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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민 10:1)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민 10:2)
여러분 구름 기둥은 시각적 표현입니다. 나팔은 청각적입니다.
사실 200만 대군을 인솔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영이 200만이 늘어서기 시작하면 무슨 나팔이 스피커가 있어요? 요즘 우리처럼 핸드폰이 없으니까 어떻게 그 연락을 해요?
그게 다 늘어서면 20km 이상 거리가 된다고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그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한 시각적 수단이라면 백성들이 항상 구름이 언제 떠오르는지 보고 사는 것은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그렇게 살 수도 없어요. 일도 해야 되고 생활도 해야 되고 또 뭘 일하다가 깜빡하면 구름이 떠오르는 걸 누가 보고 따라갑니까?
그럴 때 막 혼돈이 생길 수도 있죠.
이럴 때 200만 대군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그들을 인도하기 위한 청각적 환기의 수단이 나팔이죠.
하나님의 방식이 아주 납득이 되죠. 아주 합리적이에요.
나팔은 청각적 수단입니다. 더군다나 나팔은 굉장히 사람에게 다양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죠.
나팔의 주법에 따라 다양한 효과를 냅니다. 여러분 119 소리가 삐뽀 삐뽀 삐뽀 하고 가는 그게 그 소리가 왜 사람들의 주의를 끕니까?
여러분 왜 가도 좋다는 색깔은 파란색이고, 서라는 색깔은 빨간색입니까?
그 모든 색깔이 주는 사람에게 주는 심리적 메시지가 있죠.
그게 다 과학적으로 실험에서 나온 거예요.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 중에서 초록이 가운데예요.
그래서 정서적으로 가장 편안한 색깔이라고 그러 그래서 수술실 들어가는 수술실 의사 선생님들이 입는 옷은 대개 녹색으로 가운을 다 바꿨죠.
마찬가지로 소리마다 색이 그런 것처럼 소리마다 심리적 효과들이 있어요.
나팔 소리는 굉장히 다양한 감정을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킵니다.
소리를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따라 호기심도 생기고 흥분도 생기고 아드레날린도 유출시키고 긴장도 시키고 악성도 시키고 그렇게 그래서 이 나팔 소리는 종종 성경에서도 그 하나님의 기별을 전하는 그 수단의 상징으로 나팔을 종종 언급 하시죠?
이게 이제 10장에서부터 나팔을 언급하면서 나팔 주법들이 쭉 언급되어 나옵니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민 10:1-2)
2절에서 나팔 2개를 만들려고 그랬잖아요. 35절 제가 천천히 읽을 테니까 나팔 주법을 한번 찾아보시죠.
“[3] 나팔 두 개를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요 [4] 하나만 불 때에는 이스라엘의 천부장 된 지휘관들이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며 [5] 너희가 그것을 크게 불 때에는 동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며”(민 10:3-5)
“두 번째로 크게 불 때에는 남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라 떠나려 할 때에는 나팔 소리를 크게 불 것이며”(민 10:6)
“또 회중을 모을 때에도 나팔을 불 것이나 소리를 크게 내지 말며”(민 10:7)
여기 3절부터 7절에서 나팔 주법이 크게 나누면 몇 가지로 나누어지고 또 세분하면 또 몇 가지로 나눠집니까?
우선 주법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로 나눠지죠. 하나는 불 때고 하나는 크게 불 때죠.
여기에 불 때하고, 크게 불 때 여기 표현되지 않았습니다만 이게 주법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그냥 볼 때는 길게 뚜~ 이렇게 부는 겁니다.
조금은 낮고 깁니다. 이렇게 부는 거예요.
그거를 두 개를 가지고 불 때는 낮고 긴 소리가 이중으로 나오겠죠.
그런데 그걸 하나 이렇게 낮고 긴 소리를 할 때는 전체 회중을 소집하는 거고,
낮고 긴 걸 하나만 불면 지휘관을 모집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크게 불 때 다른 곳에는 울려 불 때 이렇게 되는데 이거 크게 불 때 하는 이 말은 뭔가 하면 짧게 뚜! 뚜! 이렇게 부는 겁니다.
이렇게 작고 크게 부는 거 이게 나중에 양각 나팔 불 때도 은나팔이 아니고 양각 나팔 불 때도 여호수아를 읽어보게 되면 주법이 다릅니다.
그냥 부를 때가 있고 울려 불을 때가 있어 두두 이렇게 볼 때가 있고 달라요.
두두두 이렇게 볼 때가 있고 그 주법이 다릅니다. 주법에 따라서 나팔이 주는 효과를 달리 하는 거죠.
이렇게 주법에 따라서 여기 보면 진영이 동서남북 넷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뒤에 그럼 세 번째 네 번째는 언제 불었냐 언급 안 해도 자동으로 언급되는 이해되는 거죠.
처음에는 맨 처음 불 때는 동쪽이 출발하고 두 번째 불 때는 남쪽에 하고 그다음에 세 번째는
서쪽이고 네 번째가 북쪽입니다. 이제 그렇게 나파를 불어서 출발 시키는 거죠.
