만 해도 관세음보살님이 현신《現身》하신다고 했습니다

일본불교 영험록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일본에서는 막부시대에 지방의 여인들을 간택하러 다니던 채홍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채홍사에 뽑혀 에도【동경】으로 올라온 여인들 가운데 귀족 집안이나 왕의 집에 뽑혀 일생을 발복《發福》하는 수가 많았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딸이 간택되는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알았답니다. 그러나 자식과 생이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딸이 간택된 경우 우선은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날 한 부인이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중에스님 한 분이 지나가기에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간택된 딸의 안녕을 위해 도움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스님이 종이를 꺼내`나무관세음보살? 일곱 글자를 써 주시더랍니다. 어머니는 이를 소중히 가지고 와 복 주머니에 넣어 딸에게 주면서 아무리 괴롭더라도 꼭 이를 지니고 관세음보살님께 항상 기도하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딸아이가 동경으로 올라가서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그 종이를 넣은 주머니가 걸리적 거리더랍니다. 생각다 못해 기둥 터진 곳에넣어두고 그 기둥 앞을 지날 때 마다 합장배례 했다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며 일을 하니 그 소녀의 얼굴이 예뻐질 수 밖에 없었겠지요.

따라서 그 귀족집 아들이 이 소녀를 너무도 사랑하게 되었고 몸종들이 이를 시샘 했었나 봅니다. 그들은 왜 저렇게 예뻐지는가 하고 그 원인을 찾게 되었고, 항상 나무 기둥에 대고 절을 하는 소녀의 이상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기둥을 뒤져 보니 거기에서 `관세음보살?이라 적힌 쪽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약을 올리기 위해 그 종이에 멸치를 싸서 넣어 두고는 `멸치에 대고 절을 한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래도 그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 소녀에게서 반응이 없자 다른 소녀들이 멸치임을 확인시켜 창피를 주려고 기둥에서 그 종이를 꺼내 펴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관세음보살님께서 직접 현신을 하셨다고 합니다. 믿는 마음이 돈독하면 쓰레기통에서도 관세음보살님께서 현신하신다는 가르침이 결코 헛말이 아님이 증명된 것입니다. 결국 그 소녀는 그 집 안주인이 되고 그 남편은 왕의 자리에 까지 나아갔다고 합니다.

일본의 예를 들어 말씀 드렸습니다만, 우리가 관세음보살님 전에 기도하거나 삼세제불보살님전에 기도하거나를 가리기 전에 우리의 정성스러운 마음이 문제입니다. 근자에 이름을 떨쳤던 어느 큰스님 한 분도 참선을 해서 끊임없이 화두를 챙기면서도 득력을 못해 안타까워 하셨답니다.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하신 스님께서는 다라니 기도를 통해 힘을 얻어 견성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이 천수대다라니의 위력과 공덕은 참으로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계신 중요한 진언들이 천수다라니에 다 들어있습니다.




대다라니의 공덕

천수다라니를 끊임없이 독송하게 되면 신. 구. 의《身`口`意》 3업【여러분이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지은 모든 3업】을 끊임없이 소멸시켜 청정한 마음을 지켜나갈 수 있으며, 현실적인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또 천수다라니를 독송하게 되면「악마와 천마가 침범하지 못하고 왕생정토하며,무생보《無生報》을 이루고 현생과 내생에 무량한 복덕을 이룰 것이며 모든 병을 다 고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수다라니에 대하여 여러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아직 수행자였을 때 부처님께서 관세음보살님께「선남자야, 너는 마땅히 대자대비 신주 천수다라니를 수지하여 미래의 오탁악세에 일체 모든 중생들에게 액난과 사마《邪魔》, 마장들을 퇴치하고 타파해서 그들을 크게 이롭게 하라」이렇게 명령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천수경의 다라니와 천수경의 내용에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들어있습니다.

천수다라니의 공덕을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천수다라니를 받아 지닌 사람이 길을 가다가 바람을 쏘이고 또 그 몸이나 옷에 스친 바람이 다른 중생들 몸에 스쳐 지나가서 그 기운이 어떤 중생의 몸에 닿게 되었을 때, 그 중생의 일체 중죄 악업이 소멸되어지고 항상 부처님 곁에 태어나 법문을 듣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끊임없이 천수경을 모시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하게 되면 그 공덕이 무량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언제 어느 곳을 가게 되더라도 여러분의 몸에 스친 바람이 또 다른 사람의 몸에 스치게 될 경우, 그 사람에게 까지 공덕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어느 곳에서나 천수경을 독송하고 집에서나 법당에서나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금강경이나 다른 경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수경을 독송한 공덕은 이와 같이 무량한 것입니다. 천수경을 독송하면서 몸과 마음이 익어지면 여러분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부처님의 알수없는 `기운《氣運》?이 몸에 배이게 됩니다. 그 결과 집안에 있는 남편과 아들 딸들에게도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입니다.

기운이라는 의미를 우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그 사람 참 분위기 있는 사람이야」「그 사람 참 독특한 분위기를 가졌어」등등의 얘기를 생각해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지녔습니다.

모든 물질들은 물질파【Broiglean wave《註:프랑스의 과학자 루이드브로이의 이름을 따서 브로이언`웨이브라 부름》】를 방출한다 하는데 사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정진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는 성스럽고 숭고한 분위기가 풍기고 함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에게선 저급한 분위기가 풍겨 나옵니다.

예불문강의에서 말씀 드렸듯이 계를 잘 지키면 계《戒》의 향《香》이 나옵니다. 그렇듯 열심히 기도 정진하는 아내의 몸과 마음에서는 숭고한 분위기가 풍겨 나와 가족들을 평안케 할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는 인간이 풍기는 분위기의 문제에 가일층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분위기를 창조하는데 많은 슬기를 도모해야만 하겠습니다.

마음 가운데 내재하는 우주 안테나

둘째로, 천수다라니를 항상 받아 지송하는 사람은 부처님 몸을 받을 사람이고 부처님이 되실 분이니 항하사제불《恒河沙諸佛》과삼세제불《三世諸佛》들이 항상 사랑하시고 아껴주신다는 것입니다. 천수경을 끊임없이 받아 지니는 사람은 항상 몸과 마음에 부처님의 광명을 갈무리하는 사람입니다. 천수경을 읽고 닦으면 부처님의 무상심심 미묘한 도리를 마음에 간직하게 되니 그 마음이 항상 밝게 됩니다. 광명을 항상 간직하고 갈무리하는 몸이 되어집니다. 광명은 지혜를 말함인데 모든 부처님들께서 항상 큰 지혜의 빛으로 비추어 주시는 까닭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도리입니다.

항상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하는 얘기가 바로 이러한 이유입니다.

기도를 자꾸 해나가다 보면 부처님 경계를 항상 느끼게 됩니다.

전혀 그 같은 의도를 가지지 않았는데도 스스로도 숭고하게 느껴지는 부처님의 말씀이 흘러 나옵니다. 제가 법회를 하고 난 뒤 테이프를 들어 볼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묘한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나 강연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법회를 많이 하고나 면 녹음테이프를 다시 듣기가 싫습니다. 법회하는 준비 과정부터 끝날 때 까지 하도 힘이 드니까 법회가 끝나면 두번 다시 듣기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 제가 법회한 녹음테이프를 다시 한번 들어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참으로 희한한 것을 많이 느낍니다. `내가 어떻게 저 얘길 했을까, 저건 전혀 생각지도 않던 얘긴데?하고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참으로 훌륭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언가 알수없는 세계의 전파가 내린 것이라는 사실을 저는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일종의 안테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 자신 부처님의 염파나 부처님의 파장을 받는 어떤 레이다라 할지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준비를 해서 법회를 할 때도 있습니다만, 법회 때마다 그 힘에 맡겨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이와 같은 도리 때문에 말씀 드립니다. 부처님의 지혜와 광명을 갈무리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면 마음이 맑아지니까 부처님의 거대한 파장을 슬기롭게 받아 들이게 됩니다.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몸과 마음을 다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정진하며 살아 가라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부처님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강남에 처음 들어와서 년 정도 지날 때 까지는 법회를 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내가 알면 얼마나 알까, 쥐꼬리만한 지식을 가지고 무얼 한단 말인가?하는 자괴심 때문이었습니다.

항상 두려움이 앞섰습니다.어떤 때는 법상에 서면 쭈뼛쭈뼛 얼어 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스럽게 세월이 흐르니까 그런 것이 점점 잦아 들더군요. 열심히 기도하다 보니 부처님의 세계, 거룩한 세계와 통하는 채널이 열리는 모양이었습니다.

에디슨이 `99%의 노력을 하는 자만이 1%의 영감《靈感》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던 얘기가 실감이 가더군요.

최근 들어 보고된 의학연구서에 보면 실제로 인간의 두뇌에는 송수신 장치가 완비돼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 두뇌의 표면에는 수상돌기라 불리우는 수많은 안테나가 가득히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같은 안테나가 제대로 작동되기만 하면 그 능력은 대단히 탁월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두뇌 안테나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길이 바로 기도와 정진인 것입니다. 무한대로 강화된 안테나를 지니신 분이 부처님이시기에 그 분께서는 우주를 관장하는 놀랍고도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니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갖가지 수행법, 이를테면 참선, 명상 등은 강한 집중력의 양성을 통해 안테나 능력을 강화하는 방법이라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텔레파시《telepathy》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5신통이니, 6신통이니 하는 얘기도 글자를 살펴보면 신통《神通》,즉 신령스러운 존재들과 통한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기도 정진하고 참선하는 것이 힘을 얻는 길【得力】이 되고, 부처님과 가까이 할 수 있는 길이 되고, 위대한 영감의 사도가 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의 체험을 통해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천수 대자대비 대다라니를 항상 지송하고 독송하는 마음은 자비를 갈고 닦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천수경을 끊임없이 독송하고 천수경에 들어있는 내용을 공부하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하는 사람들은 항상 부처님과 함께 하기에 대자대비한 마음을 갈고 닦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들을 구제하고 보호하려는 마음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중생들에게 복덕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의 문이 열려갑니다. 끊임없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살다 보면 마음 가운데 풍요로운 마음이 생겨나고 펼쳐 주려는 마음이 생겨나서 항상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마음이 솟아납니다. 마음이 여유로워지기에 그렇습니다. 자꾸만 취하려는 마음은 깍쟁이《?》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여유로워지니까 베풀려는 마음이 생겨나고 하늘과 땅이 다 도와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려운 액난도 쉽게 넘어 갑니다.




호법선신들의 가호

넷째로, 천수대다라니와 천수경을 독송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는 몸과 마음이 되어집니다. 항상 마음을 갈고 닦기에 호법선신《護法善神》들이 옹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천수경을 모시는 분들은 호법신장들이 항상 가호합니다. 천수경이 있는 곳에는 호법신장들의 가호지묘력《加護之妙力》이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집에서 기도할 때 항상 천수경을 독송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보살님은 새벽기도 때, 그리고 낮에, 또 제사 때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천수경을 계속하다 보니 하루에 일곱번 여덟번이 될 때도 있는데, 그 때 마다 새로운 것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또 천수경을 독송하는 사람은 불변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불변의 진리를 갈무리한 천수경이기에 변덕스럽지 않은 불변의 마음을 양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삶, 주어진 그대로의 삶이 가장 행복하다고 여길 때 가장 평안한 마음이 됩니다. 자꾸만 깍쟁이 같이 욕심을 내면 마음의 평형이 깨어집니다. 그 결과 마음이 불편해지고 짜증을 내게 되고 남을 괴롭히게 되지요. 그러면 신장님께서도 그를 징벌하시게 됩니다.

또 기도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상스레 일이 잘 풀려갑니다. 마음이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또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합니다. 호법신장님들과 불보살님의 가피력 때문입니다.

천수경을 독송하는 사람은 항상 변덕스럽지 않고 불변의 몸과 마음을 갈무리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천마외도《天魔外道》가 해치지 못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허공계에는 천마가 많습니다. 허공계에는 항상 여러분들을 노리고 있는 천마들이 많지만, 천수경을 독송하게 되면 그 위신력으로 방패가 쳐져서 천마가 침투해 들어올 때 막아내는 힘이 양성됩니다. 허공계에 갖가지 마군《魔軍》이가 가득하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착하고 선한 마음을 쓰는 사람들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탁하고 불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않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갖가지 마군이들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삶을 살아가다 보면 각양각색의 악연《惡緣》을 맺게 됩니다. 그들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음으로 양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입니다. 그들을 제도하고 그들의 추악한 영향력을 퇴치하는데는 기도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투철히 깨달으셔야만 합니다. 천수경을 끊임없이 독송한다는 것은 결국 호법선신의 가호를 통해 마군이들을 퇴치하고 삶을 슬기롭고 평안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첩경인 것입니다. 천수경의 공덕은 무량합니다.

불법의 묘약《妙藥》 천수경

천수경과 다라니를 독송하는 사람은 대의왕여래, 대약왕보살,약사여래의 분신을 갖춘 몸이 되어 몸과 마음의 질병이 녹아져 내립니다. 병이 다 나아 버립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기도하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입니다.

능인선원《能仁禪院》은 전국의 그 어느 사찰보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보살들이 많은 도량입니다. 부처님께서 증명하십니다. 우리 법당에 나왔다 하면 병이 어디 있습니까? 저절로 녹아져 내려지고 이내 쌩쌩해집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게 되면 자신도 알 수 없는 힘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여 이렇구나 저렇구나 하는 부처님 도리를 꿰뚫어 몸과 마음이 부처님과 함께 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천수경을 독송하면 대의왕여래의 몸을 갖춘 몸이 되어 이렇듯 몸과 마음의 병을 퇴치 시킵니다. 모든 중생들의 병을 고치는 까닭에 나의 병도 고치고 그 힘으로 남의 병도 고치게 됩니다. 자기의 몸과 마음의 아픔을 고치는 방법을 남에게 제시해 주면 남들도그 길 따라 가게 되고 몸과 마음의 질병을 이기게 됩니다. 무량광명과 신통과 자비와 자재와 위신력과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한량없는 중생들을 구제하고 있는 이 천수다라니의 위력은 두려울 정도로 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천수경은 불법의 약으로써 무수한 중생들의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한다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또 끊임없이 천수경을 독송하게 되면 악도에 처해있는 중생들이 이 천수경과 천수 다라니를 듣고 마음을 쉬게 되며 고통을 여의게 되어 그 공덕이 한량 없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몇 가지 예만 들어보더라도 천수경과 천수다라니의 공덕은 참으로 크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치지어정상《置之於頂上》, 언제 어느 경우에서건 이 천수경을 제일 앞 자리에 갖다 놓아라 하신 것입니다.




천수경부터 가르치라!

천수경에는 불교의 발달사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소승불교로 부터 대승불교의 압권이라고 하는 밀교《密敎》까지 들어 있습니다. 천수경은 불교가 시작될 당시부터, 즉초기불교, 근본불교, 원시불교 등의 불교사상에서 부터 맨 마지막에 불교의 정화《精華》, 즉 불교의 꽃이라 불리우는 밀불교와 밀교신앙에 이르기까지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수경의 내용을 공부해 보면 불교의 전반부와 후반부 대`소승의 양면을 다 꿰뚫게 됩니다. 그래서 천수경이 거대한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수경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현대 한국불교가 천수경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서 왜 자꾸만 엉뚱한 길로 가려 하는지 안타깝습니다. 흡사 걷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뛰어 오르고 날라고 하는 얘기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제 여러분들은 천수경이 정말로 중요한 경전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깨우치셨을 것입니다. 천수경은 참으로 아름다운 서사시《敍事詩》입니다. 다만 한문이란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있기 때문에 한글로 풀어서 하다 보니까 그 의미가 많이 감소되긴 합니다만, 그 참된 내용은 참으로 장엄하고 숭고한 것입니다.

천수경은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서 부터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까지 진언 밀교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모든 경전을 독송할 때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독송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앞부분에 나오고 있습니다. 개법장진언까지가 경전의 서반부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어느 경이나 참으로 특징적인 구조로 지어져 있습니다. 제일 처음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문을 여시고 21일 동안 화엄경을 설하셨답니다. 화엄경을 설하시고 난 다음 일생 내내 동안 아함경 12년, 방등경 8년, 반야경 21년, 법화경 8년을 설하셨습니다.

화엄경이 떠오르는 태양과 같고 동편에 우뚝 선 거대한 산과 같다면, 대승불교의 또 하나의 최고봉인 법화경은 서편에 우뚝 선 거대한 산과 같다고 얘기들을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경전이 화엄과 법화에 흘러 든다고 하신 스님도 계십니다. 이 천수경 역시 화엄, 법화에 들어가는 지름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천수경의 앞부분에 나오는 정구업진언 부터 개법장진언까지와, 맨 마지막에 나오는정삼업진언《淨三業眞言》 부터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까지는 양쪽에 우뚝 선 천수경의 두 산봉우리에 해당합니다. 이 부분들은 대승불교의 정화로 불리우는 밀불교의흔적입니다. 천수경은 이와 같이 소승불교부터 대승불교까지 두루 망라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주가 다 도량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계청?부터 `도량청정무하예《道장淸淨無瑕》 삼보천룡강차지《三寶天龍降此地》?의 도량찬까지가 천수경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천수경의 본경은 상당히 깁니다만 중요한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천수경의 내용 가운데 `도량청정무하예 삼보천룡강차지?의 한 줄만 먼저 생각해 봅니다. 그 한 줄의 진정한 뜻만 살펴 봐도 우리는 많은 내용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곳은 어디나 다 도량입니다. 길을 걸어가다 보면 무수한 사람이 흘러 갑니다. 길은 무수한 부처님들께서 걸어 다니시는 곳이니까, 그 길 역시 도량입니다. 그러기에 그 길은 청정해야 합니다. 함부로 종이를 버려서는 안됩니다. 침을 뱉어서도 안됩니다. `도량청정무하예?라는 것은 바로 현대 사회의 윤리와 공중도덕과 관계된 내용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 보면 어떤 아파트는 깨끗한데, 어떤 아파트는 담뱃불로 얼룩져 있는 등 매우 지저분한 곳이 있더군요. 그것은 그 아파트 주민들의 공중 도덕심이 모자라서 그렇습니다. 아파트 계단 같은 곳에 함부로 담배꽁초를 버리고, 엘리베이터를 멋대로 다룹니다. 그게 다 부처님들께서 타시는 것들인데도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길을 걸어 갈 때도 함부로 종이를 버리고 침을 뱉지 않습니다.

여담입니다만 길 얘기가 나왔으니 한마디만 짚고 나가겠습니다. 길이라는 것은 만물이 유통되는 곳인데, 요즘 우리 사회는 길의 도리를 모르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그렇겠습니다만, 길이란 항상 확확 뚫려야 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차가 한번 밀리면 정신이 없습니다.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도로에 5분씩만 밀려 있다고 합시다. 백만명이면 5백만분입니다. 문제가 대단히 심각합니다. 차들은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 내면서 길은 그대로 두고 있으니 길에서 하루 해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길이 막히니 경제 소통이 악화되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계신 곳은 항상 깨끗해야 하고 원활해야 합니다. 그래야 `삼보천룡강차지?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 자리에 내려 오십니다. 화엄신장님께서 그 자리에 내려 오십니다. 여러분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말씀 드립니다만 집안에 호법선신들의 가호지묘력이 함께 하기를 발원한다면 집을 항상 청정하게 하고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생활 자체가 기도고, 기도가 생활인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복을 받는 마음이 달리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도량청정무하예?, 이것은 기도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내 마음 가운데 번뇌 망상을 제거하며 관세음보살님 전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 마음을 세척해 들어가게 되면`도량청정무하예?가 됩니다. 그렇게 들어가는 마음 가운데 `삼보천룡강차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마음 가운데 삼보천룡과 호법선신의 가호지묘력이 가득히 고여 들게 됩니다. 이와 같이 중요한 내용들이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기 때문에 삶을 함부로 살고 아파트 단지나 공동생활 단지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엣센스 만을 모은 지보적《至寶的》경전

그 다음에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서 부터 `옴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까지가 참회경의 내용입니다.

천수경을 독송할 때 12존불을 빼는 분이 많은데 그래서는 안됩니다. 12존불을 모두다 모시고 나서, 그 분들께 참회하는 것입니다. 참회하는 마음 가운데 미래를 기약 받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청정하지 않고 썩은 마음으로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썩은 기둥이나 재목으로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만 공덕의 집을 지을 수 있고, 가정도 번창하고 사회도 번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참회 없는 정진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 하는 것과 같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다음 `준제공덕취《准提功德聚》?로 부터 `나무칠구지불모 대준제보살《南無七俱 佛母 大准提菩薩》」까지는 불모《佛母》이신 준제보살님의 거룩하신 덕을 기리고 그 분께 귀의하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본경 강의 때 공부하겠습니다만, 참으로 천수경의 공덕이 무량함을 말씀해 주고 계신 내용입니다. 천수경을 끊임없이 독경하고 기도 드리면 일체의 액난을 멀리하게 되고 부처님과 같은 공덕을 쌓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정법계진언, 호신진언, 그리고 육자대명왕진언을 통해 천수경을 마음으로 받들어 모시는 사람들은 모두 가장 거룩한 공덕의 화신들이기에 그들이 임하는 곳 어디에든지 청정법계가 되고, 항상 몸과 마음을 옹호 받으며, 관세음보살님의 거룩한가피력을 힘 입을 수 있습니다.

특히 육자대명왕진언에 대해 하나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옴 마니 반메 훔?은 진언 가운데 큰 의미가 있는 진언으로 여겨지고 있기에 그 의미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그 내용에 대해서는 세세히 설명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육자대명왕진언인 `옴 마니 반메 훔? 하나 만으로 일어난 종교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불교를 너무 어렵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하는 것처럼 다른 종파에서는 `옴 마니 반메 훔?하는 것입니다.

이 역시 불교의 한 흐름입니다. 밀불교라고 불리우는 한 파입니다. 모든 불교의 흐름을 망라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불교라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잘하고 있습니다. 진언 하나만 가지고도 잘하고 있는데 우리 불교는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 준제진언에서 부터 `원공중생성불도《願共衆生成佛道》?까지가 준제경의 내용입니다.

그 다음 여래십대발원문에서 부터 `원아광도제중생《願我廣道諸衆生》?까지가 보살본원경입니다.

사홍서원은 보살서원경이고, `나무상주시방불, 나무상주시방법, 나무상주시방승?은삼보예경에서 따 왔습니다. 이렇게 천수경은 정구업진언으로 부터 시작해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까지 해서 모두 아홉부분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아홉은 꽉찬 숫자입니다. 천수경은 아주 엣센스《Essence》만 모은 지보적《至寶的》인 경전이란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1. 위대한 창조력을 지닌 말의 세계

정구업진언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본경을 강의하겠습니다.

정구업진언입니다. 입으로 지은 죄를 깨끗이 하자는 진언입니다.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입은 재앙의 문인 동시에 진실과 광명의 문이기도 합니다. 입은 칼과 같이 양면성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입을 조심하고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은 이것이 위대한 창조의 힘을 지니고 있사온 바 저희들은 참된 말을 바로 써서말의 위력을 실현하겠습니다.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겠아오며, 나쁜 말을 하지 않겠아오며, 참된 말만을 하겠습니다」이렇게 다짐해야만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의 중요성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듭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화엄경에도 등장하는 내용이지만 참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만 할 대목이 있습니다. 보현행자의 서원입니다.

「중생과 세계의 나타난 현상이 아무리 거칠고 부정하게 보이더라도 실상은 청정하고 원만하오니 저는 언제라도 중생과 세계의 실상을 찬양하고 긍정하는 말만을 하겠습니다. 참된 진리의 모습을 깊이 믿고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 실상의 말이고 참된 말이며, 올바르게 찬양하는 말인 것을 깊이 믿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믿고 찬양하는 참말은 위대한 성취력을 지니며 창조의 힘을 나타냄을 깊이 믿습니다」말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위대한 창조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말은 무섭고도 두려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말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말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며 비관적인 말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은 쓸데없는 말들을 너무나 많이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의 말이 그 아이의 일생을 결정짓는다는 얘기를 들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노벨 수상자 솔 벨로우는 국민학교 때 선생님이「너는 노벨상 감이야」라고 무심결에 던져준 한마디의 말이 자기 일생을 문학가로 결정지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말 한마디가 우리들의 삶을 결정짓는 예를 많이 봅니다.

옛말에 `입살이 보살?이라 하고 `말이 씨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위대한 창조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허술한 말을 하거나 부정적인 말, 좋지 못한 말을 쓰게 되면 곧바로 그 말은 그의 앞날에 부정적인 상황을 창조하고 그의 미래를 나락으로 이끌고 가는 원흉으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전의 제일 처음에 입으로 짓는 업을 맑히는 정구업진언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말이 지니고 있는 위대한 힘을 잘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면서 염불을 하다 보면 내 몸과 마음이 관세음보살로 변해 갑니다. 관음의 화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게 되면 내가 관음의 화현이 되어서 모든 액난과 고난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이 양성되고 용솟음치는 활력을 잉태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어서 마음을 통제하려면 말부터 통제해야만 합니다.

가끔 사람들이 묻습니다.「스님, 마음을 도무지 잡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면서「마음을 잡고 싶다」「마음을 안정시키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 때 마다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을 잡으려면 우선 마음이 하는 역할을 점검해 보아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말과 생각과 행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 같은 말과 생각과 행동이 마음으로 부터 나와 다시 마음으로 흘러 드는 도리를 아십니까? 우리가 말을 들을 때 그 말은 다시 어디로 흘러 드나요? 또 우리가 생각을 할 때, 그리고 행동을 할 때 그 종착점은 바로 마음 아닙니까? 그러니 결국 말과 생각과 행동이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흘러 드는 것이라고 하면 그 말과 생각과 행동을 잡는 것이 바로 마음을 잡는 비결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잡으려면 말을 잡아야 합니다. 생각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행동을 통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잡기 위해, 생각을 잡기 위해, 행동을 잡기 위해 염불하고 기도하고 절을 하는 것입니다.




2. 허공계의 무량한 존재들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인간에게 극한 상황이 느껴지는 이유는 물질계적인 3차원의 존재라는 사실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3차원에만 국한되어 있는 존재이고 3차원적 존재라는 사실만을 인정하는 어리석음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극한상황을 느끼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에 속박된 차원을 의미합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극한상황이라는 것은 인간이 물질적 한계를 분명히 인식할 때 초래되는 상황입니다. 스스로를 3차원적인 존재로 전락시킬 때만 한계상황이 느껴지게 됩니다. 만일 그 마음 가운데 무한대한 차원을 인정하고 그를 호흡하게 되면 한계상황은 어느결에 눈 녹듯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대한 차원과 하나가 되기 위해 기도하고 정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갈등과 대립, 3차원적인 한계상황으로 부터 초래되는 모든 극한상황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부처님을 모시는 순간에 녹아져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아무리 설명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상황은 3차원적인 언어로는 설명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입을 갈무리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린 다음 자연스럽게 초월세계, 3차원을 뛰어 넘는 존재들에 대한 감사로움의 표현인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 安慰諸神眞言》?을 독송하는 것입니다. `오방내외?는 우리가 말하는 `시방?입니다.

고혈압이라든가 당뇨 등등의 육신의 질병 따위로 3차원적 생각에 속박되어 있을 때 이 육신은 한계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 같은 한계상황을 느끼는 마음으로는 어떠한 질병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인간들의 질병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3차원적인 한계상황으로 부터 유래되는 것입니다. 세포들 속에 그 같은 생각이 머금어져 있는 한 질병의 퇴치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부처님을 모시기만 하면 몸과 마음 가운데 있는 질병은 저절로 녹아져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기도는 3차원을 뛰어넘는 능력을 이끌어 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물질계적인 한계상황이 타파되고 그로부터 야기된 모든 질병들은 자연히 스러져 내립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정진하는 가운데 당뇨가 낫고, 고혈압이 낫고, 변비가 나으며 모든 질병이 다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3차원적인 어떤 질병도 치유해 낼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밝히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에 모두가 무명에 휩싸여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데아《Idea》을 꿰뚫는 사람들이 참으로 희유하다고 금강경에 나오지 않습니까? 질병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가 자기 스스로 3차원적인 욕망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진 않지만 다겁생래 우리를 항상 지켜보시며 시방삼세에 항상 함께 하시는 허공계의 모든 분들께 예경을 올리는 것입니다.

`안위?는 `고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런 뜻입니다. 무한대의 세계에 대한 감사로움과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맛볼 수 없음에도 나의 마음을 무한대의 차원으로 끊임없이 승화시키고 제고시키려는 그러한 부처님의 염원이 담겨진 내용입니다.

우리는 입으로 쓸데없는 소리 하지 않고, 3차원적인 소극적이고 비관적이고 부정적이며 원한에 서린 말을 떨쳐내고, 오방내외에 계신 모든 삼세제불보살님과 화엄신장님께 `감사합니다?하는 기도를 올려야만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제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 정진하고 참선을 하며 공부해 왔지만 불경에 나오는 한자 한자의 순서와 배열이 철두철미한 진리성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경전의 해설자들도 그것이 주는 뉘앙스와 의미를 부처님의 마음 따라 올바로 간취하거나 올바로 파악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이 불교의 불행이고 비극입니다. 문자 그대로 그냥 해석해 내려가고 그것으로 끝을 낼 수 밖에 없겠지만, 밝은 눈으로 보면 전후좌우의 배열과 그 안에 들어있는 무궁무진한 의미를 생각해야만 될 그런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입을 청정히 하라. 진리에 입각한 말을 하라. 그 깨끗한 입과 깨끗한 마음으로 오방내외에 계시는 모든 신장들에게 예경을 올려라? 여기서 부터 우리들의 기도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부터 우리의 마음은 우주로, 부처님 세계로, 그리고 신장님들의 세계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터 이른바 물질계적인 극한상황을 초극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나의 한계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힘은 나의 욕망과 탐욕에 포로가 된 마음을, 그리고 나를 속박하는 갖가지의 부정적인 양태의 사슬을 과감히 끊어내게 합니다. 참다운 기도에 의해 그와 같은 힘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한대의 차원을 머금으면 머금을 수록 나의 마음은 한도 끝도 없는 우주로 달려가기에 세속의 모든 허망한 욕망들은 저절로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끊임없이 기도를 하며 살면 3년 전이 다르고 2년 전이 다릅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3차원적인 한계상황이 점차로 초극 되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열심히 기도하고 살면 물질계적인 자기를 제압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신《神》과 신장《神將》

불교에서 말하는 신장《神將》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神》과는 패턴이 다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다가 신을 보았다 했고 또 파티마니 루르드 등의 장소에서 성모 마리아를 목격한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신장은 꼭 외부에 있는 존재들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신장이 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들 가운데 살아있는 중생들에게 메시지를 던지게 될 때 신이라고 생각하게 될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밑바닥에, 나의 마음 가운데에 영원의 존재와 하나가 되는 존재가 있음을 분명히 확신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같은 사람들은 외부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신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의 패러독스 역시 거기에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란 존재는 내용에 있어서는 불교의 신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신을 인간과 전혀 구별되는 존재로서 창조주로 등극을 시킵니다. 불교에서의 신이란 인간과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며 우리의 마음과 둘이 아닌 존재로 얘기합니다. 기독교가 2원론이고 불교가 1원론인 차이가 신에 관한 이해로서는 현격한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신과 인간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지만, 불교에서는 그 같은 차별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예에서와 같이 불교에서는 모두가 하나입니다. 우리가 갈고 닦으면 언제든지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어가는 과정 가운데 거치게 되는 존재들을 신장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마음이 부처이고 우리 모두 부처입니다만, 그 사실을 깨닫고 닦은 정도가 다르기에 차별이 나는 것입니다. 본래는 모두가 다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귀신이란 존재는 모두가 부처가 되어가는 과정의 존재인 것이고 우리들의 본질적 자화상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살아있는 귀신?이며 `죽은 귀신?들은 허공계에 가득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나 보이지 않은 세계 역시 하나인 것입니다.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은 바로 우리들의 의식 영역을 보이는 세계로 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로, 3차원으로 부터 무한대한 차원으로, 극한상황으로 부터 해탈의 상황으로넓혀가는 것입니다. 극한상황을 깨뜨리는 것이 해탈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의미는 3차원으로 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의 근본 명제 가운데 아주 어려운 난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극한?이라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극한?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모두가 무한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3차원적 세계로 부터 극한상황을 타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극한상황이란 무한대 차원과 3차원 사이의 장벽을 말합니다. 이 장벽에 부딪쳐 뚫고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저앉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저앉는 사람은 고뇌를 느끼고 죽음을 느낍니다. 투쟁을 하게 되고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것을 뚫고 나가버리면 고뇌도 없고 죽음도 없고 투쟁도 없고 죄악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지요. 불교는 이렇게 기가 막히게 풀려가는 것입니다. 어려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차원만 뛰어 넘으면 간단한 것을 그 한계상황과 물질계에서 그렇게 괴로워하고있는 것이 바로 중생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하는 것입니다. 오방내외 즉 시방삼세에 계신 무한대한 차원의 많고 많은 무량한 제불보살과 화엄신장께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정진하며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예경을 올리는 것입니다. 인사 드린다는 것은 그들을 내 마음 가운데 품는 것입니다. 그들을 인정하고 내 마음 가운데 받아 들이기만 하면 나는 그 순간부터 고뇌로 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모든 허망한 세계로부터도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고 욕망 때문에 싸울 이유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면 남과 다투고 싶은 마음이 녹아져 버립니다. 물질로 부터 해방되니까 참회도 되고 업장도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가 표방하는 부사의《不思議》 해탈경계입니다. 내 마음 가운데 부처님을 모시고, 오방내외에 계시는 모든 신장님들을 모시고, 관세음보살님, 화엄성중님, 지장보살님 전에 기도 드릴 때 모든 죄와 업장이 녹아져 내리고 고뇌로부터 해방됩니다. 죽음의 먹구름이 흩어지게 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에겐 죽음이 초월 됩니다.

내 마음 가운데 미움이 있으면 남이 나를 미워하고 내 마음 가운데 원망감이 있으면 남이 나를 원망하게 됩니다. 원한이 원한이 되어 끊어지지 않으니까요. 내 마음 가운데 항상 감사로운 마음이 있고, 죽음의 공포가 전혀 없고 불생불멸을 확신한다면 어떤 액난에서도 괴롭지 않습니다. 교통사고 조차 무섭지 않습니다. 내 마음 가운데 부처님을 모시고 살면 혼탁한 세상에서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자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한대의 세계를 열어 주는 그러한 천수경을 앞에 놓고 공부를 하게 되면서 우선 `부처님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 `화엄성중님 감사합니다?하는 마음으로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하는 것입니다.




3. 무상심심 미묘한 불법   《목록》

개경게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


무상심심 미묘한 불법 ◐무상심심미묘법◑

그 다음에 개경게《開經게》입니다. 경을 찬미하는 내용을 담은 중요한 게송입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은 정말 미묘합니다. 죽음과 삶이 둘이 아닙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얘기입니까? 또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작업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3차원적인 세상의 눈으로 보면 불가능한 것도 무한대의 차원에서 보면 아이들 장난감 같은 차원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슨 일이든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불법은 그렇게 미묘합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문제를 부처님께서 풀지 못하면 누가 풀겠습니까?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There is no rule but has some e. ceptions》?라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법이 세상없이 철두철미하다 하더라도 묘하게 빠져 나갈 구멍은 다 있는 것 아닙니까? 사람이 만들어 놓은 제도, 사람이 만들어 놓은 어떤 문제라 하더라도 일견 불가능한 듯 보이지만,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의 눈으로 보면 애들 장난감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은 바로 부처님의 이데아 속에서 실 꾸리 풀려나가듯 풀려나가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닥쳐오는 어려움은 각오를 해야 되겠지요. 분명한 사실은 모든 문제가 정말 무상심심미묘한 법 따라 풀려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믿어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또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한테 위탁해 놓는 그러한 것도 아닙니다. 누구에게 다가 위탁해 놓으면 간단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럴 경우 외부의 허락이 아니면 영적인 세계의 진화라거나, 마음 세계의 진화라는 것은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불교가 우리 만 중생들에게 필요하고도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다른 종교를 접하고 들어온 사람은 대부분이 불교가 어렵다고 들 합니다. 그들은 좋은 일이 생겨도 하느님 탓, 나쁜 일이 생겨도 하느님 탓, 아들이 대학교 떨어져도 하느님 탓, 길을 가다가 망신을 당해도 하느님 탓, 다 하느님 탓입니다. 자기가 망신을 당하면 자기가 무언가 잘못해서 망신을 당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탓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정신과 마음을 고양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그저 하나님에게만 모든 것을 위탁합니다.

불교는 결코 외부에 스스로를 위탁하지 않습니다. 안팎이 하나입니다. 참으로 불법은 무상심심미묘법입니다. 불법은 파고들면 들수록 정말 미묘해집니다. 공부를 하면할수록 점점 미묘해지고 불가사의 해집니다. 그런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온 세계가 참으로 미묘 불가사의한 진리 가운데 하나로 보이게 됩니다.

문화 양상과 제도와 문물, 동물 식물 모든 것이 다 일정한 진리를 따라 형성되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도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만상은 모두 진리 따라 형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기 보이는 종《鐘》은 1700℃에서 녹은 쇳물로 만들어집니다. 종도 이렇게 진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만들어진 모든 것은 진리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저 형광등도 마찬가지지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다 진리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참?의 기운

여러분의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제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제도들을 프레임 워킹《frame working》하는, 즉틀을 짜는 근본적인 정신적 지주를 이데올로기라 합니다. 만일 이데올로기가 `참【眞】?이면 그 조직과 제도는 영원불멸합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참?이지 못하면 그 조직과 제도의 수명은 오래갈 수 없고 붕괴되고 맙니다.

헤겔은 이를 `변증법적인 붕괴?라고 얘기했는데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적인 차원으로 왜곡된 논리를 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제도나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프레임 워킹될 때 올바른 `참?의 기운을 머금고 그 제도가 양성되었다면 시행착오를 거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기운을 머금고 있지 않는 제도가 바탕이 되었을 때 그것은 쉽사리 붕괴되고 맙니다.

모든 제품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참?의 기운이 얼마나 많이 들었는가에 따라 그기계의 수명이 오래 가느냐 짧게 가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물건을 만드는 직공이 적당히 날림으로 만들었다면 겉모양은 다른 직공이 만든 것과 같겠지만 그 수명은 전혀 다를 것입니다.

칫솔을 예로 들어 봅시다. 날림으로 만든 칫솔과 정성스럽게 만든 칫솔이 있다고 할 때 겉은 똑같은 회사 제품이지만 수명은 만든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저 먼 과거로부터 스스로를 프레임 워킹하는 과정 가운데 마음에 `참?의 기운, 진리의 기운이 온전히 들어있지 않으면 수명이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짧게 살다 끝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종이나 꽃이나 사람이나 제도나 모든 것이 다 결국은 하나로 지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마음입니다.

만상은 모두 하나의 근본, 즉 마음으로부터, 진리로부터 나옵니다. 마음을 알면 열을 알고 백을 알고 천을 아는 도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이 진리요, 마음이 부처입니다. 자꾸만 공부를 하다 보면 하나의 진리를 꿰뚫게 되고 또 마음을 꿰뚫게 됩니다. 그 결과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양상들이 어떻게 전개될 것 인지가 한 눈에 다 들어와 버립니다.

어떤 제도를 만들 때 그 계획의 밑바탕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공공 이익과 복리 증진을 위한 마음이 깔려 있는가, 아니면 위정자 편의에 따라 만들어지는가에 따라서 정치나 경제의 수명이 정해집니다. 그것을 정통성이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불교는 참으로 미묘합니다. 하나를 꿰뚫으면 우주 시방 삼세가 다 들어오는 도리가 있습니다.

「법을 아는 자는 우주를 아는 자요, 법을 지배하는 자는 우주를 지배하는 자」라 하신 부처님 말씀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우주와 마음이 별개가 될 수 없습니다.

불교를 더 많이 알려면 의학을 알아야 하고 또한 약학, 한의학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불교가 만상을 머금고 있다 보니 모두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참된 기운과 참된 상념을 가지고 살아가면 마음 가운데 참된 기운을 가득히 머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참된 기운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도리 따라 내 몸에 있는 수도 없이 많은 세포들에게 참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래서 그 세포들 가운데 나쁜 물질, 더러운 것, 쓰레기들은 다 흘러나가고 몸 안에 있는 질병은 모두 녹아져 내려 세포의 활성도가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학문은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하나로 다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에 참된 기운이 가득하면 내 몸에 있는 세포들은 활성도가 높아 음식을 많이 취하지 않더라도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히려 탁한 음식을 많이 취하게 되면 독소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세포들이 그 같은 음식을 거부하게 됩니다. 세포가 깨끗하면 허기도 덜 느끼고 잠도 많이 잘 필요가 없습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세포를 휴식 시키고 세포를 보수하는 시간이며 수리하는 시간입니다. 보수하는 시간이 짧아도 회복이 빠르고 세포가 젊으니까 기미`주근깨를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화장품 장사가 울고 갑니다.

원리는 이렇게 하나로 가는 것입니다. 만상도 다 그렇게 가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부처님 말씀대로 맑고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면 몸 안의 쓰레기는 다 맑은 기운에 밀려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미묘하지요. 무상심심미묘법입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도인 소강절선생의 말과 같이 소나무 잎새에 얼룩이 지는 것을 보고 천년 뒤의 소식을 아는 도리가 있습니다. 시공《時空》을 뛰어 넘어 꿰뚫는 거지요. 스타트하는 것을 보고 그 결과를 알게 됩니다. 스님들이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점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를 보면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참?의 기운이 몸과 마음에 확연히 익어지면 무엇을 판단하게 될 때, 되는 것 안되는 것을 이내 감지해 버립니다. 세속 중생들의 눈으로 볼 때는 참으로 미묘하고 불가사의 하겠지요.

AIDS 바이러스

에이즈《AIDS》바이러스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자연발생적인 재앙입니다. 같은 땀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나 죄악을 저지른 범죄자들이 흘린 땀과, 건강한 몸으로 스포츠를 하면서 흘린 땀은 다릅니다. 두 가지 땀을 분리해서 독 물질을 검사하는 시약인 셀레인산《Celane acid》처리를 해 보니까 범죄자들의 몸에서 나온 땀은 까만 암적색으로 변했는데 스포츠맨들에게서 나온 땀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고 합니다. 범죄자들의 몸 속에는 독 물질이 많다는 얘기지요. 마음의 변화가 몸의 화학변화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남녀간에 부정적인 관계를 맺게 될 때 그 때 나오는 특유의 감정이 있겠지요. 남녀간의 긍정적이지 못한 만남이 형성될수록 특유의 묘한 감정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특수한 변종 바이러스를 초래할 가능성은 대단히 클 것입니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생겨나고, 새로운 구조를 이루기 때문에 기존의 약물로는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제 미래는 에이즈 바이러스가 문제가 아니란 점입니다. 인간의 좋지 못한 마음과 환경으로 인해 에이즈 보다 더한 어떤 바이러스가 생겨날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만법이 생겨납니다. 재앙도 복도 다 그런 것입니다.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과거 시대와는 유다른 감정이 인간의 마음 가운데 양성되고 바이러스도 특유한 독종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호모《Homo》라거나 동성연애 같은 것이 오늘날 처럼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대자연의 질서를 위반하는 양태이기 때문에 변종 바이러스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같은 변종 바이러스들이 인간을 재앙으로 굴러 떨어지게 합니다.

