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전통시조보존회 원문보기 글쓴이: 운현
1. 태조왕의 고토회복 운동과 대국으로 성장하는 고구려
(서기 47~165년, 재위기간 : 서기 53년 11월~146년 12월, 93년 1개월)
모본왕을 축출한 고구려 조정은 나이 어린 태조를 옹립하여 고조선의 옛 영역을 회복하는 데 주력한다. 이 같은 정책으로 고구려는 요서를 완전히 장악하는 한편 산동반도 너머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여 후한(동한)과 함께 명실 공히 대륙의 맹주로 부상한다. 이 때부터 고구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종주국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태조는 유리명왕의 여섯 째 아들인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며, 부여 출신의 태후 해씨 소생이다. 서기 47년에 태어났으며, 아명은 어수, 이름은 궁(宮)이다. 서기 53년 11월에 두로에 의해 모본왕이 살해되자 7살의 어린 나이로 고구려 제6대 왕에 올랐다.
『후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궁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열어 능히 세상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후 소년으로 성장하면서 그 용맹함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후한 사람들은 고구려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태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불과 7살의 어린아이였으므로 그의 모후 해씨가 수렴청정 하였다(『삼국사기』는 재사의 아내이자 태조의 어머니인 그녀에 대해 단지 부여 여자라고만 언급하고 있으나, 유리명왕 당시 고구려가 부여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인 사실을 감안할 때 그녀는 부여 왕실녀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녀의 성을 부여 왕족 성인 해씨로 기록한다).
태후 해씨는 과감하고 강단 있는 여자였던 모양이다. 그녀가 수렴청정 할 당시 고구려는 국방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고조선의 고토회복에 매진한다. 서기 55년 2월에는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아 동한의 침략에 대비했으며, 이듬해인 서기 56년 7월에는 동옥저를 멸하여 동쪽 국경을 창해(현재의 동해)까지 확대하였다.
이 같은 해태후의 정책을 이어 받은 태조는 서기 68년에 갈사와의 손자 도두를 항복시킴으로써 갈사부여를 병합하였으며, 4년 뒤인 서기 72년에는 관나부 패자 달가에게 군사를 내주어 조나를 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또 서기 74년에는 환자부 패자 설유에게 군사를 내주어 주나를 치고 그 왕자를 을음을 사로잡아 고초가로 삼았다.
이렇게 고구려의 세력이 크게 팽창하자 부여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하였고, 위기감을 느낀 동한은 고구려에 대해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할 조짐을 보인다. 이에 고구려 조정은 고조선의 고토회복을 선언하고, 서기 105년에 한의 요동을 선제공격하여 6개 현을 정복하였다. 고구려의 선제공격에 당황한 동한은 급히 군사를 파견하여 요동 태수 경기로 하여금 고구려군을 대적하게 하였다.
동한과 고구려의 싸움은 한의 요동에서 한동안 지속되었고, 고구려는 동한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산동반도 쪽으로 진출하여 동해군을 점령하고 화북평원 쪽으로 세력을 넓혀나갔다.
이 무렵에 동한은 심한 내분을 겪고 있었다. 전국 각처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 대부분의 지역이 전란에 휩싸였다. 서기 107년부터 시작된 농민봉기는 이후 80년간 100여 차례 계속되었고, 결국 184년에는 황건군의 대봉기로 발전한다. 이 같은 내분과 더불어 외척세력이 강해져 조정을 장악한ㄴ 한편, 이를 저지하기 위해 왕이 환관과 결탁함으로써 환관세력의 횡포도 극에 달하게 된다.
이에 반해 고구려의 조정은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7살에 왕위에 오른 태조는 93년이 넘게 왕위에 머물며 지속적으로 고조선의 고토회복에 주력하였고, 그 결과 영토를 크게 확대하는 한편 동한의 세력을 능가하는 대륙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서기 101년에는 예맥과 함께 현도를 공격하였고, 서기 118년에 다시 현도로 진출하여 화려성을 무너뜨렸다. 이에 동한은 서기 121년에 유주 자사 풍환, 현도 태수 요광, 요동 태수 채풍 등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태조의 아우 수성의 맹활약으로 동한군 2천여 명이 죽고, 채풍 등의 군사는 퇴각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한 조정은 광양과 어양, 우북평, 탁군속국 등에서 병력을 결집하여 고구려에 대항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이처럼 동한군을 패퇴시킨 고구려는 그해 4월에 북방이 선비군 8천과 연합하여 동한의 요대현을 공격하였다. 이에 요동 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항했으나 신차에서 전사하였다. 이 때 채풍을 호위하던 공조 경모와 공조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 등은 몸으로 채풍을 엄호하다가 함께 몰살하였고, 그들과 함께 죽은 관리들이 1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 여세를 몰아 고구려는 지속적으로 현도를 공략하였다. 그해 12월에 마한과 예맥의 기병 1만여 명을 동원하여 현도성을 포위하여 현도 수복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 때 부여 왕이 아들 위구태에게 군사 2만을 내주어 고구려군의 후미를 치는 바람에 현도 수복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듬해인 서기 122년에 고구려는 다시 한 번 예맥과 마한군을 이끌고 동한의 요동을 공략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부여군이 동한을 돕는 바람에 숙원사업인 현도 수복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고구려는 비록 현도 수복에는 실패했지만 고토회복 전쟁을 통하여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우선 고구려의 요서 지역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동한의 세력을 위축시켰으며, 거기서 더 나아가서 동한의 요동 지역 일부를 점유했을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는 산동반도와 화북평야 일대를 차지하였다. 또한 북방의 선비와 연합세력을 구축함으로써 부여와 동한의 통교로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고구려의 이 같은 영토확장은 단순히 땅이 넓어졌다는 사실을 넘어서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당시 고구려이의 주무대인 요동 지역은 가뭄과 메뚜기 떼, 우박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광활한 화북대평원에 진출함으로써 노토가 넓어져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될 수 있었다. 또한 발해연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동해(황해)의 일부를 차지함으로써 어업을 토한 안정도 꾀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구려의 압박이 가속화되고 있었지만 동한은 내분을 겪고 있던 탓에 줄곧 수비태세만 취해야 했고, 급기야는 부여에 원군을 청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런데 그 무렵 고구려의 태조가 병으로 드러눕자 전쟁은 일시 중단된다. 고구려가 전쟁을 중단하자 태조가 죽을 것으로 판단한 동한은 그 기회를 노려 침략을 계획한다. 하지만 화친파의 주자에 밀려 침략 계획을 취소하고 화친을 제의하기 위해 고구려 조정에 조문사절단을 보낸다.
