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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메댁
새터 두희봉이 마누라 가사메댁은 울음소리 청승맞기로 으뜸이어요 남원 운봉 지리산 물소리 받아왔다지요 그 울음소리 옆에서는 절구통도 절구공이도 따라 울게 되어요 한규 할아버지의 꼬부랑 자당께서 그 좁쌀여우 뒷호강하더니 여든여섯에 세상 떠났는데 고씨네 사촌 육촌 팔촌 아낙 가운데 울음소리 하나 변변한 것 없어서 한규 할아버지 끌끌 혀를 찼지요 할 수 살 수 없이 가사메댁 보리 한 말 주고 사다가 울었어요 그 울음소리 그 사설 풀어나가는 울음소리 판소리 꼬부랑 자당 한평생을 산등성이 기어 오르다가 내려 오다가 갖은 양념 청승고개 다 떨어 엮어내려가는데 그 울음소리 판소리 큰 초상 난 집 마당 한번 오젓 짭짤하구나
가랑잎
우리가 감히 가랑잎 하나에도 아무런 가책 없겠는가 분단 권세야 야 이놈아 이제 그만 멎어버려라 산등성이 바람 친다 누이야 네가 있구나 몇천 년의 누이야
눈길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소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어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가을 병상(病床)
세월은 가는 것인가 가는 것인가 가는 사람도 오는 사람도 먼 산도 세월인가 누워 있는 나 또한 세월이란 말인가 한 모금 담배 연기에도 부끄러운 나의 병도 차라리 세월이건만
오늘 같은 날 나는 이렇게 누워 있을지라도 이 세상 저 세상은 다 충실하고 창 밖의 저 과실도 여물다 툭 떨어지겠다 그렇지만 여남은 나무 잎새 내 메마른 살 쓸듯이 빈 가지에 남아서 가을은 풍덩 깊구나
만일 내가 어린 아이라면 어이할 수 없는 어린 아이라면 아내여 그대 젖 고동소리 얼마나 그리워하다 잠들었을까 가을 수수밭 머리엔 아내만 갔다 지금 아내의 마음 동서남북 속에서 얼마나 추울까 아내를 내 곁에 태우고 밭에서 돌아오고 싶은데 내가 누워서 세월 농사니 달구지도 외롭겠구나 벌써 가을 땅거미 든다 나는 아내도 내 병도 사랑한다
오직 어서 돌아왔으면 돌아와 주었다면 그것 하나 내 귀언저리 소원이며 어디다 머나먼 켈트족의 말로라도 말하는 추운 곳에 나 혼자 사는 마음으로 세월이 내 아내인가 아아 아내조차도 세월인가 그렇겠구나 사랑도 세월인가
가을 상업(商業)
가을은 가면서 노인을 남긴다 그리고 노인의 죽음을 그 뒤에 남긴다 하나씩 둘씩
저문 참나무 숲에서 지는 잎들을 팔고 있다 그러나 사는 자 없다 어리석은 고독이로다
노인 한 개는 열까지 헤인다 지난날에 버린 것을 그리고 자기자신을
그리고 죽어간다 어리석도다
가을 편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간디 손자
나보다 한 살 아래였던가 위였던가 마하트마 간디의 손자 아룬 간디가 어린 시절 남아연방에 살 때였습니다
새 연필 사달라고 졸라댔는데 할아버지는 버린 몽당연필 찾아오게 하였습니다 할아버지 가라사대
이 연필은 나무를 잘라 만들었다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다 이 연필심은 땅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게 귀중한 것이니 쓸 때까지 다 써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말을 조용조용 해주며 새 연필은 한동안 사주지 않았습니다
그 아룬 간디가 뉴잉글랜드 콩고드에 와서 한국에는 가난한지라 여비 없어 가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허리에 핸드폰을 달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느릿느릿 물레를 돌렸고 손자의 시절은 여행 중에도 급한 일로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옛날과 오늘이 좀 다르게 되었습니다
갈매기
우리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육지다 육지다라고 네가 나타났으므로 우리는 소리쳤다 살아났다 우리는 보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을 보았다 너의 비상을 너의 아름다움을 난파선 널조각에 매달려서
강설(降雪)
廢墟에 눈 내린다. 敵도 同志도 함께 모이자. 함께 눈을 맞자. 눈 맞으며 껴안고 울자. 廢墟에 눈 내린다. 우리가 1950年代에 깨달은 것은 人山人海의 죽음이 아니라 사랑이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모든 죽은 사람들까지도 살아나서 함께 눈을 맞자. 눈 맞으며 울자. 우리는 분명 罪의 族屬이다. 눈을 맞자. 눈 맞으며 사랑하자.
