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장>
어떠한 결연한 의지 표명을 할 때 “내가 성을 갈겠다”는 표현을 쓴다. 실재 일어났던 타의에 의한 사례와 자의에 의한 사례를 알아 보자.
피휘(避諱)라는 뜻은 이는 절대 권력자인 군주나 자신의 조상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관습을 말한다.
때에 따라서는 글자뿐 아니라 음이 비슷한 글자를 모두 피하기도 했다. 이 관습은 고대 중국에서 비롯하여 주변의 한자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에 전파되었고, 오랫동안 행해졌다. 휘(諱)는 원래 군주의 이름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런 관습이 생겨난 것은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고 여겼던 한자문화권의 인식 때문이다. 자(字)나 호(號)와 같이 별명을 붙여 부르던 풍습이나 부모나 조상의 이름을 언급할 때 “한 국민”이라 하지 않고 “한, 국자 민자”라고 조심하여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게다가 일부 낱말도 쓰지 않는 예가 있고, 이름에 군주를 모욕하는 뜻을 넣지 않았는데 이러한 경우도 피휘로 본다. 피휘에는 국휘(國諱)라 하여 군주의 이름을 피하며 보통 황제는 7대 위, 왕은 5대 위의 지배자까지 그 이름을 피했다. 이 범주를 벗어 날 경우, 멸족의 화를 당했다.
가휘(家諱)는 집안 조상의 이름을 피하며, 성인 휘(聖人諱)는 성인의 이름을 피했다.
나라 사이의 외교 문서나 집안 사이의 서신 등에서는 서로 피휘를 지켜 주었다. 군주의 이름에 쉬운 글자가 들어 있으면 나라 전체에 불편이 생기고 외교상의 문제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군주와 그 일족의 이름은 잘 쓰지 않는 글자로 지었으며 주로 한 글자로 이름을 지었다.
피휘할 때는 글자의 전체를 피하거나, 일부도 피했다. 예를 들어 보면, 진시황의 이름 정(政)자의 일부인 ‘正’을 피하려고 정월(正月)을 단월(端月)로 바꾸어 불렀다.
한(漢)나라 고조의 이름이 유방(劉邦 BC247-BC195)으로 방(邦)은 국(國)으로 바꿔 써야했다. 논어에 나오는 "何必去父母之邦*"라는 문구가 한나라의 석경(石經)에서는 "何必去父母之國"으로 바꿔 써야만 했다. 유방의 원 이름자는 유계(劉季)이며, 모계의 성이다.
한 문제(文帝)의 이름은 유항(劉恒)으로 항산(恒山)은 상산(常山)으로, 달에 산다는 항아(姮娥)는 상아(女+常娥)로 바꿔 불렀다.
한 광제(光帝)의 이름은 유수(劉秀)이다. 당시에는 수재(秀才)를 무재(茂才)로 불렀으며, 명제(明帝)는 유장(劉庄)으로 장(庄)자로 인해 장자(庄子)는 엄자(嚴子)로, 장(庄)씨는 엄(嚴)씨로 성을 바꾸어야 했다.
경제(景帝)의 이름이 유계(劉啓)였기 때문에 24절기 중 원래 계칩(啓蟄)을 경칩(驚蟄)으로 계절명이 바뀌게 되었다.
후한 6대 황제인 효안(孝安)의 이름이 유호(劉祜 106-125)였고, 황제의 이름인 복 호(祜)자를 쓸 수 없어 복 복(福)자를 쓰도록 했고, 지금도 바뀌지 않고 계속 쓰고 있다.
휘의 소리를 피하거나, 그 모양이 비슷한 글자를 피하기까지 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성씨 이(李)와 소리가 같은 이(鯉)가 뜻하는 “잉어”를 글로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계대 표시에서 문제가 된 세(世)는 대(代)로, 민(民)자가 들어간 민부(民部 또는 탁지부 度支部)라고 불리던 부서는 호부(戶部)로 개칭하여 부르게 했다.
북송 때의 재상 문언박(文彦博 1006~1097)의 원래 조상의 성씨는 경(敬)이었다. 그런데, 후진(後晋) 건국자 이름이 석경당(石敬塘 892~942) 이므로 "文"으로 성을 바꾸어야 했다. 이후 후한이 들어서면서 다시 성을 "敬"으로 회복하였다. 그러나 송(宋)이 들어선 후, 송태조 조광윤(趙匡胤 927~976)의 할아버지인 조경(趙敬)의 이름을 피휘하여 다시 ‘文’으로 성을 바꾸어야 했다.
