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찰스 윈저
Charles Windsor
아일라 위스키를 사랑하는 한량, 찰스 왕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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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분방한 왕세자
- 다이애나와 결혼하다
- 스카치위스키를 즐긴 찰스 왕세자
- 라프로익 증류소와의 인연
비극적인 죽음으로 잘 알려진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짧고 극적인 삶만큼이나 언론과 대중의 커다란 관심을 받아온 것으로 유명하다. 마치 동화 속 주인공과도 같았던 결혼식, 화려해보였던 왕세자비로서의 기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이혼 그리고 의문의 사망 사건에 이르기까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던 그녀의 삶은 전 세계인의 관심거리였다. 이런 다이애나의 삶을 이야기할 때 찰스 왕세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찰스 왕세자야말로 다이애나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전기작가 샐리 베델 스미스가 쓴 『퀸 엘리자베스(Elizabeth the Queen: The Woman Behind the Throne)』을 보면 아들 부부의 이혼과 관련해 2012년 즉위 60주년을 맞이했던 엘리자베스 2세가 전 캔터베리 대성당 주교인 커레이 경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밝히면서 “처음으로 엄청난 절망감을 느꼈다”라고 말했다고 나온다. 여왕은 과거 에드워드 8세(Edward VIII)가 월리스 심프슨(Wallis Simpson)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버린 것처럼 아들 찰스 왕세자도 정부 카밀라와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또 커레이 경은 “여왕은 한숨을 내쉬면서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고 솔직히 이야기했으며 그 표정에서 엄청나게 실망하고 있음을 느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와 찰스 왕세자는 비슷해보이지만 서로 다른 점도 있다. 에드워드 8세는 조지 5세의 장남으로 왕위 계승 서열 첫 번째의 자격으로 1936년 부친인 조지 5세가 사망하자 왕위에 오른다. 그는 엘리자베스 2세에게는 삼촌이 된다. 그런데 왕세자 시절 평소에도 여성 편력 때문에 주위의 신경을 쓰게 만들었던 그는 즉위 후 그때까지 사귀고 있던 미국인 애인 심프슨과의 정식 결혼을 시도한다. 문제는 심프슨이 이미 한 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 데다 두 번째 결혼은 파경 직전이어서 에드워드 8세와 사귀고 있을 때만 하더라도 유부녀였다는 점이었다.
당시 스탠리 볼드윈이 이끄는 영국 내각은 살아 있는 전 남편을 둘이나 두게 될 여성을 국모로 맞이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하며 에드워드 8세의 계획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게다가 이는 영국 교회의 수장인 국왕의 자격에도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에드워드 8세의 결혼에 대한 영국 국민의 여론도 좋지 못했다. 결국 에드워드 8세는 불과 326일간의 짧은 재위 기간을 끝으로 왕위를 포기했다. 그 후 심프슨과 결혼해 프랑스에서 1972년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함께 살게 된다. 이 ‘세기의 로맨스’의 결과 에드워드 8세의 동생 조지 6세가 대신 왕위를 이어받게 되고 이어서 그의 큰딸인 엘리자베스 2세가 여왕이 된 것이다.
찰스 왕세자의 경우 다이애나와 결혼하기 전 이미 카밀라를 사랑하고 있었으나 유부녀였던 카밀라와는 이루어질 수 없으니 다이애나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이 부족했던 결혼 생활은 결국 파경에 이르고 찰스 왕세자는 그 후 남편과 이혼한 카밀라와 재혼해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낭만적인 기질로 볼 수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난봉꾼의 일탈로도 볼 수 있는 일들이 현대 영국 왕실에서 엘리자베스 2세의 표현대로 한 세대를 걸러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찰스 윈저Charles Windsor, 1948~ ⓒ 인물과사상사 |
자유분방한 왕세자 찰스 왕세자는 1948년 버킹엄 궁전에서 아직 공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와 그리스 왕실 출신의 에든버러 공작 필립 마운트배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필립 공의 어머니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로 그의 혈통에는 영국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는 셈이다.
