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Date 2013. 3. 24
Text Mt 21,6-11 <종려주일>
(6)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1.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내 힘들다.”라는 말을 거꾸로 하면 “다들 힘내!”가 됩니다. 어렵다고 주저앉지 마시고 어려워도 쓰러져도 오뚜기처럼 계속 일어서십시오. 그러라고 금년에는 주일낮예배 시작할 때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를 찬양합니다. 그 찬양으로 믿음을 새롭게 하고 그 믿음을 힘입어 마침내 승리하시라고 정하였습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절망과 같은 것이라 생각지 마시고,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어렵고 힘든 것 안에도 희망적 요소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종려주일도 이 진리를 잘 보여줍니다. 종려주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오늘 성경구절들을 잘 살펴보면 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멘.
2. 성경이 보여주는 종려주일의 이야기는 대충 읽어보면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할 것이고, 조금 집중해서 읽어보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으며,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매우 중요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알고 있는 대로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 것이 한 두 번이 아닌데 왜 유독 이 특정한 날을 기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 날이 예수님께서 고난의 마지막 길을 가신 첫 날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 날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는 아주 특별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무슨 특별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셨고,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온 성안에 다 들릴 정도로 열렬히 환영을 한 일이었습니다. 종려주일이라는 이름도 거기서 시작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면서 하신 일련의 퍼포먼스는 ‘왕의 행차’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행차 속에 나오는 어린 나귀, 종려나무 가지, 옷을 벗어 길을 덮는 것, 호산나라고 환호성을 지르는 것 등등이 우리는 그 문화를 모르는 까닭에 봐도 모를 수밖에 없지만 당시 유대인 군중들이나 예수님과 일행들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왕이 행차하는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다는 뜻이 되고, 이런 예수님의 행렬을 군중들이 열렬히 환영한 것도 저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했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고 있던 왕, 메시야다’라고 선포하셨고 군중들은 그 선포를 큰 기쁨과 기대를 가지고 받아들였다는 얘기입니다.
이 행렬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한 가지 더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행차를 하신 때의 상황에 관한 것입니다. 대다수 군중들은 예수님의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시던 행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자기들을 구해줄 메시야라고 믿고 있었고, 당시의 권력 실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권력 아성에 도전하는 반항세력의 수괴나 이단사설을 퍼뜨리는 위험인물로 여겨 호시탐참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책잡을 일만 생기면 바로 처치해 버리려고 작심하고 있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정확히 알고 계시다는 것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종려주일 행차는 이런 시기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는 올가미를 쳐놓고 거기에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날 잡아라 하고 스스로 그 올가미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진배없는 행차였다는 말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잡으려고 잔뜩 벼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아니 위험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당신이 어떤 고난을 치르게 될 지에 대해서도 미리 알고 계신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으로 행렬을 진행했다는 얘기입니다. 무엇 때문에 혹은 무엇이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토록 보무도 당당하게 함정 속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을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의 결국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드러난 여러 가지 사실들로만 볼 때에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왕의 행차는 고사하고 은밀히 변복을 하고 잠행을 해도 시원찮을 상황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성경의 그 뒷 이야기까지 다 알고 있는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파놓은 함정과 그 함정 속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받게 되겠지만, 자신이 받는 고난이 인류를 구원하는 온전한 속죄제물이 되는 것과 희생제물로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 처음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일 뿐 힘들고 어려운 일 안에도 희망적 요소가 얼마든지 있다’는 진리를 이 종려주일이 보여주고 있다고 한 것을. 드러난 정황으로만 봐서는 100% 망하는 길이요 100% 절망스러운 상태였지만 실상은 그 어둠과 절망적 상황 안에 엄청난 희망과 승리가 있었습니다. (아멘.) 예수님은 돈키호테처럼 막무가내가 아닙니다. 쓸데없는 영웅심에 사로잡혀 오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자 ‘모 아니면 도다’라는 식의 자살특공대가 되려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믿음의 안경을 끼고 보시면 절망적 상황 속에 진짜 희망이 있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위험천만한 길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3. 