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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 홈페이지에서 퍼온 글입니다
용량이 커서 나누어서 실습니다
한국기독교 유적지 순례 안내
역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의 사실'과 '기록된 사실'이라는 의미입니다. '과거의 사실'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조선에 위대한 성군으로 세종대왕이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기록된 사실'은 역사가가 주관적으로 다시 구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달리 표현될 수 있습니다. '기록된 과거의 사실'인 역사책에는 역사가의 주관적인 해석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고 역사가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조작하거나 왜곡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가는 기본적으로 객관적인 과거의 사실을 전하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실을 선택하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주관적인 해석이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볼 수도 없고, 이미 지나가 버린 역사를 우리는 왜 공부할까요? 그것은 과거의 세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과거의 세계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과거 세계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역사를 공부하는 일이야말로 과거 세계와 현재의 인간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의 광장인 것입니다. 이 만남에서 우리는 많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세계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데 도움을 줍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슬기와 노력으로 극복한 조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과거에 펼쳐진 역사적인 경험이 우리에게 지혜를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즉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여, 현재를 사는 우리의 성장을 약속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곧 미래를 향한 바른 안목을 길러나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고, 현재는 다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니까요.
한국기독교 유적지 순례를 통하여 감리교회의 성도들이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이 살았던 길을 뒤따라 걸어감으로 우리의 믿음이 더욱 성장하고 성숙해 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감리교회 성도로서의 성화의 길, 온전하심을 향한 인생의 순례 길을 걷는 가운데 한국기독교의 유적지 순례를 통하여 잃어버린 믿음을 다시 찾고, 차갑게 식어진 가슴을 다시 따뜻하게 적시며, 주님을 향한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사랑과 열정을 다시 회복하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라면서 한국기독교 유적지 순례를 안내해 드립니다.
* 첨부 파일: 한국기독교 유적지 순례(구본선 목사)
2012년 6월
교육국 차세대교육정책부 부장 정현범 목사
한국기독교 유적지 순례
구본선 목사
전국에 있는 한국기독교 유적지를 지역별, 교파별로 분류하여 지역은 8군데로 나누고, 특정 교파의 경우 충청북도 이남과 충청남도 대부분은 북감리교, 강원도는 남감리교, 경상남도는 호주장로교, 전라도 전역과 충청남도 서해안 일부는 남장로교, 충청북도 이북과 경상북도, 그리고 제주도는 북장로교, 충청도 공주와 논산 강경은 침례교를 중심으로, 각 지역별 복음전래와 교회 유적지를 소개한다.
초기 한국에 들어 온 개신교는 북감리교, 남감리교,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등 5개 교파가 주도권을 가지고 선교를 시작 했다. 이들 교파가 한국에 들어 온 시기[1885년(북감리교회 북장로교) - 1891년(호주장로교) - 1892년(남장로교)- 1896년(남감리교)]는 제각기 다르다. 그러나 교파간 선교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러 차례 선교협의(혹은 선교지 분할협정)를 하였다. 그 결과 ‘서울, 인천과 같은 대도시는 공동 선교구역, 도와 시 단위는 각 교파별로 선교지 분할’로 이어졌다.
참고로 성결교와 성공회, 침례교와 같은 군소 교단은 선교협의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장로교는 1907년 하나로 통합되면서 독노회를 조직했고, 감리교는 1930년 남.북 감리교 통합을 이루어 냈다.
감리교. 장로교 외에 천주교 성지와 개신교 군소 교단[성공회(1890년), 침례교(1895년)]의 유적지까지 정리해 놓았다.
<목차>
제 1 장 서울
1. 감리교 선교의 출발지, 정동제일교회
2. 정동, 근대 교육의 발상지(I)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3. 서대문구, 근대 교육의 발상지(II)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감리교신학대학교
4. 종로구 , 남감리교의 흔적을 찾아서 (배화학당, 종교교회, 자교교회)
5. 정동과 종로구, 북장로교의 흔적을 찾아서
6. 종로구, 중앙감리교회와 대동서시 터
7. 정동, 성공회 대성당과 옛 구세군사관학교
8. 중구와 마포구, 명동성당과 절두산순교성지
9. 마포구와 동작구, 양화진선교사 묘원과 국립서울현충원
제 2 장 인천
10. 조선 선교의 문이 열린 곳, 중구 내리교회
11. 동구 영화초등학교와 창영사회복지관
12. 옹진군 백령도 중화동교회
13. 강화군 교산교회와 홍의교회
14. 교동교회와 망월교회
15. 강화읍성당과 온수교회
16. 서도중앙교회
17. 강화중앙교회
18. 흥천교회
제 3 장 경기도
19. 화성시 제암리교회와 수촌교회
20. 수원시 종로교회와 매향역사관
21. 용인시 소래교회 예배당과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22. 안산시 샘골교회와 최용신기념관
23. 이천시 구연영 순국추모비와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제 4 장 강원도
24. 춘천시 춘천중앙교회
25. 철원군 철원제일교회와 장흥교회(서기훈목사 순교기념비), 대한수도원
26. 원주시 원주제일교회와 원주기독병원
27. 홍천군 한서교회와 남궁억기념관
28. 동해시 천곡교회와 최인규 묘역
제 5 장 충청도
29. 충북 청주시(I) 청주제일교회
30. 충북 청주시(II) 수동교회
31. 충북 진천군 성공회 진천교회
32. 충남 음성군 성공회 음성교회
33. 충남 공주시 공주제일교회와 영명중.고등학교
34. 충남 천안시 매봉교회와 유관순 생가
35. 충남 논산시 (구)북옥감리교회 한옥 예배당
36. 충남 서천군 한국최초성경전래지와 아펜젤러 순직기념관
37. 충남 보령시 고대도교회
38. 대전시 한남대 인돈기념관과 오정동 선교사 주택
제 6 장 경상도
39. 부산시(1) 한강 이남 최초인 초량교회와 부산진교회,(구)일신여학교 건물, 일신기독병원
40. 부산시(2) 성공회 부산주교좌교회
41. 대구시 대구.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대구제일교회와 동산의료원 선교사주택
42. 경북 안동시 안동교회
43. 경북 영천시 자천교회
44. 경북 봉화군 척곡교회
45. 경북 울진군 행곡교회와 행장교회
46. 경남 창원시 주기철목사 기념관,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순직 호주 선교사 묘원
47. 경남 그 외의 지역(호주장로교 중심)
제 7 장 전라도
48. 전북 전주시 전주서문교회, 신흥학교, 엠마오 사랑병원
49. 전북 익산시 두동교회 ‘ㄱ자’ 예배당
50. 전북 김제시 금산교회 ‘ㄱ자 ’예배당
51. 전남 목포시 목포양동교회와 구 목포중앙교회 예배당(현재 오거리 문화센터)
52. 전남 순천시 순천선교부 유적
53. 전남 여수시 애양원과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54. 광주시 광주선교부 유적지
55. 그 밖의 기독교 유적지
제 8 장 제주도
제 1 장 서울
1884.6 감리교 목사 맥클레이 입국, 고종황제에게 교육, 의료사업에 대한 윤허를 얻음, 1884.9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알렌 입국, 1885.4.5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입국, 1885.4.10 광혜원(제중원) 개원, 1885년 배재학당 개교, 1886년 이화학당 개교, 1887.9 새문안교회 설립, 1887.10 정동제일교회 설립
서울은 조선 왕조 500년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수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선교 초기 한국에 들어 온 선교사들은 서울 중구 정동에서 첫 사역을 시작했다. 정동은 덕수궁을 중심으로 각국 대사관이 몰려 있는 외교의 장이었다. 또한 선교사들이 서울을 벗어날 수 없도록 하였던 정부의 규제도 한 몫을 했다. 감리교와 장로교는 정동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교육, 의료사업부터 시작했다. 조직교회인 정동제일교회와 새문안교회가 설립된 것은 아펜젤러, 언더우드가 입국하고 2년 6개월이 지나서였다.
정동은 감리교, 장로교, 성공회, 구세군 등 각 교파별 유적이 몰려 있는 곳이다. 그리고 선교는 정동(새문안교회 ,정동제일교회, 성공회 대성당, 구세군 사관학교)에서 종로지역(감리교의 중앙교회, 장로교는 연동교회, 승동교회, 안동교회)으로 확대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1. 감리교 선교의 출발지, 정동제일교회
1885.4.5 아펜젤러 제물로 도착, 1885.8 아펜젤러 배재학당, 1885.9 스크랜튼 의료활동 시작(시병원), 1886.5 스크랜튼 부인 이화학당, 1887.10.9 정동제일 교회 창립, 1888.11 하워드 선교사 보구여관 시작, 1897.12 문화재 예배당 봉헌
600년 전 고려의 장수였던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길을 가다가 목이 말랐다. 마침 우물이 있기에 찾아갔더니 예쁜 처녀가 물을 긷고 있었다. 이성계는 그 처녀에게 물 한잔 얻어마셨다. 그때부터 둘은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되었고 결혼을 했다. 먼 훗날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했고 왕이 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사랑했던 우물가의 처녀(신덕왕후)는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다. “제가 죽거든 큰 연을 만들고 거기에 제 이름을 쓰고 멀리 날려 주세요. 그리고 연줄을 끊어 바람에 날리다가 떨어진 곳에 저를 묻어 주세요.” 끈 떨어진 연은 바람을 타고 날아 가다가 한 곳에 뚝 떨어졌다. 그곳은 수십 년 전 태조 이성계가 왕후를 처음 만났던 우물가였다. 태조는 그 곳에 왕후의 능을 만들고 '정릉(貞陵)’이라고 불렀다. 정동은 정릉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정동에는 임금님의 첫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다. 127년 전 복음이 들어와서 교회가 되고 학교와 병원이 되었던 기독교 역사가 남아 있는 곳이다.
시청역에서 덕수궁 방향으로 나와서 덕수궁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가면 서울시립미술관(구 육영공원 터)이 나온다. 미술관 오른편에 정동제일교회가 있다. 정동제일교회는 아펜젤러가 창립했고 여기서 한국 감리교회가 시작되었다. 교회엔 두 개의 큰 예배당이 있다. 1979년 지어진 백주년 기념 예배당과 1897년 지은 문화재 예배당이 아버지와 아들처럼 자리를 잡고 서 있다.
1887년 10월 9일 아펜젤러는 작은 한옥에서 4명의 한국인과 함께 모여서 첫 예배를 드렸다. 교회의 첫 이름은 ‘벧엘 예배당’이었다. 처음의 교회 위치는 남대문로3가 한국은행 본점 근처로 추정된다. 그러나 첫 예배당은 곧 사라졌다. 1888년 정부에서 ‘전도 금지령’을 내리면서 한옥 예배당은 폐쇄되었다. 예배 장소를 잃어버린 교인들은 아펜젤러와 존스 목사의 집, 시병원, 배재학당, 이화학당, 보구여관, 스크랜튼 대부인 저택을 전전하며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가 스크랜튼이 운영하던 시병원이 남대문으로 이전하자 시병원 터 위에 새 예배당을 건축했다. 1895년 9월에 착공해서 1897년 12월에 봉헌 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당은 1977년 사적 256호로 지정되고부터 ‘문화재 예배당’으로 불리고 있다. 문화재 예배당은 붉은 벽돌로 만든 최초의 서양식 교회로 평면 구조는 십자가형이고 건물 양식은 고딕식이다. 사각형 종탑은 성의 망루처럼 생겼고 종탑 동쪽에 있는 원형 장미창은 빛 되시고 우리의 중심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한다. 예배당은 회중석과 좌우 측랑으로 구별되는 삼랑식으로 평면은 라틴십자가 형태였다. 지금은 두 번의 증축과정에서 좌우 측랑으로 확장하면서 직사각형 모양이 되었다.
사각형 종탑 위에는 경세종(警世鐘, 세상을 깨우치는 종) 이 있다. 1907년 미국에서 구입한 것으로 군산 앞 바다에서 순직한 아펜젤러 목사를 기념하는 종이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면 1897년 예배당 건축 당시에 사용하던 강대상과 강대 의자가 있다. 둘 다 일본 나가사키 여학교 설립자인 러셀이 기증한 것으로 일본에서 제작한 것이다. 반 육면체 모양의 강대상에는 꽃 모양의 장식과 전무전도(傳務傳道)신망애(信望愛)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예배당 동쪽 벽면에는 쌍둥이 대리석 판이 있는데 1935년 한국 감리교 선교 50주년 기념으로 만든 것으로 최병헌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를 기념한 것이다.
예배당 뜰에도 ‘감리교회 조선선교 50주년 기념비’와 최병헌 목사, 아펜젤러 목사의 흉상이 있다. 최병헌 목사는 윤치호 장로와 함께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애국가는 윤치호가 발간한 감리교 찬미가(1908년)에 수록되어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에서 ‘하느님’이란 말이 더 각별해 보인다. 선교 초기에는 ‘하느님’ 이 표준어였고 ‘하나님’은 후대에 사용된 명칭이다.