에이즈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가면 5년 정도는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다고 합니다. 길게는 8년, 10년 가는 경우도 있답니다. 막을 쓰고 활동하지도 않고 꼼짝없이 그대로 가만히 있는다는 것입니다.

이 에이즈 바이러스의 무서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들어간 몸체 주인공이 약해질 때만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약해져서 기《氣》가 빠지고 정《精》이 빠져나갈 때 그 때 에이즈 바이러스가 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얘기지요. 참되게 살고 보정《補精》, 즉 정을 잘 유지하고 잡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죽을 때까지 발병하지 않을 것이라는 학설도 있습니다. 이 에이즈 바이러스가 꼭 정이 고갈된 상태이거나 몸이 허약해진 상태에서 들고 일어난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앞으로 5년 내지 10년 동안에 에이즈가 만연할 것입니다. 이것은 제 얘기가 아닙니다. 많은 석학들의 예측입니다. 우리 능인선원은 그 때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분명히 퇴치가 가능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능인선원만 왔다 하면 에이즈가 다 낫게 될지 누가 압니까?외국에서 들어온 여러 가지 관계 서적들을 보면서 느낀 것이 많습니다. 이미 결론은 나와 있습니다. 40대 후반이 넘으면 남녀간 만남의 횟수를 대폭 줄여야 합니다. 고혈압, 당뇨병도 원인이 다 그것이니까요. 가능한 한 청정하게 살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약화되면 곧 바로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대의왕여래이신데 퇴치 못할 질병이 있겠습니까? 병 낫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몸이 약한 사람들이 능인선원에 와서 열심히 기도하면 거의 모두가 건강을 되찾고 있지 않습니까? 열 가지 백가지가 모두 하나의 원리로 통해 있습니다.


만나기 어려운 불법 ◐백천만겁난조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강남에 온 것도 인연인 것 같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모두 전생에 복을 좀 지었나 봅니다. 부처님께서 강남에다 무얼 하나 보여 주시려고 저를 이곳에 보내신 모양입니다. 능인선원에 관세음보살님의 서상《瑞相》이나 부처님의 서상이 현신한다는 사실을 공표하면 서울 시내가 들썩거릴 것입니다. 색안경 쓰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래서 조용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청정하고, 정결하고, 고결하게, 정말로 진리에 가깝게 살면 사건이 벌어져도 큰 사건이 벌어질 것입니다.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참으로 백천만겁이 지나도록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 법입니다. 만나기 어려운 법을 만난 이때 열심히 닦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4난《難》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로 치불난《値佛難》입니다. 만날 치《値》, 부처님 만나 뵙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직접 만나 제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그 때에 같이 태어나서 부처님을 만나는 공덕은 참으로 무량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설법난《說法難》입니다.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하다가 그들 마음에 무언가 아로 새겨질 말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설법난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법일수록 자주 많이 설하도록 해야 됩니다. 연습이 대가를 만듭니다《Practice makes genius》. 연습도 하지 않고 100m 선수가 될 수 있습니까? 기회가 날 때마다, 시간 날 때 마다 말을 잘 못하더라도 법을 얘기하세요. 얘기하다 보면 말문이 열리고 입도 열리고, 그래서 내생《來生》에는 목소리도 좋아진답니다. 이렇게 자꾸 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고, 뭔가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도 많아지게 됩니다.

세 번째, 문법난《聞法難》입니다. 법을 얻어 듣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을 설하는 장소가 어디이건 열심히 찾아가 들어야 합니다. 특히 가정법회 때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는 `내가 누군데?하는 아만심이나 교만심은 버리십시오. 그 누구의 말이라도 경청해 주십시오. 마음에 상《相》이 생기면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듣고 싶은 마음이 나지를 않습니다. 국민학교 다니는 어린아이들 말이라도 경청해 들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설령 얘기하는 것이 유치하고 수준이 떨어진다 해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슬기로운 인물이 되고 부처님의 아들 딸이 되려고 하면 부처님 법 듣는 마음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네 번째, 신수난《信受難》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답니다. 부처님을 믿고 받아 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심이 생겨나기가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치불난《値佛難》, 설법난《說法難》, 문법난《聞法難》, 신수난《信受難》의 경계는 모두 보통 사람의 마음 가운데 갈고 닦기가 어려움을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법을 설하기 어렵고, 법을 참된 마음으로 듣기 어렵고, 법을 바로 믿어 받아들이기 어렵고, 부처님 만나기 어려운 경계를 생각해서 항상 마음을 갈고 닦는 자세를 가다듬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4난《難》외에 또 다른 차원의 4난이 있습니다. 첫번째 인신난득《人身難得》사람몸 받기 어렵고, 두 번째 남자난득《男子難得》남자 되기가 어렵고, 세 번째 불법난봉《佛法難逢》불법 만나기 어려우며, 네 번째 위승난행《爲僧難行》스님 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람 몸 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부처님께서 기회가 되실 때마다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거북이가 태평양 바다에서 판자쪽 하나 만나기 만큼 어렵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몸 받기 어려운데 태어난 이상 후회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여자 분들에게는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남자 몸 받기가 그렇게 어렵답니다. 여자의 업《業》이란 것이 있어 여자의 몸을 바꿔 남자가 되어야지만 성불할 수 있다는 얘기까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처럼 말씀하신 그 속뜻을 알 길은 없습니다만, 여자의 몸을 받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핸디캡이 많음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판단되어지기도 합니다.

또 부처님 법 만나기가 그렇게 힘들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하셨습니다. 갖가지 사법이 창궐하는 이 때, 정법을 만난다는 것은 여간한 인연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난 우리들은 몸과 마음을 다해 열심히 불법을 연마해야 할 것입니다.

또 수행자 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수행자 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머리 깎고 수행자로 산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불법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부처님 법은 나의 가슴, 나의 삶을 개조하고 변모시키는 그러한 정법이기에 만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게 설해지는 장소가 많은 것도 아니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입을 열어 전하라! 가르치라!◐아금문견득수지◑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입니다. 문견득수지《聞見得受持》는 교육학에서 말하는 학습 발달 5단계와 같습니다. 모든 것은 듣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말이 씨가 된다? 하듯 우선 귀를 스쳐 지나가야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부처님께서 문. 사. 수《聞. 思. 修》 3혜《三慧》을 닦아 나가라 하셨습니다. 우선 듣고 난 다음 생각하게 하고 그 다음 닦아 나가라 하셨습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먼저 듣게 해야 합니다. 법문을 듣게 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전달해야 합니다. 전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입을 열어 전달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디엘 가서 듣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천리 만리 먼 곳에 법을 설하는 사람이 있거든 신발을 삼아 신으며 가서 들으라 하셨습니다.

현대 한국불교의 가장 큰 맹점은 전법 포교의 중요성에 대해 절감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참선만이 최고라고 강조를 합니다. 참선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아니라 참선이 중요한 만큼 전법 포교도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얘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 부처님 말씀 한마디 전하는 공덕이 항하사 만큼의 칠보로 보시하는 공덕보다 크다 말씀하셨습니다.

귀에 스쳐 지나가야 그 다음 무엇을 할 것 아닙니까? 귀는 왜 뚫려 있습니까?들은다음에라야 보고 싶은 마음이 나고, 수행하고 싶은 마음도 날 것이 아닙니까? 부처님 경계를 보고 싶은 생각은 듣는 마음으로 부터 생겨나는 것 아닙니까? 백번 들은 다음 한번 가서 보려는 마음이 난다는 것입니다. 듣지도 못하면 찾아가 보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찾아가 본 다음 저것이 나한테 필요한 것이구나 하고 얻으려는 마음을 내지요. 얻으려는 마음 가운데 의지가 생기고 의욕이 생깁니다. 발심《發心》이 생기지요. 그 같은 의지와 의욕이 마음 가운데 아로 새겨지게 만듭니다. 즉 받아 지니게 하는 것입니다. 단계적으로 피라미드처럼 올라가는 것입니다. `아금문견득수지?, `내가 이제 듣고, 보고, 얻어, 받아, 지니게 되오니? 이런 말입니다. 받아서 마음 가운데 간직하고 아로 새긴다는 의미입니다.


참뜻 알게 하소서!◐원해여래진실의◑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 입니다. `마음 가운데 부처님 말씀을 아로새기겠아오니, 원하옵건대 여래의 진실한 뜻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의 의미입니다.

진《眞》은 `참?입니다. `참?이라야만 열매【實】가 열리는 것입니다. 참된 말과, 참된 행동, 참된 마음만이 공덕을 가져 옵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깊이 믿고 진리만을 말하는 것이 진실《眞實》의 말이며 참된 말이며 부처님을 올바르게 찬양하는 말입니다. 믿고 찬양하는 참말은 위대한 성취력을 지니며 위대한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말, 진리의 말만이 위대한 창조의 힘을 나타냅니다. 참된 말은 참된 열매를 가져오고, 위대한 성취를 가져오고, 위대한 창조를 가져옵니다. 거짓말, 삿된 말을 해서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고통이 옵니다. 인생을 의미 없이 바보처럼 보내 버리게 됩니다. 부처님 말씀은 진실입니다. 참되기 때문에 항상 위대한 성취가 가능하고 위대한 창조의 힘이 양성됩니다.


1) 법의 곳집을 여는 진언

개법장진언

옴 아라남 아라다

옴 아라남 아라다

옴 아라남 아라다

무진장의 법장을 여는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의 진언이 `옴 아라남 아라다?입니다. 경전은 법장《法藏》입니다. 문자 그대로 법의 곳집입니다. 법장을 펼치면 본경이 나옵니다. 부처님의 경전은 무량무변한 법의 창고입니다.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바다입니다. 부처님의 법장을 여는 마음은 무량무변한 공덕의 창고를 여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표출하는 진언입니다. 참된 공덕의 세계를 발원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무진법장을 여십시오. 경전을 펼치십시오. 그 자리에 무량한 보배가 가득함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본장-

발심《發心》의 장 괴로움도 즐거움도 본래 하나라네. 끝없는 하늘, 깊이 모를 바다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 계청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 계청《千手千眼 觀自在菩薩 廣大圓滿 無碍大悲心 大陀羅尼 啓請》?의 24자 의미는 참으로 깊고 깊습니다.

`광대원만 무애대비심?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걸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부처님 마음입니다. 누구에게는 특정하게 베풀고 누구에게는 베풀지 않는 그러한 마음이 아닙니다.

태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태양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비춰지지 않습니다.  태양은 재벌에게만 특별히 더 비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에게만 더 비춰지는 것도 아닙니다. 태양은 그 누구에게나 똑같이 그 빛을 비춥니다. 광대한 세계에 두루 원만하게 말입니다. 장벽이 없습니다. 걸림이 없습니다. 무애대비심이란 누구에게나 항상 장벽이 없는 그런 마음입니다. 광대원만의 의미는 한계가 없다, 무량무변하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진정 끝없는 하늘이시고 깊이 모를 바다이십니다. 무량무변 하십니다. 끝없는 하늘은 무한을 의미합니다. 깊이 모를 바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깊이를 모르니까 그것도 무한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천수경을 보거나 화엄경을 보거나 법화경을 보거나 어디를 보아도 서로 상호 모순 당착이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입니다. 모두가 한결 같습니다.

성경과 불경의 대비점을 얘기해 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실 꾸리처럼 흘러 나오기 때문에 언제 어느 곳을 얘기하더라도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여러 각도의 많은 사람들이 썼기 때문에 서로 어긋남이 많습니다.

성경 얘기가 나왔으니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어떤 보살님이 열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기독교인하고 말씨름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보살님이 왜 다툼을 하십니까? 무슨 얘기를 듣더라도 인욕을 해야지」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 보살님 말씀이 계속 얘기를 들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이 하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에 성경의 얘기 대부분이 아함경에도 다 나온다고 얘기했답니다. 그랬더니 성경은 부처님이 오시기 전부터 있었다면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해서 답변이 꽉 막혔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구약은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부처님은 2500여년 전에 나셨는데 아브라함은 4천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기원을 4천년 전부터라고 합니다. 그 쪽을 잘 모르는 사람은 말문이 막혀버릴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말이 막히지 않게 설명을 해드릴테니 다음부터는 대답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잘 들어보세요.

구약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교과서입니다. 그들의 신은 여호와입니다. 전세계에는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역사 교과서를 가지고 있는 민족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중국, 스웨덴, 이집트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단군신화에 대한 기록도 5천년 전이지 않습니까? 우리 부처님께서는 2500년 전에 오셨지만 부처님께서는「내가 오기 전에도 많은 부처님이 계셨고 내가 열반에 든 다음에도 부처님이 오실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문명마다 하나의 부처님이 오신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실제로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부처님을 가섭불이라 하고 석가모니 부처님 다음 분을 미륵불이라 하지 않습니까? 2500년 전에 오신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부처님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4천년 전 경전을 내세우면서 불교보다 앞섰다고 얘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은 과거 2500년 전에 오신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도 많은 부처님이 계셔서 3만년 전 불경도 있고 그 이전의 불경도 있었던 것입니다. 아틀란티스에 관계된 얘기나 앞으로 오실 미륵 부처님의 용화 세계에 대한 얘기들은 모든 문명이 끊임없이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 성주괴공《成住壞空:생겨나고 머물고 파괴되고 허공으로 돌아간다는 뜻》하는 차원이라는 것을 그들은 전혀 이해 못하고 있기에 그 같은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튼, 다른 종교인들과 다투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차원이 다르기에 다투는 자체가 어리석은 것입니다. 포용해야 합니다.

만상을 살리는 불법

부처님은 진실로 `광대원만 무애대비심《廣大圓滿 無碍大悲心》?입니다. 부처님은 끝없는 하늘이시고 깊이 모를 바다이십니다. 정말 무한의 존재입니다. 한계가 없습니다. 불가사의한 존재입니다. 불가사의한 청정 공덕을 따사로운 햇살처럼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어 주십니다. 나의 마음, 나의 집안,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또한 온 겨레 온 중생 가슴속에 한없이 골고루 나누어 주십니다. `광대원만 무애대비심?이 의미하는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부처님의 가호지묘력과 부처님의 위신력은 이와 같이 누구에게나 미치지 아니하시는 곳이 없으십니다. 온 중생, 온 세계, 온 우주는 부처님의 자비하신 은혜 속에 감싸여있습니다. 걸림이 없습니다. 걸림이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편견이 있거나 아집이 있거나 집착이라거나 하는 것은 장애입니다. 무애대비심, 무애의 대도는 걸림이 없어야 탄탄대로처럼 나갈 수 있습니다.

계를 지킨다고 할 때에도 계를 위한 계를 지켜서는 안됩니다. 계를 지킨다는 상《相》을 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 경에도 나옵니다.

예를 들어 사슴이 달려와 숨겨 달라 하였습니다. 잠시 뒤 사냥꾼이 헐레벌떡 뛰어왔습니다.「사슴이 어디로 갔습니까?」묻자 반대 방향을 가리키며 거짓말을 했다 합시다. 그런 경우 계를 파한 것이 될까요?

우리가 여기서 확실히 알아야 할 일은 계는 계를 위한 계가 아니고 생명을 위한 계란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한 계인 것입니다. 만상을 살리기 위한 불법이지, 만 중생을 죽이기 위한 불법이 아닙니다. 불법이라는 것은 만 중생을 걸림 없이 자유 자재로운 경지로 승화시켜 삶을 자유자재하게 살도록 하려는 것이지, 결코 사람들을 괴롭히고 힘겹게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다는 걸 믿으십니까? 믿음이 확고하면 확고 할수록 공덕은 더욱 크게 늘어나고 믿음 자체가 박약하면 쌓는 공덕도 별 볼일이 없습니다. 믿음의 자세로 공덕의 척도를 잴 수가 있습니다. 믿으려면 확고하게 믿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하고 물으면 있는 힘을 다해서「믿습니다」하는데, 불교인들에게「부처님을 믿습니까?」하고 물으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믿어요」합니다.「믿어요」해놓고 그 다음은 꿀 먹은 벙어리입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이다지도 힘겨운 상황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확고부동하게 부처님의 존재와 부처님의 실존을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무량 대자대비하신 광명의 실체라는 것을 확고히 믿어야 합니다. 스님들도 그렇고 불법을 설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심지《心地》을 분명히 갖고 분명히 심어주어야만 `원아불퇴보리심?이 되는 것입니다. 확고부동하지 않으니까 흔들흔들합니다.

부처님의 거룩하신 은혜는 나의 생명과 우리 국토, 온 세계에 넘치고 있습니다. 단지 기도가 부족해 체험해 보지 못해 그렇지, 부처님의 은혜는 온 우주에 넘실대고 있습니다. 참되게 믿지 않아서 그렇지, 부처님의 가득하신 자비는 이 세상 가득히 넘치고 있습니다.

모든 중생은 이같이 부처님의 은혜로운 공덕을 받고서 태어났습니다. 또한 그 은혜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온 중생은 모두가 일찍이 축복 받은 자들입니다. 거룩한 사명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나서 거룩한 삶의 역사를 열어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광대원만 무애대비심?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부처님의 거룩한 광명과 은혜로 살고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자를 중생이라 하였습니다. 무애한 차원으로 무한하게 걸림이 없이, 누구 한 사람 빠짐없이, 나와 너, 우리 국토 모든 중생을 전부 다 어루만지시는 그러한 마음을 `광대원만 무애대비심?이라 합니다. 그리고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리니 계청?의 의미는 이와 같은 관세음보살님의 무한한 위신력의 모두가 다 갈무리 되어져 있고, 또 부처님의 무상심심미묘한 비밀이 다 들어있는 천수대다라니를 깨우치기 원한다는 뜻입니다.

`계청?에서 계《啓》자는 계몽할 계, 깨우칠 계입니다. `내가 몸과 마음을 다해 스스로 깨우치고자 청하옵나이다?하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천수경의 의미를 모르고 바보같이 입으로 중얼거리기만 한다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2) 기도 없는 곳에 번창 없다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 1 】

계수관음대비주《稽首觀音大悲呪》

원력홍심상호신《願力弘深相好身》

천비장엄보호지《千비莊嚴菩護持》

천안광명변관조《千眼光明遍觀照》


낮출수록 높아지리라! ◐계수관음대비주◑

`계수관음대비주《稽首觀音大悲呪》?의 `계수?의 뜻은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입니다. 흔히 귀의《歸依》, 귀명《歸命》의 뜻이라고도 얘기합니다. `계수?의 참뜻은 몸과 마음을 다 던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경전의 첫머리에 `계수?란 두 글자가 나오는 이유를 분명히 이해하셔야만 합니다.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공부하기에 앞서 우리의 마음 자세는 문자 그대로 머리를 조아리는 마음이어야만 합니다.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이 중요롭지 않은 곳이 있겠습니까만, 그들 중 진실로 중요로운 부분은 머리입니다. 머리를 조아린다는 의미는 진실로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고 깨우칠 때 과연 어떠한 마음의 자세이어야만 하는 것인가를 숙연히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자기를 낮추는 마음 가운데 진보의 문이 열립니다. 교만한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불교의 수행법 중 중요한 것의 하나는 절입니다. 108배, 3천배 등 끊임없이 절을 올리는 이유는 한없이 나를 내려 낮추는 마음의 표시입니다. 나를 낮추는 가운데 높아지는 도리가 있습니다. 불교가 `계수?의 종교이기에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종교인 것입니다.

흔히들 `절은 하기가 힘들다? `절은 요즈음 시대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수행법이다? 등등의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얘기입니다. 절의 과학성과 인체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을 드렸지만, 정말 절 이상의 탁월한 수련법이 없음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정신과 육체 양면에 절만큼 심원한 효과를 가져다주는 수행법은 달리 찾을 길 없습니다.

불교는 진정 절이 있기에 성불하는 종교입니다. 절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 보신 적이 계신가요? 3천배, 만배 하시는 분들의 마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진정 원력《願力》 보살입니다. 마음 가운데 한없는 원력을 머금고 있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참다운 불제자, 참다운 수행자들은 진정 `계수?하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길 가운데 열반의 문이 열려 옵니다. 그 길 가운데 영원한 지혜와 복덕의 문이 열립니다. 항상 절 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관음대비주?란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하신 마음이 깃들어 있는 신령스러운 주문이란 뜻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의 신령스러운 주문이란 바로 천수경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계수관음대비주?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거룩하시고 대자대비하신 천수경에 예경을 올린다는 뜻입니다.

천수경은 신묘장구대다라니 뿐만 아니라 여러 중요로운 주문이 들어 있는 관세음보살님의 본심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들은 천수경을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귀의하는 마음으로 받들어 지녀야만 합니다. 천수경을 독경하며 받들어 모시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그들은 모두 넓고 깊은 원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상호는 관세음보살님을 닮아 거룩합니다.


관음의 원력 ◐원력홍심상호신◑

`원력홍심상호신《願力弘深相好身》?의 의미는 `계수관음 대비주?하는 수행자들의 마음과 몸의 자세를 의미하는 동시에, 관세음보살님의 경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진정 원력이 크고 넓은 사람은 그 상호도 그 마음을 닮습니다. 불교를 원력의 종교라 하듯, 원력을 지닌 사람들의 마음과 몸은 보통 사람들과 다릅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은 관세음보살님을 닮아 있습니다. 원력이 넓고 깊기에, 그리고 상호가 탁월하기에 그들은 천 개의 팔로 장엄하신 관세음보살님께서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가운데 관세음보살님의 마음을 닮아 갑니다.

사홍서원이라거나 여래십대발원문 등의 예를 보십시오. 그 원력이 얼마나 거대하고 거룩합니까? 사해《四海》를 다 가슴에 안을 듯한 원력이요, 서원입니다. 서원이란 원력이 승화된 자리입니다. 발원과는 차원이 다른 마음입니다. 천 개의 팔로 무량 중생들을 보호하시는 관세음보살님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항상 원력보살들을 지켜주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무한의 포용력 ◐천비장엄보호지, 천안광명변관조◑

`천비장엄보호지《千비莊嚴菩護持》?의 의미는 관세음보살님께서 한량없는 대자대비심으로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천비장엄보호지?는 `천안광명변관조《千眼光明遍觀照》?와 함께 관세음보살님의 무량한 보살심을 담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앞서 나온 천수천안의 의미와 `천비장엄보호지 천안광명변관조?의 의미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합니다. `천비장엄보호지?, 천 개의 팔과 천 개의 손【千, 千手】의 의미는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천 개의 팔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러한 팔과 손을 천 개 가졌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무한한 포용력을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손이란 모든 것을 끌어 안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또 손은 무한한 창조의 능력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손을 천 개씩 지니신 분이란 뜻은 관세음보살님의 무한한 포용력, 무한한 창조력을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이 같은 의미는 `천비장엄보호지 천안광명변관조?에 연결되어 관세음보살님의 위신력을 한결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천 개의 팔로 장엄하신 관세음보살님께서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내용은 참으로 거룩한 신앙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가 자력 신앙이라고 하지만, 이와 같은 자력을 바탕으로 한 타력 신앙이기에 무량대중들을 끌어 안을 수 있는 종교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내용은 흔히 금강경 등 여타의 경전에 등장하는 호념《護念》, 부촉《付囑》의 사상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천비장엄보호지?의 뜻은 `부처님께서 항상 우리를 보호하시는 마음을 품고 계시며, 또한 우리들에게 부처님의 무한한 능력을 부여해 주시고 부처님의 아들로 삼아주신다?는 금강경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열리는 자재의 세계

10자재의 경계는 부처님 법문 가운데 의미심장한 내용입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자유자재의 경계가 열린다, 다만 시간만이 문제일 뿐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이니까 부처님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시간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는 시간과 공간에 구속된 세계입니다. 씨를 심으면 자라야 열매가 열리는 세계입니다.

경전도 단계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아함경, 방등경에서는 `너희들은 갈고 닦으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것이다?라고 가르칩니다. 반야경도 마찬가집니다. 법화, 열반경에 가면 패턴이 좀 달라집니다. `너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처다, 그럼에도 부처임을 모르고 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너희들은 부처다?라고 가르치면 믿으려 들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너희들은 부처의 길로 가는 존재이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시간 속에 파묻혀 사니까요.

그러나 실은 우리들은 지금도 부처입니다. 다만 착각 속에 살면서 부처임을 모르는 부처님들이지요. 법화경에 들어가 보면 이 같은 사실이 여러 가지 차원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 착각을 깨는데는 우리들이 워낙 물질에 밀도 짙게 물들어 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따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 성불해 있습니다. 본래 성불의 존재입니다. 본래성불과 원래 성불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확실히 믿고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원래 부처이니까 기도를 하기만 하면 모두 다 성취되어 집니다. 자유자재로와집니다. 기도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면 끊임없이 기도하는 한 무한하게 자라서 부처의 경계가 됩니다. 지금의 능인선원 문제가 아닙니다. 20년 30년 끊임없이 계속 기도를 하게 되면 상상을 초월한 차원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스님, 어떻게 그렇게 그 많은 일들을 혼자서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묻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럴 때 저는「부처님과 함께, 관세음보살님과 함께 있습니다.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부처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지휘자는 원래 혼자입니다.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해도 콘덕터는 하나입니다. 여러 사람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단원들이 따라 주기에 아름다운 음악이 펼쳐집니다.

사실에 있어 모든 역사는 어떤 한 사람의 탁월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시작됩니다. 그 생각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역사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믿고 `내가 부처다?라고 확신하고 계속 뛰면 부처의 위신력을 힘입게 되고 이 땅 위에 대역사를 펼칠 가능성이 무한대로 자라나게 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스스로가 부처임을 포기합니다. 그 누구도 부처님입니다. 저는 확신 속에 살고 있기에 정말로 폭발적인 기세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정의 번창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먹고 잘 입으려 무언가 물질 위주로만 살아가는 삶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본래 성불의 존재라고 확신하며 살아 가십시오. 본래성불의존재라면 부처님답게 행동해야지 중생처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관자재보살의 10자재

처음 관세음보살이라고 하지 않고 관자재보살로 표시한 의미를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세계는 자유자재라고 하는데 10자재 뿐이겠습니까? 무한 자재이신데 단지 인간들이 살아가다 보니까 10자재 정도만 하더라도 모두가 해결되기에 그 정도로 나온 것입니다. 10자재만 제대로 나의 것으로 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부처님 경계가 됩니다.

10자재의 첫번째는 명자재《命自在》입니다. 명자재는 부처님 전에 기도하면 수명이 자재해 진다라는 뜻입니다. 마음 가운데 탁하게 오염된 것을 자꾸만 씻어내고, 죄를 짓지 않고 참된 마음으로 살아가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난국에 처해진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명자재입니다.

옛날에 `진묵?이라는 스님은 자신의 목숨을 마음대로 했다고 합니다. 진묵대사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내가 몇 월 몇 일에 열반에 들어야겠으니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나이 어린 사미승이「스님!, 그 날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정초여서 어려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라고 얘기 했습니다. 진묵 스님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도 그럴 듯해서「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미승이 그 다음날 돌아가시라고 했습니다.

마침 그 날짜가 닥쳐오니 스님이 또 내일은 가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번에도 그 날은 큰 49재가 들어왔는데 스님께서 그 날 돌아가시면 49재와 겹치게 되어 곤란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은 일리가 있으시다면서「그러면 49재 지나고 가야겠구나」하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 날이 지나자 홀연히 떠나가셨습니다. 죽음을 자유자재로 선택하실 수 있는 스님의 놀라운 법력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두 번째는 심자재《心自在》입니다. 기도를 하면 마음이 항상 안정되고 여유로워집니다. 마음속에 부처님을 모시면 어디를 가나 행복합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이런 원리를 다 깨닫게 되기에 기도하라고 계속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작업은 부처님을 만나는 작업이고, 스스로가 부처임을 입증하는 작업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사람들은 무한 번창의 길을 바라면서도 왜 이렇게 좋은 길을 잊고 사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러기에 어리석은 나머지 애꿎게 주위 사람만 원망합니다. 스스로를 원망하고 스스로의 게으름을 탓해야만 합니다.

세 번째, 업자재《業自在》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하면 업이 녹아져 내립니다. 기도는 업장소멸입니다. 좋은 업을 짓게 되고 또 기도하며 사니까 좋은 업이 쌓이게 됩니다. 기도를 오래 계속하다 보면 부처님 생각으로 가득하게 되어집니다.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이 모두 부처님 말씀이고 생각과 행동들이 모두 좋은 업으로 승화되어 집니다.

마음 가운데 부처님을 모실 때는 부처님과 하나 되지만 부처님을 잊어버릴 때는 악마와 하나가 됩니다. 악마가 여러분의 주변에 서성이면 고통스럽습니다. 고통을 받을 때 부모를 원망하고 조상을 원망하고 부처님을 원망합니다. 모두가 다 자기 탓인데도 말입니다. `광대원만 무애대비심?의 원천이신 분께서 왜 여러분을 괴롭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진노하는 하느님이요.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요」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참 이상한 하느님도 다 계시는 구나?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원천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진노하거나 질투하는 부처님도 아니고 시기하는 부처님도 아닙니다. 부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깨버리고 바벨탑을 깨버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다른 종교 얘기입니다만, 성경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벨탑을 인간의 교만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해석하면 그 의미가 선명해질 텐데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마음이라는 것이 궁극적 대상이 되지 않으니까 그런 이데아가 나올리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재앙도 인간들이 죄악과 자멸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깼다 이러지 말고 인간의 마음 가운데 존재하는 근본적인 양심, 참의 세계로 나아가는 마음이 쓰레기 같은 마음을 제거하는 과정 가운데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라고 얘기해야 옳습니다.

실천 없는 곳에 성불 없다

네 번째, 재자재《財自在》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공덕이 쌓이고 모여 재물의 궁핍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재물 때문에 항상 곤경을 느끼는 것은 지은 바 공덕과 복업이 짧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부처님 전 관세음보살님 전에 기도를 하게 되면 마음이 맑아져 저절로 부처님 전 관세음보살님 전에 공양을 올리게 됩니다.

공양의 결과는 항상 우리들을 복업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마음은 여러분들을 재물이 자재로운 경계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궁핍한 사람, 재물에 곤란을 느끼시는 분들은 열심히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제 그와 같은 경계가 열려지는 지는 직접 체험해 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번째, 생자재《生自在》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언제나 좋은 곳에 태어납니다. 내생에 복 받고 태어나려면 금생에 기도를 열심히 하세요. 부유하고 고귀한 집안에 태어나는 경계가 모두 생자재입니다.

여섯번째, 승해자재《勝解自在》입니다. `승해?는 `최고의 이해? `부처님의 이해?라는 말입니다. 기도하고 살면 머리가 맑아집니다. 두뇌 회로가 일관성을 가지니까 산란한 마음이 녹아지고 머리가 맑아집니다. 번뇌가 다 제거됩니다. 쓰레기같은 마음들이 다 스러지니까 모든 것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 눈이 열립니다. 기도하고 난 다음에 부처님 말씀을 들어보세요. 머리가 깨끗해진 상태에서 무엇이든 쏙쏙 들어옵니다. 워낙 쓰레기통 같은 사람은 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기도할 때는 곗돈 같은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관세음보살님 하나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마음 가운데 잡념이 일어나면 관세음보살님을 찾으세요. 마음의 쓰레기를 제거하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아이들도 기도를 많이 시켜야 합니다. 머리가 맑아져 공부를 잘하게 됩니다. 특히 공부를 못하고 산만한 녀석들은 기도를 많이 시켜야 합니다. 마음을 집중시키지 않고 머리를 맑게 하지 않으면 공부를 아무리 시켜보았자 헛일입니다. 머리를 깨끗하고 맑게 한 다음 공부하도록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기 전의 정지작업이 중요합니다. 집에서 기도를 시켜서 보내는 것이 훨씬 슬기로운 것입니다. 괜히 공부 못한다고 야단치지 말고 절 시키고 염불 시켜 보세요. 물론 전생에서 부터 복업이 많아 가지고 똑똑한 아들 딸들을 잉태한 그런 보살님들은 상관없겠지만, 그렇더라도 미래에 또 좋은 집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기도를 열심히 해야만 합니다.

일곱번째, 원자재《願自在》입니다. 원력을 갖고 열심히 기도하면 소원한 것이 모두 다 이루어집니다. 불교는 이미 말씀드린대로 원의 종교이니까, 한번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덟번째, 신력자재《神力自在》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신통력이 나오고 숙명통이 열립니다.

끝으로 아홉번째 지자재《智自在》과 열번째 혜자재《慧自在》입니다.

`지?는 일체 보이는 현상계에 대한 완벽한 통찰력입니다.

`혜?는 마음의 세계에 대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투철한 파악을 의미합니다. 신통력이 자재하게 되니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훤히 다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그저 보이는 세계에 밀착되어 살면서도 그 세계를 잘 모릅니다.

삶을 엮어 나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도를 바탕으로 살아가게 되면 소망하는 모든 것들이 자유자재 해진다는 것입니다. 자재란 `자유롭다, 마음먹은 대로 다 흘러 들어오게 되어 있다? 이런 뜻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분명히 아시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10자재라고 10가지를 하나하나 떼어서 얘기했지만, 부처님 경계는 떼어서 얘기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 경계는 광명입니다. 햇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태양처럼 햇살을 끊임없이 부어 주시는데, 여러분들 스스로 방벽을 치고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재력이 광대원만하게 두루 어디나 한계가 없이 무한하게 우리들에게 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바로 착각 속에 싸여 있고 무명 속에 싸여 있으며 미혹에 휩싸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온 중생, 온 세계, 온 우주는 부처님의 자비하신 은혜 속에 감싸여 있습니다?하는 내용이 바로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의 의미입니다. 이 모든 내용이 천수다라니에 다 들어 있으니까 기도하고 정진하는 마음 가운데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거두어 들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증적으로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대단히 중요로운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신 다음에라도 실제로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공을 하려는 사람이 행동을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듯이, 성불하려고 하는 사람이 기도하고 정진하지 않으면 성불할 수가 없습니다. 행동으로 엮어 나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법《法》이 불《佛》이요, 불이 곧 법이라고 했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이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바른 행동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저 1년에 한두 번씩 찾아와서 연등이나 달고 입춘 날 부적이나 받아가지고 가서는 안됩니다. 정말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그길 가운데 자재의 경계가 있습니다.


3. 무위심《無爲心》으로 승화되라!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 2 】

진실어중선밀어《眞實語中宣密語》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

속령만족제희구《速令滿足諸希求》

영사멸제제죄업《永使滅除諸罪業》


`참?만이 열매를 맺는다 ◐진실어중선밀어◑

부처님 말씀은 `참【眞】?입니다. `참?만이 열매【實】을 맺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항상 진실《眞實》입니다. 부처님은 진리이시고 법《法》이시기에 그를 따르는 자는 무한 영광이요, 번창입니다. 그러나 눈이 먼 자, 귀가 멀어있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법이며 진리이심에도 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어렵고 힘겨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닌데도, 그를 받아 들일 만한 마음 자세가 제대로 되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햇빛이 그 누구를 차별하는 것이 아니지만, 창문이 닫혀있는 집에는 비쳐 들 수 없는 원리와 같습니다.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고 마음의 귀가 열리지 않았기에 참된 말씀이며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말씀이지만,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진실된 말씀을 하시지만 항상 비밀스러운 의미처럼 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 소풍을 갔을 때 보물찾기 하던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물을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비밀스러운 곳에다 숨겨둡니다. 부처님의 거룩하신 진리는 그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마음의 귀와 마음의 눈이 닫혀있는 사람에게는 비밀스러운 내용처럼 들리고, 보이는 것입니다.

오염 없는 마음 ◐무위심내기비심◑

부처님 마음은 전혀 오염이 없는 마음입니다. 오염이 있는 마음이란 `나?가 있는 마음입니다. `나?가 있는 마음은 `아상《我相》?이 있게 되고, 그 마음 가운데 집착이 생겨납니다.

`나?가 있는 마음은 갖가지로 부처님 마음을 깨뜨립니다. 이기심이 생기고 탐욕이 생깁니다. 이기심과 탐욕으로 물든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 아닙니다. 그 마음은 베푸는 마음이 아니라 끌어 들이는 마음이요, 병든 마음입니다.

무위심《無爲心》은 `나?가 없는 마음입니다. 부처님 마음입니다. 부처님 마음은 무한자비의 마음입니다. 무위심 가운데 한 없는 자비심이 일어납니다.

무위심에 대칭되는 유위심《有爲心》이 있습니다. 유위심은 `나?가 있는 마음이요, 오염된 마음입니다. 번뇌에 찌든 마음입니다. 우리들은 부처님의 참 말씀을 통해 부처님 마음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부처님 마음은 문자 그대로 베풀며, 주는 마음입니다. 베푸는 마음, 부처님 마음을 닮은 마음은 무한한 공덕을 쌓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가운데 소원하는 모든 희구가 성취됩니다.

속히 이루리라! ◐속령만족제희구◑

이 우주는 뿌린 대로 거두는 세계입니다. `무위심내기비심?의 사람은 분명 `속령만족제희구《速令滿足諸希求》?의 경계를 열어갈 것입니다.

`속령만족제희구?의 의미는 `속히 그들로 하여금 모든 희구하는 바를 만족시켜 주리라?의 의미로 해석되어집니다. 참다운 마음, 무위심의 사람은 베푸는 마음의 사람이기에 스스로의 소원하는 바, 희구하는 바를 모두 이룹니다.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희구하는 바 있는 사람, 소망하는 바가 있는 사람은 먼저 씨부터 뿌려야 합니다.

씨를 뿌린 다음에 라야 수확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뿌리지 않고 거두려는 사람은 애가 타고 괴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질병의 포로가 되기 십상입니다.

진실로 기도해야만 되는 이유, 마음 가운데 번뇌 망상을 씻어내고 무위심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 같은 마음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부처님 말씀대로 살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만이 소구하는 바를 속히 달성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무엇인가 이루려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모두 기도와 정진 끝에 자신의 소망을 달성해가는 이유를 면밀히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 가운데 기도를 통해 자신의 행로를 열어가지 않았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음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무위심의 사람은 모든 희구하는 바를 속히 만족시킴과 동시에 다겁생래 쌓아올린 모든 죄업들을 영원히 소멸시키고 제거하게 됩니다.

업장소멸의 경계 ◐영사멸제제죄업◑

`영사멸제제죄업《永使滅除諸罪業》?이란 `영원히 그들의 마음 가운데 모든 죄와 업장들을 소멸시키고 녹여내리게 되리라?하는 뜻입니다. 억겁을 두고 쌓아온 죄와 업장은 마음을 갈고 닦아 무위심이 되어짐으로 인해 소멸됩니다.

진실로 부처님의 참된 말씀, 비밀스러운 뜻을 담고 있는 말씀을 통해 무위심으로 승화되어 지는 것이 우리 수행자들의 소망입니다. 그 같은 마음 가운데 참된 자비심이 일어나고, 그 결과 모든 희구하는 바는 속히 만족되어질 것이고 모든 죄와 업장들은 저절로 녹아질 것입니다.


4. 광명의 깃발을 높이 들라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 3 】

천룡중성동자호《天龍衆聖同慈護》

백천삼매돈훈수《百千三昧頓薰修》

수지신시광명당《受持身是光明幢》

수지심시신통장《受持心是神通藏》


화엄신장들의 가호지묘력 ◐천룡중성동자호◑

물은 수로《水路》이 깊게 패이고 넓직하게 뚫려서 물이 콸콸 한 곳으로 흘러가야 힘찰 수가 있습니다. 물의 힘을 이용한 수력발전소를 보면, 큰 뚝으로 댐을 쌓아 일년 내내 비를 받아 둡니다. 장마철에 물이 넘치게 되면 수문을 활짝 엽니다. 그러면 그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수문《水門》으로 빠져 나갈 때 생기는 무진장한 힘으로 터빈을 돌려 전력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그와 같이 한 곳으로 흘러가야지만 큰 힘을 발《發》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으면 흡사 물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흐르는 것과 같이 제대로 힘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지리멸렬《支離滅裂》이라고 하지요. 지리《支離》, 가지가지 찢겨져 있으니까 멸렬《滅裂》, 흩어져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군대도 단단히 뭉쳐있으면 깰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공략을 하는 방법은 게릴라 전법을 쓰는 것입니다. 적국의 한 가운데로 간첩, 스파이를 집어 넣어서 분열시킵니다. 그 나라와 왕에 대해 욕도 하고 정치 못한다고 나쁜 얘기들을 고의로 마구 퍼뜨리면 민심《民心》이 흩어지고 갈라집니다. 그럴 때 때리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지리멸렬 되어 있으니까 공략하기 쉬운 것이지요. 전쟁에도 다 전법《戰法》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몸이나 마음도 지리멸렬 되어 있으면 외적이 침범하기 쉽습니다. 외적이란 질병이나 재앙의 형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항상 한 곳으로 정리가 되고 집중이 되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갈라져 있을 때 오열《五列》이 쳐들어오는 법입니다. 그것은 에누리 없는 사실이요, 이 우주의 철칙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한곳으로 모여 있을 때는 온 몸에 펼쳐져 있는 신경의 흐름이 질서 정연해지고 정신도 아주 맑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항상 모여 있어야 합니다.

조금 전에 수로《水路》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만, 마음이 한 곳으로 모여있게 되면 수로로 물이 일정하게 흘러가듯이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온 혈액도 온 몸을 질서 정연하게 흘러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지리멸렬한 상태가 계속되면 변덕이 심해집니다. 변덕이 죽 끓 듯하는 사람은 수로가 일정치 못한 물줄기처럼, 혈액의 흐름이 고르지 못합니다. 마음을 이렇게 썼다, 저렇게 썼다 하면 심장에 부담이 가 피가 흐르는 속도도 일정치 못해 부정맥《不靜脈》같은 아주 위험한 병이 생기기 쉽습니다. 심장을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가 고르게 흘러가도록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엘마 게이트《Ellma Gaytt》란 유명한 심신상관《心身相關》의학자는 치료를 할 때 동양의 명상법이나 참선법을 도입하여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질병이 상당히 심각한 상태에 가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앉혀 놓고 일정 기간 명상을 시켰더니, 질병이 쾌유되는 속도가 빨라지더라는 것입니다.

