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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호
藝家를 찾아서
애국 시인 孔仲仁목숨 걸고 北과 싸운 愛國 낭만파 시인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우리의 심령을 흔들어 통곡허희 비창 격동케 한 시인”(박종화)
⊙ 1951년 陸士 교가 작사… 2016년 육사 교정에 교가비 건립
⊙ 6·25 때 서울 함락 후에도 KBS 남아 격시 낭독… 인민군에 잡혔다가 탈출
⊙ 1950~60년대 《희망》 《자유신문》 《삼천리》 등 편집장, 주간 역임
애국 시인 공중인.
6·25 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문인 중에 시인 공중인(孔仲仁·1925~1965·본명 仲麟)이 있다.
그는 6·25가 발발하자 서울중앙방송국(지금의 KBS)에서 공산군의 격퇴를 호소하는 애국시를 낭독했고, 모윤숙(毛允淑·1910~1990), 김윤성(金潤成·1926~2017) 등과 함께 문총(文總)구국대를 결성한 애국 시인이었다.
지금은 한국문학사에서 그의 ‘영토’를 찾기란 쉽지 않지만 1950~60년대 가장 비극적인 시대에 절절한 시를 쓴 시인이었다.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1901~1981) 선생은 공중인의 첫 시집 《무지개》(1957)에 대해 ‘우리의 심령을 흔들어 통곡허희(痛哭噓唏) 비창(悲愴) 격동(激動)케 해주는’ 시인이라고 했다.
굳이 풀이하자면, ‘통곡게 하고 한숨짓게 하며 마음을 몹시 슬프게 하고 격하게 만드는’ 시인이라는 것이다. 월탄은 ‘영혼이 피를 토하며 몸부림쳐 이 현실을 영탄하고 대결하는’ 시라고도 평했다.(《조선일보》 1957년 4월17일자 4면)
당대 월탄 같은 문단의 큰 산이 칭찬한 공중인의 처녀 시집 《무지개》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시어로 가득했지만 무언가 가슴 속 뜨거운 것을 분출케 하는 낭만적 감정과 열정이 느껴졌다. 6·25라는 아비규환과 동족 살인의 비극을 체험한 시인의 몸부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죽기로서 단 한 번 목메어 울고픈
종루는 저렇게 신라를 울어 헤어졌기에
그 소리 한량없이 바람 설움에 겨워 불지른
‘토함(吐含)’은 끝내 하늘에 염원을 적시며
쓰러졌는가
-시 ‘불국사’ 1연
시인 신경림은 공중인의 시에 대해 이런 평가(〈어떤 시를 읽을 것인가〉, 2004)를 내린 적이 있다. “50년대에 가장 인기 있는 시인으로 공중인이라는 시인이 있었다. 신문에 시를 연재했는데 가판에서 그 사람의 시가 없으면 안 팔릴 정도였다”는 것이다. 전쟁의 상흔에 신음하던 시절, 신문을 사서 공중인의 시를 찾아 읽던 이들의 지적 갈망을 짐작해본다.
공중인 시인은 육군사관학교 교가를 작사했다. 2016년 육사 개교 70주년을 맞아 교가비가 세워졌다. 오른쪽이 차남 공명재 계명대 교수. |
시인은 1951년 육군사관학교의 교가를 작사했다. 작곡은 가곡 ‘물레’ ‘그대 있음에’ ‘4월의 노래’ 등을 작곡한 김순애(金順愛·1920~2007)가 했다. 2016년 육사 개교 70주년을 기념해 교정에 교가비가 세워졌다.
동해수 구비 감아 금수 내 조국. 유구 푸른 그 슬기 빛발을 돋혀. 풍진노도 헤쳐나갈 배움의 전당. 무쇠같이 뭉치어진 육사 불꽃은 모진 역사 역력히 은보래* 치리. 아아 영용 영용. 이제도 앞에도 한결 같아라. 온누리 소리 모아 부르네. 그 이름 그 이름 우리 육사.
-육사 교가 1절과 후렴구
(*‘은보래’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보라인 ‘은보라’로 해석된다. 따라서 불꽃이 은보라처럼 빛난다는 의미)
공중인·김순애는 교가를 짓기 위해 참혹한 낙동강 전선을 지프를 타고 둘러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41세 나이로 요절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시도 세월에 잊혔지만 6·25 70주년을 맞아 재조명되고 있다. 기자는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 사는 부인 최금선(崔金善·88) 여사와 시인의 차남 명재(孔明宰·계명대 교수)씨를 만났다.