문화재 예배당 옆에 백주년 기념 예배당이 있다. 비록 1979년 지은 예배당으로 역사성은 떨어지지만, 한국 건축가 협회로부터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건물이다. 주일 예배는 백주년 기념 예배당에서 드린다. 예배당 1층에 있는 사무실은 보구여관(保救女館, 하워드 선교사가 개설한 병원으로 1888년 11월 개원했고 여성만을 치료했던 병원)이 있던 자리이다.
교회를 방문하는 이들이 가봐야 할 곳이 하나 더 있다. 사회교육관 7층에 있는 만곤도서실이다. 그곳에서는 아펜젤러 목사가 사용했던 성찬기를 비롯해서 역대 담임 목사들의 유물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아펜젤러와 최병헌 외에 정동제일교회를 대표하는 두 분이 있다.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 두 분은 1919년 3.1 만세 운동을 주도했고 민족 대표 33인으로 활약을 했다. 두 분 모두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 주 소
정동제일교회(서울 중구 정동 34)
☞ 주변 유적지
배재학당 동관 - 이화여고(구 이화학당 터) - 예원학교(언더우드 집터) - 중명전(맥클레이와 알렌의 숙소, 정동여학교 터) - 구 러시아 공사관(아관파천 후 고종 황제의 숙소)
2. 근대교육의 발상지(I),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1885.8 아펜젤러 배재학당 시작, 1886.5 언더우드 경신학교 시작, 1886.5 스크랜튼 부인 이화학당 시작, 1886.7 장로교 여선교들 정신여학당 시작, 1915년 이화학당 심슨홀 건축, 1916년 배재학당 동관 건축
정동에서 근대 교육의 발상지를 찾아가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 정신여학교, 육영공원 터를 정동에서 만날 수 있다. 먼저 감리교 교육 기관으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있다. 배재학당은 정동제일교회 정문에서 오른편에 있다. 교회와 배재학당 사이에 러시아 대사관이 있다. 배재학당은 1885년 8월 아펜젤러의 주택에서 시작되었고 1886년 6월 8일 정식으로 개교했다. 배재학당은 고종황제가 지어준 이름으로 ‘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뜻이다. 배재학당이 시작된 아펜젤러의 주택은 러시아 대사관 경내에 있어서 들어가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남아 있는 배재학당 건물은 ‘동관’ 유일하다. 동관은 1916년 지은 건물로 중앙에는 토스카나식 화강암 돌기둥이 양쪽에 있고 현관 지붕 아래 삼각 벽면에는 “욕위대자 당위인역(慾爲大子 當爲人役,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마20:26) 가 새겨져 있다. 건물 정면 북쪽 모서리에 오래된 대리석 머릿돌이 있다. 1916년 정초식 만든 것으로 ‘덕기성취 지능계발(德器成就 知能啓發)’ 이라고 새겨진 글이 남아 있다. 2001년 서울시는 이 건물을 기념물 제 16호로 지정하였다.
동관은 현재 역사 박물관으로 개조되었고 1.2층 전시관이 있다. 전시관 내에 초기 배재학당 교실을 재현해 놓았고 배재학교 출신 유명인들의 고등학생 시절 사진도 전시해 놓았다. 그곳에 배용준과 차두리의 사진도 있다.
동관 뒤에는 550년 된 향나무가 있는데 하늘로 치솟은 굵은 가지 위에는 선명한 못 자국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카토 키요마사가 말을 매려고 못질을 한 흔적이다. 이 향나무는 배재학당 학생이었던 시인 김소월이 즐겨 찾던 나무라고 한다. 동관 앞에 독립신문을 발간했던 ‘최초의 신문사 터’(배재학당에 속한 삼문출판사)가 있다.
배재학당을 나와서 정동교회로 가는 길 왼쪽에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는데 육영공원이 있던 자리였다. 육영공원은 1886년 설립된 관립(국립)학교였는데 현직 관리들을 중심으로 어학을 가르쳤던 학교였다.
미술관과 정동제일교회를 지나면 이화여고가 있다. 학교 정문에서 오른 편에 ‘사주문(四柱門)’ 있는데 이화학당의 옛 정문으로 1923년 만들어진 것이다. 정문 왼쪽에는 심슨홀이 있다. 학교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15년 지은 것이다. 본관으로 올라가는 입구 오른쪽에는 ‘손탁 호텔 비’가 있다. 호텔은 1902년 손탁이 세운 것으로 구한말 조선의 고위 관리들과 외국 사절들이 외교적 담소를 나누었던 장소였다.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할 때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묵었다고 한다. ‘호텔 터’를 지나서 본관으로 올라가면 ‘한국 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기념비와 스크랜튼 부인의 흉상이 있다.
1886년 5월, 한 여인이 스크랜튼 부인을 찾아 왔다. ‘김씨 부인’으로 알려진 이 여인은 양반집 첩이었다. 다음 달에는 복순이가 들어왔다. 복순이의 엄마는 가난한 살림에 입하나 덜 요량으로 딸을 맡기고 간 것이다. 복순이는 8살이었다. 얼마 후 스크랜튼 부인이 병든 모녀를 학교로 데리고 왔다. 풍토병에 걸렸다고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병든 어린 딸은 경우 4살이었는데 별단이라고 했다. 별단이도 이화학당에서 공부를 했다. 1887년 가을, 명성황후가 학교의 이름을 ‘이화학당(梨花學堂)’ 이라고 지어 주었다. 그후 이화학당은 보통과, 중등과 고등과, 대학과를 개설했고, 1935년 대학교를 신촌으로 이전했다.
본관 아래쪽에는 우물이 하나 있다. ‘유관순 우물’이라고 불리는데 유관순 열사가 빨래했던 곳이다. 어디 유관순뿐인가? 한국 최초의 여자 ‘문학사’ 하란사,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그리고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이었던 김활란 박사가 이 물을 마셨을 것이고 이곳에서 빨래도 하며 수다도 떨었을 것이다.
장로교 교육의 발상지는 이화여고(구 이화학당 터) 정문 건너편에 있는 예원학교와 중명전이다. 예원학교 운동장은 언더우드 목사의 집이 있던 장소였다. 1886년 5월 언더우드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고아 한명을 데리고 교육을 했다. 이것이 경신학교(현재 경신중.고등학교)의 시작이 된다. 학교만이 아니라 ‘대한성서공회’를 조직하고 ‘대한기독교서회’를 시작한 곳도, 장로교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 교회가 창립 예배를 드린 곳도 언더우드의 집이었다.
학교 옆에 있는 중명전은 정동여학교(현재 정신여중.고등학교)가 시작된 곳이다. 중명전은 원래 맥클레이 선교사와 알렌 선교사가 묵었던 곳이었는데 1886년부터 장로교 여 선교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 해 7월부터 여선교사들은 이곳에서 여성 교육을 시작했다. 첫 학생은 5살짜리 고아 정네였다.
중명전이 정부 소유가 된 것은 1895년 이후가 된다. 장로교는 선교부를 연지동으로 옮기면서 정부에 여 선교사 기숙사를 팔았다. 중명전은 정부 소유가 되면서 생긴 이름이다. 중명전에 들어와 살게 된 이는 고종 황제였다. 이후 중명전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이곳에서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 7조약이 체결되었고 헤이그 밀사도 파견했다. 아주 가까운 곳에 구 러시아 공사관이 있다.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한 후 고종 황제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을 갔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고종 황제는 공사관에서 1년을 살았다.
☞ 주소
배재학당 동관( 중구 정동 34-35), 이화학당 터(중구 정동 32)
☞주변 유적지
배재학당 - 정동제일교회 - 이화여고(이화학당 터) -예원학교(언더우드 집 터) - 중명전 - 구 러시아 공사관 터
3. 근대교육의 발상지(II),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감리교신학대학교
1887년 아펜젤러 배재학당에서 신학교육 시작(감리교 신학대학), 1915년 연세대학교 설립, 1917년 연세대학교 신촌으로 이전, 1935년 이화학당(대학과정) 신촌으로 이전
정동에서 시작된 근대 교육의 바람은 서대문에서 그 결실을 맺었다. 초등학문을 전달하는 교육 기관이 아니라 고등교육을 전담하는 교육기관의 설립은 우리 민족의 염원이었다. 연세대학교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주축이 되어서 설립한 기독교 학교이다.
정동을 둘러 본 다음에는 서대문 신촌으로 가서 기독교 대학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연세대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광혜원이 있다. 광혜원은 알렌이 운영했던 병원인데 여기 있는 것은 최근에 복원한 건물이다. 광혜원에서 다시 백양로로 나와서 직선으로 올라가면 오래된 석조 건물들을 만난다. 스팀스관(1920년, 사적 275호), 언더우드관(1924년, 사적 276호), 아펜젤러관(1924년, 사적 277호) 이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연세대가 신촌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20년 이전이다. 학교 대지는 언더우드 목사의 형이 기부한 돈으로 구입을 했다. 그 이전에는 종로 인사동에 있는 YMCA 건물에서 교육을 했다. 연세대는 1915년 YMCA 건물에서 ‘조선기독교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란 이름으로 개교했는데 초대 학장은 언더우드 목사였다. 학교 이름은 신촌으로 옮기면서 연희전문학교로 바뀌었고, 해방 후엔 세브란스 병원과 합치면서 두 학교의 첫 글자를 따서 ‘연세대학교’로 했다.
3개의 석조 건물 외에 핀슨관과 언더우드관이 있다. 핀슨관은 1922년 건립한 기숙사로 윤동주 시인이 생활했던 곳이다. 건물 앞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詩碑)가 있고 건물 2층엔 윤동주 기념관이 있다. 언더우드관은 옛 언더우드 사택을 개조한 것으로 언더우드의 타자기를 비롯해서 각종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는 연세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화학당은 스크랜튼 부인이 설립한 감리교 학교이다. 이대는 이화학당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생겼다. 이화학당은 1910년 경 보통과, 중등과, 고등과, 대학과로 학제를 편성했다. 1925년 경 대학과는‘이화여자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대학교를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은 1935년 이다. 파이퍼홀은 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현재는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은 튜더식 석조 고딕이고 네모난 창문과 아치가 독특하다. 건물 위에 있는 십자가 조각은 이화여대가 기독교 학교임을 상징한다.
유관순 열사가 공부하던 당시의 교사를 복원해 놓은 곳이 있다. 그것은 ‘이화역사관’인데 이화여대의 역사를 12가지로 구성한 ‘상설 전시실’을 비롯해서 영상교육실, 편지방, 기도실 등으로 꾸며져 있다.
이대역(2호선)에서 전철을 타고 가면 15분 거리에 서대문 형무소와 독립문(3호선 4번 출구)이 있다. 역에서 나와서 맨 먼저 보게 되는 것은 독립문(사적 32호)이다. 1898년 6월 독립협회에서 시민들의 기금을 모아서 설립한 것이다. 원래 자리에 있던 영은문(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장소)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떠서 만들었고 문 위에 있는 현판의 경우 남쪽(서울)은 독립문, 북쪽(중국)엔 獨立門으로 새겨 넣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을 상징해서 만든 상징물의 현판 글씨를 쓴 사람이 매국노 이완용이다. 운명의 장난치고는 참 짓궂은 현장이다.
독립문을 보았는데 ‘서대문 형무소’를 가지 않을 수 없다. 일제 강점기에는 전국에 30여개의 감옥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던 감옥이 서대문형무소였다고 한다. 형무소로 들어가는 입구는 높이 4m의 붉은 벽돌담이 쳐져 있다. 이곳 형무소에서 순국이 확인된 독립투사는 165명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23년 신축한 것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수감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새로 지었는데, 옥사는 물론이고 고문실과 사형장까지 두었다. 전시실에는 각종 고문을 재현한 방과 5,000여 명 수형자들의 수형기록표로 도배한 방이 있다. 유관순 지하 감옥은 여성 독립 운동가들을 수감했던 여성옥사로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 외에 김구 선생, 손병희 선생, 만해 한용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었다.
다시 독립문으로 나와서 서울역 방향으로 10분 거리에 감리교신학대학교가 있다. 감신대는 감리교 최초의 신학교육 기관으로 1887년 배재학당에서 시작되었다. 초기엔 정해진 장소와 건물도 없이 겨울 농한기에 서울, 평양, 인천 등지를 떠돌며 신학교육을 했다. 현재 위치인 서대문구 냉천동 땅을 구입해서 학교 건물을 지은 것은 1910년 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33인의 민족 대표 중 7명이 감신대 출신이었고, 심훈의 소설 ‘상록수’ 여주인공 최영신도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 오래된 건물로는 교수회관(1956년)과 대학원 건물(1960년)이 있고, 볼만한 곳으로는 2007년 개관한 ‘감신대 역사박물관(02-3916-114)’이 있다. 학교에서 길 건너 10분 거리에 경교장(사적 465, 김구 선생 집무실, 암살장소)과 홍난파 가옥(종로구 홍파동 2번지 16, 070-8112-7900), 딜쿠샤(알버트 테일러 기자가 살던 집. 3.1운동의 참상을 전 세계로 보도해주었음)가 있다.