1952년 2월 6일 찰스가 채 만 4세가 되기도 전에 할아버지 조지 6세가 사망하자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가 불과 25세의 젊은 나이로 영국 왕위에 오르게 된다. 장남인 찰스는 이때 차기 왕위의 공식적인 계승자로 왕세자 타이틀을 얻은 후 지금까지 이르러,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왕세자에 머물러 있는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찰스는 유년기 때부터 미래의 영국 왕이 되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된다. 1955년 영국 왕실은 찰스가 앞으로 개인 교습 방식이 아니라 일반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한다. 왕세자가 일반 학교에 다니는 것은 영국 왕실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찰스는 왕실의 발표대로 1956년 런던에 있는 ‘힐 하우스’에 입학했다. 당시 이 학교의 창립자이면서 교장이었던 타운엔드는 왕세자를 일반 학생과 똑같이 대하려고 노력했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왕세자를 축구부에 들게 권유해 그가 다른 학생들과 동질감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찰스는 이후 1957년부터 1962년까지 아버지의 모교이기도 한 햄프셔 주 헤들리에 있는 침 스쿨에 다녔으며, 1962년부터 1967년까지는 스코틀랜드 북동부에 위치한 엄격한 교풍을 가진 고든스타운 스쿨에서 대학 전 예비 교육을 받았다. 1967년 찰스는 중간에 사관학교를 거치는 기존의 관례를 깨고 바로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인류학·고고학·역사학 등을 공부한 그는 1971년 영국 왕위 계승자로서는 최초로 학사 학위를 받고, 이후 1975년에는 석사 학위도 취득한다. 찰스는 영국 왕실의 전통에 따라 공군과 해군에서도 잠시 동안 복무하며 군 경험을 쌓는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 2학년 때인 1969년에는 영국 공군에서 비행 훈련을 받고, 그 후 직접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또 다트머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서 6주 교육을 받고, 1971년부터 1976년까지 해군 소속으로 함대에 배치되어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근무한다. 이 기간 중에 헬리콥터 조종사 자격증도 취득한다.
왕세자라는 신분과 남성적인 매력 그리고 특유의 한량 기질로 찰스는 젊은 시절부터 상당한 여성 편력을 보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흥미 있는 인물이 한 사람 등장한다. 마운트배튼 경(Lord Louis Mountbatten)이다. 마운트배튼 경은 찰스의 부친인 필립 공의 친삼촌으로, 인도의 마지막 총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찰스의 성장기에 멘토 역할을 하며 영향을 미쳤다. 찰스도 그를 몹시 따랐다. 그는 진작부터 찰스가 과거 에드워드 8세와 같이 자유분방하면서 인생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성격인 것을 눈치채고 몇 차례 주의를 주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젊은 시절의 에드워드 8세에 관해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도 기본적으로는 찰스에게 총각 시절에는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길 것을 권했다. 그는 그러면서 나중에 결혼만은 안정된 생활을 위해 젊고 순진한 여자와 해야 한다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마운트배튼 경은 찰스가 결혼을 생각할 때가 되자 찰스의 배우자로 그의 손녀 아만다를 적극 추천했다. 몇 차례의 예비 작업을 거친 뒤 1978년에는 그의 예정된 인도 여행에 찰스와 아만다가 같이 가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괜한 구설수를 걱정한 양가 부모의 반대로 이 계획은 무산된다. 거기에다 1979년에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폭탄 테러로 마운트배튼 경이 사망하고 만다. 그 후 찰스는 혼자 인도 여행을 마친 뒤 아만다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하지만 테러 사건으로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막내 동생 등 다른 가족도 함께 잃은 아만다는 그 충격에서 쉽사리 헤어나지 못하고 왕실로 들어가는 것을 완강히 거절한다.