그런데 이런 적법에 따른 관계, 이런 청각적 효과가 있기 때문에 백성들 모두가 다 구름이 언제 뜨나 속만 쳐다보고 긴장하고 살 필요가 없었죠.
그래서 일할 수도 있고 잠잘 수도 있고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팔을 부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8절입니다.
“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지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니라”(민 10:8)
예 나팔은 제사장들이 불어야 했습니다. 제사장들의 사명 나팔 부는 것이 제사장들의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멈추라는 것과 떠나라는 것을 말씀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려주는 사명이 제사장들의 사명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백성이 항상 구름만 쳐다보고 살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도 해야 되고 잠도 자야 됩니다. 그것만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구름을 살펴야 했습니다. 그걸 보고 나팔을 불어야 했습니다.
여기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어라 하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뭐예요?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어라 하는 이 민수기 10장 8절에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뭐예요?
구름을 살펴라 그 말입니다. 그래 구름을 살펴서 머무르면 뜨면 그걸 보고 항상 할 수 있어야 되는 거죠.
아까 제가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구름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는데 바로 그런 모습을 가지고 바울이 그의 제자에게 한 유명한 권면이 있죠.
디모데후서 2장 15절 유명한 구절이죠. 15절에 보면 내가 우리 학생들에게 많이 인용해서 늘 설명했던 것 중에 하나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함이오. 이 성경 말씀을 잘 분별하며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딤후 2:16)
16절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제가 참 안타까운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우리가 다 이렇게 연약하고 제한적이잖아요.
그래서 정말 이제 말씀을 분별하는 일이 정말 필요하고 오늘날 말씀을 섬기는 분들이 저를 포함해서 정말 말씀을 잘 분별해서 구름이 떠오르는지 지는지 내리는지 이걸 보고 나팔 잘 불어줘야 합니다.
제가 그래서 현직 교수로 있을 때는 언젠가도 말씀드린 것처럼 신학과 학생들이 1학년에 들어오면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설교하지 말라고 그럽니다.
제가 집에 가서 고향 내려가면 우리 신학도 왔다 그러고 설교하라고 그러는 그때 말씀에 빛도 없고 무슨 말을 해야 되는지도 모르는데 신학생 됐다고 설교하라고 그러니까 막 이것저것 뒤져가지고 사람 말하고 그렇게 하지 마라.
이제 뭔가 보이고, 하고 싶은 말이 가슴에 가득 찰 때까지 우리는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는 스피크 아니고 메신저로 야 메신저는 메시지가 없으면 하는 말이 없는 사람들이야.
메시지가 있느냐 없느냐이지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 진리의 말씀을 이렇게 분별해야지 저희 저도 끊임없이 배워가는 심정으로 우리 젊은이들에게 이제 그렇게 호소하고 했었죠
제가 참 나름대로 살면서 안타깝게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진리의 바다가 우주 같고 태평양 같거든요.
너무너무너무 많은 이 우주 같은 말씀의 바다 앞에 내가 관심 있는 거 어떻게 한 구절, 그냥 하나에 꽂혀가지고 평생을 고집스럽게 보내는 그런 상황들도 종종 봅니다.
그런 것들이 다 우리를 하나님의 품성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어주는 장애가 되는 것이죠.
특별히 제사장님은 나팔을 부어야 됩니다. 그래서 나파를 부르라고 하는 그 말은 이 맥락에서 제대로 이해하면 뭐라고요?
구름을 제대로 살펴라.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지시되는지를 봐라.
그게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전제로 한 표현인 거죠.
9절입니다.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민 10:9)
앞으로 행진해 가면서 전쟁이 일어날 때 이렇게 나팔을 불어야 되는데 그때는 어떻게 부르라고요?
크게 불어라 이렇게 썻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크게 불라는 말은 짧게 끊어서 크게 부는 겁니다. 이게 길게 낮게 전쟁이 발혔지만 이렇게 불러야 되는 거 아주 토탈적으로 보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나중에 이제 말씀이 진행돼 가면서 살펴보겠습니다만 여호수아를 읽어보게 되면 그러고서 이제 4장 5장에서 요단강을 건너고 6장에서부터 여리고를 돌고 6장 7장에서 여리고를 정복하고 이제 7장 8장에서 아이성 공격하고 그러잖아요.
6장 7장에서 여리고성 정복할 때 마지막에 백성들은 제사장들 앞에서 나팔을 부르고 백성들은 아무 소리 안 하고 일주일 동안 성을 돌았죠.
마지막에는 일곱 바퀴 돌고 난 다음에 제사장이 나팔을 쫙 불 때 외치라 그랬습니다.
근데 외칠 때 뭐라고 외쳤을까요? 외치라 그럴 때 뭐라고 외쳤습니까?
성경에 뭐라고 외치라고 돼 있습니까? 아무 말 없어요.
무너져라 그렇게 답하시면 안 됩니다. 성경에는 그냥 외쳐라 이렇게만 나와요.