☞ 주 소
연세대학교(서대문구 신촌동 134), 이화여자대학교(서대문구 이화여대길 52), 감리교 신학대학(서대문구 냉천동 31)
☞주변 유적지
연세대학 - 이화여대 - 독립문과 서대문 형무소 - 감신대 - 경교장(삼성강북병원 정문)- 홍난파 가옥 - 딜쿠샤(알버트 테일러가 살던 곳)
4. 남감리교의 흔적을 찾아서(배화학당, 종교교회, 자교교회)
1896.8 리드선교사 내한 (남송현 선교부), 1897.5 고양읍교회 개척, 1897.6 광희문 교회 개척, 1898년 여선교부를 고간동으로 이전, 8월부터 배화학당 시작, 1900.4 배화학당 교사와 학생들이 모여서 예배드림(잣골교회), 1906년 남송현 선교부를 사직동으로 이전, 1998년 잣골교회 교인들이 도렴동에 새 예배처 마련(종교교회), 1913년 배화학당을 사직동으로 이전, 1921.4 태화여자관 개관, 1922년 잣골교회 교인들 창성동에 새 예배처 마련(자교교회),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하나로 통합됨
장로교는 백여 개 이상의 교단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감리교는 단일교단이다. 이것은 한국 감리교인들이 갖고 있는 평범한 상식이다. 그리고 선교 초기부터 감리교는 하나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감리교는 북감리교와 남감리교 이렇게 둘이었다.
아펜젤러는 북감리교에서 파송한 선교사였다. 남감리교는 이보다 늦은 1896년 리드 선교사를 파송했다. 미국 감리교회가 남.북으로 나누어진 이유는 남북 전쟁에 있었다. 노예 문제로 인해서 미국은 남.북으로 갈려서 수많은 희생을 치렀다. 노예문제로 시작된 감정의 골은 미국 감리교회를 남.북 두 토막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온 남.북 감리교회는 서로 협력하며 선교했다.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주택을 마련하고 선교지를 선택할 때에는 북감리교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두 감리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통합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930년 두 토막의 감리교회는 하나가 되었다.
감리교인들의 기억 속에서 조차 생소한 남감리교 답사는 사직동에 있는 선교사 주택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처음에 리드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자리 잡았던 곳은 남송현(남대문 근방)이었다. 그곳에서 리드는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1897년 5월 고양읍에 첫 감리교회를 세웠고 그 해 6월 남송현 주택에서 광희문 교회를 시작했다. 남감리교가 사직동으로 선교부를 옮긴 것은 1906년이다. 현재 사직동에는 선교사 주택 2채가 남아 있다. 사직동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배화여고, 종교교회, 자교교회가 있다.
배화여고는 남감리교 여선교부에서 시작했다. 여선교부도 처음에는 남송현에 자리를 잡았다가 1898년 고간동(현재 내자동 75)으로 옮겼다. 그 해 10월 캠벨 선교사는 여학생 6명으로 학교를 시작했고 ‘배화학당’ 이란 학교 이름은 윤치호가 지어주었다. 그리고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부터 교사와 학생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그날은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창립일이 된다. 처음엔 주로 여자들이 모였고 잣골교회로 불렸다. 그 후 잣골교회 교회는 둘로 분리되었다. 도렴동 종침교 근방에 예배 터를 마련한 교회는 종교교회, 자수궁(조선시대 늙은 궁녀들이 여생을 보내던 곳)에 예배 터를 마련한 교회는 자교교회라 하였다.
배화여고(구 배화학당)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은 1913년 이다. 학교에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옛 건물들이 3개 남아 있다. 과학관은 1914년 지은 것으로 붉은 벽돌외벽을 둘렀고 2층보다 1층을 내어 쌓는 코벨 양식이다. 동창회관으로 사용 중인 건물은 1914년 지은 것으로 캠벨을 비롯한 독신 여선교사 사택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마지막으로 1926년 지은 캠벨 기념관이 있다.
종교교회는 최근에 지은 건물이라 특별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교회 외벽에 1910년과 1959년 건축 당시의 예배당 벽돌을 설치했고, 교회 안에는 역사자료 박물관을 두었다. 3.1 운동 때 담임이었던 오화영 목사가 민족 대표 33인으로 활동했다.
자교교회 건물은 종교교회보다 훨씬 오래 되었다. 1922년 건축했다. 비록 여러 번의 증개축을 하기는 했지만 90년 전 건축 당시 교회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교회 2층 복도에 오래된 성미함(誠米函)이 있고, 교육관 1층에는 교회역사자료전시관(캠벨기념홀)이 있다.
종로 인사동으로 태화관(태화빌딩)이 있다. 원래 태화관은 요릿집이었다. 그런데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는 바람에 요릿집 문을 닫게 되었다. 이때 남감리교 여 선교부에서 태화관을 매입해서 ‘태화여자관’으로 사용했다. 초대 관장 마이어즈는 요릿집 이름인 太和館을 泰和館으로 바꾸었다. 똑같은 ‘태’이지만 한문 한 글자를 바꾼 셈이다. 태화여자관은 유치원, 탁아소, 여자 실업학교, 여자 성경학교, 여성들을 위한 요리, 재봉, 영어, 도서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여성 교육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현재 있는 건물은 1980년 초에 지은 것으로 특색은 없다. 건물 1층 로비에 독립선언 역사화와 독립선언서 부조가 있고, 건물 밖 오른쪽에 ‘삼일독립선언유적지’ 표지석이 있다. 초기 태화관 유적들인 태화관 요릿집 시절의 기둥머리 지붕돌, 1939년 지었던 석조 건물 정초석,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는 예배당 긴 의자 등은 강남 수서동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에 있다.
☞ 주 소
배화여고(종로구 필운동 12), 종교교회(종로구 도렴동 32), 자교교회(종로구 창성동 156), 남감리교 선교사 주택(종로구 사직동 311), 태화관(종로구 인사동 194)
☞주변 유적지(남감리교 중심)
배화여고 - 사직동 선교부(선교사 주택) - 종교교회 - 자교교회 - 태화관
5. 북 장로교의 흔적을 찾아서
1884.9.24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알렌이 내한, 중명전에서 거주 1885.4.5 언더우드 제물포 도착, 서울에서 선교활동 시작(정동선교부), 1885.4.10 알렌 광혜원 개원, 1885년 알렌과 선교사들이 광혜원에서 예배를 드림(남대문교회는 이 때를 창립일로 주장) 1886.5 언더우드 사택에서 경신학교 시작, 1886.7 장로교 여선교사들 정신여학당 시작, 1887.9.27 언더우드 사택에서 새문안교회 창립, 1893년 봄 승동교회 창립, 1894년부터 정동 선교부 이전 시작, 1894년 연지동에 연동교회 창립, 1895.10 정동여학당을 연지동으로 이전, 1901년 경신학교를 연지동에서 재개 1903년 장로교 선교부에서 연지동 136번지 대지 구입, 선교사 사택 7채를 건축, 1909년 북촌에 안동교회 창립, 1910년 현재 위치로 새문안교회를 이전, 벽돌예배당 건축, 1913년 승동교회 현재 위치에 벽돌 예배당 건축
새문안교회는 정동 언더우드의 사택(현재 예원학교 운동장)에서 출발했다. 신문리로 이전한 것은 1910년경이다. 교회 맞은편에 세안빌딩이 있는데 이곳은 태조 이성계와 처녀가 만났던 우물가, 후에 왕후가 된 처녀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다. 여기서 ‘정동’이란 지명이 나왔다.
현재 있는 예배당은 1972년 지은 것이다. 교회 내부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지하 예배 장소인 카타콤을, 강단은 노아의 방주를 본떠서 만들었다. 교회 건축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금일봉을 하사했다고 한다. 교회 안에 있는 사료실(월, 토요일 휴관, 02-733-8160)에서 초기 장로교 역사를 감상할 수 있다.
이 교회 출신으로 ‘울밑에 선 봉선화’로 유명한 홍난파가 있다. 홍난파는 이 교회에서 성가 지휘자로 활동했다.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홍난파 가옥이 있다.
새문안교회 뿐 아니라 남대문교회, 승동교회, 연동교회, 안동교회가 초기 장로교의 서울 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남대문 교회는 1885년 재동(종로 안국동) 광혜원(제중원)에서 시작했다. 알렌과 동료 선교사들이 함께 예배드린 날을 교회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것은 장로교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 교회의 역사와 차이가 있다. 남대문 교회는 자신들이 장로교 최초라고 주장하고 있고, 건물 안에 알렌 기념관과 역사 자료실이 있다.
종로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는 1893년 봄 무어 목사가 개척했다. 현재 승동교회는 1913년 지은 것으로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130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2층 벽돌 건물로 고딕양식인데 멀리서 보면 3층처럼 보인다. 평면도는 정사각형이지만 지붕은 십자가형이다. 동서 사방 벽에 원형 아치형태의 창을 달았고 건물에 비해서 창이 많다. 1919년 3.1운동 당시 담임 차상진 목사는 동료 목사, 장로들과 함께 독립 청원서인 ‘12인등의 장서(十二人等의 長書)’를 총독부에 제출하고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살았다. 12인등의 장서는 차상진 목사가 직접 글이기도 하다. 청년 회장 김원벽 또한 남대문 역에서 수 만 명의 시위대를 지휘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교회 입구에 ‘3.1운동 기념 표지석’이 있다.
이 교회 출신으로 몇 해 전 방영되었던 드라마의 실제 주인공이 있다. 드라마 ‘제중원’에서 백정 출신이었다가 의사가 된 사람, 박서양(원래 이름은 봉주리)은 제중원 의학교(세브란스 의학교) 1회 졸업생으로 한국 최초의 외과 의사가 된 사람이다. 한 때는 고종 황제의 병을 치료하기도 했는데 1917년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조교수까지 올랐던 인물이었다.
안동교회는 승동교회 교인들이 세운 교회이다. 안동교회 설립자 중 유성준은 서유견문록을 쓴 구당 유길준의 동생으로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에는 아펜젤러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던 사람이다. 또 다른 설립자인 윤치소는 남감리교 최초 교인인 윤치호의 사촌 동생이다. 또한 윤보선 대통령의 부친이기도 하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집이 교회 정문 맞은 편에 있다. 현재는 윤보선 대통령의 아들이 안동교회 장로로 활동하고 있다. 교회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조선어학회 터’도 확인할 수 있다.
연동교회는 새문안 교회들이 중심이 되어서 현재 예배당은 1978년 건축한 것으로 외부는 열주(列柱) 형태를 취한 붉은 벽돌로 장식을 하였고, 건물의 중앙은 높이고 좌우를 낮추어서 수직으로 상승하는 느낌을 준다. 내부는 부채꼴 모양으로 좌석을 배치했다.
연동교회 주변 종로구 연지동 136번지는 북장로교 선교부가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연지동에 가장 먼저 들어 온 것은 정동 여학당(정신여중.고등학교)이다. 학교 터(연지동 136-5)에는 정신여고 본관으로 사용했던 세브란스관(1910년 건축)과 과학관(1958년 건축)이 남아 있다. 세브란스관 뒤에 500년 묵은 회화나무가 있다. 이 나무가 애국부인회 사건 당시에 큰 일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서 태극기, 독립운동 관련 비밀문서, 한국 역사 책 등을 나무 중간에 있는 구멍 속에 넣어 두었다. 그 때의 나무 구멍은 시멘트로 메워져 있다.
1903년 경 지었던 7채의 선교사 사택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물이 있다. 여선교사들이 살았던 2층 벽돌건물인데 지금은 한국장로교출판사(연지동 136)가 사용하고 있다.
☞ 주 소
새문안교회(종로구 신문로 1가 42), 승동교회(종로구 인사동 137), 안동교회(종로구 안국동 27), 연동교회(종로구 연지동 136-5), 남대문교회(중구 남대문로 5가 544)
☞주변 유적지
안동교회 주변으로 광혜원 터(헌법재판소 경내)와 운현궁, 조선어학회 터, 윤보선 대통령 주택이 있다. 광혜원 건물은 연세대학교 교내에 새롭게 복원해 놓았다. 승동교회 주변엔 중앙감리교회(1890년 아펜젤러 개척)와 대동서시 터, YMCA 건물, 태화관(태화빌딩), 3.1운동 기념 표지석 등 감리교 유적들이 몰려 있다.
6. 중앙감리교회와 대동서시 터
1890년 아펜젤러가 종로 향정동과 종로통에 집을 각 한 채를 구입, 1890년 가을부터 향정동 집에서 예배 시작(중앙교회 창립), 종로 통 집을 서점으로 활용(대동서시), 1901년 질레트가 YMCA 간사로 한국에 옴, 1903년 YMCA 창립 총회가 향정동 한옥 예배당에서 열림, 1908년 3층 벽돌 르네상스 양식으로 YMCA 건물을 지음, 1919년 중앙교회 담임 김창준 목사와 박희도 목사가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 징역형을 받음, 1920년 중반 가우처 예배당 건축, 1932년 중앙교회에서 운영하는 ‘중앙 유치원 보육학교’를 교인인 임영신이 인수, 1938년 흑석동에 ‘중앙유치원 보육원 교사(敎舍) 신축(현재 중앙대학교)
아펜젤러가 종로로 진출한 것은 1890년경이다. 그 해 향정동과 종로통에 각기 집 한 채를 마련해서 하나는 예배 장소로, 또 다른 하나는 서점으로 사용했다. 향정동 한옥에서 드린 첫 예배는 중앙교회의 시작이 되었고, 종로통 가옥은 성경과 기독교서적을 판매하는 서점(대동서시, 大東書市) 이 되었다.