환자를 앉혀 놓고 마음이 모이도록 하나만 가르칩니다. 명상을 시키거나 참선을 시키며 화두를 들게 한다든지, 관세음보살님을 염송 시키거나 `옴 마니 반메 훔? 같은 진언 하나 만을 외우게 하면 마음의 안정 상태를 확보하게 되고 그 결과 질병이 속득쾌차 됩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병이 빨리 낫게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리멸렬했던 파이프 라인《pipe line》이 뻥뻥 뚫려서 강한 에너지가 콸콸 흘러드니까, 약한 세포에도 힘이 흘러들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혈관으로 피가 막힘없이 흘러다니니 나쁜 병원체가 죽어버리고 독소들이 다 빠져나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경이 지리멸렬 되어 있으면 각양각색의 질병 현상들이 다발적으로 생겨납니다. 관세음보살님과 화엄성중님을 소리 높여 불러 모시는 순간에는 마음이 하나로 모아집니다. 신체의 지리멸렬하고 깨어져 있던 메카니즘이 하나로 통합되는 작용을 합니다. 관세음보살님과 화엄성중님을 부르면서 마음의 수로를 하나로 뚫어나가는 작업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할 때 그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피도 온 머리로 몸으로 일관성 있게 흐르기에, 모든 세포에 영양 공급이 잘되고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절을 계속하면 머리가 맑아지는 이치도 여기에 있습니다. 수로가 열려 콸콸 흘러가니 머리가 좋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머리가 나쁘고 주위가 산만한 아이들은 기도와 절을 많이 시켜야 됩니다. 기도하는 작업은 진실로 수로를 활짝 열어가는 작업입니다. 마음 가운데 관세음보살님을 자꾸 불러 모셔야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사실입니다. `화엄성중 화엄성중,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자꾸만 염《念》하는 그 순간보다 마음의 수로를 더 확실히 여는 작업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마음이 한 곳으로 흘러가면 갈수록 혈관도 한 곳으로 흘러가고 신경도 한 곳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정신집중도가 강해지고 파이프 라인이 하나로 통해서 영양분이 온 몸에 고루고루 공급되기 때문에 병이 쾌차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신 분들은 머리가 맑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영양 공급이 적절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안개 끼인 듯 찌푸둥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멍한 사람들은 뭔가 알 수 없는 병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신체의 파이프 라인이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런 분들은 기도를 많이 하셔야 됩니다. 수로가 튼튼해야, 그 튼튼하고 커다란 파이프 라인으로 `천룡중성동자호《天龍衆聖同慈護》?, 즉 불보살님들과 화엄신장님들의 가호지묘력이 콸콸 흘러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막혔던 파이프를 뚫는 기도

기도를 할 때는 화엄성중님과 관세음보살님을 규칙적이고 일관성 있게 염송하셔야 됩니다. 능인선원의 기도하는 법들도 다 이 같은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능인선원에서는 혼자서 유별나게 튀는 목소리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없지요. 한 덩어리가 된 목소리로 관세음보살님 명호를 함께 부르면 서로에게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절에 가 보면 정근이 동음창화《同音唱和》이 되지 않고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기도는 파이프 라인이 하나로 통하지 않아서 헷갈려 버립니다. 파이프 라인이 뻥 뚫려야 그 곳으로 화엄신장님들의 가호지묘력이 콸콸 흘러 들어오는 법입니다.

사람들의 심전도《心電圖》을 한번 점검해 보면 제 각각 다 다릅니다. 심전도는 사람마다 똑같은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심장의 파동이 강해야 건강한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심전도가 사람마다 다른 것은 그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다르니까 심전도가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의 수로도 어떤 사람은 넓고 어떤 사람은 형편없이 좁습니다. 기도가 안 되는 사람은 그 마음이 모아지지 않아서 그러합니다. 파이프 라인인 생명관《生命管》이 약하니까 부처님의 가호지묘력이 쏟아져 들어 오지를 못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밤 늦게 동해 바다를 건너가 보면 환하게 빛나는 배는 모두 오징어 잡이 배입니다. 오징어 배는 캄캄한 밤에도 환히 빛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파이프 라인이 크고 굵으면 불보살님들과 화엄신장님들이 모두 다 보시게 됩니다. 그 생명의 파이프 라인이 굵고 크기에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부처님의 가호지묘력을 훨씬 더 많이 받게 되는 것이지, 부처님께서 특별히 어떤 사람에게만 더 많이 베푸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파이프 라인은 평상시에 항상 크고 굵게 열어 놓아야 합니다.

전선도 굵은 것이 있고 가는 것이 있습니다. 굵은 전선으로는 전류가 콸콸 힘차게 흐릅니다. 전선이 가늘면 전류도 영 시원치 않습니다. 전류의 흐름은 도선의 굵기에 비례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전기의 도선과 같이 우리 마음의 파이프 라인도 크게 만들어 놓고 볼 일입니다.

파이프 라인을 크게 만드는 작업에는 기도하는 작업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 드릴 것은 화엄신장님들과 천용팔부신장님들이 이 허공계에 가득히 계신다는 점입니다. 기도를 참으로 많이 하셔야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하시면 집안에 정말 좋은 일들이 각양각색으로 찾아 듭니다. 이 우주에는 부처님의 가호지묘력이 가득 차있는데, 사람은 자기가 지닌 파이프 라인의 크기 밖에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의 파이프 라인이 약하디 약하고 콱 막혀 있으니까 아무리 받아 들이려 해도 자꾸만 옆으로 새어 나가는 것입니다. 막힌 파이프를 뚫어야 합니다.

법화경에도 나오듯 관세음보살님과 화엄성중님을 부르는 만큼 머리가 맑아집니다. 얼굴에 밝고 환한 광채를 띄게 됩니다. 화엄성중님들께서 밝고 빛나는 얼굴을 보시고는 `아, 이 녀석은 기도를 많이 했구나!?하고 금방 알아보십니다. 그러면서 `이 녀석은 나의 아들?이라고 어여삐 여기시며 가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왕이나 재상하고 친구가 되면 다른 사람들이 시비를 잘 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잡귀들이 붙었다가도 강한 사람과 가깝게 있으면 범접을 못합니다. 내가 사장과 친하면 다른 직원들이 시비를 못 걸듯이 기도를 많이 한 사람들은 천룡중성들이 와서 함께 자비로운 마음을 내어 보호를 해 주십니다. `천룡중성동자호?가 되어야 `백천삼매돈훈수《百千三昧頓薰修》?가 되는 법입니다.


삼매는 영원과 하나된 마을 ◐백천삼매돈훈수◑

`백천삼매?라 할 때 `삼매?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삼매《正三昧》이며, 또 하나는 사삼매《邪三昧》입니다. 정삼매란 기도를 자꾸 해서 마음의 파이프 라인이 튼튼해진 경지를 말합니다. 부처님 세계와의 파이프 라인이 튼튼해서 오랜 세월이 흐르면 법력이 강해집니다. 진정으로 영적인 능력이 열린다거나, 법력이 쌓인다거나, 자기 마음 가운데 뭔가 영원성이 강화된다거나 하는 것은 정삼매입니다.

사삼매란 노름이나 당구나, 자꾸만 뭘 하다 보면 그 방면으로 무엇인가가 열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의 영원성의 세계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이렇듯 삿된 경계를 사삼매라 합니다. `백천삼매돈훈수?라는 말은 마음 가운데 영원성을 희구하는 마음이 계속 닦여지고 기도가 쌓이면 부처의 경계가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용《龍》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정말 허공계에는 많고 많은 화엄신장님들과 천룡들이 있습니다. 용을 실제로 못보셨으니까 믿기 어려우실 테지만 용은 정말 있습니다. 저는 용꿈을 자주 꿉니다. 꿈 속에서 용을 한 두번 본 것이 아닙니다. 퍼런 비늘이 달린 용이 와서 웃기도 하고 같이 놀자며 춤을 추기도 합니다. 수염이 돋은 용도 있습니다. 정말 기도가 잘된 보살에게는 용이 보여집니다. 용꿈을 꾼 사람들은 화엄신장님들의 가호지묘력이 함께 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만 없지, 보이지 않는 세상에는 용이 있습니다. 저는 용하고 같이 놀기도 했는데 그게 환상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환상이고 빈 소리면 부처님께서 용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 옛날 도인들이 지은 지명《地名》 같은 것도 예사로 붙여진 것이 아닙니다. 용두동이니, 용인이니, 용산이니, 계룡산이니, 구룡산이니 하는 용《龍》자 붙은 그런 지명들은 산신령님들이나 화엄신장님들의 가호지묘력이 함께하는 장소입니다. 용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용이란 글자 자체가 없어졌을 것입니다.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같은 곳에서 나오듯 `불휘기픈 나무는 바라매 아니뭘씨 곶됴코 여름 하나니 시미 기픈 므른 가뭄래 아니 그츨새 내히 이러 발아래 가나니?【완성형으로 나오지 않는 글씨 때문에 약간 바뀌었음】에서 보듯, 필요 없고 쓰이지 않는 글자는 자꾸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용이란 글자는 필요 없는 글자가 아니니까 아직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저 먼 과거로부터 필요 없고 뭔가 헛되고 삿된 건 다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말 한대로 `언어는 다 유기체?이기 때문에 쓰임이 없는 언어는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용이란 낱말은 생생하게 지금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가운데에도 용꿈을 꾸어본 사람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용꿈 꾸어본 사람들이 계시기에 용이란 말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태몽에 용꿈을 꾸면 좋다고 들 하지 않습니까? 색깔이 아주 찬연한 청룡, 황룡도 있습니다. 기도를 작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부처님, 저에게 청룡, 황룡을 보여주십시오」하면 홀연히 꿈 속에서 청룡, 황룡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의상대사 이야기에도 선묘공주가 청룡으로 변해 부석사돌을 날라왔다는 것 아닙니까?

`천룡중성동자호?란 이렇듯 하늘에 있는 많고 많은 용들과 화엄신장님들이 다 함께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호해 주시고, 주변에 있는 모든 잘못된 악귀, 사마들을 물리쳐주신다는 뜻입니다. 화엄신장님들과 친하면 그 분들이 두호해 주셔서 잡귀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면 잡귀가 다 달아나 버리니까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백천삼매돈훈수《百千三昧頓薰修》?의 돈《頓》은 갑자기란 뜻이고, 훈《薰》은 안개나 향기가 뭉게뭉게 퍼져가는 모습입니다. 수《修》은 닦을 수 자입니다. 백천삼매를 순간에 얻는다는 뜻은 기도를 시작하면 이내 일념 상태에 쉽게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광명의 깃발이 되라 ◐수지신시광명당◑

일념이 되어 관세음보살님 기도를 하는 사람은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생깁니다. 이런 강한 힘을 바탕으로 나가는 사람을 `수지신시광명당《受持身是光明幢》? 이라 부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힘이 강하기 때문에 깃발을 들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광명당《光明幢》이란 `광명의 깃발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불교를 광명당의 종교, 행동의 종교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공부를 할 때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서 머리 속으로 `아! 그렇게 하는 거로구나?하고 생각하는 것으로만 끝낸다면 별 소용이 없습니다. 직접 자기가 그 문제를 풀어보지 않으면 잘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듣는다 하더라도 직접 실천해 보지 않으면 그 의미를 모르게 됩니다. 직접 실천해 보는 사람들만이 강한 힘으로 깃발을 들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아들, 딸 여럿을 둔 큰 부농《富農》이 있었답니다. 그가 죽기 전에「내가 큰 보배를 땅속에다 묻어 두었으니 너희들이 협조해서 캐서 갖도록 하라」은 유언을 남겼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아들 딸들이 정말 땅 속에 보배가 있는 줄 알고 이땅 저땅, 이밭 저밭을 온통 파 헤쳐 보았습니다. 그러나 1년을 파고 2년을 파고 10년을 계속 파도 그 보배는 나오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랫동안 땅을 파헤치다 보니 그 밭에 곡식을 심기만 하면 대풍이었습니다. 땅을 판다고 땅을 갈아 놓았으니 그럴 수 밖에요. 세월이 한 십년 쯤 지나고 보니, 아들 딸들이 그 때서야 느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 아버지가 땅 속에 보배를 묻어 놓았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구나?하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한 10년 정도 계속 자기 마음을 파 보십시오. 그러면 그 마음밭에서 무엇이 나오나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어마어마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기도는 위대한 자의 운명입니다. 정말 원력을 머금고 위대한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한 인간들 외에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정말 쉬운 작업이 아니거든요. 하루 이틀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속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마음은 위대한 자의 운명이라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침묵의 시간은 자기가 자기를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화엄성중님, 관세음보살님 같은 영원의 존재를 내 마음 가운데 자꾸만 머금으니까 내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부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지신시광명당?이 되어 저절로 힘이 샘솟아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솔선해서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몸으로 하여금 광명의 깃발을 들리고 남들보다 앞장서서 자신만만하게 당당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위대한 자의 운명 ◐수지심시신통장◑ 1

그러한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한 탓으로 파이프 라인이 뻥뻥 뚫려있기 때문에 `수지심시신통장《受持心是神通藏》?이 되는 것입니다. `수지심시신통장?이란 `부처님의 법력 받아 지닌 저희 마음 신통력의 곳집【창고】이라?의 뜻입니다. 마음 가운데 이른 바 거룩하신 화엄신장님들과 불보살님들의 신통도력이 흘러들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자꾸만 하다 보면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분명한 사실은 기도는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 보면 원하는 것은 모두 다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고, 얻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한 10년 동안 죽자하고 기도를 해 보세요. 무엇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주변의 상황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시면서 말입니다. 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도해 보시면 자기 주변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 딸들이 부모 말을 안 들어서 기도를 했더니 그 아들 딸들이 다 부처님께로 오더랍니다. 기도를 하면 벌레들도 사람들의 말을 알아 듣는 도리가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들 제도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 신랑 법당으로 오게 해 주십시오?하고 자꾸만 기도하면 그 기도의 위력으로 그렇게 됩니다. 백날 이야기만 하면 뭘 하나요. 먹어봐야 맛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직접 행하지 않으면 불교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몸으로 하여금 광명의 깃발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시고, 이 마음으로 하여금 신통의 곳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자꾸만 기도를 하면 정말 광명당이 되고 신통장이 되어집니다. 천룡중성들이 보호해 주고 주변에 잡귀가 없어지니까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습니다. 백천삼매가 항상 마음에 가득해지고, 곧바로 부처님과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교 신자들은 항상 광명의 깃발을 들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용맹 무쌍한 행동파의 기수가 되어야만 합니다. 자신감이 없으면 행동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서 부처님의 팔만사천대장경을 다 꿰뚫는다 하더라도 한 마디 실천하는 사람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사람은 못 당하는 법입니다. 토끼가 아무리 뛰는 능력이 출중하다 하더라도 거북이한테 질 때도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재주가 아무리 출중하더라도 실천이 없으면 안되는 법입니다. 걷는 자 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뛰다 보면 오래 못갑니다. 꾸준히 걷는 자 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꾸만 기도를 해 보시면 느껴집니다. `수지심시신통장?, 마음에 신통력의 창고를 지니게 되고 아이디어가 백출합니다. 머리가 확확 열려서 자꾸만 부처님의 이데아가 떠오릅니다. 저는 매일 법회를 하고 살면서 항상 이렇게 기도합니다. `

부처님! 항상 부처님의 육성을 흐르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언제 어느 곳에 가서 어떻게 입을 열어도 부처님 말씀이 흘러 나오리라 확신합니다. 여러분들도 기도해 보세요.

`수지심시신통장?이라 할 때 신통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신통력, 신통도사 등등의 말을 많이 합니다. 신통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신령스러운 힘과 통하는 경계를 의미합니다. 부처님께서도 5신통, 6신통 등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통력이 자재한 경계를 부처님의 경계라 하셨습니다.

6신통의 경계를 살펴 보면

첫째, 신족통《神足通》이라 해서 생각하는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비행자재의 경계, 마음대로 상《相》을 바꿀 수 있는 변화무쌍의 경계, 외계《外界》의 대상을 마음대로 하는 수의자재《隨意自在》 경계의 세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수의자재의 경계는 성여의《聖如意》의 경계라 하여 부처님만이 가지고 계신 경계라 합니다.

둘째, 천안통《天眼通》은 우주 법계를 망라해 모든 것의 원근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경계를 말합니다.

셋째, 천이통《天耳通》은 우주 법계를 망라해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경계를 말합니다.

넷째, 타심통《他心通》은 타인의 마음 속 모든 선악의 작용을 꿰뚫어 아는 경계를 말합니다.

다섯째, 숙명통《宿命通》은 자타《自他》의 과거세의 생존 상태를 모두 아는 작용을 말합니다.

여섯째, 누진통《漏盡通》은 번뇌를 모두 끊을 수 있어 두 번 다시 미계《迷界》에 태어나지 않는 경계를 말합니다. 특히 누진《漏盡》이란 모든 `새는 경계를 다한 상태?라 하여, 일체 번뇌로 생기는 눈물 침 등이 다해 다시는 사람 몸을 받지 않는 경계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지니고 계신 숙명, 천안, 누진의 3통《通》을 3명《明》이라고도 합니다. 특히 부처님의 천안《天眼》은 미래세에 중생의 태어나고 죽는 모습을 밝게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라 합니다. 부처님의 6신통은 모두 혜《慧》을 본질로 하고, 그 중 5신통은4선《禪》을 닦음으로써 증득하므로 성자뿐만 아니라 범부도 닦을 수 있다 합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오로지 부처님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합니다.


기도는 위대한 자의 운명 ◐수지심시신통장◑ 2

성실론《成實論》에 보면 불교 밖의 외도에서도 5통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5통을 얻은 선인《仙人》을 5통 선인이라 합니다.

신통에는 귀신《鬼神》이나 제천《諸天》등과 같이 태어나서부터 갖고 있는 생득《生得》신통과 8선정을 닦음으로 해서 중득한 후득《後得》 또는 수득《修得》신통이 있습니다.

신통을 얻는 방법에는 색계에 태어남으로 해서 그 과보로 자연히 얻어지는 과보통《果報通》, 선인《仙人》이 업《業》을 닦은 힘으로 하늘을 자유로이 나는 업통《業通》, 바라문 등이 주문을 오래 지송함으로 해서 모양을 바꿀 수 있는 주통《呪通》, 선정을 닦음으로써 얻게 되는 수통《修通》등의 4가지가 있습니다.

특히 업통과 주통은 외도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밖에 신통력을 5가지로 분류해 5종통《五種通》이라 하기도 합니다.

도통《道通》:도《道》의 이치를 깨달아 무심《無心》이 되어 능히 사물에 따라 자재한 통력

신통《神通》:선정에 의해 마음이 정적하게 되어 사물을 관찰 사유해서 숙명을 아는 등의 통력

의통《依通》:약이나 부적, 주문 등에 의해 얻는 통력, 외도 등에 행해지는 통력

보통《報通》:업의 과보로 자연히 얻게 되는 통력, 끊임없는 나름대로의 세계를 닦음으로 얻어지는 통력

요통《妖通》:요괴 등 잡귀 등이 갖고 있는 통력, 갖가지 요마《妖魔》, 삿된 존재 등의 통력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신통의 경계는 모두가 우리 마음이 갖고 있는 능력으로 수행을 거듭함으로써 차츰 획득되어지는 경계인 것입니다. 신통 도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신통력이란 혹세무민《惑世誣民》하기 위해 얻으려 하거나 함부로 쓰게 되면, 그 재앙이 대단히 엄중함을 부처님께서는 크게 경계하셨습니다. 그 대표적 얘기가 바로 빈두로《Pindola》존자의 얘기입니다.

빈두로존자는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목련존자 다음으로 신통이 자재한 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왕사성에 내려갔다 오는 도중, 시장 한복판에서 신통 대회가 열리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시장판 한 가운데 수십 척 짜리 장대 끝에 값진 전단향 바루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때 주최자가「누구든 신통력이 있는 사람이 저 바루를 따 가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빈두로존자는 이 말을 듣고 어렵지 않게 팔을 뻗쳐 수십 척 장대 끝에 있는바루를 따냈습니다. 빈두로존자는 의기양양한 마음이 되어 부처님을 찾아 이 사실을말씀 드렸습니다.「부처님, 부처님의 제자 빈두로가 신통 대회에서 1등을 해 최고가는 전단향 바루를 차지했습니다. 부처님 제자가 신통력에 있어 천하 으뜸임을 입증했습니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칭찬을 들을 줄만 알았던 빈두로존자는 부처님께 호된 꾸지람을 듣고 엄한 벌을 받았습니다. 부처님은「내 일찍이 모든 제자들에게 함부로 신통을 부리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신통을 함부로 부림은 참된 도의 길을 가는 수행자가 아니니라」고 호되게 꾸지람을 한 뒤「너는 내가 열반한 뒤 열반에 들지 말고 미래세 미륵부처님이 오실 때가지 이 땅 중생들을 제도하도록 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아직도 부처님의 분부대로 빈두로존자는 모든 제자들이 열반에 들었음에도 열반에 들지 못하고 사바세계를 이곳저곳 다니면서 중생들을 제도하고 있다 합니다. 각 사찰에 모셔져 계신 독성《獨聖》님이 바로 빈두로존자이십니다.

경전에 나오는 신통에 관한 일화를 하나만 더 소개합니다. 부처님 당시 바사익왕이신하들에게 얘기했습니다.「얘들아! 예전에 내가 어렸을 시절에는 탁월한 신통도사들이 많아 내 마음 한량없이 즐거웠으나, 이제는 예전 같이 탁월한 신통도사가 없는지 심심하기 짝이 없구나. 너희들이 나라에 방을 붙여 탁월한 신통도사를 찾아내 왕궁으로 데려 오도록 하라. 후히 상을 주리라」하였습니다.

많고 많은 신통도사들이 왕궁에 불려 왔으나 모두 왕의 마음에 시들하였습니다. 왕의 마음을 안, 한 신하가「대왕폐하! 제가 듣기로 영축산에 있는 고타마란 분이 신통도력이 출중하다 하더이다. 명령을 내리시어 그를 불러오면 대왕폐하의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은 신하를 시켜 부처님을 찾아보게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초지종을 다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신하여! 내가 하나 묻겠다. 하늘을 날고 물 위를 걷고 신통이 자유자재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어떠한 느낌이 들더냐? 그 같은 신통의 힘으로 인해 네 마음이 변하더냐? 그 같은 것은 참으로 하등한 신통이니라. 부처님의 거룩한 법문을 전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이상으로 참 신통은 없느리라. 네 왕에게 가서 전하도록 하라」

갖가지 신통은 거저 눈요기 꺼리나 될 뿐 참다운 신통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부처님 말씀이셨습니다. 하늘을 날고 땅 속을 다니는 것이 참 신통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에 법문을 전해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이상의 신통이 없다 하신 부처님 말씀을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5. 고통 중생들을 제도하라!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 4 】

세척진로원제해《洗滌塵勞願濟海》

초증보리방편문《超證菩提方便門》

아금칭송서귀의《我今稱誦誓歸依》

소원종심실원만《所願從心悉圓滿》


번뇌 망상을 씻는 작업 ◐세척진로원제해◑


`세척진로원제해《洗滌塵勞願濟海》?, 이것은 다짐입니다. `세척?은 무엇입니까? 씻어낸다는 뜻입니다. 뭘 씻어 낼까요? 티끌진《塵》, 노고롭고 힘들다는 뜻의 노《勞》, `진로?란 티끌로 인한, 즉 물질로 인한 괴로움이니까 바로 우리 마음의 번뇌 망상을 말합니다. 우리들은 항상 세척진로, 즉 우리의 번뇌 망상을 씻어내어야만 합니다.

번뇌 망상을 씻어내는 작업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떻게 해야 번뇌 망상을 씻어 낼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자기를 자꾸만 돌아보는 것입니다. 마음 가운데 자꾸만 번뇌 망상을 씻어내고 또 씻어내고, 그렇게 씻어내면 낼수록 마음은 점점 밝아지고 맑아져서 건널 제자, 바다 해자-제해《濟海》, 고통의 바다를 건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마음 가운데 있는 번뇌 망상에 휩쓸려 지내다 보면 이 사바를 떠날 수 없게 됩니다. 이 세상의 많고 많은 중생들은 모두가 욕망의 포로가 되어서 삽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살면, 부처님 세계로 떠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아미타경에서도 공부했지만, 이 지상 세계 말고도 너무도 찬연한 세계가 이 우주에는 많이 있습니다. 지구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은 너무도 초라한 세상입니다. 허름한 세상이지요. 정말 환경이 참으로 아름다운 그런 별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좋은 별들이 가득한 우주입니다. 여기서는 다이아몬드 몇 캐럿짜리 하나만 해도 비싸다고 하지만, 저 극락이라거나, 아촉불국이라거나, 그와 유사한 좋은 국토에는 온 세상이 다 아름다운 보석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다이아몬드,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같은 보석을 하나 사려고 해도, 땀 흘려가며 모은 많은 돈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세상에 가면 칠보로 된 연못뿐만 아니라, 찬연한 보석들이 즐비하게 널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난간들이 다 아름다운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답니다.

그 세상은 또한 남자 여자의 구별도 없다고 합니다. 남자 여자가 없으니까 괴로움이 훨씬 덜한 세상이지요. 이 세상의 법칙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야지 뭔가 되는 세상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그렇게 업에 끄달려 살면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게 됩니다. 애욕을 이겨내고 이 지상 밖으로 나가야 되는 것인데, 남들하고 똑같이 사랑하고 살면 끊임없이 윤회할 수 밖에 없게 되지요.

그래서 수행자들은 이렇게 남과 다른 생활을 하며 노력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명심해야 될 일은 이 세상의 허름한 것에 자꾸 관심을 가지게 되면 이 세상을 뛰어 넘을 수가 없어 자꾸 윤회를 거듭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 속에 열리는 초월세계 ◐초증보리방편문◑

`초증보리방편문《超證菩提方便門》?의 초《超》은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보리도를 증득해서 자꾸만 기도하며 나아가다 보면, 마음 가운데 방편의 문이 열려서 자꾸만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마음의 새로운 세계, 초월적인 세계가 열려옵니다. 기도를 자꾸하다 보면 마음 가운데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방편이 자유 자재로워집니다.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도 자꾸 기도하며 사시는 분들은 기억력은 좀 쇠퇴된다 하더라도 생각은 깊어집니다.

제가 처음 스님이 되어 산중에서 기도를 할 때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부처님 기도도 하고, 화엄신장님 기도도 하고, 보살님전 기도도 하며 아무튼 열심히 정진했습니다. 그 때 화엄신장님을 한 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화엄신장님을 한번 좀 만났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더니, 어느날 정말 문득 저 위 허공에서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낮에 꿈도 아닌 비몽사몽간에요. 엉겁결에 허공을 쳐다 봤더니 키가 수십 척은 되어 보이는 어떤 이가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습니다. 경전에도 키가 몇 미터나 되는 신장님들 얘기가 나오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분이 화엄신장님이로구나 싶었습니다. 그 이후도 여러 번 봐 왔지만, 참으로 희귀한 체험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화엄신장님들을 직접 뵙고 싶으시면 기도해 보세요. 지붕 천장을 뚫을 만큼 키가 큰 분이셨습니다. 그때 느낀 것은 우리 시골 마을 동구 밖에 서 있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같은 것도 모두가 우리 선조들이 신장님들을 보고 만든 영감과 슬기가 깃든 것이다 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동구 밖을 지켜주는 그런 존재들이 신장들이라 생각해서 동구 밖마다 세워둔 것입니다. 정말 예삿일이 아니고 무언가 의미성이 있는 일들입니다. 상호는 우락부락하게 생겼지만 어떤 의미성을 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맹세코 귀의 하리! ◐아금칭송서귀의◑

`아금칭송서귀의《我今稱誦誓歸依》?, 맹세코 부처님전에 귀의 하옵니다 하는 의미입니다. 끊임없이 정진해 나가다 보면 부처님께 대한 한없는 신심《信心》이 쌓입니다.

원력《願力》을 세우고 나아가는 가운데 만상이 다 기도 속에 성취되어짐을 깨닫게 되고, 그 결과 부처님을 향한 한없는 칭송, 찬탄의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기도 정진을 거듭함에 따라 그 같은 마음은 더욱 더 굳어지고 부처님께 맹세코 귀의하리라 하는 마음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맹세코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 다시 말하면 기도하는 마음을 서귀의《誓歸依》라고 표현했습니다. 사홍서원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기도 마음은 원만성취의 마음 ◐소원종심실원만◑

`소원종심실원만《所願從心悉圓滿》?의 `소원?은 `원하는 바 모든 것?이고, `종심?은`마음 먹은 대로, 마음 자리 따라서?란 뜻입니다. `실원만?이란 `실로 다 이루어진다?는 풀이가 됩니다. `원하는 바 모든 것이 마음 따라 이루어지리라?하는 기원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통해 모든 것을 이루고자 할 때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우선 여러분 마음 가운데 모든 욕망, 집착, 번뇌 망상 등이 녹아져 내려야만 합니다. 기도하거나 무언가를 이루고자 할 때 삿되고 잡된 마음을 가지면 기도가 안됩니다. 우리 인간들은 항상 죄를 저질러 놓고 참회합니다.

인신매매범은 마음이 뻔뻔해서 나쁜 일을 저지르고서도 자기가 나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마음 가운데 한 줄기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는지 모르지만, 양심이 혼탁해져서 뭐가 뭔지를 모릅니다. 나쁜 일을 계속 거듭하다 보면 양심이 마비되어 나쁜지 좋은지도 모르게 됩니다. 전과가 많은 폭력범들은 두들겨 패며 싸우고 감방에 드나들면서도 또 죄를 저지릅니다.

사람들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인간이면 다 그렇게 사는 것 아닌가?하고 도식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고급스러운 존재가 되기 힘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고급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면 정말 기도하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점점 영적《靈的》으로 고급스러워지면 모든 것은 다 해결되게 되어져 있습니다. 마음이 보배로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세척진로원제해?란 뜻도 마음 속에 있는 번뇌 망상과 욕망 같은 것들을 자꾸만 씻어내 고통의 바다를 건너려는 원《願》을 세우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 가르침은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새벽마다 기도하느냐」,「왜 이렇게 힘들게 살 필요가 있느냐」은 등의 이야기들을 많이 하십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열매를 거두려면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수확을 거두려면 고통스런 나날을 넘기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남들과 똑같이 살아서는 그 삶이 남들보다 나아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무량한 선조들이 왜 정한수 떠놓고 기도하며 미래의 문을 열어 갔을까요? 고통은 극복하면 할수록 새로운 삶이 열려오는 법입니다. 이 세상의 욕망을 버리지 않으면 커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위대한 인물들이 가는 길은 다 극복의 길입니다. 진실로 우리는 어렵고 힘겨운 길을 가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몸과 마음을 다 던져서 기도해 보십시오. `세척진로원제해?해 보십시오. 마음 가운데 욕망을 자꾸 제거하고 마음을 세척해 내면서 고통의 바다를 건너길 소원해 나가면, 머리가 맑아져서 지혜로운 가르침이 샘 솟듯 쏟아져 나옵니다. 샘 솟듯이 `초증보리방편문?의 경계가 열립니다. 세속에 살면 이런 길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음 한 생각 바로 가지고 욕망과 번뇌를 이기면 무한한 세계가 열려옵니다.

이 사회에는 돈 많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 사회가 점점 돈과 욕망으로 오염되어지면 모두가 나빠져 결국 돈 가진 사람들도 다 함께 망하는 것이지요. 그 때가 되면 사회의 일각에서는 사회가 나빠지는 것에 대한 반동의 힘이 싹틉니다. 작용에 대한 반작용의 현상이지요. `사회가 이렇게 나빠져서는 안되겠다. 사회복지적인 일을 해야겠다?는 운동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내가 가진 이 돈으로 이 세상에 어떤 보탬이 되는 일을 좀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욕망의 포로가 되고 재물에만 탐착하는 그런 인간들만 많은 게 아닙니다. 맑고 밝고 깨끗하게 살면서 이 사회에 이바지되는 일을 하려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사람들 또한 많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여러분들이 마음만 비우고 살면,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십니다. 절대로 돈 같은 것에 걱정하지 마세요. 공은 튀기면 튀길수록 튀어 오르듯 이 세상이 나쁘면 나쁠수록 그 반작용으로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내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그들은 수십억씩 동참금을 내어 좋은 일에 쓰이도록 합니다.

그런가 하면 로비를 하면서 몇 백억씩 풀어제끼는 인간들도 많습니다. 수서 일원 등 땅 사건을 일으킨 어떤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치자금이니 뭐니 하고 막대하게 쓰지 않았습니까? 만약 그렇게 많은 정치자금을 뿌리는 사람들 가운데서 참 마음으로 뭔가 착하게 살아야겠다, 맑게 살아야겠다, 밝게 살아야겠다는 한 생각만 가지게 된다면 돈 몇 십억 정도 희사하는 것을 아깝게 생각할까요? 그들은 전생에 큰 복을 지어서 그만한 마음의 세계도 있을 것입니다.

밝고 맑고 깨끗하게만 닦아 놓으면 정말 재물은 한도 끝도 없이 흘러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세척진로원제해?하면서 삽시다. 부처님 말씀대로만 살아가면 됩니다. 마음 가운데 욕망을 세척하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려는 의지를 가지고 보리도를 점점 증득해 나가면 방편문이 활짝 활짝 열려집니다. 방편문은 위대한 아이디어의 개념입니다.

사람들이 찾아와도 한두 마디 하면 상대의 마음을 이내 울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법의 힘【法力】을 가진 만큼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습니다. 진실만이 사람들을 압도합니다. 우리들 마음 가운데 어떤 잘못된 일을 하고 나면 이내 `아, 내가 이래서 되나?하는 반성의 마음이 생깁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있기에 그런 마음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면 부처님께서 다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깍쟁이처럼 욕심만 부려선 되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그 거룩하신 가호지묘력이 내려지는 파이프 라인이 막혀 있는데 무엇이 흘러 들어오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마음을 맑고 또 밝게 자꾸만 닦아가면 파이프 라인이 열리게 되어 있고, 그를 타고 부처님의 가피력이 흘러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되풀이 해보면 `초증보리?, 뛰어넘는단 뜻입니다. 이 사바세계를 뛰어넘어 보리도를 중득해서 방편문을 활짝 활짝 열어 그 다음에 `아금칭송서귀의?라, `내가 맹세코 부처님 전에 귀의할 것을 기도 드리옵니다?란 의미입니다. 기도를 드리니까 원하는 바, 소원하는 바가 종심《從心》, 마음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이 다 원만히 이루어 진다는 의미입니다.

세척진로원제해《洗滌塵勞願濟海》, 초증보리방편문《超證菩提方便門》, 아금칭송서귀의《我今稱誦誓歸依》, 소원종심실원만《所願從心悉圓滿》.

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마음 가운데 모든 욕망을 세척해서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 원하옵나이다. 고통의 바다를 넘고 넘어서 보리도를 증득하여 방편문이 열리고 지혜가 자재하게 되어지이다. 제가 이제 맹세코 부처님께 귀의 하옵나니, 원하는 바 마음 따라 모두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따라 모두 다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나무?는 기도의 극치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 5 】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지일체법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知一切法◑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지혜안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得智慧眼◑

부처님 말씀들은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덜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게 다 중요한 것들 뿐입니다. 이 `나무대비관음《南無大悲觀世音》? 할 때의 `나무?란 몸과 마음을 다 내던져서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귀의하는 마음이란 몸과 마음을 다 내던져서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나무?란 말은 그러니까 기도의 극치를 이르는 말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을 대변하는 대명사가 바로 이 `나무=나모《namo》?란 말입니다. 몸과 마음을 다 한다는 의미를 기도 정진하는 외에 또 어디서 찾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나무대비관세음?이란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님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귀의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하는 마음이 들 때라야만, 우리의 마음 가운데 많고 많은 번뇌들이 모두 다 녹아져 내릴 수 있습니다.

`원아속지일체법《願我速知一切法》? 할 때, 일체법이란 우주의 근본 법성을 말합니다. 공부를 할 때도 마음 가운데 잡념이 있으면 그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해야 할 학생이 매일 연애나 하고 쓸데없는 일이나 하며 돌아다니면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나무대비관세음?의 근본 뜻은 진실로 우리 인간들이 발전을 지향할 때 지녀야 되는 근본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출세간《出世間》이건 또 세간《世間》이건 정말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체법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마음 가운데 오염된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은 공부를 제대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마음 가운데 부정적인 마음들을 전부 다 녹여야만 우주의 일체법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자기 마음 가운데 오염된 세계를 제거한다는 것이죠.

옛날, 우리 선조님들은 무슨 일을 도모하기 전에는 반드시 목욕재계 했습니다. 그리고 탁자에 조용히 앉아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대자연의 비밀, 이 광대무변한 우주의 비밀과 법도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바꿔야만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단계입니다. 우리가 정말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만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일체 모든 우주의 법칙을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은 마음 가운데 여러 가지 생각들을 다 내려 놓으시고 부처님 말씀을 들으셔야 합니다. 곗돈 생각을 한다든지 쓸데 없는 생각들을 많이 하면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우주의 비밀은 마음을 비우고,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그 비밀의 문을 열어 줍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처럼 말입니다.

`원아조득지혜안《願我早得智慧眼》? 할 때 `지혜안?이란 탁월하고 걸출한 아이디어를 말합니다. 우리가 직장에 다니거나 사업을 하거나, 머리가 맑아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직장이나 기업을 이끌고 나가는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학생들도 어떤 문제를 풀 때, 기도하는 마음으로 풀어야만 잘 풀려나갑니다.

인생의 제반 문제를 해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닥쳐 들어올 때 욕망의 포로가 된다거나 여러 가지 오염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 문제를 제대로 풀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는 보편 타당한 마음이 될 때 `속지일체법?, 모든 일체법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만이 지혜의 눈이 열립니다. 천수경은 일체법을 단계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내용들로 되어 있습니다.

남편들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우선 `나무대비관세음?하며 기도를 하도록 시키셔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들이 지혜의 눈을 갖게 됩니다. 지혜의 눈을 갖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지혜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이죠. 머리가 맑아야만 그 머리 속에 지혜의 세계가 열립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사바세계의 모든 일도 그러하지만 불교의 모든 세계도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이 없이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발전을 하려면 먼저 이 우주의 법도를 알아야 합니다. 함부로 살아서는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함부로 사는 길은 재앙의 길이요, 고통의 길이요, 실수와 질병과 장애의 길입니다. 시험문제를 풀 때도 푸는 길이 있고 요령이 있습니다. 그런데 눈이 맑은 사람은 그 길과 요령이 잘 보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도 평상시에 항상 기도를 하며 사셔야 합니다. 기도를 하고 살지 않으면 자기 마음 가운데 오염된 부분이 녹아지지 않아서 항상 교만심과 이기심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전진인가, 퇴보인가

이 지구라고 하는 별은 초속 30Km로 우주공간을 질주합니다. 초속 30Km면 이 지상의 그 어느 것 보다 더 빠릅니다. 미국의 패트리엇《Patriot》미사일이 이라크의 스커드《Scud》미사일을 요격할 때의 속도라 해도 지구의 초속에 비하면 많이 떨어집니다. 초속이 30Km면 똑딱하는 순간에 우주공간을 질주해 버립니다.

부처님께서 제행무상이라 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다 이렇게 빨리 빨리 움직여가는 것입니다. 이다지 빠르게 변화해 가는 세상을 살며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으로 일체의 모든 법을 터득해 나가는 그러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우주에는 전진과 퇴보의 두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총알처럼 날아다닙니다. 로켓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만상이 다 움직여 가고 있습니다. 모든 만상은 다 이렇듯 현기증 나게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가 정말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르게 인생을 살려는 마음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정지는 없습니다. 정지한다는 자체는 퇴보를 의미합니다. 모든 만상은 움직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야만 되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전진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전진의 기상이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여기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열심히 나아가고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 잠깐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짧은 사이라 할지라도 두 사람의 사이는 크게 벌어지게 마련입니다. 잠깐의 정지가 전진과 퇴보를 좌우하는 분기점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실로 이 우주의 속성, 보이는 세계의 속성은 전진이냐 퇴보냐, 발전이냐 패망이냐, 이 두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전진을 할 것이냐 패배를 할 것이냐, 그것은 얼마나 노력하며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의 정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일체만법을 통달하는 그런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법당에 나오셔서 부처님의 거룩하신 법을 터득해 나가는 이 작업은 영원의 법인 일체법을 터득해 나가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존재들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퇴보요, 패망이며, 패배입니다.

지혜의 눈을 열려는 사람은 공부를 해야만 합니다. 지혜의 눈을 열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지혜의 눈을 뜨려고 노력하지만 그것 역시 마음을 가다듬고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노는 입에 염불이라고, `나무관세음?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그러면 저절로 길이 열려옵니다. 길이 열리면 지혜와 아이디어가 샘물처럼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고 많은 물건들은 모두 아이디어의 소산입니다. 여자들이 쓰는 안경 가운데 삐죽하게 칼 모양으로 생긴 안경이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일이 있습니다. 그 안경 만드는 사람이 어느 날 부인이 부엌에서 식칼을 가지고 일을 하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아 저런 모양으로 안경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만들었더니 불티나게 팔렸다는 것입니다. 넓은 마음으로 항상 많은 사람들에게 값싸고 이용하기 쉽고 보탬을 줄 수 있는 제품을 만들려 하는 사람들, 정말 자기만의 이익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탁월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법입니다.




기도와 아이디어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 6 】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도일체중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度一切衆◑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선방편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得善方便◑

탁월한 제품을 만들려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속도일체중《速度一切衆》?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을 제도합니다.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은 내 마음을 텅 비우는 마음입니다. 사심을 녹이고, 이기심을 녹이며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속도일체중?, 속히 일체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위대한 인물들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고 기여할 수 있는 삶을 열어 주십사고 기도했던 사람들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기도를 올렸던 사람들 입니다. 기도하는 마음 가운데 일체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기심을 가지고 나만 잘 먹고 잘 살려는 인간들은 중생을 제도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많이 느끼는 일인데, 자꾸만 기도를 하다 보면 이상스럽게 이기심과 업장이 녹아 들면서 항상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중생을 포용하려는 이해심이 넓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절에 수 십년 다녔다 해도 전혀 기도가 안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으로 `속도일체중? 즉 모든 사람들을 속히 제도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진실로 아이디어를 원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하며 마음을 크게 비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나무대비관세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남편들과 아이들에게 항상 이야기 하십시오.「얘야, 기도 좀 해라. 기도라는 것을 꼭 종교와 연관시키지 말고 마음을 비우고 안정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기도를 좀 해 봐라」고 말씀해 보십시오.

기도는 마음을 비우는 작업입니다. 명상을 하며 참선을 하는 것입니다. 염주를 잡고 자꾸만 기도를 해 보는 것입니다. 머리가 모자란 사람들도 10년, 20년, 끊임없이 기도를 하다 보면 머리가 화통하게 열리게 됩니다. 아이들 가운데 공부를 못하고 속을 썩이는 녀석이 있으면 자꾸만 절을 시키십시오. `관세음보살?하면서 1년이고 10년이고 계속 절을 하다 보면 머리가 틔어집니다. 오염된 좋지 못한 생각들이 다 녹아져 버립니다. 자기 능력이 쌓이고 지혜의 안목이 쌓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재산입니다.

여자들이 입는 브레이저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재단하는 사람이 자기 어머니가 나이가 많이 드셔서 젖 무덤이 흘러내려 불편해 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재단사이다 보니까, 헝겊을 모아 재봉틀로 박아서 어머니의 젖가슴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가슴받이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순전히 어머니를 편하게 해드리려는 마음으로 생각해 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어머니가 동네를 다니면서 아들이 만들어 준 가슴받이가 그렇게 편하고 좋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너도 나도 하나씩 만들어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고 소문이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하는 수 없이, 이왕 시작한 김에 여러 어머니에게 도움을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이 재봉틀로 대량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히트를 쳐 버렸다는 것입니다. 특허를 내고 전세계를 석권해 버린 것이 지금 여러분이 입고 있는브레이저입니다.

볼 포인트 펜《ball point pen》, 흔히 볼펜이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펜을 쓰다 보니 잉크가 다 떨어져버리면 불편하거든요. 그래서 만년필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만년필도 불편한 점이 많던 차에, 잉크를 채워야 되는 불편함이 없는 볼펜이 나오게 되니 단번에 세계를 석권해 버린 것이죠. 이 모든 것이 다 아이디어《idea》입니다.

