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16
'아이 세이 토마토(I say tomato)'.
국제학술지 ‘네이처’ 10월 4일자에 실린 사설의 제목을 보는 순간 재즈의 두 거장 엘라 피츠제럴드와 루이 암스트롱이 듀엣으로 부른 노래가 떠올랐다. 형인 아이라 거슈윈의 가사에 동생 조지 거슈윈이 곡을 붙인 ‘렛츠 콜 더 홀 싱 오프(Let’s call the whole thing off)’이란 제목의 노래로 무척 흥겹다.
먼저 엘라 피츠제럴드가 운을 띄운 뒤 루이 암스트롱이 1파트를 부르고 이어서 엘라가 2파트로 응수한 뒤 두 파트의 일부를 두 사람이 짧은 간격으로 번갈아 부르며 흥취를 한껏 끌어올린 뒤 마무리한다. 노래는 토마토를 비롯해 지역 사투리로 다르게 쓰거나 발음하는 여러 단어들을 제시한 뒤 이런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지 말자고 얘기한다. 특히 아래 대목이 압권이다.
‘네이처’ 사설의 제목은 아래 구절에서 응용한 것 같다.
무슨 내용인데 이처럼 별난 제목을 붙였나 궁금해 읽어봤다.
▲ 1957년 발표한 엘라 피츠제럴드와 루이 암스트롱의 앨범 ‘Ella and Louis Again’에 ‘Let’s Call the Whole Thing Off’가 수록돼 있다. 영어공부에 지쳤을 때 이 노래를 들으면 기분전환이 될 것이다. / Verve 제공
법적으로는 채소
사설은 최근 각광받고 있는 게놈편집기술을 이용해 야생 토마토와 식용꽈리를 작물화한 연구결과를 보고한 논문 세 편을 소개하고 있다. 꽈리는 몰라도 토마토라면 벌써 작물화돼 널리 재배되고 있는데(연간 생산량이 1억 7000만t에 이른다) 새삼스럽게 야생 토마토를 갖고 다시 시도한다는 게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실 토마토는 ‘과일이냐 채소냐?’라는 논쟁이 있을 정도로 애매한 대상이다. 과일의 정의가 ‘먹을 수 있는 열매’이므로 식물학적으로는 당연히 과일이지만 실제 쓰임새는 주로 요리의 식재료이므로 실생활에서는 채소로 볼 수 있다.
과일이든 채소든 무슨 상관이냐 싶지만 1893년 미국에서는 이 문제로 법정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즉 1883년 관세율이 조정되면서 수입과일은 무관세이고 수입채소에는 10%의 관세를 매겼다. 그런데 토마토는 채소로 분류돼 관세 대상이 됐고 이에 수입업자들이 불만을 품었고 이 가운데 큰손인 존 닉스가 뉴욕항 세관 책임자 에드워드 헤든을 상대로 재판을 걸었다. 재판은 대법원까지 올라갔고 1893년 대법원은 과학 대신 관습의 손을 들어줬다(원고 패소). 따라서 법적으로 토마토는 채소다(우리나라는 어떤지 모르겠다).
보기는 좋아도 맛과 향은 별로
그런데 야생 토마토로 넘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즉 누가 먹어봐도 과일이라고 인정할 정도로 향미가 진하기 때문이다. 결국 작물화 과정에서 토마토 고유의 맛과 향을 많이 잃어버렸다는 얘기다.
이는 토마토 작물화의 포인트가 열매 크기와 겉모습, 수확 용이성, 저장성 등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서구에서 토마토가 주로 식재료로 쓰이다 보니 과일보다는 채소로서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개량이 치우친 것이다. 그 결과 다른 과일이 없다면 모를까 토마토 자체를 후식이나 간식으로 먹는 경우는 드물다. 그나마 향미가 좀 있는 방울토마토는 가끔 이렇게 먹는다.