향정동 한옥을 헐고 ‘가우쳐 예배당’을 지은 것은 1920년대 후반이다. 예배당 이름은 1883년 보빙 사절단으로 미국에 간 민영익을 만난 뒤에 조선 선교를 추진했던 가우쳐 목사를 기념한 것이다. 현재 자리로 교회를 옮긴 것은 1975년이다. 가우쳐 예배당을 성지출판사에 팔았고, 태화기독교 사회복지관 자리를 사서 교회를 옮겼다. 그리고 빌딩을 짓고 7층을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7층 로비에서 큰 대로변 오른쪽 아래를 내려다보면 가우쳐 예배당이 있다. 지금은 성지 출판사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3.1운동 당시에는 김창준 전도사(담임)와 박희도 전도사가 민족대표 33인으로 활약했고 옥고를 치렀다. 또한 중앙대학교가 중앙교회에서 출발했다. 원래는 교회 내에 ‘중앙유치원 보육학교’가 있었는데, 1932년 이 교회 교인 임영신이 학교를 인수했다. 그리고 1938년 흑석동에 3층 교사를 신축했는데 이것이 중앙대학교로 발전했다.
현재 교회가 있는 곳은 3.1운동 유적지에 해당된다. 특히 중앙 하나로 빌딩 뒷편 주차장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이 모여서 독립을 선언했던 명월관의 ‘별유천지(別有天地) 6호실’이 있던 장소다.
대동서시 터는 큰 길 건너 편에 있다. YMCA 건물에서 길 건너 편 정면에 있는‘ 대한기독교서회’ 와 옆에 있는 건물 한 동이 모두 대동서시 터가 된다.
교회 주변에 볼 만한 기독교 유적들이 있다. 먼저 옛 태화관 자리인 태화빌딩이 있다. 원래 태화관은 요릿집이었다. 그런데 3.1운동 당시에 민족대표들이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바람에 입장이 난처해진 집 주인(매국노 이완용)이 태화관을 남감리교 여선교부에 판 것이다. 남감리교 여선교부는 요릿집을 여성교육을 위한 사회사업기관으로 바꾸었다.
현재 있는 태화 빌딩은 1978년 새로 지은 것이다. 빌딩 앞에 ‘삼일운동선언유적지’표지석이 있는데 이것은 약간 잘못된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 태화관은 맞지만 ‘별유천지 6호실’은 옛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 자리(현재 중앙교회 주차장)에 있었다.
‘삼일운동선언유적지’ 외에 태화 빌딩에서 볼 수 있는 것은 1층 로비에 걸려 있는 ‘독립선언 역사화’와 ‘독립선언서 부조’ 정도이다. 1920년 초반의 기둥머리 지붕돌, 1939년에 지은 석조 건물 정초석, ‘태극문양’이 새겨진 예배당 의자 등과 같은 초기 태화관의 유물은 수서동에 있는 태화기독교사회 복지관(강남구 수서동 741, 02) 2040-1600)에 보관되어 있다.
한국 YMCA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그리고 한국 청년 150명의 청원서에서 시작되었다. 청원서를 받아 본 모트 총무는 질레트를 한국 YMCA 간사로 파송했다. YMCA는 1903년 10월 창립총회를 가졌는데 총회 장소는 향정동 한옥 예배당(중앙교회)이었다. YMCA가 제대로 된 건물을 갖게 된 것은 1908년경이다. 그 해 르네상스 양식의 3층 벽돌 건물을 지었다. 그러나 그 건물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현재 건물은 1976년 새로 지은 것이다.
YMCA의 역사를 추억할 수 있는 유물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출입구 오른편 벽에 붙어 있는 정초석이다. 돌에 새겨진 ‘一千九百七年’ 은 1907년 기공식 때 조선 황태자 이은(영친왕)이 직접 쓴 글이다. 건물 뒤편 주차장으로 가면 2미터 높이의 화강암 사각 돌기둥이 있다. 1914년 청년회 학관 정문에 세웠던 것으로 기둥 정면에는 ‘私立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學校’라고 새겨져 있다.
이 외에 교회 근처에 민영환 자결터와 이율곡 선생이 살았던 집터가 있고 삼일운동의 진원지인 탑골공원과 보신각이 있다. 승동교회와 피맛골 골목을 걸어 보는 것도 좋겠다.
☞ 주 소
중앙교회(종로구 인사동 194-4), 가우쳐 예배당(종로구 인사동 246), 대동서시 터(종로 2가 84-9), YMCA(종로 2가 9), 태화관 터(종로구 인사동 194 태화빌딩)
☞주변 유적지
대동서시 터와 보신각 - YMCA 와 피맛골 - 승동교회 - 중앙교회와 가우쳐 예배당, 별유천지 6호실 터 - 태화관 터(태화빌딩) - 인사동 골목(민영완자결터, 이율곡 주택 터)-탑골공원
7. 성공회 대성당과 옛 구세군 사관학교
성공회 연혁
1890.9.30 성공회 신부들 서울 도착, 1890.12.21 정동에서 코프 신부가 첫 미사 집례(서울 대성당), 1891.5.17 낙동성당(중구 충무로) 축성, 9.30일 인천 내동성당 축성, 1892.11.27 정동성당(현재 대성당 위치) 축성, 1926년 현재 서울 대성당 건축(미완성), 1978년 서울시 지방 유형문화재 35호로 지정, 1996년 서울 대성당을 완공
구세군 연혁
1908년 10월 구세군의 호가드, 본윅 등이 서울 도착, 평동에 자리 잡음, 1910년 평동에서 구세군 사관학교 시작, 1928년 사관학교를 정동으로 옮기고 현재 건물을 지음, 1988년 사관학교 건물을 구세군 중앙회관으로 사용, 2002년 정동 구세군 사관학교 건물이 서울시 기념물 20호로 지정 됨
서울에 있는 오래된 예배당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약현성당(1892) 정동제일교회(1897) 명동성당(1898) 승동교회(1913) 자교교회(1922) 성공회 대성당(1926) 가우쳐 예배당(1920년 후반)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성공회 대성당은 수평을 강조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평면은 라틴십자가 형이고 중앙 탑을 포함해서 11개의 종탑으로 사방을 둘러싼 것이 견고한 성채를 닮았다. 하늘로 솟은 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상징하고, 견고한 성채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미한다.
제단은 동쪽에 있고 출입구는 서쪽에 있다. 제단이 동쪽인 것은 해가 떠오르는 곳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동방에서 오신다는 초기 교인들의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외벽은 화강암과 벽돌로 마감을 했고 건물 내부는 본당과 지하 성당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하 성당엔 성공회 3대 주교였던 트롤로프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다. 트롤로프 주교는 서울 대성당 뿐 아니라 강화도에 있는 읍성당(1900년 건축된 한옥 성당)을 건축한 경력이 있다.
본당 제단 후진에는 반(半) 돔형 모자이크가 있다. 영국에서 특수 제작한 구슬로 모자이크를 했는데 예수님을 비롯해서 다섯 성자(마리아, 니콜라스, 요한, 이사야, 스데반)을 새겨 넣었다. 이 모자이크는 10년 동안 만든 작품으로 1938년 완성 된 것이다. 본당 동쪽 익랑에 있는 소제단은 6.25 때 순교한 신부와 수교들을 기념해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서쪽 익랑에 있는 소제단은 6.25 때 전사한 영국과 아일랜드 군인들을 기념하는 소제단인데 거기엔 1992년 11월 방한했던 찰스 황태자가 제막한 기념 현판이 붙어 있다.
성당 내에 있는 비품들은 영국 교인들이 보내 온 것이다. 1641년 제작되었다고 하는 은자개 십자가는 선교 초기 영국 수녀가 가져온 것이고, 세례대는 코프 주교의 옛 동료들이 보내온 것이다. 은자개 십자가는 분실 위험이 있어서 방문객들에게 공개하지는 않고 있다.
영국인들이 모금하고 설계한 건물이기는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한국 전통 양식을 찾아 볼 수도 있다. 관심을 갖고 보면 한식기와 지붕, 처마의 서까래 장식, 전통 격자 창살 문양 등이 눈에 들어 올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건물은 1-2년 사이에 지은 것이 아니라 70년이란 긴 시간의 결과물이다. 1926년 건축 시에는 건축비가 모자라서 미완성인 채로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그 당시 교회 평면은 직사각형 형태였다. 그러다가 1996년 양쪽 측랑을 만들고 성전을 확대하면서 오늘과 같은 십자가 형태로 바뀌었다.
성당 주변으로 성가 수녀원, 옛 주교관 건물, 영빈관으로 불리는 교구 사무실이 있는데 3채 모두 전통 한옥 건물이다. 교구 사무실은 1920년 경 수학원(修學院, 조선시대 왕실의 자제들을 가르치던 곳)을 옮겨다 놓은 것이다.
대성당 가까운 곳에 옛 구세군 사관학교가 있다. 구세군이 한국에 들어 온 것은 1908년이다. 처음엔 평동에 본영(本營)을 설치하고 사관학교를 시작했고, 1928년 사관학교를 정동으로 옮기고 현재 건물을 지었다.
2층 높이의 토스카나식(고대 그리스 건축의 기둥양식) 기둥 네 개가 설치된 중앙 출입구를 통해서 건물로 들어가면 국한문과 영문으로 기록된 <봉헌사>가 벽에 붙어 있다. 1926년 한국 구세군 ‘미주순회단’이 미국과 캐나다를 순방하여 모금해 온 7만원으로 이 건물을 지었다는 내용이다. 2층 예배당 내부는 가파른 삼각 지붕 천장에 서까래 형태의 목조 근골로 장식했고, 강대상 아래에는 회중석 방향으로 놓여 있는 장의자가 있다. 등받이 안쪽에 ‘속죄’, ‘화평’, ‘성결’ 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의자는 교인들 앉으라고 놓은 것이 아니라 무릎 꿇고 기도하라고 만든 ‘회개석’(悔改席)이다. 구세군에서는 예배 후 결단의 시간을 갖는데, 그 때 새로 나온 교인이나 하나님께 성결한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앞에 있는 회개석에서 결단의 기도를 한다.
선교 초기 구세군은 이름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았다. 구세군을 군대로 착각하고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사관이 군복을 입고 사관의 직분을 참위, 부위, 정위, 참령, 부령, 정령, 참장, 대장 등 구 한국군 부대 계급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하다못해 교인이 되는 것은 입대, 찬송가는 군가, 헌금은 탄약금으로 불렀다. 더구나 구세군이 들어와 전도하던 시기는 전국적인 항일 의병이 일어나던 시절이었다.
1907년은 헤이그 밀사 사건, 고종 퇴위, 군대해산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후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 조선 멸망)에 이르기까지 거국적인 의병투쟁이 있었다. 이런 시기에 들어와 복음을 전했던 구세군은 조선 독립을 위해서 싸우는 군대로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현재 사관학교는 과천으로 옮겨갔고 옛 사관학교 건물은 구세군 중앙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주 소
성공회서울대성당(중구 정동 3), 옛 구세군사관학교(중구 정동 1-23)
☞주변 유적지
주변에 정동제일교회, 중명전(알렌 사택 터), 구 러시아 공사관(아관파천), 예원 중학교(언더우드 사택 터), 이화여고(유관순 우물과, 캠벨 기념관, 손탁 호텔 터), 새문안교회 등이 주변에 포진하고 있다.
8. 명동성당과 절두산 순교성지
1777년 정약전을 비롯한 젊은 선비들이 천주교 교리 연구회 모임을 가짐,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 받음, 천주교인이 증가하면서 조선 천주교회 형성, 1785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가짐. 1786년 김범우가 귀양지에서 죽음(최초의 순교자), 1791년 진산사건으로 윤지충, 권상연 순교, 1794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 입국, 1801년 신유박해로 300명 이상 순교, 이 때 주문모 신부도 순교, 1831년 조선 교구 창설, 1839년 기해박해, 1845년 김대건, 상해에서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서품 1846년 병오박해, 김대건 신부 순교, 1856년 충청도 배론에 신학교 설립 1866년 병인박해, 프랑스 신부 9명 순교, 병인양요, 1886년 한불조약 체결로 천주교 금지 해제, 1898년 5월 29일 명동성당 축성,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완공,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설립 200주년 기념으로 교황 바오로 2세가 절두산 순교성지 방문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젊은 선비들의 학문적인 관심에서 출발했다. 1777년 권철신, 정약전의 주도로 젊은 선비들이 절에 모여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다. 처음에는 서학(西學)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천주교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 중 하나인 이벽은 친구 이승훈으로 하여금 북경에 있는 천주교 신부를 찾아가 영세를 받도록 권면했다. 이승훈은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귀국한 날부터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전파했고 이후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인이 되었다.