우리 한국에도 그런 아이디어로 돈을 크게 번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보급이 되지 않았지만, 담배불을 붙이려면 성냥이나 라이터를 켜야 되니까 번거롭거든요. 그래서 성냥이나 라이터가 필요 없이 담배 끝에다 인체에 유해하지 않는 물질을 발라두어 사람의 입에서 입김이 나가면 발화되도록 고안한 담배를 발명한 것입니다. 한 번 빨면 저절로 불이 붙어버리는 담배지요. 우리나라 사람이 그걸 발명해 냈는데, 전매청에서 받아 들이지 않자 스위스에 가서 특허를 내어 유럽 전역에 그 담배를 팔아서 졸부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밖에도 예를 들자면 많습니다. 소화제도 한약을 달이기가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한 모금만 마시면 쉽게 배가 낫게 만드는 그러한 약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 까스명수나 활명수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 작은 아이디어가 다 제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득지혜안?, 지혜의 눈이 열리면 `속도일체중?이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도 그렇고 내생에도 그렇겠지만, 여러분들이 부처님의 길 따라 가려면 남들 보다 한 걸음 앞장서서 가야합니다. 그런 마음이 곧 `나무대비관세음?하고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일체법을 터득하게 되려면 마음이 맑아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을 제대로 볼 수 없고 진리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마음이 오염된 사람들은 잘 안 됩니다. 아침에는 공부하러 가야겠다고 마음을 냈다가도 친구들이 꼬드기면 그만 마음이 변해 따라가고 맙니다. 그런 것도 다 아직 마음이 맑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항상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일체의 모든 법칙을 보다 빠르게 깨닫게 되고 지혜의 눈을 일찍 열게 되어, 보다 많은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의 눈을 열 어 가지고 삶을 살게 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을 제도할 수 있습니다.

선방편, 악방편《善方便, 惡方便》

마음을 비우고 사는 사람들은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항상 승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자꾸 내다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하고 여러 가지 궁리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탁월한 방편문이 열려지게 되는 법입니다. 저도 오랜 세월 동안 법회를 하다 보니까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것이 좋고, 저럴 땐 저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떠 오릅니다. 항상 마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이끌어서 의미성 있는 세계를 함께 열어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좋은 방편문이 열려옵니다. 방편에는 악방편《惡方便》도 있습니다. 남들을 자꾸만 나쁘게 생각하다 보면 악방편이 열립니다.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들은 아주 기기묘묘한 범죄를 많이 만들어 냅니다.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 이런 궁리만 하는 인간들은 결국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으로 이끌어갑니다.

법문 들으러 법회에 나오시는 분들은 차원이 좀 다르신 분들입니다. 똑같이 능인불교학교를 졸업했는데, 나오시는 분들과 나오지 않으시는 분들과는 지금 당장 무슨 차등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 차이가 점차 나타나게 됩니다. 법당에 열심히 나오시는 분들은 마음 가운데 자꾸만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니까 세월이 흐르다 보면 전혀 다른 차원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천수경 강의를 들으시는 분은 앞으로 천수경을 독경할 때 `아, 이게 이런 뜻이었지?라고 새기며 살게 됩니다. 아무런 의미도 모르고 입으로만 줄줄 외는 사람과 구분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마음 가운데 한번 느껴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전혀 그 감도가 다릅니다. 또, 처음 들으시는 분들과 두 번째 들으시는 분이 다르며, 세 번째 듣는 사람과는 더욱 다를 것입니다. 점차로 부처님의 말씀이 내 것이 되어가고 몸에 익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몇 발이라도 먼저 들은 사람들은 그만큼 앞서 공부하게 되니까 그 성취도 도 다를 수 있습니다. 인생에 몇 달쯤 앞선 게 무슨 문제가 되며, 뒤에 사람이라도 더 열심히 공부하면 따라 갈 수도 있는 일 아니냐고 생각하시겠지만, 공부는 늦고 빠르고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육조단경에도 `전념이 미즉 범부중생이요, 후념이 오즉 부처님【前念迷卽凡 後念悟卽佛】? 이라고 말했듯이, 한 생각 깨닫고 깨닫지 않는 차이가 범부중생과 부처님의 차이입니다. 알고 모르고 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먼저 알면 행동을 할 때도 그 만큼 확신에 차서 하게 됩니다. 따라서 위정자나 정책을 담당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지혜로워야 되고 공부를 많이 해서 많이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보다 빨리 판단을 내리고 남들보다 앞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게 됩니다.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과 애매모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의 차이는 큽니다. 확고부동하게 아는 사람은 카드를 빨리 선택합니다. 결정도 빨리 하고 단념도 빨리 합니다.

무엇이든 빨리 일을 해결하고 처리해 나갑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명쾌한 결정을 못합니다. 이것 저것 살피다 보면 벌써 늦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도 기본을 잘 알면 자꾸만 응용이 되지 않습니까? 방편이란 응용을 의미합니다. 훌륭한 방편을 구하는 마음, 그것이 `원아조득선방편《願我早得善方便》?입니다. 방편문이 열린 사람들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교육의 재산, 지식의 재산, 지혜의 재산 등 폭 넓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인생을 폭 넓고 풍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서 사색하며 열심히 일하며 살아갑니다. 발달된 머리와 지식이 출중한 인간들은 좋은 아이디어로 많은 사람이 일하는 몫을 단번에 해 치울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교육도 없고 지혜도 지식도 없는 사람들은 삶을 폭 넓고 풍요롭게 살지 못합니다. 평생을 몸으로 때워야 됩니다.

막노동의 수명은 남녀를 불문하고 길지가 못합니다. 30대만 넘으면 벌써 막노동은 힘겹습니다. 40대까지도 힘듭니다. 이 고깃덩어리의 수명이 오래 못갑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받는다 해도 교육과 지혜의 재산이 없으니까 그네들은 몸으로 때우는 것입니다. 또 유곽지대나 술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공부가 없으니 힘겹게 사는 것이지요.

자기의 인생을 소중하고 값지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공부를 하고 검정고시라도 보아서 대학교에 가려고 피눈물을 쌓으면서 직장 생활을 하며 뜁니다. 무엇 때문에 어렵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교에 가려고 하겠습니까. 그게 다 자기 인생을 값지게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법당에서 공부하는 작업은 여러분들의 인생을 아주 값어치 있게 만드는 작업입니다. 고통을 겪는 것 만큼 미래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 법당에 나와 부처님 공부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살아가실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부처님 말씀 듣고 깨닫고 사는 삶과는 질적으로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인생 소중한 줄 아는 사람은 고통 속에서도 노력하며 삽니다. 정말 인생이 소중한 줄 아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안정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주위가 산만하고 안정감이 없는 데는 부모의 원인이 큽니다. 부모 사이가 좋지 않아도 그렇고, 부모의 교육 정도가 떨어져도 그렇습니다. 부모가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면 아이들도 안정감이 없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학교를 다녔다 하더라도 제대로 공부를 하는 자세가 마음 가운데 쌓여있지 않으면 매사에 안정감이 적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해서 지혜롭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부처님 나라로 가는 배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 7 】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승반야선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乘般若船◑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월고해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得越苦海◑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의 반야선은 부처님 나라로 가는 배입니다. 이 반야용선만 타면 부처님 나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새마을호 특등 칸을 타려면 다른 자리보다 더 많은 돈을 내야합니다. 기차도 그만한 값을 치루어야 특등 칸에 탈 수 있듯이 부처님 나라에 가는 배를 타려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의 댓가를 치루어야만 합니다. 반야선은 아무나 탈수 있는 배가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가 마음 가운데 부처님을 모시고 계시지만 부처님 나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입니다. 그러므로 `원아속승반야선?이란 말은 함부로 살지 말고 반야용선을 탈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스님, 우리 애는 중학교 때까지는 우등생이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왜 이렇게 멍충이가 되어가는지 모르겠어요」이렇게 말씀하시는 보살님들이 계십니다. 그것은 그 학생이 처음에는 마음을 잘먹고 기차를 탔는데 중간에 그 기차를 내려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나라에 가는 배도 한 번 탔다 하면 끝끝내 가는 것이 아니라, 가다가 마음자리가 바르지 못하면 도중하차 되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고 기차를 탔는데 대전쯤 내려가서 배가 고프다고 가락국수를 먹고 있는 순간에 그만 기차가 가버렸단 말입니다.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다가 반야의 기차를 놓치지 않도록 하세요. 기차를 놓쳤다 하면 별 볼일 없는 인생이 되어버립니다.

`원아속승반야선?, 우리는 절대절명으로 반야용선을 타야 합니다. 능인불교학교와 경전연구반에 오신 분들은 지금 이 순간에 반야용선을 타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이미 반야용선을 탔다면 하루 온 종일 어딜 가더라도 반야용선을 탄 부처님의 아들 딸 된 마음가짐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법당 문만 열고 나가면 금방 잊어버리고 뭘 들었는지 깜깜해집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번 반야용선을 타셨으면 중간에 내리지 마시고 꾸준하게 이 고통의 바다를 빨리 건너서 부처님 되는 나라에 갈 수 있도록 항상 마음을 다스려야만 합니다.



계`정`혜《戒`定`慧》3학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 8 】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득계정도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得戒定道◑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등원적산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登圓寂山◑

`원아속득계정도《願我速得戒定道》? 계`정`혜 삼학을 속히 공부하도록 하여,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 부처님 계신 원적산으로 빨리 가게 해지이다 의 뜻입니다.

`속득계정도?란 반야용선을 타는 사람들은 항상 계`정`혜 삼학《三學》을 잘 지켜야 된다는 뜻입니다. 계`정`혜란 반야용선을 타고 부처님 나라로 가려는 사람들의 자격요건입니다.

계`정`혜 삼학을 잘 지켜 나가면 부처님께서 계신 원적산《圓寂山》에 갈 수 있습니다. 그 곳에는 부처님이 계신 집이 있는데 이름이 무위사《無爲舍》입니다.

부처님 계신 원적산이 실지로 저 멀리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계`정`혜 삼학을 잘 닦아 나가면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 계신 원적산이 된다는 뜻입니다.




속히 법성의 몸 되소서!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 9 】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회무위사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會無爲舍◑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동법성신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同法性身◑

천수경은 전부가 아름다운 한편의 시《詩》이며 장엄한 발원문입니다. 이 이상 더 아름다운 발원문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원적산에 오르면 부처님 계신 집이 있고, 부처님이 계신 무위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원아조동법성신? 할 때의 `법성신?은 법성의 몸이니까 곧 부처님을 가르킵니다.

제일 처음 단계인 `원아속지일체법?에서 열번째 단계인 `원아조동법성신?까지는 우리가 처음에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떻게 서원을 시작해서, 어떻게 부처님이 될 것인가 하는 방법이 차근차근 10단계로 설명 되어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삶의 모든 지침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천수경을 독경할 때 내용도 뜻도 모르고 입으로만 외운다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강남에 처음 들어왔을 때 천수경 몇 줄을 펴놓고 불자님들께 얘기해 보라 하면 대부분이 대답을 못했습니다. 흰 건 종이고 까만 건 글자란 식이었지요. 천수경에 나오는 한 줄 한 줄이 무슨 소리를 담고 있는지 모르시는 것입니다. 천수경 뒷부분을 보면 `공점이엄지《空點以嚴之》?란 말씀이 나옵니다. 천수경에 나오는 한 점 한 점이 모두 다 부처님의 말씀, 진리의 귀절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점들이 `여피계명주《如彼계明珠》?, 마치 아름다운 구슬을 꿰놓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천수경은 항상 `치지어정상《置之於頂上》?, 가장 위쪽에 갖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가 막히도록 아름다운 천수경을 절에 몇 십년씩 다녔다는 보살들도 제대로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다간 불교가 점점 망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았습니다. 천수경 한 줄도 무슨 뜻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니까「어디 다니느냐」고 물으면 절에 다닌다는 말도 못하고 입을 딱 다물어 버립니다. 다른 이야기는 너무나 잘합니다. 그런데 종교 얘기만 나왔다 하면 벙어리가 되어 버립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줄줄줄 얘기를 잘도 하는데 우리 불교 신자들은 그렇지 못해요. 그러면 저쪽 친구들은「내가 너를 위해 교회에 나올 때까지 기도하겠다」이럽니다. 교회 믿는 사람들은 특허가「내가 너 교회에 나올 때까지, 하느님 아버지 구원 받을 때까지 기도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에 약해지고 마음에 켕기게 되어 그 쪽으로 한 사람 두 사람씩 따라가서 예수교인이 되곤 합니다.

연애와 공부

이 천수경이 얼마나 아름다운 가르침입니까? 한귀절 한귀절 읽어보세요. `나무대비관세음. 몸과 마음을 다 해서 부처님 전에 귀의하옵나이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옵나이다?의 뜻 아닙니까?

우리가 한창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들한테「여자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당부를 합니다. 연애 걸면 공부가 어렵지요. 대체적으로 대학교 때 연애 거는 학생들을 보면 상대적으로 뒤쳐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취직이나 해서 장가를 가 그럭저럭 살고 있는데 반해, 불같이 공부한 학생들은 확실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서 남자들이 무슨 일을 열심히 할 때 그 일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의 하나가 뭔지 아세요? 여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에서 남자하고 여자하고 같이 있는 순간처럼 즐거운 순간이 또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국민학교 3학년 때 연애를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상대는 제 짝꿍이었는데 그 아이가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 다 해 주고 싶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란 한번 보고 두번 보면 자꾸만 더 보고 싶어지는 법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창 공부할 나이에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머리깍고 사는 스님들에게도 여자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크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여자와 같은 존재가 하나만 더 있었어도 이 세상에 도《道》 닦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관찰해 보면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참 무서운 일입니다. 본인 당사자들은 즐거워서 어쩔 줄 모릅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다 썩어도 모릅니다. 그러니 중요한 시간을 모두 뺏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남녀공학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학교 입학시험에 합격률이 낮다고 합니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공학을 하기 전과 공학을 한 후의 대입 합격률을 비교해 보았더니 공학을 한 후가 훨씬 나쁘게 나왔다고 합니다.

이해가 가는 이야기입니다. 남녀공학을 하면 아무래도 옷이나 머리에도 신경을 쓰게 됩니다. 공연히 쓸데없는 데에 시간을 쓰게 됩니다. 연애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청춘의 귀중한 시간이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 다 해놓고 연애하는 건 상관없겠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일입니까? 인생은 `나무대비관세음?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아이들에게도 이런 뜻을 알아 듣도록 잘 이야기 해 주시기 바랍니다.`나무대비관세음?,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이 천수경만 제대로 안다 해도 삶의 근본 원리를 터득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 정진하는 마음, 번뇌를 제거하는 마음에 바탕을 두어야만 원《願》을 발하게 됩니다. 그런 기본 단계가 되어 있어야만 일체법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욕망으로 눈이 어두워진 인간들에게는 이 지혜의 문, 진리의 문, 대자연의 비밀의 문이 열리지 않는 법입니다. 정말 여러분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집이 멀어서 새벽 기도에 못 나오시는 분들은 집에서라도 새벽에 일어나 기도해 보십시오. 남편과 함께 하시면 더욱 좋고요.

우선, 여러분들의 신랑을 꼭 법당으로 모시고 나오셔야 됩니다. 아들 딸들도마찬가지입니다.  머리가 맑아지고 일체법을 다 알아 지혜의 눈이 열리고 건강해지는데, 무엇을 망설이는지요? `원아속지일체법? `원아조득지혜안? 아닙니까? 제일 처음 기본 조건은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이고, 그 다음 일체법을 알게 되면, 지혜의 눈이 떠지고 창의력을 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회사에 강의를 하러 갔을 때인데 그 사장님이「스님, 우리 회사의 모든 직원들에게 어떤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는 기풍을 진작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어떤 종교 문제를 떠나, 정기적으로 단 몇분 이라도 조용히 앉아서 마음 모아 참선을 하던지 명상 좀 할 수 있도록 회사 내에 방부터 하나 마련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조용히 앉아서 참선을 하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됩니다. 능인선원을 이끌고 나가는 것도 모두 다 이런 아이디어의 소산입니다. 어떤 조직이건 그 나름대로 다 운영 방안이 필요합니다. 경영학이라는 것도 다 조직의 운영학입니다. 법당에서 쓰는 것도 세속의 경영학이 아니라 부처님의 경영학입니다. 지혜의 눈이 있으면`속도일체중?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혜의 안목을 가지고 있으니까 좋은 방편문이 열려 오고 일체의 모든 중생들을 보다 빨리 제도할 수 있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하게 되면 모든 것이 저절로 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선택 받은 사람

제가 여러분들께 자주 기도할 것을 강조하는데 기도를 무슨 종교상에 등장하는 어떤 원리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는 우리의 생명과도 같다고 생각하십시오. 마음을 가다듬는 방법 가운데 기도 외에 다른 방법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생을 뜻 있게 살려고 한다면 삶의 패턴을 바꾸십시오. 기도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기도는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기도는 법력과 추진력과 적극성의 배양입니다. 기도를 항상 하면 그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열심히 하면 일체법을 분명히 알게 되니까 자신만만 해지거든요.

능인선원 운영만 해도 그렇습니다. 수만명이 드나드는 능인선원인데, 제가 많은 사람들을 모시고 부처님께 나아가려면 무언가 열쇠를 하나 가지고 있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되지를 않습니다. 세속의 법과 부처님의 법은 그 패턴이 다릅니다. 많은 분들의 인생을 앞장서 같이 도모하며 나가고 있는데, 자칫 뭔가 잘못 이야길 해 보세요. 능인선원의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한 보살들을 보면 대체로 잘 되어갑니다. 삶을 부처님 세계로 열어가니 다 잘 됩니다. 잘 되니까 신심이 나서 잘 나오시구요. 신심이란 믿는 마음이요,믿어지는 마음입니다. 부처님 말씀이 뭔가 믿어지니까 자꾸만 부처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좋은 일들이 겹쳐서 일어나고, 좋은 방편문이 계속해서 열립니다. 결국은 선택 받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속승반야선?이란 것은 `선택 받은 사람【chosen people】?이 된다는 뜻입니다. 선택 받은 인간이 되려면 기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적당히 가다가 끊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등원적산?이란 항상 계`정`혜의 삼학을 잘 닦아서 부처님이 계신 원적산으로 가자는 뜻입니다.

산 속 마다에 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절은 산 밑에 있어야 제격입니다. 너무 도심에서 떨어져 있어도 곤란합니다. `속회무위사?라, 부처님이 계신 무위의 집에서 속히 만나 모두 법성신이 되자는 것이 `조동법성신《早同法性身》?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지극 정성 기도하는 마음이 있으면, 남자들 고집이 아무리 세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의 말씀에 관심을 두고 수용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공부한 것을 남편들에게 정성 들여 얘기해 보십시오. 그러면 처음엔 시큰둥 하다가도 나중엔 뭔가 한 줄거리 들으려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능인선원에 나오시는 어떤 보살님의 남편이 회사를 경영하시는데, 어떤 파티에서 남편이 직원들을 모아놓고 하는 훈화를 가만히 들어보니까, 자기가 얘기한 걸 그대로 다 말씀하시더랍니다.



기도 속에 녹아지는 악도의 마음【 1 】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 10 】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我若向刀山 刀山自최折》

아약향화탕 화탕자고갈《我若向火湯 火湯自枯渴》

아약향지옥 지옥자소멸《我若向地獄 地獄自消滅》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

`아약향도산《我若向刀山》, 도산자최절《刀山自催折》?은 `칼산지옥 내가 가면, 칼산 절로 무너지고?의 뜻입니다.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으로 살게 되면 `도산자최절?된다는 것입니다. `나무관세음?이란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이 만일 도산지옥의 마음이 되었더라도 내가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스스로자, 무너질최, 꺽어질절, 스스로 도산지옥의 마음이 무너지고 꺾어진다는 뜻입니다. `아약향도산《我若向刀山》?, 우리의 마음 속에 칼산지옥의 마음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콕콕 찌르고 아프게 하는 못된 마음이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스러운 마음들입니다.

남 안되길 바라는 마음, 남이 아파서 괴로워하고 비명을 울리면 위로해 줄 생각을 하지 않고 고소하다는 식으로 좋아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아약향도산?이란 `내가 만약에 도산 지옥에 가게 되면?으로 풀이되지만, 이 말의 참뜻은 `내 마음이 그와 같은 도산지옥의 마음이 된다면?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정말 아름답게 갖고 기도 정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 마음이 도산지옥이 되었을 때라도 `나무대비관세음?하게 되면 그 마음은 즉시 가라 앉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분명한 사실은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관세음보살님의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새벽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집에 돌아가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점점 풍요로워집니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아침을 시작하기 때문에 하루 온종일 마음이 맑아지고 쓸데없는 말을 안하게 됩니다. 기도하며 살아가시는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백일기도를 몇 번 하다 보니까, 처음엔 몰랐는데, 점차 속된 모임에는 참석하기도 싫고 쓸데없는 얘기도 하기 싫어지더라 는 것입니다.「저절로 마음이 착 가라앉고 마음이 맑고 깨끗해지더라」고 하더군요. 여러분도 꼭 필요한 모임이 아니면 자주 나가지 마세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요. 마음의 발전을 도모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셔야 합니다. 우리들은 거듭 말씀 드리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찌르고 아프게 해서 상대방의 마음에서 피를 흘리게 합니다. 우리 피부에서 나오는 상처는 이내 아물지만, 마음의 상처에서 흘러 나오는 피는 아물기가 힘듭니다. 마음에 상처를 낸 상대방을 용서하기가 무척 힘든 모양입니다. 많은 분들을 만나고 느끼는 것은 `용서해야지, 용서해야지?하면서도 용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해해야지, 이해해야지? 하면서도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면 안 됩니다. 남편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을 때, 하루에도 몇 번이나 부처님 말씀 생각하면서 남편을 이해하려 해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그 말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마음을 맴돈답니다. 그래서 밉살스러워 쏘아댄다는군요. 어느 보살님의 얘기입니다. 남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면 안 됩니다. 부부라도 서로 이해를 도모하고 서로 참회하며 살아야지, 서로의 마음에 피를 흘리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럴 경우 마음은 안 만나고 고깃덩어리만 만나 사는 부부가 되고 맙니다.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남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도산의 마음?입니다. 비수 같은 마음으로 서로 찌르고 째고 하니까 서로가 비명을 울리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내가 하는 이 말이 비수가 되지 않을까, 상대방의 마음에 피를 내지 않을까를 생각하면서 대화를 나누도록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상처는 참으로 아물기 힘든 것입니다.

아약향화탕, 화탕자고갈

`아약향화탕《我若向火湯》? 화탕지옥 내가 가면, `화탕자고갈《火湯自枯渴》? 화탕 절로 말라지고 의 뜻입니다.

화가 너무 나면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 오릅니다. 내 마음이 화탕지옥의 마음이 될 때`나무대비관세음?하게 되면 그 화탕이 다 고갈되고 소멸되어 말라버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항시 기도를 하고 살면 비수 같은 마음도, 화탕같은 마음도 다 녹아져 버립니다.

아약향지옥, 지옥자소멸

`아약향지옥《我若向地獄》? 모든 지옥 내가 가면, `지옥자소멸《地獄自消滅》? 지옥 절로 없어지다 의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지옥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하는 그런 지옥 같은 마음이 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정말 어떻게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신문 사회면에 보면 그런 지옥의 마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술집 여자와 바람을 피웠는데, 그 여자가 걸핏하면 부인한테 알리겠다면서 돈을 요구했답니다. 그 남자는 돈을 갖다 주면서도 지옥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여자들에게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자칫 실수로 악마들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시달림을 주고 받는 마음들이 다 지옥의 마음들입니다. 지옥의 마음이 그런 것 뿐일까요? 자신의 실수를 남들이 비난하고 질시할 때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아픕니다. 그럴 때 `나무관세음보살?하는 기도로 마음을 다스리면 `지옥자고갈?, 지옥이 다 말라 버리게 됩니다.




기도 속에 녹아지는 악도의 마음【 2 】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 11 】

아약향아귀 아귀자포만《我若向餓鬼 餓鬼自飽滿》

아약향수라 악심자조복《我若向修羅 惡心自調伏》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我若向畜生 自得大智慧》

아약향아귀, 아귀자포만

`아약향아귀《我若向餓鬼》? 아귀세계 내가 가면, `아귀자포만《餓鬼自飽滿》? 아귀 절로 배부르고 의 뜻입니다.

내 마음이 만약 아귀의 마음이 되면 어떠하겠어요? 우리 중생들은 그저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합니다. 죽을 때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쌓아 놓고 구경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입니다. 죽은 다음 묘자리만 잘 쓴다고 발복《發福》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크고 호화롭게 만든다 하더라도 아귀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다간 사람에게는 쓸모 없는 것이 됩니다.

내 마음 가운데 아귀의 마음이 생길 때 기도하면, 아귀가 스스로 포만감을 느껴 물러 갑니다. 기도는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아귀도로 부터의 해방입니다. 자꾸만 기도를 하면 마음이 안정됩니다.

어느 보살님이 다음과 같은 리포트를 쓰셨습니다. 보살님의 남편이 상당히 청렴결백한 공무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보살님은 적은 월급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 남편에게 항상 불평을 하셨답니다. 그런데 능인불교학교 공부를 하고 계속 기도를 하다 보니까 저절로 마음이 채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옛날엔 항상 마음이 허전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고혈압, 당뇨병 같은 병도 많은데, 우리 남편은 항상 건강하고, 아이들도 공부 잘하고 속 안 썩이니 `부처님 감사합니다?하는 마음이 절로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무대비관세음?을 계속하면 욕망의 때가 제거되니까 나름대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꾸만 기도를 하게 되면 마음이 뿌듯하게 부처님으로 가득채워집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자꾸 좋은 일을 베풀어 주십니다. 사람들이 다 좋아보이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착하고 고맙게 보이며 의미로운 존재로 생각됩니다. 기도는 참으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약향수라, 악심자조복

`아약향수라《我若向修羅》, 악심자조복《惡心自調伏》?이라 했습니다. `내가 만일 수라도 의 마음이 될 때 수라와 같이 화내는 나쁜 마음들을 스스로 다 항복 받게 해 주소서?하는 뜻입니다.

수라의 의미는 전투를 일삼는 귀신의 일종을 의미합니다. 경전에서는 천인《天人》, 즉 제석천 등과 항상 싸움을 벌이는 악신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수라도에 떨어진 존재들은 본래 마음이 닦이지는 않았으나 공덕을 지은 바가 있어 받게 되는 경계라 합니다. 공덕은 있어 아수라에 태어났으나 마음이 닦이지 않아 항상 싸우기 만을 즐겨 한다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수라장이니 아수라 같은 놀이터 등으로 무엇인가 혼란 되고 마음이 악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싸우기 잘하는 마음, 화를 내서 다투기 잘하는 악심을 스스로 항복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흔히 싸우기 잘하고 흥분을 잘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이 같은 마음 역시 기도 가운데,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 가운데 녹아진다는 뜻입니다.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

`아약향축생《我若向畜生》, 자득대지혜《自得大智慧》?, `내가 만일 축생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큰 지혜로서 내 마음 다스려지게 하여 주시옵소서?하는 뜻입니다.

축생의 마음이란 동물의 마음, 돼지 소의 마음을 말합니다. 벌레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머리가 없어 지혜의 마음이 없습니다. 정신병원에 가보면 동물 같은 행태를 부리는 이상한 증세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보, 멍충이 같은 이런 사람들도 자꾸만 `나무대비관세음?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시키면 `자득대지혜? 큰 지혜를 얻게 됩니다.

흔히 `저 사람은 돼지보다도 못하고 개만도 못하다?는 참혹한 욕을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도 동물의 마음들이 있습니다. 뱀의 마음도 있고,여우의 마음도 있고, 강아지의 마음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러한 축생의 마음을 자꾸만 녹여내려야 합니다. 축생들은 머리가 나쁘니까 계속 축생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머리, 가슴, 배의 순서로 됩니다. 머리를 많이 쓰는 인간들은 무언가 긍정적으로 살지만, 머리를 안 쓰는 인간들은 가슴으로 살고, 배로 사는 인간들은 그저 육체의 욕구밖에 채울 줄 모릅니다. 머리를 쓰는 인간들만이 학문적인 어떤 즐거움이나 부처님 말씀 공부하는 즐거움 같은 것을 체득할 수 있습니다. 기도도 계속하다 보면 즐겁습니다. 산중에서 목탁 들고 기도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워 어떤 때는 기도에 몰두하다 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배고픈 것도 모릅니다.

다른 절에서는 기도를 간단히 하는데 능인선원에서는 2~3시간씩 하니 너무 힘들다는얘길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도를 하는 순서는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하나도 빼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약식으로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것은 곤란합니다. 근기가 강해져야 됩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시고 남겨주신 대로 해야 됩니다. 천수경 같은 것도 자기들 멋대로 뚝뚝 잘라 버리고 간단하게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할 때 공부한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학교에 다닐 때에도 선생님으로부터 한번 배운 다음에는 항상 무엇이든지 몸으로 익히고 마음으로 새기는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들을 때 그저 귀로만 듣는 그러한 자세를 버리고, 마음으로 익혀서 참다운 부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참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무량한 세월이 흐른다 하더라도, 그리고 언제 어느 곳에 간다 하더라도 항상 복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다운 삶이 아니고 그릇된 마음을 가진 삶은,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항상 긍정적인 삶을 엮어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항상 부처님 말씀을 벗 삼아서 삶을 슬기롭게 이끌어가는 그런 자세를 끊임없이 몸과 마음 가운데 익혀 나가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언제 어느 곳에 어떠한 삶을 살아 간다 하더라도 항상 무량한 복덕이 가득한 그러한 삶을 열어 갈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대개 그 사람이 잘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을 나름대로 예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부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가에 따라 그의 앞날을 어느 정도 판별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고 진리를 몸과 마음에 익히면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만 합니다.




대자대비의 화신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 12 】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南無觀世音菩薩摩하薩》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南無大勢至菩薩摩하薩》

나무천수보살마하살《南無千手菩薩摩하薩》

나무여의륜보살마하살《南無如意輪菩薩摩하薩》

나무대륜보살마하살《南無大輪菩薩摩하薩》

나무관자재보살마하살《南無觀自在菩薩摩하薩》

나무정취보살마하살《南無正趣菩薩摩하薩》

나무만월보살마하살《南無滿月菩薩摩하薩》

나무수월보살마하살《南無水月菩薩摩하薩》

나무군다리보살마하살《南無軍茶利菩薩摩하薩》

나무십일면보살마하살《南無十一面菩薩摩하薩》

나무제대보살마하살《南無諸大菩薩摩하薩》


나무본사아미타불《南無本師阿彌陀佛》

나무본사아미타불《南無本師阿彌陀佛》

나무본사아미타불《南無本師阿彌陀佛》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관세음보살님의 열 가지 다른 이름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무량하고도 불가측한 존재이십니다. 대자대비의 화신이며상징입니다. 대세지보살님이나,천수보살님은 관세음보살님의또 다른 별호《別號》이며 별명들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무량한 위신력 가운데 하나의 부분을 따서 이름을 부치게 된 것으로 모두 다 관세음보살님이라고 불러도 좋을 보살님입니다. 하나하나 그 보살님들이 무엇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봅니다.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의 보살마하살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버금가는 위신력을 가지고 무량 중생들을 이끌어 가는, 이미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간 그런 보살님들을 말합니다. 우리들은 여자 신도들을 보살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보살마하살이라고부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아직 부처님과 같은 여법한 역량과 그런 능력을 구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부처님에 버금하는 그런 능력을 구족하게 되면 아무 아무개 보살마하살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나무《南無》?란 말은`귀의합니다?라는 뜻입니다. 귀의란말은 몸과 마음을 다하는자세입니다. 나의 모든 것, 피 한 방울, 땀 한 방울까지도 아낌없이 바램없이 다 내던지는 그런 자세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순교자적인 자세하고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 불교신자들은 나무아미타불이니, 나무관세음보살이니 하면서 `나무《南無》?란 말을 참 많이 쓰면서도 그 참뜻은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화엄경 보원행원품에는`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귀의하라?고하셨습니다. 가까이는 남편과 아내 부처님께 귀의하고, 아들 딸 부처님에게 귀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몸과 마음을 다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서로가 귀의하는그런 가정은 이 땅에서 극락국토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마가렛 미드여사는 미국의 세계적인 인류학자입니다. 그레고리 베이츤이라고 하는 유명한 석학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모두 노벨상 수상자 집안으로 대단한 가정입니다. 그 마가렛 미드여사도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공자《孔子》님께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사회구조의 최소단위가 가정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문화와 행동 양식과 소비구조 등 모든 의사를결정하는 단위가 가정입니다. 그런 가정 하나하나가 잘 되어 나갈 때 그 사회도 잘 되어 나가기 마련입니다. 예전부터 우리 선조들은 가정을 제일 중요시 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서양보다도 동양이 더 가정에 대해서 소홀히 하고 경시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예전의 우리 선조들은 집에서 음식을 만들 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쏟아 정성을 다해 만드셨습니다. 계절 따라 고추장 담고 된장 간장 담으며 열심히 삶을 살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음식들은 그들의 자랑이었으며, 삶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의 가정 주부들을 보면 너무나 전통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통음식들을 만드는 방법과 그것을 보존 계승하는 음식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요즘의 주부들은 아이들에게 피자나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이나 햄버거를 먹입니다. 우리 가정의 음식 문화에까지 서구 식단이 침투되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원래 요리를 많이 만들고 잘 만드는 여인들은 머리가 좋고 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손【手】이라고 하는 것은 밖에 있는 뇌《腦》이기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요즘의 가정 주부들은 요리하기를 싫어합니다. 큰 문제입니다. 아름다운 요리를 만드는 나라로 불란서를 꼽는데, 그것은 불란서 여인들이 요리하는데 많은 정성을 쏟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불란서 요리가 세계적으로 정평이 있지 않습니까?우리 한국에도 예로부터 아름다운 음식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최근 들어 그것을 보존하고 전달하고 개발해 나가는 그러한 전통적인 흐름이 단절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이건 우리 가정 주부들이 게을러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것은 가정에 귀의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대자대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님께 항상 귀의하는 자세로, 그리고 가족들과 주변사람들에 귀의하는 자세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삶이 복 받는 삶입니다.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

대세지《大勢至》보살님은 지혜와 용기의 화신입니다. 용기라고 하는 것은 마음 가운데 자신감이 가득할 때 나옵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능력이 축적됐을 때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아함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많이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마음 가운데 자신감이 넘칩니다. 모든 사안을 분명하게 신속히 깨닫게 됩니다. 지금 내가 나가야 할 때인가 아닌가를 보다 지혜롭게 알게 됩니다. 어떤 사안을 만났을 때 주저하는 것은 판단력과 능력이 쌓이지 않아서 입니다. 명쾌하게 분명히 알 때는 즉시 `나가자! 앞으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만용과 용기는 큰 차이가 있는 단어입니다. 용기는 그 사안을 분명히 파악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판별하며 지혜와 능력을 바탕으로 해서 밀고 나가는 힘입니다. 사전 지식도 없이, 옳고 그름의 구분도 없이 그저 `가자!?고 큰소리만 치는 것은 만용입니다. 실패만 따를 뿐입니다.

우리는 만용을 부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용기는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바탕으로 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지혜란 낱말과 용기란 낱말은 한 덩어리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용감해져야만 합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수지신시광명당《受持身是光明幢》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모든 사안을 분명히 파악하기에 용감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고 정진을 하는 것은 어떠한 사안이 나에게 부딪혀 왔을 때, 그 사안을 슬기롭게 선별해서 헤치고 나가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 입니다. 실력 있는 사람이 될 때 용감해 집니다. 바르게 알 때 용감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본래 대세지보살은대정진《大精進》보살, 득대세《得大勢》보살이라고도 부릅니다. 아미타부처님에게는 두 분의 보살님이 계십니다. 우보처가 대세지보살로 지혜문을 나타내며, 좌보처 관세음보살은 자비문을 나타냅니다. 대세지보살님의 지혜와 용기의 광명이 모든 중생에게 비추어 삼악도를 여의고 위없는 용기를 얻게 하므로 대세지라 부릅니다.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이라고 하는 이 귀절은 대세지 보살님을 배워 지혜롭고 용기 있게 살자는 의미입니다. 대세지보살님은 우리들에게 삶의 이정표를 제시해 줍니다. 대세지보살님은 용기의 화신입니다. 불교는 용기의 종교입니다.

용기를 마음 밑바탕에서 우러나오게 하려면 평상시에 끊임없는 공부와 기도 정진을 거듭해야만 합니다. 능력을 탁월하게 기른 사람만이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나갈 수 있습니다. 용감하게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남들보다 훨씬 많은 공덕을 지을 수 있습니다. 용감하고 결단성 있는 사람들이 앞에서 이끌고 나갈 때 그 사회는 그들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사회가 발전해 나가려면 그렇게 앞장서 이끌고 나가는 용기의 화신이 있어야 합니다.

전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속담에 `공격이 최상의 방어이다《Offense is the best deffense》?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선공이 필요합니다. 자녀들도 용감하게 키워야 합니다. 왜 여자가 남자에게 지는 줄 아십니까? 용감성에서 뒤지기 때문입니다. 대세지보살마하살은 용기의 상징입니다. 그 용기는 자신감에서 나오며 자신감은 능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무천수보살마하살

천수《千手》보살님은 포용력의 화신입니다. 손이 천개라고 하는 것은 한도 끝도 없이 끌어 안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것을 다 포용하는 것입니다.

천수보살상은 양쪽에 각각 20개의 손이 있습니다. 손바닥마다 눈이 있으며 한눈과 한손이 각각 25유《有》 중생을 제도하므로 천수천안《千手千眼》이 됩니다. 천수보살은일체중생을 제도하고 포용하시는 관음보살의 대자비의 포용력을 상징적으로 보인 관음보살입니다. 관음보살의 화신 가운데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악도 중생의 혹심한 고통을 해탈케 해주시는 보살로 일체중생의 소구소망을 빨리 성취케 해주는 관음보살의 분신입니다.

요즘 능인불교학교에 오시는 분들을 보면, 처음 들어오신 보살님들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경직되어 있습니다. 눈【眼】이 모두가 매 눈 같이 날카롭습니다. 저 스님이 잘하시나 못하시나 의심하는 듯한 표정입니다. 그러나 불교학교를 마치고 전법사반에들어오신 보살님들의 눈은 비교적 많이 부드러워져 보입니다. 눈이 아름다워졌습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같이 잘 웃게 됩니다. 그 만큼 마음이 많이 맑아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공부하시는 보살님들은 무슨 얘길 해도 자세가 굳어져 있습니다. 그 업장이 녹아지려면 두어 달 쯤 걸리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육이 대단히 무섭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혼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마음의 세척 정도, 공덕의 정도, 지혜의 정도, 포용력의 정도에 따라 그 등급이 매겨집니다. 어떻게 마음이 좀 닦여지셨나요? 포용력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자꾸만 공부해야 합니다. 자꾸만 닦아야 합니다. 많은 생각과 생각 속에서 자기의 삶과 자기의 마음을 지혜롭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보살님들의 근본적인 덕성 가운데 중요한 것은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포근한 마음입니다. 한도 끝도 없이 고통스러워 하는 중생들을 모두 다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자들은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전쟁을 합니다. 참으로 치열한 전쟁입니다. 먹느냐 먹히느냐, 잡느냐 잡히느냐의 무서운 싸움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러한 남편을 사랑해야만 됩니다. 관세음보살님과 같이 천 개의 팔로 남편들을 포용해 주십시오. 남편이 괴롭고 아파서 주저 앉고 싶다가도 아내 생각만 하면 더욱 용기 백배해져서 `열심히 해야지?하는 생각이 날 수 있게 말입니다. 그런 보살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을 극락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 보살은 천수보살의 화현입니다.

나무여의륜보살마하살

여의원만형통《如意圓滿亨通》의 뜻입니다. 여의륜《如意輪》보살님은 원만보살입니다.

보살님들은 둥굴둥굴하게 원만해야 됩니다. 남편이 어렵고 괴로울 때, 또는 결정적인 어떤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남편들은 아내에게 묻습니다. 그럴 때 평상시에 기도를 많이 하고 공부를 많이하신보살님들은 바른 선택의 길을 얘기해 줄 수가있습니다. 그러면 남편들 대부분 그 말대로 따라 갑니다.

남편의 운명은 보살님들의 손바닥 속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긍정적으로 부처님 전에 기도하고 마음을 잘 갈무리하며 올바르게 살아온 보살님은 남편을 잘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보살님은 남편의 손을 잡고 지옥으로 끌고 가기 쉽습니다. 사업의 실패나 집안의 여러 가지 잘못의 큰 부분이 보살님들의 책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화엄경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야 될 때와 앉아야 될 때, 앞으로 나가야 될 때와 후퇴해야 될 때, 이것을 알고 계시는 유일한 분은 오직 부처님 밖에 안 계십니다.

`노는 입에 염불하라?고 하듯이 늘 기도한다든지 부처님 말씀을 공부한다든지 해서 자신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남편의 결정적인 순간 때 여러분들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면 여러분의 가정이란 배【船】은 그길 따라 순풍에 돛 단 듯 나아가게 됩니다. 평상시에 원만보살의 길을 가야 합니다. 형통보살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우리 아내하고 상의하면 만사 형통이야」이렇게 남편들이 즐거워 할 수 있게 말입니다.

`만사여의원만 형통지대발원《萬事如意圓滿亨通之大發願》? 천수경을 강의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부처님 말씀은 참 아름답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은 `만사길상여의원만《萬事吉祥如意圓滿》?의 마음을가지십시오. 기도하고 정진하고 공부하고 슬기를 도모하고, 그런 가운데 여러분들은 어느 사이에 여의원만해집니다. 원만형통보살님이 되시려면 기도를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만 합니다.

원래, 여의는 여의보주《如意寶珠》의 준말입니다. 륜《輪》은 여의륜관음을, 법륜을 가리킵니다. 6도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 세간과 출세간의 이익을 베푸는 것을 본뜻으로 하는 보살입니다. 여의보주는 흔히마니주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을 가지면 원하는 대로 뜻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나무대륜보살마하살

무한의 마음, 한도 끝도 없는 넓은 마음을 말합니다. 무한하고 끝없는 대륜《大輪》보살님은 여의륜보살님의 포용력과는 조금 패턴을 달리하고있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마하?의 뜻을 아시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대《大》?라는 의미는 원효대사께서 `열반경종요?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대?라는 의미는 광《廣》, 고《高》, 장《張》, 심《深》, 다《多》, 승《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광?은 한도 끝도 없이 넓다는 뜻입니다. `고?는 한도 끝도 없이 높고 높다는 뜻입니다. `장?은 한도 끝도 없이 가장 확장된 상태보다 더 확장된 상태를 말합니다. `심?은 이 우주에서 깊고 깊은 것 보다 더 깊은 심원【profundity】의 상태입니다. `다?는 많고 많은 것보다 더 많은 상태입니다. `승?은 가장 최고 가는 것보다 더 최고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망라한 상태를 `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텅 비우라고 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모은 그런 크고 큰 마음인 때문입니다. `대?라고 하는 것은 그저 `크다?는 정도의 그런 뜻이 아니라, 이 모든 경계와 의미를 다 초월한 경계를 말합니다. 대륜보살님은 이 모든 경계를 다 망라한 무한의 보살입니다. 그리고 대륜보살님은 텅 빈 허공과 같은 마음입니다.

나무관자재보살마하살

관자재《觀自在》보살마하살은 십자재보살입니다. 무한자재, 정말로 수단 좋고 수완 좋은 자재의 보살님입니다. 십자재는 다음과 같습니다.

명자재《命自在》:수명을 자유자재로 함.

심자재《心自在》:마음이 평안해져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됨.

재자재《財自在》:재물이 마음대로 풍요로워짐.

업자재《業自在》:좋은 업을 지음.

생자재《生自在》:태어나는 곳과 시간을 마음대로 함.