왕 했는지 뭐라 했는지 몰라요. 여호수아 그 부분에 가서 우리 공부할 게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냥 외치는 게 그냥 혼자 목소리만 막 외치거나 외친 게 아니고 나팔을 불었죠.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도 나팔를 불었습니다. 이거 뭐예요?
나를 전쟁 때 나팔를 불면 승리죠. 전쟁과 함께 승리가 전제된 것입니다.
또 사상에 가보면 저 유명한 기드온 300명 이야기했잖아요.
근데 기도원에 300군사들이 항아리에다가 횃불 넣고 막 두드리다가 항아리를 깨트리면서 하는 ... 사사기의 기드온 어떤 그런 역사적 이야기뿐만이 아니고 지금 우리도 함께 성경책을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1절입니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31)
예수 재림의 장면을 이야기하면서 나팔 소리도 묘사하죠.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고전 15:51)
역시 고린도전서 15장은 마지막 사망을 이기는 소리를 나팔 소리로 묘사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우리가 너무너무 잘 아는 유명한 구절이잖아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이때 역시 나팔 소리는 뭘 나타내요.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뭐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역시 사망에 대한 승리의 함성, 승리의 사운드 승리의 소리로 말해주는 것이 나팔 소리 아닙니까?
이 소리를 성경에서 그러므로 이 나팔 소리는 여기 민수기 10장 9절에서 언급된 대로 대적을 치러 나갈 때 나팔을 불어라.
이건 전쟁한다 이렇게 경고만 하는 게 아니고 승리를 약속하는 그런 소리인 거죠.
그다음에 10절입니다.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과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민 10:10)
이상하죠. 여기는 속죄제물이나 속건 재물이나 소제가 없어요.
번제 하고 화목제물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날입니다.
희락의 날이 언젠가 말 그대로 좋은 날이에요. 전쟁 때만 나팔 부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날, 기쁨이 있는 날, 즐거운 날 이럴 때 하나님을 나팔을 불어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역사적 사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훗날 시간이 좀 지나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절기를 정상적으로 지키게 되죠.
아예 나팔을 불면서 시작되는 절기가 있습니다.
무슨 절이죠? 나팔 7월 1일에 시작됐던 나팔절, 아예 나팔절은 나팔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여기 초하루는 매달 1일이죠.
여러분 성경에서 아예 나팔 부르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시작된다는 유명한 장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8장부터 11장은 일곱 천사의 일곱 나팔장입니다.
그렇죠 8장부터 11장은 다 일곱 나팔 이야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8장 2절에 보면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결국 나팔은 경고와 승리와 기쁨과 모든 것을 나타내주는 그런 도구임을 알 수 있죠.
여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팔을 부르라.
누구 보고 부르라고요? 제사장에게 부르라. 이쯤 해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이 나팔 얘기만 나오면 반드시 확인해야 할 유명한 성경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8절,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고전 14: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그랬습니다.
이제 이 표현은 그야말로 나팔의 모데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갈 때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나팔을 이렇게 부르라 하고 주법을 딱 말해줬던 그 모든 것이 전제된 개념이죠.
그렇죠 하나를 불러야 할 때 두 개를 불러야 할 때 이렇게 길고 낮게 불러야 할 때 짧고 크게 불러야 할 때 이 모든 나팔 기능이 다 전제했던 것을 바울이 이해하고 그리고 그걸 그 개념을 그대로 끌고 와가지고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교회에서는 선명하고 분명한 말씀을 전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은유로 설명하기를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말합니다.
오늘날 나팔을 불어야 하는 어쩌면 제사장의 사명이 주의 백성들에게 많은 제사장 설에 의해 우리는 택하신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하나님 그 말씀에 의해 답할 부는 사명이 오늘 우리에게 다 이렇게 부여되었다고 사실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도 말씀을 섬기면서 사실 제가 여러분께 하나 고백한다면 제가 이 저녁 2시간 수업을 위해서요. 그냥 평생 강의하고 학생들에게 20년 30년 가르치던 이렇게 본문들입니다만 제가 이 시간을 위해 우리 집사람이 옆에 증인입니다.
제가 어떻게 진짜 헛소리하지 않고 분명한 소리를 내야 하나 그런 이렇게 부담으로 제가 최대한 준비를 해요.
성경을 또 보고 다른 역본으로 또 읽어보고 내가 혹시 잘못 그러면서도 또 기도하는 가운데서 이렇게 나팔이 분명한 소리를 내도록 저도 이렇게 여러분에게 전하고 여러분들도 그렇게 함께 하게 하기 위해서 제 나름대로 또 나름으로는 이렇게 시간을 들여가면서 준비를 합니다.
또 우리가 나팔의 기능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 나팔 이야기 나올 때마다 반드시 살펴봐야 되죠.
빠뜨릴 수 없는 구절 마태복음 6장 2절 찾아보겠습니다.
이제 나팔의 기능이 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죠.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2)
이 사람들처럼 여기 뭐예요? 이게 여기 나팔을 불면 관심을 받게 되는 걸 전제로 하는 거죠.
