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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배 육성 회고록8
-신춘문예 당선하는 비법 있어요
시와 시조로 신춘문예 7관왕이란 대기록을 세운 이근배 시인은 지금 소설로 신춘문에에 당선되는 꿈을 꾸고 있다. 열여덟 살 때 세계적 베스트셀러 소설을 쓰겠다며 가출까지 했던 꿈을 아흔 살에 현실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쓴다. "쓰는 것이 스승, 쓰는 것이 천재"라는 좌우명에 따라, 쓰고 쓰고 또 쓴다
여든넷이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쓰는 열정은 60
년 전 문청 때와 다름없으니까
<노래여 노래여>로 문공부 특상을 받은 것으로 나의
투고 벽'도 일단 마무리 됐어요. 1964년에는 '주간예술'이라는 신문에서 편집 차장 일도 했고, 이런저런 일거리가 생겼지요. 나의 신춘문예는 1964년에 마감했는데, 후속편이 하나 있어요. <노래여 노래여>가
1964년 문공부 신인상에 뽑혔는데, 중앙일보가 1965년 9월에 창간돼서 신춘문예를 시작했어. 1966년 첫 당선작이 <밀림 이야기>인데, 작가가 조상기 시인이야. 나랑 대학 동기생, 문창과!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친구들이 난리가 났어요. 신춘문예 당선작은 대부분 보니까요. <밀림 이야기>가 이근배 시 <노래여 노래여>를 베꼈다는 거지요. 당시 심사위원이 이어령
선생과 서정주 시인 등이었고, 중앙일보 문학담당 기자가 한국일보에 있던 손기상 기자고, 문화부장은 한국일보 문화부장 출신의 예용해였어요.
이우종 시인 신춘문예 당선으로 벼락 출세
<밀림 이야기> 당선을 취소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지요. 안 그렇습니까? 이건 누가 봐도, 그냥 확실한 표절이니까. 그런데 중앙일보에서 이병철 회장이 무서운거예요. 중앙일보가 발칵 뒤집혔지요. 문화부도 난리가 났고. 중앙일보 문화부에서 나를 만나자는 거예요.
내가 힘도 없고, 또 미당 선생이 심사위원인데 어떡합니까. 그래서 난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는데, 친구들이 난리쳤지요. 그리고 '주간한국'에서 특집으로 다뤘어요. 김성우라는 분이 부장이었는데,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노래여 노래여>와 <밀림 이야기>를 양면에 대조해서 실었어요. 이게 왜 표절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다룬 거지. 김성우 부장은 통영 욕지도 출신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해서 나와는 학연 지연이 없는데다, 아주 까다로운 분인데 그 일을 계기로 가깝게 지내게 됐지요. 나는 학력도 변변찮지만 학력 콤플렉스가 없어요. 홍 기자는 어느 학교 다녔나요? (서울대학교요.) 서울대죠. 내 아들은 서울대 합격하고도 카이스트로 가서 2학년 때 장영실상을 탔어요. 그 아들 덕분에
내가 카이스트 초대 부이사장을 했지요. 그 아들의 아들, 그러니까 큰 손자는 서울대 공대 대학원에서 잘 하고 있어요. 외손자도 서울대학교 다니고 있지만..
그런데 이근배가 예술원 회원이 되자, 서울대 출신들
놀란 표정이었죠. 내가 마 가진 게 있습니까, 밑천이 있습니까. 그래서 무시하려고 해도 내가 저만치 가고 있으니까 무시하지 못한 거지요. 김성우 부장이
얼마나 완벽주의자냐 하면요, 작품이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두 번 다시 보려 하지 않아요. 틀려도 아예 사람대접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노래여 노래여>가
인연이 돼서 내가 1984년에 한국일보에 <한강>이라
는 작품을 연재하게 됐지요. 미당도 있고 박두진 구상 시인께서 계신데 왜 나에게 연재기회를 줍니까. <노래여
노래여> 하나 가지고 내가 이렇게 부자가 된 거지. <
노래여 노래여>는 중앙일보 신춘문예뿐만 아니라 여러 번 표절당했어요. 지방지 같은 데서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간 것도 있고.
