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 / 신현정 나는 염소 간 데를 모르네 / 신현정 빙점 氷點 / 신현정 하산 下山 / 신현정 염소와 풀밭 / 신현정 눈사람은 눈을 먹고 산다 / 신현정 도깨비바늘 / 신현정 어느 여름 / 신현정 개똥 / 신현정 어딜 가시는가 / 신현정 역광逆光 / 신현정 염소에게 / 신현정 바다의 구도 / 신현정 일진 / 신현정 나목 / 신현정 강아지풀 / 신현정 오리 한 줄 / 신현정 고로쇠나무가 있는 곳 / 신현정 하나님 놀다 가세요 / 신현정 싸움 / 신현정
파문 / 신현정
연잎 위의 이슬이
이웃 마실 가듯 한가로이 물 속으로 굴러내리지만
여기 평화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지금 한 개 굴러내리면서
아, 수면에 고요히 눈을 뜬 동그라미가 연못을 꽉 차게
돌아나가더니만
이 안에 들어와 짐을 자던 하늘이며 나무며 산이
건곤일척 乾坤一擲, 일거에 일어서서 그 커다란 몸을 추스른다
새들, 도도히 날아간다
시집 <자전거 도둑> 2005년 애지
나는 염소 간 데를 모르네 / 신현정
연두가 눈을 콕콕 찌르는
아지랑이 아롱아롱 하는 이 들판에 와서
무어 할 거 없나 하고 장난기가 슬그머니 발동하는 것이어서
옳다, 나는 누가 말목에 매어 놓고 간 염소를
줄을 있는데로 풀어주다가
아예 모가지를 벗겨 주었다네
염소 가네
어디로인가 가네
나는 모르네
어디서 음메에가 들리네
하늘 언저리가 뿔 쬐그맣게 달고 가는 흰구름이 저거 몀소 맞을 거네
나는 모르네
이 봄, 팔짝 뛰고 뒤로 나자빠질 봄이네
정말 모르네
빙점 氷點 / 신현정
첫, 겨울
냇강을 오르내리며 살던 붕어가 세상이 어디인가 하고
아주 쬐끔 입질해 물을 열어보았던 것인데
그만 닫는 걸 잊고 가버린 거기에서 부터
온 천지가 물 얼다
하산 下山 / 신현정
산에 오를 때 지나친 벼랑을
내려오면서 보게 된다
까마득히 내려다뵈는 벼랑 어디쯤
파란 솔 한 그루 몸을 틀었다
알겠다
그 아래부터는 죄다 세상이다
염소와 풀밭 / 신현정
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발을 넣고 깨끗한 입을 넣고 몸을 넣고
줄에 매여 멀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염소가 발을 넣고 뿔을 넣고 그리는 원을 따라
원을 그리는 하늘도 안쪽은 그의 것
그 안쪽을 지나가는 가슴 큰 구름이며, 새들이며
뜯어먹어도 또 자라는 풀은 그의 것, 그러하냐.
눈사람은 눈을 먹고 산다 / 신현정
눈사람이 섰다
눈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까
아마 눈을 먹고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내리는 눈을 먹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눈이 그만 내리고 눈 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까
눈사람은 제 몸뚱이를 먹고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그럴지 모른다
긴긴 겨울은 그렇게 오고 갔으며 그리고 봄이 왔다
도깨비바늘 / 신현정
한낮, 외진 길가 풀섶에
바람부는 대로 흔들리며
그림자도 없이 서 있는 도깨비바늘에는
도깨비가 살면서
이제나 저제나 언제나 세상에 나가볼까 하고는
거길 지나치는 하 세월의 것들에게
무심만 옷이나 한 벌 지어 입으라고
바늘을 꽂고 있으렷다
어느 여름 / 신현정
자벌레들이 녹음을 와삭와삭 베어먹는
나무 밑에 비맞듯 서다
옷 젖도록 서다
이대로 서서 뼈가 보이도록 투명해지고 싶다
개똥 / 신현정
쇠사슬을 풀어주자 쏜살같이 뛰어나간다
급하기도 하여라 그러나 개는 똥눌 자리를 찾아
한동안을 쩔쩔 매다가
비로서 엉덩이를 좌정하고는 똥을 눈다
하, 똥봐라
똥에는 하루 종일 쇠사슬에 묶여 물고 띁고 흔들고집어 넣은 이빨자국이
요만치 없다
그렇게 물고 뜯고 했는데도
전쟁의 상흔이란 요만치 없다
오히려 화해의 승리의 질퍼난 냄새가 생짜로 오르는 똥이다
그래도 개는 무엇이 못미더운지 제가 눈 똥을
코로 몇번이고 킁킁거리다가 간다
아 마침 하늘은 파랗고
나, 그냥 저 똥에 경배하고 싶어진다
시집 <자전거 도둑> 2005년 애지
어딜 가시는가 / 신현정
달팽이는 언제 집을 내려놓는가 언제까지 이고지고 하는가 어딜 가시는가 이젠 그만 집을 땅에 내려놓으시지 않겠는가 짐을 땅에 내려놓고 아예 집을 땅에 붙여버리고 꽃나무나 오두막 한 채, 그런 것처럼 등불을 켰다 껐다 하다가보면 누가 아시는가, 혼자서 켜졌다, 꺼졌다, 바람 부는 한세월 거저 먹게 될는지 어딜 끝도 없이 가시는가
역광逆光 / 신현정
해가 어깨 너머에 있는 해질 무렵 마누라가 빨래 좀 걷어오라고 해서 마당에 긴 줄 해서 널어놓은 빨래 걷다가 쪼그리고 앉아 담배 피운다 고추잠자리 날아온다 바지랑대 끝에 고추잠자리 앉을락말락 한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등 뒤에 무엇이 남실대는지 안다 역광으로 피우는 담배 그 참 맛있다.