매 주일마다 모여서 정기적인으로 예배를 드린 것은 그 이듬해(1785년) 부터였다.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 모임은 곧 발각되었다. 김범우(세례명은 도마)는 이승훈의 전도로 천주교인이 된 사람으로 출신은 중인 역관이었다. 김범우는 모진 고문을 받고 충청도 단양으로 귀양을 갔는데 1년 후 죽고 말았다.
명동성당의 역사는 1784년 명례방 집회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명동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최초의 순교자였던 김범우의 집터이기도 하다. 한국 초기 벽돌조의 성당이고 고딕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성당의 평면은 라틴 십자가형 삼랑식인데, 본당의 높이는 23m, 종탑의 높이는 45m 이다. 건축 당시에는 큰 서양식 건물을 지을 기술자가 없어서 모두 청나라에서 데려왔다고 한다.
지하 성당에는 1839년 순교한 앵베르 범 주교와 성 샤스탕 정 신부, 성 모방 나 신부의 유해 일부와 성 김성우 안토니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등 다섯 분의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다. 대성전 뒤에 있는 후원에는 ‘무염시태성모상’이 있는데 이것은 1948년 명동대성당 축성 5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에서 제작해서 들여온 것이다.
명동성당은 몇 해 전 선종(善終, 개신교에서는 하늘로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로 소천(召天)이라고 한다) 하신 김수환 추기경이 시무했던 곳이다. 또한 군사독재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다.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 군부 독재에 대항하다가 쫓겨 온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에게 명동성당은 안전한 도피성이었다.
합정동에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는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한 신자들을 기념해서 1967년 만들어졌다. 절두산(切頭山)은 원래 ‘잠두봉’, ‘들머리’로 불렸다고 한다. 이곳에 양화진이 있었는데, 양화진은 한강진, 삼전도와 함께 조선 3대 나루 중 하나였고 삼남에서 올라오는 모든 물자의 집산지기도 했다. 또한 경치가 아름다워서 시인들이 찾아와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던 장소였다.
그러나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함대를 방어하는 기지로 사용되었고 프랑스 군이 퇴각한 뒤에는 많은 천주교인들의 처형 장소로 사용되었다. 대원군은 “불국 양이들에 의해 더럽혀진 땅을 그들이 전한 천주쟁이들의 피로 깨끗하게 씻겠다”며 잠두봉에서 천주교인의 목을 쳤다. 절두산은 그 때부터 불린 이름이다.
절두산 기념관 내에는 성자 28위 유해를 모신 지하 묘소와 자료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이 있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설립 200주년 기념 및 103위 순교자들의 시성식을 위해 한국에 온 교황 바오로 2세가 지하 묘소를 방문해서 오랫 동안 기도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성지 경내에는 척화비와 형구돌(천주교인들을 고문하고 죽였던 도구) 이 있다. 성지와 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예약(02-2126-2200)이 필요하고 월요일은 휴관이다.
☞ 주 소
명동성당(중구 명동 2가 1) 절두산 순교성지(마포구 합정동 96-1)
☞ 주변 유적지
명동성당과 가까운 곳으로는 영락교회(중구 저동 2가 69)가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락교회 김응락 장로는 예배당을 버리고 피난갈 수 없다며 교회를 지키다가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순교했다. 김응락 장로의 순교비엔 이런 글귀가 있다. “의의 길 택하시오며 모진 붉은 돌에 쓰러지시올 때 스데반의 미소 또한 그 광채 만면에 사무치고 마지막 한방울 피 흘리시도록 영락의 제단 부둥케 안으사 숨을 거두셨으니 베다니 들에 첫 번 맺은 순교의 원공은 장하시도다”
절두산 순교 성지와 가까운 곳에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이 있다.
9. 양화진 선교사 묘원과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1883년 인천(중구 북성동)에 외국인 묘지 설치, 1887년 인천 외국인 묘지에 첫 매장자 발생, 이후 인천 여러 곳에 외국인 무덤이 조성 됨, 1893년 서울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 개설 허가, 헤론 선교사 매장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는 145명의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 무덤이 있다. 지방도 아닌 서울에 외국인의 무덤을 허가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개항 이후 한국에서 죽은 외국인들을 위한 묘지는 인천에 있었다. 인천 중구 북성동, 남구 도화동, 중구 율목동 등 여러 곳에 외국인 묘지가 조성되었다. 그러다가 외교관들과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서 서울에도 외국인 묘지를 조성하게 되었고, 장로교 선교사 헤론이 첫 매장자가 되었다.
4,000평 선교사 묘원에는 417명이 묻혀있는데 선교사들 뿐 아니라 각 국 외교관, 사업가, 언론인, 군인들도 묻혀 있다. 그들 중 선교사와 그 가족들 145명이 묻혀 있는데, 교파별로는 장로교 26기, 감리교 20기 그 외에 선교사 무덤 14기다 있다.
그들이 이곳에 묻힌 사연도 여러 가지다. 헐버트의 무덤이 있다. 그는 1886년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들어와서 1909년 일본에 의해서 강제 출국을 당할 때까지 23년 동안 한국의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몇 안 되는 선교사 중 하나였다. 1905년 을사늑약 때에는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가서 백악관, 국무성, 의회를 방문하는 외교적 노력을 했고,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이 열리는 것을 한국에 알려 주고 헤이그 밀사가 파견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또한 헤이그로 가서 한국대표단의 회의 참석을 주선하고 불어로 된 호소문을 작성해 주기도 했었다. 일본에 의해서 강제 출국 당한 그가 한국에 다시 돌아 온 것은 1945년 8.15 해방이 되어서였다. 그는 죽으면서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묘원에 묻힌 이들 중에 유일한 일본인이 있다. 소다 가이치, 그는 41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서 헌신했다. 어떤 때는 그가 가르치고 키운 한국인들이 독립 운동을 하는 바람에 일본 경찰에게 불러가서 조사받기도 했었다. 그는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우리 정부로 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감리교 첫 순직자인 제임스 홀의 무덤이 있다. 그가 죽은 뒤에 그의 부인 로제타 홀은 조선에 남아서 평양기홀병원과 경성여자의학교(후에 고대병원)를 설립했다. 아들 셔우드 홀은 폐결핵요양원을 한국에 처음으로 개설했고 크리스마스실을 처음으로 창시했다. 그들 가족들의 이야기는 ‘양화진 사랑’이라는 연극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한, 감리교 첫 번째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의 가족묘가 있다. 그는 1885년 입국해서 1902년 목포에서 열린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러 가다가 바다에서 순직했다. 그의 아들과 딸 또한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와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에서 활동을 했다.
아펜젤러 목사 무덤 맞은편에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튼 부인의 무덤을 비롯해서, 배화학당을 설립한 캠벨 선교사, 1903년 원산 대부흥 운동의 주역인 하디 선교사의 무덤이 있다.
그외 장로교 선교사들의 무덤으로는 언더우드 목사의 가족 묘, 광혜원에서 활동했던 애비슨 선교사, 1893년 곤당골에 승동교회를 개척했던 무어 목사의 무덤이 있다. 무어 목사의 묘비는 많이 훼손된 상태다. 6.25 때 이곳 양화진 묘원에서 국군과 인민군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때 날아온 총탄에 맞은 흔적이다.
동작구에 있는 국립 서울 현충원은 453만 평 넓이에 17만 기의 묘가 있다. 여기서는 기독교인으로서 독립 운동에 헌신했던 믿음의 선배들을 만나볼 수 있다. 감리교 인으로는 손정도 목사, 신석구 목사, 이필주 목사, 전덕기 목사, 유관순 열사, 이동휘 권사 등이 있다. 손정도 목사는 정동제일교회 목사로 있다가 3.1운동 직전 상하이로 건너가서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장(국회의장)으로 활동했다. 만주로 가서는 이상촌(理想村) 건설에 열정을 쏟았다. 그의 신앙과 민족의식은 김일성 같은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그의 비문에는 ‘하나님 사랑이 나라 사랑이요 이웃 사랑이 민족 사랑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전덕기 목사는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교회 청년들과 함께 을사늑약 반대 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주의자였다. 1907년 스크랜튼의 뒤를 이어서 상동교회 담임자가 되었다. 그는 신민회의 창립 회원이었고,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는 데에 깊숙이 관여했고 그들이 출발 할 때 기도해 주기도 했었다. 그는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해서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할 인재들을 양성했다, 그러나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때문에 잡혀 들어가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비록 무죄로 풀려 났지만 고문 휴우증으로 1914년 죽음을 맞았다. 39살 젊은 목사의 마지막 한마디는 “나는 천사로 더불러 돌아가노라”였다.
신석구 목사(당시 서울 수표교 교회)와 이필주 목사(당시 정동제일교회)는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했고, 고향 천안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옥사한 주기철 목사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전덕기 목사, 유관순 열사, 헤이그 밀사 이상설, 강화중앙교회 권사였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은 이동휘 권사 등 감리교 독립지사들의 무덤은 독립지사 묘역 한편에 위치한 무후선열제단(유해도 없고 후손도 없는 애국지사들)에 있다. 국가 원수 묘소로 가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정동제일교회 이승만 장로의 무덤이 있다.
동작구에서 또 한군데 들릴 곳이 있다. 숭실대 캠퍼스 안에 있는 한국기독교박물관인데, 통일 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 십자가를 비롯한 고대 경교(일명 네스토리우스교, ) 관련 유물 그리고 천주교와 개신교의 수용, 박해,성장을 보여주는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김양선 교수가 학교에 기증한 3,600점의 소장 자료가 이 박물관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고, 현재 건물은 2004년 개관했다.
☞ 주 소
양화진선교사묘원(마포구 합정동 145-8), 국립서울현충원(동작구 현충로 210),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동작구 사당로 19)
☞ 주변 유적지
양화진 선교사묘원에서 도보로 15분 떨어진 곳에 절두산순교성지가 있음
제 2 장 인천광역시
1883.1 인천 개항, 1884.6 미국 선교사 맥클레이 인천도착, 1884.9 의료 선교사 알렌 인천도착, 1885.4.5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인천 도착,
인천의 옛 이름은 미추홀이다. 미추홀은 ‘밑골, 바탕골’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비류가 나라를 세울 때부터 불린 지명이다. 인천이란 지명은 조선 태종 13년(1412년)부터 사용되었다.
인천은 기독교 복음이 가장 먼저 상륙한 곳이다. 개항 이후 인천을 찾은 첫 손님은 맥클레이 목사와 알렌이었다. 그리고 1885년 4월 5일 오후 3시 감리교 아펜젤러와 장로교 언더우드 목사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국내 정세가 불안했던 이유로 아펜젤러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6월 20일 다시 인천에 돌아와서 38일 동안 머물렀는데 내리교회는 이 기간을 교회 창립일로 기억하고 있다.
10. 조선 선교의 문이 열린 곳, 중구 내리교회
1885.6.20 아펜젤러 재입국(내리교회 시작), 1889.7 답동성당 시작(발렘신부 부임), 1890년 성공회 인천 선교 시작, 1892년 영화초등학교 개교, 1894년 감리교 여선교사 숙소 건축(현재 창영교회 사회복지관), 1899.12(내리교회에서 제1회 신학회), 1900.12 신학월보 발간, 1902년 내리교회 교인 50명이 포함된 하와이 이민단 출발, 1986년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 기념탑, 1995년 국제성서박물관 개관, 2008년 인천선교역사기념관 설립
현재 내리교회는 1987년 신축한 것이다. 2층 입구에는 초대 담임인 아펜젤러 목사, 2대 담임목사 존스, 3대 담임목사인 김기범 3명의 흉상이 있고, 정원에는 ‘하와이 이민 100주년 기념비와 ’한국선교 120주년 기념비‘ 그리고 1901년에 만든 종(鐘)이 있다. 2층과 3층 로비로 올라가면 역사전시관이 있는데 1890년부터 내려온 사진 60여 장과 아펜젤러 목사의 성경책, 1923년 제작된 내리교회 역사책이 전시되어 있다.
내리교회는 감리교 최초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교회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먼저 예배당을 건축(1891년)했고, 감리교 청년 조직인 엡윗 청년회를 가장 먼저 조직(1897년 9월)했다. 또한 교회에서 한국인 목회자 양성기관인 신학회(1899.12)를 처음으로 조직하고, 한국최초의 신학잡지인 신학월보(1900.12)를 발행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사립학교인 영화초등학교는 존스 부인이 1892년 설립한 것이다.
1902년 내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하와이 이민자들이 인천을 출발했다. 이는 국가에서 공인한 첫 번째 해외 이민으로 존스 목사가 하와이이민을 모집했다. 이민단과 더불어 홍승하 목사를 하와이로 보냈는데 이것은 한국 교회가 파송한 첫 번째 선교사이다.[하와이 이민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중구 월미로 32-9(북성동 1가)에 있는 ‘한국이민사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물관은 4개의 상설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시관 안에서 최초의 공식 여권인 집조와 하와이 이민선인 캘릭호의 모형을 볼 수 있다.]
교회 후문 옆에서는 1901년 당시의 예배당(웨슬리예배당, 평면이 십자가 형태인 석조 예배당)을 복원공사 중이다. 또한 ‘아펜젤러 비전센터’도 건립 중이다.