문학이라는 게 시대의 어떤 패러다임을 담고 있지 않습니까. 신경림 시인이 내가 동화출판사 주간일 때 5년 동안 편집장을 했거든요. 그 신경림이 신춘문예 당선자가 나오면 "또 이근배구먼 .."이러곤 했지요. 그럴수밖에 없지. 신춘문예 하는 사람들은, 내가 당선한 작품들이 모법답안처럼 보였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흉내 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비슷해지는 거지. 조상기는 그 여파 때문인지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동덕여대 교수를 하다 몇 해 전에 돌아갔지요. 본인도 참힘들었을 거예요, 시단에서도 제대로 빛을 못 보고.
신춘문예와 관련해 에피소드가 또 있어요. 이런 분이
있었어요. 나랑 같은 해인 1961 동아일보에 당선한 분이 이우종 시조시인인데, 돌아가셨지요. 그분은
1925년 충남 아산 출신으로 나보다 열네 살이나 위로, 당시 안성에 있는 안법고등학교 국어 선생이었어요. 근데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시조가 당선된 거예요. 이세정 진명여고 이사장이 그 기사를 보고 이우종 시조시인에게 전보를 쳤어요. 진명여고 국어 선생으로 특채한 거지. 문정희 시인도 그 선생에게 배웠고.
신춘문예 당선으로 엄청나게 벼락출세한 셈으로 기적이 일어난 거지. 서른여섯에 신춘문예에 당선돼서 신분이 확 바뀌었지요.
왜 그 양반 얘기를 하느냐면, 자기 부인에게 그랬다고
그래요. 신춘문예 응모 한 달여를 앞두고, 앞으로 한달 동안 나한테 생활비다 뭐다 시끄러운 소리 일체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고 시조를 썼다고요. 그냥 머리 싸매고 시조에 올인하며 썼다는 거야. 또 다른 소설
가는 출판사를 다니다가 휴직계를 낸 뒤 소설 써서 당
선했지요.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로 당선된 사람 가운데 성학
원이라는 작가가 있었는데, 신춘문예 당선작품집을
만들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작품 안 주더라고요. 아마
그 소설이 당시에 정보부 같은 데서 무슨 문제로 걸렸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뒤에 작품도 쓰지 않더라고요. 작품을 청탁했는데도 안 주고그 뒤로 소설도 쓰더라고요. 좀 미스터리한 게 있었어요. 또 신춘문예 당선하고도 사라진 별들도 많았어요. 안타까운 일이예요.
확률로 보면 언론고시보다 휠씬 어려운 게 신춘문예
신춘문예를 준비하려면 많이 써야 돼요. 눈을 좀 크게
뜨고 넓게 보면서 쓰는 게 중요하지요. 왜냐하면, 우리 한국문학이라는 게 이렇게 좋은 것 같아도 역사가
길고 깊으니까요. 나무가 있으며 뿌리가 있고 둥치가
있고, 가지가 뻗어야 꽃이 피고 열매가 맺잖아요. 꽃
과 열매만 알고 뿌리와 둥치를 모른다면, 그거는 공부
가 안된 거죠. 그러니까 말하자면 뿌리 공부를 많이 해
서, 생각의 뿌리를 캐내야 합니다.
내가 서울예술대학에서 가르칠 때 보니까, 신춘문예
계절이 되면 경기도 마석 같은 곳에 10만원 주고 방
하나 얻어서 틀어박힌 채 작품을 쓰더라고요. 공사판
등에서 막일을 해서 번 돈으로 라면하고 소주를 잔뜩
사서 들어가는 거지요. 그렇게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술 마시면서 쓰는 거지. 신춘문예가 그렇게 쉽지 않은
거지요. 신문기자 되려면 언론고시에 합격해야 하는
것처럼 .. 신춘문예는 사실 확률로 보면 그보다 훨씬
더 어렵지. 예전에 있던 사법고시보다도 경쟁률이 더 셌지.