‘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1654~1722)의 이름은 현엽(玄燁), 이로 인하여 ‘현’이나 ‘엽’이라는 글자를 쓸 때는 반드시 마지막 한 획을 덜 써야 했다. 천자문에 처음 나오는 천지현황(天地玄黃)이 천지원황(天地元黃)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자금성의 북쪽문인 현무문(玄武門)은 강희제 때부터 신무문(神武門)으로 바뀌었다.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1678~1735) 때 예부시랑인 사사정(査嗣廷)은 강서성에서 과거시험문제를 내면서 ‘대학, 우전지 2장 석신민’에 나오는 "유민소지(維民所止)"를 시험문제로 제출하였다. 유민소지의 유(維)와 지(止)가 옹정(雍正)의 머리를 자른 글자라고 누군가가 옹정제에게 고자질하여 사사정의 직위를 박탈하였다. 결국 사사정은 감옥에서 죽음을 맞고, 목이 베이는 육시(戮屍)의 형벌을 받았다.
그 모양이 비슷한 글자를 피하기까지 한다. 황(皇)자와 고(辜)자의 모양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고(辜)를 죄(罪)로 바꾸기도 하였다.
송(宋)ㆍ명(明) 때의 제명(製名)에 대한 금령(禁令)을 보자,
송나라 선화(宣和 휘종(徽宗)의 연호) 중엽에는 백성들에게 천(天)ㆍ왕(王)ㆍ군(君)ㆍ성(聖)의 글자로 이름 짓는 것을 금하였고, 1369년 명나라 홍무(洪武) 2년에는 한림원(翰林院)에 명하여 관민(官民)의 서례 의식(書禮儀式)을 제정하여 민간들이 선세의 성현(聖賢)과 대국 군신(大國君臣), 그리고 한(漢)ㆍ당(唐)ㆍ진(晉)ㆍ송(宋) 등의 글자를 빌어 이름과 자를 짓는 것을 금하였다.
청 세종(淸世宗) 옹정(雍正) 1년(1723)에는 모든 지방(地方)에 명을 내렸는데, 성명(姓名)이나 문(文)에서 공자(孔子)의 휘(諱)를 만나면 모두 부방(阝旁)을 붙이고 구(丘)자를 모방하여 승(升)으로 대용한 것은 순치(順治) 을미(乙未) 진사(進士)들이고, 옹정(雍正) 이후로는 모든 책에 구(邱)로 고쳤으니, 승(升)으로 모방한 것과 같다. 읽을 때는 기(期)로 읽으라 하여 지극히 공경하는 뜻을 보였다고 이덕무(李德懋:1741-1793)는 그의 저서 청장관전서 앙엽기(盎葉記一)에 썼다.
이는 누루하치가 명나라를 폐망시킨 후, 민심 이반을 막고 공자의 학문을 따르던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측면이 더욱 크다.
당태종 이세민이 노자(老子)를 이(李)씨의 조상이라고 받들어 놓았으나, 번한세가에는 노자의 아버지 이름이 한건(韓乾)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하(蕭何) 한신(韓信)과 더불어 한나라의 건국 공신인 장량(張良)은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韓)나라 재상을 지냈는데, 한나라가 멸망하자 만금(萬金)의 가산을 아끼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서 강대한 진(秦)나라에 복수를 하여 천하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하여 자기의 뿌리는 역시 한(韓)이었음을 밝혔다.
<제 2장>
발해국의 귀족 성씨였던 대(大)씨와 오(烏)씨들은 고려로 망명하거나 대단위로 유입되어 한반도 곳곳에 살게 된다. 大씨는 태씨로 바뀌었다. 그러나 烏씨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종 2년 고려사가 마감되면서 이들 烏씨들은 같은 음인 吳씨로 바뀌었을 가능성을 본다.
한말의 학자 황현(黃玹: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 제1권) ‘호남의 부호 오영석’에서 그 단초를 확인해 보자.
“호남의 부호 중에 오영석(吳榮錫)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논밭에서 생산되는 벼는 1만석쯤 되었다. 민영환은 그를 끌어들여 자신의 문하에 출입하게 하였다. 서울 사람들은 그를 오금(烏金)이라고 하였다. 「吳」와 「烏」가 동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음사(蔭仕)로 누차 군읍(郡邑)의 수령을 지냈다”라고 썼다.
1765년 영조(英祖) 41년 연경사행(燕京使行)으로 갔던 홍대용(洪大容)이 연경의 시장에서 만났던 오가 상인[烏商]은 자기가 조선인이라 말했다. 조선의 吳씨를 친척이라 불렀다.
사기(史記)와 시경(詩經) 주석자들이 동이의 자취를 감주고자, 삼족오인 현오(玄烏)를 제비(燕)로 바꾸어 놓았 듯,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대륙이 한민족 땅이었음을 알아서는 안되었을 터, 고려사 간행과 함께 동음이자(同音異字)인 吳자로 바꿔치기했을 개연성이 너무나 크다.
장유(張維 1587-1638)는 그의 문집인 계곡집(谿谷集 제15권) 의정부 영의정 권공 행장에서 ‘권씨(權氏)는 본래 성씨가 김(金)이었다. 그런데 신라씨(新羅氏)의 후예로 행(幸)이라는 이가 고창군(古昌郡)을 가지고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귀부(歸附)하자, 고려 태조가 그 공을 갸륵하게 여겨 ‘기미에 밝고 권도에 통했다.[炳幾達權]’ 하여 권씨의 성(姓)을 하사하고 고창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는데, 뒤에 가서 고창이 안동부(安東府)로 바뀌면서 권씨가 마침내 안동 사람이 되었다‘고 썼다.