이 때의 상황을『후한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해에 궁(태조)이 죽고 아들 수성이 즉위하였다(수성은 아들이 아니라 태조의 동생임). 요광(현도 태수)이 글을 올려 상중인 것을 기회로 병사를 일으켜 그를 치고자 한다 하였더니, 논의하던 모든 신하가 허락함이 옳다고 여겼다. 상서 진충이 이르기를 ‘궁이 전에 교활하여 요광이 능히 토벌하지 못하였는데, 죽고 나서 치면 의로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마땅히 사신을 파견하여 조문하고 이전의 죄를 질책하여 꾸짖은 후 사면하여, 더 이상 책망하지 않음으로써 뒷날의 화친을 기약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기에 안제가 그대로 좇았다.”
『후한서』의 기록은 비록 동한측에서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으나 실상은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고구려에 화친을 제의하면서 동한은 고구려에 잡혀간 포로들을 송환해줄 것을 요구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이후로는 현이 관리와 싸우지 말 것이며, 스스로 친근함으로 함께 하며 살아 있는 자들을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 환속 값으로 사람마다 (비단) 48필을 주고, 어린아이는 그 반으로 하겠습니다.”
서기 122년에 동한의 안제 유고의 이름으로 보낸 이 화친 조건은 가히 굴욕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동한은 고구려와 화의조약을 해야만 했다.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농민봉기가 계속되고, 궁궐에서는 외척과 환관들의 싸움으로 피비린내가 가실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때 고구려 조정은 태조의 동생 수성이 왕위를 탐내는 바람에 파벌싸움에 휘말린다. 태조가 노환으로 누운 후부터 권력은 수성에 집중되었는데, 세월이 흘러도 태조가 죽지 않자 수성은 왕위를 찬탈할 마음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수성에게 왕위 찬탈을 부추긴 사람은 관나부 우태 미유와 환나부 우태 어지류, 비류나 조의 양신 등이었다. 그들은 은밀히 수성을 찾아가 왕위를 차지할 것을 말했고, 수성은 처음엔 받아들이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왕위에 욕심을 내었다.
수성이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좌보 목두루 등은 스스로 병을 핑계로 벼슬을 내놓고 조정에서 떠나버렸다. 또한 수성의 아우 백고는 왕위를 찬탈하지 말 것을 간곡하게 당부했지만 수성은 찬탈의 뜻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수성은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역모 계획을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는 태조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조는 좀체 죽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덧 태조의 나이는 백 살에 가까워졌고, 수성의 나이도 일흔을 훌쩍 넘겨버렸다.
그러자 수성은 모반을 계획하게 되었고, 그런 상황에서 동한이 화의조약을 어기고 현도에 둔전육부를 설치하여 고구려를 압박했다. 태조는 서기 146년 8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한나라 요동 서안평을 공략하여 대방 현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와 아들을 붙잡아온다.
이 때문에 조정이 급박하게 돌아가 기회를 엿보고 있던 수성은 모반 계획을 실해에 옮기려 한다. 이에 우보 고복장이 태조에게 수성의 역모 계획을 고변한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조정과 군권은 거의 수성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조로서도 손쓸 틈이 없었다. 그래서 별수 없이 수성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태조는 상왕으로 물러앉는다.
그 후 태조는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년 후인 서기 165년 3월에 11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묘호를 ‘태조(太祖)’라고 하였다.
2. 태조왕의 가족들
태조왕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왕후에게서 막근과 막덕 두 아들을 두었다. 하지만 왕후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언급을 생략하고, 막근과 막덕의 삶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막근태자(?~서기 148년)
막근태자는 태조왕의 맏아들로 태조왕의 왕후 소생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전하지 않으나 성장한 뒤에는 숙부인 수성대군과 알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왕은 서기 121년에 병상에 누우면서 아우 수성대군에게 정사를 맡긴다. 이 때부터 조정의 권력은 수성에게 집중되었고, 그는 마침내 왕위를 찬탈할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25년 후인 서기 146년에 태조왕을 위협하여 왕위를 빼앗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렇듯 수성이 불법으로 왕위에 오르자, 신하들 사이에서 수성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를 미리 포착한 수성은 147년 3월에 태조왕의 근신인 재상 고복장을 먼저 제거한 후, 이듬해인 148년 4월에 태조왕의 맏아들 막근태자를 살해한다. 이로써 태자 막근은 비운의 인생을 마감한다.