강은 흘러도
가을 볕 한 줌 쥔 시린 손 속으로 어린 것을 재울까
자장 자장이라는 무한한 위안이여 너를 재울 때 내 몸도 함께 재운다
내 딸이라 하여 강가 나룻배로 실어가고 싶은 맑은 날의 도둑
아무리 강은 흘러도 나는 그냥 강과 남남으로 있을 뿐이다
강가에서 어린 것처럼 어린 게 어디 있을까
객혈(喀血) 1 아아 저물기 전에 노래하자 괴로움을 또한 첫눈을 노래하자
한 마리의 밤새가 되어 대낮 가득히 노래하자
2 아무리 바라보아도 어제의 하늘일 뿐 저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내 가슴에서는 눈 쌓인다
아아 저물기 전에 노래하자 혼자도 괴로우면 여럿이구나
3 아아 저물기 전에 노래하자 저물기 전에 노래하자 나는 누구한테도 사랑받을 수 없고 오직 눈먼 산 보며 사랑하였다 아아 첫눈이 내리므로 노래하고 쓰러지자
거름 내는 날
내 앞에서 자란 자식 벌써 코밑에 잔털 난 자식 쇳내 나는 이놈 데리고 경운기 함께 탄다 아랫뜸 지나 꽤나 먼 길 거름을 낸다 갓난이때 잘도 보채던 놈이 이제는 입이 굼떠 별반 성난 듯이 말도 없다 이놈하고 가다가 상묵이네 논 둔치에서 까딱 엎어질 뻔했다가도 용케 경운기 손잡이 잘 휘어 잡았다 추운 날도 느린 새는 느리게 난다 사뭇 점잖다 우리 짚뭇은 다 들여가고 다른 집 짚벼눌이 더러 논에 있다 올해는 객토 못하는 대신 여름내 만든 퇴비거름 맛있는 거름 논에 내니 논 좀 보아라 논이 헤헤 입 벌리고 좋아한다 남의 논들이야 너무 일직 방정떤다 할지 모르나 우리 논이 좋아하니 나도 내 자식도 함께 좋구나 하늘이야 높아서 소 닭 보듯 하고 다섯 번 거름 실어내면 한나절이 넘어서 거름냄새 퀴퀴 쩐 몸으로 비로소 내 자식 입을 연다 아버지 내년 절충못자리는 내가 할께요 어느덧 덧없구나 내 자식이 자식 아니다 나와 내 자식 이 들판에서 비로소 나란히 형제다 어서 가자 가서 술 한잔 주고받자
걸레 바람 부는 날 바람에 빨래 펄럭이는 날 나는 걸레가 되고 싶다 비굴하지 않게 걸레가 되고 싶구나 우리나라 오욕과 오염 그 얼마냐고 묻지 않겠다 오로지 걸레가 되어 단 한 군데라도 겸허하게 닦고 싶구나
걸레가 되어 내 감방 닦던 시절 그 시절 잊어버리지 말자
나는 걸레가 되고 싶구나 걸레가 되어 내 더러운 한평생 닦고 싶구나
닦은 뒤 더러운 걸레 몇 번이라도 몇 번이라도 못견디도록 헹구어지고 싶구나 새로운 나라 새로운 걸레로 태어나고 싶구나
겨울 달빛 무덤을 다 팠다. 여기서 겨울 달빛이 너무나 다하고 있다. 밤기러기 이래 하늘은 언제나 어둠의 회오리 바람으로 가득하다. 나는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다. 흰 綿地 두루마기 자락을 날리며 내가 壽衣의 긴 밤을 다녀올 곳이 어디인가. 사랑하는 이여 내가 절로 무덤을 파고 살아서 돌아간다. 그대 마을까지 가려면 이토록 팽팽한 추위로 밤을 지새이리라. 또한 내 籠藥 냄새의 송장 이마에는 몇 번이나 밤 거미줄이 휘날리다가 걸리리다.
때때로 선잠 깬 忌日의 자갈길은 지난 날 어허어허 내 상여소리에 이르고 바다는 저 달이 혼자 떠있지 않도록 朝天바다 사리때 고기들은 숨기고 있구나 슬프도다. 내가 살아 있는 기침소리를 내면 내 마음이 먼저 나와 길에 이어질 뿐이다.