다이애나와 결혼하다 1981년 7월 29일, 찰스 왕세자는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그보다 12세나 어린, 불과 20세의 스펜서 백작 가문의 딸 다이애나 스펜서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그들은 1977년에 우연히 다이애나의 집에서 처음 만나게 되나 찰스가 연정을 느낀 것은 1980년 여름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연애 시절에도 찰스가 그렇게 다이애나를 사랑했던 것 같지는 않았으며, 다이애나도 찰스의 갑작스런 접근에 당황하면서 놀라워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들의 연애가 언론과 파파라치들의 집중 조명을 받자, 부친인 필립 공이 찰스에게 ‘너가 빨리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그녀의 명예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라고 충고한 것이 찰스의 결혼을 재촉한 원인이 었을 거라는 해석도 있다. 어쩌면 찰스는 연애는 마음대로 하되 결혼만은 ‘젊고 순진한 여자’와 하라는 마운트배튼 경의 조언을 새삼 되새기고 이를 이행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 생활은 결혼 이듬해에 장남 윌리엄이 태어나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84년에는 차남 헨리가 태어나면서 겉으로는 무척 행복해보였다. 그러나 동화처럼 보이던 결혼 생활에 1985년부터 깊은 갈등과 불화의 단서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갈등의 결정적인 요인은 찰스의 오랜 연인이었던 카밀라 파커볼스(Camilla Parker Bowles)였다. 찰스에게 결혼이란 왕으로 가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식이었다. 이런 생각으로 왕세자비의 자리를 적당히 메워줄 고분고분한 여자를 찾은 것인데 의외로 다이애나는 굳센 의지와 자립심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찰스가 마치 과거의 왕처럼 정부를 두고 버젓이 활동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훗날 자신의 결혼은 실질적으로는 카밀라를 포함한 세 사람의 생활이었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다이애나와 함께 걷고 있는 카밀라 파커볼스ⓒ 인물과사상사 |
1995년에는 두 사람을 둘러싼 상황이 결정적으로 악화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다이애나가 BBC의 시사 프로 〈파노라마〉와의 인터뷰에서 과거 그녀의 승마 교관을 지냈던 전 육군 소령 제임스 휴잇과의 혼외정사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그는 다이애나의 둘째 아들인 해리 왕자와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해리의 생부일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을 받았다.
당시 찰스의 한심한 행태와 다이애나의 충격적인 고백에 크게 분노한 엘리자베스 2세는 그해 12월 부부에게 차라리 정식으로 이혼해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공식 서한을 보낸다. 결국 찰스와 다이애나는 이듬해 8월 28일 이혼을 발표한다. 그 후 찰스 왕세자는 2005년 4월 9일에 정식으로 윈저성의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카밀라와 결혼한다.
찰스와 카밀라의 재혼으로 만일 찰스가 영국 왕에 즉위하면 카밀라를 ‘왕비(Queen Consort)’로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현재는 하원의 공식적인 반대 의사 표명과 국민들의 반대 여론을 의식하여 찰스의 즉위 이후에도 카밀라를 왕비 대신 한 단계 격이 낮은 ‘빈(Princess Consort)’으로 부르기로 결정된 상태다. 이처럼 찰스 왕세자의 간단한 이력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어느 정도 한량 기질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서 술을 빼놓을 수 없다.
스카치위스키를 즐긴 찰스 왕세자찰스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우연한 일을 계기로 술을 접했다. 1964년 그가 고든스타운 스쿨에 다닐 때였다. 16세였던 그는 영국방위군의 일원으로 해군 사관 훈련을 받기 위해 스토나웨이 섬에 가 있었다. 문득 신문기자 몇 명이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는 한 펍(pub)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황급히 들어갔는데 펍 주인이 젊은 손님에게 무엇을 마시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순간 찰스는 체리 브랜디(cherry brandy)를 떠올렸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들을 따라 사냥 여행을 떠났을 때 그들이 마시는 술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체리 브랜디라고 대답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찰스는 체리브랜디를 마시게 되는데 당연히 처음 맛보는 독하고 이상한 맛이 좋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뒤따라온 신문기자들에 의해 기사화되어 당시 영국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다.