그게 그러는 사람에게 각성을 시키고 환기시켜준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 뭔가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자꾸 한 일을 떠드는 것에 대해 주님께서 나팔을 불지 말라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팔 불지 말라 이렇게 했는데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한국어 표현 기가 막힌 표현이 하나 있죠.
이때는 나팔을 불지 말라 이렇게 안 하고 한국 사람들은 나발을 불지 말라 이렇게 표현하죠.
그래서 정말 우리는 나팔을 불어야지 나발 불면 안 됩니다.
이게 기가 막힌 한국어 이걸 영어로 어떻게 통역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팔을 불지 말라 나발을 불지 말라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마태복음 6장 2절의 표현은 정말 이게 나발을 불지 말라에 딱 해당되는 말씀인 거죠.
이렇게 주님께서 이제 광야 출발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장들에게 구름으로 시각적 임재와 인도, 나팔로 청각적 환기 이 두 가지 모든 장치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것을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시행하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11절 드디어 출애굽기 19장에 도착한 다음에 다함께 봅니다.
출애굽기 19장 1절 직접 성경을 찾아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출 19:1)
그러니까 출애굽기 19장 1절부터 민수기 10장 10절까지 계속해서 시내광야에 있었습니다.
그동안 출애굽한 지 3개월 만에 시내 광야에 도착해서 그러니까 3개월이 되던 날이니까 두 달 만이죠.
두 달 만에 시내 광야에 도착해서 그다음 여기 민수기 10장 11절을 보세요.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르매”(민 10:11)
그러니까 그동안 시내 광야에 정확히 1년 20일 동안 있었던 거죠.
이제 그게 보이시나요? 둘째 해 둘째달 20달이에요.
그러니까 출애굽기 19장 1절에 만 2개월을 보내고 3개월이 되던 날에 시내 광야에 왔다가 그로부터 만 1년이 지낸 둘째 해 둘째 달에서 20일이 더 간 20일 동안 20날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릅니다.
드디어 출발하는 거죠. 출발할 때는 어떻게 부르라고 그랬습니까?
짧고 크게 부르라고 그랬죠.
아까 10장 5절에서 크게 불 때는 라고 했기 때문에 나팔을 부릅니다.
이렇게 불자 드디어 출발하는 거죠. 12절 미리 말합니다.
이때 출발해서 어디까지 갔는지를 미리 말하는데,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자기 길을 가다가 바란 광야의 구름이 머무니라. 이렇게 일단 시내 광야부터 바란 광야까지 공간 이동을 12절에서 앞에 설명해 주고, 그다음에 13절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따라 행진하기를 시작하였는데 드디어 지난 3주 동안 우리 준비 잘하고 우리도 함께 이제 출발합니다.
행진 시작합니다. 14절부터 17절 유다 지파가 먼저 출발합니다.
14절부터 선두로 유다 자손의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이 출발합니다.
그다음 18절을 보세요.
“다음으로 르우벤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진영별로 출발하였으니 르우벤의 군대는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이 이끌었고”(민 10:18)
다음 22절을 보시죠.
“다음으로 에브라임 자손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진영별로 행진하였으니 에브라임 군대는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가 이끌었고”(민 10:22)
다음으로 에브라임 자손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이 출발합니다.
그다음 어디를 보시는가 하면 25절입니다. 다음으로 단 자손 진영의 분기에 속한 자들이 여기서 드디어 출발합니다.
“다음으로 단 자손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진영별로 행진하였으니 이 군대는 모든 진영의 마지막 진영이었더라 단 군대는 암미삿대의 아들 아히에셀이 이끌었고”(민 10:25)
여러분 그런데 이 사람 이 각 지파가 네 진영으로 나누어져서 출발할 때 여기 본문의 표현대로 14절을 보실까요?
선두로 유다 자손의 진영의 어디에 그랬습니까? 군기 그랬잖아요.
군기는 뭡니까? 군대 깃발 그런 뜻입니까? 군대 깃발.
근데 이 본문에 14절에 유다 자손의 진영의 군기 하면 이 군기의 그림이 뭔지는 안 나와 있죠 그렇죠 그다음 18절에 르우벤 친영의 군기 거기도 군기 그림이 뭐라고 하는 게 안 나와 있습니다.
22절 에브라함 자손 군기 안 나와 있습니다.
25절 단 자손의 군기 안 나와 있어요. 성경에는 없어요. 그런데 유대인 랍비들이 군기를 나름대로 그렸습니다.
군기를 확인했습니다. 그 군기를 그려낸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함께 에스겔 1장 10절을 보시죠. 에스겔 1장 10절.
이 군기의 그려진 그림은 성경 본문이 말해주는 게 아니고 유대 라비들의 해석이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 본문에는 없어요. 그런데 유대 랍비들이 그렇게 해석한 근거가 에스겔 1장 10절에 있습니다.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겔 1:10)
여기 보니까 그 얼굴들의 모양은 하나님의 보좌를 옹립하고 있는 체어리어트
우리 말로 뭐라고 그러는 병거 수레라고 그러잖아요.