승해자재《勝解自在》:머리가 좋아져 이해도가 깊어짐.

원자재《願自在》:어떤 소원이든지 그 소원을 성취함.

신력자재《神力自在》:알 수 없는 신통력이 생김.

지자재《智自在》:대자연의 원리를 깨닫게 됨.

혜자재《慧自在》: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도 꿰뚫어 알게 됨.

이와 같은 십자재의 경계에 자재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해야만 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자재의 경계를 증득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하면 점차로 이와 같은 자재로운 경계를 열어갈 수 있음을 생각하시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마음을 다져 나가시기 바랍니다.

나무정취보살마하살

정취《正趣》보살마하살은선재동자《善財童子》에게 끝없는 정도《正道》을 열어 주신 보살님입니다. 우리는 항상 바른 길로 살아야 합니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살면 정도를 가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사는 사람, 자기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사람의 길은 항상 험난합니다.

나무만월보살마하살

만월《滿月》보살마하살은 `무위《無爲》?의 뜻입니다.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입니다. 오염되지않고 이그러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 만사길상《萬事吉祥》 여의원만《如意圓滿》 형통지대발원《亨通之大發願》과 같은 의미입니다.

기도 정진하면 만월보살의 원력으로 내 마음 가운데 오염된 부분이 항상 녹아내려 업장을 소멸하게 됩니다.

특히 만월보살은 그 상호가 둥근 달과 같다 하여 어두운 밤길을 밝혀주듯, 중생들의 고통을 녹여내리는 보살로 지칭되고 있습니다.

나무수월보살마하살

수월《水月》보살님은 순종의 뜻입니다. 끝없는 순종의 뜻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어느 사람의 말이라도 다 잘 들어주시는 수순한 그러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그 마음을 다해서 그 누구에게라도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순종하는 자세, 수순의 자세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수월관음은 달이 비친 바다 위에 한 잎의 연꽃을 타고 계신 형상이며, 왼손에 연봉《연꽃의 봉오리》을 들고 계신 모양을 하고 계십니다.

나무군다리보살마하살

군다리《軍茶利》란 치병, 감로 약병이란 뜻입니다. 관세음보살님 가운데 약병을 들고 계신 모습이 있는데 그 안에는 만병통치약이 들어 있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마음의 따사로움으로 몸과 마음의 병을 고쳐주는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고쳐주는 마음이 되려면,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같은 마음이 되려면 열심히 기도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공부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병을 고쳐주고 몸의 병을 고쳐주는 그런 보살님이 군다리보살님 입니다.

나무십일면보살마하살

십일면《十一面》관음보살님은 십면은 보살면이고 딱 한면은 불면《佛面》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원래 부처님이 되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제도하시려고 지금도 그냥 보살도를 닦고 계신 분이십니다. 일체 모든 능력이 다 구족되신, 일체 모자람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다 차 계신 완전 충족되신 분이십니다.

십진법에서는 십이 꽉 찬 수《數》입니다. 10다음에 하나 더한 의미입니다.

나무제대보살마하살

제대《諸大》보살, 즉 일체 모든 보살들과 더불어 대보살님들께 귀의합니다 의 뜻입니다. 모든 보살님께 기도를 열심히 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나무본사아미타불

관세음보살님의 본사《本師》은 아미타불입니다. 모두가 우리가 정말 귀의해야 할 대상들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마음을 길러 가야만 된다는 매일 매일의 수행 자세를 의미합니다.

자비심을 기르고, 용기와 포용력을 기르고, 형통한 마음을 기르고, 자재로운 마음으로 정도 따라 걷는 것을 말합니다. 무위심과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들의 마음과 몸의 병을 고쳐주는 마음으로, 그리고 항상 수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곧 우리의 삶의 행로이며 불도 수행의 요체인 것입니다.




다라니의 공덕

신묘장구대다라니

천수경의압권은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입니다신묘장구대다라니는문자그대로 여래의 지혜, 자비를 갈무린 여래의 본체라 부릅니다. 한량없는 여래의대비신력과 위신력을 머금은 대다라니이기에 그 신통묘용은 말로 다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대다라니는 뭇 중생들의 안락함을 얻게 하기 위해, 긴 수명을 얻게 하기 위해, 풍요로움을 얻게 하기 위해, 모든 그릇된 행위로 지은 중죄를 녹여내리기 위해, 모든 장애와 곤란을 떠나기 위해, 무구 청정한 공덕을 늘리기 위해, 모든 선근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두려움을 먼저 여의기 위해, 간절히 원하는 것을 모두 속히 만족시키기 위해 설하여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이나 천상 대중으로 대비신주를 외워 지니는 이는 15가지 좋은 태어남을 얻고 15가지 나쁜 죽음을 받지 않습니다.

15가지 나쁜 죽음을 받지 않음이란,

배고픈 고통으로 죽지 않게 하며

옥에 갇혀 매맞아 죽지 않게 하며

원수와 상대해서 죽지 않게 하며

전쟁터에서 서로 싸워 죽지 않게 하며

사나운 짐승에게 물려 죽지 않게 하며

독사 전갈에게 물려 죽지 않게 하며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지 않게 하며

독약을 먹고 죽지 않게 하며

독충의 독으로 죽지 않게 하며

미쳐 죽지 않게 하며

산이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지 않게 하며

나쁜 사람의 저주로 죽지 않게 하며

악귀에게 홀려 죽지 않게 하며

악병으로 죽지 않게 하며

자살로 죽지 않게 함입니다.

또 15가지 좋은 태어남이란,

태어나는 곳마다 늘 좋은 정치지도자를 만나며

늘 좋은 나라에 태어나며

늘 좋은 때를 만나며

늘 좋은 벗을 만나며

몸에 결함이 없으며

진리를 향하는 마음이 돈독하며

계를 범하지 않으며

가정이 늘 화목하며

음식과 재물이 풍요로우며

늘 다른 사람의 공경과 도움을 받으며

재보를 도둑 맞지 않으며

바른 뜻으로 구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며

천룡팔부신장과 선신들이 옹호하며

태어나는 곳마다 부처님 법을 들으며

바른 법을 듣고 그 깊은 뜻을 깨치게 된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대다라니의 공덕은 문자 그대로 무량한 것이어서 관세음보살님께서도 부지런히 독송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다라니를 수지 독송하는 사람의 공덕에 대해 관세음보살님께서는 `나의 자비, 방편의 힘으로 필요한 바를 모두 성취케 되며, 삼악도 중생들이 이 다라니를 들으면 모두 고통을 여의게 되며, 초발심의 자리로부터 부처님의 자리에까지 속히 이르도록 하며, 32상 80종호를 속히 이루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밖에「만약 모든 사람과 하늘 대중으로 이 다라니를 외워 지니는 자가 강이나 냇물, 큰 바다 가운데 목욕하면 그 물 가운데 있는 모든 부류의 생물들은 이 사람이 몸을 씻는 물이 그 몸을 적시기만 해도 모든 잘못된 행위와 무거운 죄가 사라지게 되고, 곧 서방정토에 태어나 연꽃에 화생하여 낙을 누리게 된다. 또 만약 다라니를 외워 지니는 자가 길을 갈 때, 때마침 큰 바람이 이 사람의 몸이나 머리칼 옷에 스치면, 그 바람의 흐름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몸을 스쳐 흐른 바람이 몸에 불어 닿기만 해도 모든 무거운 죄와 잘못된 행위가 사라져 다시는 삼악도의 과보를 받지 않고 늘 부처님 앞에 태어나게 되리라. 그러므로 이 다라니를 받아 지니는 자는 복덕의 과보가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느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밖에, 이 다라니를 외워 지니는 사람은

부처님의 몸《佛身藏》이며

광명신《光明身》이며

자비장《慈悲藏》이며

묘법장《妙法藏》이며

선정처《禪定處》이며

허공장《虛空藏》이며

무외장《無畏藏》이며

묘어장《妙語藏》이며

상주장《常住藏》이며

해탈장《解脫藏》이며

약왕장《藥王藏》이며

신통장《神通藏》이 된다

하시는 등, 다라니 수지의 공덕은 참으로 무량하다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특히 다라니를 지닐 경우 갖가지 병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가르침을 낱낱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탁월한 공덕의 곳집인 신묘장구대다라니의 해석 여부를 놓고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5종불번《不飜》이라 하여 진언이나 다라니등 주문은 5가지 이유로 번역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번역 자체를 거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다라니가 여래의 무상심심미묘한 경계를 반영한 내용이라 분명히 맞는 얘기입니다. 다섯 가지 다라니를 번역치 않는 이유를 보아도 번역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번역치 않는 다섯 가지 이유를 살펴봅니다.

다라니나 진언 등은 제불《諸佛》의 높은 차원의 의미를 담은 말씀으로 부처님과 부처님 만이 서로 통하고 그 경계에 이르지 못한 이는 해득이 불가능하므로 번역치 않는다.

다라니나 진언 등은 한자 한자에 여러 뜻을 포함하고 있어 번역치 않는다.

다라니나 진언 등은 허공계의 많은 신장들과 성현들의 이름이어서 고유명사인 때문에 번역할 수 없다.

다라니나 진언 등은 모든 부처님들의 비밀스러운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이를 번역하면 부처님의 위신력을 손상하므로 번역할 수 없다.

다라니나 진언 등은 제불보살의 불가사의한 위신력이 깃 들어 있으므로 지송《持誦》자체에 의미가 있어 번역할 수 없다.

다라니를 총지《總持》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교 자체가 말을 떠난 가르침이기에 다라니의 해석은 그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밀교《密敎》라 불리우는 한 부류에서는 진언이나 다라니 등이 부처님의 무상심심미묘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해석이 불가하다고 합니다. 다라니의 세계가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세계이나, 부처님의 경전 역시 부처님의 무상심심미묘한 마음을 펼쳐 놓은 것이고 그를 공부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근기에 따라 받아 들일 수밖에 없으나, 부처님께서도 경전을 설하신 바에야 어떤 형태이건 이해 불가해한 다라니의 세계를 이해하는 한 차원으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라니의 경우는 부처님께서 그 당시의 언어로 말씀하신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한 내용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화두와 다라니의 차원은 조금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다라니는 이해 가능한 인도 언어로 되어져 있으나, 화두란 의심 덩어리인 것이어서 같은 측면과 전혀 차원이 다른 양면이 존재한다 하겠습니다.

이같은 이유로 해서 이번 천수경 강의에서는 간단히 이해 가능할 정도의 번역을 도모해 보았습니다. `아! 이러한 내용이구나? 생각하시고 좀더 큰 신심을 내시면 번역의 취지를 달성한 것이라 사료됩니다.

항상 말과 글이란 마음의 미묘한 상황을 백퍼센트 다 묘사해 낼 수 없는 것이고, 특히 부처님의 경계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범부들에게는 해석이 필요한 점도 있을 것입니다. 당장 `이것이 무슨 내용일까?? 알고자 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우리들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다라니의 해설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천수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대다라니를 귀절별로 나주어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모《namo》〓귀의 한다는 의미입니다. 귀명《歸命》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라다나《ratna》〓본래 보물, 보석 등의 의미입니다. 보물 보석 등은 가장 훌륭한, 가장 으뜸 가는 최상《最上》의 의미로 해석됩니다.

다라야야《trayaya》〓보호자의 의미로 관세음보살님을 의미합니다.

<가장 거룩한 관세음보살님 귀의합니다>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마하가로 니가야

나막〓나모와 같은 뜻

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arya valokite svaraya》〓관세음보살님의 본명

모지사다바야《bodhisattvaya》〓보살의원음

마하사다바야《mahasattvaya》〓마하살, 큰 보살의 의미

마하가로니가야《mahakarunikaya》〓대자대비의 뜻

<거룩하신관세음보살님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옴살바바예수 다라나가라야 다사명 나막까리다바 이맘알야바로기제 새바라 다바

옴〓`옴마니 반메 훔?에서 자세히 설명됩니다. 옴은 A. U. M의 뜻으로 시작과 과정과 끝을 의미하는 우주의 본질을 뜻하는 가장 근본적 진언입니다.

살바〓일체의 뜻

바예수〓공포, 두려움

다라나〓보호, 피난처, 구제제도

가라야〓고난

다사명〓구한다, 제도한다여기까지의 의미는 <일체의 공포로 부터 지켜주시는>의 의미입니다.

나막〓나모와 같은 뜻

까리다바〓위엄 있는 힘이 있는 사람

이맘〓성인

알야바로기제 새바라 다바〓관자재보살의 위력 여기까지의 의미는 <성스러운 관자재보살님의 위신력이 펼쳐진다>의 뜻입니다. 전체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옴 일체의 공포로 부터 지켜 주시는 성스러운 관자재보살님께 귀의하여 거룩하신 위신력이 펼쳐집니다>

니라간타 나막하리나야 마발다 이사미

니라〓푸른 빛

간타〓머리<푸른 머리를 지닌 관세음보살님>의 뜻

나막〓귀의

하리나야〓마음에 접촉되다【心觸】

마발다 이사미〓회귀한다, 돌아온다

<관세음보살님의 근본심으로 돌아 가옵니다>

살발타 사다남 수반아예염 살바보다남 바바말아 미수다감 다냐타

살발타〓모두를 이롭게 하다

사다남〓성취 완성하다

수반〓길상, 행운

아예염〓최고의

살바보다남〓일체 생물

바바〓탄생

말아〓길, 통로, 정토

미수다감〓청정공덕

다냐타〓나아간다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경지를 성취할 것이며, 지고의 최고의 행운의 경지에 올라 일체 이 세상에 출현한 중생들을 정도로 이끌어 청정공덕의 길로 나아가겠습니다>

옴 아로계 아로가 마지로가 지가란제 혜혜하례

아로계 아로가〓관찰자

마지〓지혜

로가〓존재, 국민, 사람

지가란제〓초월

혜혜〓따르다

하례〓오르다

<옴, 통찰자이시며 지혜의 존재이시며 초월자이신 관세음이시여, 끊임없이 정진하겠나이다, 따르겠나이다>

마하모지사다바 사마라 사마라 하리나야

마하모지사다바〓대보살님

사마라〓기억하다

하리나야〓마음에 새기다

<대보살님이시여, 기억해 주소서, 항상 마음에 새겨 주소서>

구로 구로 갈마 사다야 사다야 도로도로 미연제 마하미연제 다라다라

구로〓나쁜

갈마〓업

사다야〓승리자

도로〓선장 수장

미연제〓승리하다

마하미연제〓크게 승리하다

다라〓기억한다

<속히 악업을 그치겠나이다. 위대한 승리자이신 관세음이시여, 항상 우리를 기억해주소서>

다린나례 새바라 자라자라 마라 미마라 아마라 몰제 예혜혜

다린나례〓옹호하는 주인, 왕

새바라〓자재자

자라자라〓행동하다

마라〓번뇌

미마라〓더러움을 없애다

아마라〓더러움을 없앤자, 해탈자

몰제 예혜혜〓속히 어서 빨리

<옹호자이시며 자재자이신 관세음이시여, 일체 번뇌로 부터 해탈하신 관세음이시여, 어서 빨리 강림하소서>

로계 새바라 라아 미사미 나사야 나베 사미사미 나사야 모하자라 미사미 나사야

로계〓세간, 세상

새바라〓자재자

라아〓욕망, 탐욕

미사미〓독심

나사야〓잠재우다

나베〓진심

사미사미〓독심

나사야〓잠재우다

모하자라〓치심, 우치심, 무명

<세간의 자재자이신 관세음이시여, 탐욕의 독심을 잠재워주소서, 진심의 독심을 잠재워 주소서, 치심의 독심을 잠재워주소서>

호로호로 마라호로 하례 바나마 나바 사라사라 시리시리 소로소로 못쟈못쟈 모다야 모다야

호로호로〓공포, 두려움

마라〓번뇌

하례〓제거하다

바나마〓연꽃

나바〓중심【바나마 나바〓연화성존《聖尊》】

사라〓제도하다

시리〓나아가다

소로〓펼치다

못쟈〓깨달음의 성자

모다야〓보리도

<관세음이시여, 공포를 제거하여 주소서, 속히 제도하여 주소서, 나아가게 하여 주소서, 깨달음을 얻게 하소서>

매다리야 니라간타 가마사 날사남 바라 하라나야 마낙 사바하 싣다야 사바하

매다리야〓어여삐 여기소서

니라간타〓관세음보살, 청경성존

가마사〓애욕

날사남〓파하다, 부수다

바라 하라나야 마낙〓분발케하다

사바하〓길상, 서상

싣다야〓성취

사바하〓길상 있으라

<관세음이시여, 어여삐 여기시어 애욕을 파하도록 힘을 주소서, 성취케 하소서>

마하 싣다야 사바하

마하〓크다

싣다야〓성취, 달성

<대성취존이시여, 성취케 하소서>

싣다유예 새바라야 사바하

싣다〓싣다야와 같은 뜻

유예새바라야〓요가의 성취자

<요가자재이시여, 성취케 하소서>

니라간타야 사바하

니라간타야〓청경존

<청경존이시여, 성취케 하소서>

바라하 목카싱하 목카야 사바하

바라하〓돼지

목카〓모습

싱하〓사자

<동물을 제도키 위해 동물 모양을 한 관세음보살이시여, 성취케 하소서>

바나마 하따야 사바하

바나마〓연꽃

하따야〓지니다

<연꽃을 지니신 관음이시여, 성취케 하소서>

자가라 욕다야 사바하

자가라〓큰 수레바퀴

욕다야〓구족하다

<큰 바퀴를 드신 관음이시여, 성취케 하소서>

상카섭나녜 모다나야 사바하

상카〓소라

섭나녜〓소리

모다나야〓보리【깨달음】

<법소라음으로 깨닫게 하시는 관음이시여, 성취케 하소서>

마하라 구타다라야 사바하

마하라〓크다

구타〓병

다라야〓지니다

<큰 병을 지니신 관음이시여, 성취케 하소서>

바마 사간타 이사시체다 가릿나 이나야 사바하

바마〓오른손

사간타〓어깨

이사〓방향

시체다〓서있다

가릿나〓검은색

이나야〓깨달은 자, 여래

<오른쪽 어깨에 검은 서상을 하신 관음이시여, 성취케 하소서>

먀가라잘마 이바사나야 사바하

먀가라〓호랑이

잘마〓가죽

이바사나야〓의복

<호랑이 가죽 옷을 두른 관음이시여, 성취케 하소서>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나모〓귀의

라다나〓보배

다라야야〓보호자

나막〓귀의, 나모와 같은 뜻

알야바로기제 새바라야〓관세음

<귀의 하옵나니 관음대성존이시여, 성취케 하소서>



하루의 마음 자세   사방찬

사방찬《四方讚》

일쇄동방결도량《一灑東方潔道량》

이쇄남방득청량《二灑南方得淸량》

삼쇄서방구정토《三灑西方俱淨土》

사쇄북방영안강《四灑北方永安康》

사방찬《四方讚》, 하루 온 종일 정신을 가다듬고 사방 부처님께 찬탄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허공은 부처님의 몸이므로 항상 부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방 허공의 부처님을 찬탄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쇄동방결도량

`일쇄동방결도량《一灑東方潔道장》?의 `쇄?란 뜻은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질 때 느끼는 시원함을 의미합니다. 머리에 시원한 물을 끼얹었을 때의 시원함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듯이 몸을 씻어 낸다는 의미보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가다듬게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물은 모든 걸 다 씻어 내리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물을 마실 때 그 물은 온 몸을 휘감아 돌면서 모든 불순물을 씻어 냅니다. 물이 만상을 씻어 내리듯, 모두를 청정하게 씻어 내는 마음으로 살아야 함을 뜻합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은 모든 만상이 눈을 뜨는 곳입니다.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면 세상 만물이 살 수 없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동 터 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창문을 모두 열고 공기도 바꾸고 모든 도량을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도량이란 무엇을 의미하나요? 절【寺】만 도량이 아닙니다. 도량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부처님이 계신 곳은 어디나 다 도량입니다. 여러분의 집이 바로 도량입니다. 남편부처님, 아들 딸 부처님, 그리고 시아버님 부처님, 시어머님 부처님이 다 계시는 도량입니다.

여러분 마음 가운데 부처님이 계시냐고 물으면 다들 계신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렇다면 부처님답게 생활하셔야 합니다. 부처님다운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 가운데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허공은 살아 있는 세계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고 마음은 그 육신에서 벗어나 허공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분명한 사실은 마음은 살아 있는 존재이니까 허공 가운데 무언가 있을게 아닙니까?

반야심경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불교에서 무《無》라는 말은 무한과 통하는 의미입니다.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란 말씀은 무한대한 안이비설신의가 있다는 뜻과도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생명체를, 모든 만상을 존재케 하는 원천이 바로 허공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원각경 보안보살장에 보면 부처님은 허공을 몸으로 삼고 계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엄경에도 그와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진실로 허공은 바로 부처님의 몸입니다. 허공이 부처님의 몸이기에 지금도 부처님께서 여러분을 허공에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의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행동 하나 하나를 모두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호흡을 할 때 무엇을 빨아 들일까요? 산소를 빨아 들일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미국에 NASA라고 불리우는 항공우주국이 있습니다. 그 NASA에서 조사한 것이 있습니다. 진공상태를 만들어서 그 안에 기니피그【Guinea pig, 흔히 모르모트라고함】을 집어 넣고 그 곳에 산소만 집어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기니피그가 4시간 40분만에 모두 죽어 버렸습니다.

우리 인간도 산소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을 빨아 들이고 사는 것입니다.

허공은 부처님의 몸이라고 했으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는 부처님을 마시고 사는 것입니다. 바로 부처님의 몸을 마시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간단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매일 부처님 몸을 마시고 살기에 항상 부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생명의 원천은 호흡에 있습니다. 호흡이 나갔다 다시 들어오지 않으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허공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허공은 살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바로 네 마음 가운데 부처님이 계시니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이 부처님이요, 허공이라 했으니까, 우리들의 마음이 곧 허공을 닮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논리적으로 빈틈 없이 맞아 들어갑니다. 우리들의 마음이나 허공이 다 똑같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은 안팎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안팎이 없는 우리 마음에 이렇게 껍데기 하나씩이 입혀졌을까요?

우리들은 바로 오염된 물방울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빨강, 노랑, 파랑색 물감이 들어 있는데 그러한 물감이 들어 있다고 해서 물이 아닌 것은 아니잖습니까? 거기서 물감만 빼내면 여러분은 맑은 물이 됩니다. 물감을 빼내는 작업이 바로 수행이고, 고행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감을 완전히 빼내 버리면 여러분들은 바로 부처님과 똑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물감이 들어있는 부처님들입니다. 물감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오염된 마음은 흡사 누에가 고치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자기《自己》라고 하는 이기심과 자기라는 장벽을 쌓고 살아갑니다. 나와 남을 가르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내 것 네 것, 나 너, 이렇게 모두를 분별하는 마음 때문에 불행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입니다. 내 것 네 것 가르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욕망으로 오염된 마음을 버리십시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다가 죽을 때 동전하나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나올 땐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나왔지만, 죽을 땐 꽉 쥐고 죽는 사람이 없습니다. 기운이 없어서 입니다. 여러분들도 머지않은 장래에 그러한 날이 옵니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직시하고 삶을 허공과 같은 마음, 빈 마음, 부처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은 꼭 몸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저 부산 자갈치시장을생각하면, 마음은 이미 그 곳에 가 있는 것입니다. 또 자동차를 타고 갈 때 만약 시속 60Km로 달린다면 초속 16m를 달리는 셈이 됩니다. 눈 깜작 할 사이에 자동차가 16m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만일 그 순간에 자동차가 잘못하여 가로수를 받아 버리면 육신은 순식간에 깨어져 버리게 되지만 마음은 허공으로 가 버립니다. 마음은 이다지 안팎이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 가운데 부처님이 계십니다. 다만 그 사실을 모르는 부처님들인 것입니다. 내가 곧 부처님임을 확신한 사람은 부처님답게 살아갑니다. 자신이 바로 부처님임을 알면서도 그 부처님 됨을 방해하는 가장 좋지 못한 마음은 바로 욕망입니다. 탐욕입니다. 나밖에 모르는 마음이 장벽이 되어 나의 부처님 됨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마음 가운데 있는 이러한 탐욕의 독심을 녹여 내리는 작업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를 수행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일쇄동방결도량?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동방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수행의 자세를 깨끗하게 가다듬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이쇄남방득청량

태양이 정오에 정남향에 올 때를 남중 한다고 합니다. 태양이 정남향에 올 때, 지상은 이글이글 타오릅니다. 그때는 씩씩하게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동《東》을 아침에, 남《南》을 점심에, 서《西》을 저녁에, 북《北》을 밤에 비유하며 하루의 사이클《cycle》을 얘기합니다. 동서남북은 시계방향으로 돌아갑니다.

아침엔 모든 걸 청결히 하고 직장에 출근해서 `이쇄남방득청량《二灑南方得淸양》? 청량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낮엔 푸르고 푸른 마음으로 씩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푸른 땀을 흘려야 합니다. 우리가 땀을 많이 흘릴 때 바람이 싸악 스쳐 지나가면 우리는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것을 청량함이라고 합니다.

신선하고 상쾌한 기분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면 그로부터 오는 상쾌함이 있습니다. 노동이 주는 즐거움입니다. 태양이 남중하는 낮은 열심히 일하는 때입니다.


삼쇄서방구정토

`삼쇄서방구정토《三灑西方俱淨土》?의 `정토?는 가장 편안한 곳을 말합니다. 낮에 열심히 일하고 태양이 서편으로 질 무렵 집에 들어오면, 집안은 바로 정토가 됩니다.

일을 해야만 보금자리에 들어와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일을 하지 않고 빈둥거리다 보면 쓸데없는 생각만 하게 됩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권리가 없습니다.


사쇄북방영안강

`사쇄북방영안강《四灑北方永安》?의 `영안강?은 오래도록 편안하다는 뜻입니다. 밤에는 편안히 잠을 자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날을 활기차게 보낼 수 있습니다. 일 안하고 놀기만 하면 불면증에 시달리기 쉽습니다. 하루의 사이클, 일년의 사이클, 일생의 사이클이 다 같은 것입니다. 하루의 사이클은 아침 점심 저녁 밤이고, 일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며, 일생은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렸을 때에는 깨끗한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일생 동안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근간을 형성해야 합니다. 청결한 마음, 오염되지 않은 마음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어린 시절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고 부처님 말씀 따라 살게 하는 교육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청년기엔 부지런히 근면 성실하게 살도록 해야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능력을 닦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청년기에 열심히 살아야 장년기에 휴식을 할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 다음엔 부처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1년을 생각해 본다면 봄에는 밭을 갈고 논을 갈고 씨 뿌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름엔 왕성하게 이것을 가꾸어야 합니다. 여름에 가꾸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게 없습니다. 가을에 거둘 게 없으면 겨울에 편안하게 쉴 수 없습니다. 이것이 1년의 사이클입니다. 불교의 천수경은 완전히 입체적입니다. 불경은 평면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완전히 입체적인 가르침입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

도량찬

도량청정무하예《道장淸淨無瑕예》

삼보천룡강차지《三寶天龍降此地》

아금지송묘진언《我今持誦妙眞言》

원사자비밀가호《願賜慈悲密加護》

도량찬《道장讚》이란 도량을 찬탄하는 사구게 입니다. 도량이란 부처님을 모시고 계신 곳입니다. 어디나 다 도량이 아닌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도량이고, 이 우주도 다 도량입니다.

부처님 경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이라고 하셨습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만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항상 불상《佛像》이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다 불상입니다. 이 육신은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그릇입니다. 그러니까 처처불상《處處佛像》입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작은 일 큰 일이 따로 없습니다. 다 하나로 연결된 채널《channel》입니다. 조그마한 일, 그 어느 것도 부처님 공양하는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전에 쌀을 올리고 초를 올리는 것 만이 불공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마주 오는 상대방에게 아름다운 미소를 한 번 짓는 것도 바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입니다. 어디에 있다거나, 어떻게 살아가거나, 어느 상황이거나, 작은 일 큰 일 모두가 다 부처님께 공양하는 일입니다. 이 우주는 처처불상이라고 하셨으니까, 이 우주는 그대로가 다 부처님 나라입니다. 모든 사람을 모두 부처님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도리로 산다면 모든 것이 다 성취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걸핏하면 상대방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경멸합니다. 상대방을 헐뜯고 비난하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짓입니다. 정말 바보 짓입니다. 자타 모두의 공멸을 초래하는 짓입니다.

우리는 좋은 마음을 가지면 좋은 물질이 생성되고, 나쁜 마음을 가지면 나쁜 물질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이미 공부했습니다. 프랑소와 자콥은 노벨상 수상자이며, 유전인자 공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이 분이 노벨상을 받은 주요내용은 `세포가 악화되거나 좋아지는 데는 두가지 요인이 있다. 내적인 요인과 외적인 요인이다. 기후의 변화나 음식물의 공급 등 외적 요인이 상황 변화를 유도한다. 그러나 내적 요인,즉 마음과 의식의 변화는 그 이상의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외적 상황 변화가 세포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미립자 세계의 그 어마어마한 코드《chord》을 변모시키는 전폭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는 것을 설명하기는 불가능 합니다. 프랑소와 쟈콥이나 엘마 게이트 같은 탁월한 석학들이 마음의 변화가, 내적인 변화가 몸의 화학적인 변화를 유도한다고 밝혀낸 것입니다.

현대 인체 생리학자들에 따르면, 우리 몸의 신경 속엔 전기가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전류는 전자의 흐름입니다. 그렇게 보면 마음의 변화가 몸의 변화를 유도하고, 신경의 변화를 유도하고, 전자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를 부처님께서는 이미 수 천년 전에 다 아신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정성스럽게 듣고 있으면, 좋은 세포가 생겨납니다. 아주 신성하고 깨끗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 말씀을 듣는 순간에는 마음속의 오염된 여러 가지가 다 녹아져 내립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 세포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좋은 세포는 좋은 파장을 내 보냅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 든다?하듯, 좋은 세포는 좋은 생각【idea】을 담는 그릇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그 반대로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세포가 생겨나고, 그 나쁜 세포는 나쁜 생각만 방출하게 됩니다. 나쁜 파장을 방출하는 것입니다. 좋은 파장은 좋은 파장 끼리 모입니다. 에너지는 뭉치면 질량으로 변하고, 질량은 다시 에너지로 변합니다. 좋은 세포는 좋은 생각을 만들어내는 그릇입니다. 좋은 세포는 좋은 생각을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끊임없이 생성하게 됩니다. 이같은 이유로 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거나, 마음을 맑게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탁월한 아이디어《idea》이 나옵니다.

도량청정무하예

`도량청정무하예《道장淸淨無瑕》?입니다. 온 도량이 깨끗하여 더러운 것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도량입니다. 도를 닦는 그릇입니다. 부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청정하고 결점이 없고 더러움이 없어야만 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앞에서도 여러 차례 설명 드렸습니다.

삼보천룡강차지

`삼보천룡강차지《三寶天龍降此地》?, 허공 가운데 계신 삼보님과 불보살님의 거룩하신 힘이, 그리고 그 많고 많은 신장님들께서 청정하고 더러움과 결점이 없는 그 자리에 오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여러분의 청정한 몸과 마음속에 삼보님이 오시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복을 받거나 재앙을 받는 것도 다 자기 하기 나름입니다.

아금지송묘진언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아금지송묘진언《我今持誦妙眞言》?, 내가 지금부터 끊임없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부처님 법문을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하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제 열심히 정성스런 마음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부처님!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를 참회하옵니다. 나의 교만심과 오만함과 이기심과 야욕과 쓰레기 같은 마음들을 다 녹여 내리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원사자비밀가호

`아금지송묘진언?하는 마음이라야 `원사자비밀가호《願賜慈悲密加護》? 부처님의 비밀스러운 가호지묘력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호지묘력을 힘 입으려면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필요충분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자기 할 도리를 다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선 몸과 마음과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그런 환경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노는 입에 염불하라?는 말씀처럼 우선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할 도리를 다해야 복이 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 직접 참회하라

참회게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진痴》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성당에서는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하지만, 우리 불교에는 그런게 필요 없습니다. 참회경에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우리가 천수경을 독경하기 시작하면 나무참제업장 보승장 부처님은 물론, 12존 부처님과 모든 화엄신장님들께서 우리들의 참회를 받아 들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각양각색 죄를 탕감시켜주시는 모든 부처님들과 화엄신장님께서 우리들 앞에 나타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불교는 스님께 참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전에 직접 천수경을 독경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사실은 그 모든 분들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 계십니다.

악업과 탐진치 ◐아석소조제악업, 개유무시탐진치◑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내가 저 먼 과거로 부터 지은바 여러 가지 악업들은 모두가 다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진痴》?, 저 시작도 끝도 없는 과거로 부터의 탐진치로 말미암은 것이다란 뜻입니다.

탐`진`치는 삼독심《三毒心》, 즉 탐심을 내고 화를 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탐심은 독심입니다. 탐심을 내면 세포 속에 독소가 생겨나게 됩니다. 진심 역시 자멸의 길입니다. 화내지 마십시오. 어리석음도 지혜롭지 못한 마음이요, 동물의 마음과 유사한 마음입니다. 그 역시 자멸의 길입니다. 독심은 몸에 독을 오르게 합니다. 그것은 곧 자멸의 길입니다.

삼업과 참회 ◐종신구의지소생, 일체아금개참회◑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모든 악업들은 신`구`의《身`口`意》삼업으로 부터서 생기는 바이오니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일체를 이제 다 참회 하옵나이다의 뜻입니다.

탐`진`치가 배어 나오는 곳이 어디입니까? 몸과 입과 생각입니다. 탐. 진. 치 삼독심이 생겨나는 곳이 몸, 입, 생각의 신`구`의 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모두가 신`구`의로 부터 표현됩니다. 탐`진`치 삼독심을 잘 다스리려면 항상 몸과 입과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자기 몸과 마음을 좋지 못한 환경에 머물게 하면 의도적이 아니더라도 빨려 가듯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런 환경을 만드는 마음을 파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환경에 빨려 들어가는 것은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속에 쌓인 업 때문입니다. 억겁 창생을 두고 저 먼 과거로부터 나쁜 생각을 쌓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쁜 생각이 나쁜 업을 만들어서 우리의 몸과 마음 가운데 배어진 까닭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자신의 몸과 입과 생각을 관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남편들의 몸과 입과 생각도 관리해 나가야 합니다. 어느 거사님의 표현을 빌리면 여자들의 사고방식이 어떨 때는 남자들의 사고 관념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차이를 알면서도 어쩌다 보면 아내에게 쉽게 끌려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보살님들께서는 이같은 점을 생각하셔서 스스로의 몸과 입과 생각도 관리하고 남편들의 몸과 입과 생각까지도 관리하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몸과 입과 생각을 좋지않은 환경 속에 갖다 놓지 마십시오. 좋지 못한 환경으로부터 모든 불행이 오는 것입니다.




업장소멸의 열 두 부처님

참제업장십이존불

나무참제업장보승장불《南無懺除業障寶勝藏佛》

보광왕화렴조불《寶光王火炎照佛》

일체향화자재력왕불《一切香火自在力王佛》

백억항하사결정불《百億恒河沙決定佛》

진위덕불《振威德佛》

금강견강소복괴산불《金剛堅强消伏壞散佛》

보광월전묘음존왕불《普光月殿妙音尊王佛》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

무진향승왕불《無盡香勝王佛》

사자월불《獅子月佛》

환희장엄주왕불《歡喜莊嚴珠王佛》

제보당마니승광불《帝寶幢摩尼勝光佛》

지금까지 우리는 참회의 필요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신부님 앞에서 참회를 하지만, 불교는 스님께 참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 중에 계신 무량한 부처님 전에 참회하면 됩니다. 우리들 마음속의 참회를 받아주시는 분이 바로 위에 열거한 열 두 분의 부처님이십니다.

진정한 참회란 신부님이나 스님들에게 가 아닌, 나의 내면 깊숙이 진심 어린 기도를 통해 부처님들께 하라시는 불교는 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꿰뚫은 멋진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내면의 뉘우침을 받아주시는 열 두 부처님들은 어떤 부처님이신지 공부해 보겠습니다.

나무참제업장보승장불

우리들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남에게 아무 대가《代價》도 치르지 않고 신세를 지게 되면 그것이 다 빚이 됩니다. 이 보승장부처님께 참회를 하게 되면 그러한 허물과 빚들을 탕감 받는다고 합니다. 또 애꿎게 짐승들을 때리고 학대하는 것, 이런 것도 다보승장부처님께 참회를 하면 많은 죄업이 소멸됩니다. 보승장부처님을 자주 염하십시오.

보광왕화렴조불

돈 있고 재물 있다고 함부로 낭비하지 마십시오. 재물을 함부로 낭비하는 죄, 참으로 큰 죄입니다. 공공 기물을 함부로 다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돈이라고 흥청망청 낭비한 죄, 공공 기물을 함부로 손괴한 죄, 그런 모든 죄를 보광왕화렴부처님께 기도 드리면 많은 부분이 참회가 됩니다.

일체향화자재력왕불

계행을 잘 지키지 않고 파기한 죄도 큽니다. 그러나 이 일체향화자재력왕불은 그러한 죄를 탕감 시켜 주십니다.

백억항하사결정불

살생을 한 사람들은 이 부처님께 기도 드리십시오. 살생죄의 많은 부분을 탕감 받게 될 것입니다.

진위덕불

삿된 음행, 사음 죄를 탕감해 주시는 부처님입니다.

금강견강소복괴산불

지옥고에 떨어질 죄를 지은 중생들이 이 부처님을 불러 모시면 죄의 많은 부분이 상쇄될 것입니다.

보광월전묘음존왕불

이 부처님은 법문을 많이 듣거나 공부를 많이 한 사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여래불타의 교설을 전하고 불법을 펼친 그러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게 있을 때 변호해 주시는 부처님, 다시 말해 변호사 부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법문을 많이 공부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환희장마니보적불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걸핏하면 성질을 내는 마음, 더럭더럭 화를 내는 마음, 그것이 진심《진心》입니다. 몸과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진심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이 부처님을 불러 모시면 그 죄를 탕감 받게 됩니다.

무진향승왕불

생고《生苦》과 사고《死苦》, 태어나는 고통과 죽을 때의 고통이 대단히 큽니다. 그 같은 고통의 많은 부분을 멸해 주시는 부처님이 무진향승왕불입니다. 끊임없이 이 부처님전에 기도를 올리면 아이를 잉태할 때 또는 출산할 때의 고통이 덜해진답니다.

오래 전 얘기인데, 어떤 박사님이 워낙 크게 정진을 하셔서 그 분 스스로가 죽는 날까지도 알았답니다. 그리고 자기는 죽을 때 좌탈입망《坐脫入亡》, 앉아서 죽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시는 날,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은 이 박사님은 너무너무 고통스러우니까 할 수 없이 다리를 쭉 펴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생고와 사고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얘기해 주는 하나의 예라 하겠습니다.

사자월불

축생보《畜生報》을 받을 그런 죄업을 지은 중생들이 이 부처님을 불러 모시면 축생보를 감하게 됩니다.

환희장엄주왕불

십중대계《十重大戒》을 파한 죄를 탕감해 주시는 부처님입니다. 십중대계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제보당마니승광불

상대방을 괴롭힌 죄가 큽니다. 그 죄보《罪報》을 탕감 시켜 주시는 부처님입니다.




열 가지의 큰 죄

십악참회

살생중죄금일참회《殺生重罪今日懺悔》

투도중죄금일참회《偸盜重罪今日懺悔》

사음중죄금일참회《邪淫重罪今日懺悔》

망어중죄금일참회《妄語重罪今日懺悔》

기어중죄금일참회《綺語重罪今日懺悔》

양설중죄금일참회《양舌重罪今日懺悔》

악구중죄금일참회《惡口重罪今日懺悔》

탐애중죄금일참회《貪愛重罪今日懺悔》

진에중죄금일참회《진에重罪今日懺悔》

치암중죄금일참회《痴暗重罪今日懺悔》

우리가 짓는 죄가 어디 열 가지 뿐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중에도 가장 자주 짓고 많이 지으며 결정적인 그런 악업이 바로 십악업《十惡業》입니다. 우리 삶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세가지 요소, 그것을 부처님께선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짓는 신`구`의 삼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신`구`의, 삼업으로 해서 형성되어지는 악업이 바로 십악업입니다. 살생, 투도, 사음은 몸으로 짓는 것이며, 망어, 기어, 양설, 악구는 입으로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탐애, 진에, 치암은 생각으로 짓는 것입니다.

이 십악업을 설명하는 것은 곧 팔만사천대장경을 다 설명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십악업을 소멸시키는 것이 팔만대장경의 근본적인 규범이면서 우리를 무량한 복락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살생중죄금일참회

살생은 대우주의 법칙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특히 불교에서는 모든 계율 가운데 살생죄를 대단히 중대하게 취급했습니다. 모든 삼라만상들은 생명을 바탕으로 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나온 모든 생명들은 그것이 비록 미물 중생이라 하더라도 살기 위해 나온 생명체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물론 어떤 미물 중생의 생명까지도 함부로 대한다면 그 죄업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생명을 함부로 하면 네 목숨으로 대신 갚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요절하는 사람, 일찍이 인생을 등진 사람, 이런 사람들은 전생의 업으로 인해서 또는 금생에 지은 업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 자주 살생을 하는 분은 마찬가지로 내생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 한 분이 부처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 세존이시여! 세존께선 모든 미물 중생들은 그 모두가 생명이 수승하기 때문에 함부로 생명을 앗아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사《袈裟》가운데는 이가 있지 않습니까? 세탁을 하게 되면 이가 하얗게 죽게 되는데, 그런 때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그래, 너희들 말을 충분히 이해하겠다. 비육일《非六日》이어든 부득세완내의《不得洗완內衣》하라.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음력 엿샛날, 열엿샛날, 스무엿샛날 그 때는 방생을 제도하는 신장들이 이 지상을 시찰하며 다니시니까, 그날 잡도록 하여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살생중죄, 정말 생명을 소중히 하십시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살생은 금하셨으나 다음과 같은 단서를 달았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삼정육, 오정육, 칠정육, 구정육등을 얘기 하시면서 육류의 섭생을 말리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계를 보면「너를 위해서 잡지 않은 고기, 너를 위해서 잡았다는 의심이 들지 않는 고기, 그 짐승이 죽을 때 비명 소리를 듣지 않은 고기, 그런 고기들은 먹어도 괜찮다」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쨌든, 살생심을 멀리하는 일에 우리 모두 많은 마음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현대 사회의 갖가지 환경문제 등은 이 같은 살생심이 제대로 잡혀지지 않기에 더욱 더 큰 문제라 하는 지적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소고기 한 점이 보통 수십평의 목초지를 황폐화시킨 댓가라는 얘기는 심각히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 아닌가 합니다. 육식을 많이 하게 되면 그만큼 산천초목이 황폐화되고 환경이 파괴된다는 얘기입니다. 불자들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환경을 보호해야만 합니다. 항상 생명을 소중히 하는 마음, 그것이 곧 자비입니다.

투도중죄금일참회

우리 모든 인생은 유한한 삶을 살아갑니다. 수명이 정해져 있습니다. 수명은 무엇입니까? 수명은 시간입니다. 인생은 시간이고, 삶도 시간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간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선「지금 이 순간이 항상 너의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살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각자의 귀중한 시간을 투자해서 자신의 재산을 모으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자기 인생을 투자해 형성한 물건을 훔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인생을 훔치는 것과 같습니다.