한국 모더니즘의 기수, 김기림 시인이 스승
공중인 시인의 아내 최금선씨와 차남 공명재씨. |
공중인 시인은 곡부(曲阜) 공씨인 아버지 공승일(孔承一)과 어머니 한동라(韓東邏)의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인 최씨 증언에 따르면 시인의 고향인 함경남도 이원군에 공씨 집성촌이 있었고 대대로 한학을 하는 집안이었다. 시인의 아버지는 함북의 도청 소재지인 청진에서 한의사를 했고 시인은 본가를 떠나 청진에서 학업을 했다. 시인의 어머니와는 줄곧 떨어져 살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고 한다. 아들 공명재 교수의 말이다.
“할아버지(공승일)는 한의사로 재력이 있었지만, 정어리 공장을 하던 친구의 보증을 서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가산을 날렸고 화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셨어요. 할아버지가 마흔한 살에 돌아가셨는데, 놀랍게도 큰아들(孔得麟)도 마흔한 살, 둘째인 아버지도 마흔한 살에 돌아가셨죠.”
이번에는 부인 최씨의 말이다.
“남편 얘기로는, 다섯 살부터 서당에 다녔는데 당신보다 두세 살 많은 마을 형들보다 공부를 잘해 훈장 선생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고 합니다. 별명은 ‘올콩’.
청진에 있는 천마소학교를 1등으로 졸업해 함경북도를 대표하는 1명에 선발돼 각 도(道)의 1등들과 함께 일본 천황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해요. 청진의 경성고보를 졸업했는데 동기생은 영화감독 신상옥(申相玉), 시인 김규동(金奎東)입니다.”
시인은 어떤 계기로 문학을, 시를 접하게 되었을까. 공 교수의 말이다.
“시와 문학을 누구에게 배웠고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요.
아버지는 1946년 월남해 김윤성·정한모(鄭漢模)·조남사(趙南史)·전광용(全光鏞) 등과 ‘시탑’ 동인으로 활동하셨고, 1949년 《백민》에 ‘바다’ ‘오월송’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
학창 시절 문학을 접했을 개연성이 높은데, 선친과 동문수학한 분(김정준·재미 의사·뉴욕 한국음악재단 이사장 역임)의 증언을 들어보면, 청진의 경성고보에 시인 김기림(金起林·1908~?) 선생이 계셨다고 합니다. 김기림 하면 우리 시단에서 모더니즘의 기수로 알려진 분입니다.
김기림은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있다가 1941년 경성고보에 와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고 해요. 짐작건대 선친이 리얼리즘이 아닌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쓰셨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스승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어요.”
― 시인이 1946년 월남했다고 하는데 당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요.
최금선 여사의 말이다.
“생전 남편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공산 체제가 너무 가혹해 목숨을 걸고 내려왔노라’고요. ‘북에서 죽을 바에야 자유스런 남한에서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탈출했는데 얼마 후 6·25 사변이 터져버렸어요.
남편은 모윤숙 시인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자’ ‘서울을 사수하자’는 방송을 하셨다고 합니다. 방송국에서 사흘간 먹지도 못하고 교대로 모윤숙과 방송을 하다가 두 분 다 붙잡혔다고 해요. 남편은 모윤숙을 누나라고 불렀는데 ‘남자처럼 강직하고 애국심이 대단했다’고 칭찬한 적이 있어요.”
모윤숙 시인이 인민군에 붙잡혔다는 최씨 증언은 틀린 것으로 보인다. 모윤숙은 적(敵) 치하 90일 동안 피신하면서 지냈고 이듬해 1·4후퇴 때 도강(渡江)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모윤숙과 공중인 두 사람이 겪은 일화는 많은 증언과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별시 ‘한양(漢陽)아, 잘 있거라’
《동아일보》 1968년 9월28일자 6면, 같은 신문 1973년 7월11일자 5면에는, 모윤숙과 공중인, 박종화, 고희동(高羲東) 등이 인민군의 남침 하루가 지난 6월 26일 서울에서 문총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국민에게 전의를 고취하는 선전전을 펼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문총 회장은 고희동이었다.