사랑하는 이여 내가 무덤을 파고 살아서 돌아간다. 그대 마을 忘却의 漁油 등불을 꺼라. 밤은 모든 잠으로 죽음 노릇을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은 몇 번은 새 세상이 되리라. 오늘밤만 그대 자지 말고 기다려 달라. 저 언덕 두더지 들쥐들의 더운 피의 새벽까지 그대 슬픔 때문에 어이 잠이 오겠느냐.
무덤을 다 팠다. 여기서 겨울 달빛이 너무나 다하고 있다. 萬若 이 겨울이 봄 여름 다음을 그대로 다시 온다면 누가 키 큰 손님으로 고개를 찾겠느냐. 사랑하는 이여 내가 살아서 돌아간다. 그대는 흐르는 물처럼 의구하게 문에 열어라. 내 발이 海藻 밀린 자갈에 다쳐도 새벽까지는 다다르리라.
고아
파미르 고원을 아는가 무위의 산소 60프로 숨차 어디에도 나라가 없이 이제야 나는 고아가 되었다 불쌍한 희로애락 따위 너희들도 잘 가거라
- 문학동네 1997 가을
고향에 대하여 - 故鄕에 대하여 -
이미 우리에게는 태어난 곳이 고향이 아니다 자란 곳이 고향이 아니다 거기가 고향이 아니다 거기가 고향이 아니다 산과 들 온통 달려오는 우리 역사가 고향이다
그리하여 바람 찬 날 몸조차 휘나리는 날 우리가 쓰러질 곳 그곳이 고향이다 내 고향이다
아 창연한 날의 나의 노스탈쟈 모두 다 그 고향으로 가자 어머니가 기다린다 어머니인 역사가 기다린다 역사의 어떤 깃발이 손짓한다 그곳이 고향이다 가자
곡비
조선시대 양반 녀석들 딱한 것들 폼잡기로는 따를 자 없었다 그것들 우는 일조차 천한 일로 여겼것다 슬픔조차도 뒤에 감추고 에헴에헴 했것다 그래서 제 애비 죽은 마당에도 아이 아이 곡이나 한두 번 하는둥마는둥 하루내내 슬피 우는 건 그 대신 우는 노비였것다
오늘의 지배층 소위 오적 육적 칠적 역시 슬픔도 뭣도 모르고 살면서 분부를 내리것다 울음 따위는 개에게도 주지 말아라 그런 건 이른바 민중에게나 던져주어라 그 민중이나 울고불고 아이고 대고 할 일이다 그런 천박한 일 귀찮은 일은 내 알 바 아니야
하기야 슬픔이 본질적인 것이 되지 않을 때 울음이 말단이나 노동자에게만 머물 때 그런 것들이 다만 천박한 것으로만 보일 때 시인아 너야말로 그 민중과 함께 민중의 울음을 우는 천한 곡비이거라 곡비이거라 감옥의 무기수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내 인생을 노래해 주시오 그 말씀 잊어버릴 때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인이 아니다
공 던지기
방학 중의 딸과 함께 공 던지기를 했다 좀 세게 던져주면 튀는 공이 딸의 키를 넘어간다 딸의 공이 와서 튀면 내 키도 월떡 넘어 저만치 떨어졌다 깔깔깔 딸의 웃음이 물소리로 터져나왔다
나도 세게 던진 뒤 땀을 훑어내며 하늘을 보았다
웬일인지 비행운 하나도 없다 하늘이 누구누구의 소유가 아닌 것이 얼마나 아슬아슬히 다행인가
교상기도(橋上祈禱) 오래, 새벽을 거닐어 간다. 안개속에 나오는 다리위를.
잠든 한강(漢江)이 안개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안개처럼 여의도(汝矣島)로 사라져간다. 안개에는 많은 그림자가 들어 있나니, 내가 돌 하나로 던진다.
한 점의 물소리가 나면 이어서 모여드는 고요, 환도(還都) 후 누이가 이곳에서 빠진 소리였다. 세월이 씻기어 적어진 그 소리로야 아
더 흐르면 안남을 그 소리로야 비로소 이곳이었나 보다 졸음을 깨우는 누이의 울음이듯이, 새벽은 말하지 않는다.
드디어 와, 누이는 와서 내 앞에 비맞은 빛같이야 빛나게 그치어 있다. 옛 시절의 약속에 못견디우듯 우는 입술.
그러나 새벽이어 더 뚜렷이도 다가드는 내 누이의 낯선 모습을 아느냐.
오래, 안개에 새인 새벽 등불이 이제 보이면 누이는 또 가버리나, 안개 속에 눈감기는 어둠이 되나. 이제는 어느때인가
다리위에서야 다리 아래의 강위에 솟아 오는 깊음을 보는 내 소름으로 자는 바람은 일어나, 누이는 멀어져 간다.
