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히말라야에 영혼을 뭍은지도 10년이 다와간다.
그를 기억하는 몇몇 산악인들이 그녀를 위한 추모모임을 가진다 한다.
잠시잠깐 스치는 인연으로 나 또한 안타까워 했던 그때 그 기억들이 떠오른다.
여성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두고 오은선 과의 경쟁구도에서 항상 그녀를 응원했던 기억들이...
여성 산악인으로서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개 고봉에 오르겠다던 그녀의 도전은 그해 7월11일 낭가파르밧 하산길에 11개 등정을 끝으로 멈추고 말았다.
그의 가족들은 그녀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 그녀의 유골 일부를 고미영이 미처 오르지 못한 가셔브룸1, 2봉과 안나푸르나 정상에 고미영의 사진을 묻어주는 것으로 14좌 완등의 꿈을 마무리지어 주었다 한다.
국내 아웃도어시장를 선점하려는 코오롱스포츠와 블랙야크의 지나친 경쟁구도에 내몰린 고미영과 오은선,
고미영을 잃은 주변의 슬픔과 히말라야14좌 완등의 기쁨을 누리지도 못했을 오은선과 블랙야크...
그래서 였을까?
난 지금도 이 둘의 제품은 없다.
산악인 고미영을 추모하며,
10년전 어느 칼럼을 스크랩 해본다.
산은 애초부터 두 사람 모두를 거두기로 작정했던 것일까. 2005년 7월 파키스탄 드리피카봉(6,477m) 원정 때 같은 코오롱등산학교 강사였던 김형주, 고미영 두 자일파트너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 등정을 목전에 둔 지점에서 고미영이 추락했으나, 김형주는 노련하게 제동했다. 확보에 실패했다면 김형주도 함께 끌려가며 그때 이미 두 사람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고미영은 척추 두 마디가 어긋나는 부상을 입었지만 동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하산했다.
그 4년 후인 올해 초 김형주는 설악산에서 느닷없는 눈사태로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위기를 넘겼던 고미영도 7월 11일 낭가파르밧(8,126m)에서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세계 최초의 여성 14좌 완등을 노리던 고미영의 꿈은 이렇게 11개째인 낭가파르밧을 오르는 것으로 끝이 났다.
어떤 죽음은 곰곰이 짚어 보면 흡사 누군가 집요하게 상황을 몰아간 것만 같다. 이번 고미영의 죽음도 그러했다. 훅, 하고 한 번 불어닥치는 것으로 고글은 물론 얼굴 전체를 하얗게 눈가루로 덮어 버리던 모진 폭풍설을 뚫고 밤새 제4캠프 귀환에 성공한 고미영이 목숨을 잃은 곳은 제2캠프 직전의 10m 구간. 그 짧은 10m 구간에서, 7월 11일 오후 7시에 신이 벌인 일은 지나치게 악의적이었다.
2캠프에서 3캠프 쪽은 포르투갈팀이 설치해둔 고정로프가 있었다. 그러나 등정 시도 때 국제대(유럽 6개국 연합)가 제멋대로 잘라 들고 올라가, 하산시에는 10여m 공백이 생겨났다. “제2캠프 20m 위부터 30m까지, 100m도 아니고 단 10m였다”고 김 대장은 안타까워했다.
고미영은 등정 후 제4캠프에서 휴식하고 나서 KBS와의 위성전화 인터뷰도 활기차게 했을 만큼 원기를 회복한 상태였다. 고미영과 이미 8,000m 고봉 11개를 등정한 고미영의 ‘등반 매니저’ 김재수 대장은 그런 고미영을 보고 안심, 먼저 2캠프로 내려와 고미영을 위한 차를 끓이고 있던 중이었다. 시각은 오후 7시경으로, 아직 어둠이 내리지는 않은 때였다. 고정로프가 없는 경사면 위에 이르러 항상 고미영의 뒤에 위치해 있던 윤치원은 고미영을 멈추게 하고 “내가 먼저 내려가겠다”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먼저 내려가면서 새삼 발 디딤을 잘 다듬어두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고미영이 내려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슬쩍 낭가파르밧의 안개가 옅게 시야를 가리며 흘렀다. 그 순간 갑자기 고미영이 미끄러져 내렸다. 윤치원은 고미영의 옷깃을 부여잡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고미영은 길이 1,500m에 이르는 기나긴 쿨와르로 굴러 떨어졌다. 쿨와르는 대부분 설사면 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중간에 200m 정도 되는 바위지대가 돌출해 있었다. 그 아래 설벽에서 고미영은 두부 손상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네팔 히말라야의 마칼루(5월 1일), 칸첸중가(5월 18일), 다울라기리(6월 8일) 등정을 마친 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로 내려온 고미영과 김재수는 외국인이 운영하는, 외국인 트레커들을 주로 상대하는 유명 병원에서 고가의 종합검진을 받았다. “원정대가 검진결과표도 보관하고 있고 나중에 공개도 할 수 있지만, 결과는 이상무였다”고 김 대장은 밝혔다.