막덕왕자(?~148년)
막덕왕자는 태조왕의 차남이며 태조왕의 왕후 소생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고, 서기 148년 왕위를 찬탈한 수서에 의해서 친형 막근태자가 살해되자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라 판단하여 스스로 목메어 자결하였다.
3. ‘태조’라는 묘호에 담긴 역사적 의미
한국과 중국 및 일본 역사를 통틀어 ‘태조’라는 묘호를 처음 사용한 국가는 고구려이다. 흔히 ‘태조’라는 칭호는 국가를 세운 사람에게 붙이는 묘호인데, 어째서 고구려 제6대에 처음으로 붙이게 되었을까? 이것은 단순히 ‘큰 할아버지’ 또는 ‘큰 조상’이라는 뜻이었을까?
왕의 묘호에 ‘조(祖)’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서한 시대부터이다. 서한을 세운 유방의 묘호를 ‘고조(高祖)’라고 한 것이 그 시작이다. 그 이전에는 ‘제(帝)’ 또는 ‘왕(王)’을 사용했는데, 중국 대륙을 통일한 ‘시황’이 처음으로 ‘황’을 사용했다. 하지만 황 역시 ‘제’의 범주 속에 들어간다.
이렇듯 묘호에 ‘조’를 붙인 예는 서한의 ‘고조’의 경우가 처음이며, 그 같은 칭호를 남긴 최초의 기록은 사마담과 사마천 부자에 의해 만들어진『사기(史記)』이다. 하지만 서한 시대에도 고조 이외의 모든 왕들이 묘호에 ‘제’를 사용하였다. 물론 동한은 서한을 잇는다는 이미에서 ‘고조’라는 묘호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동한 이후 삼국시대에는 모든 왕의 묘호에 ‘제’를 사용하였고, ‘조’를 사용한 예는 없다. 그 후 양진시대나, 남북조, 수나라 때까지도 ‘조’가 사용된 예는 없다. 그러다가 당(唐)나라에 와서 다시금 ‘조’를 사용하였으며, 이 때부터 묘호에는 ‘조’와 ‘종’의 개념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 때 당을 세운 ‘이연’에게는 ‘고조’라는 묘호를 붙인다. 말하자면 ‘태조’라는 묘호는 이때까지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국 역사에 ‘태조’라는 묘호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5대 시기이다. 그러나 5대 시기에 와서도 ‘고조’와 ‘태조’가 혼재되어 있다.
5대 중에 후량과 후주는 건국자를 ‘태조’라 칭했고, 후진과 후한은 ‘고조’라 칭했으며, 후당은 당을 잇는다는 이미에서 이 두 묘호를 피했다. 따라서 중국의 역사에서 건국자를 ‘태조’라고만 칭하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 때부터이다. 송, 원, 명, 청 등은 건국자를 모두 ‘태조’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 역사에서 ‘태조’라는 칭호를 사용한 시기는 고구려에 비해 한참 뒤의 일이다. 5대 시기가 907년에 시작되는 사실을 감안할 때 고구려는 그 보다 약 700년 앞서서 ‘태조’라는 묘호를 사용한 것이다. 때문에 ‘태조’라는 묘호의 기원은 고구려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태조’라는 묘호는 나라를 세운 사람에게 붙이는 묘호이다. 하지만 이 칭호를 처음 사용한 고구려인들은 제6대 왕에게 그 묘호를 올렸다. 다시 말해서 ‘태조’라는 묘호가 처음 사용될 당시에는 반드시 ‘나라를 세운 사람’에게만 붙이는 칭호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태조’라는 묘호가 후대에 가서 나라를 세운 사람에게만 붙이는 묘호가 된 것으로 봐서 이 묘호는 결코 일반적인 묘호가 아니다. 이 묘호에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고구려의 제6대 왕은 고구려인들에게 단순히 제6대 임금이라는 사실 이외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시조가 동명성왕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제6대 왕에게 올린 ‘태조’라는 묘호는 결코 ‘나라를 처음으로 연 임금’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태조 다음의 제7대를 차(次)대왕, 그리고 제8대를 신(新)대왕이라고 붙인 것을 볼 때 태조는 결코 단순히 ‘큰 할아버지’ 또는 ‘큰 조상’이라는 뜻만은 아니다. 이것은 흔히 알고 있듯이 ‘나라를 처음으로 연 사람’에 준하는 호칭인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은 왜 하필 제6대 왕에게 처음 왕에게나 붙일 법한 ‘태조’라는 묘호를 올린 것일까?
이는 태조의 업적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태조 때 고구려는 대대적인 고토회복운동을 벌여 고조선의 고토를 거의 회복했다. 또한 이 때 고구려는 동한과 숱한 전쟁을 벌여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는 한편 산동 지역 아래쪽에까지 세력을 뻗쳐 대륙의 맹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같은 국력의 강성으로 고구려는 종주국의 면모를 갖추었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한서』에서 태조를 “태어날 때부터 눈을 열어 세상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고 표현한 것도 바로 태조 때부터 이렇게 고구려가 강성해진 사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태조’라는 묘호는 고구려가 주변국에서 종주국으로 변모한 사실을 담고 있는 칭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고구려의 세력으로 봐서 스스로 종주국을 칭한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나라도 그것에 대해 시비를 걸지 못할 상황이었다. 때문에 고구려인들이 제6대 임금의 묘호를 ‘태조’라고 붙인 것은 그가 고구려를 재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고구려가 종주국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장수왕 68년 4월의 기사에 “남제 태조 소도성이 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삼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남제 태조는 고제를 일컫는다. 남제의 고제 소도성은 남제를 건국한 인물인데, 고구려에서 그에게 태조라는 칭호를 붙이고 있다. 이는 남제의 소도성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태조라고 불렀음을 의미한다. 즉, 고구려가 제6대 왕에게 태조라는 칭호를 붙인 이래 350여 년이 지난 다음에 남제에서 다시금 태조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이다. 그것도 나라를 세운 인물에게 붙인 칭호였다.