내리교회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성공회 내동성당(시도유형문화재 51호)이 있다. 성공회가 한국에 들어 온 것은 1890년경이고 그 해부터 서울과 인천에 예배 터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1891년 내동성당을 지었다. 원래 성당은 6.25 전쟁 때 파괴되었고 1956년 현재 건물을 새로 지었다. 성당은 화강암을 쌓은 석조건물로 서구식 바실리카 양식에 한국의 전통 처마양식을 덧입힌 지붕을 올렸다. 성당 내부는 12개의 십자가 모양의 기둥이 있는데 이는 12사도를 상징한다.
내리교회 길 건너편에 천주교 답동성당(문화재 사적 287호)이 있다. 성당은 1897년 건축한 성당을 확장 증축한 것으로 1936년 완공했다. 이 후 몇 차례의 개축이 있었지만 본래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8각형 모양의 종탑 3개이다. 중앙에 큰 종탑을 설치했고 좌우에 작은 종탑을 놓았다. 중앙 종탑 아래에 장미창이 있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벽면에 예수님의 십자가길 14처 부조를 설치해 놓았고 양쪽 기둥은 아치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제단 뒤와 좌우 벽면에 있는 색채 유리화가 인상적이다.
내리교회에서 차이나 타운으로 들어가면 짜장면 박물관(등록문화재 246호)이 있다. 이 박물관은 옛 공화춘 건물(1912년 개장)을 개조한 것으로 지금도 하루 700만 그릇이 팔린다는 자장면의 역사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근대건축전시관(구 인천 일본 18은행지점), 옛 대불호텔 터(아펜젤러가 묵었던 숙소), 인천 개항박물관(1899년 건축, 구 일본 제1은행)을 거쳐서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이 있는 곳으로 간다.
기념탑은 파라다이스 호텔 아래쪽에 있는데 1885년 4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인천에 도착했을 때 첫 발을 내디뎠을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총 높이 17m짜리 기념탑은 50평 면적 위에 세워져 있고 3개의 탑신과 3인의 청동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3인의 청동상은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이고 탑신 양쪽 부조물은 부활의 환희와 복음이 이 땅에 충만케 된 것을 의미한다.
☞ 주 소
내리교회(인천시 중구 내동 29), 내동교회(인천시 중구 내동 3), 탑동성당(인천시 중구 답동 3)
☞주변 유적지
동인천역에서 탑동성당으로 먼저 가는 것이 좋다. 성당을 둘러 본 후에 내리교회 - 내동교회 - 자유공원(1888년 건립, 서울 탑골공원보다 9년 빠름) - 차이나 타운(2012년 4월부터 자장면 박물관 개장) -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 옛 대불호텔 터 - 근대건축전시관(구 인천 일본18은행) - 제물포 구락부 - 신포시장(신포문화의 거리) 투어
11. 동구 영화초등학교와 창영 사회복지관
1892년 내리교회에서 영화초등학교 시작, 1894년 감리교 여선교사 주택 건축(현재 창영사회 복지관), 1907년 창영초등학교 시작, 1934.6 내리교회에서 창영교회 분립
한국 최초의 사립학교인 영화초등학교는 내리교회를 담임했던 존스 목사의 부인 벤젤이 시작했는데 1894년 9월 관립왕실학교로 출발한 서울 교동초등학교보다 2년 빠른 것이다. 학교 이름인 영화(永化)는 영생(永生)과 교화(敎化)의 줄임말로 기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학교 본관(인천시 유형문화재 39호)이다. 1904년 존스 목사가 미국 자선사업가인 콜린스로부터 1천 달러를 기부 받아서 지은 건물로 원래는 중구 경동 싸리재에 있던 건물이다. 그런데 1911년 학교를 이전하면서 지금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이 건물은 반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구성된 맞배지붕 형식이고 3층 발코니에 있는 서까래는 인자(人字)형태로 노출되어 있다. 이 학교 출신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박사이고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던 김활란(새 찬송가 345장 작사자)과 영화배우 황정순이 있다.
영화초등학교에서 20m 거리에 창영사회복지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8호)이 있다. 원래는 감리교 여자 선교사 합숙소였는데 1894년 건축 당시에는 ‘Gamblee Home'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은 창영교회에서 인수해서 ‘창영사회복지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붕은 파란색 양철이고 벽은 빨간 벽돌이다. 창문은 조선시대 서원과 승방에서 사용하던 방법과 같이 용자(用字) 모양으로 꾸몄고, 가장자리는 빗살 모양이다. 건물은 지상 2층, 지하 1층이고 복도엔 마루가 갈려 있다. 아래와 위층에 각각 5개의 방이 있고 지하에는 건축 당시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었던 보일러 시설이 남아 있다.
기독교 유적은 아니지만 영화초등학교와 이웃하고 있는 창영초등학교에도 옛 건물이 남아 있다. 창영초등학교는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로 시작했고 현재 남아 있는 빨간 벽돌 교사(校舍)은 1922년 조선인 유지들이 뜻을 모아서 모금한 기금으로 완공했다. 학교에는 야구부가 있는데 한화 이글스의 에이스인 류현진 선수가 창영초등학교 야구부 출신이다.
주위에 있는 배다리 골목은 헌책방거리로 유명하다. 한 때는 서울 청계천에 이어서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헌책방 거리였고 30-40개의 서점이 있었다. 지금은 겨우 서점 몇 개가 옛 추억을 짊어지고 힘겨운 삶을 견디고 있다. 시간이 있다면 ‘아벨서점’을 비롯해서 60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는 ‘집현전서점’에서 좋은 책 한 권을 골라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차로 10분 거리에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동구 솔빛로 51[송현동 163])이 있다. 60-70년대 인천에서 가장 가난했던 달동네 사람들의 삶을 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입장료는 성인 500원, 청소년은 300원이고 10인 이상이면 50% 할인이 된다. 박물관 안에 ‘문화해설사’가 배치되어 있어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중구와 동구에서 초기 기독교 유적을 살펴보았다면 남구 주안과 부평구로 가서 ‘국제성서박물관(남구 경인북 2길 8[주안1동 192-3])’과 ‘한국선교역사기념관(부평구 갈산동 5-12)’에서 다양한 성경과 한국 교회의 역사를 관람할 수 있다.
국제성서박물관은 300개 나라 언어, 15,000여권의 각종 성경과 5,000여점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1456년 구텐베르크 성경 영인본(본원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장)을 비롯해서 킹제임스 성경(1611년) 원본, 위클리프 성경, 마르틴 루터 성경 등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고 각 국 언어로 번역된 현대 성경들까지 구비하고 있다.
한국선교역사기념관은 3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 성서역사관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 2층 한국기독교관I은 기독교 전래부터 해방 전 까지 한국 선교와 순교자들의 모습, 3층 한국기독교관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기독교의 부흥과 성장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이 외에 송암 박두성 기념관(남구 학익동 709-1)을 추천하고 싶다. 박두성(1888-1963)은 강화도 교동교회 출신으로 1926년 한글점자인 ‘훈맹정음’을 반포해서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들에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는 점자 성경을 만들었고 영화초등학교 교장으로도 재임했다. 사후에 은관문화훈장(1992년)을 받았고 문화관광부에서 지정한 4월의 문화인물(2002년)로 선정되기도 했다. 박물관은 시각장애인 복지관 건물 1층에 방 하나를 꾸민 것이다.
☞ 주 소
영화초등학교(인천시 동구 우각로 44), 창영사회복지관(인천시 동구 창영동 42-3)
☞주변 유적지
남구(국제성서박물관과 송암 박두성 박물관)와 부평구(한국선교역사기념관)은 거리상의 문제로 제외하고 동구 지역 중심으로 답사 일정을 세움
도원역에서 출발 - 창영사회복지관(여선교사 사택) - 영화초등학교 - 창영초등학교 - 배다리 헌책방 골목 -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12. 옹진군 백령도 중화동교회
1832년 귀츨라프 방문, 1865년 토마스 목사 방문, 1883년 의주 신앙공동체 형성, 1884년 황해도 소래교회 설립, 1898년 백령도 중화동교회 설립
고구려 시대에 백령도의 원래 이름은 곡도(鵠島)인데 곡(鵠)은 고니를 말하는 것이다. 고려 태조 때부터는 백령(白翎, 흰 날개, 깃)으로 불렸다. 이러한 명칭은 온갖 철새들이 섬에 모여 살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원래는 황해도 장연군에 속했지만 1945년부터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고, 인천시에 들어온 것은 1995년부터이다.
백령도는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191Km 떨어져 있고, 북한과의 거리는 16Km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서 8번째로 큰 섬이고, 2011년 3월 기준으로 5,006명이 거주하고 있다. 11개의 교회가 있고, 전체 주민의 90% 이상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백령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는 중화동 교회인데 1898년 설립되었다. 그 이전에는 귀츨라프와 토마스 목사가 방문한 적이 있다. 교회 옆에는 ‘백령도기독교역사관’이 있고, 교회 앞뜰에는 백주년기념비와 놋쇠로 만든 종이 전시되어 있다.
☞ 주 소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백령도 가는 배가 오전 8시 출발(백령도에서는 1시 30분 출발), 소요시간은 4시간, 운임은 1인당 57,400원
중화동교회(옹진군 백령면 연화리 335)
☞주변 유적지
심청각과 효녀 심청의 동상, 콩돌 해안(천연기념물 392호), 두무진(명승 8호) 이 있다.
13. 강화도 교산교회와 홍의교회
1892년 존슨 목사의 강화도 입성 실패, 1893년 강화도에 감리교 교산교회, 서도중앙교회, 성공회(강화읍성당) 설립, 1896년 홍의교회 설립, 1898년 온수리 성당 설립, 1900년 강화중앙교회 설립, 1902년 김상임 별세, 1903년 박능일 별세, 1907년 감리교인 4명 순국, 1915년 마리산 부흥회 시작, 1919년 삼일만세 시위(감리교 길상결사대 조직)
강화도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이다. 갑비는 강을 고차는 꽃을 나타내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강에 떠 있는 꽃과 같다는 뜻인데 한문으로는 강화(江花)가 아니라 강화(江華)라고 표기한다. 강화란 명칭은 고려 후기(1377년)부터 사용되었다.
강화도에 복음이 들어 온 것은 1893년경이다. 그 이전(1892년 가을)에도 강화도에 복음을 전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당시 내리교회 담임목사인 존스가 강화도에 들어오려고 했지만 지방 관리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반대한 이유는 미국인 목사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선 말기 강화도는 프랑스군(1866, 병인양요), 미군(1871, 신미양요), 일본군(1875, 운양호 사건)과 충돌했던 전쟁터였다. 프랑스군은 관공서와 민가에 불을 질렀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그때에 규장각이 불탔고 왕실의궤(2010년 반환)를 빼앗겼다. 미군과의 전투로 광성보에서는 어재연 장군과 350명의 군인들이 전사했다. 초지진을 초토화시키고 강제로 불평등조약(1871, 강화도조약)을 채결한 일본에 대한 반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인이 강화도에 들어와서 전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성문(城門)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존스의 강화도 입성이 실패한 다음 해(1893년) 강화도 북쪽 시루미(증산) 마을에 교산교회가 설립되었다.
시루미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는 데에는 이승환의 역할이 컸다. 이 마을 출신인 이승환은 인천으로 가서 술집을 하다가 내리교회에 등록하게 된다. 당시 내리교회는 전도의 일종으로 ‘계모임’을 만들었는데 이승환은 계원의 자격으로 예배에 참석하게 된다. 처음에는 곗돈 붓고 목돈 타는 재미에 교회를 다니다가 진실한 교인이 되었다. 얼마 후 술집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이승환이 자신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림으로 교산교회가 시작되었다. 교산교회가 창립 일을 1893년 4월로 잡는 것은 이승환이 첫 예배를 드린 시점이 모내기철이었다는 구전에 근거한다.
시루미에 예배 모임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존스 목사가 배를 타고 양사면 앞 바다까지 왔지만 마을 유지 김상임의 반대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이승환은 한 밤중에 어머니를 업고 존스목사가 있는 바닷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배에 올라서 어머니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1년 후 김상임이 회심하고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는 안정을 되찾고 크게 부흥했다.
교산교회 예배당은 2003년 완공한 것으로 ‘존스기념예배당’으로 불린다. 교회 창립 당시 내리교회 담임이었던 존스목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예배당은 날개를 접고 앉아 있는 비둘기 형상을 닮았다. 예배당 본체는 비둘기 몸통, 종탑 부분은 목과 머리에 해당한다. 예배당 건너 편 작은 동산에는 김상임 전도사의 가족묘가 있고, 동산을 넘어가면 이승환이 세례를 받았던 바다가 있다. 물론 바다로 나갈 수는 없다. 바다건너 편이 북한 땅이기 때문이다. 교회 마당에는 ‘김상임 공덕비’가 있다. 감상임은 내리교회에서 시작한 신학회 1회 입학생으로 공부를 했고 1902년 4월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열병에 걸린 교인 심방을 갔다 온 후에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목사 안수 받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교회에서 400m 떨어진 곳에 이승환의 생가 터(교산교회 첫 예배터)가 있다. 여기서 강화도 감리교회가 시작되었다(2012년 현재 125개 감리교회와 17,200명의 감리교인)
1896년 홍의교회가 설립되었다. 김상임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하게 된 홍의마을 박능일은 김상임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교산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리다가 얼마 후 자신의 집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홍의교회는 예수 믿고 이름을 바꾼 교인들로 유명하다. 교인들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항렬을 버리고 천(天), 경(敬), 일(一), 신(信), 애(愛)가 들어간 이름을 지었다. 그러다 보니 초기 교인들의 원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박능일, 김경일, 종순일, 권신일, 주선일 등 홍의교회 교인들은 일자(一字) 돌림이 많다.