지난 2012년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오늘날 토마토 맛이 싱거운 이유를 유전자 차원에서 밝힌 논문이 실렸다.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식물과학과 앤 포웰 교수팀과 코넬대 식물육종유전학0壕캣갱薰건逵� 제임스 지오바노니 교수팀은 작물화된 토마토 품종 대다수에서 GLK2라는 유전자가 고장 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유전자는 토마토의 엽록소 생성에 관여한다. 잎에는 같은 기능을 하는 GLK1 유전자가 발현돼 GLK2가 고장나도 별 영향이 없지만, GLK2만 발현되는 열매에서는 이게 고장 나면 엽록소의 양이 적어 열매가 자라는 동안 밝은 녹색을 띤다. 그 결과 광합성으로 만든 당분이나 그 대사산물인 캐로티노이드가 적어 싱거운 토마토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재배 과정에서 농부들은 왜 이런 변이체를 선택했을까.
GLK2 유전자가 고장 난 변이체는 열매가 일정한 시기에 한꺼번에 익어 수확하기에 편하고 열매 전체가 예쁘게 빨간색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u 표현형’이라고 알려진 이 특징을 지닌 변이체가 20세기 중반 발견된 뒤 다른 품종에도 빠르게 도입돼(전통적인 교잡으로) 오늘날 토마토 품종 대다수가 지니게 됐다.
연구자들은 정상 GLK2 유전자를 작물화된 토마토에 도입했고 그 결과 열매의 녹색이 짙어졌고 익은 뒤 측정한 당도와 카로티노이드 함량도 20~30% 높아졌다.
지난해 ‘사이언스’에는 토마토 향미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규명하는 논문이 실렸다. 향미(flavor)는 맛과 향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오늘날 토마토가 채소로 취급되는 건 단맛과 함께 향기도 약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재배 품종과 야생종, 지역 토종 등 398가지 토마토를 분석한 결과 재배 품종에서 향미와 관련된 휘발성 분자 13종의 농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산량과 저장성 등에 집중한 개량과정에서 이런 특성이 희생된 결과다. 연구자들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손상된 유전자들을 복원한다면 향미가 풍부한 토마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 오늘날 시장에 나오는 토마토 품종들은 대부분 GLK2 유전자가 고장 나 있다. 그 결과 한꺼번에 익어 수확하기 쉽고 색도 예쁘게 나오지만 당도가 떨어지고 향도 약하다. 이는 열매가 자라는 동안 엽록소가 부족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S. Zhong and J. Giovannoni 제공
새 술은 새 포대에
학술지 ‘네이처 생명공학’ 10월 1일자 온라인판에는 이와 관련해 다른 식으로 접근한 논문 두 편이 나란히 공개됐다. 즉 기존 작물화된 토마토에 잃어버린 유용한 특성을 복구시키는 대신 이런 특성들을 지니고 있는 야생 토마토에 작물화된 토마토의 특성을 부여한 것이다. 지난 수년 사이 토마토 작물화 과정에서 일어난 게놈 변이가 많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런 접근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시간은 줄일 수 있을지 몰라도 어차피 같은 결과물이 나오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다. 게놈 차원에서 보면 기존 전통 육종법은 염색체가 재조합되는 과정이고 이때 표적이 되는 유전자에 가까이 있는 여러 유전자들도 같이 바뀐다. 그 결과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게놈편집기술을 쓰면 원하는 유전자만 콕 집어서 바꿀 수 있으므로 이런 부작용을 피할 수 있다.
두 논문은 비슷한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독일 뮌스터대 식물생물학생명공학연구소 요르그 쿠들라 교수팀과 공동연구자들의 결과를 소개한다(쿠들라 교수가 논문 파일을 보내주면서 글이 실리면 사이트 주소를 꼭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연구자들은 작물 토마토(학명 Solanum lycopesicum)와 가장 가까운 야생 토마토(학명 Solanum pimpinellifolium)를 대상으로 게놈편집 계획을 수립했다. 이 야생종은 향미가 뛰어난 열매가 열리지만 크기가 너무 작고(1g이 안 된다) 개수도 얼마 되지 않는다. 즉 이 자체로는 작물로서 상업성이 없다.