서울중앙방송을 통해 고희동과 모윤숙은 시민들을 진정시키는 강연을 했고, 공중인과 김윤성은 격시(檄詩)를 낭독했다. 그들의 목소리(녹음방송)는 북한군이 방송국을 점거할 때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김윤성은 훗날 회고에서 “공중인과 함께 격시를 낭독했는데 이 방송의 녹음은 다음 날 북괴군이 방송국을 점거하기 직전까지도 재생하여 방송되었다”고 했다. 언론인이자 수필가인 김을한(金乙漢·1905~1992)은 1956년 2월5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 제하의 연재를 통해 이렇게 증언한 일이 있다.
〈… 나는 힘없이 그렇게 말하고는 터벅터벅 봉익동 나의 집으로 걸어갔었다. 그날 밤의 불안과 초조는 이루 형용할 수가 없으며 궂은비는 더욱 사납게 퍼붓는데 거의 자정 때가 되자 그때까지 잠잠하던 라디오가 갑자기 울리기 시작하더니 이 대통령의 고별사와 곧이어서 모윤숙, 공중인씨 등의 결별시(訣別詩) ‘한양(漢陽)아, 잘 있거라’가 애끊는 음성으로 낭독되었다. 나는 ‘라디오’를 붙들고 울었다.…〉
안타깝게도 ‘결별시’로 알려진 ‘한양아, 잘 있거라’는 전해지지 않았다.
《사진으로 본 한국방송사》(제1권)에는 ‘모윤숙이 지프를 타고 아군의 주 저항선인 미아리 고개 밑에까지 가서 적과 분전하는 국군장병들을 격려했으며 그 목멘 외침은 최전방까지 들려와 자칫 자지러들려는 장병들의 투지를 돋워주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정황상 모윤숙과 공중인 등이 함께 전선을 향했을 수도 있다.
당시의 주(駐)일본 김용주 전권공사는 1950년 6월 27일 밤 10시경 모윤숙의 애국시 낭송을 끝으로 서울방송이 끊겨버리는 상황에서 즉시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을 추진했다고 한다.
소설가 유주현(柳周鉉·1921~1982)이 쓴 산문집 《정(情) 그리고 지(知)》(1975)에서도 모윤숙, 공중인 두 이름을 찾을 수 있다.
〈… 그해 6월 27일 밤 11시쯤이던가, 서울방송은 조국을 지키자는 애국시를 계속 내어 보내고 있었다. 모윤숙, 공중인 두 시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인현동 집 3층에서 미아리 방면의 하늘을 바라보며 그 방송을 듣고 있었다.
낮에는 의정부를 탈환했다는 방송이 있었으나 밤이 깊어지니까 미아리 쪽에서 포성이 그치지 않고 하늘을 찢는 화광(火光)이 쉴 새 없이 번쩍이고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그게 포성인지 뇌성인지 분간이 안 갔다.…〉
인민군에 붙잡혀 끌려갔다가 탈출
시인 고은(高銀)이 전시(戰時) 문단의 이야기를 묶은 《1950년대》(1973)에도 공중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 6월 28일 최후의 KBS 방송은 화가 고희동의 시국안정 연설과 모윤숙의 시낭독 프로, 공중인의 격문조 시낭독 프로였다. ‘국군은 건재한다!’가 그들의 정훈 사업이었다.…〉
공중인은 마지막까지 방송국에 있다가 인민군에 붙잡혀 북송됐다. 최 여사의 말이다.
“함경북도 길주를 거쳐 연해주에 접한 곳까지 끌려갔다가 느슨한 경비를 틈타 도망쳤다고 합니다. 도보로 수많은 철교를 건넜는데 ‘철교 아래로 떨어지면 아무도 내 시체를 못 찾겠지’ 하고 되뇌었다고 해요. 걷다가 나중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며 도망쳤다고 하니 얼마나 고되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지요.”
구사일생으로 국군에 구조된 이후의 일화는 소설가 김송(金松·1909~1988)의 회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들 공 교수는 1980년 《신동아》 6월호에 실린 김송의 ‘환도(還都) 직후의 문단 이모저모’를 기자에게 낭독했다.
〈… 몇 달 동안 조반석죽으로 가난과 싸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내(김송)가 잘 다니는 분홍신이라는 다방에서 공중인을 만났다. 그는 《백민》 출신의 시인으로 애국시만 써왔다.