병거에 있는 내 짐승의 생물의 얼굴 모양이에요. 1장 10절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오른쪽 은 사람의 얼굴 사람의 얼굴입니다.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 메세지는 독수리의 얼굴 한 성경 절 더 봅니다.
10장 14절입니다. 에스겔 10장 14절에 역시 사람 사자 소 독수리 나오지요.
그렇죠 여기 내 생물의 얼굴 사람, 사자, 소, 독수리 여기 표현된 이 내 생물의 특성이 여호와의 품성을 나타내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격을 나타내주는 혹은 메시아의 사역을 나타내주는 내 국면이라고 랍비들이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내 짐승을 네 군기의 그림에다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4절로 돌아갑니다. 민수기 10장 14절. 그래서 민수기 10장 14절에 선두로 유다 자손 지영의 군기라고 했죠.
이 군기는 유다는 사자 새끼라 하는 말씀이 있죠. 그래서 유다 자손의 군기를 사자 깃발로 만들었습니다.
옆에다 적어놓으세요. 근데 이거는 아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다음
18절에 루우벤 진영의 군기라고 그랬죠. 이 루벤 진영의 군기에다가 사람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다음에 22절 에브라임 자손의 깃발 그랬죠. 군기라 그랬죠.
거기에 송가지 깃발을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25절 단자손 진영의 군기 거기에다가 독수리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내 생물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나타내준다 그러죠?
다 들어보셨죠? 우리가 너무 익숙히 아는 내용 상식적으로 아는 내용이잖아요.
사자는 왕 되신 예수님을 나타내주고, 사람은 인자 되시는 예수님을 나타내주고, 소는 섬기는 이 종 되시는 예수님을 나타내주고, 독수리는 하늘을 나는 신성의 예수님을 나타내신다고 그러잖아요.
그렇죠 마태는 왕 되신 예수님, 마가는 종 되신 예수님, 누가는 인자 되신 예수님,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 그렇죠.
그래서 그 강조점이 마태는 왕이기 때문에 왕은 족보가 없으면 왕이 될 수가 없어요.
마태복음에는 족보가 있어요. 마가는 종이에요.
종은 족보가 없어요. 마가복음에 족보가 없어요.
누가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누가복음 3장에 족보가 있어요.
요한복음에 족보가 없어요. 하나님은 족보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렇죠.
그래서 사자, 사람, 송아지, 소, 독수리 이런 모습으로 각각의 진영이 각 지파를 대표하는 선임 지파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해서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죠.
이 유다 지파와 함께 레위 사람들이 뭘 가지고 가죠?
어디를 보시는가 하면 17절입니다.
“이에 성막을 걷으매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이 성막을 메고 출발하였으며”(민 10:17)
유다 자손의 선부로 해서 이사가 스블론 함께 따라가고 17절 이에 성막을 걷어내 게르손 자손과 무라리 자손이 성막을 메고 출발했습니다.
이때 다 유다 지파를 선두로 한 동쪽 지파 사람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다음에 18절부터 읽어보면 루벤을 비롯한 남쪽 지파 사람들이 출발합니다.
거기에 누가 함께했나요? 21절 보세요.
“고핫인은 성물을 메고 행진하였고 그들이 이르기 전에 성막을 세웠으며”(민 10:21)
고핫이는 성물을 메고 행진하였고, 그들이 이르기 전에 성막을 세웠으며 이렇게 했습니다.
옷자손은 다 메고 갔죠. 이렇게 아주 조직적으로 질서 있게 12지파가 함께 출발하면서 드디어 광야 행진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 각각의 깃발이 이스라엘 진영을 옹위하는 메시아의 내 국면을 그대로 나타내주고, 그 모습이 그대로 복음서에 반영돼 있는 모습을 보게 되죠.
왜 똑같은 걸 갖다 복음서 한권으로 쓰면 되지, 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근데 네 권의 책이 있어야 우리를 위해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내 국면이 그대로 강조되기 때문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으로 복음서를 정리해서 우리들에게 소개해 주고 있는 것이죠.
드디어 출발합니다. 10장 29절입니다. 이렇게 출발하자 모세가 조금 우리가 보기에 엉뚱한 길을 하는 것 같습니다.
천천히 읽어보죠.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민 10:29)
“호밥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민 10:30)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민 10:31)
“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민 10:32)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민 10:33)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은 루브엘의 아들 코바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방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
허갑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데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모세의 말로 이 장면은 끝났어요.
호밥이 모세의 말을 들었을까요? 안 들었을까요?
아니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는데 왜 모세는 느닷없이 호밥에게 우리의 눈이 되리다라는 요청은 왜 하는 거예요?
믿음이 없어져가지고 모세가 이렇게 했나요? 이 호밥을 뭐라고 소개하고 있나요?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
그러면 호밥은 모세에게 장인이에요. 뭐예요? 장인인 루우엘의 아들이니까 모세한테는 처남이 되겠죠 그렇죠 그런데 사사기 4장 11절 보세요.