홍의교회 예배당 입구에는 교회 역사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다. 교인들이 이름을 바꾼 이야기, 1898년 강화도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식 장례예배를 드린 것, 홍의교회 교인들이 교동도, 주문도, 강화도 전역을 다니며 교회를 세웠는데 그중에서도 종순일이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고 전도자가 되었다는 감동적인 사실들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서 2층으로 올라가면 ‘역사전시실’이 있다. 그곳에서 100년이 넘은 낡고 오래된 성경책과 홍의교회 초기 문서들을 관람할 수 있다.
교회 옆에는 많은 무덤들이 있다. 그곳에서 초기 홍의교회 지도자였던 김경일 전도사와 ‘복음이 된 할머니’ 무덤을 볼 수 있다. 이름은 몰라도 ‘복음이 된 할머니’라는 별명이 붙은 무덤의 주인은 강화 최초의 기독교 장례식의 주인공인 고씨 할머니로 알려져 있다. 교회에서 뒤편에 있는 동산 길을 따라서 100m 정도 올라가면 교회 창립자인 박능일의 무덤과 안내판이 있다. 박능일은 홍의교회와 강화중앙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1903년 죽을 때는 자신의 재산을 홍의교회에 기부했다.
홍의교회에서 1Km 떨어진 곳에 강화역사관과 고인돌 공원이 있다. 강화역사관은 월요일은 휴관이고 고인돌 공원엔 3,500년 전에 만든 고인돌이 있다. 이 고인돌은 남한에서 가장 큰 탁자식 고인돌이다.
☞ 주 소
교산교회(양사면 교산리 504-2), 홍의교회(송해면 상도리 943), 망월교회(하점면 망월3리 1862) 교동교회(교동면 상룡리 628-2)
☞주변 유적지
강화읍에서 교산교회로 출발 - 망월교회(1900년 설립, 학 모양의 예배당) - 강화역사관과 고인돌 공원 - 홍의교회
교동교회는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야하는데 배는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함
14. 교동교회와 망월교회
1899년 여름 교동교회 설립, 1900년 망월교회 설립, 1933년 읍내리에 있던 교동교회를 상룡리로 이전, 새 예배당 건축, 1991년 교동교회를 현재 위치로 옮김
홍의교회에서 창후리 방면으로 차를 몰고 20분 정도 달리면 망월교회와 교동교회가 보인다. 망월교회는 1900년 설립되었는데 현재 건물은 1999년 완공한 것이다. 논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고 마을은 작은 섬처럼 보인다. 교회는 마을 한 가운데 있다. 예배당의 외형이 아래는 방주(方舟), 위는 종이학을 닮았다. ‘종이학 교회’란 소문이 나서 구경하러 오는 방문객들이 괘 많은 편이다.
교동교회로 갈려면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볼 수 있다. 선착장에서 1시간 간격으로 배가 뜨는데, 배를 타면 창후리에서 교동도까지 20분(3.2km) 걸린다.
교동교회는 1899년 홍의교회 교인 권신일이 섬으로 들어와서 세운 첫 번째 교회가 된다. 교동으로 들어가기 전 권신일은 아내와 의논했다. “교동으로 이사하는 것이 우리 부부에게 고난이 될 수도 있소. 하루에 한 끼만 먹게 된다면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요.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하지 않겠소?
권신일의 굳은 결심을 알게 된 부인의 도움으로 교동선교가 시작되었다. 두 부부의 노력으로 1년 만에 10가정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교동읍 외에 인사리와 서한리에도 각각 예배처가 생겼다. 처음 예배를 드렸던 읍내리 교동교회 터는 고추밭이 되었고 서한리 예배 터엔 나무들이 무성하다. 인사리 예배 터는 알 수가 없다.
현재 교동 섬엔 12개의 감리교회가 있고 3,200명 인구 중 700명이 감리교인이다. 교동에서 방문할 곳은 옛 교동교회 건물(옛 상룡리 예배당)이다. 1933년 읍내리에 있던 교회를 상룡리로 이전하면서 새로 지은 예배당이다. 전통 한옥 형태로. 평면은 직사각형이다. 출입문은 두 개인데 왼쪽 문은 남자, 오른쪽 문은 여자가 출입하도록 만든 것이다. 예배당 옆 종탑에 매달린 종은 80년 전 인천 내리교회에서 가져온 것이다. 일본 경찰에게 공출로 빼앗긴 적도 있었지만 해방이 되면서 다시 교회로 되돌아 왔다. 옛 교동교회에서 20m 떨어진 곳에 작은 공터가 있다. 크고 파란 물통이 놓여 있는데, 훈맹정음을 만든 박두성의 생가 터이다.
113년 전 읍내리에 있던 교동교회 첫 번째 터는 옛 상룡리 예배당에서 3Km 떨어진 곳에 있다. 읍내리 처음 교회 터엔 아무런 표식이 남아 있지 않고 100년 전 교회에서 사용했던 우물이 하나 남아있다.
그런데 우물 옆에 조선시대 10대 국왕인 ‘연산군 적거지(적거는 죄인이란 뜻)’ 푯말이 있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읍내리 교동교회 터와 연산군 적거지가 같이 붙어 있다.
☞ 주 소
망월교회(하점면 망월3리 1862), 교동교회(교동면 상룡리 628-2)
☞주변 유적지(교동도 기독교 유적지)
옛 상룡리 예배당(1933년)과 박두성 생가 터 - 교동읍성 - 교동부사 터와 황룡 우물(태종 임금때 황룡 두 마리가 나왔다는 조선왕조실록 기록이 있음) - 읍내리 교동교회 터와 연산군 적거지 - 삼도수군(충청도,경기도,황해도) 통어영 터 - 1930년 대 인사리교회 두번 째 터와 북한 연백지역 관람
15. 강화읍성당과 온수교회
1893. 4 교산교회 설립, - 1893년 봄 성공회 코프 주교가 강화 방문, 1893.7 성공회 강화읍성당 설립, 워너 신부가 주문도 방문, 1898년 온수리 성당 설립, 1900년 강화중앙교회 설립, 1902년 윤정일이 주문도에서 전도
성공회가 강화도에 들어 온 것은 감리교와 같이 시기다. 감리교가 강화도 북쪽 해안가 이승환의 집에서 시작했다면 성공회는 강화도에서 가장 큰 포구,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갑곶 나루에서 출발했다.
1893년 7월 강화도에 도착한 워너 신부는 갑곶 나루에 초가집 한 채를 구입했다. 그리고 이 집에 머물면서 전도했고 고아들을 모아서 교리를 가르쳤다. 워너 신부가 주문도를 방문한 것도 이 때쯤일 것이다. 그러나 주문도 방문은 단순방문에 그쳤고 새로운 결신자를 만들지는 못했다.
성공회가 강화읍에 자리를 잡은 것은 워너의 후임자 트롤로프 신부 때였다. 트롤로프는 총제영 학당(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1893년 9월 개교했지만 청일 전쟁이 끝난 뒤에 일본에 의해서 폐쇄되었다) 교관이었던 콜웰과 커티스의 집을 구입해서 성당으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1900년 지금의 성당을 완공하고 축성했다. 축성 112년을 맞이한 강화읍성당(사적 424호)은 조선의 전통 한옥과 서양의 바실리카 양식을 절충해서 지은 것이다.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은 3칸으로 되어있고 가운데 대문이 양쪽 문보다 높은 솟을 대문이다. 외삼문을 지나면 단층 팔작지붕을 한 두 번 째 문이 있는데 왼쪽에 범종을 걸어놓았다. 종은 항아리를 닮았는데 표면에는 태극무늬와 십자가와 요한복음 1: 1-9 말씀을 새겨 놓았다. 종을 다는 고리는 성령의 불꽃을 상징한다. 외삼문과 두 번째 문은 사찰의 일주문과 천왕문에 해당되는 것으로 두개의 문을 통과하면 예배당(사찰의 대웅전에 해당)이 나온다. 예배당 입구에는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주련이 매달려 있다.
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무시무종선작형성진주재) 처음과 나중이 없으시나 소리와 모습을 먼저 지으셨으니 참 주재시다
宣人宣義律照拯濟大權衡(선인선의율조증제대권형) 어질고 옳음을 널리 펴시어 무리를 비취고 구하시니 큰 저울이시다
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삼위일체천주만유지진원)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니 세상 만물의 참된 근원이시라
神化周流乳庶物同胞之樂(신화주류유서물동포지락) 하나님의 감화가 흘러나와 만물을 기르시니 우리 동포의 기쁨이라
福音宣播啓衆民永生之方(복음선파계중민영생지방) 복음을 널리 펴서 백성을 깨우치니 영생하는 길이로다
지붕은 이중으로 되어있고 팔작지붕이다. 용마루에 있는 12개의 용머리는 12사도를 상징한다. 처마 끝 단면에도 십자가와 연꽃 문양을 새겨놓았다.
성전 내부에는 20개의 기둥이 있다. 이 기둥은 회중석과 지성소, 좌우 회랑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트롤로프 신부가 직접 신의주까지 가서 구해온 백두산 적송으로 만든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화강암으로 만든 세례대와 회중석을 지나가면 지성소가 있다. 지성소 안에는 만유진원(萬有眞原) 현판이 있고, 오른 편에는 베드로의 열쇠와 바울의 칼을 상징하는 키리 십자가(☧) 깃발이 있다.
성당은 일주문과, 천왕문, 대웅전(법당), 승방(사제관)으로 연결되는 사찰의 건물 배치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동시에 성당 터와 건물들의 평면도는 고깃배를 연상시킨다. 예배당 곳곳에 태극문양의 십자가와 연꽃무늬를 심어 놓았다. 이렇게 토착화된 예배당을 만든 이유는 한국 문화를 수용해서 외래 종교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감을 줄이려는 현실적인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당 아래엔 조선 25대 국왕인 철종이 5년 동안 살았던 잠저(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곳)였던 용흥궁과 병자호란 때 순사했던 김상용순절비 그리고 삼일운동 기념비가 있다. 참고로 삼일운동 기념비에 기록된 유봉진, 염성오, 김유의는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감리교 지도자들이다. 특히 유봉진은 길상결사대장으로 삼일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했다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일본 재판기록에서는 만세 시위가 있던 날 유봉진이 백마를 타고 시위대를 지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래된 성공회 성당이 온수리에도 있다. 읍에서 온수리까지는 차로 약 30분 걸린다. 온수리교회는 1898년 의료 선교사 로스로 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구 예배당(인천광역시 지방문화재 15호)은 1911년 완공한 것이다. 성당 입구엔 작은 망루처럼 생긴 종탑이 있는데 가운데 문이 양쪽 문보다 높은 솟을 대문이고 지붕은 우진각 형태이다. 예배당은 일자형 한옥으로 단층 팔작지붕인데 지붕 아래는 겹처마로 했다.
예배당 입구에는 ‘김여수 순국기념비’가 있다. 김여수는 인천상고를 다니면서 잔디회를 조직해서 한글보급과 학병반대 운동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에게 모진 고문을 받고 대전 형무소에서 복역 중에 사망했다(1944.2.25)
구 예배당 왼편에는 새로 지은 예배당이 있다. 새 예배당 제단 뒤에는 멕시코산 돌로 만든 강화도 지도와 예수님 모자이크가 붙어 있다. 제단 위에 있는 창문은 색 유리로 장식을 했는데 색유리에는 성화(聖畵) 외에도 세상을 떠난 신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주일 예배를 드릴 때 회중석에 앉아 있는 산 사람과 색유리 속의 죽은 자가 함께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는 신앙적인 의미가 있다.
현재 전국에 있는 성공회는 106개이다. 그중 12개의 성공회(교세 1,000명)가 강화도에 있다.
☞ 주 소
강화읍성당(강화읍 관청리 422), 온수리교회(길상면 온수리 505)
☞주변 유적지
강화읍성당 - 삼일운동기념비 - 용흥궁과 김상용순절비 - 강화중앙교회 - 교산교회 - 홍의교회 - 온수리교회 (혹은 강화읍성당 - 삼일운동기념비 - 용흥궁과 김상용순절비 - 온수리교회)
그 외에 강화읍 성당에서 300m 위로 올라가면 고려 궁지가 있고, 온수리 근처에는 초지진과 광성보 혹은 마리산이 있다. 마리산은 강화도에서 제일 높은 산(469m) 으로 산 중턱에 마리산기도원이 있다.
