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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이르지만, 나의 고백 정도로나마 해둘까요?
내용은 별 것이 없습니다만 다른 분들 좋은 글 올려 달라는 발문의 취지에서 올려 봅니다.
(2003. 9월 어느날 지역의 동문들에게 심경을 밝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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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올라가는 비행기속에서 신당 결성과 원내 대표는 김근태 의원이 내정됐다는 기사를 봤다.
신당의 성격 규정을 해석하는 것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 다를 수밖에 없고 지역마다 이해 기반이 다르기 때문에 제각각일 수 밖에 없겠지만, 신당이 민주당의 핵분열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의 공개적 지지를 받는 원내 소수 여당인것은 분명하겠지.
원내 구성으로 봐서는 제 3당으로 다수 야당에 포위 되어 있는 셈이지. 노무현 정권과 신당은 그런 면에서 상당한 취약점을 안고 있으며, 앞으로의 정국의 전개 방향은 내년 4월 총선으로 치달아가며 총선의 결과에 따라 또 한번의 격변을 예상할 수 있겠지.
나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나는 신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신당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하고 싶어 지난 20-30년간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세력이 드디어 정치권 전면에 나선 것으로 한국 정치사의 새로운 분수령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말이야.
그 동안 3김과 지역 구도 속에 갇혀 각개 약진하며 흩어져 있던 이 세력이 드디어 그 속박을 깨고 전면에 나선것이라고 말이야. 그 동안 3김 세력의 지역할당 구도에 기대어본 호남당 영남당 충청도 당이라는 도식이 3김의 퇴장과 함께 전면적 붕괴를 의미하며 앞으로의 정치적 지형은 어쩔 수 없이 바뀌어 나가며 국민들에겐 혼란과 새로운 희망이라는 상반된 모습을 비쳐질것이라고 보여.
한국정치는 바야흐로 혁명적 전환기에 들어서고 있으며 이는 정치권에서 진정한 진보: 보수의 틀을 갖춰 나가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어.
이러한 정치적 전개 과정은 제대로만 된다면 그 동안 지역구도에 따라 볼모로 잡혀있던 유권자인 국민들에겐 지역이 아니라 정책에 따라, 그들 각자의 정체성에 따라 지지 정당을 선택하는 효과를 내어 한국 정치를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고 선진화시키며 한걸음 더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고 믿고 싶어. 하여간 정치적 지형의 변화는 지역마다 극심하리라고 예상이 되지.
김근태 의원 얘기를 나의 개인사와 썩어서 얘기해 보기로하자. 어제 선배 한분이 민청련(민주화운동 청년 연합) 결성 20 주년 기념식이 9월 30일 있다고 알려주며 한참동안 신상문제와 근황에 대한 물음을 서로 나누었다.
1983년이면 전두환군사정권이 기세등등할때라 정치는 실종되고, 언론은 그야말로 침묵, 아니 굴종뿐이었지. 학생들의 정의로운 외침만이 간간이 들릴뿐 정말로 치욕의 시절이었지.
군홧발 힘이 얼마나 쎘으면 한국에서는 학사 위에 석사, 석사 위에 박사, 박사 위에 육사가 있다고 울분을 터뜨리며 군대와 그 조직 자체를 증오했었지.
그러한 숨막히는 상황속에서 김근태 의원이 당시 의장으로서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해서 전두환 정권에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도전한 것이었어.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의 구성원은 그 당시 주로학생운동 출신으로 출신 대학별로 조직 형태를 띄었고 직장인들이 다수였고 전문직인 사람들도 많았었지.
서동만 현 국정원 기조실장은 당시 유네스코에 근무하며 북한문제와 국제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뤘고 국제정세분석에 탁월했지. 한겨레 신문의 강태호 기자는 북한문제 분석에 발군이었어. 그 당시 식견이 부족한 나로서는 국제분과위에 있으면서 두 선배에게서 엄청나게 많이 배웠지.
소설가 김영현씨는 아마도 기관지인 "민주화의 길" 편집위원이었던 것 같아.
이 양반의 데뷔작인 "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한국문학상 수상작)"에 보면 자신의 활동과 관련된 부분들이 조금씩 보이고 ,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한 친구의 정신병 발작이 나오는데 이것은 실제적인 사건이었어.
반공개 반합법 조직인 민청련을 필두로하여 서울 노동운동연합(약칭 서노련 의장 김문수 현 한나라당의원), 인천사회운동 연합, 인천 노동운동연합 등 줄을 이으며 조직되며 나아가서는 이들 조직을 아우르며 민주화운동의 연대를 목표로 고 문익환 목사를 의장으로 하는 민통련 (민주화운동 통일연합) 이라는 소위 상위 단체도 조직되게 되지. 이와 아울러 학생운동도 이념적 분화가 더욱 가속화 되고 급진화하게 되었던 것 같아.