이 같은 사실은 고구려의 태조 이후에 ‘태조’라는 묘호는 나라를 세운 인물에게 붙이는 칭호로 굳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고구려의 제6대 임금 태조가 고구려를 종주국으로 발전시킨 임금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고구려에서는 황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태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황제에 대한 고구려 식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태왕이 황제와 동격이라는 것은 고구려에 복속된 지역의 우두머리를 왕이라고 부르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황룡국 왕, 동해국 왕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광개토왕릉비문에 ‘영락’이라는 연호가 나타나는 것도 태조라는 묘호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태조 이후 고구려는 국제사회에서 종주국의 위치를 확보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기에 제19대 임금인 광개토왕도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 사용이 가능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영락’이라는 것은 연호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단지 광개토왕 대에만 연호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고구려의 국력은 광개토왕 때에만 극대화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 이상 그 같은 주장을 하지 못할 것이다. 고구려는 태조 대에 힘이 막강해져 국제사회에서 종주국의 지위를 확보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이래 꾸준히 그 상황을 이어갔던 것이다.
4. 동한을 상대로 한 고구려의 고토회복전쟁
태조는 고(古)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동한과 많은 전쟁을 치른다. 고토회복의 일차적 목표는 현도군을 수복하는 일이었다. 현도군은 서한의 무제가 설치한 4군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곳으로, 태조 당대에는 이미 임둔과 진번은 폐지되고 낙랑은 현도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현도의 수복은 고조선의 고토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현도 수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우선 태조는 서기 55년에 요서 지역에 10개의 성을 쌓았으며, 전쟁 수행 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서기 56년에는 동옥저를 쳐서 멸망시킨다. 그리고 서기 68년에 현도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던 갈사국을 복속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서기 72년에는 조나, 서기 74년에는 주나를 쳐서 현도 수복의 전초 기지를 마련한다.
이처럼 발해만을 따라 남쪽으로 세력을 뻗치던 고구려는 동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해군을 이용하여 점차적으로 산동반도까지 진출하여 자치국으로 남아 있던 연안의 소국들을 차례차례 복속한다. 그리고 서기 105년에 고구려는 동한을 상대로 고토회복전쟁에 돌입한다. 요서 지역에 10개의 성을 쌓은 후 무려 50년간 치밀하게 전쟁에 대비한 후 드디어 숙원사업인 고토회복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동한 왕실은 외척 세력과 근왕 세력이 치열한 정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서기 88년에 왕위에 오른 화제 유조는 외척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근위세력을 형서하고 있었고, 그 근위세력의 중심엔 환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 동한 왕조는 외척과 환관 사이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정권 다툼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고구려가 고토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한의 요동을 공략한 서기 105년엔 화제 유조가 병으로 누워 동한 조정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흑 속에 갇혀 있었다. 왕의 건재는 곧 환관의 건재를 의미했으며, 왕권의 약화는 외척의 득세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회제가 병으로 눕자 근위세력의 힘은 급격히 쇠퇴하고, 외척이 득세하여 동한 조정은 환관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고구려 조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기 105년 1월에 한나라 요동에 군사를 보내 6개 현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한의 요동 태수 경기가 이끄는 군사가 몰려오자 고구려군은 일단 퇴각했다가 그해 9월에 또 다시 한나라 요동을 쳤다. 이에 경기가 다시금 군사를 동원하였고, 고구려군은 또 다시 퇴각하였다. 이처럼 치고 빠지는 전략을 통하여 동한의 군사를 요동 지역에 집결시킨 고구려군은 수군을 동원하여 산동반도 일원이 연안 지역을 공략한다.
이렇게 고구려가 동해(당시에는 산동반도 아래쪽 바다를 일컬었다. 산동반도 위쪽은 발해라고 불렀다.)연안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 왕실은 쉴 새 없이 정권 다툼을 벌여 서기 106년에는 화제 유조가 죽고 상제 유륭이 즉위했다가, 다시 그 해에 유륭이 물러나고 안제 유고가 즉위하였다. 당시 유고는 십대의 어린 왕이었는데, 그 때문에 외척이 득세하였다. 하지만 유고는 성장한 후에 환관들을 중심으로 근위세력을 형성하여 외척들과 대적하게 된다.
유고의 즉위 초년에는 조정이 외척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에 동한 조정은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전쟁을 수행할 만큼 왕권이 강화되지 못한 까닭에 고구려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고구려 역시 오랜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한 만큼 동한과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와 동한 사이에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들었다.