잠든 한강(漢江)의 안개속에서 떠는 나의 눈은 얼마나 졸음을 새어왔느냐. 다리위에서 나는 이제 쓰러지며 나를 사로잡는 누이여 나의 기도를 너는 다 앗아간다. 새벽은 말하지 않느냐.
국도
지나 왔다. 아무도 만난 일이 없다. 이따금 형석(螢石)빛 습기(濕氣) 속으로 젖은 개똥벌레를 만나고 먼 바다에서 십이음(十二音)의 배들이 죽어서 불빛이 된다. 기다리는 것은 미지(未知)의 친척(親戚)들, 그러나 그들을 만난 일이 없다. 차라리 잠든 세상에서 잠들지 않은 절도가 된다. 이 밤 세 시(時)와 네 시(時) 사이를 마시던 술잔은 그대로 놓여 있는 주택(住宅)을 찾는다. 그리고 임자가 바뀔 개량종자(改良種子)의 밭들을 찾는다. 이제 나는 찾았다. 온갖 절교(絶交)의 정적(靜寂)을
그리고 지나왔다. 아무도 만난 일이 없다. 밤 네 시(時)의 국도(國道)에는 여름철의 말 끝들이 남아 있다. '까' '요' '다' '요'…… 어둠 속에서 의문부(疑問符)가 없어지고 전해진 뜻이 없어진 채 남아서 빛나고 있다. 지나왔다. 수레가 지나간 뒤, 말오줌 자국이 적셔진 곳을. 그리하여 가장 취할 진정제(鎭靜劑)를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주어서 던졌다. 어떤 뜻밖의 언덕에 가까스로 명중(命中)했느냐, 바다가 내 흉터를 모조리 빼앗아 갈 때, 아직 새벽은 멀고 말끝들이 남아 있다.
이윽고 바다가 죽은 어부(漁夫)들을 부른다. 새벽이다. '까' '요' '다' '요' 나는 지친 모자를 벗어 간조(干潮)의 머리카락을 뿌린다. 새벽 배는 비어 있을 뿐, 지나왔다. 배들이 죽었다. 나는 말끝처럼 하얗게 죽으리라.
귀성
고향길이야 순하디 순하게 굽어서 누가 그냥 끌러둔 말없는 광목띠와도 같지요 산천초목을 마구 뚫고 난 사차선 저쪽으로 요샛사람 지방도로 느린 버스로 가며 철들고 고속도로 달리며 저마다 급한 사람 되지요 고향길이야 이곳저곳 지나는 데마다 정들어 또 더러는 빈 논 한 배미에 밀리기도 하고 또 더러는 파릇파릇 겨울 배추 밭두렁을 비껴서 서로 오손도손 나눠 먹고 사양하기도 하며 굽이치지요 삼천리 강산 고생보다는 너무 작은 땅에서 오래도록 씨 뿌리고 거두는 대대의 겸허함이여 자투리 땅 한 조각이라도 크나큰 나라로 삼아 겨우 내 몸 하나 경운기길로 털털 감돌아 날 저물지요 어느새 땅거미는 어둑어둑 널리는데 이 나라에서 왜 내 고향만이 고향인가요 재 넘어가는 길에는 실바람 어느 설움에도 불현듯 어버이 계셔야 해요 그리운 내 동생들 달려오지요
그 할머니
몇해 전 겨울이었지요 앞산 골짜기에서 울음소리 훌쩍훌쩍 들렸습니다 다가가서 우는 할머니 달래었습니다 남의 집 식모살이라 울 데도 없어 여기 나와서 혼자 우는 것이었지요 바로 어제가 세상 떠난 그 양반 제삿날이라 메 한 사발 올리지 못하고 밤을 새워서 오늘 아침 울음으로나 잠깐 제사 지내는 것이지요 나야 별소리로 더 달랠 수 있다지만 우는 할머니 따라 내 설움으로 함께 울었습니다
금강산
금강산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금강산 1만 2천봉을 나도 모르게 너도 모르게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저 봉우리마다 수려한 얼굴들 저 골짜기마다 그윽이 마음 담겨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 아흐 헛디디어 저 아래 구름속으로 빠져버려도 차라리 좋아라 얼씨구 좋아라 그토록 금강산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그동안 갈라졌던 것 흩어졌던 것 모조리 작파하고 그동안 무지무지하게 아까운 나날들 허사로 보낸 세월들 훨훨 날려버리고 이제는 하늘의 선녀로 내려와 실한 나무꾼 만나 서로 익어가는 사랑의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금강산 아니어도 좋아라 삼천리 강산 어느 산이어도 좋아라 그 아침 산들을 그 저녁 산들을 이윽히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아 금강산 1만 2천봉.