쓰는 스승, 쓰는 천재가 돼라
어쨌든 신춘문예에 당선하려면 많이 써야 해요. 예를
들어 문화센터 같은 데서 소설로 신춘문예를 준비한
다고 해보면, 가령 내가 홍찬선 선생한테 소설 써 가지
고 오라고 해서 제목과 도입부 문장 및 구성 등을 봐
주잖아요. 그렇게 한 번두 번, 일 년 내내 공부하면 혼
자 하는 것보다 휠씬 좋지 않겠어요? 어느 정도의 모
범답안이 나오는 거지. 물론 시인이나 소설가 같은 작
가가 되려면 근본적으로 자기 역량을 길러야지요. 그
러려면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야지. 많이 읽고
또 많이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쓰는 것이 스승
쓰는 것이 천재다'라고 봐요.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
은, 시대적 패러다임이랄까 경향을 잘 살펴야 합니다.
시와 소설도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신춘문예는 그냥 문학지 추천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요. 문학지 추천은 자기 기록만 가지면 되지만, 신춘문
예는 상대평가로 금메달을 따는 것이지요. 신춘문예
작품은 딱 하나가 내걸린다고 하는 거, 정말 환상적이
잖아요. 그렇게 당선되면 그게 어떤 이정표가 되기도하고, 텍스트가 되기도 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 신춘문예라는 것은 이렇게 탑이 있으면 그 탑 위에 돌 하나를 올리고, 또 나무가 있으면 새순이 돋듯이, 말하자면 한국문학은 신춘문예를 통해서 한 걸음씩 진보되어 왔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
지 않습니까. 작년에 당선한 사람과 올해 당선한 사람, 내년에 당선한 사람들이, 신춘문예의 걸음걸이로
서 한국문학과 한국의 현대문학이 발전해 온 거지요.
그러니까 '신춘문예열병'을 앓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
이에요. 다른 걸로 당선 뒤 신춘문예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나는 신춘문예를 그렇게 나쁘게만 평가할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렇잖아요. 내가 씨름꾼이라며 천하장사 살바 끼고한 번 가서 씨름판에 나가 봐야죠. 그렇죠. 내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사람보다 더 오래 빨리 쓸 수 있고, 그런 사람 100명도 쓰러뜨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지요.
내가 학생들에게 '신춘문예에 당선하는 비결을 알려주겠다"고 하면 귀가 쫑굿해서 듣지요. 그럼 내가 말 하지요. "신춘문예는 투고한 자만이 당선한다"고요. 그러면 "에이~"하면서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어요. 하지만 그게 진실이거든요.한 번 응모했다가 떨어지면,
뭐 그런 거니까, 다른 것도, 스포츠 같은 것도 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번에 내가 금메달 딸 줄 알았는데 못 땄잖아요. 그럼 뭐가 나한테 모자란 게 있을 거 아닙니까. 내가 공부를 모자라게 했기 때문에 당선되지 않을
거거든요. 내가 작년, 재작년 기록을 가지고 덤비면
그건 안 되죠.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은 그런 말을 안
해도, 우리 때는 "기성의 벽을 넘는다"는 말이 큰 덕담
이었어요. 기성, 이미 만들어져 있는 그런 기성의 어떤 틀을 벗어나서, 자기만의 어떤 것. 그러니까 지금
하고는 다른 것을 찾아서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한국 시는 서정시, 이런 것으로 오랫동안 전통적인 가락 등이 정착돼왔기 때문에, 신춘문예 시들은 어떤 시사적인 것, 뭔가 현실적인 것을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가령 조그맣게 짧고 굉장히 잘 농축된 완성된 작품보다는, 좀 볼륨이 있고 미래성이 있는 작품 말하자면 어떤 남의 아류 같은 것보다는 자기 자신에대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한국문학은 언어도 까다롭고 해서 레토릭, 문장력도 매우 중요하지요. 시든 소설이든 평론이든 뭐든 일단 레토릭이 기본입니다. 피카소가 이상한 그림을 그리더라도 데생 능력을 부정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한국어는 굉장히 까다로운데, 한국어는 어휘수도 많기 때문에 레토릭을 갈고 닦아야지요
위대한 시인은 그 자신을 씀으로 해서 그 시대를 쓴다
입담을 닦은 뒤에는 좋은 글감을 찾아 잘 조립해야지
요. T.S 엘리어트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요. "위대
한 시인은 그 자신을 씀으로 해서 그 시대를 쓴다"고요.위대한 시인은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시대정신 같은 것을, 그게 꼭 무슨 청지적인 거나, 어떤 이념적인
것이 아니고, 말하자면 좀 더 자기답고 창조적인 것,
남이 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나가야 차별성도 있고, 독창성도 발휘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어떤 새로움, 그러니까 과거 사람이 가지 않았던, 말하자면 돌 위에 돌 하나를 더 놓는 식으로 말이에요. 탑 위에,우리가 지나가다 보면 돌탑 위에 돌 하나 더 없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바로 이거예요. 난 여기다가 요거 하나를 더 없겠다, 이런 책임감과 독창성이 있어야
당선되는 겁니다.