그런데 서기 111년 고구려는 다시 동한 조정의 문란을 틈타 고토수복의 깃발을 든다. 이 무렵 동한 조정은 안제 유고가 근위세력을 형성하여 외척에 대항하는 바람에 정권 다툼에 휩싸여 있었고, 고구려는 그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동한 조정에 사절단을 파견한다. 사절단 파견 명목은 현도와 가까운 요서 지역의 군현을 한에 예속시키겠다는 제의를 하기 위함이었다. 이 같은 파격적인 제의를 받은 동한 조정은 기꺼이 고구려 사절단을 맞아들였고, 고구려는 사절단을 통해 동한 조정의 혼란상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한 조정이 정권 다툼으로 혼란을 겪고 있다는 확신을 얻은 고구려는 그해 3월에 예맥의 군사를 동원하여 현도를 습격하였다(하지만 이 때의 상황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아마 이 때 고구려는 현도를 급습하여 동한의 전투 능력을 시험해 보고자 했던 것 같다). 그 후 서기 118년 6월에는 다시금 예맥과 함께 현도를 공략하여 화려성을 장악하였다. 이에 동한 조정은 3년 뒤인 서기 121년에 유주 자사 풍환과 현도 태수 요광, 요동 태수 채풍 등에게 대군을 내주어 고구려 변경 지역에 침입하였다. 그러자 고구려는 태조의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대적하게 하였다.
이 때 수성이 이끌던 군사는 겨우 2천이었다. 이를 얕본 한군은 고구려군을 향해 밀려들었고, 고구려군은 한군을 변방 깊숙이 끌어들였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한군은 협곡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지형에 익숙하지 못했던 그들은 수성의 군사가 겨우 2천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만 생각하고 겁 없이 덤벼들다 고구려군이 쳐놓은 함정에 갇히고 말았다. 몇 만의 한나라 군사가 겨우 2천 명의 고구려 군사에 의해 길목을 차단당한 채 꼼짝없이 협곡에 갇혀버린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군은 선제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한군의 수가 너무 많아 섣불리 공격을 감행했다간 오히려 패배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협곡 위에서 길목을 차단한 채 적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한군은 고구려군의 동태를 살피며 시간을 끌었다.
이렇게 한의 대군이 협곡에 갇혀 있는 동안 고구려는 군사 3천을 동원하여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였다. 이미 주력 부대가 빠져나간 현도와 요동은 순식간에 고구려군에게 점령되었고, 이 과정에서 동한은 3천여 명의 병력을 잃었다.
요동과 현도가 고구려에 의해 정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한 조정은 부랴부랴 대응책을 모색하였다. 동한 조정은 우선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등지의 군사를 모아 3천여 기병을 형성한 다음 요동과 현도로 보냈다. 그러나 그들 기병이 현도와 요동에 도착했을 땐 고구려군은 이미 철수한 뒤였다. 고구려군은 현도와 요동의 성곽을 불사른 다음 퇴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3개월 뒤인 그해 4월에 고구려군은 선비의 군사 8천을 포함한 대군으로 현도와 한의 요동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붕괴된 성곽을 채 수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또 다시 고구려 대군의 공격을 받은 요동군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고, 요동 태수 채풍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군사들을 수습하며 응전하려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순식간에 고구려군에 의해 포위된 채풍은 남은 군사 1백여 명과 신창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이 때 공조연(관직명) 용단과 병마연 공손포 등은 몸으로 채풍을 호위하다가 죽고, 채풍 역시 최후를 맞이하였다.
패풍의 죽음으로 한나라 요동 지역을 습권한 고구려구는 그해 12월에 다시 마한과 예맥의 기병 1만을 비롯한 대군을 거느리고 현도를 공략하여 현도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현도성의 함락을 눈앞에 두었을 때 동한 조정의 원군 요청을 받은 부여군이 고구려군의 후미를 치는 바람에 현도 수복은 실패하고 말았다.
동한 조정의 원군 요청을 받은 부여 왕은 왕자 위구태에게 군사 2만을 주어 고구려군의 후미를 치게 했고, 이에 당황한 고구려군은 별수 없이 퇴각해야만 했다.
현도 수복을 눈앞에 두고 물러나야 했던 고구려군은 이듬해 가을에 다시금 마한과 예맥군을 포함한 대군을 이끌고 한의 요동과 현도를 급습하였다. 고구려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한군은 황하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에 고구려군은 여세를 몰아 황하를 건너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때에도 부여군이 후미를 치는 바람에 고구려군은 퇴각해야만 했다.
그 후 고구려는 한동안 현도와 요동을 공략하지 못했다. 태조가 노환으로 병석에 눕고, 설상가상으로 태조의 아우 수성이 왕위를 넘보고 정변을 일으켜 조정을 정권 다툼의 장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고토회복의 열기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던 것이다.
5. 태조왕 시대의 주변 국가들
동옥저(東沃沮)
동옥저는 태조 4년(서기 56년)에 고구려에 보속된 국가이다. 옥저는 원래 북옥저, 동옥저, 남옥저가 있었는데, 북옥저는 이미 동명성왕 10년(서기전 28년)에 멸망했고, 남옥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세 개의 옥저에 대한 기록은『삼국지』‘동이전’에 처음으로 언급되고,『후한서』‘동이전 동옥저’ 편에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으며, 동으로 큰 바다를 끼고 있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그리고 남쪽은 예맥과 접해 있다. 그 땅은 동서가 좁으며, 남북이 길어서 꺾으면 사방 1천리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볼 때 동옥저는 현재의 함경산맥 동쪽에 해당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쪽으로는 동해, 서쪽으로는 함경산맥, 남쪽으로는 함흥, 북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물론 개마대산을 현재 개마고원이 있는 함경산맥에 비정할 경우이다.