이후 엄격한 왕세자 교육을 받던 찰스는 더 이상 술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이후 마침내 나이가 찬 그의 술에 대한 인연에 스카치위스키가 빠질 수 없었다. 사실 영국 왕실과 스카치위스키와의 인연은 그 역사가 만만치 않다. 과거 조지 4세는 불법으로 만들어지던 시절의 글렌리벳 몰트위스키를 즐겨 마셨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바로 전 장에서 소개한 빅토리아 여왕도 와인에 스카치위스키를 섞어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또 찰스의 아버지 필립 공도 평소 스카치 몰트위스키의 대표주자 격인 글렌피딕(Glenfiddich) 제품을 좋아해, 스코틀랜드 몰트증류소 협회 창립 100주년을 맞은 1974년에는 글렌피딕 증류소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찰스도 1998년에 빅토리아 여왕이 1848년에 역사적인 첫 방문을 했던 로열 로크나가 증류소를 빅토리아 여왕 방문 150주년을 기념해 공식적으로 방문했다. 그러나 찰스의 스카치위스키와의 인연은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아일라 섬의 라프로익(Laphroaig) 증류소였다.
라프로익 증류소ⓒ 인물과사상사 |
라프로익 증류소에서 생산되는 위스키들ⓒ 인물과사상사 |
아일라 섬은 작은 섬이지만 ‘위스키 성지’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진 스카치위스키의 최고 생산지 가운데 하나다. 이 표현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이란 책 제목 때문이다. 이 책은 무라카미가 부인과 함께 아일라 섬에 몇몇 위스키 증류소를 들러본 기행문인데, ‘위스키 성지’라는 표현이 독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도 역시 여러 해 전에 여름 휴가를 이용해 한국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섬에 방문해 이 섬만이 갖는 독특한 매력을 경험했다. 위스키의 성지로까지 표현된 아일라 섬은 과연 어떤 곳이기에 이토록 대단한 별명을 선사받게 되었을까?
아일라(Islay, 영어식으로는 아일레이라고 하지만 현지에서는 아일라로 읽는다)는 스코틀랜드 서쪽 해안의 헤브리데안 제도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섬이다. 남북으로 약 40킬로미터, 동서로 약 32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으로 인구도 불과 3,40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인구의 약 3분의 1은 바닷가 마을인 행정 중심지 보모어(Bowmore)에, 그리고 다른 3분의 1은 남쪽 항구 도시 포트 엘런(Port Ellen)에 살고 있다. 나머지 3분의 1이 섬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섬 크기에 비해 체감 인구밀도는 낮은 편이다.
그런데 이 작은 섬에 무려 8곳의 위스키 증류소가 있다. 대부분의 증류소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으며 품질도 스카치위스키 가운데 최고를 자랑한다. 특히 이탄(peat)이라는 특이한 석탄 연료로 몰트 보리를 볶음으로써 술에서 배어나오는 강력한 향은 수많은 아일라 위스키 마니아를 탄생시킨 원동력이다.
이들 증류소 가운데 킬코먼(Kilchoman) 증류소는 그 규모도 가장 작고 설립연도도 2005년 11월로, 가장 최근에 시작되었다. 따라서 제품에 대한 인지도도 아직 그렇게 높지는 않다. 그러나 나머지 7개의 증류소는 위스키 애주가 사이에서는 모두 대단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우선 섬의 북쪽에는 부나하번(Bunnahabhain) 증류소와 쿠일라(Caol Ila) 증류소가 있고, 남쪽에는 포트 엘런 근처에 아드벡(Ardbeg), 라가불린(Lagavulin), 라프로익(Laphroaig) 세 증류소가 마치 삼총사처럼 연이어 서 있다. 그리고 섬 중간에는 로크 인달(Loch Indaal) 만에 면해 있는 보모어(Bowmore) 증류소와 브루크라디(Bruchladdich) 증류소가 있다.