6·25 때 서울이 함락되었는데도 중앙방송국에서 애국시를 낭독하다가 체포되어 백두산까지 끌려갔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용소를 탈출하여, 부산까지 걸어와 결국 스타다방에서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김 선생!” 하고 공중인은 내 손을 잡았으나 나는 뒷걸음을 치면서
“누구요?” 하고 물었다. 걸레 같은 옷을 입고 신을 신고 있는 것이 꼭 한강 다리 밑의 걸인이었다.
“저 공중인입니다.”
“자네가 웬일인가. 앉게 앉아.”
그는 아편쟁이처럼 추워서 떨고 있었다.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다. 레지들이 둘러서서 거지가 커피를 마신다고 웃고 있었다.
“선생님 석 달 동안 동냥하면서 걸어왔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정부를 찾아왔으나, 갈 곳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김 선생님을 찾아온 거예요.”
“잘 왔소. 고생했구만.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옷이라도 사 입게.”
주머니를 털어주었다. 2~3일이 지나서 그가 다시 신조사로 찾아왔는데 멀쩡한 신사가 되어 있었다.
그 공중인이가 종로 분홍신 다방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선생님. 환도 이후 어떻게 지냅니까?”
공중인은 이같이 말하고 봉투를 내놓았다.
“이게 무슨 돈이요?”
“제가 《삼천리》 잡지를 하는데 연재소설을 쓰십시오.”
“선금까지 주어 고맙소. 요긴하게 쓰겠소.”
“역사소설이면 좋겠습니다.”
역사소설 《이성계(李成桂)》를 연재했다.…〉
몇 배로 불어나 돌아온 쌀자루
공중인 시인이 펴낸 두 권의 시집 《무지개》와 《조국》. |
월간 《삼천리(三千里)》는 1956년 7월에 창간했다. 당시 발행인은 공중인이었다. 누더기를 입고 월남한 그가 어떻게 해서 잡지사 발행인이 되었을까. 최금선 여사의 말이다.
“시아주버니(孔得麟)가 남편보다 늦게 1·4후퇴 때 피란을 나와 부산에서 형제가 만났던 겁니다. 남편은 부산에서 잡지 《희망》 《실화》 등의 편집을 책임졌고, 형은 자금을 대는 역할을 한 겁니다. 두 형제가 잡지사를 운영하다가 자금난으로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공중인은 《희망》 《현대여성》 《여성계》 《자유신문》 《삼천리》 등의 신문과 잡지에서 편집장, 주간, 발행인 등을 맡았었다.
― 어떻게 시인과 만나 결혼하게 되었나요.
최 여사의 말이다.
“저는 1·4후퇴 때 북에서 배를 타고 내려왔어요. 돛이 부러지는 바람에 동해상에서 일주일 동안 떠다녔지요. 선장이 ‘하느님께 최후의 기도를 드리자’고 했어요. 바다에서 미 군함을 만났는데 과자와 빵을 주더군요. 그때는 처음 보는 것들이라 이름을 몰랐는데 훗날 초콜릿이란 걸 알았어요. 그렇게 도착한 곳이 주문진 항구였습니다.
이후 강릉에 정착했는데 당시 친정아버지가 《한국일보》 강릉지국장을 하셨어요. 시아주버니가 강릉에 볼일이 있어 우리 집에 들렀다가 저를 눈여겨보셨나 봅니다. 그분은 작은아버지와 함께 피란을 오셨던 겁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진을 교환했고 1953년 6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21세 때 결혼했는데 남편은 29세였죠. 부부싸움한 기억이 거의 없어요. 남편은 부처님 같았어요.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책장엔 책이 가득했어요.
(서울) 필동에 살 때였는데 주인집 할머니가 몰래 숯을 훔쳐 가는 거예요. 그땐 풍로에다 밥을 지었는데 숯으로 불을 피웠어요. 숯 한 포대를 사면 한 달은 쓰는데 보름 만에 사라지는 거예요. 속이 상했어요. 이사 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어요. 남편더러 할머니께 항의하랬더니 정작 만나서는 ‘숯을 두 포대, 세 포대를 사다가 쟁여놓을 테니까 마음 놓고 쓰라’고 하지 뭡니까.
