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이 심해 농민들이 양식이 떨어져 굶주렸다. 너무 배가 고파서 느름나무나 칡뿌리 등으로 허기를 채우며 목숨을 부지했다. 이 참상을 표현한 작품이 곧 구황식물(救荒植物) 연작이다. 학계는 이들 작품을 한꺼번에 지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 선생께서는 글을 지을 때 초안(草案)도 없이 뜻대로 썼다고 한다. 이는 평소 문장형식이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현신보(政絃新譜) 시폐(時弊) 13조를 이해에 저술했다(救弊 1759년 저술). 政絃이란 정치의 병폐를 낡은 악기의 줄로 여겨 새 줄로 바꿔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하나 자신의 글이 세상에 전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덕산을 다녀온 기록은 없다. 그러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문묘종사(宗廟從祀)가 이루어진 만큼 스승을 찾아뵈었을 가능이 높다. 노론으로서는 우암의 종사가 숙원이었기 때문이다.
〈茨苽〉 在田自不妨嘉穀 밭에 있어도 스스로 곡식을 해치지 않고 登鼎偏宜活萬民 솥에 들어가면 만민을 살리기에 딱 맞네 最是歲歉方見用 흉년에 바야흐로 쓰임 받기에 제일이지만 等閑平日野山春 등한 평일에는 봄마다 산과 들에 널려 있네
첫댓글가뭄으로 인한 기아를 원감국사도 겪으셨다. 그의 齋餘偶作에 "慈味休疑議 맛이 어떤지 의론하지 말라, 人以鼓和鹽 사람들은 된장을 소금에 섞였다 하지만, 我以鹽爲鼓 나는 소금을 된장이라 하네"{이하 생략). 그리고 간암공의 에는"人相飾 이 말씀은 오늘날 解惑하나 , 아무리 헤어봐도 이 시절에 비할넌가"하며 탄식하고 있다. 이런 천재지변이 옛날에는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원산.
첫댓글 가뭄으로 인한 기아를 원감국사도 겪으셨다. 그의 齋餘偶作에 "慈味休疑議 맛이 어떤지 의론하지 말라, 人以鼓和鹽 사람들은 된장을 소금에 섞였다 하지만, 我以鹽爲鼓 나는 소금을 된장이라 하네"{이하 생략).
그리고 간암공의 에는"人相飾 이 말씀은 오늘날 解惑하나 , 아무리 헤어봐도 이 시절에 비할넌가"하며 탄식하고 있다.
이런 천재지변이 옛날에는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