지역에 따라 술맛도 차이가 뚜렷해 남쪽의 세 증류소는 강한 이탄 향이 특징인 반면 북쪽의 두 증류소는 상대적으로 이탄 향이 약한 편이다. 지역적으로 중간쯤에 있는 보모어는 이탄 향도 중간쯤이고, 브루크라디는 이탄 향이 강하지 않은 제품이 주종이나 최근에는 상당히 강한 이탄 향을 지닌 위스키도 출시되고 있다. 아일라에는 이 증류소들 이외에도 여러 증류소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지금 흔적이나마 남아 있는 곳은 1820년대 후반 설립되었다가 지금은 폐쇄된 포트 엘런 증류소다. 이 증류소에서 만든 위스키의 인기가 대단해 지금도 위스키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과거에 이곳에서 만든 위스키가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
라프로익 증류소와의 인연 찰스 왕세자는 1994년 6월 29일 평소 좋아하던 아일라 스카치위스키의 대표주자 가운데 하나인 라프로익 증류소에 방문하기로 한다. 그런데 그날따라 워낙 빠듯한 일정 때문에 개인 비행기로 현지에 도착해 증류소에는 고작 20분 정도만 머물 계획이었다. 그런데 찰스의 비행기가 섬에 착륙을 시도하던 중 그만 활주로를 지나치며, 비행기가 크게 망가지는 사고를 당한다. 이 때문에 찰스는 다른 비행기가 올 때까지 아일라에 기다릴 수밖에 없어 라프로익 증류소에 예정한 것보다 훨씬 긴 2시간 반 정도 머문다.
증류소 지배인인 이안 헨더슨에게는 큰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개인비서 그리고 경찰 관계자 한 명과 증류소에 찾아온 찰스 왕세자에게 온갖 정성을 다해 증류소를 소개했다. 찰스도 큰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질문을 했으며,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면서 위스키를 만들고 있는 증류소의 사업 철학을 끝까지 고수해줄 것을 당부했다. 찰스는 또 지배인의 부인 캐럴이 준비한 맛있는 음식과 함께 라프로익 위스키를 마시고, 증류소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2008년 6월 4일 카밀라(왼쪽)와 함께 라프로익 증류소를 방문한 찰스 왕세자ⓒ 인물과사상사 |
이윽고 떠날 시간이 되자 헨더슨은 찰스에게 방문 기념으로 자사 위스키가 들어 있는 오크통 2통을 선물로 증정했다. 이 위스키 통은 뒤에 자선단체에 기부되어 높은 가격으로 경매되었다. 찰스는 라프로익 증류소의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왕세자의 로열 워런트를 수여한다. 싱글 몰트위스키로는 최초로 로열 워런트를 받는 영예를 가진 것이다. 찰스와 라프로익 증류소의 인연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2008년 6월 4일에는 카밀라와 함께 증류소를 다시 방문한다.
또 1998년 12월 찰스가 슬로베니아를 공식 방문했을 때 그의 방문에 맞추어 수도 류블랴나에서 영국 주간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이때 찰스는 행사장을 찾은 슬로베니아 대통령에게 기념으로 라프로익 위스키 한 병을 선물했다. 영국의 차기 왕위 계승자 입장에서 찰스는 특정 브랜드를 소개하기보다는 스카치위스키 전반을 적극적으로 대외에 홍보하려는 의도였다.
찰스 왕세자는 1948년 11월 14일생이니까 만 72세다.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나이에 즉위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지금까지는 윌리엄 4세가 기록을 가지고 있다. 사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건강 상태로 미루어보아 현재로서는 찰스 왕세자의 즉위 여부조차도 불투명하다. 이런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그가 술에 관해서는 앞으로 또 어떤 일화를 남길지 관심이 더해진다.
글:김원곤1978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흉부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의학 전문 서적(8권) 이외에도 『Dr. 미니어처의 아는 만큼 맛있는 술』, 『50대에 시작..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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