이러한 과정에서 김근태 의장과 민청련을 군사정권이 가만히 둘리없었고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의 핵이었던 문용식(현 나우콤 사장) 그룹의 팸플릿 사건을 서울대 내 좌경그룹 조직 사건으로 발표하고, 유인물속의 민주주의 민족론을 민청련의 이론진이었던 상임위원장 이을호씨(김영현 소설속의 바로 그분)와 연계시키고 이를 확대하여 김근태 의장을 구속 시키게 되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김근태 의원이 당한 고문은 후일 김근태 의원이 정강이에 생긴 피딱지를 떼어서 부인 인재근씨에게 전해줘서 재판과정에서 고문의 증거로 제시되어 격렬한 법정투쟁이 전개되고 이는 국제문제로 이슈화 되었지.
김근태의원의 법정투쟁 그 자체가 전두환군사정권의 반인권 야만성을 폭로하는 국제적인 문제가 되고, 후일 이법정투쟁으로 고문반대에 대한 인권신장의 공로가 있다하여 케네디 재단이 수여하는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부인 인재근씨와 함께 공동 수상하게 되지. 하여간 김근태 의원은 이 후 민주화 운동세력의 상징성을 뚜렷이 지니게 되지.
내 개인사로 돌아가면, 별것도 아닌 유인물 사건에 연루되어 81년 대학 3년때 집시법 위반으로 1년형을 선고받고 영등포 구치소 4개월 나머지는 안동 교도소에서 합해서 1년을 꼬박 다 채우고 나왔어. 나는 학생운동에 대한 이해도 짧았고 솔직히 그 당시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잽혀간거였어. 하여간 그 안에서 장래에 대한 불안감과 가족에 대한 송구함 기타등등으로 많은 번민을 거듭했고, 유일하게 남는것은
일생일대에 가장 많은 책을 읽었다는 것이었지. 네루가 말한대로 감방이 나의 진정한 대학이었던 셈이지.
그 당시 영등포 구치소에는 당시에는 몰랐지만 철학과 선배 한분이 레닌의 "무엇을 할것인가"라는 일본어 번역본을 운동권에 배포한 혐의로 가슴에 빨간 딱지를 달고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잽혀 와 있었다.
내 옆방에는 사기 15범짜리 죄수 한분 그분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얼마나 닮았던지, 그 건넛방에는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잽혀온 항공대 애가 하나 있었다. 그 무슨 야학 연대 사건이라나 왜 이리 빨간 딱지들이 많지 하며 의아해 했고 솔직히 그들을 경계심을 가지고 대했다.
그런데 그 빨간 딱지의 선배 애인이 사법고시에 붙어 사법연수원에 다닌다는 게 아닌가. 그것도 면회를 자주 온다는게 입소문을 타며 구치소 전체로 번졌다.
참 대단한 여자일쎄 하면서도 어울리지 않은 한쌍이라구만 생각했었어. 구치소측이 꽤나 신경이 쓰이겟다 싶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여자가 지금의 강금실 법무장관이었지.
내가 첫방에서 둘째방으로 전방을 가니 옆방 아래층방이 집시법 위반 학생들로 득시걸 거렸어. 지금도 생각난다. 내가 전방간 방이 평론가 김명인(황해평론 대표) 씨 방이었고 그 방에 새겨진 자구하나 " 침잠하라 의연하라."- 반어적으로 읽으면 그를 들뜨게하고 의연하게 하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을까라고 궁금해 한적이 있었어.
20년후에 그 양반을 만났을 때 불쑥 그 질문을 던지고 싶었었지. 그 양반이 쓴 팸플릿 속에 레닌의 글이 인용되고 온 세상이 발칵 뒤집혔었거던. 그게 또 조직 사건으로 확대되어 서울대 무림 사건으로 공표되었었지. 강금실씨 빨간딱지 애인은 그 당시 그 배후로 되고- 김태경 74 미학과 선배로 이론과 실천 발행인으로 자본론을 출판했다 나중에 또 옥살이 살고 그 때 강금실씨 변론 이야기도 세간에 유명하지. 이 분은 굉장히 학구적인 분인데 책과 연관된 사건으로 고초를 많이 겪으셧지.
80년 서울의 봄 안개 정국때 사실 당시 이들이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서울역 앞에서 회군하는 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계엄군과 충돌은 피했지만, 12,12 세력이 손쉽게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내리고 정권을 전면 인수하게 되었었지.
내 생각에 적어도 서울역 앞에모인 10만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강력히 저항하였다면 역사는 또다른 길을 걸었으리라 믿어. 적어도 전두환 노태우라는 군사정권의 쌍생아가 우리 역사를 오염시키지는 않았으리라 또한 광주의 유혈극도 없었으리라.