『후한서』‘동옥저’ 편에는 또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를 현도군으로 삼았다. 후에 이맥의 침략을 받게 되자 현도군을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기고, 다시 옥저를 현으로 삼아 낙랑의 동부도위에 예속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한나라 무제가 설치한 4군 중 현도를 함경도 일대에 비정하는 학설이 생겨났는데, 이는 다소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현도군이 마음대로 옮겨 다닌 점도 문제가 있거니와 태조 대에 고구려가 현도군을 공략하는 내용을 통해서도 처음이 현도군이 함경도 일대에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문제가 된『후한서』의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현도군에 편입시킨 옥저현이 동옥저가 아니라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무제가 조선을 멸한 후 옥저를 현도군으로 삼았다.’는 기사 뒤에 북옥저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데 거기서 엉뚱하게도 다음과 같은 남옥저에 대한 언급이 있다.
“또한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라 하며, 남옥저에서 8백여 리 떨어져 있다.”
이 기록 이전에 그 어느 곳에도 남옥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런데 부옥저를 설명하면서 갑자기 ‘남옥저에서 8백여 리 떨어져 있다’고 한 것은 이해 못 할 일이다. 기록의 순서대로라면 의당 북옥저는 ‘동옥저에서 8백여 리 덜어져 있다’고 해야 옳다. 그런데 왜 앞에서 서술한 동옥저를 언급하지 않고 남옥저를 언급했을까?
이 의문은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현도군을 설치했다는 옥저는 동옥저가 아니라는 설정을 가능케 한다. 원래 사료는 북옥저를 언급하기 전에 남옥저를 언급했는데『삼국지』의 편찬자는 남옥저에 대한 기록을 동옥저 편에 슬쩍 끼워 넣은 듯하다. 즉『삼국지』의 편찬자는 현도군의 위치를 동옥저 지역에 두기 위해 남옥저에 대한 기사를 의도적으로 동옥저 기사 바로 다음에 붙였다는 뜻이다.『삼국지』의 편찬자는 이를 통해 한나라의 영역을 확대하고, 고구려 지역 전체가 과거 한나라 땅이었다는 주장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추론은 무제가 현도군을 설치했던 옥저는 동옥저가 아니라 남옥저였다는 주장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남옥저는 한반도의 동해 연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의 동해, 즉 발해 내지는 황해 연안에 있던 나라였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남옥저를 발해 연안에 설정했을 때 흑룡강 이북에 있는 북옥저와 8백여 리 떨어져 있다는 기록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현재 일부 사가들의 주장대로 남옥저와 동옥저가 같은 곳을 일컫고, 또한 동옥저와 북옥저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면 북옥저는 ‘남옥저에서 8백여 리 떨어져 있다’는『삼국지』와『후한서』의 기록을 전면 부인하는 꼴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의 설정대로 북옥저가 흑룡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면(「동명성왕실록」‘고구려 민족의 형성과 동명성왕 시대의 주변 국가들’의 북옥저 편 참조) 중국의 사서들은 반드시 남옥저를 기준으로 북옥저를 설명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 고서들은 한결같이 북방에 있는 나라의 위치를 설명할 때 최북단에 위치한 현도군을 기준으로 언급하기 때문이다. ‘옥저의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다’는『후한서』의 기록을 염두에 둔다면 현도군은 곧 남옥저이고, 남옥저는 현도군의 일부로서 발해 연안에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남옥저의 위치를 파악하고 나면 동옥저가 단 한 번도 중국 세력에 의해 정복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옥저는 고조선 말기에 형성되어 고구려 태조 대까지 유지되다가 서기 56년에 비로소 멸망했던 것이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남옥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옥저에 대한 언급 없이는 현도군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할 수 없고, 현도군에 대한 정확한 설명 없이는 우리의 삼국 역사를 정확하게 밝힐 수 없다. 따라서 남옥저에 대한 언급은 매우 중요하다. 동옥저에 대한 설명에 남옥저에 대한 기록을 곁들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조나(藻那)와 주나(朱那)
고구려는 서기 72년에 조나를 정복하고, 서기 74년에 다시 주나를 굴복시킨다. 당시 조나와 주나는 모두 왕이 다스리는 독립된 국가였다. 하지만 아주 작은 나라였던 모양이다.『삼국지』나『후한서』의 지리지에 그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삼국사기』의 지리지에도 없다.
그렇다면 이 두 나라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당시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대해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가 조나와 주나를 정복하기 전에 갈사국을 점령한 사실은 매우 중요한 단초이다. 갈사국은 바닷가에 있는 국가로, 한때 해두(海頭), 즉 ‘바닷머리’로 불린 것으로 봐서 반도에 위치한 국가이다.
발해 만에는 대표적으로 산동반도와 요동반도가 있고, 작은 반도로는 황하강 하류의 덕주가 있다. 즉, 갈사국이 반도국이라면 그 위치가 이 세 지역으로 축소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태조 당시에 이미 요서 지역까지 고구려가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요동반도는 제외된다.
이 두 지역은 모두 고구려와 동한의 접경 지역에 있으므로 당시 고구려의 고토회복전쟁과도 관련을 가질 수 있다. 즉, 당시 고구려는 요서 지역에 10의 성을 쌓고, 고토회복을 위한 전초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갈사국을 복속하고, 연이어 조나와 주나를 병합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다고 했는데, 그 내용이『삼국사기』에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 때 축성된 10개의 성은 그 규모가 매우 컸을 것이다. 또한 10개의 큰 성이 들어섰던 요서 지역은 매우 넓어야만 한다. 대개 하나의 행정 단위에 큰 성이 한뿐인 점을 감안한다면 10개의 성이 들어섰던 요서 지역의 영역은 황하 하류, 즉 발해 만의 덕주까지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이 같은 대대적인 공사는 서기 55년에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13년 후인 서기 68년에 갈사국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말하자면 고구려의 영역은 한층 남쪽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뒤에 조나를 점령한다. 그리고 조나 점령 후 2년 만에 주나를 정복한다.