남편에게 따지니까 ‘얼마나 없으면 세든 이의 숯까지 훔치겠느냐’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제가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
남편은 이런 당부도 했어요. ‘장을 볼 때 점포 물건 대신 다라이(함지)에 담긴 행상의 물건을 사라’고 권했죠. 또 ‘아기 업은 젊은 여자의 물건을 사라’고 당부했어요. 이런 기억이 납니다. 남편과 시장엘 갔는데, 파 한 단을 사려고 둘러보고 있었어요. 남편이 ‘많아 봤자 파 한 뿌리 더 많고, 적어 봤자 한 뿌리 적을 텐데 그걸 엎드려서 고르냐’는 겁니다.”
최씨는 오래 묻어두었던 남편에 대한 기억들을 하나씩 들추었다.
“한번은 정○○씨라는 소설가가 집에 찾아왔어요. 소주 한 병을 사 왔기에 김치, 풋고추로 술상을 차렸지요. 남편이 ‘쌀독에 쌀이 얼마나 있냐’고 물어요. ‘반쯤 있다’고 하니, ‘우리 먹을 아침쌀 정도만 남겨두고 모두 퍼서 자루에 담으라’는 겁니다.”
― 자식 먹일 양식도 없는데 그걸 다 펐어요?
“어떻게 해요. 남편 위신을 세워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석 달 후에 쌀 한 가마니가 집으로 배달됐어요. 깜짝 놀랐죠. 누가 보냈는지 알아보니 그 소설가더군요. 신문 연재소설을 쓰게 돼 계약금을 받았다고 했어요. 쌀자루의 몇 배를 갚은 거지요.”
死因은 간암
세상을 떠날 당시 시인은 국방부 발행 일간 《전우(戰友)》의 문화부장이었다. 혜화동 성당에서의 장례미사 모습. |
공중인 시인은 1965년 11월 18일 사망했다. 사인(死因)은 간암. 평소 술을 즐겨 마셨다. 고료를 타거나 월급을 받으면 동료 문인들과 통음(痛飮)을 했다. “문인들끼리 명동 돌체다방에서 만나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술을 마셨다”고 한다. 한번은 대취해 중랑교 흙탕물 아래에서 자고 온 적도 있었다. 세상을 떠날 당시 시인은 국방부 발행 일간 《전우(戰友)》의 문화부장에 재직하고 있었다. 공 교수의 말이다.
“어머니는 일찍 혼자되셨지만 평생 아버지 험담을 하신 적이 없으셨어요. ‘네 아버지 결점은 술·담배를 하신 것인데 글 쓰는 사람이니 어쩌겠노’ 이러시는 거예요.
어머니가 33세 때 아버지를 잃으셨어요. 저는 6세, 형과 누나는 11세, 9세였죠.”
최 여사의 말이다.
“남편이 간경화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제가 기절했어요. 그런데 입원 후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어요. 당시 신문에 사인이 ‘간암’이라고 적혀 있기에 의사를 찾아가 따졌죠. 의사 왈 ‘간경화라는 말에 기절했는데 간암이라고 하면 남편보다 먼저 죽을 것 같아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죠. 처음으로 장만했던 답십리 집을 팔아야 했고, 책장 가득했던 남편 책들을 청계천 헌책방에 내다 팔았습니다. 33세 젊은 새댁이 헌책방을 돌며 수기(手記)한 책 목록을 보여줬지요. 안타깝지만 그 책을 팔아 아이들을 먹여 살렸어요.”
공 교수는 “이후 단칸방에서 살았고 너무 많이 이사를 다녔다”며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문방구도, 하숙도 하시고 나중에는 친척 도움으로 한일은행 직원식당에서 일하셨어요.
그렇게 일찍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이상하게도 당신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이 많아요. 그때 이미 복수가 차서 배가 부르셨는데 그것도 모르고 당신 배에다 저를 앉히시고…, 그러면 저는 까르르 웃곤 했죠.
한번은 크리스마스 날, 산타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어요. 새벽 문득 눈을 떠보니 머리맡에 두꺼운 엿이 있고 술 취한 아버지의 음성이 두런두런 들렸어요.
일찍 철이 들었나 봐요. 장례미사 때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많이 났어요. 고작 6세인데 말이죠.