생각해보라 서울 도심지 한복판에서 계엄군을 동원하여 발포하였다면 그 정권은 그것으로 끝이었겠지.두고두고 이 회군결정에 대한 비판이 이들을 괴롭히지. 결정적인 시기에 싸움을 회피하고 후퇴해버렸으니--
이 후 벌어진 광주 민중항쟁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역사가 기록하고 있지.
개인사로 되돌아 와서 안동교도소에선 이해찬의원과 성균관대생 한명 나 이 세사람만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독거 수감되었었어.
성균관대생은 곧 출감하고 나만 이해찬의원만 남았는데, 가끔 책을 서로 바꿔 보기도 했지 소지를 통해서. 그 양반말이 나의 독서 경향이 너무 철학적인데 치우친것 같으므로 사회과학서를 더 읽도록하라며 현대경제사 한권을 주더구먼.
지금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채광석시인의 "밧줄을 타며"라는 평론집과 물물교환한거였지. 채시인이 이해찬의원의 가까운 선배였으므로 개인적 관심으로 그랬겠지. 운동시간에는 이의원의 테니스라켓을 빌려 벽치기도하면서 잽싸게 통방도하고-- 안동교도소 소장은 후일 이해찬의원이 대신 써준 논문으로 고과를 잘받아 영전했다나 어쨌다나.
하여간 그는 일제시절 일본경찰서 사환으로 시작하여 그만큼 자리가 올라왓다고 교도관들이 쑤근덕 거렸지만 우리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대우를 잘해준거였어. 아무래도 대신 써준 논문의 음덕이었겠지만.
82년 8월 출감하고 나서 한동안 대구에서 답답하게 지내고 있는 차에 삼덕성당 출신의 친구하나가 술도 자주사고 정치현실 대해 공분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이 친구가 그간 수도사로 잠깐 활동한 왜관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산하 분도 출판사의 미디어 담당이었던 독일 신부님이셧던 임신부님을 소개시켜주었어.
나중에 알았지만 이분이 광주항쟁당시의 유혈 장면이 담긴 필름을 독일매체의 기자에게 넘겨서 광주항쟁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고 하더만.
사람 좋은 임신부님과 편집장이셨던 정박사님으로부터 이런저런 대화와 함께 책도 많이 받았었는데, 임신부님 말씀중 기억나는 한토막은 김지하 시인의 말은 한국말을 잘하는 자신도 너무 어려워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당시 김지하 시인이 아시아 아프리카의 제3세계의 저항 시인에게주는 로터스상을 수상한데 대해 말하며 그랫던것 같다. 정박사님이 준 "그리스도 이전의 예수" 라는 책은 두고두고 내가 대학 진학 후 접어둔 신앙문제를 건드리고 한편으로 카톨릭 사회운동의 근거에 대한 하나의 확고한 입장을 지니게 해주었다.
당시 많은 나의 동료들은 그 이후 노동운동의 대열 속에 뛰어들게 되는데 나는 여전히 낭만적인 운동관과 소시민적 정서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빈약한 사회과학 공부때문이거나 나자신의 준비부족이 그렇게 만들엇으리라.
82년말 능력 개발 출판사에 임시직 제안이 들어와 편집일도 보며 서울 생활을 재출발하였다. 7-80년대를 통하여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갈 곳이 없다보니 생업을 위해 사회과학 출판사나 교육 교재용 출판사에 엄청나게 많이 진출했는데 그곳에는 한국 출판시장의 향후를 가르는 일군의 무리가 진출햇었다.
능력개발사에는 지금 웅진 닷컴의 사장인 김준희씨가 당시 과장으로 있었고 이을호 선배도 거기에 있었다.
83년말 능력개발사가 회사 전체가 팔려 갑자기 우리 그룹은 공중분해될 지경이었다. 하여 일부는 갓 태어난 웅진출판사로 나머지는 다른 선배들이 소개하는 회사로 흩어지게 되었다. 내 경우 이을호 선배가 이해찬 선배를 통하여 이철전의원이 만든 학생용 컴퓨터 잡지사에 취업하기로 내정되었다.
이해찬의원과 이철의원은 같은 사회학과 출신으로 이철 전의원은 유신시절 민청학련사건으로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웅진출판사에는 편집위원이었던 윤 구병 교수- 이분 대안 교육으로 유명하다-의 알선으로 소설가 김영현 선배(현재 실천문학사 대표)가 편집장으로 새로운 관점의 유아 아동 전집인 "어린이 마을"로 일대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 웅진 윤석금 회장이 당시 사장이었는 그의 뛰어난 판매술과 책 자체의 우수성으로 이 책은 웅진출판사 자체가 크게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그 당시 유아를 둔 웬간한 중산층은 한 질씩 다 보유한것으로 보였다.