(1998년 7월 14일 금강산을 떠나며)
긴 겨울에 이어지는 봄이 우리인 것을
우리나라 사람 여싯여싯 질겨서 지난 겨울 큰 추위에도 얼어죽지 않고 무사히 보냈습니다 그러나 삼한사온 없어진 그런 겨울 백 번만 살면 너도 나도 겨울처럼 산처럼 깊어지겠습니다 추위로 사람이 얼어죽기도 하지만 사람이 추위에 깊어집니다 우리나라 사람 좀더 깊어야 합니다 드디어 묘향산만큼 깊어야 합니다 장마 고생이 가뭄만 못하고 가난에는 겨울이 여름만 못한 것이 우리네 살림입니다 이 세상 한번도 속여본 적 없는 사람은 이미 깊은 사람입니다 그런 순량한 농부 하나 둘이 긴 겨울 지국총 소리 하나 없이 살다가 눈더미에 묻힌 마을에서 껌벅껌벅 눈뜨고 있습니다 깊은 사람은 하늘에 있지 않고 우리 농부입니다 아무리 이 나라 불난 집 도둑 잘되고 그 집 앞 버드나무 잘 자라도 남의 공적 가로채는 자 많을지라도 긴 겨울을 견디며 그 하루하루로 깊어서 봄이 옵니다 봄은 이윽고 긴 겨울에 이어지는 골짜기마다 우리의 것을 누가 모르랴 동네 어른이며 날짐승이며 봄이 왔다고 후닥닥 덕석 벗지 않는 외양깐 식구며 나뭇가지마다 힘껏 눈이 트는 봄이 이미 우리들의 얼굴에 오르는 환한 웃음입니다 깊은 겨울을 보낸 깊은 충만으로 우리들의 많은 할 일을 적실 빛나는 울음입니다
길
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 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다 그리하여 길을 만들며 간다 길이 있다 길이 있다 수많은 내일이 완벽하게 오고 있는 길이 있다
길 1
길을 보면 나에게 부랴부랴 갈 데가 있다 신영리나 내리 마음을 보면 나에게 저 마을을 지나서 갈 데가 있다 그렇도다 마정리 에움길 하나에도 장호원 이백리 길도 나에게 그냥 잠들지 못하게 한다 길을 보면 나는 불가피하게 힘이 솟는다 나는 가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말아라 저 끝에서 길이 나라가 된다 그 나라에 가야 한다 한평생의 추가령지구대 그 험한 길 오가는 겨레 속에 내가 살아 있다 남북 삼천리 모든 길 나는 가야 한다 기필코 하나인 나라에 이르는 길이 있다 나는 가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깽매기 소리
가을걷이 끝나고도 삼동네 풍장 칠 일 없어요 반장 고갑룡이는 제 집 뒷방에 둔 깽매기 징 장고들이 궁금해서 그것들 꺼내다 늘어놓고 먼지도 털어주고 잿물 찍어 쇠 닦아주기도 하다가 어디 한 번 소리 내봐라 하고 오래오래 소리 못낸 깽매기 냅다 쳐보니 그 소리 동네에 다 들려 아닌 밤중에 이 무슨 깽매기 소린가 도깨비 양반 장난인가 죽은 칠성이 혼백 돌아와 신명나는가 그렇지 젊어서 죽은 칠성이 깽매기 자진모리 한 번 눈 지그시 감고 신들렸지 얼쑤 어깨죽지 뛰놀았지 무논갈이 소 모가지 고단하듯 고단한 세월 신들렸지
꽃 봄이 왔다 해도 봄이 와서 갔다 해도 욧골이나 황골 산시골에는 꽃 하나 없네 그 흔해빠진 목련도 벚꽃도 없네
다행이야 남새밭에 노란 장다리꽃 있네 이 얼마나 넘치는 기쁨이냐 산모퉁이 돌자 아 거기에 산싸리꽃 무더기 피어 있네 그러고 보니 밭 묵은 데 눈꼽 같은 냉이꽃 자욱하게 피어 있네 암 피어 있네 피어 있네
우리 산시골 꽃 구경이야 이로써 족하구말구 꽃도 쓸 만한 건 다 뽑혀 갔네 서울로 서울로 이 나라 산천에서 뽑혀 갔네
어디 꽃뿐인가 여자뿐인가 면사무소 마당 큰 나무 몇 그루 그놈들도 88올림픽에 어디에 뽑혀 가려고 밑둥 돌려 놓았다네
봄이 와서 갔다 해도 허허 꽃 하나 없네 텔레비젼만 있네 텔레비젼만 있네
나는 몰라요