또 한 가지 우리는 이 종려주일 행차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종려주일 행차에 어떤 인물들이 등장합니까? 제자들이 있지요, 아이들이 있습니다. 책잡으려고 예수님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나귀를 제공한 사람도 있고 그 외에도 많은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기 나오는 인물들, 제자들을 다 포함한 이 등장인물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 모두 예수님의 의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행렬의 주인공이었던 제자들은 한 시 동안도 주님과 함께 깨어 있지 못하였고 주님께서 체포되시고 심문을 받으시며 십자가에 처형을 당할 때 모두들 자기를 숨기기에 급급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메시야가 어떤 분인지에 대하여서도 모두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환호하던 군중들은 어땠습니까? 며칠 사이에 돌변하여 예수님을 최고의 흉악범들에게나 적용하는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여차하면 시위라도 벌일 태세였습니다. 그렇게 극악무도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 편에 서 있던 일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존경하고 흠모해서 그리하였을 뿐이고 희생제물이 되고자 하셨던 주님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모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 대하여 호의적이었든 비판적이었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겉모습과는 달리 모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롬3,23 말씀이 바로 같은 뜻입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라는 롬3,10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제가 이 얘기를 왜 할까요? 종려주일 당시에는 거기 현장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었고 거룩한 사역과는 거리를 멀리 두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얼마 후 이 사람들 중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가슴이 뜨거워진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말씀대로 성령 충만을 받아 권능이 생겨서 위대한 복음의 증인이 된 사람도 있었음며 거룩한 순교자도 나왔습니다. 종려주일 그 때까지만 해도 다 오십보 백보였던 사람들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180도로 서로 다른 인생길을 걷는 사람들이 되었단 말씀입니다. 무엇이 이들을 달라지게 했을까? 그것을 말씀드리고 오늘 우리도 꼭 달라지는 복을 받자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
무엇이 잠간 동안에 이들을 달라지게 했을까요? 다른 이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딱 한 가지 감출 수 없는 사실이 있으니, 예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고 끝까지 참고 기다린 것과 기다리지 않은 것의 차이가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다 똑같은 죄인들이었지만 뭐가 뭔지 잘 모르더라도 주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따라 앉으나 서나, 길에 행할 때나 어디 머무를 때나, 늘 주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드란 말입니다. 참고 기다렸는지 기다리지 않았는지 여부에 따라 정반대의 방향으로 인생행로가 결정되고 맙니다.
종려주일로부터 시작하여 고난 받는 자리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육신으로 계신 주님 곁에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에 500여명이 승천광경을 지켜봤습니다. 그러나 그 500명 중에서도 하루 이틀 1주일을 기다리다가, 끝까지 참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하고 변하여 새롭게 된 사람은 불과 120명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생이 약속을 믿고 참아 기다리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신앙과 인생 양면 모두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조건 믿고 참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내는 확실히 씁니다. 하지만 그 열매는 달콤합니다.
3. 여러분, 이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소리지르는 것을 허용한 말은 오직 하나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이것입니다.
“주님, 우리를 구하소서”
우리가 끝까지 참고 견디며 기다려야 하는데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를 하면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살전5,17)이라고 배웠지 않습니까? 우리는 늘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살아 응답하시는 주님을 체험하셔야 하겠습니다.
대니얼 디포우는 ‘로빈슨크루소’ 소설을 탈고한 후에 무려 20군데의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부당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간 21번째의 출판사가 출판해줬더니 세상에나 대박을 터뜨렸었답니다. 존 그레시라는 영국의 탐정소설 작가는 무려 743번이나 출판을 거절당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존 그레시는 평생 543권의 탐정소설을 출간했습니다. ‘러브스토리’, ‘갈매기의 꿈’ 같은 명저들도 출판사로부터 12번이나 출판을 거절당했던 책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은 우리에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짖기를 끝까지 인내하며 하라는 명령과 당부를 들려줍니다. 거절은 포기하라는 신호가 아니라 방법을 바꾸라는 신호입니다. 아멘.
4. 눈에 드러난 정황이 어렵고 힘들다고 낙심하거나 절망 혹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려운 상황 안에서 보이지 않는 희망의 싹이 있음을 알고 붙잡으셔야 하겠습니다. 성공자와 실패자의 차이는 자질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참아 기다리는데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다. “호산나-주여 우리를 구하소서”라고 계속 계속 부르짖으며 기다리라는 당부대로 부르짖는 사람들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