염소에게 / 신현정
염소야, 네가 두 뿔로 풀을 열심히 밀고 당기며 뜯어 먹은 흙이 붉은 자리 너를 붙들어 맨 말목이 박힌 거기, 흙이 붉은 자리 말목도 필경은 거기서 썩을 흙이 붉은 자리 흙이 흙을 토해내고 다시 풀이 돋고 별이 돋고 햇빛도 돋고 비도 돋고 서리도 돋는 흙이 붉은 자리 네가 똥도 누운 흙이 붉은 자리 거기가 바로 네가 조용히 네 다리를 꿇고 쉴 곳이다. 염소야 너는 구름 파랗게 피는 먼 하늘만 보고 있구나.
바다의 구도 / 신현정
해변가에서 바다를 뒤로 한껏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 한 장 찰칵, 목이 수평선에 걸려져 있다 지금이라도 목은 캑캑거리며 갈매기를 토해낼 것 같다 아니지 아니지 수평선은 거기다 놓는 것이 아니지 발목 쪽에 놓아야 하지 그래야 바다가 확 트이지 그래여 그래야 바다가 확 달려오지
일진 / 신현정
오늘따라 나팔꽃이 줄지어 핀 마당 수돗가에 수건을 걸치고 나와 이 닦고 목안 저 속까지 양치질을 하고서 늘 하던대로 물 한 대야 받아놓고 세수를 했던 것인데 그만 모가지를 올려 씻다가 하늘 저 켠까지 보고 말았다 이때 담장을 튕겨져나온 보라빛 나팔꽃 한 개가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다 볼 뻔하였다
나목 / 신현정
사실, 입성만큼은 때맞춰 복을 받은
나무는 그 외에도 비나 눈이 오면 비옷, 눈옷,
노을 뜨면 노을옷 다 입어보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옷은 거추장스러운 모양, 남의 옷은 물론
제 옷마저 훌훌 벗어버리고
텅 빈 하늘에 부끄럼없이 다 보이고
우뚝 서있는 것이다
시집 - 염소와 풀밭 (2003년 문학수첩)
강아지풀 / 신현정
손바다에 강아지풀을 올려 놓고 본다
강아지들이 기어간다
팔에다도 올려놓아 본다
기어간다
나는 간지럽다
강아지풀은 달아나려 한다
나는 마냥 간지럽다
강아지풀을 엄지와 검지로 살며시 집어올려서는
내 생의 한복판에 내려놓아 본다
강아지풀은 달아 나려 한다
요오놈의 강아지풀
그래그래,내 생의 끝까지에도 기어가리라
나, 죽어서도 간지럽게
현대시학 , 2004년 3월호
오리 한 줄 / 신현정
저수지 보러 간다
오리들이 줄을 지어 간다
저 줄에 말단末端이라도 좋은 것이다
꽁무니에 바짝 붙어가고 싶은 것이다
한 줄이 된다
누군가 망가뜨릴 수 없는 한 줄이 된다
싱그러운 한 줄이 된다
그저 따라만 가면 된다
뒤뚱뒤뚱 하면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급기야는 꽥꽥되고 싶은 것이다
오리 한 줄 일제히 꽥꽥꽥.
시집 <자전거 도둑> 2005년 애지
고로쇠나무가 있는 곳 / 신현정
고로쇠나무 좋구나
하늘은 파랗구나 좋구나
새들은 부리를 꼬부리고 마시고 가고 좋구나
오소리들은 젖꼭지 쭉쭉 빨고 가고 좋구나
방아깨비 사마귀는 핥고 가고 좋구나
고로쇠나무 좋구나
우리 인간은 물통을 놓아두고 가고 좋구나
하늘은 오만(傲慢)한 대로 좋구나
웹진 <문장>에서
하나님 놀다 가세요 / 신현정
하나님 거기서 화 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오늘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들판은 파랑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
염소들의 살랑살랑 나부끼는 거룩한 수염이랑
살랑살랑 나부끼는 뿔이랑
옷 하얗게 입고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
애지 (2005년 봄호)
싸움 / 신현정
불두화가 피었다기에 보러 간다
부처님 머리송아리 같은 불두화가 피었다기에 보러 간다
정말 불두화가 환하게 피었다
그리고 불두화 아래 두꺼비가 꼼짝 않고 있는 것을 보았다
금방 부풀어오를 것 같았다
독을 오글도글 끓일 것 같았다
팽창할 것 같았다
서너길은 펄쩍 뛰어오를 것 같았다
나는 거길 빨리 지나쳤다
저건 순전히 불두화와 두꺼비와의 싸움에 다름아닐 것이다
오늘만은 난, 그 둘을 다 안본 것으로 한다.