이 책의 우수성은 당시 유아용 책에 만연한 사대주의 색채를 제거하고 주체적 관점에서 우리문화, 우리자연을 강조하며 유아에 대한 막연한 천사주의나 동심주의 색채도 없애려고 하였다. 그야말로 유아의 시각에 접근한 책이었던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에 있어서도 디즈니 아류의 것들을 없애고 독자성을 유지할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독자적인 일러스트레이션 역량은 그 후 현재의 한솔 교육으로도 이어진다.
한솔교육의 초기 한글나라 성공은 '일러스트레이션이 기여한 바가 크다. 한솔교육의 변재용 사장은 공대출신으로 독특한 이력을 가진 분이다. 수학용 학습지 개발 판매로 사업을 시작하다 노동운동에 투신하다 80년대말 유아용 출판교육시장에 뛰어들어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철전의원이 하는 출판사에서 짧게 있다가 나는 웅진출판사로 옮겨 중학생용 영어와 유아용 과학 도서 편집일을 맡아보았다.
87년 결혼과 더불어 모든 문제에 변화가 생겻다. 나는 더이상 출판사일에 매력을 못느끼고 공대선배이며 독일 Voith사의 한국법인 사장인 이래경씨(지금 이분 김근태의원 후원회장이다)를 찾아가 기계 오퍼일을 하게 되었다.
Voith사는 동력전달 장치(power transmission)에 독보적인 기술과 제품을 갖고 있어서 철도에 있어서 그 당시 막 도입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현재 새마을 열차전량, 무궁화 열차 전량 및 일부 화물 기관차의 트랜스미션은 이 회사가 공급한 것이다.
나는 산업기계용 어플리게이션을 맡아 정말 난생 처음으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어. 주로 중공업쪽 어플리케이션이 많아 제철소 압연공장 , 시멘트 공장, 제지 공장, 중장비 회사, 특장차 트랜스미션 관련, 자동차 트랜스미션 관련, 조선소, 회전기기 관련 그 모든것, 하여간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한국의 공장을 거의 모두 안돌아 다닌곳이 없었어 12년간 했으니.
인천 찍고 서울 훑고, 대전 공장없어 건너 뛰고, 울산 뺑글 돌고, 창원 대가리 박고, 포항에 쳐바르고, 부산에 막판 올인하고 그랬어. 심지어 오산 미군 뱅장도 출입하고 그랬어.
생각나는군 흑인 싸전트 한명이 내 영어가 독일식 영어 같다고. 맨날 독일넘하고 전화질하고 팩스 갈기고 이멜 때리다 보니 글케 되었겠지. 나가 젤로 못알아 듣겟는게 니네 깜상들 주절 되는거여 했어.
실제로 깜상들 주절되면 잘 들어야 혀.
하여간 12년간의 기계영업을 통해 한국의 경제의 강점과 약점 무엇이 우리를 부하게하며 빈하게하고, 무엇이 우리를 정신적으로 타락시키며 무엇이 우리를 숭고하게하는가에 대한 철저한 학습을 한셈이지.
나의 세계관은 갈고 다듬어졌으니 전과 다르나 그 다름이 또한 이질적인 것은 아님이라. 단순하고 기계적인 사고에서 훨씬 현실적인 감을 가진 그러한 것이 된것이라 믿고 싶어.
2000년 들어 벤처인큐베이팅하다 풀빵나는 스토리는 이미 과거가 되었고, 이제 나는 새로운 기로에 선 것이다.
2년간 헤매다 결정한 교육사업으로 대전환하기로 결심한겨 이 과정에서 나의 서울 81학번 동아리 후배들의 지원과 격려가 결정적이엇다.
사십대중반 이 나이에 어쩌면 또다른 시도가 인생의 고로중에 또한 고로일 수 있겠지만, 영원히 젊은 가슴과 불타는 열정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노래를 불러본다.
새파랗게 젊다는게 한 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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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후퇴하며 FIN을 띄운다)
필자는 2003년 12월부터 대구에서 초등 영재 사고력 중심인 시매쓰 수학학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시대는 나와 가튼데 길은 다른길을 걸었군--- 나는 주로 노동운동과 93년 이후 사회생활, 지금 생각하니 딱 반반 씩이구만 15년 15년 앞으로 15년은 어떨까?
형님도 나의 20년 한 번 올려봐주셔여. 조재성 선배님이 관심을 보여주셔서리 팔림을 무릅쓰고 ㅎㅎ ... 이 인생 저 인생 서로 나누면 좋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