이는 조나가 갈사국의 남쪽이나 동한의 수도가 가까운 서쪽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갈사국의 서쪽 또는 남쪽에 있던 조나는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조나(那)를 다르게 조국(國)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고구려어로 ‘나(那)’는 곧 ‘국(國)’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때 비류국이었던 ‘다물도’가 ‘다물국’ 또는 ‘비류나’로 불린 사실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따라서 ‘조나’의 중국식 지명은 ‘조국’ 즉 조나라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나’는 독립된 국가이기보다는 어떤 나라에 복속된 국가를 가리켰다. 비류국이 고구려에 복속된 다음에는 비류나로 불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동한 당시 중국에는 조국, 주국, 제국, 노국 등의 명칭이 남아 있었는데, 이는 춘추 전국 시대 때 조(趙), 주(周), 제(薺), 노(魯)나라 등이 도읍으로 삼았던 지역에 붙여진 지명이거나 또는 그 나라들이 일어났던 지역에 붙여진 지며이었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는 왕족이나 공을 세운 제후, 또는 토호로 전락한 왕족의 후예들이 자치권을 행사하며 다스렸다. 그들은 봉건 제후이자 작은 나라의 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작은 나라들은 고구려 입장에서 보면 ‘국’이 아니라 ‘나’에 불과했다. 그래서 고구려인들은 조국ㆍ주국ㆍ제국ㆍ노국 등을 조나ㆍ주나ㆍ제나ㆍ노나 등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물론 한자상의 차이는 있지만 당시엔 대개 발음만 같고 한자는 다른 경우가 많았으므로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이 같은 추론이 맞는다면 조나는 조(趙)나라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지금의 한단에 설정될 수 있고, 주나는 주(周)나라의 발원지인 위수 중류의 섬서성 분양에 설정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고구려는 하북성 동쪽 지대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뜻이 된다. 이를 증명하듯 태조 대에 고구려와 동한의 주된 싸움터는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 내륙 지역에 한정된다. 말하자면 고구려가 동한을 공격할 당시에는 황하 이북의 해안 지역과 하북평원 일대는 고구려 영역이었다는 뜻이다(대무신왕 대에 이미 고구려군이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 대릉하와 황하 사이에 위치한 내륙의 요충지들을 점령한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도 좋은 것이다).
동해곡(東海谷)과 남해(南海)
태조 55년(서기 107년) 10월 기사에 “동해곡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쳤다. 꼬리가 아홉 자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사의 동해곡을 흔히 한반도의 동해 어딘가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태조 당시 동해라는 지명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현재 동해라고 부르고 있는 한반도 동쪽 바다는 당시에 ‘창해(滄海)’ 또는 ‘대해(大海)’라고 불리었다.
당시 사람들이 동해라고 부르던 바다는 현재 황해라고 부른 중국 동쪽 바다였다. 동한 시대 중국 사람들은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의 바다를 ‘발해(渤海)’라고 불렀고, 산동반도에서 상해까지를 ‘동해’라고 불렀으며, 상해 아래쪽 바다를 ‘남해’라고 불렀다. 발해는 현재도 ‘발해(渤海, 안개 낀 바다)’라고 부르며, 동해는 ‘황해(黃海)와 ‘동해’로 부르고 있고, 남해는 여전히 ‘남해’로 부른다. 다만 상해에서 복주(대만 앞바다)까지는 남해와 동해가 겹치는 부분이다.
따라서 태조 55년 10월 기사에 등장하는 동해곡은 산동반도에서 상해 사이에 있는 어떤 곳을 가리킨다. 이 지역에 ‘동해’라는 이름은 가진 곳은 단 한 곳 밖에 없었다. 당시 지명으로 동해군(현재 연운항)이 바로 그곳이다. 이 곳은 진나라 때에 처음으로 동해군으로 불리다가, 서한ㆍ동한 때도 역시 그 이름으로 불렸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동해국이 된다.
한나라의 행정구역은 주ㆍ군ㆍ현으로 구분되었고, 고구려의 행정구역은 천ㆍ곡ㆍ원 등으로 구분되었다. 때문에 한나라의 동해군은 고구려 측에선 동해곡이 되는 것이다. 또한 동해군을 동해곡으로 불렀다는 것은 고구려가 동해군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태조 62년 8월 기사에 “왕이 남해를 순행하였다.”고 했고, 같은 해 10월 기사에 “왕이 남해에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고구려가 당시의 남해, 즉 상해 아래쪽 지역까지 진출했음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한족과 선비족 등 내륙 지역 출신들은 해전에 약했다. 그들은 배를 잘 다룰 줄 몰랐고, 바다에 대해서도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이족은 상대적으로 해전에 강했다. 동이족은 원래부터 바닷가에 살았기 때문에 바다의 흐름에 능했고, 조선술도 발달되어 있었다. 이 같은 전통을 이은 고구려는 동한에 비해 수군이 강했을 것이고, 해전에도 능했을 것이다. 이는 서한과 동한의 수도가 진령산맥에 둘러싸인 내륙 지역인 데 비해 고구려의 수도는 발해에서 멀지 않은 요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이처럼 해전에 약했던 동한은 발해와 동해 연안 지역을 고구려에 내줄 수밖에 없었고, 태조가 남해를 순행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배경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태조가 남해를 순행한 기간은 자그마치 두 달이었다. 말하자면 남해는 고구려의 수도가 있던 요동에서 한 달 이상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는 뜻이다. 이는 곧 고구려의 남해가 결코 발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고구려는 뛰어난 해군력을 바탕으로 산동반도는 물론이고 양자강 아래쪽의 상해나 복주까지 진출해 있었던 것이다. 이는 태조 당시 고구려가 중국의 해안 지역을 거의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마한(馬韓)
「고구려본기」에 마한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태조 69년(서기 121년) 12월이다. 이 무렵 고구려는 한의 요동과 현도를 공략하기 위해 선비, 예맥, 마한 등의 군사를 동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현도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마한에 관련된 기사는 바로 고구려가 현도성을 포위하는 다음의 내용에 기록되어 있다.