학창 시절 학원사에서 발행한 《학원백과사전》에 실린 ‘근대 인물’ 중에 아버지 성함이 있었어요. 공씨여서 사전 첫머리에 이름이 나왔죠. 세상을 일찍 떠나셨지만 아버지의 10분의 1, 100분의 1이라도 본받자고 마음먹었어요.”
최 여사는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혜화동 성당에서 장례미사할 때 남편의 친구인 영화감독 신상옥씨의 아내 최은희(崔銀姬)씨가 까만 옷을 입고 조사(弔詞)를 낭독했어요. 막내가 얼마나 울던지, 미사에 참석한 모든 이가 함께 울었어요.”
“애국 시인으로 기억되길…”
공중인·최금선씨는 모두 함경남도 이원군이 고향이다. 시인은 이원군 동면, 최 여사는 이원군 서면에서 태어났다. 피란 와서 부부의 연을 맺기 전까지 안면은 없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자녀와 후손 중에 문인이나 예술가의 길을 걷는 이는 아직 없다고 한다.
장남 명화(孔明和·69)씨는 유인옥(柳寅玉)씨 사이에 1남을 뒀는데 아들은 현재 제약회사에 근무 중이다.
장녀 은주(孔銀珠·67)씨는 이완우(李完雨)씨와 결혼해 2남을 뒀다. 첫째는 치과의사, 둘째는 공무원이다.
차남 명재(64)씨는 서강대 경제학과를 나와 뉴욕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배영숙(裵英淑)씨와 결혼해 역시 2남을 뒀다. 첫째는 미국에서 회계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고 둘째는 서울 모대학 로스쿨에 재학 중이다.
― 많은 사람이 시인을 어떻게 기억하길 원하세요.
“남편을 애국 시인으로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얼마나 애국자인지 몰라요. 생전 저에게 ‘국가와 민족의 소중함을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말했죠. 당신이 직접 지옥에서 탈출하고 자유의 소중함을 체험했으니까요.”(최금선)
“선친 시를 읽으면 감정이 굉장히 풍부하셨음을 알 수 있어요. 울림이 큰 시를 쓰셨습니다. 누군가 한 분이라도 아버지 시를 읽고 독자가 된다면 그 자체로 감사할 것 같아요.”(공명재)
공중인 시인의 遺稿 시 3편
“눈시울은 뜨거워 눈물이 철철, 나의 눈은 청명하다”
공중인 시인의 차남 공명재 계명대 교수가 시인이 남긴 유고 시 3편을 보내왔다.
한 편은 제목이 없어서 공 교수가 ‘무제(無題)’로 정했다. 나머지 두 편은 ‘꿈’과 ‘종다리 바람’. 시인이 펴낸 두 권의 시집 《무지개》 《조국》에 포함되지 않은 시인데 “매체에 발표했을 수도 있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 공 교수의 설명이다.
전체적으로 시가 영탄적 서정이 가득한 낭만시다. 평자(評者)에 따라 작품 결이 조금 낮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들 역시 시인의 지체(肢體)가 아니겠는가. 일부 시어는 현대어 표기에 맞게 살짝 고쳤음을 밝혀둔다.
무제(無題)*
공중인 시인의 유고 시 ‘무제(無題)’의 육필 원고. |
1
이 밤 나는, 너에게 바치기 위해,
저- 들뜬 장쾌한 바람과, 또한 저- 찬연한 태양(太陽)의
그 황금(黃金)빛 비단 속에 적셔온 기쁨을 가져다준다
풀속을 걸어왔으므로, 나의 발은 청신하다
꽃속을 스쳐왔으므로 나의 손은 감미하다
축제(祝祭)에 꽃피는 대지(大地)와, 그 영원의 힘 앞에,
눈시울은 뜨거워 눈물 재빨리 생기어, 철철
넘치어짐을 느끼므로
나의 눈은 청명하다
공간은 그 율동하는 빛의 팔[腕]에,
취하고, 열(熱)하고, 목 놓아 울고 싶은 나를 앗아갔다
그리고 나는 눌리어온 외침을 내가 걷는
발에 말하게 하고,
먼 먼 저편, 어디로 정처없이 걸어왔다
지금 여기에, 나는 뜰의 생명과 아름다움을 너에게
가져다준다
마음껏 넘치도록, 그것을 내 몸에서 흡수하렴!