남의 인생을 훔치는 과보야말로 대단히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응보로 동물의 과보를 받게 됩니다.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말아야 합니다. 남을 시켜서 그렇게 해서도 안됩니다. 마음속의 투기심도 사실은 전부가 도심《盜心》입니다. 노력을 들이지 않고 벌려고 하는 것은 결코 올바를 수가 없습니다. 재앙을 면키 어렵습니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일 앞에는 재앙의 문이 끊임없이 열려갈 것이란 점을 알아야 합니다.

사음중죄금일참회

자기 아내가 아닌 사람, 자기 남편이 아닌 사람과의 만남은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 많은 해악을 끼치게 됩니다. 사람은 방종하기가 쉽습니다. 방종을 하게 되면 그 영혼이 탁해지고 마음이 나빠지고 그 나빠진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정조를 함부로 여기는 마음은 산란해집니다. 사음을 하게 되면 몸에 그러한 기《氣》이 입혀져 버립니다. 번뇌가 많아집니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영원을 향해 가는 마음 자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망어중죄금일참회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거짓말은 큰 재앙입니다. 거짓말을 하게 되면 사회가 혼란해집니다. 교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 사회에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키는 가장 큰 원인은 거짓말 때문입니다.

기어중죄금일참회

꾸며대는 말입니다. 모든 걸 정확하게 듣고 본대로 하지 않고 꾸며서 자기 의견을 가미해 말을 한다는 것은 거짓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자기 의견을 덧붙이게 되면 원래 말한 사람의 의도하고는 다른 차원으로 전달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양설중죄금일참회

이간질입니다. 싸움을 부치는 두가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간질을 하지 않았는데도 결과적으로는 이간질하게 될 경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이 들은 대로 얘기를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이간질한 것이 되는 그런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오해를 줄 수 있는 소지가 있는 말들을 자제해야 합니다. 말을 옮기지 말아야 하며, 남에게 이익 되는 말과 칭찬하는 말과 진리 이외의 말은 하지 않는 것이 부처님 뜻입니다.

악구중죄금일참회

욕설입니다. 남을 헐뜯는 말입니다. 남을 헐뜯는 것은 자기를 헐뜯는 일입니다. 남의 약점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약점을 보십시오. 남을 헐뜯는 사람은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잘되는 법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남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너 자신을 이기도록 해라」「남을 헐뜯기 보다, 너를 먼저 헐뜯어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나 자신을 먼저 되돌아 보십시오.

탐애중죄금일참회

탐애라고 하는 것은 나만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마음 밑바닥에 내가 깔려 있는 마음입니다. 불교에서는 나를 박멸하는 작업을 가장 중대하게 여깁니다. 탐욕은 나와 남을 갈라 놓게 만드는 마음입니다.

진에중죄금일참회

걸핏하면 화를 내는 마음입니다. 참을성이 부족한 마음입니다. 참는다는 것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리는 사람만이 성공합니다. 한 순간의 진심이 백겁 동안 쌓아 온 그런 공덕을 앗아 간다고 합니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좋은 관계를 가지는 사람이 적습니다.

치암중죄금일참회

우리는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배우는 만큼, 아는 것만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아는 것 만큼 생각하고, 아는 것 만큼 반성하고, 아는 것만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모든 재앙의 근본입니다. 그러기에 모르는 것은 곧 큰 재앙입니다. 어리석음은 원자폭탄 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라고 말한 현자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깨달음을 통해서 지혜를 양성해 가는 과정입니다.

항상 참회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윤리입니다.

108배 참회하십시오. 수행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 마음에 평화를 가져오는 길입니다. 안락을 가져오고 열반을 가져오는 길입니다. 백겁 동안 쌓여져 온 죄일지라도 진실로 참회하는 한 생각이 있으면 `여화분고초《如火焚枯草》?, 건초더미 한 순간에 태워버리듯 그렇게 하나도 남김없이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본래 실다움이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악심과 번뇌망상심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번뇌망상심을 소멸해 나가면 죄 또한 다 녹아내리게되어 있습니다. 죄도 번뇌망상심도 다 녹아져 버리게 되면 이것을 `진참회?라고 합니다.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마음을 자주들여다 보는 기회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 가운데 보배가 들어 있는지, 그렇지 않고 쓸모 없는 것들이 들어 있는지 말입니다.

마음 가운데 삼보《三寶》을 모셔야 합니다. 삼보란 3가지 거대한 보배입니다. 마음이 보배가 아니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제품도 보배가 될 수 없습니다. 즉 말도 보배가 될 수 없고, 생각도 보배가 될 수 없고, 행동도 보배가 될 수 없습니다. 말과 행동과 생각을 일으키는 마음이 문자 그대로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보배의 마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무죄체 <無罪體>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

여화분고초《如火焚枯草》

멸진무유여《滅盡無有餘》

`백겁 동안 쌓아 올린 많고 많은 죄, 한 생각 가다듬고 또 가다듬어서, 전부가 다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흡사 불씨 하나가 마른 풀을 다 태워버리는 것과 같이 남김없이 태워지이다?하는 우리의 발원입니다. 저 먼 과거로 부터 백겁 동안 쌓아 온 죄업을 한 생각을 바로하고 갈무리 함으로써 언젠가는 다 사라지게 됩니다.

전생에 지은 업 같은 것도 이렇게 다 녹여 달라고 지성 드려 기도하는데, 또 다시 입으로 몸으로 생각으로 업을 짓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죄라는 것은 원래 실다움이 없습니다. 죄는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망상심 따라 일어나는 것이므로 그 분별망상심을 자꾸만 소멸시켜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들을 때도 빈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자기의 선입견을 바탕으로 착색을 해서 들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분별망상심이 사라지게 되면 죄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두 가지가 다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상태를 진정한 참회라 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모두 견해가 다릅니다. 180도 완전히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불교가 바라보는 관점과, 다른 종교가 바라보는 관점에도 천양지차로 다른 것이 많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완전히 무죄체《無罪體》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을 부처님의 분신《分身》이라고 합니다. 갈고 닦음에 따라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는 인간을 모두 죄를 진, 원죄를 짊어진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부터 많은 차이가 나게 됩니다. 불교는 만 중생이 모두 다 부처님의 분신이라 이야기하고 부처님과 한 덩어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들이라고 하는데, 다른 종교에서는 우리가 아담과 이브의 죄를 뒤집어 쓴 원죄체《原罪體》라고 합니다.

쓰레기는 실체가 없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忘》

죄망심멸양구공《罪忘心滅양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

`죄무자성종심기?란 죄라는 것은 원래 실체가 없이 마음 따라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심약멸시죄역망?이란 마음이 소멸되면 죄 또한 없어져서 `죄망심멸양구공?, 죄도 죄짓는 마음도 `시즉명위진참회?, 그런 상태를 이름하여 진참회라 부른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은 죄도 따지고 보면 별다른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죄라는 것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다 타버리면 없어져 버리는 쓰레기와 같은 것입니다. 숯불 위에 쓰레기가 많이 덮여 있으면 그 불은 꺼지게 마련입니다. 다시 불을 붙이려면 여기에 바람을 불어 넣어야 되는데 그 바람이 바로 부처님의 바람이며 진리의 바람입니다.

바람을 불어 넣으면 그 쓰레기는 저절로 다 타버리고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쓰레기는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무자성《罪無自性》?입니다. `죄무자성?이라는 말은 실다움이 없고 죄라고 주장할 본질적인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한 생각 잘못했을 때 바로 거기에 죄가 오는 것입니다.

죄는 분별망상심 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분별망상심이 없어지면 이것이 좋고 저것은 나쁘다, 이것은 맛있고 저것은 맛없다, 이것은 사랑스럽고 저것은 사랑스럽지 않다 하는 호오지심《好惡之心》, 즉 이런 분별 간택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죄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분별망상심을 잠 재우고 한 생각을 잘 가다듬기 위해 기도도 하고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고 부처님 법도 공부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화두를 챙기면서 `이뭣고?하다 보면 나쁜 생각이 들어오다가도 튕겨져 나갑니다.

그렇게 계속 밀고 나가면 분별망상심이 끝간 데가 있습니다. 일념이 끝간 자리에서 구경열반을 증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생각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듭니다. 가다가 자꾸 주저 앉게 됩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선할 때 화두를 챙기는 것과 관세음보살 할 때 일념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참선할 때 일념으로 화두를 챙기면, 화두는 무자비한 칼날같이 마구 휘몰아칩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 할 때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가호지묘력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사노라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일, 액난, 괴로움, 쓰라린 일들이 닥쳐옵니다. 이럴 때, 화두를 챙기고 끊임없이 일념을 다독여 가면서 `이뭣고?를 하면 기도의 경우와는 궤도를 달리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뭣고?를 자꾸만 계속하면 마음이 정제되고 그런 가운데 불보살과 화엄신장이 임하는 그런 측면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삶을 살아가려면 현실사회는 넘어야 할 능선도 많고 괴로움도 많기 때문에 관세음보살님의 가호지묘력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뭣고?만 하다 보면 근기가 약한 경우, 파고드는 마장을 견뎌 내기가 힘겨울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불자들은 사회생활도 해야 하고 가정생활도 영위해야 하기 때문에 관음정근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님의 가호지묘력으로 어려운 액난도 소멸시키면서 수행정진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머리 깎고 산 중에 깊숙하게 살면서 수행정진하게 되면 `이뭣고?만 해도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세속의 생활을 하면서 살아야 하니까 구고구난《救苦救難》하시는 관세음보살님의 가호지묘력을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겐 이렇게 기도하는 마음이 슬기롭게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관세음보살님이 옆에 계십니다.

죄도 사라지고 분별망상심도 다 사라지면 마음이 깨끗해 질 것입니다. 죄도 없고 분별망상심도 없는 경계, 정말 청정무구한 푸르디 푸른 하늘과 같은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계가 진참회《眞懺悔》의 경계이며, 부처의 경계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경계가 되어 죄와 분별망상심이라는 쓰레기를 다 태우면 활활 타오르는 부처님의 자비광명인 숯불 자체가 됩니다. 우리는 광명체《光明體》이며 무죄체《無罪體》입니다. 원죄체《原罪體》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죄를 지으면 `죄를 지었구나?하고 아는 존재가 있습니다. 만약 원죄로 뒤덮여져 있다면 캄캄한 방에 갇혀 천년이고 만년이고 들어있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밝은 세상을 모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우리들이 태어날 때부터 아담과 이브에 의해서 원죄를 짊어지고 태어난 존재라고 합니다. 원죄를 뒤집어 쓰고 있어서 신의 구원이 아니고서는 결코 구원될 수 없는 존재라 합니다.

그 종교의 논리대로 따진다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지으면 지었다는 것을 압니다. 죄를 심판하는 존재가 마음 가운데 있다는 것은 곧 우리의 본질이 무죄라는 사실과 같습니다. 죄를 안다는 것 자체는 우리 내부에 죄를 판정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자가 있으며, 죄를 참답게 심판할 수 있는 능력자가 우리 마음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유위심《有爲心》이고, 죄를 짓지 않는 마음은 무위심《無爲心》입니다. 무위심의 증득《證得》을 이름하여 진참회라고 합니다.

참회진언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참회진언《懺悔眞言》은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참회진언을 항상 마음 가운데 모셔야만 합니다. 억겁 창생으로부터 우리는 지금까지 많고 많은 죄를 지으며 왔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원죄는 아닙니다. 언젠가는 그 죄도 모두 다 녹아져 내릴 날이 있습니다. 그것을 녹여내는 방법이 바로 이 천수경을 끊임없이 독경하고 기도하고 정진하는 마음입니다.




우주의 기운을 모으는 소리

정법계진언

옴 남

옴 남

옴 남

법계를 청정케 하는 진언입니다.

호신진언

옴 치림

옴 치림

옴 치림

우리는 항상 언제 어디를 가든 업장 탓으로 재난을 당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때마다 천수경의 호신진언《護身眞言》인 `옴 치림?을 많이 외우면 모든 호법신장들이 여러분들을 가호하게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천수경을 독경하거나 관세음보살님을 찾게 되면, 삿된 기운이 다 흘러나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본심미묘육자대명왕진언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관세음보살 본심미묘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 本心微妙 六字大明王眞言》인 `옴 마니 반메 훔?《aum mani padme hum》은 정법계진언이나 호신진언과 다 연결되는 무척 중요한 진언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는 진언입니다. 이 `옴?이라는 것은 `옴 남? `옴 치림?에도 나와 있듯이 진언마다 빠지는 곳이 없습니다.

이 `옴?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기에 이렇게 각 진언마다 들어가 있을까요? 그런데 이 `옴?을 온전하게 잘 설명해 놓은 책이 우리나라엔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이 뜻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어느날 우연히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영어로 번역해 놓은 영국 책을 보고 그 뜻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티베트에서는 `옴?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옴?《aum=om, m, 唵》은 인도인들이 옛부터 신성시 해 온 소리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며,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고 사후《死後》에는 그것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시작할 때는 om으로, 끝에는 hum으로 표현하기도 했으나 본래는 같은 글자입니다.

옴《aum》의 세계

`A〓아

이것은 `아? 발음으로 `아이우에오?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 `아베체데? `에이비 시 디? 하듯이 그 `아?란 것은 모든 만상의 시초음《始初音》으로 스타트《start》란의미입니다.

`U〓우

아이들에게 자동차가 어떻게 달리느냐고 물어보면 `붕?하고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기계가 돌 때는 `웅-?하는 소리가 납니다. 즉 바퀴가 돌아갈 때는 `웅-?하고 소리가 나는데 이것을 과정【process】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우?음은 과정음《過程音》이라고 합니다.

`M〓ㅁ

우리나라 말을 포함해서 전세계 언어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전세계 모든 민족들의 언어가 하나의 오리지네이션《origination》, 즉 하나의 근원으로 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가 나름대로 터득할 수 있는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말 문법에 《단어》+ㅁ이나, 《단어》+기는 명사형 어미《語尾》라고 하는데 마침, 먹음, 멈춤, 달림, 잠자다 의 명사형인 `잠? 등은 모두다 ㅁ을 씁니다. 이것은 영어도 마찬가지로 ㅁ【M】발음을 끝【end】이라고 해서 이것을 종음《終音》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옴《aum》?이란 처음과 중간과 끝이라고 하는 뜻으로써 이 우주 만유의 처음이자, 과정이자, 마지막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어에 나오는 Α《Alpha》과 Ω《Omega》도 다 `옴?에서 나온 것이며, 기독교의 아멘《Amen》도 바로 이 `옴?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멘에도 M자가 들어 있는데 이 M은 우리나라 말로는 ㅁ에 해당됩니다. ㅁ은 굴러갈 수 없으나 ㅇ은 굴러갑니다. ㅁ이 명사형 어미라거나 혹은 끝【end】, 종음《終音》이라고 형용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空, ㅇ】의 근원적인 성품이 이제 잠깐 형체로 머물러 있다 해서 명사형으로 ㅁ을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서리가 진 것은 세월이 흐르면 점점 변해서 깨어지고, 깨어져서는 다시 둥글어지게 됩니다. 모든 것은 공으로부터 와서 머물러 있다가 다시 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원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문자에도 우주의 기운 자체가 들어 있습니다. 모든 만상을 형용하는 내용이 문자로 정착된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서양의 말에 현재진행형【~ing form】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역시 발음기호가 ` ?으로 ㅇ입니다. 우리가 움직일 때, 노래부를 때도 마찬가지로 singing, riding, playing 등등 모두가 다 바퀴를 달고 있습니다. 바퀴를 단 것은 굴러간다는 것을 뜻하고 있지요.

문자라고 하는 것은 삶의 양상을 대변하는 것이며, 말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나왔다고 했으니 그 말을 잡으면 바로 그 마음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자꾸만 말을 그렇게 하다 보면 마음에도 그러한 말의 뜻이 형성될 것이란 점입니다. 그러니까 아들 딸 이름 지을 때나 상호《商號》 지을 때도 이 같은 뜻을 꼭 유념해야만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들 딸 이름을 근사하게 짓는다고 생각하면서 정성 들여 지었겠지만, 지나다 보면 여러 가지 덜컥덜컥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말의 뜻을 소홀히 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살다 보면 때로는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직업을 바꾸든지 어떤 변화를 모색해야 될 때가 간혹 있습니다.

특징적인 사실은 이름자에 ㅁ이나 ㅂ이 들어간 사업체나 사람들은 뭔가 덜커덩거린다는 사실입니다. 당장 우리나라의 모든 기업들만 잘 살펴보아도 이런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삼성, 금성, 우성, 선경, 쌍용,동양 등 대부분이 바퀴가 달린 글자를 가지고 있으며, 또 다들 잘 나가고 있는 기업들이죠.

이미 언급했듯이 말이라는 것은 마음에서 나왔으며, 또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원리를 모르고 말을 함부로 하거나 이름을 아무렇게나 만들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언학《眞言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들 딸이나 남편을 가만히 분석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러한 흔적들이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성할 창《昌》, 행동할 행《行》, 꽃 화《花》, 성품 성《性》, 영화 영《榮》, 꽃뿌리 영《英》자와 같은 글자는 굴러가는 바퀴를 가지고 있는 글자입니다. 아이들 이름을 지을 때도 그 아이의 생년월일《生年月日》과 생시《生時》을 타고난 기《氣》에 잘 맞춰가자고 굴러가는 바퀴를 달아주면 건강하고 무장무애《無障無碍》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상호《商號》들도 연구해 보면 여기에는 뭔가 무시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꼭 죽을 사람도 이름을 바꿔 놓으면 사는 수가 있다고 합니다. 말은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말 가운데에 마음의 기운이 흘러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굴러가는 기운이 그의 몸과 마음 가운데에 스며들어 그 곳에 좋은 기운이 입혀지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이름은 사람의 간판입니다. 그러기에 이름은 뭔가 아름답고, 뜻이 있고, 부르기 좋고, 듣기 쉽고, 모가 안 나고, 쓰기도 좋은 것이 좋습니다. 법명《法名》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리 중에는 터져나가는 소리가 있는데 화, 행, 수, 성과 같은 좋은 음이 있는 법명을 사용하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 능인선원이 무장무애, 별 탈없이 잘 굴러가고 있는 것도 법명에 그렇게 좋은 음을 쓰고 있는 것이 한 원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제가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계속 관찰해 본 결과 그 말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음이 지니고 있는 기《氣》라는 것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음 자체가 마찰이 많으면 부서져야 되고, 깨져야 되고,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레셴도, 디크레셴도

굴러가고 터져가는 소리는 당장 음악에도 있습니다. 점점 가다가 막히는 것, 즉 `점점 약하게?의 디크레셴도《decrescendo》은 입이 오무라져 입의 기운이 약해지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크레셴도《crescendo》은 `와?하고 터져나가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함성을 지를 때는 `이?라고 하지 않고 `와?라고 합니다. 그리고 웃을 때도 `하하하?하고 웃습니다. 환하다, 밝다, 아름답다, 이러한 단어들은 `아?자로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ㄱ ㄴ ㄹ과 같은 글자는 느낌이 다릅니다. 이 글자들은 중성 음이라고 해서, 자기의 주체적인 의지 보다는 외력《外力》에 의해 많이 좌우하게 됩니다.

하여간 음이란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뭔가 치명적으로,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라고 꼭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상황 전개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매일같이 부르는 이름은 그래서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 이름이 본인이 들을 때도 막히고, 말하는 사람도 막히는 음이면 기운도 가다가 막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대체로 이름이 꽉 막혀있는 사람은 내성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활달하지 못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꾸 그렇게 불러왔고, 그런 막힌 기운이 쌓이다 보니까, 뭔가 하려고 하다가도 그냥 주저앉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들에게도 터지는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여자 이름에 계집 희《姬》자를 많이 썼습니다. 여자 이름에 계집 희자를 붙여 놓으면 비교적 얌전하고, 안존《安存》하는 그런 뜻이 그 글자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음운《音韻》이라는 것이 사람의 성품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활달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억제하는 힘이 강해 남편 말 잘 듣고 순종하지만 마음 가운데 맺히는 것이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제가 많은 분들을 관찰해보니까 능력이 100% 있는데도 발휘를 못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들의 이름을 바꿔놓으면 사람이 달라지는 수가 있습니다. 이름이라는 세계는 그냥 웃고 넘겨버릴 세계가 아닙니다. 그리고 옴《aum》이란 음의 세계도 참으로 미묘 불가사의한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 너무나 많은 것을 모르고 무심하게 살고 있습니다.

일본 여자 이름을 보면 `~꼬?자를 많이 씁니다. 그런데 그 `~꼬?자는 동글동글한 양성모음의 `오? 발음으로서 부드러운 기운을 가져 옵니다. 그래서 일본 여자들이 대체적으로 상냥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옛날 왕조의 왕명《王名》인 태종, 세종 등도 모두 굴러가는 발음이며 태조의 `오? 발음도 모두 양성 발음을 썼습니다.

그러고 보면 옛날 중국인들은 참으로 무서운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글자 한자에도, 여자 이름 하나 지을 때도, 다 그 지혜를 바탕으로 지었던 것입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해서 여자들 이름에 막히는 글자를 넣어 기를 못쓰게 해 놓은 것도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중요한 지맥《地脈》마다 쇠파이프를 박아 놓은 것도 작은 일이 아닙니다. 풍수적으로 본다면 기가 흐르는 맥을 꽉꽉 막아 놓은 것입니다. 꾸불꾸불 흘러가는 산의 정기《精氣》을 강한 자성《磁性》을 띈 쇠로 그 자리에 꽉 묶어놓아 버렸으니 발전이 어려울 것입니다. 이 같은 대 우주의 기운은 옛날의 도인들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에서 여자들 이름에 디크레셴도 음《音》을 달아 놓으니까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꾸만 자기 스스로 억제하게 되고, 그러다 속병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이하게도 요즈음 여자들의 이름에는 희자 이름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마니 반메 훔

마니《mani》

옴 마니《aum mani》의 `마니?는 원래 여의주라는 말입니다. 여의주란 문자 그대로 여의주에다 자기 소원을 정성 들여 빌면 만사길상 여의 원만하게 형통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마니《mani》라고 하는 것은 또한 무진장《無盡藏》이란 뜻도 있습니다. 장《藏》이라고 하는 것은 많이 축적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에서도 많다는 말은 `many?이며,한국어에서는 `많이?입니다. 모두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언어 현상으로 미루어 보건대, 과거 이 지구상에 내려온 어떤 존재들의 언어 현상은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 영어, 독일어, 일어, 산스크리트어, 희랍어 등을 망라해 보면 비슷한 단어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굴러가는 바퀴?는 전 세계가 공통입니다. 영어도 ~ing form이고, 우리나라 말도 `ㅇ?이며, 한문이나 산스크리트어도 다 마찬가지인 것을 보면 이건 뭔가 하나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리지네이션《origination》, 즉 원류《源流》이 하나라는 얘기이지요.

반메《padme》

`반메?란 연꽃이란 말로 번역이 되지만, 여기서의 연꽃이란 거대한 우주의 소용돌이를 의미합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대연화《大蓮花》은 대 우주를 뜻하는 것입니다.

훔《hum》

`훔?이라는 것은 `옴?의 마감으로 `옴?과 같은 뜻입니다. 모든 진언은 참으로 묘하게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옴 치림?에서는 `림?으로 끝이 나고, `옴 남?에서는 `남? `옴 마니 반메 훔?에서는 `훔?으로 모두가 다 ㅁ으로 마감되어 완결을 시킵니다.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언을 연구하다 보면 재미난 것이 많습니다. `옴 마니 반메 훔?이란 해석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추해서 생각해 보면 `우주의 처음이시자, 과정이시며, 모든 것이신 무진장의 존재, 대 우주의 주재자이신 부처님께 예경하나이다?하는 산스크리트어의 뜻으로써 문자 그대로 우주 그 자체의 어떤 근본 성품을 음성으로 묶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옴 마니 반메 훔?을 여러 번 하게 되면 몸과 마음 가운데에 우주의 기운이 흘러 들게 됩니다. 관세음보살님과 염불 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같이 수행하던 한 도반이 `옴 마니 반메 훔?을 그렇게 열심히 할 수가 없었는데, 어느 단계가 되니까 신통이 열려오더군요. 물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이 진언과 음성의 세계는 참으로 무서운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 오히려 치명적인 세계라고 말씀 드릴 수도 있지요.

부처님께서 성자즉실상《聲字卽實相》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말이 곧 실상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도 `태초에 말이 있었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 `옴 마니 반메 훔?이란 말을 계속함으로써 그 사람이 부처님으로, 관세음보살님으로 형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너는 이 다음에 참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계속해 말하면 그 아이는 그렇게 되어져 갑니다. 그리고「나쁜 놈 같으니라구」란 말을 계속하면 정말 나쁜 놈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가족에게도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은 그 자체에 어떤 성품을 지니고 있으니까 밝고 환한 소리를 쓰면 그 사람은 점점 밝고 환한 길을 가게 되고, 자꾸만 막히는 음을 쓰게 되면 음으로 양으로 자기의 능력을 펼쳐보이지 못하고 주저앉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니 법당에 나와서는 세속 이름을 부르기보다 법명《法名》에다 보살을 붙여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속과는 다른 새로운 장《장》이 열리게 됩니다. 소리가 운명을 형성하고, 미래를 형성하며, 부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공간 미학의 세계

진언을 연구하다 보면 음운에 어려있는 무한대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바로 독일 출신의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anstein》이란 구조주의 언어 철학자입니다. 그는 말을 쓸 때 정말로 말 하나하나의 음운조차도 아주 의미 있게 쓰라고 했습니다. 까숑 바슐라르라고 하는 불란서의 시인도 언어 미학에 매우 박통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에드워드 워홀이라는 미국의 미학자는 그가 연구하는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이 그 사람과 나 사이의 분위기를 양성한다는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건물들 분위기가 시민들의 정신 세계를 그런 분위기로 양성합니다. 아파트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미국에선 이런 부분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합니다.

건물을 세우는 데에도 너무 건물을 떼어 놓으면 똑같은 동질의 건물일지라도 분위기가 틀려집니다. 공간 미학에서는 이 공간과 공간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그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연구합니다. 건물을 세울 때도 각이 진 건물과 타원의 건물, 원형의 건물이 주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모양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주는 무형의 언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거리감이 있습니다. 그런 거리감이 많이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면, 뭔가 밀쳐내는 장벽이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반대로 거리감이 적은 친근한 사람에겐 가까이 가게 됩니다.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도 다 이 같은 원리가 작용된다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절에서 보면 스님들은 절에 왔다 가는 신도들을 그냥 보냅니다. 그래서 거리감이 많이 생기지만 목사들은 나갈 때 대부분 악수를 하고 보냅니다. 그것이 바로 거리감을 축소시키는 길입니다. 비록 남남이라 할지라도 부부는 일심동체인데 그 부부가 각방을 쓰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 부부 사이는 이미 많은 거리감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어릴 적부터 다른 방에서 키웁니다. 따라서 그 아이가 자라도 부모를 가까이 하지 않고 잘 공경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아이들이 커도 엄마들이 계속 끼고 지냈습니다. 석학 라이샤워교수 같이 동양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도 이러한 거리감이 주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인간관계에 관해서는 확실히 터득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른바 공간 미학으로 보면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아기자기 합니까? 생활 구조를 보아도 그 조그만 공간들은 정말 섬세하게 꾸며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사는 인간들도 상냥하고 아기자기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요즈음 건축 미학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양성하는 공간 감각을 크게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건물들은 이와 같은 감각을 전혀 백안시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미국의 초대형 건물들이 이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다 보니 딱딱하게 되어 버렸지요. 여의도의 쌍둥이 빌딩을 설계한 사람은 이러한 공간 미학을 많이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 건물을 잘 살펴보면 사각형이 아니고 양쪽으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둘이 마주 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에 그 회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적으로 화합의 분위기가 돌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그러한 분위기에 많은 관심을 써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사회가 너무 건조하고 차갑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가구를 배치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와대에서 회의를 할 때 원탁회의를 하는 것도 다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사각으로 각이 져 있으면 뭔가 딱딱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건물도 가능한 한 원형과 타원형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곡선을 내려면 물론 돈은 많이 들어가겠지만, 정성을 들인 만큼 부드러워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 가운데에는 중요한 측면인 형태 미학의 세계, 건축 미학의 세계, 공간 미학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어의 음을 보면 흐, 크, 프, 트와 같은 강한 음이 많은데 그래서인지 다툼을 많이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일본도 역시 많은 전쟁을 일으켰는데 일본말의 음운이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강하고 모난 점이 많고 골이 들어가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나 부부간에 말을 나눌 때도 가능한 한 뭔가 그 말에다가 기운을 실어 보십시오. 단순한 사무적인 언어가 아니고 거기에 어떤 공간 미학적인, 뭔가 정감 어린 내용을 넣어 톤을 부드럽게 해서 보내 보십시오. 중국어를 연구하다 보면 평상거입《平上去入》의 사성《四聲》이 있는데 중국인들이 뭔가 응집력이 강한 이유도 그러한 연유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들을 합니다.




아는 것 만큼 산다

서양의 어느 철학자가 `아는 것이 힘이다?라 했듯이,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 만큼 살아갑니다. 물론 사람들 가운데는 아는 것을 바탕으로 남들을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어 `모르는 것이 약이다?란 말도 나왔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 인간들은 아는 것만큼 밖에 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계가 그저 눈에 보이는 세계밖에 없다면 보이는 세계만을 마음에 두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가운데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세계가 자리하고 있기에 그 세계는 우리에게 부처님의 거룩하심을 일깨우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허공을 몸으로 삼고 계시며 항상 우리를 응시하고 계시는 분이니까요. 이미말씀드린대로`천비장엄보호지《千비莊嚴保護持》?`천안광명변관조《千眼光明遍觀照》?, 일천 개의 팔로 고통 속의 모든 중생을 거두어 주시고 일천 개의 눈의 광명으로 온 세상을 살피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 우리가 꼭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부처님께서는 허공을 몸으로 삼고 계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마음으로 터득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되는데 입으로만 외우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엔지니어다?하면 그 방면밖에 모릅니다. 물론 그 방면 하나만 해도 새로운 기술이 자꾸 개발되니까 공부하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우리 중생들은 대부분 자기 분야밖에 모릅니다. 엔지니어도 그렇고 의사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기술이 쏟아지고 자기 공부하기 바쁘니까 시야가 넓질 못해요.

제 친구 하나가 종합병원에 취직해 있다가 어느날 직접 병원을 개업했는데 그 이후 부인의 행동이 크게 바뀌었다고 합니다. 제 친구는 진료하는 것밖에 모르고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고, 그래서 부인이 구청 세무서 경찰서 등 가리지 않고 외부 일까지 보다 보니 자연히 적극적이 되더라 는 것입니다. 자기 남편이 다른 병원에 취직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직접 병원을 개업하고 난 다음에는 구청과 세무서 일까지 보다 보니 정말 왈패가 다 되었다고 한탄하더군요.

사람들이 한 방면에만 몰두하여 오래 가다 보면 그것만이 전부인 줄 알게 되기 쉽습니다. 자기가 볼 수 없는 세계, 보이지 않는 넓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마음속의 보이지 않는 넓은 세계를 생각하면서 문을 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을 그 만큼 폭 넓게 사는 것이며, 마음의 폭 또한 그 만큼 넓은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부처님의 세계를 마음 가운데 간직하고 살고 있으니까, 그의 마음은 항상 영원성을 머금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성을 머금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만큼 진리에 입각해서 바르고 영원답게 산다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등한시하고 보이는 세계에만 탐착하다 보면 금생의 삶이 끝인 줄 알고, 악도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행동을 하는 수가 많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아는 것 만큼만 살고 있습니다.

소리의 세계, 색채의 세계, 공간의 세계 등 우리의 삶을 음으로 양으로 통제하는 그런 세계가 있습니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조그마한 아파트의 공간 속에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답답한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럴수록 집에 가구를 배치하는 것이나 색채나 공간을 배려하는 슬기로운 가정 주부의 안목과 지혜가 필요하겠지요. 그 모두가 부처님세계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자기가 아는 것 만큼밖에 못 산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남을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면, 상대방이 괴로워지고 문제가 생기기에 앞서 나 자신이 먼저 괴로워집니다.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는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이 상대방의 귀에 가기 전에 나의 귀에 먼저 들어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귀는 내 귀니까요.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말을 한번 허공으로 날리면, 그 미움과 증오의 말이 내 귀를 타고 흘러와 내 마음 속에 먼저 새겨집니다. 그러면 다음 번에 그에 대한 상스럽고 격한 소리를 할 가능성이 그만큼 더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세뇌가 되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도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 세포를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내 몸의 세포들이 전부 다 상대를 미워하는 세포들로 형성되어 갑니다. 상대를 미워하면 세포들은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기운을 품게 되어 내 얼굴이 먼저 밉상이 되어 갑니다.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면 할 수록 내 얼굴이 그만큼 빨리 밉상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를 미워함으로 인해서 자기를 밉상으로 창조해 가는 결과가 됩니다. 이 우주의 원리가 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몸 가운데 모가 난 세포들이 생겨나고 세포가 모가 나니까 인상도 모가 나고 날카로워지고 상대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이 얼굴에 배어 있게 마련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게 되면 그와 같은 몸체와 마음체를 형성해 가서 상대방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뿜어내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들에게 증오심을 가지고 자라난 아이들은 몸에 그런 기운이 배어있습니다. 보살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어렸을 때 가족 가운데 뭔가 문제성이 있게 자란 사람들은 자꾸만 모든 일을 왜곡되게만 생각합니다.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들일 수록 바르게 생각하지 못하고 비뚜러지게 생각하며 왜곡된 시각으로 보곤 합니다. 이런 생각이나 행동들은 다 어렸을 때 시작되어 오랜 세월 쌓여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말을 몇 마디 나눠 보면 그분의 커 난 배경에 뭔가 콤플렉스가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마음 연구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대하며 살아가다 보니까, 정말 단 몇 마디에도 그 사람의 과거 생을 짐작할 수 있게 되고, 행동 양상 속에서 바르게 살아왔는가의 여부를 알 수 있게 되더군요.

관성의 법칙

우리 삶의 모든 면모들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이고 쌓여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사소한 하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비롯하여 그것이 또 다른 여파를 일으켜 세월이 흐르면 완전히 그렇게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그때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조그마한 악행이라도 그것이 네 마음 가운데 떠오른다고 생각될 때 빨리 밟아서 없애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일이라고 그냥 방치를 해 두면 그것이 새끼를 쳐서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사람들은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우리를 심판하는 줄 생각하나 그런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가장 무서운 일은 자기 자신이 자기를 심판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거짓말 한 마디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거짓말 하지 않은 사람보다 다음에 또 다시 거짓말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두 번은 예사로 하다가 익숙해져서 습관이 되면 다음에 또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관성《慣性》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지요. 그 관성의 관《慣》자가 습관 관자입니다. 습관이 계속되면 습벽《習癖》이 됩니다.

제2의 천성이 습관이라 하지만 그 습관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고쳐질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습벽에 이르면 떼기가 힘든 상태가 됩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이나 도벽이 있는 사람을 보세요. 무의식적으로 손이 남의 물건으로 가고, 입을 열었다 하면 거짓말 투성이입니다. 습벽이 쌓이면 업이 됩니다. 업이 되면 이것은 완전히 알라야식《Alaya識》에 새겨져서 도저히 어쩔 수가 없게 됩니다. 깊고 깊은 참회를 하지 않으면 그 업이 녹아져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업장소멸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업장소멸이다, 선근《善根》의 증장이다 하지만, 한번 쌓인 업은 참으로 지워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겁《劫》을 두고 윤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둑질도 습관적으로 하다 보면 어느 날은 감방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내는 것도, 부처님이 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자작자수《自作自受》, 결국은 자기가 자기를 감방에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파고 들면서 마음의 세계를 연구해 보면 전부가 자기가 지어 자기가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을 텐데, 어찌해서 사람들은 다 하느님 아버지가 판가름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은 다 자기가 자기를 판가름하고 결정 지우는 것이기에 우리가 부처님 전에 나와서 부처님 말씀 듣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이 쌓이고 쌓여서 좋은 미래를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프로이드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프로이드가 아프리카에서 한 흑인을 데리고 와서 컵에 설탕을 타서 마시기 좋게 해서 주었더니 극구 안 마시려고 하더랍니다. 후에 알고 보니 그 흑인이 살던 나라에 설탕이 없었기 때문에 하얀 분말을 소금이라 생각했던 거지요. 프로이드는 그 사실을 목격한 다음부터「인간은 현재 이 순간에도 철저히 과거의 지배를 받는다. 현재를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과거의 인간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러한 프로이드의 통찰과 같이 모든 사람들은 과거의 지배를 받으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여러 가지 지견《知見》과 공부한 것들이 올바른 것이라면 문제가 될게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지견과 공부가 왜곡되고 편견에 치우치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면 그 좋지 못한 지견들이 마음 가운데 가득 차서, 그가 선택하는 카드도 왜곡되고 아집에 차서 전혀 볼품 없는 카드를 잡게 됩니다. 그래서 미래도 볼품 없이 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지금 이렇게 부처님 말씀을 자꾸 듣고 공부하면서 진리를 생활화해 나가면, 여러분들은 새로운 판단의 척도와 준거와 틀을 형성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어떤 일에 맞닥뜨렸을 때 바르게 형성된 여러분들의 판단과 척도는 여러분들의 미래를 밝고 바르게 열어갈 것입니다.

그 옛날 도인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사물을 관찰하고 통찰하는 정도가 예상 밖으로 놀랍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 건축 일을 하는 어느 분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옛집을 전통 양식 그대로 보수를 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조로 된 몇 백년 된 집을 자세히 살펴보니 당시 목공들의 기술이 굉장한 수준이더랍니다. 현재의 이름있는 건물을 찾아 옛날 기술과 비교해 보니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인에게 옛 그대로 보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전했더니「어째 한국에 이렇게 쓸만한 목공이 없느냐?」고 한탄을 하더랍니다.

목공이라는 것도 어렸을 때부터 장인 정신을 가지고 하나 하나 기술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대패로 나무 한 토막 밀더라도 정성스럽게 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옛날 선조들은 대단했던 거지요. 끌을 대고 대패로 밀 때 정성스러움을 바탕으로 하니까, 놀라운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즘과 같은 경제성 위주의 목공들에게 맡기면 옛날 같은 집이 지어 질리가 있겠습니까? 장인 정신이 없고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건물에는 여기저기서 문제점이 들어나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세상을 장인답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면 우리는 인생을 너무나 함부로 살아갑니다.

상학《相學》에 보면 얼굴 표정 짓는 것 하나도 조심하라고 합니다. 딱딱한 마음으로 얼굴 표정을 짓지 말라고 합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표정도 굳어집니다. 무언가 남을 경멸하는 것 같은 인상으로 변해갑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얼굴에다 별난 그림을 다 그려갑니다. 통찰력이 깊은 사람은 상대방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금방 알아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조금 똑똑하거나 지혜가 많아 남에게 칭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어딘가 공손하지 못합니다. 교만심과 아상에 차서 쌀쌀 맞고 냉정해 보이며, 상대방에게 썩 훌륭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정교육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밝고 맑은 인상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말과 생각과 행동을 도《道》답게, 진리답게 엮어나가는 길을 제시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주의 종이다?라는 식의 위압적인 것이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宗敎》은 글자 그대로 `가장 으뜸되는 가르침?이듯이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으뜸이 되게, 도답게 펼칠 수 있는 그런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우울하면 오장육부도 함께 우울해집니다. 따라서 우울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 내장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습니다. 기계가 활력 있게 돌아가야 100% 기능 발휘가 되듯이, 우리 몸도 기능 발휘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시면서 마음의 세계가 여러분들의 모든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바로미터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항상 마음을 밝고 맑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지도록 노력하십시오. 격렬한 마음,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자기가 자기에게 심판 당하는 날이 오게 됩니다. 자신의 심판은 외부에서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직접 자신을 심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처님 전에 나와서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우리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 공부는 먹고 살기 위한 공부지만, 부처님 말씀 공부는 영원으로 가기 위한 공부란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불모《佛母》에게 드리는 간절한 기원

준제진언

나무 사다남 삼먁 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나무 사다남 삼먁 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나무 사다남 삼먁 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우리의 앞날을 기원하는 간절한 내용의 게송을 공부하겠습니다.

아금지송대준제《我今持誦大准提》

즉발보리광대원《卽發菩提廣大願》

원아정혜속원명《願我定慧速圓明》

원아공덕개성취《願我功德皆成就》

원아승복변장엄《願我勝福遍莊嚴》

원공중생성불도《願共衆生成佛道》


`아금지송대준제《我今持誦大准提》?, 내가 지금 대준제보살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올리오니 하는 뜻입니다. `지송?할 때의 지《持》은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지송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독송한다는 뜻이고, 계속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기도할까요? 준제보살은 부처님이 되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부처님이 될 때까지, 한도 끝도 없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부처가 되려는 사람들을 가호하시는 불모《佛母》보살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어머니라면 얼마나 자비롭겠어요? 그런데 사실은 여러 보살님들도 다 불모이며 부처님의 어머니십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아들 딸들이 다 부처님들이시니까요. 그런데 불모는 불모인데 쓸데 없는 소리나 하고 사는 불모이고, 매일 남편에게 바가지나 긁는 불모들이십니다. 그러면 여러 불모의 아이도 자라서 허튼 소리만 해대는 부처님이 되게 마련입니다.

`아금지송대준제?라, 내가 이제 끊임없이 기도하는 마음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정말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때 기도는 올바른 해답을 얻게 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더구나 요즘같이 세상이 복잡한 시대에는 마음을 맑히는 작업인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삶을 살아 가노라면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될 순간들이 많이 닥쳐옵니다. 그럴 때마다 맑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맑은 마음으로 결정을 하게 되면 우리의 미래는 맑고 아름답게 전개되어져 갑니다. 맑은 마음이 아니면 선택의 카드를 올바로 잡지 못해 나락으로 떨어지기 쉽습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불보살의 가호지묘력도 대단히 중요한 측면이지만, 우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된다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측면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엔더슨 파이트《Enderson Fight》란 사람이 미국의 성공한 최고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영감에 대해 조사를 해 보았답니다. 그들 중에서 영감에 바탕을 두고 자기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사람이 10명 중 9명, 그러니까 90%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영감이 비교적 다른 사람보다 수승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보다 경건한 삶을 살아가고, 상대방에 대한 자비심도 많고, 선심이 두텁고, 좋은 인간성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감이 강한 사람들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앞장 서 나가는 부류였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더럽고 탁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영감이 발로될 수 없습니다. 엔더슨 파이트란 사람이 발견해 낸 것은 부처님 말씀을 현대적인 각도로 연구해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냥 공부만하고 믿기만 하면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것 이상의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신심《信心》이라는 것이 모든 공덕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 가시면서 경건하게 기도하고 정진하면 진실로 미래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어떤 남자 어떤 여자를 선택하며, 어떤 사업을 할 것인가 등등, 우리가 선택을 강요 당할 때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를 계속하면 마음이 맑아집니다. 기도를 하지 않고 마음이 탁해져 있으면 세상을 탁하게 봅니다. 나밖에 모르고 이기심만 가득해집니다.

마음이 탁한 것은 거의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 독심이 가득 차서 마음이 탁해지는 것입니다. 기도를 계속해서 그 마음의 탁한 부분을 제거하면 모든 것이 바르게 보이게 됩니다. 영감이 강화되고, 마음의 세계가 점점 열려갑니다. 끊임없이 기도를 하면 이기심이 녹아져 내리고 업장이 무너져 내립니다.