나는 몰라요 나는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고서 오로지 당신뿐
오늘 깨달아 아프기를 이 무지몽매 이것으로 하늘이 저리 푸르른가 드높이 솔개 멈춰
나무의 앞
보아라 사람의 뒷모습 신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저것이 신의 모습인가
나무 한 그루에도 저렇게 앞과 뒤 있다 반드시 햇빛 때문이 아니라 반드시 남쪽과 북쪽 때문이 아니라 그 앞모습으로 나무를 만나고 그 뒷모습으로 헤어져 나무 한 그루 그리워하노라면
말 한마디 못하는 나무일지라도 사랑한다는 말 들으면 바람에 잎새 더 흔들어대고 내년의 잎새
더욱 눈부시게 푸르러라 그리하여 이 세상의 여름 다하여 아무도 당해낼 수 없는 단풍 사람과 사람 사이 어떤 절교로도 아무도 끊어버릴 수 없는 단풍 거기 있어라
나의 추억
나는 세 살 때부터 늙었다 어떤 놈은 피리를 불고 다녔다 어떤 놈은 북을 쳤다
어떤 놈은 노래를 불렀다 노래하는 동안 밤 강물이 흘렀다
나는 열 살 때도 늙어버렸다 오두막에도 평화가 없는 시절 가을벌레들아 가을벌레들아 밤새도록 나는 네 동무였다
항상 젊은 영혼을 꿈꾸며 노예를 꿈꾸며
낙조
벗이여 나는 영웅을 원하지 않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영웅적인 세계 그것이네
지금 그 세계가 우리들의 손을 떠나서 이루어지고 있네
벗이여 이제는 술조차 필요치 않네
난초 앞에서
무지가 난초처럼 조용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무지는 반드시 행위로 나타난다
이윽고 오늘 아침 난초꽃이 피어났다 괜히 밖에서 백합꽃도 피었다 긴 장마 동안 아무런 꽃도 필 수 없다가
오 무지여 암흑의 행위여 가거라 이 꽃들에게 할 말이 없을 때가 얼마나 영광인가
낯선 곳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 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아기가 만들어낸 말의 새로움으로 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그리하여 할머니조차 새로움이 되는 곳 그 낯선 곳으로
떠나라 그대 온갖 추억과 사전을 버리고 빈주먹조차 버리고
떠나라 떠나는 것이야말로 그대의 재생을 뛰어넘어 최초의 탄생이다 떠나라
내 아내의 농업(農業) 이미 날이 저물었다. 시장기 든 해거름의 일꾼들이 돌아온다. 어떤 장님도 눈을 뜬다. 토끼풀밭에서 몰고 온 이웃집 황소는 긴 입 안이 가득하게 헛새김질을 한다. 제 주인의 잘못을 오래오래 걱정할 때도 있다. 靑果物 장에 짐에 부치고 온 내 晩婚의 처음, 아직 아내는 들에서 오지 않았다. 나는 美濃무우로 담은 깍두기와 찬 밥을 먹을 것이다. 기다렸다가 먹게 되면 더 걱정을 준다. 첫딸의 이름은 아내의 허리에 달아 두려 한다 러시아의 父稱을 넣지 않겠다. 이제 바다는 滿潮일 것이다.
아내의 수건 벗은 새벽 머리로부터 이 세계는 어두워 온다. 이윽고 그녀가 먼 들길을 건너올 때, 우리나라의 별똥이 그 위에 흐른다. 나는 아무런 뜻도 없도록 아내 所望에 내 所望을 더한다. 아내의 손발이 얼마나 텄을까. 오늘 장에서 神 같은 크리임을 사 왔다. 이제 내가 찾을 아내의 가슴은 이미 송구한 안방에 있다. 오직 입을 다물고 解産을 기다릴 뿐 아내의 農業은 어디로 떠날 수 없도록 喬木을 섬긴다. 미안하다. 저 멀리 未婚의 汽笛소리가 들린다. 이제 아내는 한쪽 귀를 떨며 작은 사립문을 연다. 그녀의 모습은 내가 끝없이 반기므로 보이지 않는다. 이제 바다는 滿潮일 것이다.