‘오르간’은 나의 손가락에 희롱하였다. 공기(空氣),
그 빛, 또한 그 향긋한 내음들이, 지금 나에게
가득하다
2
조용히, 조용히, 썩도 조용히,
그대의 팔 속에,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렴.
뜨거운 이 마음, 그리고 또한 이 지쳐버린 두 눈을.
조용히, 조용히, 썩도 조용히,
내 입술 위에 키스를, 그리고 나는 듣고 싶은 것이다.
그대의 입술에서 새여날 때, 그대가 나에게 몸을 바쳐,
내가 열렬히 그대를 사랑하고 있을 때의
저- 아침마다 보내 주는 보다 즐거운 그대의 말을.
아침은 되었지만, 무겁고, 그리고 울적하다. 밤에는
싫은 꿈을 보았다.
비[雨]는 내 머리를 흩어 창(窓)을 두드린다.
지루한 구름으로, 지평(地坪)은 어둡다.
조용히, 조용히 , 썩도 조용히,
그대의 팔 속에,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렴.
뜨거운 이 마음, 그리고 또한 이 지쳐버린 두 눈을.
그대야말로, 나에겐 즐거운 새벽.
그대의 손에서만, 새벽의 애무(愛撫)가 있고,
그대의 상냥한 말에서만, 새벽빛이 있다.
이리하여 나는 괴로움을 잊어, 뉘우침을 잊고,
나날의 일에 소생한다.
아- 내 나날의 일,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의 행로(行路) 위에
푯말을 새기고,
영광스러운 목숨의 황금의 추억에 몸을 가다듬은
힘과 미(美)의 인간이 되고 싶은 의지(意志)를 불태우며,
나를 굳세게 살리어 주는 것이다.
(*이 시는 시인의 자필 원고지에는 제목이 없다. 아들 공명재씨가 ‘무제’로 이름을 붙였다.)
꿈
공중인 시인의 유고 시 ‘꿈’. |
그 오련한 웃음 속에
무지개와 같은 신화(神話)의
아침 노을이 피어 옵니다
뭇 별은 동결(凍結)된 당신에의 밀어(密語)!
울렁이는 가슴은,
저렇게 치솟는 분수(噴水)처럼
당신에게 그지없이 지향합니다
그 슬기, 그 우아(優雅), 그 서정(抒情)…
당신의 눈결은, 이슬 젖은 하늘에 가득한
머언 음악(音樂)의 푸른 샘입니다
촛불에 비치인 설화석고(雪花石膏)처럼
아련히 ‘슈미이즈’에 하늘대는 젖가슴-
나의 영원한 생명(生命)의 서장(序章)입니다
내음은 하염없이, 당신의 머리칼에
떠돌아 흔드는 애욕(愛慾)의 선율(旋律)!
내 관능(官能)의 ‘비오론’에 비껴
한량없는 일락(逸樂)의 바람이 감돕니다
마침내 달을 껴안아 하늘에 오르듯,
강(江)물에 뛰어 드는 이태백(李太白)의 환상(幻想)처럼
나는 당신의 웃음이 피어 놓은
그 수밀도(水蜜桃) 노을 속에 쓰러져 갑니다
종다리 바람
공중인 시인의 유고 시 ‘종다리 바람’. |
한떨기 꽃의 환상(幻想)을 위(爲)함인가.
저토록 노래 흔드는 불[火]의 음악(音樂)!
…바람이 인다. 이윽고 천지(天地)를 시내쳐
퍼져오는 이 돌연(突然)한 여울!
나의 노래는 압도(壓倒)된다.
절절(切切)하게, 내 마음의 귀는
너의 노래 속에 듣고 있다
하늘 가득히 무늬 져 오는
머언 세상(世上)의 종소리를.
바다와 같은 나의 욕망,
인제는 돌처럼 묵묵(默默)하다.
꽃이여, 천년(千年)의 고요조차
이 순간이 어지러워
너도 흩어지는가?
또다시 하늘 끝 연연(戀戀)히 불어오는,
푸르른 사모(思慕)의
이 뜨거운 입김…
마침내 나는.
이름할 수 없는 것을 흐느껴 운다
황홀(恍惚)한 극치(極致)!
…나는, 내가 아니라,
언젠가 너였었다.
아아, 종다리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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