“12월, 왕이 마한과 예맥의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이 때 부여 왕이 아들 위구태에게 2만의 병사를 주어 고구려군의 후미를 치는 바람에 현도성을 장악하는 데 실패한다. 그래서 이듬해 가을에 다시 요동을 공격한다. 이 때도 고구려는 마한의 병력을 동원한다.
이처럼 고구려가 동한을 공격할 당시에 마한이 언급되자『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 왕과 함께 군사행동을 하였다 하니, 멸망하였다가 다시 일어난 것인가?”
『삼국사기』편자들이 이 같은 의문을 던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백제본기」의 기록들 때문이다.
25년 봄 2월, 왕궁의 우물이 엄청나게 넘쳤다.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다.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점치는 자가 말했다.
“우물이 엄청나게 넘친 것은 대왕께서 융성할 징조이며, 하나의 머리에 몸이 둘인 소가 태어난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합병할 징조입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마침내 진한과 마한을 합병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26년 가을 7월, 왕이 말했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임금과 신하가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 국세가 오래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다른 나라가 이들을 합병해 버린다면 입술이 마르고 이가 떨리는 일이 될 터이니, 그 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차라리 남보다 빨리 빼앗아 후한을 없애는 것이 낫겠다.”
겨울 10월, 왕이 사냥을 간다고 하면서 군사를 출동시켜 마한을 기습하였다. 마침내 마한을 병합하였는데, 오직 원산과 금현 두 성만 굳게 수비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27년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였다. 그 곳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마침내 마한이 멸망하였다.
34년 겨울 10월,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직접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주근은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자르고 처자들도 죽였다.
이것이「백제본기」에 나오는 마한에 관한 모든 기사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마한이 온조 27년(서기 9년) 4월에 멸망했다고 말하고 있다. 때문에『삼국사기』의 편자들이 이미 112년 전에 망한 마한의 군사가 고구려와 함께 동한을 쳤다는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고구려가 동한을 칠 당시에 마한의 병력이 동원된 거만은 사실인 듯하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그 어느 기사에서도 마한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곧 마한이 백제에게 멸망당한 이후에 다시 일어나지는 못했다는 증거이다. 다만 마한은 백제에 의해 도성을 빼앗긴 이후 고구려에 투항하여 일부 영토를 할당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 같은 예는 당시의 역사 기록에서도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마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백제왕조실록』「제1대 온조왕실록」편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 태조왕 시대의 세계 약사
태조 시대 중국은 동한의 광무제가 죽고 명제, 장제, 화제, 상제, 안제, 소제, 순제, 충제, 질제 등 아홉 명의 왕이 교체되었다. 이들 중 광무제, 명제, 장제가 치리했던 60여 년간은 비교적 안정된 시기로 국가의 토대가 확립된다. 그러나 화제에서 질제에 이르기까지는 외척이 득세하여 왕권이 약화되고, 한편으로는 환관들이 근왕세력을 성장한다. 이 시기의 왕들은 즉위 당시 나이가 불과 3살에서 15살에 이르는 어린아이였다. 그 때문에 외척들이 권력을 장악하곤 했는데, 왕이 성장하면 환관들을 중심으로 근위세력을 형성하는 바람에 환관의 힘이 강해졌다. 이런 현상은 누차에 걸쳐 반복되어 외척과 환관들 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조정은 혼란되고, 곳곳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서도 역사가 반고는『한서』를 편찬하고, 학자 왕충은『논형』을 저술한다. 또한 장형은 ‘혼천설’의 체계를 세워 혼천의를 발명함으로써 과학문명의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한다.
한편, 이 무렵 서양은 로마의 크라우디우스가 아그리피나에게 독살되고, 서기 54년에 그의 아들 네로가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네로는 서기 59년에 자신의 친모 아그리피나를 죽이고, 다시 자신의 아내 오타비아를 죽인다. 또한 그는 서기 64년에 로마시를 불태우고,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베드로, 바울 등이 순교하였고, 유태인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기 68년에 로마에 내란이 일어나 폭군 네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네로 이후 로마에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등이 몇 개월 상간으로 왕위에 오르다가 티투스가 즉위함으로써 안정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가 죽자 네르바, 리야누스 등이 짧게 집권하다가 트라야누스에 이르러 다키아,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등을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안정을 되찾아 안토니누스 피우스에 이른다.
이 같은 정치적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더욱 가속화되고 기독교인들은『요한복음』을 비롯한『신약성서』를 완성해간다. 또한 이 시기에 역사가 타키투스는『게르메니아』,『연대기』등을 완성하고, 플루타르크는『영웅전』을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