제자 중에 장석남 시인이 있어요. 장석남 시인을 초청해서 학생들과 대담을 시켰어요. 그랬더니 학생들이
물었어요. 선생님은 얼마나 시를 쓰셨습니까? 난 장 시인이 술을 좋아해서 술만 먹고 그런 줄 알았더니, 이렇게 답하더라고요. "저는 매일 썼습니다. 제가 술 마시거나 먹지 않거나를 가리지 않고 매일 썼습니다."라고. 그러니까 내가 볼 때는 많이 쓰는 사람을 못 당하는 거야. 그냥 써서, 요즘 무슨 달인이니 뭐니 하는 것처럼, 스스로가 언어에 대한 기술자가 돼야 돼. 특히
시 같은 거는. 언어 특히 우리 한국어는 참으로 묘해서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잖아요. 그 언어를 많이 다뤄야 돼요.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그저 몇 편 써 가지고 어떻게 운 좋게 당선할 수 있었다. 뭐 그런 기적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많이 써야 되는 거예요
운이라는 것도 그래요. 운이라는 건 심사위원을 잘 만나는 일입니다. 옛날에는 시적 성향이 같은 심사위원을 만나면 내가 당선되는거고, 이런 걸 싫어하는 심사위원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나 그건 걱정할 게 없어요. 신문이 여러 개가 있지 않습니까. 신문이 모두 같을 수 없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내가 냈는데 내 작품을 좋아하는 심사위원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중에 하나가 날 좋아하면 되는 것이죠.
나는 지금도 신춘문예에 투고하려고 그래요. 소설을
한 번 투고해볼까 하고요. 내가 한 참 신춘문예 준비할 때 소설가 김승옥하고 친했어요. 승옥이는 시를 투고하는데 안 되고, 나는 소설 투고도 안 했고, 나는 한번도 소설 투고는 못 해봤어요. 못 해봤지만, 그때는 내가 열심히 일본의 아쿠다카와상 수상작이라든가 하는 작품을 읽었으니까 소설 구상이 되고, 또 그때는 월남전이 있고 해서, 어떤 소설가한테 내가 이런 걸로 신춘문예를 준비하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틀림없다고 하더군요. 내가 문장력이 좀 있고 그것을 뒷받침했으면 그냥 됐을 거예요. 그래서 기회가 되면 소설로 신춘문예에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더 늦기 전에 세계적 베스트셀러 소설을 쓰겠다는 문청 때의 꿈을 현실로 만들고 싶은데, 이왕에 쓸려면 신춘문에에 도전해보자, 그런 생각이지요. 한번 소설을 써서, 나도 공모를 해서, 가령 내가 90살 됐을 때 응모를 했는데 당선했다고 하면, '아흔 살 먹은 할아버지 신춘문예 소설 당선' 이런 제목으로 신문에 대서특필
할 거잖아, 괜찮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