네 눈동자
바람 친다 네 눈동자에는 언제나 새 세상이 들어 있다 말없이 오늘 거짓없이 네 검은 눈동자에는 언제나 새 세상의 별이 빛나고 있다. 몇백억광년 동안 달려와서 이제야 이땅 위에 빛나고 있다 탄압이 우리를 다시 모이게 한다 네 눈동자는 더욱 빛난다 새 세상이다 새 세상이다 탄압이 우리를 새롭게 한다 어제의 이데올로기는 오늘의 이데올로기의 무덤이다 너뿐이 아니다 여기 모인 수많은 눈에도 하나하나 빛나고 있다 새 세상의 별이 빛나고 있다 긴 밤 새워 발 구르며 우리는 한덩어리다 네 눈동자에는 꼭 오고야 말 그 세상이 들어 있다 오 별보다 더 찬란한 네 눈동자여 탄압이 우리를 뭉치게 한다
누이에게
내 私生活 십여년 전까지는 허깨비 근친상간으로 흰 옷 입은 누이 흰 인조치마 누이 죽은 누이 어쩌구 어쩌구했으나 그건 새빨간 거짓말
오늘 아침 나는 펄펄 살아 있는 總天然色 누이를 찾아나선다.
누이야 누이야 누이야 앗 뜨거운 꼭두새벽 이 벌판을 細石平田 철쭉바다로 꽃 피어 소리질러라. 내 우렁찬 누이야
눈길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들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써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눈물 1 숲 가까이 혼자 가서 우는 소녀여 네 눈물은 강하다
네 눈물은 지금 악을 죽이고 있다
네 눈물 때문에 조국이 있다 세계 도처의 양심이 비에 젖으며 새로운 풍경으로 태어나고 있다 네 눈물 때문에
눈물 2
서(序)
아 그렇게도 따라가며 눈물 나니 한 줄기의 냇가를 더러는 디려다 보면 나와 거슬러 오르는 잔 고깃떼도 만나보리오 그저 뜨는 마름풀 잎새도 우연히도 되리오 내 늙으면 냇가에서 지난날도 다시 거슬러 오르며 눈물 난 마음 만나보리 그러면 나는 눈물나리
다시 오늘
어제를 반성하기보다 오늘을 반성해야 할 때가 있다 어제는 죽음일 따름 아 짐승들은 자유롭구나 반성 없는 그들의 하루하루와 함께 우리는 오늘을 반성해야 할 때가 있다
오늘 나는 무엇인가 나는 짐승보다도 못하구나 반성이 없는 것과 반성이 있는 것 사이 그 질곡의 배회에 맴도는 나는 무엇인가
벌써 아침해의 찬란한 빛은 낡아 얼어붙은 것을 다 녹이지 못하고 다시 얼기 시작하는 저녁이 저쪽에서 다가온다
그러나 나는 이런 오늘을 때려 죽이리라 나는 무엇인가 내가 몽둥이이기 전에 내가 벼락이기 전에 내일을 잉태한 몸으로 꽝 꽝 언 땅을 걸어간다 찬 별빛이 나로 하여금 반짝반짝 빛난다
아 그동안 오늘이 너무 컸다
대동강 앞에서 무엇하려 여기 왔는가 잠 못이룬 밤 지새우고 아침 대동강 강물은 어제였고 오늘이고 또 내일의 푸른 물결이리라 때가 이렇게 오고 있다. 변화의 때가 그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길로 오고 있다 변화야말로 진리이다
무엇하러 여기 강물 앞에 와 있는가 울음같이 떨리는 몸 하나로 서서 저 건너 동평양 문수릿벌을 바라본다 그래야 한다 갈라진 두 민족이 뼛속까지 하나의 삶이 되면 나는 더 이상 민족을 노래하지 않으리라 더 이상 민족을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그런 것 깡그리 잊어버리고 아득히 구천을 떠돌리라 그때까지는 그때까지는 나 흉흉한 거지가 되어도 뭣이 되어서도 어쩔 수 없이 민족의 기호이다 그때까지는 시퍼렇게 살아날 민족의 엄연한 씨앗이리라
오늘 아침 평양 대동강 가에 있다 옛 시인 강물을 이별의 눈물로 노래했건만 오늘 나는 강건너 바라보며 두고 온 한강의 날들을 오롯이 생각한다 서해 난바다 거기 전혀 다른 하나의 바닷물이 되는 두 강물의 힘찬 만남을 생각한다
해가 솟아오른다 찢어진 두 동강 땅의 밤 헤치고 신새벽 어둠 뚫고 동트는 아픔이었다 이윽고 저 건너 불근 솟아오른 가멸찬 부챗살 햇살 찬란하게 퍼져간다