16. 서도중앙교회
1893년 여름 워너신부와 윤정일이 주문도 방문, 1902년 윤정일이 주문도에서 전도, 김근영이 예수 영접, 1905년 김근영이 학교를 세움, 1907년 박용세가 영생학교 설립, 1917년 기독신보에 박두병 권사의 2,000원 탕감 기사, 1923년 여름 35칸 한옥 예배당 건축
강화도에는 오래된 한옥 예배당으로는 강화읍성당(1900년), 온수리교회(1911년), 서도중앙교회(1923년), 교동교회(1933년)가 있고 그 외에 석조 건물로는 흥천교회(1938년), 교산교회(1961년)가 있다.
주문도는 강화도 서도면 소재지가 되는 섬이다. 조선 인조 때 명나라로 원병을 청하러 가던 임경업 장군이 이 섬에 내려서 문서를 상주했다고 주문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주문진(注文鎭)이 설치되고 첨사(종3품)가 상주한 것은 인조 11년(1633년) 부터 이다)
주문도에 복음이 들어 온 것은 1893년 여름 성공회 워너신부와 윤정일의 방문하면서 부터였다. 물론 그 때에는 별다른 전도의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9년 후 감리교로 교파를 옮긴 윤정일이 주문도를 다시 방문했다. 그 해(1902년) 여름 윤정일은 웅개지 나루터에서 전도를 해서 뱃사람 김근영을 얻었다. 예수를 영접한 김근영은 자신의 집에 있는 사당과 신주단지를 불태워 버렸다. 김근영은 동네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도했을 뿐 아니라 옛 주문진(注文鎭)을 불하받아 학교를 세워 지역 사회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지역의 유력한 양반인 박씨 집안이 교회를 나온 것은 이때였다. 그들 중 박용세는 영생학교를 설립했고, 박용세의 큰 아버지 되는 박두병은 자신에게 2,000원을 빚 진 사람을 용서해 줌으로서 예수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다.
주문도 선교의 주역인 윤정일은 볼음도, 말도, 서검도에 교회를 세움으로 서도면에 속한 4개의 섬을 복음화 시켰다.
한옥 예배당이 세워진 것은 1923년 여름이다. 육지에서 들어온 건축 자재를 실어 나르다가 과로로 죽은 소 두 마리의 희생으로 35칸 한옥 예배당(인천시 지방문화재 14호)이 완공되었다. 교회 건축비 7,000원은 박씨 집안의 후원과 1인당 1원씩 헌금한 교인들의 노력으로 마련했다.
예배당 외형은 단층 일자형이고 지붕에는 조선 기와를 얹었다. 본당과 연결된 종탑의 지붕은 솟을지붕이고 본당은 팔작지붕이다. 예배당은 배를 형상화한 것이다. 종탑은 뱃머리, 뒤쪽 강단은 배의 고물에 해당된다. 예배당 안에는 좌우에 6개씩 12개의 기둥이 있는데 이는 12사도를 상징한다. 예배당 좌우에 있는 창문의 숫자가 다르다. 오른쪽에 3개, 왼쪽에 4개의 창문을 낸 이유는 창문을 서로 엇갈리게 배열함으로써 실내 환기를 원활하게 하려는 것이다.
예배당 오른편 들보에는 오래된 편액 2개가 있다. 하나는 영생학교 교사 신원철과 모태정이 지은 ‘영세기념사’(1926년)로 교회 부속 영생학교 신축에 관한 글이고, 다른 하나는 담임자였던 김성대 목사가 쓴 ‘기념서’(1927년)로 윤성심 전도부인이 50원을 헌금해서 교회 종을 구입했다는 내용이다. 교회 앞에는 강화군에서 세운 안내 표지판이 있다. 그런데 안내 문구 중에서 ‘천주교 교인 윤정일’ 이란 표현이 있다. 이것은 성공회와 천주교를 구별하지 못하는 공무원들의 잘못이다.
현재 사용 중인 예배당은 1993년 옛 영생학교 터(또한 주문진이 있던 곳)에 새로 건축한 것이다. 주문도에는 서도중앙교회 외에 서도교회도 있다. 섬 안에 있는 교회는 둘이고 전체 주민 159가정(200명)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윤정일이 전도했던 웅개지 나루터는 폐가 한 채만 남아있는 쓸쓸한 장소가 되었다.
☞ 주 소
외포리 선착장에서 주문도로 가는 배는 하루 두 번(오전 9시, 오후 4시) 있다. 배로 가는 시간은 약 1시간 30분 정도이다. 차량은 왕복 14,000원, 사람은 왕복 2,000원이다.
서도중앙교회(서도면 주문 1리 717)
17. 강화중앙교회
1896년 홍의교회 설립, 1900년 강화중앙교회 설립, 1901년 합일초등학교 설립, 1904년 이동휘가 보창학교 설립, 1907년 의병항쟁과 김동수 권사의 순국
강화중앙교회는 홍의교회 교인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김봉일이 개척한 교회이다. 지역적 의미로는 강화읍내에 세워진 첫 감리교회가 된다. 성공회가 처음부터 갑곶나루, 강화읍내로 들어와 전도를 하고 1900년 40칸 한옥 예배당을 짓는 동안, 감리교는 교산교회 (1893년) 홍의교회(1896년), 고비교회(1897년) 교동교회(1899년), 삼남교회(1899년) 등 강화도 북쪽 변두리와 서편 바다 건너 교동도와 석모도에 교회를 세웠다. 그러다가 강화도 선교 7년 만에 강화중앙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강화읍에 교회가 세워지면서 감리교 선교는 더욱 활발해졌다. 강화 남쪽으로는 화도면에 내리교회(1903년)와 동막교회(1905년), 선원면에 선원교회(1910년), 서쪽으로는 아차도 아차교회(1906년) 교회를 설립했고 김포, 통진까지 전도의 손을 뻗치게 되었다.
강화중앙교회 정문으로 걸어 올라가면 ‘김동수권사 순국기념비’가 있고, 예배당 현관에는 역사 전시관이 있다. 김동수 권사는 1907년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당시 군대가 해산되면서 흥분한 한국군과 강화도 주민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수적으로는 일본군의 10배였지만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읍에 들어온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로 강화주민 30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반일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강제 연행을 당했다. 그 때 김동수 권사와 그의 두 동생도 함께 체포되었다. 일본군은 적법한 절차도 없이 이들을 더리미로 끌고 가서 처형해버렸다. 강화중앙교회에서는 김동수 권사의 죽음을 기억하는 의미에서 더리미 해안가와 교회 앞마당에 순국비를 세웠다. 여기에 6.25 전쟁 중에 지방 감리사였고 담임목사였던 백학신목사가 납북되는 비극이 덧붙여진다.
또한 이 교회 출신으로 이동휘와 조봉암이 있다. 이동휘는 1902년 강화진위대 사령관으로 왔다가 교회에 등록한 사람이다. 교인이 된 후 이동휘는 보창학교(1904년)를 세워서 지역 교육 사업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이동휘의 영향으로 강화도 곳곳에 ‘보창’ 이란 이름이 붙은 학교가 세워졌다. 보창은 고종황제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1910년 강제 병합 직전까지 강화도는 70개가 넘는 학교가 있었다. 그중 절반은 감리교인이 세운 학교로 이동휘와 관련이 있었다. 1907년 강화 의병 이후 중국으로 가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1995년 정부에서 ‘대한민국독립유공훈장(건국훈장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의 무덤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무후선열제단(유해도 없고 후손들도 없는 유공자)에 놓여 있는 조그마한 위패가 전부이다.
조봉암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강화도의 인물이었다. 그는 청년시절에 강화중앙교회에 출석했고 3.1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평생을 민족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살아왔다. 그러나 1959년 자유당 독재정권 치하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의 무죄가 밝혀진 것은 62년(2011.1)이 지나서였다. 그의 무덤은 서울 망우리 묘역에 있고,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가 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한가?”
강화읍 사무소 마당에 그의 ‘생가 터’기념비가 있고, 갑곶 돈대(구 강화역사박물관)로 들어가는 길목에 조봉암 기념비가 있다.
현재 예배당은 2000년의 새로 지은 것이고 1층 로비에 역사 전시관(2006년 개관)이 있다. 역사관에는 강화도 초기 문서들과 사진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전시 자료는 문서액자 5점, 시진 18점, 유물 15점, 역대 담임목사 사진 23점. 기타 24점 등 총 85점이다.
교회 옆에는 합일 초등학교(1901년)가 있다. 강화중앙교회에서 설립한 학교이다. 학교 안에는 김상현의 동상이 있다. 강화중앙교회 교인이었던 김상현은 자신의 땅 40만평을 학교 발전을 위해서 내놓았다. 그의 도움으로 합일초등학교는 일본의 핍박 속에서 학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합일(合一)은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기독교적 의미를 담고 있다.
☞ 주 소
강화중앙교회(강화읍 신문리 449)
☞주변 유적지
강화중앙교회에서 나와서 큰 길을 건너면 강화읍성당과 용흥궁, 삼일운동 기념비, 조봉암 생가 터(강화읍 사무소)가 있다. 읍에 있는 유적지를 둘러 본 다음에는 창후리 방면으로 가다가 강화서문 옆에 있는 옛 연무당 터(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터)를 지나서 교산교회와 홍의교회, 망월교회, 강화역사관과 고인돌 공원 등을 방문할 수 있다.
18. 흥천교회
1897년 고비교회 설립, 1899년 건평교회 설립, 1902(1906년) 흥천교회 설립, 1938년 석조 예배당 건축과 흥천교회 출신 김종우 목사가 감리교 제2대 총리사로 선출
홍의교회가 예수 믿은 교인들의 이름을 바꿨다면 흥천교회는 마을 이름을 바꿔버렸다. 교회가 있는 마을의 원래 이름은 흥천(興川)이었다. 그러나 교인들에 의해서 흥천(興天)이 되었다. 그뿐인가 마을 20가정 중 7가정이 술집이었는데 모두 문을 닫았다고 한다.
흥천교회를 개척한 사람은 김용하, 전병규 두 사람이다. 이들은 강화도의 영향력 있는 유학자였는데 건평교회(1899년)를 개척한 정천일의 전도로 구원을 받았고 초기에는 건평교회에 출석했다. 건평교회는 고비교회(1897년)에서 나왔는데, 고비교회를 개척한 이는 홍의교회 교인 황양일이다. 지역 선교 관점에서 고비교회, 건평교회로 이어지는 강화도 중부지역 선교 과정에서 흥천교회가 설립된 셈이다. 흥천교회의 설립 년도는 1902년 설과 1906년 설이 있다.
정천일이 김병하와 전병규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일이다. 두 사람은 성경책을 보따리에 싸 걸머지고 계룡산에 들어가서 연구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길 떠난 첫날, 주막집에서 누워서 얘기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김용하는 전병규에게 “계룡산까지 갈 것 뭐 있겠나? 아주 여기서 결정하고 마세나!”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처음 얼마 동안은 정천일이 개척한 건평교회를 다니다가 김용하의 집으로 예배 장소를 옮겼다. 흥천교회를 개척한 다음에는 흥천합일학교(현재 양도초등학교)를 세우고 인근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1938년은 흥천교회 역사에 특별한 시간이다. 첫째는 예배당을 건축한 일이다. 돌로 예배당을 지었는데 그 당시 강화도에서는 특이한 일이었다. 강화도에서는 돼지우리를 돌로 만들었다. 물론 지금은 거의 다 사라진 풍습이고 동검도에 돌로 만든 돼지우리가 한군데 남아있을 뿐이다. 예배당을 짓고 나서 “이게 예배당이냐? 돼지우리지”하는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때 만든 예배당이 우리나라 중부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석조 예배당 중 하나가 되었다. 다른 지역에 있는 석조 예배당으로는 목포양동교회(1911년 건축), 대구제일교회(1933년 건축), 안동교회(1937년 건축) 가 있다.
또 하나는 김용하의 손자인 김종우 목사가 감리교 총리사(현재 감독회장)가 된 것이다. 8명의 후보가 나와서 23번의 투표를 했다고 한다. 21번의 투표가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에 예배당의 열린 창문으로 비둘기 한 마리가 들어와서는 묵상하고 있는 김종우 목사 앞에 내려와 앉았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석조 예배당 옆에 있는 교육관으로 들어가면 역대 목사님들의 사진과 교회의 역사 사료가 되는 사진들을 관람할 수 있다. 교회 마당에 '100주년 기념비‘와 김용하 전병규 기념비’가 있다. 두 기념비 사이에 오래된 종탑이 있는데 30여 년 전 교회를 방문했던 배재고등학교 교사들이 기증한 것이다.
☞ 주 소
흥천교회(양도면 삼흥리 303)
☞주변 유적지
강화읍에서 흥천교회로 가는 길에 찬우물 약수터(조선 25대 국왕 철종과 첫 사랑 봉이가 만나던 곳), 철종 외가, 강화 농경문화관, 조선 양명학의 시조인 하곡 정제두 선생의 묘가 있다.
첫댓글 석장로님 귀한 자료를 주셔서 평신도사역에 도움이 되엇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