고려의 정치가이며, 문인이었던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권하 27장)에 보면, 이인로는 그가 찬한 글에서 자신을 농서타리(隴西駝李)라 칭했다. 그 주에 ‘증보문헌비고 제계고(帝系考)’를 인용, 경원(인천) 이씨의 본성(本姓)은 기(奇)씨였다고 기록했다. 신라 때 당(唐) 황제의 이씨 성으로 사성(唐賜姓氏) 받았다고 썼다.
‘의령 남씨(宜寧南氏)의 시조(始祖)는 당(唐)의 안렴사(按廉使) 김충(金忠)으로 천보연간(天寶年間)에 중국 사신으로 왜(倭)에 갔다가 표류되어 영해(寧海)에 표착되었다. 남으로부터 왔다 하여 성(姓)을 남(南)으로 하사하였다. 신라가 영양군(英陽君)으로 봉하고, 의령 남씨의 시조로 삼았다’고 이긍익(李肯翊 : 1736~1806)은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서원(書院) 편에 기록했다.
2000년 통계에 의하면 국내 성씨는 286개이다. 대체적으로 중국에 그 근거를 두고 귀화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위에 간략하게 세 집안 만을 소개했으나, 고려가 중기 이후까지 대륙에 존재했던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음을 볼 때, 중국 내륙에 있던 민족들이 살기좋은 고려로 이동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들 집단이 고려 황실을 따라 한반도로 다시 대 이동할 때 자기 고향의 지명을 가져와 성씨의 본관을 삼았고, 정착했으므로 귀화가 아닌 도래(到來)라는 표현이 적절하다할 것이다.
<제 3장>
조선 개국과 동시에 고려 왕씨(王氏)의 성(姓)을 말살하는 피바람이 시작된다. 1394년 태조 3년 4월 왕씨 일족을 제거하기 위해 관원들을 삼척(三陟), 강화(江華), 거제도(巨濟島)에 보낸다.
동년 2월 27일 사헌부에 명하여 강화도에 있는 왕씨 일족의 거취를 감시토록 명하다. 4월 15일 윤방경(尹邦慶) 등이 왕씨(王氏)를 강화 나루에 빠뜨려 죽였다. (甲申/尹邦慶等投王氏于江華)
4월 20일 손흥종(孫興宗) 등이 왕씨(王氏)를 거제 바다에 던졌다.(己丑/孫興宗等投王氏于巨濟之海) 같은 날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令中外大索王氏餘孼, 盡誅之)
4월 26일 왕씨의 성을 쓰지 못하게 하다 (乙未/令前朝賜姓王氏者, 皆從本姓。 凡姓王者, 雖非前朝之裔, 亦從母姓)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은 그가 찬(撰)한 ‘추강냉화(秋江冷話)’에, ‘고려의 왕씨가 망하자 여러 왕씨를 섬으로 추방했더니, 모신(謀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그들을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니, 죽여 버리는 것이 낫다.” 하였다.
그러자 민심이 더욱 악화된다. 이에 ‘1397년 10월 10일 상장군(上將軍) 노조(盧珇)로 특진 보국 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마전군(麻田郡) 귀의군(歸義君)을 습봉(襲封)하고, 왕씨(王氏)로 복성(復姓)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면, 盧씨 성을 쓰던 王씨가 다시 王씨로 돌아왔고 성씨는 임금의 재량에 의해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음을 보여 준다.
태조 6년(1397)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묘(廟)를 세우고, 그후 태조와 7왕(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목종·현종)을 제사지냈다. 숭의전이라 한 것은 문종 2년(1452)부터이며,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이 곳을 관리하게 하였다.
1426년 세종 8년 5월 19일 예조에서 도화원(圖畫院)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계하기를, “도화원에 간수된 전조 왕씨(前朝王氏)의 역대 군왕과 비주(妃主)의 영자초도(影子草圖)를 불태우기를 청합니다.”하니, 명하여 정릉(貞陵)의 반영(半影)도 아울러 불태우게 하였다.
그러나 1576년(선조 9) 선조는 풍기(豊基)의 용천사(龍泉寺)에 소장된 왕 태조(王太祖)의 진영(眞影)을 역군을 조발하여 요여(腰輿)에 싣고 마전(麻田)에 있는 숭의전(崇義殿)에 안치시키되, 경유하는 모든 고을에서는 의장(儀仗)을 갖추도록 명하였다. 또 이안제(移安祭)를 지내게 하였다. 이 또한 민심 이반을 고려한 고도의 정책 결정이 아닌가.
절대 군주제도 아래에서는 ‘성을 갈아 버릴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 속칭 “깜”도 안되는 백성들이야 ‘그렇다’고 할 수 밖에 없었겠다.
한문수 2009. 8. 26. 1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