무엇하러 여기 와 있는가 지난 세월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왔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념이었고 서로 다른 노래 부르며 나뉘어졌고 싸웠다 그 시절 증오 속에서 5백만의 사람들이 죽어야 했다. 그 시절 강산의 모든 곳 초토였고 여기저기 도시들은 폐허가 되어 한밤중 귀뚜라미 소리가 천지하고 있었다 싸우던 전선이 그대로 피범벅 휴전선이었다 총구멍 맞댄 철책은 서로 적과 적으로 담이 되고 물이 되어 그 울안의 하루하루 길들여져 갔다 그리하여 둘이 둘인줄도 몰랐다 절반인줄도 몰랐다 둘은 셋으로 넷으로 더 나뉘어지는 줄도 몰라야 했다 아 장벽의 세월 술은 달디달리라
그러나 이대로 시멘트로 굳어버릴 수 없다 이대로 멈춰 시대의 뒷전을 헤맬수 없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였다 천년 조국 하나의 말로 말하면서 사랑을 말하고 슬픔을 말하였다 하나의 심장이었고 어리석음까지도 하나의 지혜였다 지난 세월 분단 반세기는 골짜기인 것 그 골짜기 메워 하나의 조국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다
무엇하러 여기 와 있는가 아침 대동강 강물에는 어제가 흘러갔고 오늘이 흘러가고 내일이 흘러가리라 그동안 서로 다른 것 분명할진대 먼저 같은 것 찾아내는 만남이어야 한다 큰 역사 마당 한가운데 작은 다른 것들은 달래는 만남의 정성이어야 한다 얼마나 끊어진 목숨의 허방이었더냐 흩어진 원혼들의 흔적이더냐
무엇하러 여기 와 있는가 우리가 이루어야 할 하나의 민족이란 지난 날의 향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의 온갖 오류 온갖 야만 온갖 치욕을 다 파뭏고 전혀 새로 민족의 세상을 우러러보며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통일은 재통일이 아닌 것 새로운 통일인 것 통일은 이전이 아니라 이후의 눈시린 창조이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하러 여기에 와 있는가 무엇하러 여기 왔다 돌아가는가 민족에게는 기필코 내일이 있다 아침 대동강 앞에 서서 나와 내 자손 대대의 내일을 바라본다 아 이 만남이야말로 이 만남을 위해 여기까지 온 우리 현대사 백년 최고의 얼굴 아니냐 이제 돌아간다 한송이 꽃들고 돌아간다.
대보름 날
정월 대보름날 단단히 추운 날 식전부터 바쁜 아낙네 밥손님 올 줄 알고 미리 오곡밥 질경이나물 한 가지 사립짝 언저리 확 위에 내다 놓는다 이윽고 환갑 거지 회오리처럼 나타나 한바탕 타령 늘어놓으려 하다가 오곡밥 넣어가지고 그냥 간다 삼백예순 날 오늘만 하여라 동냥자루 불룩하구나 한바퀴 썩 돌고 동구 밖 나가는 판에 다른 거지 만나니 그네들끼리 무던히도 반갑구나 이 동네 갈 것 없네 다 돌았네 자 우리도 개보름 쇠세 하더니 마른 삭정이 꺾어다 불 놓고 그 불에 몸 녹이며 이 집 저 집 밥덩어리 꺼내 먹으며 두 거지 밥 한 입 가득히 웃다가 목메인다 어느새 까치 동무들 알고 와서 그 부근 얼쩡댄다
대보름 뒤 고향에는 밤이 있다 한없이 환한 대보름 뒤의 달밤이 있다 잠 깨어 뒷간에 간다 벌써 요강 넘쳐서 바깥으로 나가 뒷간에 간다 자지러지게 환한 밤 건너마을 수동이네 헛간 위 지붕 못 걷히게 얹어둔 헌 쟁기까지 보이는 밤 참수리가 공중에서 먼 데까지 보듯이 병아리 보듯이 멀리 멀리 바위배기 상여집까지 보이는 밤 보름 쇠고 치던 징소리 아직도 귀에 쟁쟁 가슴 설레어 천리길 나서고 싶다 과부 자식 아니랄까 소문난 건달 창섭이 오줌 싸고 진저리치며 그 길로 휘영청 나서고 싶다 곰아 곰아 너 숨었거든 발바닥만 핥지 말고 너도 나와 성큼 나서 보아라 환한 달밤 아쉬워 어찌 잠자누 잠만 처자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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