이건 다 찾아보셔야 돼요. 사사사기 4장 11절 성경마다 이런 게 나오면 이제 당황하지 말고 뚜렷하게 답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사사기 4장 11절 직접 찾아보시죠.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삿 4:11)
4장 11절 뭐라고 그랬어요?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그렇게 했죠?
사사기 4장 11절에 보니까 호밥이 모세의 장인이에요.
여러분 모세의 장인은 이름이 세 개입니까? 여러분 보세요.
그렇게 호밥을 모세의 장애인이라고 설명 소개하는 설교가 많아요.
인터넷에 보면 많아요. 여러분 출애굽기를 보세요.
출애굽기로 돌아가서 2장 18절에 보면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출 2:18)
모세가 이제 미리안 광야에 가서 여자들을 만났는데 18절에 보면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이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3장 1절을 보세요.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누구 이으로 그랬죠?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출 3:1)
그러니까 2장 18절에 의하면 모세의 장인은 르우엘이고 3장 1절에 의하면 이드로이고 사사기 4장 11절에 의하면 호밥이에요.
모세의 장인 이름은 모세의 장인이 도대체 누굽니까?
이제 민수기 12장을 이제 다음 주에 우리가 공부하게 될 텐데 민수기 12장 가보면 모세가 형제들 때문에 갑자기 힘들어져요.
모세의 장인이 찾아와가지고 문제가 생겼거든요.
근데 모세가 거기 보면 또 다른 여자하고 결혼을 한 것 같아요.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민 12:1)
실제로 모세가 12장 1절에 보면 구스 여인을 택했다고 그랬는데 모세가 또 다른 부인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그럴까요?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우선 호밥은 모세의 장인일입니까?
처남입니까? 또 더 나가서 하나만 더 찾아보죠. 사사기 1장 16절을 보세요.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주하니라”(삿 1:16)
사사기 1장 16절 이거 나중에 사사기 공부하게 될 때 이렇게 설명드렸어도 또 많이들 잊어버리면 또다시 여기 와서 또 확인해 봐야 돼요.
사사기 1장 16절에 보면 재밌죠. 성경이 이렇게 풀어지는 게 재미있죠.
1장 16절입니다. 거기 보니까 모세의 장인은 어디 사람이라 그랬어요 겐 사람이라 영어로 Kenite.
“The descendants of Moses’ father-in-law, the Kenite, ”(Jdg 1:16)
아까 출애굽기 3장 1절에 보니까 미디안 제사장이라고 그랬는데 미디언 나이트
사사기 1장 16절은 Kenite 1장 16절.
도대체 모세의 처가는 미디안 족속이에요. 겐족속 이에요.
모세의 장인은 르우엘이에요. 이드로예요. 호밥이에요?
성경을 있다가 이런 게 나오는데 이게 뭐지 하고 이런 거 다 확인해야 되잖아요.
그쵸? 하여튼 모세가 이 사람들 보고 눈이 되어 달라 그러고 길 안내를 해달라고 그랬는데 그 길 안내를 해달라고 한 게 왜 했는지 살펴보기 전에 도대체 후반이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되겠죠.
우선 출애굽기 2장 18절에 르우엘이라고 그러고 3장 1절에서 이드로라고 그랬는데 한 사람이 두 가지 이름을 쓰는 것은 얼마든지 그런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죠.
아브람 아브라함, 야곱과 이스라엘, 요셉과 사브낫바네아, 기드온과 여룹바알(Jerubbaal), 솔로몬과 여디디아 다 한 사람인데 다니엘과 벨드사살, 사울과 바울 이름 두 개 너무 많았죠.
여러분 그러므로 출애굽기 2장 18절에 르우엘이 출애굽기 3장 1절에서 이드로라고 불렸는데 왜 같은 사람이 르우엘과 이드로로 불렸을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르우엘 하잖아요. 르우엘 근데 엘 할 때 그 엘은 다 하나님이에요.
다니엘, 엘리야 할 때 엘은 다 하나님이거든요.
‘르우’라는 말은 친구입니다. 그래서 ‘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포함하고 있어요.
그래서 르우엘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친구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친구 그러니까 이드로는 미디안 족속인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어요.
유일신 신앙을 하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이름이 르우엘이라는 이름과 이드로가 미디안 족속으로서의 이름인데 르우엘이라는 이름을 통해 그가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는 거죠.
문제는 사사기 1장 16절에서 모세의 장인은 된 사람이고, 사사기 4장 11절에서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겐 사람 모세의 장인을 호밥이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미디안 족속인가 겐 족속인가 장일인가 처남인가 여러분 이게 이것에 대해 답을 주는 구절이 바로 민수기 10장 29절입니다.
성경을 조금만 자세히 읽어보면 답이 나오는 거죠.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민 10:29)
민수기 10장 29절에서 모세의 장인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오빠들이 있어요.
근데 여러분 여기 모세 장인이라고 번역된 이 장인이라는 히브리어가 장인이 되면 히브리어는 호텐이고요. 처남 하탄이에요. 근데 원래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걸 호텐으로 읽어야 되느냐 하탄으로 읽어야 되느냐 하는 것은 성경을 보고 정확히 이해하면 돼요.