시안 (2005년. 봄호)
신현정 시인
1948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1974년 월간문학예 시부문 당선.『그믐밤의 수』 시집 『대립』『염소와 풀밭』 『자전거 도둑 』2005년 애지 제4회 한국시문학상 수상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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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둑 / 신현정 외면外面 / 신현정 신생(新生) / 신현정 소금쟁이 / 신현정 일체감 / 신현정 천천히 천천히 / 신현정
담에 빗자루 기대며 / 신현정
자전거 도둑 / 신현정
봄밤이 무르익다
누군가의 자전거가 세워져있다
복사꽃과 달빛을 누비며 달리고 싶은 거다
자전거에 냉큼 올라가서는 핸들을 모으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은빛 페달을 신나게 밟아보는 거다
꽃나무를 사이사이 빠지며
달 모퉁이에서 핸들을 냅다 꺾기도 하면서
그리고 불현듯 급정거도 해보는 거다
공회전하다
자전거에 올라탄 채 공회전하다
뒷바퀴에 복사꽃잎 하르르 날리며
달빛 자르르 깔려들며
자르르 하르르
외면外面 / 신현정
연잎 위에 개구리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있다
연잎 위에 올라앉은 개구리
어쩌면 저렇게 꼼짝 않고 있는 개구리 그게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바람 불어 연잎 날리고
급기야는 개구리 첨벙하고 못 속으로 뛰어들 것 같아서
아 못이 한순간에 뒤집어질 것 같아서
가부좌란 저런 동작 이 세상 것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얼른 연잎 위에 개구리 애써 외면하며
하늘 본다 흰구름아 어디 가느냐.
리토피아 <2005년 여름호>
신생(新生) / 신현정
마누라와 그거 하다가
아예 나 들어가고 싶어라
자궁 속에
우리 마누라 나 술 먹는 거 때문에 고생하는 우리 마누라
이 세상에 엄마 하나 더 삼고 싶어라
양수에 싸여 있고 싶어라
눈 없고 입 없고 그냥 커다란 무개골로 있으면서
양수 먹으면서
딸꾹질하면서
발가락 꼼지락거리면서
한 열 달 웅크리고 있다가
그만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내 발로 걸어나오고 싶어라
웹진 <문장>에서
소금쟁이 / 신현정
수련 핀 연못가에 고요히 앉아본다
난 처음에 검불이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줄 알았다
소금쟁이들이다
소금쟁이들이 이따금 물방울 듣는 파문 위를
긴 다리로 왔다갔다 하면서
파문을 놀고 있다
그걸 보자니
아 다리 한 쪽 빠지지 않고 살아온 내 지난(至難)한 삶이
감사하기만 했다
시집 <자전거 도둑> 2005년 애지
일체감 / 신현정
눈이 내리면서 먼저 내리면서
뒤에 내리면서
먼저 내리는 눈이
뒤에 내리는 눈을 사뿐히 받아주기도 하면서
먼저 내리는 눈이 뒤에 내리는 눈을
무동을 태워 세상구경도 시켜주어가면서
먼저 내리면서 뒤에 내리면서 마음을 포개면서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덮으면서
한 이불 속을 만드누나.
적설 積雪 / 신현정
흰 눈도 쌓이다 보면 그 속이 캄캄하다
흰눈도 무너질 땐 그 속이 캄캄하다
문득 노송이 팔뚝 하나를 주어 버린다
시집 - 염소와 풀밭 (2003년 문학수첩)
천천히 천천히 / 신현정
땅이 오래 참고
아픈 배 갈라 지상에 내놓은 굼벵이건만
굼벵이 그래야만 하는 듯
나무 둥치를 천천히 기어 오른다
나무에 물오르듯이
천천히, 천천히,
나무 자라는 것마저 훤히 보일 정도로
천천히, 천천히, 너무 천천히.
시집 - 염소와 풀밭 (2003년 문학수첩)
담에 빗자루 기대며 / 신현정
이 빗자루 손에 잡아보는 거 얼마 만이냐 여기 땅집으로 이사 와 마당을 쓸고 또 쓸고 한다 얼마 만이냐 땅에 숨은 분홍 쓸어보는 거 얼마 만이냐 마당에 물 한 대야 확 뿌려보는 거 얼마 만이냐 땅 놀래켜 보는 거 얼마 만이냐 어제 쓴 마당, 오늘 또 쓸고 한다 새벽같이 나와 쓸 거 없는데 또 쓸고 한다 마당 쓸고 나서 빗자루를 담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놓는다 빗자루야 그래라 네가 오늘부터 우리집 도깨비하여라.
사랑이여 조금만 사랑이여.....양희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