즉발보리광대원

`아금지송대준제?, 다시 말해서 기도를 열심히 끊임없이 하면 `즉발보리광대원《卽發菩提廣大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발보리?란 깨달음의 길을 나가려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광대원?은 나만 잘 살겠다는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고 구제하여 이 세상의 빛이 되고 등불이 되며 원력보살이 되겠노라는 서원입니다. 기도도 처음엔「우리 남편 잘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 아이 대학에 꼭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하지만 나중에는 `광대원?의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같이 치열한 입시에는 참으로 기도의 힘이 무섭게 작용되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오래 하다 보면 말하는 것도,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가 달라져 갑니다. 원력보살이 되어집니다.

원아정혜속원명

`원아정혜속원명《願我定慧速圓明》?, 원하옵건대 정과 혜가 속히 밝아지게 하여 주소서의 뜻입니다. 기도를 계속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지혜로워져서 두루 원만해지고 밝아집니다. 마음이 밝아지면 모든 것이 잘 보이게 됩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이런 세계가 열리지 않습니다. 참선을 한다, 주력《呪力》을 한다, 기도를 한다, 이 모든 것이 이와 같은 정과 혜의 세계를 열어가기 위해서 절실히 필요한 작업인 것입니다.

`원아정혜속원명?, 마음이 안정되고 지혜로워져서 뚜렷이 밝은 부처님 마음 속히 갖추게 하여 주옵소서의 의미입니다. `즉발보리광대원?, 즉 넓은 원력으로 살아가는 마음이어야만 대원《大願》을 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뚜렷이 밝아지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보이는 것이 여러분들 눈에는 보이게 됩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막이 씌어서 보이지 않는데 말입니다. 만약 눈에 까만 안경을 쓰고 있다면 아무리 큰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하더라도 보이겠습니까? 눈이 밝은 사람만이 다이아몬드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꾸만 기도를 하게 되면 눈이 밝아지고 마음의 폭도 넓어집니다. 내 마음의 세계가 넓어지니까 모든 것이 뚜렷이 밝게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그런 사람들은 저절로 남다른 공덕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원아공덕개성취《願我功德皆成就》?,크고 넓은 모든 공덕 모두 모두 이루어지게 하소서의 뜻입니다. 기도를 통해 눈이 밝아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짓지 못하는 수승한 공덕을 짓게 됩니다.


`원아승복변장엄《願我勝福遍莊嚴》?, 가장 수승한 복으로 나의 삶을 장엄하여 주소서의 뜻입니다. 공덕을 많이 짓다 보면 가장 우월한 복인 부처님의 복으로 마음을 장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따지며 깍쟁이처럼 살지 마세요. 여러분들 보다 더 많이 공덕을 짓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여러분들 보다 인생을 더 진지하게 정진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내가 전생에 복을 조금 지어서 금생에 좋은 남편 만나 먹고 살기가 웬만하니까 자기만 잘나서 그런 줄 알면 그것은 정말로 큰 오산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중생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들 정말 진지하게 살아야 합니다. 수승한 복을 지어서 자기 몸과 마음을 장엄 하십시오. 그리하여 공덕장엄이 되면 저절로 회향이 됩니다.

원공중생성불도

`원공중생성불도《願共衆生成佛道》?, 두루 모든 중생들이 함께 성불하여지이다 의 뜻입니다.

불교의 이상은 모든 중생들의 성불입니다. 예불문에도 나오듯이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이 부처님의 이상이며 불자의 이상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원《願》을 세우고 정진하는 구경《究竟》에는 성불의 의지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그 목표가 성불에 맞춰져야 합니다. 돈도 명예도 그 무엇도 삶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목표는 하나에도 성불, 둘에도 성불이어야만 합니다. 그 길을 위한 것은 받아 들여야만 하고, 그 밖의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성불은 우리 모두의 이상이어야만 합니다.


여래십대발원문【 삶의 금과옥조《金科玉條》】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 痴》

원아상문불법승《願我常聞佛法僧》

원아근수계정혜《願我勤修戒定慧》

원아항수제불학《願我恒隨諸佛學》

원아불퇴보리심《願我不退菩提心》

원아결정생안양《願我決定生安養》

원아속견아미타《願我速見阿彌陀》

원아분신변진찰《願我分身遍塵刹》

원아광도제중생《願我廣度諸衆生》


여래십대발원문은 여래의 발원문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여래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그런 뜻이 있고, 또 하나는 여래가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시는데 있어서 중생제도에 필요한 발원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개가 분리되어 있는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하나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은 중생인 우리를 제도하려고 하는 발원이든, 우리가 부처가 되려고 하는 그런 근본적 금과옥조이든 간에, 역시 우리의 마음을 갈고 닦는 지침이라고 하는데는 다를 바 없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렇게 앞으로 앞으로 나가야 된다는 부처님의 지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수경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순간 순간 밀도 짙게 내 가슴으로 파고들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긴 합니다만, 그 의미가 얼마나 심중한 것인가를 항상 공부를 해나가면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삼악도를 떠나라 ◐원아영리삼악도◑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 삼악도인 지옥, 아귀, 축생의 마음을 버리고, 인생을 진지하게 살며 공덕장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선 모두 아십니다.

내가 베푼 만큼 내 마음이 열리기에 내 몸의 세포들도 건강해지고 또 그 건강해진 세포가 허공에 그 만큼 좋은 기운을 뿜어내니 화엄신장님들도 그 만큼 가호를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빈 구석이 없습니다. 우연이란 절대 없습니다. 진정 우리는 마음 가운데 아귀, 지옥, 축생의 마음을 버려야만 합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6바라밀행을 닦고 기도를 하고 살면 모든 것이 서서히 마음먹은 대로 전개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구나! 모든 것이 베푸는 것 만큼, 기도하는 것 만큼 되는구나. 모든 것이 그렇게 되게 되어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부처님이 어디 먼 곳에 계시는 분입니까?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십니다. 참으로 부처님을 체험해 본 사람들은 `부처님! 당신은 누구 시길래 이렇게 바로 이 마음속에 임하시는가요??하는 감사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 가운데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 삼독심이란 쓰레기를 다 내려 놓으십시오. 쓰레기가 있는 곳엔 독충과 해충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쓰레기 속에서는 파리, 모기밖에 생기지 않듯이,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몸의 세포가 더럽고 탁하면 병균 밖에 안 생깁니다. 더러운 세포 속에서는 암이 생기고 각종 질병만이 생겨나게 됩니다.

`미래의 충격《Future shock》?이란 책을 쓴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이 쓴 글을 보면 인간 개조란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탁월한 인체 생리학자 엘마 게이트《Elma Gaytt》이 조사 연구한 글을 보면 감방에 들어 앉아있는 알콜중독자와 마약중독자들의 체질을 연구하다 보니 마약과 알콜중독자들은 세포 반응이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침, 땀, 혈액 등의 세포 반응 상태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마약중독자와 알콜중독자의 땀을 채취해서 독물을 검출하는 시약, 셀레인 애시드《Celane Acid》을 넣으니까 보통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땀과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그들의 세포는 완전히 알콜과 독소에 절었을 테니까요. 기도를 계속하게 되면 세포가 완전히 바뀌어져서 생각이 건강해지고, 부처님의 기운을 머금기에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포용력이 커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을 개조 시키려면 항상 불`법`승을 들어야 합니다. 한 주일에 한 번 정도가 아니라 매일 들어야 합니다. 들은 다음엔 행동으로 옮겨야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팔만사천대장경을 백천만겁 동안 머리 속에 넣어 놓고 있는 것 보다, 한 마디를 듣더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더 큰 공덕이라고 하셨습니다. 백번 천번 남에게 `베풀어라, 어떻게 해라?하는 것보다 당장 하나를 주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 많이 들으라고 그렇게 이끌어도 한 번 몸을 움직여 법당에 나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 않던가요?

여래십대발원문은 그 의미가 굉장히 깊은 내용입니다. 우리 삶의 금과옥조《金科玉條》과 같은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렵고 힘겹고 험난하다 할지라도 마음을 닦고 정진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말씀드리기는 쉬울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데 문제가 있습니다. 마음을 갈고 닦는 것이 금방 표가 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어떤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에게는 우선 나의 입에 들어오는 호떡 하나가 더 중요하고, 나의 입에 들어오는 콩 깎지 하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밀도 짙게, 보이는 세계에만 마음을 주고 살다 보니까 무슨 도《道》을 닦는다는 식의 도덕군자 같은 내용들이 삶을 살아가는데 얼마만한 필요성이 있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갈고 닦는 사람들이 많지가 않습니다.

`원아영리삼악도?의 설명에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악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지옥의 마음이 있고, 아귀의 마음이 있고, 축생의 마음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인간의 마음이 아닌 나쁜 마음들이 아주 많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옥의 마음이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문제성이 많은 마음입니다. 나도 지옥으로 이끌어 가고, 남도 지옥으로 끌고 가는 그런 마음입니다. 내 마음에 지옥이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와 같은 동료로 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지옥으로 끌고 가게 됩니다. 내 마음이 지옥이면 참으로 참담한 현실을 살아가게 됩니다.

아귀란 굶주린 귀신을 말합니다. 아귀 같다는 말은 굶주린 귀신 같다는 말입니다. 축생 같다는 말은 사람 같지 않고 동물 같다는 뜻입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살면서도 전혀 사람 같지 않은 짐승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참으로 이상스러운 마음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마음들이 들어 있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인신매매 범들이 뻔뻔스럽게 웃으면서 경찰들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사람을 파리목숨만도 못하게 살상해 놓고도 얼굴엔 유유한 웃음을 띄우는 악마의 탈을 쓴 존재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왜 그런 인간들이 이 땅에 자꾸만 생겨나고 있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우리 중생들의 마음에서 지옥, 아귀, 축생의 마음이 좀 녹아져 내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삼독심을 버리라 ◐원아속단탐진치◑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 痴》?라, 하루 빨리 탐`진`치를 끊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탐`진`치, 삼독심에 교만한 마음【慢】과 남을 의심하는 마음【疑】까지를 더해 오독심《五毒心》이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누구나 삼독심, 오독심이 있습니다. 탐욕의 마음이라는 것은 내 마음 가운데 전혀 다른 사람이 고려되지 않은 마음입니다.

탐욕의 포로가 되고, 성질 내고, 신경질 부리고,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마음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면서도 이같이 중요한 가르침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진정으로 탐`진`치, 삼독심에서 벗어나자고 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내 앞에 호떡이 하나 떨어져 있으면 나 먼저 먹기 바쁘지, 반쪽 나눠서 앞에 있는 친구하고 나눠 먹기를 즐겨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습니다. 서당개는 매일 서당 앞에 매어 놓으니까 흉내라도 내겠지만, 사람은 그저 법당에 가뭄에 콩 나듯, 오면 오고 말면 말고 하니 부처님 법이 제대로 터득이 되겠느냐 말입니다. 세속에서의 대학교 몇 년 공부는 인생 몇 십년 먹고 살기 좋은 길로 나가기 위한 것이겠지만, 불교 공부는 영겁의 세월 잘 살고 못사는 것을 좌우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공부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이러한 이야기가 진짜인가 거짓인가, 이런 것만 주판 놓기에 바쁩니다.

신중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몸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입니까?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꿈결 같이 흐르다 가는 것입니다. 소가 도살장에 끌려 가듯이 어느날 한 순간에 가버리는 것입니다. 경전에도 우리 중생들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산다고 쓰여 있습니다.

실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들을 보면 참으로 불쌍합니다. 안 끌려 가려고 두발로 버티면서 털석 주저 앉으며, 어떤 때는 울기도 합니다. 그런데 소 주인이 와서「어이, 일어나 일어나」하면 마지못해 일어납니다. 그런 광경을 보면「야, 저 사람 용하다. 소 부리는 도사인가 보다」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 큰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는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제 주인 말은 듣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 주인 덕분에 일생 동안 자기 몸을 살찌워왔기 때문에 빚을 져서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막 달려들던 강아지도 제 주인에게는 꼬리를 흔들며 반깁니다. 자기 주인에게 밥을 얻어 먹고 사니까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미물 중생들도 빚진이에게는 순종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사람들은 모두가 전생에 인연이 있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 번 봐서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사람들은 다 전생의 인연들이란 것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공연히 잘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데도 공연히 내가 명령만 내리면 내 말을 잘 들어줄 것 같은 사람, 내가 뭐 하나 얻어 먹은 것도 없는데 그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사람들은 모두 전생에 그와의 인연이 깊기 때문입니다. 강아지나 송아지도 주인에게 빚을 졌으니까 거역하지 못하고 자기 고깃덩어리를 팔아 주인에게 값을 치르려고, 할 수 없이 끌려갑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생에 나와서 호떡 하나 얻어먹은 것도 없는데, 그 사람에게 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전생에 내가 그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밀리는 경우가 있는 것은 내가 그에게 빚을 져서 그렇고, 그저 나에게 잘 해주고 내 말을 잘 듣는 사람은 그가 나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뭔가 밀리는 것 같고 켕기는 것 같으면 되도록 빨리 점심이라도 사고 호떡 하나라도 사서 빚을 갚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좀 당당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생《生》을 송아지로 와서 그 주인에게 봉사를 하게 되면 얼마 정도의 빚을 갚게 될까요? 200석 정도의 빚을 갚는답니다. 소의 평균수명이 20년인데, 20년 동안 200석, 그러니까 쌀 400가마니 정도의 빚을 갚고 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듣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퇴직금 얘기입니다. 일반 기업체나 공무원들이 퇴직을 하면 퇴직금을 받습니다. 30년이나 40년 일한 다음 퇴직금을 한 몫 받으면 그것은 일생 내내 일해서 마지막 전리품으로 받는 돈이니까 정말 무서운 돈이지요. 자신의 반 평생을 환산한 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 부처의 어느 국장님은 퇴직금을 받아 사업을 한다고 나왔다가 전부 사기를 당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퇴직금을 날린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난 인생 전체를 사기 당한 기분일 것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조용히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무심하시지, 어째서 일생 내내 벌어 들인 그 귀중한 돈을 사기를 당해 참담한 상황이 되도록 그냥 놔 두실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경전에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로 공짜가 없다고 말입니다. 남에게 빚을 지게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갚아야 된다고 나옵니다. 여유가 있으면 돈으로 갚고 그럴 능력이 못되면 송아지로 와서라도 갚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빚진 사람을 만났을 때와 같이 뭔가 자꾸 밀리는 것 같고, 공연히 눈치가 보이는 그런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퇴직금을 날려버리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수 십년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공짜도 바라게 되고 뇌물을 받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결코 공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신 퇴직금이 날아가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송아지도 도살장에 안들 어 갈려고 떼를 쓰다가 자기가 빚을 진 주인이 야단을 치면 죽을 길도 마지 못해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공짜 좋아하다 보면 마지막에 퇴직금을 날려 빚을 갚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갚을 능력이 안되면 다음 생에 소로 오고 돼지로 와서, 살을 먹히고 가죽을 바쳐 그 빚을 갚게 되는 것입니다.

불공의 중요성

예전에 제가 큰 절에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교구 본사 같이 큰 절에는 절에 딸린 논밭이 많습니다. 그 논 밭을 소작인들에게 맡깁니다. 지금은 먹고 살기가 좋아졌으니까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엔 소작인들이 가난해서 스님들에게 와서 송아지 한 마리 살 돈을 빌려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송아지를 먹여 키워서 새끼를 치면 그 송아지를 절 송아지라면서 빌린 돈 대신 갚아줍니다.

그런데 가끔 소가 죽은 송아지를 낳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산《死産》하는 경우이지요. 그러나 죽어서 나오는 송아지도 그 송아지는 스님네 송아지니까, 그 소작인들이 스님들께 와서 상의를 합니다.「스님, 그 죽은 송아지 우리들 주세요. 우리들이 잡아 먹을께요」그러면 스님네들이 그렇게 하라고 쉽게 승락을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야! 그 송아지 녀석 전생에 복 많이 지었구먼」이러십니다. 다시 말하면 죽어서까지 자기 몸을 몸 보시하니 그만큼 빚을 갚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또 희한한 것은 사산이 돼서 나오는 송아지라도 동네 사람이 달라고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큰 스님들이「저 송아지 녀석은 전생에 복도 못 지었구나!「 하시면서 행자 스님을 시켜서「저 송아지를 땅 파서 묻은 다음 그 위에다 과실수를 심도록 하여라」고 하십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 몸이 거름이 되어 과일 나무를 충실히 키움으로써 복을 짓게 하라는 것입니다. `송아지가 썩어서 과일을 열게 하고, 그 과일을 사람이 먹게 해서 송아지 복을 지어준다. ?

옛날엔 그런 말을 들을 때 그 논리가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부처님 말씀 공부하면서 많은 분들을 대하고 살다 보니 그게 다 일리 있는 말씀들로 느껴지는 바가 많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빚진 기분이 들 때 점심 한 끼 사주면 당당해지는 것과 마찬가지 도리입니다. 우리가 대중공양이니 무주상보시니 하는 것도 다 같은 이치로, 그 보시의 기분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허공에 뜨는 것입니다. 생일날 생일불공을 해서 떡 한 조각씩을 나눠주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고, 또 옛날부터 신랑이 먼 길을 떠나면 꼭 밥 한 그릇씩을 이불 속에 묻어두어 그 기운 때문에 집 떠난 사람이 굶주리지 않게 하려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돌아가신 분들 3년 동안 상식《上食》을 올리는 것도 일맥상통하는 얘기입니다. 아이들 돌이나 생일에 떡을 해서 한 조각씩 돌리는 것도 다 공덕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건 과거에 어떤 형태로 건 남에게 베풀었던 것이 되돌아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나에게 긍정적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씨를 뿌려둬야 공덕의 열매가 열리게 되는 법입니다. 떡 한 조각 밥 한 그릇을 공양하는 공덕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래 풍속 같은 것을 보면 무슨 때가 되면 떡 하고 음식 차리고 해서 밥 한끼라도 나눠 먹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그런 것을 우습게 생각하지만 음식을 주고 받는 가운데 은연중에 서로가 잘 해주고 싶은 마음 생기게 되고, 음으로 양으로 우호적인 연관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이 우주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고사를 지내거나 생일 같은 날 떡 돌리고 밥 한 그릇 나눠 먹으면 그만큼 좋은 기운이 허공에 뜹니다. 그런 공덕을 짓는 어머니를 만난다는 것은 복업이 수승한 아들입니다. 고사 때나 개업식 날 떡을 만들어 돌리는 공덕이 다른 데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 오게 되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가능한 한 상대방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꾸만 주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부처님 경에 나옵니다. 천명의 도둑을 먹이는 것보다 한 사람의 착한 사람을 먹이는 공덕이 더 크고, 천명의 착한 사람보다 한 사람의 수행자를, 천명의 수행자 보다 한명의 아라한을, 천명의 아라한보다 한 분의 부처님을 공양하는 공덕이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속엔 무서운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세세생생 다시 만나게 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도둑들 백명 천명 먹여봤자 그들은 또 다시 악도에 갈텐데, 내생 어느 세월에 그들에게 받아 들일 수 있겠습니까? 물론 언제인가는 돌아오겠지요. 그러나 착한 사람들이나 도인들에게 많은 빚을 지워주게 되면 그 빚을 받기도 쉽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등급이 높아 내생에는 재상이나 왕후장상으로 태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공덕을 많이 쌓은 수행 도인이 아니고서는 재상이나 왕후로 나오기 어렵다는 얘기지요. 보살의 급수가 높아야 왕후로라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의 이치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총사령관과 인연을 짓는 것이 나을까요? 졸병과 인연을 짓는 것이 나을까요? 공덕론이란 철두철미하게 그 속에 계량을 깔고 있습니다. 이 우주에는 결코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은 바에 따라 사람의 급수가 철저하게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을 낱낱이 얘기해 주는 것입니다. 자손들을 위해서 생일날 꾸준히 생일불공을 해 보세요. 그리고 여러분들의 아들 딸 손자들이 어떻게 자라나는가 살펴보세요. 축원을 하며 마음을 발하는 순간 허공계 신장님들이 다 듣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기도를 붙이는 순간, 여러분들의 정성이 공중에 퍼지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강렬한 파장이 떠서 허공계에 공양이 되는 것입니다.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미풍양속 안에도 그런 무서운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공덕을 지어주는 것도 다 그 의미가 수승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허공으로 쏘아 올린 그 파장은 절대로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사명대사와 구렁이 뼈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잘 해주고 싶은 사람들은 전생의 사연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명대사에 관한 이야기를 한마디 하겠습니다. 사명대사가 두 제자를 데리고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한곳을 가다 보니 큰 구렁이의 뼈다귀가 다 삭아서 산 중턱에 걸쳐져 있는 걸 보고 사명대사께서 첫번째 제자한테 땅을 파서 그 구렁이의 뼈를 묻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제자는「아휴 스님!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구렁이 뼈를 뭣하러 묻어줘요?」라면서 싫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째 제자에게 다시 시켜 그 뼈를 묻어 주게 했습니다. 그리고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나 언덕을 넘다가 배첨지네 집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명대사가 그때 문득 절에 양식이 떨어진 것이 생각났습니다. 배첨지에게 가서 양식을 좀 얻어오도록 첫째 제자를 보냈습니다. 첫째 제자가 배첨지에게 가서 절에 양식 떨어져서 왔노라고 했더니 다른 때는 무엇이든 잘 주고 하던 배첨지가 그날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야단을 쳐서 쫓아 내 더 랍니다. 야단만 실컷 맞고 돌아 왔노라고 사명대사에게 고했더니 그럼 둘째가 가보라며 두 번째 제자를 다시 보냈습니다. 그런데 첫째에게는 이유도 없이 야단을 치던 배첨지가 둘째 제자에게는 아주 친절하게 대접을 하면서 쌀 한 자루를 주더랍니다. 하도 이상해서 첫째 제자가 투덜대며 대사님께 그 연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더랍니다.「그래, 참 이상스럽지. 그렇지만 알고 보면 별로 이상할 게 없단다. 우리가 저 능선을 오를 때 묻어 주었던 그 구렁이 뼈는 전생에 배첨지란다. 그 구렁이가 사람으로 다시 와서 지금의 배첨지가 된 것이지. 전생에 쓰던 자기의 뼈를 정성스럽게 묻어 주니까 그 기운이 하늘에 떠서 배첨지의 마음에 닿은 거란다. 첫째, 너는 미물 중생에게도 다 불성이 있다고 말했는데도 구렁이 뼈라고 몰인정하게 무시하니까 배첨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너를 무시하게 된 것이고, 둘째는 뼈를 정성스럽게 묻어 준 공덕의 마음이 허공에 떠 있다가 모아져서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배첨지에게 전달되어 그렇게 잘 대해준 것이란다. 이 우주에는 정성스러운 마음의 흐름이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답니다.

사명대사의 이야기와 같이 여러분들도 살아가시다가 상대방이 이유없이 소리치며 야단을 칠 때는「아, 내가 과거에 그에게 뭔가 몰인정하게 대한 적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하시고, 말 한마디라도 상냥하게 건네서 과거의 빚을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유없이 남에게 구설을 듣고, 자주 다투게 되고, 질타를 당하는 것도 과거의 어느 생에서 좋지 못한 일을 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 기운이 돌아온 것이라 생각하십시오.

허공에 우리 마음의 염파가 발사되면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KBS나 MBC에서 나오는 전파는 물질파여서 언젠가는 힘이 약해 사라지겠지만, 이 마음의 염파는 그 기능을 다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떠도는 것입니다. 염파를 방송하는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무한대한 우주와 통하는 채널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파장이 허공에 뜨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사를 지내고 고사를 지내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우리 선조들의 미풍양속은 정말 엄청난 슬기의 소산이라 하겠습니다.

탐`진`치, 탐심《貪心》과 진심《 心》과 치심《痴心》을 가지고 나의 욕심만 차리는 마음은 부처님의 정도《正道》에 어그러지는 마음입니다. 우리들은 결코 한 생만 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남을 위해서 일하고 항상 남들 앞에 밝고 맑은 인상을 보여 주면 언제 어느 생에 다시 태어나더라도 그는 남의 우두머리가 되어 남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대장이 되려면 대장의 기질을 기르고 그릇을 키우라고 화엄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언가 좋은 얼굴로 미소를 띄우며 좋은 일을 자꾸 하다 보면 내생에는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호감을 갖게 하는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여러분들이 가정 법회니 기도재일 같은 날 자꾸 모이고 만나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내생에 다시 어디서 무엇이 되더라도 만나게 될 테니까요. 가능한 한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끼리 만나고 만나면 그것이 모두 또 다시 어디서 만나게 되는 인연 자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능인선원에와서 자꾸 부처님 공부하고 영혼의 등급을 높여 나가다 보면 내생에는 분명히, 적어도 최하위로 떨어진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부처님 경에도 나옵니다. 영혼의 승화와 향상을 통해 내생을 기약할 수 있는 사람은 법문 중에 만난 사람들 외에는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속에 있는 중생들은 모두 이익을 바탕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밑바탕에 깔고 만나니까 그런 중생들하고는 내생을 기약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래도 법의 문중은 세속보다는 욕심이 덜한 사회 아닙니까? 자주 모이고 만나서 마음의 등급을 높이고 복력도 짓는 그런 불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불법의 표상, 아사지

부처님의 제자중에 아사지란 제자가 있었습니다. 아사지【馬勝】비구가 어느 날 사위성을 걸으면서 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평상시 그가 걸식하는 구역은 사리불존자와 마하목건련의 집을 돌아서 오는 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리불이 자기집에 와서 걸식을 하는 승려를 보니까 그 행동거지가 매우 맑고 밝았습니다. 사리불이 그를 불러서「수행자여! 자네가 우리집을 드나든 지가 여러 차례 되었는데 내가 눈 여겨 보니 자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예법에 맞고 정확하고 존중할만하다. 자네의 스승은 누구인가?」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사지가 대답했습니다.「나의 스승은 고오타마 시다르타,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고행문 속에 들어가 깨달음을 여신 분,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는 인연의 법칙을 통해서 우주를 깨달으신 분, 바로 그분이십니다」그 말을 들은 사리불 존자가 감복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아사지가 있는 동쪽으로 발을 두지 않았답니다. 자기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자기를 부처님의 문중으로 이끌어 준 스승 격인 아사지가 고마우신 분이라 해서 그가 있는 쪽으로 꼭 머리를 두고 일생 동안 그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절 바르고 수행자다운 아사지란 비구 한 사람의 자세가 지혜 제일 신통 제일의 수보리와 목련존자를 함락 시킨 것입니다.

우리 능인선원도 앞으로 5년이고 10년이고 세월이 흐르다 보면 우리 보살님 중에서도 마음이 닦이고, 마음의 문이 열려져 언제 어느 곳에서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하더라도 남에게 아사지와 같은 모범을 보이시는 분이 여러분 나오실 것으로 확신합니다. 만인 속을 걸어다니는 법당이 되는 거지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교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한 분이 나오셔서 이 우주를 다 뒤덮으셨는데,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 경지까지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몸과 마음을 다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아사지의 마음을 키워가면, 모두가 머지 않아 아사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아사지가 되려는 사람은 베푸는 마음을 지녀야만 합니다. 남에게 호떡 하나라도 주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호떡을 줄 수 없는 처지라면 그를 위해 관세음보살 한마디하는 마음, 기도라도 한번 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흔히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해 줄께?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말 그대로 실천된다면 기도해 주는 사람의 힘은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새벽 기도와 백일기도도 계속하면 그 원력이 결코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원아속단탐진치?, 이생에서 탐`진`치, 삼독심을 끊어 버리십시오. 나만 잘 먹고 잘살겠다는 그런 생각을 고쳐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내생을 기약 받을 수 없습니다. 법문 중에 들어오는 사람 외에는 이런 마음을 끊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문 중에 들어와 만난 사람들만이 내생을 기약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법문을 들으라 ◐원아상문불법승◑

`원아상문불법승《願我常聞佛法僧》?, 항상 부처님 말씀을 잘 듣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세생생 복되고 긍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선조들로부터 쌓아온 공덕 때문일 것입니다. `부모 팔자 반팔자?란 말이 있는데, 사실은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자기의 공덕입니다. 아이들 가운데도 복을 짓고 나오는 아이가 있고 복이 없는 아이도 있다고들 합니다. 똑같은 부모의 배속에서 세 아이가 나왔는데 첫째 아들 녀석은 장가갈 적에 아버지가 잘 살던 때라 한밑천 단단히 보태 줬는데, 둘째 녀석에게는 사업이 크게 기울어져서 냄비 하나도 제대로 못해 줬습니다. 그런데 또 사업이 슬슬 일어나 세 번째 딸 시집갈 때는 해주고 싶은 대로 다 해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게 다 자기 복 지은대로 받는 것입니다. 세상 이치란 다 그렇게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 공덕을 많이 지어 주세요. 또 남편과 아이들 뿐만 아니라 자기 공덕도 열심히 지으시고요. 흔히 보살님들은 남편과 아이들 생일은 잘 찾아주는데 그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생명으로 태어났으니, 자기 생일에도 부처님께 공양을 하세요. 그것도 다 공덕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일전《一錢》이 만전《萬錢》이 되어 다 자기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씨를 뿌려놓으면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 백 개 천 개 열매가 열립니다. 이것이 다 부처님의 도리입니다.

가르침을 따르려면 제일 먼저 법문을 들어서 깨우쳐야 됩니다. 문`사`수《聞`思`修》라 했습니다. 불`법`승을 받들어 듣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 따라 공부하는 건 굉장히 영광스럽고 자부심이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 불자들은 대화를 나누다가도「무슨 종교를 믿으세요?」하고 물으면 대답을 잘 안합니다. 다시 물으면 무슨 죄인처럼 마지 못해서 모기만한 소리로「절에 다녀요」그럽니다. 그것은 절에 다니는 자기 행위에 대한 자부심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절에 다니는데 대한 어떤 근본적이고 튼튼한 관《觀》이 서 있질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투철한 신심이 서 있질 않으니까 그렇게 행동이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것입니다. 절에 다녀도 남들이 하는 대로 향이나 켜놓고 옥수나 올리고 그렇게 다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하는 흉내나 내면서 속칭 나이롱《?》으로 복이나 빌러 다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옛날 어느 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초상날 소가 고삐가 풀려 마당을 왔다 갔다 하자 아들이 소를 끌어다 대들보에다 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 손주가 그 광경을 보고 `아, 사람이 돌아가시면 저렇게 하는가 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얼른 외양간으로 들어가서 소부터 끌고 나와 대들보에 묶더라는 것입니다.

절에 흘러다니는 이야기들이 대개 다 이런 식입니다.「이런 건 틀렸어, 저렇게 해야돼」하면서 한 스님들이 올바르게 해 놓으면, 다른 스님은 틀렸다고 합니다. 절 집에 와서 보살님들이 하는 의식이 무지몽매하고 미신처럼 보이니까, 며느리들이 자기 시어머니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절에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나이 젊은 보살들이 절에 갔다가 놀랄 만도 하지요. 절을 해도 앞뒤 사람 쳐다보지도 않고 마구하다 보니 부딪치기 예사고, 그러다 보니 걸핏하면 싸웁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 가관입니다. 그런 중생들을 모아 놓고 법회를 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한 시간이 후딱 가버리고 하니, 어느 세월에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한달이라도 계속해서 불러낼 수만 있다면 무언가 한 줄거리를 가르칠 텐데, 일요일에도 가뭄에 콩 나듯 왔다 갔다 하니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능인불교학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이 뜻밖에 큰 효과를 거두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습니다. 교육이 참으로 무서운 효과를 내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부지런히 수행하라 ◐원아근수계정혜◑

`원아근수계정혜《願我勤修戒定慧》?, 부처님 말씀은 듣는 것만으로 끝을 내서는 곤란합니다. 불교는 듣고 끝내는 종교가 아니라, 닦는데 의의가 있는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래서 때를 빼고 빛【光】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입니다. 우선 첫째 계를 지켜야 합니다. 그 계심《戒心》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도모하는 선정삼매의 경계를 공부합니다. 그 마음 가운데 혜심《慧心》이 열립니다. 예불문 강의 때 계《戒》의 중요성에 대해 낱낱이 말씀 드렸습니다만, 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계란 부처님 되는 길이며 부처님 세계로 올라가는 사다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계를 지키는 마음을 통해 부처님으로의 길이 열려옵니다. 진정 불자들은 참된 마음으로 계의 길을 열어가야 합니다. 신도5계라든가 보살계 등은 불자의 첫걸음인 동시에 무한 번창의 길이요, 무량복덕의 길이기도 합니다.

계를 지키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평정은 자신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계를 지키는 마음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가운데 강한 힘이 배양됩니다. 어떠한 충격에도 흔들림이 없는 경계가 열립니다. 이른바 정《定》의 경계라 하겠습니다. 선정삼매《禪定三昧》의 경계는 바로 부처님의 마음에 해당하는 경계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한없는 지혜의 바다입니다. 지혜의 세계는 조화롭고 장엄된 세계이며, 무량한 복락의 세계입니다. 지혜는 광명이요, 무지《無智》은 무명입니다. 어두움 가득한 칠흑의 밤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괴롭고 위험하겠습니까? 찬연한 광명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우리는 부처님의 세계를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지혜는 모든 어둠을 걷어내고 우리들을 광명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지혜의 중요성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셨습니다. 실제로 불교는 지혜의 종교가 아닌가요?

우리 모든 불자들이 부지런히 갈고 닦아야 되는 것은 바로 계`정`혜의 삼학《三學》입니다. 계`정`혜, 삼학은 불교의 시작이요,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계《戒》을 가리켜 몸과 입과 생각으로 범하는 나쁜 짓을 경계하는 내용이라 한다면, 정《定》은 산만한 마음을 다스려 부처님 마음이 되게 하는 것이요, 혜《慧》란 무명을 깨뜨리고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는 경계를 의미합니다. 계`정`혜, 삼학은 불교의 실천 방면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세 가지 가 서로 도와 불과《佛果》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또 불경을 분류하여 율장《律藏》을 계학, 경장《經藏》을 정학, 논장《論藏》을 혜학으로 얘기하기도 합니다.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라 ◐원아항수제불학◑

`원아항수제불학《願我恒隨諸佛學》?, 부지런히 갈고 닦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상 실천하는 불자가 되기를 발원하는 내용입니다. 수《隨》란 수행원이라 쓸 때의 수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상 받들고 따라가는 마음은 참으로 중요한 마음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자신들이 불교를 믿고 부처님을 믿는다 하면서 부처님을 잊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저 한 달에 한번, 일년에 한번 절에 나올 때만 부처님을 생각합니다. 단 한 순간도 부처님을 잊어서는 참된 불자라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을 잊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악과 결부시키는 일입니다. 부처님은 광명이시라, 부처님을 잊는다는 것은 곧 암흑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인 8만4천대장경을 마음 가운데서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가운데 광명의 세계를 열어가야 합니다. 불자들은 물론, 스님들도 참으로 부처님 말씀을 생활화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 힘듭니다. 끊임없이 공부하며 정진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교육이 제대로 돼 있지 않기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점은 한 둘이 아닙니다. 종교의 당위적 존재이유, 불교의 존립 근거는 중생의 제도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나는 이 땅에 고통 받는 중생들의 교화를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화란 바로 교육의 개념입니다. 부처님께서 8만4천 대장경의 장광설을 펼치신 것도 모두 중생들의 제도를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부처님 말씀을 가르치고 또 배워야만 합니다. 스님을 가리켜 스승님의 준말이라 하지 않습니까? 또 스님을 가리켜 법사《法師》라 하지 않습니까? 모두 가르침에 가장 큰 의미를 둔 내용들입니다. 진정 우리 모든 불자들은 부처님을 마음 가운데 놓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 불자의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그 길 가운데 영원의 길, 성불의 길이 열려옵니다.

영원의 길, 성불의 길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가운데서 열려오는 법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금강경 가운데 한 구절만 이라도 스스로 깨우치고 남을 위해 전달하는 공덕은 항하사만큼의 칠보를 보시하는 것 보다도 낫다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를 전달하는 공덕이 이렇게 크다고 강조하신 것은 부처님께서 불법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공덕을 얼마나 중요시 하셨는지 거듭 생각케 하는 대목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상 따라 배우는 길, 그 길만이 우리들의 숙명인 것입니다.



결코 물러나지 않으리라 ◐원아불퇴보리심◑

`원아불퇴보리심《願我不退菩提心》?, 위대한 인간들의 일생은 어떠한 역경이 닥쳐와도 물러남이 없는 투지의 화신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살면서 피할 수 없는 불변의 법칙 가운데 하나는 모든 수확의 기쁨은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흔히들 `고통 끝에 낙《樂》?이라고 하듯, 고통을 이겨내지 않고는 결코 즐거움의 시간이 도래할 수 없다는 철칙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과 쓰라림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위대한 인간들의 삶은 불퇴전《不退轉》의 마음으로 한길로 꿋꿋하게 나간 삶입니다. 그들은 초지일관《初志一貫》의 탱크였습니다. 영원한 성불의 문을 열어가려는 모든 불자들은 이같은 마음을 견지해야만 합니다. 물러남이 없는 마음, 그 마음은 모두 위대한 구도자의 마음입니다.

부처님께서 억겁을 두고 닦아오시면서 물러남이 없는 마음을 견지하셨기에 결국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 역시「물러남이 없는 마음으로 나아가라」이셨습니다.「가시밭길이 있으리라, 아픔과 쓰라림의 능선도 있으리라, 그러나 결코 굴치 말고 나아가라」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엄경에서도 수행자들이 갖춰야 할 기본 덕목으로 불퇴전《不退轉》의 경계, 물러남이 없는 경계를 참으로 중요시 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 되는 법이 없습니다. 고통이 닥쳐올 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띄우십시오. `아! 이 고통은 부처님께서 나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시기 위한 배려이시구나?하고 말입니다.

작은 고통은 작은 즐거움을 가져오고, 큰 고통은 큰 즐거움을 가져오는 법입니다. 다만 물러남이 없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고통은 모두 즐거움과 낙으로 변하는 법입니다.

고통을 희롱할 줄 아는 사람, 역경을 유희로 아는 사람만이 위대한 성공자의 대열에 오를 수 있습니다. 성불에의 길은 물러남이 없는 마음, 어떠한 고통도 극복해내는 의지에의 화신들이 걷는 길입니다. 고통 끝에 낙《樂》이 오듯이, 위대한 고통 끝에는 위대한 즐거움이 오는 법입니다. 성불의 의지를 돈독히 세우고, 보리도를 증득하려는 마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 부처님의 세계는 열려옵니다. 보리심이란 문자 그대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마음이요, 성불의 마음입니다. 보리심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Anuttara Sam Myak Sam Bodhi》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준말입니다. 결코 깨달음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불퇴전의 의지가 모든 불자들에게 절대절명으로 요구되는 요즈음입니다.



결정코 극락에 나리라 ◐원아결정생안양◑

`원아결정생안양《願我決定生安養》?, 끊임없이 갈고 닦아나가는 불퇴전의 자세는 결국 영원한 안락의 세계를 약속합니다. 작은 고통을 이기면 작은 즐거움이 오고, 큰 고통을 이기면 큰 즐거움이 옵니다. 무한한 즐거움의 세계를 열반의 세계라 부릅니다. 모든 고통과 번뇌가 녹아진 자리는 진실로 무한한 즐거움의 자리이고 열반의 경계입니다. 불퇴전의 마음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면 결국 그와 같은 경계에 나아갑니다. 안양《安養》이란 말은 극락 국토의 별호입니다. 극락세계는 문자 그대로 지고《至高》의 복락 세계입니다. 우리가 극락세계에 나아가려면 우리의 마음이 극락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극한 수행을 하는 이유는 마음 가운데 무한 번뇌와 고통을 녹여 내려 마음에 한없는 복락의 세계를 열어가기 위해서 입니다. 수행을 거듭하면 할수록, 번뇌를 극복하면 할수록, 우리들 마음속에 한없는 평화와 안락의 경계가 열려가는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끊임없는 수행 가운데 우리들은 물질의 세계에 대한 각양각색의 속박을 이겨내게 되고 그 결과 차원이 다른 즐거움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극락이 되지 않으면 극락에 갈 수 없듯이, 우리의 마음을 극락으로 만들어가는 비결은 한없는 수행입니다. 불퇴전의 마음으로 끊임없는 수행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결정코 극락에 나게 될 것입니다. 극락에 나는 것을 불교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수행의 과보로 받아들입니다. 극락에 나게 될 경우 부처를 보장받게 된다는 가르침이 경전에 나옵니다. 극락에는 언제나 법문이 울려 퍼지고 있어, 무량한 극락의 주인들이 그 법문을 듣고 성불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없다 합니다.

이 우주 광대무변한 세계는 화엄경의 가르침대로 무량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고 배나무에 배가 열리듯, 중생의 업《業》이 다르기에 사는 별【星】도 다 다릅니다. 이 우주의 무량한 다양성은 중생들이 짓는 업의 다양성으로 인해 벌어졌다고 경전은 밝히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열심히 근면 성실하게 삶을 엮어 나간다면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이고 좋은 환경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무량한 별들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별들이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배정되는 업력의 세계입니다. 그들 중 극락에 태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과보의 결과인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입니다. 마음의 극락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속히 아미타불을 뵈리라 ◐원아속견아미타◑

`원아속견아미타《願我速見阿彌陀》?의 아미타란 말은 원래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의 뜻입니다. 진리는 광명이라, 진리답게 산 사람은 광명의 존재와 같다고 해서 그들이 사는 세계를 극락, 아미타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무명《無明》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진리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무명중생이라 부릅니다.