근데 이걸 마소라 학자들이 하탄으로 읽은 겁니다.
근데 이걸 하탄으로 안 읽고 호텐으로 읽어야 된다고 하는 것 그게 바로 민수기 10장 29절이 말해주는 거죠.
모세의 장인 루브엘의 아들 호밥 이렇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이 구절은 사사기 4장 11절은 수정해야 합니다.
모세의 장인 호밥이 아니고 모세의 처남 호밥으로 고쳐야 합니다.
그래서 한글 개혁에는 없던 설명이 이렇게 난하주에 나와 있죠.
개혁 개정에는 민수기 10장 29절을 보면 처남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하는 설명이 개역 개정 성경에 나와 있을 겁니다.
그래서 호밥은 모세의 장인이 아니고 모세의 처남입니다.
그러면 미디안 족속과 겐 족속은 도대체 뭔가 이건 또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하면요.
미니안 족속과 겐 족속은 이 두 족속의 관계는 간단합니다.
여러분 저는 강원도 강릉 사람이에요. 저는 강원도 사람입니까?
강릉 사람입니까? 그렇죠 그래서 미디안 족속과 겐 족속의 관계가 겐 족속이 미디안 족속의 하부 족속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크게 말하면 미디안 족속인데 그 부족을 그대로 말하면 겐 족속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영국에 가기 전까지 영국의 영국 나라 이름이 잉글랜드인 줄 알았어요.
근데 제가 영국 유학 가가지고 스코슬랜드라는 곳에 가가지고 잉글랜드 하니까 사람들이 이래요.
I am not english. I am Welsh.
제가 영국에 살 때 유학할 때 저 옆집에 웨일스 할머니가 있었는데 이 할머니는 만날 때마다 I am not english. I am Welsh. 여러분 저는 영국이 4 나라인 줄 몰랐어요.
우리가 지금 영국 하잖아요. 영국이라는 말은 잉글랜드를 번역한 거예요.
그래서 여기 스코틀랜드 사람, 웨이치 사람, 아이비치 사람, 아일랜드 사람 이런 사람들은 사람들은요.
①잉글랜드 (England) - 잉글랜드인 (English)
②스코틀랜드 (Scotland) - 스코틀랜드인 (Scottish)
③웨일스 (Wales) - 웨일스인 (Welsh)
④북아일랜드 (Northern Ireland) - 북아일랜드인 (Northern Irish) 또는 아일랜드인 (Irish)
자기들 10번 만나면 10번 다 스코틀랜드인 (Scottish) 웨일스인 (Welsh) 이러지 잉글랜드인 (English)이라고 안 해요.
그런데 네 나라가 다 합쳐가지고 브리티시가 됐어요.
그래서 브리티시 그룹은 받아들이는데 잉글리시 그룹은 안 받아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니까 미니언 족속과 겐 족속이 마치 잉글랜드인 (English)와 스코틀랜드인 (Scottish)과 같이 브리티시로 불리는 것처럼 그런 관계일 수도 있어요.
여하튼 여기 그러므로 모세의 장인이 미디안 족속이냐 겐 족속이냐 하는 것은 서로 전혀 충돌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서로 연결된 이야기다. 그런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해야 합니다.
문제는 왜 모세가 이 호밥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느냐 하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모세의 말을 다시 한 번 분석해 보겠습니다.
보겠습니다. 29절 30절입니다.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민 10:29)
“호밥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민 10:30)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민 10:31)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그다음 말씀 어떻게 진칠지를 아는 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을 따라갈 수 있지만, 그야말로 광야의 독사가 어디 나오는지, 돌 있는 곳에 와디가 계절 강이 어디 있는지, 이런 모든 구체적인 장소에 텐트를 어떻게 쳐야 하는지를 아는 데는 그 지형을 아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 데리고 캠핑 가보세요. 아이들이 애들 데리고 어른들이 아이들 데리고 다 갔더라도 장소 데려다 놨다고 해서 애들이 캠프 못해요.
텐트 다 쳐줘야 되고, 애들 돌 다 골라줘야 되고 다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셔서 어디로 가야 할 장소는 알지만은 그 광야 장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광야에서 살았던 사람이 알 수 있으니까 호밥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것이지 인도해달라고 하는 것을 부탁한 게 아닙니다.
어떻게 진칠지를 아나니 요 표현 속에 모세의 부탁의 의미가 다 담겨 있는 것이죠.
모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불신해서도 아닙니다.
결국 호밥은 모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까요? 30절에 보니까 안 가겠다고 그랬습니다.
일단 거절해줬습니다. 고향으로 가겠다고 그랬습니다.
모세가 재차 요청했었죠. 우리를 떠나지 마세요.
우리와 동행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 대로 우리가 당신께 행하겠습니다.
민수기 본문에는 호밥이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더 이상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까 우리가 읽어봤던 사사기 1장 16절, 사사기 4장 11절 등등을 보면 그때까지 호밥의 자손들이 유다 자손들과 함께 있습니다.