파키스탄 히말라야로 들어가는 길목 도시인 스카르두에서 보름여 쉬며 원기를 회복한 고미영은 6월 28일 헬기로 낭가파르밧 베이스캠프에 도착, 7월 3일 제1캠프까지 가볍게 다녀오는 것으로 워밍업을 삼았다. 코오롱스포츠는 이렇게 두 사람의 상태를 기록하고 있다. ‘고미영 대장과 김재수 대장 모두 현재 컨디션은 매우 좋은 상태입니다. 베이스캠프에는 눈이 많이 내리고 있다고 합니다.’
고미영은 눈이 그치고 날씨가 호전되기를 기다려 7월 6일부터 등반을 개시했다. 3시간 단위로 잘라 받아본 일기예보도 ‘오늘 자정까지 바람 없고 온화’였다고 한다. 대원은 그간 이미 8,000m 10개 봉을 함께 올랐던 매니저 김재수 대장을 비롯해 쟁쟁한 경력의 고봉 등반가인 문철환, 윤치원, 그리고 네팔인 셰르파 치링과 소나, 파키스탄 고소포터 2명 등 총 8명이었다. 김재수 대장은 “고소포터 2명은 먼저 오르며 텐트를 설치했고, 4명의 한국인 대원은 항상 같이 움직였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1캠프까지 2시간30분 만에 올랐으나 무리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일부러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자고 했고 고미영은 따라주었다. 그렇듯 나는 조언하며 서포트를 했을 뿐, 최종 결정은 모두 고미영의 몫이었다”.
다음날 7월 7일 이들은 7시간 걸려 200m의 대암벽이 중간에 걸쳐진 디아미르벽을 지나 제2캠프에 올랐고, 8일은 제3캠프, 이어 9일 날 제4캠프로 진출했다. 김재수 대장은 이렇게 돌이킨다.
“활달하고 담대한 고미영은 등반 때 여성들이 특히 괴로워하는 용변 문제도 소변기통으로 텐트 안에서 쉽게 해결했다. 고미영이 나한테 ‘대장님, 담배 한 대 태우셔야죠’ 하면 나는 텐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담배를 피워 물었고, 고미영은 그새 용변을 보았다.”
자정을 막 넘긴 7월 9일 해발 7,400m의 제4캠프지엔 고미영보다 한 봉 앞선 8,000m 11개 봉 등정을 마치고 12번째로 낭가파르밧을 시도 중인 여성 산악인 오은선 대장팀, 국제대, 포르투갈팀 등이 있었다. 고미영팀은 오전 2시30분경 가장 먼저 등정길에 나섰다. 김 대장은 이렇게 말한다.
“제4캠프부터 한동안은 완경사 트래버스 구간으로 눈이 무척 깊었다. 그 구간을 우리 팀이 힘들여 러셀하며 전진하다 보니 우리 뒤로 모두 25명이 줄지어 따라왔다. 2시간30분쯤 우리가 그렇게 앞서 전진한 다음 오은선팀의 산소를 사용하는 포터들이 앞장서서 올랐다. 우리는 30분쯤 휴식하다가 뒤따라 올랐다. 7,700m쯤 되는 지점에서 등정하고 내려오는 오은선씨를 만났다. 축하한다, 앞으로 얼마나 걸리느냐, 두세 시간이면 된다, 그런데 바람이 세다, 등의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때가 오후 2시경. 김재수 대장은 “힘들면 돌아가자”고 했으나 고미영은 “다시 이 길을 힘들여 올라오고 싶지 않다. 한 번으로 끝내자”고 했다.
파키스탄 고소포터 핫산 착란증세로 하산 늦어져
제트기류가 몰아치며 속도가 점점 느려져, 오후 7시11분에야 이들은 정상에 섰다. 고미영은 지친 상태였다. 하산하면서 김재수는 고미영과 2m 로프를 또다시 묶었다. 고미영이 지쳤다 싶으면 그는 제각각 고정로프 하강을 해야 하는 구간이 아니면 언제나 2m의 짤막한 로프로 서로를 연결했다. 왜 단 2m였을까. 김 대장은 이렇게 말한다.
“짧아야 한다. 그래야 실족 첫 단계에서 잡아줄 수 있다. 그 이상 길어지면 가속도가 붙어 같이 추락해 버린다. 언제나 고미영이 한 걸음 옮기면 나도 한 걸음 옮겼다. 내 자랑이 아니라 사실대로 말해서, 나는 8,000m 고봉 등반을 하면서 죽을 만큼 지쳤다는 느낌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므로 언제든 고미영이 실족하면 잡아줄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다울라기리 등반 중 고정 로프 없는 구간의 트래버스 중 미끄러졌을 때도 바로 잡아주었다. 나중에 14좌 완등이 끝난 뒤에 고미영에게 그 로프를 기념으로 선물하려 했는데….”
고미영도 지쳤지만, 그보다 파키스탄인 고소포터 핫산이 문제였다. 손가락이 동상인 것 같다며 먼저 내려갔던 그가 엉뚱하게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그리고 밑이 절벽인 줄도 모르는 듯 마구 걸었고, 무어라 사방으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김 대장은 이렇게 돌이킨다.