극락세계는 문자 그대로 진리 따라 사는 사람, 진리를 생활화하는 사람들만이 가는 곳입니다. 극락세계에 가서 아미타부처님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무량한 복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부처님 법 만나기가 대단히 어렵다 하는데 직접 부처님 시대에 태어나 부처님께 직접 법문을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량복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님 시대에 태어나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도 훌륭한 선생을 만날 때 참으로 흥겨운 마음이 되어집니다. 선생을 잘 만나서 어렵고 힘겹던 과목을 쉽게 깨치게 되고 흥미를 갖게 됨을 우리는 학창시절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잘 만나는 것도 크나큰 복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중의 선생님이신 부처님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까요? 문자 그대로 무량한 영광과 무량한 복덕을 가져올 것입니다. 성불의 감격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을 만난다는 것은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한 복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쪽 집게 선생님이라 부르는 선생님들을 만나자면 많은 액수의 수고료를 드려야만 하듯이, 훌륭한 스승을 만나려면 그만한 공덕을 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대통령을 만나면 일을 쉽게 풀 수 있듯이, 부처님을 만나면 모든 일은 쉽게 풀리는 법입니다. 기도 역시 부처님을 만나는 성스러운 행위이기에 기도 가운데 모든 일이 순조로이 풀려나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미타부처님을 만나면 우리는 성불의 대도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왕을 한 번 만나기 위해 많은 단계를 거치고 통과해야 되는 것처럼,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많은 수행의 단계를 거치고 그를 통과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많은 공덕과 많은 수행을 쌓아야만 합니다.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쌓아야만 하는 고행과 수행은 참으로 헌신적인 것이 아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항상 스스로에게 반문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부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나의 분신들로 가득차게 하리라 ◐원아분신변진찰◑

`원아분신변진찰《願我分身遍塵刹》?이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노라면 갖가지 어려운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때 마다 내 마음 같이 함께 일해 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과 같은 사람, 즉 분신《分身》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곳곳 마다에 나의 분신들이 있다면 참으로 모든 일은 순조로이 풀려나갈 것입니다. 분신변진찰의 의미는 나의 분신들이 우주 곳곳마다에 함께 하여지이다 의 뜻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 누구든 나의 분신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진리와 하나된 사람입니다. 진리는 하나이며, 하나를 만들 수 있는 위대한 힘입니다. 진리와 하나된 사람은 우주와 하나된 사람이고, 이 우주는 둘이 아닌 하나인 분신들이 될 것입니다. 우주 곳곳 마다에 분신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 같은 사람은 부처의 분신이며, 부처와 하나된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나의 분신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성불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힌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이며, 여래와 하나된 마음입니다. 그의 마음은 허공과 같습니다. 물질 세계에 대한 모든 번뇌를 이긴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큰 뜻을 지닌 사람은 이와 같은 `분신변진찰?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합니다. 좋은 친구를 원하는 사람, 탁월한 분신들을 주변에 포진 시키려는 사람은 마음을 비워야만 합니다. 특히 여래가 되겠노라는 큰 뜻을 세운 사람들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항상 이기심과 탐욕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고 맙니다. 한계는 장벽이요, 스스로의 발전을 차단하는 마음입니다. 삼계도사《三界導師》 사생자부《四生慈父》의 마음은 바로 모든 물질적 번뇌를 이긴 자의 마음입니다. 그 같은 마음 가운데 무한자비의 마음이 열립니다. 천수경의 앞부분에 나오듯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입니다. 우주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 모두를 나의 분신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진실로 무위심《無爲心》의 사람입니다. 대자대비심의 사람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이 땅 위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나의 분신을 만들었는가? 그리고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분신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들 모두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무량중생들을 모두 제도하리라 ◐원아광도제중생◑

`원아광도제중생《願我廣道諸衆生》? 여래의 발원 속에 사는 사람들의 유일무이한 소망은 중생제도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위대한 용기와 신심을 바탕으로 모든 유정중생《有情衆生》들을 열반으로 이끄는 영웅이 되라 강조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존재들을 가리켜 대승보살이라 부릅니다. 참으로 세상 사람들은 이기심과 탐욕의 포로가 되어 헤어날 길을 모릅니다. 그것은 세속 중생들 뿐만 아니라 출가 수행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부 출가 수행자들도 머리만 깎았지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기에 마음이 전혀 보살심이 아닙니다. 그저 절 뺏기 싸움, 주지 싸움에 날을 지새는 스님들이 적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같은 마음은 `광도제중생?의 마음이 아닙니다.

`광도제중생?의 마음은 나를 버려 남을 살리는 마음입니다. 여래십대발원 속에서 사는 사람이야 말로 `광도제중생?, 널리 뭇 중생을 제도하리란 마음을 낸 사람입니다.

이 세상 많고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여러분들의 따뜻한 손길을 원합니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생활하기가 궁핍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눈이 멀고 마음의 귀가 멀어 무엇이 바르고 참된 삶인지를 전혀 모르는 채,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 진리의 등불을 밝혀야만 합니다. 어둡고 괴로운 마음 가운데 부처님의 말씀을 심어 주어야만 합니다. 금강경의 한 귀절처럼 제도한다는 생각도 없이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지닌 참 보살들이 이 땅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합니다. 참으로 20세기 말 현대 이 땅 이 시대는 어렵고 힘겨운 시대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에 물들어 있고, 애욕과 관능의 포로가 되어 헤어날 줄을 모릅니다. 이 시대 이 땅 위에 부처님의 말씀을 펼쳐야만 합니다. 그래서 병든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병든 마음을 고치고 치료해주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불자들의 책임이요, 사명입니다.

`광도제중생?, 이는 부처님의 원대한 뜻이요, 우리들 모두의 삶의 지표이어야만 합니다. 진리에 미혹하고 깊은 어둠 속에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제도하는데 몸과 마음을 다하는 일이 우리 불자들에게 주어진 거대한 과제입니다. 여래십대발원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지막 가르침은 바로 `광도제중생?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로 불법을 공부하고 깨우친 불자로서 우리들에게 부여된 책임과 의무를 진지한 자세로 수행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광도제중생?입니다.




1. 불국토《佛國土》의 구현을 위하여

발사홍서원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중생무변서원도◑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란 가없는 중생들, 그리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그들 모두에게 나의 형편 닿는 대로 부처님 전에 공양하듯 베풀어 주고, 공부한 것 한마디씩이라도 그들에게 전해 주어 끝없는 중생들 모두를 제도하기를 서원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나 성당에서는 교리가 마음에 와 닿는다고 하지만, 불교는 마음에 와 닿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에 파고들어서 마음을 변혁시키는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정도 가지고야 어떻게 그 마음을 변모시킬 수 있겠습니까? 보통 중생들은 천번 만번 들어도 `소 귀에 경 읽기?이기 쉽습니다. 마음에 파고들어 뒤흔들어 놓아야 그 마음이 조금씩이라도 변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어느 자리에 가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게 될 때 그들을 압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전하는 바로 그 자리가 반야선이 되고 연화대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서울 곳곳에 가서 부처님 말씀 전하면 서울 시내가 반야용선이 될 터이니까 그것을 보시는 부처님 마음은 얼마나 좋으실까요? 여러분들도 가능한 한 자기 능력대로 부처님 말씀 전하셔서 그 어느 곳이든 반야용선을 만드십시오. 가정이면 가정을 반야용선을 만들고, 동창 모임이면 동창 모임을 반야용선을 만들고, 학부모 모임에 가면 학부모 모임을 반야용선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계속해서 반야용선을 서울시 내 곳곳에 띄워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모이는 곳곳마다, 가정 법회 소구역 하나하나 그 모두가 다 반야용선이 될 것입니다. 그 반야용선을 타고 우리들은 함께 영원의 항로를 나아가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노력하고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어려운 문제일까요? 다만 노력하고 정진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내 마음의 문을 열면 부처님은 항상 허공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데 어려울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행《行》을 그대로 하면 부처님이 항상 그 곳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부처님께서 그 자리에 내림하신다 하셨으니 내 모든 정성 다 해 무변한 중생들을 다 반야용선에 태워야 되겠습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과 쓰라림을 우리 모두가 기회 닿는 대로 아물게 해야만 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하나가 다 전법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본래 부처님의 아들 딸들입니다. 본래 부처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깨닫고 있지 못한 탓에 중생이라 부릅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이와 같이 깨닫고 못깨닫고의 한 생각 차이라 하셨습니다. `한 생각 깨달으면 그 자리가 부처요, 한 생각 어리석으면 그 자리가 중생이라? 하셨습니다.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깨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본래 무한 능력자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한 생각 깨달으면 부처입니다. 무량한 부처님들께서 깨달음의 길을 통해 부처의 길을 가셨고, 위대한 성자, 현자들은 모두 이 길을 통해 영원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깨달음의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이 길을 모르는 자들은 영원히 암흑 속을 헤맬 수밖에 없고 영원히 중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은 광명이요, 등불입니다. 이 땅을 가득 채운 중생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부처임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마구잡이로 함부로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이 풍요로운 존재임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천박한 생활을 능사로 알고 인생을 헛되게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스스로가 부처의 분신임을 일깨워 줘야 합니다. 스스로가 가장 존귀로운 존재임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이 길이 바로 `중생무변서원도?의 길입니다. 우리들 불자들은 스스로가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맹세코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그들은 맹세코 제도하기를 서원해야만 합니다.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의 은혜로운 공덕을 받고서 태어났으며 그 은혜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온 중생은 모두가 일찍이 축복 받은 자입니다. 그들은 모두 축복 받은 자들이며, 거룩한 사명을 안고 이 땅에 태어 났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거룩한 광명과 은혜로서 살고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를 중생이라 하였습니다. 저들에게 지혜의 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착각을 일으켜 육체를 자기로 삼고, 듣고 보는 물질로서 세계를 삼으며, 거기서 얻은 생각으로 가치를 삼고 그를 추구하기에 중생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생 세계는 겹겹이 장벽에 싸여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는 막혀 있습니다. 중생들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에 잠겨 지냅니다. 이 모두가 미혹의 탓이며, 착각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그릇 인정 한데에 기인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제도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너와 나의 서원이 되어야 하며, 우리 모두의 서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 가운데, 우리의 가정과 사회 위에 생명의 참가치가 구현되며 불국토의 공덕장엄이 구현 됩니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가 끝이 없지만 모두 끊겠다는 서원입니다.

중생의 몸이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미혹 시켜 퇴락하게 하는 정신작용의 모두를 번뇌라 부릅니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 업을 일으키고 괴로움의 과보를 받아 생사의 세계를 헤맵니다. 불교는 번뇌를 끊고 열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번뇌에는 많은 구별이 있습니다. 3독 번뇌 5독 번뇌 등을 비롯, 8만4천 번뇌를 말하기도 합니다. 108번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번뇌들은 성도《成道》을 방해하고, 열반의 길을 차단합니다.

그러나 열반경 등에는 `번뇌 즉 보리?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번뇌 그대로가 보리라는 의미입니다. 중생의 어리석은 경지에서 보면, 미망《迷妄》의 주체인 번뇌와 깨달음의 주체인 보리는 전혀 다른 차원 같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눈으로 보면 그 두 가지가 그대로 하나이어서 차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번뇌는 마음의 때와 같은 것으로 흡사 거울에 때가 묻었기에 닦으려는 마음이 나고, 거울의 때를 닦기 때문에 저절로 맑아지게 되어, 마음의 때가 깨달음을 이루는데 중요한 측면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또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먼지가 허공에 많이 떠 있으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먼지가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지가 없으면 우리들은 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먼지 입자들에 수증기가 묻어 비가 되는 근본적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우리가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가 내리면 온 세상은 맑아지게 되어져 있습니다.

`번뇌 즉 보리?라는 의미는 이렇게 우리들에게 큰 의미를 지닙니다. 번뇌를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번뇌를 녹여 내려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불의 길이 열려옵니다. 번뇌가 다 하게 되면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의 자리인 것입니다.

성유식론《成唯識論》, 구사론《俱舍論》 등에는 번뇌의 제반 양상에 대해 많은 설명이 등장합니다. 대단히 복잡한 학술적 설명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복잡한 설명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들은 이른바 3독 번뇌 탐. 진. 치5독 번뇌 탐. 진. 치. 만. 의《貪. . 痴. 慢. 疑》 등의 번뇌를 끊어가도록 항상 정진해야만 합니다.

문자 그대로 한없는 무진번뇌가 있더라도, 맹세코 끊어 내겠다는 서원 속에 불자의 수행 생활을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이 한 없지만 모두다 배우겠다는 서원입니다. 우리는 성불의 대도《大道》을 걷기 위해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안내자란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경《經》이라 부릅니다. 경은 `길?의 의미이고 성불의 대도를 의미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닦는 작업을 불도《佛道》을 닦는다고 하는데, 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로 불도를 닦아가기 위해 무량한 법문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법《法》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하고, 불법《佛法》 교법《敎法》 정법《正法》 따위로 부릅니다. 무릇 진리라 하는 것은 불변의 보편적 도리이므로 법이라 부릅니다. 법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세계는 광명의 세계이기에 진리를 따르는 자, 법을 따르는 자는 한없는 광명의 세계를 열어갑니다. 그래서 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펼쳐지는 한없는 광명을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불법을 공부하고 들음으로써 얻어지는 기쁨을 법락《法樂》, 법희《法喜》, 법열《法悅》, 불법의 진리에 대한 맛을 느끼는 경계를 법미《法味》, 불법의 강력한 위신력을 법력《法力》, 불법은 열반의 문이기에 법문《法門》, 불법을 따르는 자에게 열리는 광명의 세계를 법광《法光》, 불법은 만 중생들의 어둠을 밝히므로 법등《法燈》, 불법은 인간중생들에게 혜택을 주므로 법우《法雨》라고 합니다. 그밖에도 법을 바탕으로 한 술어는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그 만큼 법의 세계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세간의 모든 것은 잠깐이요, 번개나 아침 이슬 같은 것입니다만, 부처님 법은 영원이며, 영겁의 보배 그 자체입니다. 부처님 법으로 중생은 대해탈을 성취하며, 이 세계는 부처님 법으로 불국토로 승화됩니다. 법이 머무는 곳에 태양이 있습니다. 법이 사라진 곳엔 어둠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부처님 법은 진실로 진리의 태양입니다.

우리들은 부처님 법을 통해서만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불법이 있음으로 해서 중생의 희망도, 국토의 평화도 가능한 것입니다. 중생들이 거짓과 다툼과 고통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중생들이 불법을 모르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진실로 불법은 중생과 세계를 찬연히 밝혀나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지혜이며 법입니다.

우리 모든 불자들은 부처님 법을 항상 듣고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량한 법문을 한도 끝도 없이 공부해야만 합니다. 법문이 무량하더라도 한도 끝도 없이 공부하기를 서원해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모든 선 지식들과 스님들께 설법하여 주시기를 간청해야만 합니다. 이 땅의 모든 불행과 악과 재난을 쓸어버리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법문 뿐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법문 듣기를 서원하고 설법하여 주시기를 간청해야만 합니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가 드높지만 모두다 이루겠다는 서원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도《道》이 있습니다. 많고 많은 종교와 가르침들이 저마다의 도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많고 많은 도가 이 땅에 존재함은 많은 사람들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물론 목적지로 가는 길이 한길 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길【道】가운데 불도《佛道》을 위없는 도《道》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불도란 바로 부처님과 하나되는 도이고 진리와 하나되는 도이며 절대 그 자체로 승화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도들은 하나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창조주가 있고 피조물이 따로 있는 상대성의 도입니다. 그 같은 가르침을 꼭 도라 부를 수 있는지 조차 분명치 않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절대자에 의한 구원이 아니고서는 우리들의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불도는 그 같은 주장을 낮은 차원의 도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은 피조물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무한한 창조주가 있음을 얘기합니다. 우리가 그대로 창조주임을 선언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창조주임을 깨닫고 창조주답게 살아가기를 가르칩니다. 우리 스스로 무한한 창조주임을 선언한 도는 불도 이외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부처님이 항상 함께 계시고 우리가 곧 부처님이라는 가르침은 참으로 장엄한 가르침이요, 위없는 가르침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도 가운데 부처님과 하나되고 영원과 하나됩니다. 광대무변한 우주는 불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안겨옵니다.

우리는 진정 위없는 불도를 성취할 것을 서원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가득한 번뇌 망상 등을 제거하기만 하면 우리는 무한의 존재와 하나가 됩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갖가지 물질을 바탕으로 한 독심과 악심들의 번뇌가 우리로 하여금 영원과 하나됨을 방해합니다.

불도를 닦는다는 것, 불도를 이룬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번뇌를 녹여 내리고 부처와 하나되는 작업입니다. 참으로 성스럽고 지고《至高》한 값어치를 지닌 숭고한 작업입니다. 우리 모두 위없는 불도를 성취하겠노라는 굳세고 굳센 서원을 다짐해야만 합니다.

불도를 다른 말로 보리도《菩提道》니 해탈도《解脫道》니 등등의 술어로 얘기하기도 합니다. 불교는 문자 그대로 도를 닦는 작업입니다. 외부의 힘이 아닌 스스로가 끊임없이 갈고 닦으며 나아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흔히 도로를 내는 작업을 생각해 보면 좀더 이해를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잡초를 제거하고 길을 닦으면 그 길을 따라 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생 동안 길을 닦아나가다 멈추어 버리면 우리는 다음 생에 그 길의 끝에서 다시 길 닦는 일을 시작해 나가야만 합니다. 우리의 길은 영원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기에 그 길은 부처님 세계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원아불퇴보리심?하면서 물러나지 않는 마음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불도만이 위없는 도이며 영원과 하나되는 도임을 자각하고 쉬임없이 나아가 그를 달성토록 서원해야만 합니다.



자성중생서원도《自性衆生誓願度》

자성번뇌서원단《自性煩惱誓願斷》

자성법문서원학《自性法門誓願學》

자성불도서원성《自性佛道誓願成》

내 마음속에 중생을 맹세코 제도하기 원하옵니다, 내 마음속에 번뇌를 맹세코 끊기를 원하옵니다, 내 마음속에 법문을 맹세코 배우기를 원하옵니다, 내 마음속에 불도를 맹세코 이루기를 원하옵니다. 내 중생부터 제도하고 내 마음의 번뇌부터 끊어가면서 나부터 열심히 법문을 공부하고 나부터 불도를 이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서원입니다. 그리하여 아사지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사지가 되어야 친구 따라 능인선원에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능인불교학교를 만들어 몸과 마음을 다해 가르치려고 작심을 한건, 누구나 가 다 소중한 분들이며, 누구나 다 아사지가 될 수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보리, 목건련들과 연결되어 있겠습니까?




2. 한없는 예경의 마음

발원이귀명례삼보

나무상주시방불《南無常住十方佛》

나무상주시방법《南無常住十方法》

나무상주시방승《南無常住十方僧》


나무상주시방불《南無常住十方佛》

나무상주시방법《南無常住十方法》

나무상주시방승《南無常住十方僧》


나무상주시방불《南無常住十方佛》

나무상주시방법《南無常住十方法》

나무상주시방승《南無常住十方僧》

발원이《發願已》, 발원을 마치고 의 뜻입니다. 귀명례삼보《歸命禮三寶》란 삼보님께 이 목숨 다 바쳐 예배드리옵니다의 뜻입니다.

우리의 발원은 이제 마쳐졌습니다. 사홍서원 이상의 발원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발원은 삼귀의로 귀착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지심귀명례?하듯이, 우리들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께 귀의하는 마음으로 만이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발원은 참으로 고귀하고 장엄한 것이기에 그 길은 삼보님의 위신력과 더불어 함께 하는 길입니다. 우리들은 원력의 달성을 위해 항상 삼보님과 하나 됨을 선언하고, 한없는 예경의 마음을 지녀야만 합니다.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은 부처님과 하나되는 마음이고, 우리들은 `지심귀명례?를 통해 그를 확인합니다.

나무《南無》의 뜻은 바로 지심귀명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상주《常住》의 뜻은 항상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시방《十方》의 뜻은 언제 어디에서나 의 의미입니다. 부처님은 언제 어디에서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처이고 너의 마음 나의 마음이 부처이듯, 이 세상 모두를 부처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곧바로 부처님 마음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우주를, 만상을, 그리고 우리 주변의 모두를 부처님으로 섬긴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삼보님 전에 귀의해야만 합니다.

`나무상주시방불, 나무상주시방법, 나무상주시방승?의 뜻은 `항상 함께 계시는 부처님, 항상 함께 계시는 가르침, 항상 함께 계시는 스님들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귀의합니다?의 의미입니다.


1. 영원한 정진을 위하여

정삼업진언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여기서 부터는 불공을 올릴 때만 외우는 부분입니다.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진언의 내용을 해석하면 `옴, 본래 청정한 일체 법성이여, 내 자성도 청정해 지이다?의 뜻입니다. 이 세상 모든 법은 원래 청정하니 자신 또한 이 법과 더불어 청정하게 되어지며, 그렇게 될 때 삼업도 깨끗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신. 구. 의,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지은 삼업을 잘 다스리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제일 처음 천수경을 독송할 때 삼업을 청정히 하고 독송합니다. 법요식이나, 법회, 제사, 불공을 올릴 때 천수경을 제일 처음 독송합니다. 천수경을 독송하면서 부터 제단, 불단, 지장단, 신중단, 영단을 여는 것입니다. 즉 내 마음의 문을 부처님께로, 관세음보살님께로, 지장보살님께로, 화엄신중님께로, 영가님들께로 연다는 뜻이 다음에 나오는 개단진언입니다.


개단진언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 사야훔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 사야훔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 사야훔

개단진언《開壇眞言》, 제단을 여는 진언입니다.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 사야훔?이란 진언의 의미는 `옴, 금강의 문이여, 열어지이다. 삼매에 두루 들어가리라?의 뜻입니다.

우리가 법당 문을 열었다고 하면 법당의 분위기 속에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단을 열고 불공을 올리면 부처님과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천수경을 공부하고 있으면 새로운 세계가 완전히 펼쳐집니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것이 개단진언입니다. 문을 열면 그 세상은 별천지로서 부처님의 세계로 만들어 갑니다. 정법계진언은 앞에도 한번 나왔는데 또 한번 더 법계를 맑히는 진언을 하고 부처님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완전히 맑고 깨끗한 별천지가 되는 것입니다.


건단진언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

건단진언《建壇眞言》, 제단을 세우는 진언입니다.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의 진언을 풀이하면 `환희신장이시여, 단을 세우는 신장이시여, 희열의 낙원을 펼쳐 주소서, 모든 일을 성취케 하옵소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불단을 세우고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청해서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기쁨과 환희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2. 정상에 놓으라

정법계진언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 법계를 맑히는 진언입니다. 앞에 나오는 정법계진언인 `옴 남?과 관련지어 해석하면 됩니다. `옴 남?은 원래는 `옴 람? 입니다.

귀절마다 장엄한 뜻

나자색선백《羅字色鮮白》

공점이엄지《空點以嚴之》

여피계명주《如彼 明珠》

치지어정상《置之於頂上》

색깔도 선명하게 글자로 풀어서 기록한 이 천수경은 한 귀절 한 귀절이 모두 다 부처님의 점, 공점으로 장엄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공점?이란 부처님의 점, 공의 마음, 부처님의 마음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수경은 중요한 것이고 그 공덕이 무량한 것입니다. 천수경에 쓰인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부처님의 마음으로 장엄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피계명주?, 흡사 계명주 같다는 뜻입니다. `계?는 꿸 계자로 흡사 밝은 구슬이 꿰어져 있는 것 같은 것을 말하며, `치지어정상?은 항상 처음과 정상에 두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다같이 생각을 좀 해 봅시다. 눈앞에 새로운 신천지가 열리고 아름다운 보석들이 줄줄이 꿰어져 있는 세계를 말입니다.

제가 예전에 뉴욕에 갔을 때 티파니란 유명한 보석상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더니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보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천수경에 나오는 보석은 티파니보석상의 그런 보석이 문제가 아닙니다.

물방울 다이아가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천수경을 부지런히 독경하게 되면 수천 캐럿트 다이아몬드 목거리보다 더 값 있는 보석을 가슴에 달게 되는 것입니다.

천수경을 독송하고 기도하게 되면, 여러분들 마음에 그만큼 아름다운 보석으로 꿰어진 마음의 목걸이를 거시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걸려있는 빛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보이십니까? 다이아몬드 한 알도 비싸다는데, 그 비싼 다이아몬드를 줄줄이 알사탕으로 엮어 놓았으니 이렇게 값진 보석을 어디에 보관하겠습니까? 물론 최정상의 자리에 보관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경은 소중한 것이기에 그래서 소중하게 보관해야만 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만, 스님들이 공부하시는 어느 강원에서 스님들끼리 싸움이 났습니다. 싸우는 도중 한 스님이 화가 나서 보고 있던 경전을 던졌는데, 나중에 그 스님이 내려가다가 차에 치여서 다리가 부러졌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경전들이 우리 눈에는 그냥 종이로 보이지만, 허공에 계시는 화엄신장님들의 눈에는 아주 밝은 황금 빛 덩어리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이 들어있는 책들이나 경전을 함부로 다루지 말고 정성스럽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천수경은 법계 그 자체

진언동법계《眞言同法界》

무량중죄제《無量衆罪除》

일체촉예처《一切觸 處》

당가차자문《當加此字門》

`진언동법계?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진리란 영원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에 구애 받지 않습니다. 천년 전 진리는 지금도 진리인 것이고 미국에서 진리인 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차원 더 나아간다면 지구에서 진리인 것은 저 멀고 먼 우주의 어느 별에서도 진리인 것입니다.

진언이란 진리의 말이고 진실된 말입니다. 우리들의 진실된 말 역시 법계와 하나 된다는 의미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진언동법계?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만, 법계《法界》의 의미는 법이 유통되는 세계, 즉 광대무변한 우주를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참말을 하면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뜻은, 참말을 하면 우주가 그를 가호하게 되고 우주의 도움을 힘입게 된다는 가르침과 통합니다.

우리가 참말을 하고 기도를 하게 되면 우주가 나를 가호하게 됩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세계가 열립니다.

우리는 참말, 진실된 말을 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릇된 말, 삿된 말을 하게 될 경우 우주는 그를 저버립니다. 그는 결코 우주 법계 안에서 용납될 수 없는 존재로 전락될 것이고 크나큰 재앙이 그를 압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말 중의 참말은 역시 염불이요, 기도입니다. 그러기에 기도란 우주의 복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항상 기도하라고 읊어대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 있습니다.

참말 중의 참말은 기도이고, 또 부처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부처님 말씀을 독경하고 항상 그 같은 가르침을 생활화면 그 역시 우주의 복이 내립니다. 진실로 부처님의 힘, 법계의 힘을 부릅니다.

진언이 법계와 하나되는 위신력을 가지고 있다면, 법계는 청정하고 법계 자체가 부처님이니까 참말을 하고 사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쌓여진 무량한 중죄는 녹아져 내립니다. 기도를 하면 업장소멸이 되고 무량한 중죄가 다 녹아진다는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합니다.

`기도는 진심으로의 참회이며, 기도는 헌신적인 참회이다?라고 했듯이, 기도 가운데 참회가 되고 참회 가운데 무량한 중죄가 녹아집니다. 그래서 `무량중죄제《無量衆罪除》?라 한 것입니다.

천수경은 바로 부처님 말씀이고 진언이기에 천수경은 부처님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기에 천수경을 독송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가피력을 힘 입을 수 있습니다.

`촉?은 접촉할 때의 촉자이며 `예처?란 괴롭고 힘겨운 곳이란 말씀입니다. `일체촉예처《一切觸 處》?란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괴롭고 어려운 일을 맞닥뜨렸을 때 천수경을 독경하게 되면 모든 것이 순순히 풀려 나간다는 의미입니다.

`당가차자문《當加此字門》?이 바로 그 같은 의미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천수경의 문을 열고 나가라는 의미입니다. 천수경을 끊임없이 독송하고 기도하고 나아가면, 어렵고 힘들고 괴로운 모든 일들이 모두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슬기롭게 극복되어 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




천수경【 千手經 】

정구업진언【구업을 깨끗이 하는 진언】◐淨口業眞言◑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세상 사람들이 무량겁을 내려오며 항상 구업을 지어왔고 또 나쁜 음식을 먹어서 악취가 나며 침`가래 등이 있어서 입이 깨끗하지 못하므로 이 천수대비주를 외울 때는 반드시 먼저 이 진언을 외우지 않으면 안된다.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모든 신을 안위하는 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개경게【경전을 찬탄하는 게송】◐開經偈◑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가장 높고 미묘하고 깊고 깊은 부처님 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백천만겁 지나도록 만나 뵙기 어려워라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나는 이제 다행히도 듣고 보고 지니오니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원하옵건대 부처님의 진실한 뜻 알아지이다

개법장진언【법장을 여는 진언】◐開法藏眞言◑

옴 아라남 아라다

옴 아라남 아라다

옴 아라남 아라다

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千手千眼觀自在菩薩 廣大圓滿無碍大悲心大陀羅尼 啓請◑

천손과 천눈으로 중생을 구제하시는 관자재보살님의 광대하고 원만하고 걸림 없는 자비의 다라니를 청함

계수관음대비주【稽首觀音大悲主】관음보살 신주 앞에 머리 숙여 절합니다.

원력홍심상호신【願力弘深相好身】그 원력이 위대하사 상호 또한 거룩하고

천비장엄보호지【千비莊嚴菩護持】고액 속에 모든 중생 일천팔로 거두시며

천안광명변관조【千眼光明遍觀照】일천 눈의 광명으로 온 세상을 살피시네

진실어중선밀어【眞實語中宣密語】참된 말씀 그 가운데 비밀한 뜻 보이시고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하염없는 그 맘속에 자비심이 넘칩니다

속령만족제희구【速令滿足諸希求】저희들의 온갖 소원 어서 속히 이루옵고

영사멸제제죄업【永使滅除諸罪業】모든 죄업 남김없이 깨끗하게 씻어이다

천룡중성동자호【天龍衆聖同慈護】하늘과 용 모든 성중 또한 함께 보살피어

백천삼매돈훈수【百千三昧頓薰修】백 천 가지 온갖 삼매 한꺼번에 깨쳐이다

수지신시광명당【受持身是光明幢】받아 지닌 저희 몸은 큰 광명의 깃발이고

수지심시신통장【受持心是神通藏】받아 지닌 저희 마음 신비로운 곳집이니

세척진로원제해【洗滌塵勞願濟海】세상 티끌 씻어내고 괴롬바다 어서 건너

초증보리방편문【超證菩提方便門】보리법의 방편문을 속히 얻게 하여이다

아금칭송서귀의【我今稱誦誓歸依】신비로운 대비주에 귀의하여 원하오니

소원종심실원만【所願從心悉圓滿】뜻하는 일 마음대로 모든 원을 이뤄이다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여 비옵니다

원아속지일체법【願我速知一切法】이 세상의 온갖 진리 어서 빨리 알아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여 비옵니다

원아조득지혜안【願我早得智慧眼】부처님의 지혜 눈을 빨리빨리 얻어이다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여 비옵니다

원아속도일체중【願我速度一切衆】한량없는 모든 중생 어서 빨리 건져이다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여 비옵니다

원아조득선방편【願我早得善方便】八만四천 묘한 방편 빨리빨리 얻어이다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여 비옵니다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저 언덕의 지혜 배에 어서 빨리 올라이다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여 비옵니다

원아조득월고해【願我早得越苦海】생노병사 괴롬바다 어서 빨리 건너이다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여 비옵니다

원아속득계정도【願我速得戒定道】무명 벗는 계와 정을 어서 빨리 얻어이다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여 비옵니다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극락세계 열반산에 어서 빨리 올라이다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여 비옵니다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하염없는 법의 진리 어서 빨리 알아이다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여 비옵니다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절대 진리 법성의 몸 어서어서 이뤄이다

아약향도산【我若向刀山】칼산지옥 내가 가면

도산자최절【刀山自催折】칼산 절로 무너지고

아약향화탕【我若向火湯】화탕지옥 내가 가면

화탕자고갈【火湯自枯渴】화탕 절로 말라지고

아약향지옥【我若向地獄】모든 지옥 내가 가면

지옥자소멸【地獄自消滅】지옥 절로 없어지다

아약향아귀【我若向餓鬼】아귀 세계 내가 가면

아귀자포만【餓鬼自飽滿】아귀 절로 배부르고

아약향수라【我若向修羅】수라 세계 내가 가면

악심자조복【惡心自調伏】악한 마음 항복 되고

아약향축생【我若向畜生】짐승 세계 내가 가면

자득대지혜【自得大智慧】슬기 절로 생겨이다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南無觀世音菩薩摩 薩】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南無大勢至菩薩摩 薩】

아미타 부처님의 우보처《右補處》시다. 아미타불, 관세음, 대세지 세분을 극락세계의 三존《尊》불로 숭배하는데,대세지보살님은 만행을 닦으실 때 특히 남에게 모든 것을 베푸는 수행을 잘 하셨다고 한다.

나무천수보살마하살【南無千手菩薩摩 薩】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중생을 구제해 주시는 보살님이신데, 다름 아닌 관세음보살님의 여섯 화신《化身》가운데 한 분임.

나무여의륜보살마하살【南無如意輪菩薩摩 薩】

여섯 관세음보살 화신 중의 한 분인데 손에 여의주와 보배 수레바퀴<寶輪>를 들고 계시다 여의주는 중생의 원을 다 들어 주겠다는 뜻이며, 보배 수레바퀴는 부처님의 법을 굴리는 표시다.

나무대륜보살마하살【南無大輪菩薩摩 薩】

대륜금강《大輪金剛》을 말한다. 태장계《胎藏界》 금강수원《金剛手院》의 三十三존 가운데 한 분이시다. 미혹을 끊는 지혜와 덕을 표하여 대륜이라고 한다. 손에 금강저《金剛杵`跋折羅》은 보리심을 뜻하는 수도 도구인데 이 보살은 《三고》으로 된 금강저를 들고 보리심을 재촉하신다.

나무관자재보살마하살【南無觀自在菩薩摩 薩】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관세음보살의 이명이다.

나무정취보살마하살【南無正趣菩薩摩 薩】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니, 정취 관음이라고 부른다. 정취보살은 화엄경 입법계품에 보면 해탈법문을 널리 설해준 보살이기도 하다.

나무만월보살마하살【南無滿月菩薩摩 薩】

둥근 달과 같이 공덕이 원만하고 상호가 원만한 보살이며 온 중생에게 골고루 비춰주시는 보살이시다. 역시 관음보살의 화현불이시다.

나무수월보살마하살【南無水月菩薩摩 薩】

수월관음이니 三十二관음의 한 분이시다. 밝은 달이 바다 위를 환하게 비쳤을 때 한 연꽃이 바다 위에 떠 있고 연꽃 위에 서서 계신 몸을 나투신 관음을 말한다.

나무군다리보살마하살【南無軍茶利菩薩摩 薩】

보배 병을 들고 계시며, 일체 고액을 제도해 주시는 일을 맡아서 특히 자비를 펴시는 보살이시다.

나무십일면보살마하살【南無十一面菩薩摩 薩】

아수라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 대광보조관음《大光普照觀音》이라 한다. 머리 위에 열한 개의 얼굴을 가지신 관음으로서, 전후 좌우의 十면은 보살의 수행 계급인 十위를 표하고, 맨 위의 한 분은 고요하고 안온한 상이고, 왼편의 세 얼굴은 위엄과 노여움으로 꾸짖는 상이고, 오른편 세 얼굴은 아랫편 어금니가 입 밖으로 나온 상이고, 뒤의 얼굴은 자비로 웃는 상이시다. 맨 위의 부처님 상은 원만상호이시다. 경전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十一면상이 모두 화관을 썼고 화관 위에 다 아미타불을 모시었다.

나무제대보살마하살【南無諸大菩薩摩 薩】

나무본사아미타불【南無本師阿彌陀佛】

나무본사아미타불【南無本師阿彌陀佛】

나무본사아미타불【南無本師阿彌陀佛】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

이 경은 옛날 인도의 범어를 그대로 우리말로 음역《音譯》하여 읽는 것이며, 정법《正法》을 두호하는 모든 보살과 신장의 비밀 명호이므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경에 말씀하시기를「어느 중생이든지 이 대비신주를 독송하면 三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현세에서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된다. 」고 하셨다. 우리는 오직 일념으로 이 대비주를 읽는 가운데 관세음보살님의 위신력을 입을 수 있고 광명과 복락의 바른 길을 갈 수 있다. 이 대비주를 읽어서 고액을 없애고 소원을 성취한 실증은 많은 불자 선배들의 예로써 증명되고 있다. 원래 다라니는 한 말속에 깊고 많은 뜻을 지니고 있고 모든 선 공덕을 갈무리하고 있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 독송하도록 되어 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가로 니가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다사명 나막 까리다바 이맘알야 바로기제 새바라 다바 니라간타 나막 하리나야 마발다 이사미 살발타 사다남 수반 아예염 살바보다남 바바말아 미수다감 다냐타 옴 아로계 아로가 마지로가 지가란제 혜혜하례 마하모지 사다바 사마라 사마라 하리나야 구로구로 갈마 사다야 사다야 도로도로 미연제 마하 미연제 다라다라 다린 나례 새바라 자라자라 마라 미마라아마라 몰제 예혜혜 로계 새바라 라아 미사미 나사야 나베 사미사미 나사야 모하자라 미사미 나사야 호로호로 마라호로 하례 바나마 나바 사라사라 시리시리 소로소로 못쟈못쟈 모다야 모다야 매다리야 니라간타 가마사 날사남 바라 하라나야 마낙사바하 싣다야 사바하 마하 싣다야 사바하 싣다유예 새바라야 사바하 니라간타야 사바하 바라하 목카싱하 목카야 사바하 바나마 하따야 사바하 자가라 욕다야 사바하 상카섭나녜 모다나야 사바하 마하라 구타다라야 사바하 바마 사간타 이사시체다 가릿나 이나야 사바하 먀가라잘마 이바사나야 사바하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사방찬【사방을 찬탄함】◐四方讚◑

일쇄동방결도량 : 첫째 동방 망상 씻어 청정도량 이루었고

이쇄남방득청량 : 둘째 남방 번뇌 씻어 끊는 마음 시원하며

삼쇄서방구정토 : 세째 서쪽 망심 씻어 안락 정토 이루었고

사쇄북방영안강 : 넷째 북방 애욕 씻어 영원토록 안강토다

도량찬【도량을 찬탄함】

도량청정무아애 : 온 도량이 깨끗하여 더러운 것 전혀 없고

삼보천룡강차지 : 삼보님과 천룡님네 이 도량에 오시도다

아금지송묘진언 : 내가 이제 묘한 진언 지니옵고 외우오니

원사자비밀가호 : 자비 감로 베푸시어 저희 무리 살펴이다

참회게【참회하는 게송】

아석소조제악업 : 아득히 먼 옛날부터 내가 지은 모든 악업

개유무시탐진치 : 크고 작은 그것 모두 탐진치로 생기었고

종신구의지소생 : 몸과 입과 뜻을 따라 무명으로 지었기에

일체아금개참회 : 나는 지금 지심으로 참회하고 비옵니다.

참제업장십이존불

나무참제업장보승장불【南無懺除業障寶勝藏佛】

보광왕화렴조불【寶光王火炎照佛】

일체향화자재력왕불【一切香火自在力王佛】

백억항하사결정불【百億恒河沙決定佛】

진위덕불【振威德佛】

금강견강소복괴산불【金剛堅强消伏壞散佛】

보광월전묘음존왕불【普光月殿妙音尊王佛】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

무진향승왕불【無盡香勝王佛】

사자월불【獅子月佛】

환희장엄주왕불【歡喜莊嚴珠王佛】

제보당마니승광불【帝寶幢摩尼勝光佛】


십악참회【열 가지 죄업을 참회함】◐十惡懺悔◑

살생중죄금일참회 : 살생한 죄 오늘 이제 참회하고 비옵니다

투도중죄금일참회 : 도적한 죄 오늘 이제 참회하고 비옵니다

사음중죄금일참회 : 사음한 죄 오늘 이제 참회하고 비옵니다

망어중죄금일참회 : 거짓말한 죄업 오늘 참회하고 비옵니다

기어중죄금일참회 : 발림 말한 죄업 오늘 참회하고 비옵니다

양설중죄금일참회 : 이간질한 죄업 오늘 참회하고 비옵니다

악구중죄금일참회 : 나쁜 말한 죄업 오늘 참회하고 비옵니다

탐애중죄금일참회 : 탐애한 죄 오늘 이제 참회하고 비옵니다

진에중죄금일참회 : 성낸 죄업 오늘 이제 참회하고 비옵니다

치암중죄금일참회 : 우치한 죄 오늘 이제 참회하고 비옵니다

백겁적집죄 : 백겁 천겁 쌓인 죄업

일념돈탕진 : 한 생각에 없어져서

여화분고초 : 마른 풀을 불태운 듯

멸진무유여 : 남음 없이 사라지네

죄무자성종심기 : 죄는 본래 따로 없고 마음 따라 일어난 것

심약멸시죄역망 : 그 마음 없어지면 죄 또한 사라지리

죄망심멸양구공 : 지은 죄와 죄진 마음 모두 함께 녹아 내려

시즉명위진참회 : 녹아내린 그 자리가 이름하여 진참하네


참회진언【죄업을 참회하는 진언】◐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준제찬【준제관음의 공덕을 찬탄함】◐准提讚◑

준제공덕취 : 준제 주의 크신 공덕

적정심상송 : 일념으로 늘 외우면

일체제대난 : 그 어떠한 어려움도

무능침시인 : 그를 침노 못하리니

천상급인간 : 하늘이나 사람이나

수복여불등 : 부처처럼 복 받으며

우차여의주 : 이 여의주 얻은 이는

정획무등등 : 가장 큰 법 이루리라

나무칠구지불모대준제보살

나무칠구지불모대준제보살

나무칠구지불모대준제보살


정법계진언【법계를 깨끗이 하는 진언】◐淨法界眞言◑

옴 남

옴 남

옴 남

호신진언【몸을 보호하는 진언】◐護身眞言◑

옴 치림

옴 치림

옴 치림


관세음보살본심미묘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本心微妙六字大明王眞言◑

관세음보살님의 미묘하신 본심을 보이는 여섯자로 된 대명왕 진언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준제진언【준제보살님의 진언】◐准提眞言◑

나무 사다남 삼먁 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나무 사다남 삼먁 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나무 사다남 삼먁 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아금지송대준제 : 내가 이제 대준제를 지성으로 외우면서

즉발보리광대원 : 크고 넓은 보리심의 광대한 원 세우오니

원아정혜속원명 : 정과 혜를 닦고 닦아 어서 밝게 이뤄이다

원아공덕개성취 : 크고 넓은 모든 공덕 모두 모두 얻어이다

원아승복변장엄 : 높은 복과 큰 장엄을 두루두루 갖춰이다

원공중생성불도 : 그지 없는 중생들과 불도 함께 이뤄이다


여래십대발원문【여래의 열 가지 발원문】◐如來十大發願文◑

원아영리삼악도 : 나는 이제 삼악도를 여의옵기 원입니다

원아속단탐진치 : 나는 이제 탐진치를 어서 끊기 원입니다

원아상문불법승 : 나는 이제 불법승을 항시 듣기 원입니다

원아근수계정혜 : 나는 이제 계와 정혜 힘껏 닦기 원입니다

원아항수제불학 : 나는 이제 부처님 법 늘 배우기 원입니다

원아불퇴보리심 : 나는 이제 보리심을 안 여의기 원입니다

원아결정생안양 : 나는 이제 안양계에 태어나기 원입니다

원아속견아미타 : 나는 어서 아미타불 만나 뵙기 원입니다

원아분신변진찰 : 나는 이제 나툰몸을 두루 펴기 원입니다

원아광도제중생 : 나는 널리 모든 중생 제도하기 원입니다


발사홍서원【네 가지 큰 원을 세움】◐發四弘誓願◑

중생무변서원도 : 중생이 수 없지만 모두 다 건지리다

번뇌무진서원단 : 번뇌가 끝없지만 모두 다 끊으리다

법문무량서원학 : 법문이 한없지만 모두 다 배우리다

불도무상서원성 : 불도가 드높지만 모두 다 이루리다

자성중생서원도 : 마음의 중생부터 기어이 건지리다

자성번뇌서원단 : 마음의 번뇌부터 기어이 끊으리다

자성법문서원학 : 마음의 법문부터 기어이 배우리다

자성불도서원성 : 마음의 불도부터 기어이 이루리다


발원이귀명례삼보【원을 발하여 삼보께 귀의함】◐發願已歸命禮三寶◑

나무상주시방불 : 시방에 항상 계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나무상주시방법 : 시방에 항상 계신 법보님께 귀의합니다

나무상주시방승 : 시방에 항상 계신 승보님께 귀의합니다


정삼업진언【몸과 입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진언】◐淨三業眞言◑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개단진언【법단을 여는 진언】◐開壇眞言◑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 사야훔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 사야훔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 사야훔


건단진언【법단을 세우는 진언】◐建壇眞言◑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


정법계진언【우주 법계를 깨끗이 하는 진언】◐淨法界眞言◑

나자색선백

공점이엄지

여피계명주

치지어정상

진언동법계

무량중죄제

일체촉예처

당가차자문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

능인선원 지광스님 천수경 강의 끝.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