사사의 시대까지 같이 간 거지요, 더 나아가 사사의 시대를 넘어 왕정 시대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최초로 누가 왕이 됐죠? 사울이 왕이 됐습니다. 사울이 왕이 돼 가지고 그때 사울이 무슨 일을 하는가 보세요?
다 함께 사무엘상 15장 6절입니다. 찾아서 읽겠습니다.
사무엘상 15장 6절 사울이 아마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을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치려고 합니다. 그때 사무엘상 15장 이거 보면 이런 게 정확하게 확인되는 거 보면 참 재밌죠.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삼상 15:6)
그러니까 이때 겐 족속이 유다 족속과 함께 살면서도 아말렉 족속과도 함께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다음에 우리가 아말렉 족속을 공격하면서 너희와 함께 멸하게 될까 걱정이 돼서 하더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그렇죠. 사울이 겐 족속을 향해 이렇게 말을 하죠.
그렇죠. 그러므로 호밥이 모세의 요청을 들어서 광야 여정 내내 함께했고, 가나안 정복 후에 그때까지 함께 살면서 같이 거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겐 족속이 이스라엘을 출애굽에 상당한 도움을 줬었고, 그 은혜 받았던 사실을 사사 시대까지 기억하고 그 선대했던 약속, 모세가 뭐라고 말했어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라는 약속을 그대로 지켜서 사울이 이때 그 약속을 시행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죠.
참 이런 부분을 우리가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되는지 어떻게 기억하고 있어야 되는지를 다 나타내주고 있지 않습니까?
드디어 33절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민 10:33)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민 10:34)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민 10:35)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민 10:36)
모세의 기도 따라서 궤가 움직일 때 모세는 여호와여 길을 열어주소서 머물 때는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죠.
출발하자 궤가 앞에서 인도했습니다. 다함께 민수기 2장 17절을 보시죠.
“그 다음에 회막이 레위인의 진영과 함께 모든 진영의 중앙에 있어 행진하되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각 사람은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들의 기를 따라 앞으로 행진할지니라”(민 2:17)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 성소는 진 중앙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법궤는 진 중앙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민수기 10장 33절에 보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날 때 삼일 길을 갈 때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앞서 갔다고 했습니다.
문제, 언약궤가 시내산에서 출발하여 처음 3일만 제일 앞에 갔을까요?
민수기 2장 17절의 말씀대로 중앙에서 갔을까요?
나머지는? 그렇다면 광야 내내 법궤는 진 중앙에서 갔을까요?
진 앞에서 갔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요단강에 도착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널 때는 궤가 중앙에서 갔을까요? 제일 앞에서 요단강을 건넜을까요? 다시 말해 백성들이 법궤를 모시고 갔을까요? 법궤가 백성들을 이끌고 갔을까요? 궁금하시죠?
민수기 10장 33절에 이 표현이 민수기 2장 17절과 비교해서 보니 또다시 이런 궁금증이 일어 나죠.
제가 늘 했던 대로 이 궁금증이 궁금하다면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10장까지 모든 걸 준비하고 이제 출발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11장 12장에서 멋지게 진행해 나가는 장면이 나올 것 같습니다.
10장의 마지막 기도가 모세가 여호와여 우리에게 대접을 물리치시고 길을 열어주소서 오늘날 여호와에 돌아오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출발했던 그다음 참 11장에 멋진 이야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11장에 보면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너무너무 기대 밖의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12장에 가면 더합니다. 모세의 형과 누나가 모세를 힘들게 합니다.
11장 12장 저 유명한 그다음 이야기는 제가 다음 주 목요일 라스베가스에서, 미국 현지에서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저녁에도 또 이 새벽에도 이 밤중에도 새벽 2시에 4시에 또 5시에 늦은 저녁 6시 10시에 이렇게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늦은 시간까지 또 이른 새벽부터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고 함께 살피는 이 말씀의 교훈이 우리 삶을 의롭게 하고 또 눈을 밝게 해주는 그런 시간이 되었기를 소망에 맞지 않습니다.
다들 건강하시죠. 기도하고 마쳐도 되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 광야로 출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지막 장면들을 출발 직전의 장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교훈대로 정말 주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우리의 길을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우리가 머무는 곳에는 오셔서 우리 중에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해 주시고 우리에게 돌아와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구름처럼 이렇게 내딛는 발걸음 걸어가야 하는 인생길에 우리의 길을 밝혀주셔서 주님의 임재 속에 주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함께해 주옵소서
주여 할 수만 있으면 우리에게도 우리를 선대하고 주의 백성들을 잘 대해주는 똑같은 사람들을 주셔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뭘 내리고 살아가야 할지 함께 친절을 베풀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또 우리도 또 그 은혜를 받은 대로 갚으며 살아가는 우리들 되게 해 주옵소서 말씀을 선명하게 주옵소서. 그래서 정말 분별한 분명한 소리를 나팔 소리를 내며 또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감동해 주옵소서. 다음 주 다시 만날 때까지 참여하는 모든 분들의 삶에 주님의 은혜가 함께해 주시기를 감사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