“핫산은 일종의 착란증세를 일으킨 것 같았다. 낭가파르밧을 포함해 이미 8,000m 봉을 4개나 올랐던 핫산이 그렇게 될 줄은 정말 예상치 못했다. 간신히 달래서 하산을 시작했지만 30분여 지나자 그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의 팔과 다리를 잡아 끌면서 내려가려니, 셰르파들이며 윤치원과 문철환이 아무리 힘이 좋다 해도 죽을 맛이었다. 우리에겐 로프가 100m 가량 있었으므로, 핫산의 상태만 괜찮았다면 한결 빠른 하산이 가능했을 것이다.”
제4캠프에 먼저 내려가 있던 오은선팀이 준비한 산소 1통과 따듯한 물 한 통을 국제대 고소포터 3명이 받아들고 출발했으나 1시간쯤 뒤 그들은 되내려갔다. 국제대 리더는 나중에 “우리 포터도 동상 기운이 있어서 되돌아서게 했다. 우리 팀원을 먼저 보호해야 할 것 아니냐”라고 김 대장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미 등정자 중 한 대원이 실종당한 뒤여서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고 김 대장은 말했다.
시간 정도면 가능했을 제4캠프까지의 하산이 그렇게 하여 13시간 넘게 걸렸다. 너무 힘이 들어 중간에 비박한 뒤 내려가려고 어느 바위 밑에서 설동을 파려다가 포기하고 밤을 새워 하산했다.
다음날 아침 9시경에야 제4캠프에 도달한 고미영팀은 간식을 들며 3시간쯤 쉰 다음 12시경 하산을 다시 시작했다. 상태가 조금 덜해진 핫산에게는 다른 고소포터 1명을 붙여 먼저 내려보냈다.
제4캠프에 도착해 김 대장이 “수고했습니다”하고 인사를 건네자 역시 언제나처럼 고미영은 “그 얘기는 베이스캠프에서 듣고 싶습니다”하고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고미영은 KBS와의 무선 인터뷰 중 “올해 8,000m 봉 7개 모두를 오르고 싶습니다. 박영석 선배의 한 해 5개 봉 기록을 제가 뛰어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고미영의 그 희망은 이제 그만 꿈으로만 남았다.
사고 후 윤치원과 문철환은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여기저기 오르내리며 고미영을 찾으려 애썼으나 아무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고미영의 시신은 하루 뒤에 비로소 발견되었고, 김재수 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은 목숨을 건 모험 끝에 고미영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간의 등반 과정을 설명한 뒤 김재수 대장은 “사고 수습이 끝난 다음 고미영이 미처 오르지 못한 가셔브룸1, 2봉과 안나푸르나 정상에 고미영의 사진을 묻어주는 것으로 14좌 완등의 꿈을 마무리지어주겠다”고 덧붙였다.
고미영이 사고를 당한 제2캠프 위 10m 구간에 대해 14좌 완등자인 한왕용은 “고정로프를 설치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전한 곳으로 기억한다”며 “내가 등반할 때도 제2캠프부터 얼마간은 고정로프를 깔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거기서 고미영이 실족한 것은 뜻밖이다. 고미영의 별명은 ‘멘털 스트롱(mental strong)’이었기 때문이다. 스포츠클라이밍 국제대회에서 만나 친하게 된 외국 클라이머들이 언제나 여유롭고 시합 때도 남달리 차분한 고미영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김재수 대장은 고미영의 치밀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K2 등반 때도 고미영은 전 구간 고정로프의 마디 수를 외고 다녔다. 악천후가 닥쳐도 외워둔 마디 수로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늘 단전호흡과 요가를 해왔으며 <정신력 강화훈련>이란 책자를 닳도록 읽었던 고미영이었다. 그렇도록 치밀하고 집중력이 높았던 고미영이었지만 안락하고 편안한 제2캠프가 코앞으로 다가온 순간 방심했던 것일까. 아니면 안개가 눈앞을 잠시 가리며 문득,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부안 고향마을 집의 환영이 어른거렸던 것일까.
낭가파르밧(Nanga Parbat·8,125m)은 세계 제9위의 고봉으로서 산스크리트어로는 ‘Nanga Parvata’이며 그 뜻은 ‘벌거벗은 산’이라는 뜻이다. 이 산의 디아미르 계곡 주민들은 디아미르(Diamir)라고 부르는데, ‘산중의 제왕’이라는 의미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봉으로 알려져, 1985년 영국의 머메리가 인류 최초로 8,000미터 거봉 등정을 시도했다. 1953년 독일의 헤르만불이 초등정했으며, 한국인은 1992년 경남 합동대의 박희택·송재득 대원이 이번에 고미영이 오른 것과 같은 디아미르벽 루트를 통해 올랐다. 그후 엄홍길을 비롯한 많은 한국 산악인이 이 봉을 올랐으며, 1989년 전주대산악부의 김광호 대원, 1990년 광주팀의 정성백 대원이 추락사하는 등 여러 명이 목숨을 잃은 바 있다.
/ 글 안중국 편집장
사진 코오롱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