연구자들은 토마토 작물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유전자 6개를 바꾸기로 했다. 즉 3세대 게놈편집기술인 크리스퍼/캐스9을 써서 족집게 분자육종을 시도한 것이다. 식물체의 성장에 관여하는 SP 유전자와 열매 모양에 관여하는 O 유전자, 열매 크기에 관여하는 FAS 유전자와 FW2.2 유전자, 열매 개수에 관여하는 MULT 유전자, 영양분(리코펜)에 관여하는 CycB 유전자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야생종에 비해 열매 크기가 3배가 됐고 개수는 무려 10배가 됐다. 즉 식물 한 개체 당 열매가 양으로 30배 더 달린 것이다. 게다가 리코펜 함량도 두 배로 늘었다. 이는 시장에 나와 있는 토마토의 리코펜 함량의 5배에 이르는 농도다. 리코펜은 항염증 작용이 있고 심혈관계질환 및 암 위험성을 낮춰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리코펜 관련 유전자인 CycB는 리코펜을 베타카로틴으로 바꿔주는 효소를 지정하고 있다. 기존 토마토 작물화 과정에서는 이 유전자의 활성이 강화돼 리코펜 함량이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 방울토마토의 리코펜 함량은 1㎏에 60~120㎎인 반면 야생 토마토는 최대 270㎎에 이른다. 그런데 게놈편집으로 이 유전자를 고장 내자 리코펜 함량이 500㎎까지 올라갔다. 이 경우는 기존 작물화와 반대 방향으로 바꾼 것이다.
▲ 게놈편집기술로 야생 토마토(WT)의 FAS 유전자를 고장 내자(fas 5) 꽃잎 개수가 늘고 열매가 커졌다./ ‘네이처 생명공학’ 제공
다섯 번째 베리를 꿈꾸며
한편 학술지 ‘네이처 식물’ 10월호에는 게놈편집을 이용한 식용꽈리의 작물화라는 특이한 연구결과가 실렸다. 우리나라에서는 관상식물로 꽈리를 키우지만(보자기 같은 꽃받침이 달려 있는 꽈리 가지는 그림의 단골 소재다), 중남미의 몇몇 지역에서는 꽈리 열매를 즐겨 먹는다고 한다. 물론 같은 꽈리속(屬)일 뿐 별개의 종이다. 즉 관상용 꽈리는 학명이 Physalis alkekengi이고 식용꽈리는 학명이 Physalis pruinosa다.
그런데 식용꽈리의 열매가 꽤 맛있다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것 같다. 그럼에도 역시 열매가 너무 작고 재배 조건도 까다로워 상업 작물로서는 자격미달이다.
보이스톰슨연구소 조이스 반 에크 교수팀 등 미국의 공동연구자들은 식용꽈리가 야생 토마토(Solanum pimpinellifolium)와 여러 특성이 비슷하다는 데 착안해(둘 다 가짓과(科) 식물이다) 토마토 작물화 과정을 밝힌 게놈연구결과를 꽈리 작물화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즉 둘이 친척 식물이므로 해당 유전자가 꽈리에도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꽈리의 게놈을 분석한 결과 1만 3000개에 가까운 유전자가 토마토의 유전자와 1대1로 대응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자들은 식물체의 성장에 관여하는 SP 유전자와 SP5G 유전자, 열매 크기에 관여하는 CLV1 유전자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식물체에 열매가 50% 더 열렸고 열매 크기도 24% 늘어났다.
연구자들은 “식용꽈리는 향미가 독특하기 때문에 딸기(strawberry), 블루베리, 블랙베리, 산딸기(raspberry)에 이어 다섯 번째 베리(berry)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 식용꽈리는 달콤하면서도 독특한 향이 있어 인기라고 한다. 최근 게놈편집기술로 식용꽈리를 작물화하는 시도가 진행됐다. / Sebastian Soyk 제공
야생 토마토와 꽈리 작물화 시도에 관한 논문들을 읽다 보니 문득 대저 토마토가 떠올랐다.
1950년대 김해군 대저면(현재 부산 대저동) 낙동강 삼각주 평야에서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는 대저 토마토는 향미가 꽤 강하다. 주스를 만들 때 넣는 것 말고는 토마토를 거의 먹지 않는 필자이지만 봄철 나오는 대저 토마토는 즐겨 먹는다.
대저 토마토의 별칭이 ‘짭짤이 토마토’인데서 알 수 있듯이 미네랄 함량도 높은데, 이는 삼각주의 퇴적토양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토양만으로 대저 토마토의 맛과 향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늦어도 16세기에는 우리나라에 토마토가 들어왔다고 하니 아마도 토종 품종 아닐까. 필자 생각에 대저 토마토는 GLK2 유전자가 온전해 열매에서 엽록체가 충분히 만들어져 당도가 높고 향도 강한 것으로 보인다. 정말 그런지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
강석기 /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