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한 살 차이, 할아버지와 손자의 동행
(이 글은 2015년 9월 12일부터 20일까지 예순아홉 할아버지와 여덟 살 손자 태환 둘이서 여행한 기록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오래전에 계획한 여행 날짜가 다가오면 마음이 들뜨며 흥분되는 게 아니라 귀찮다는 생각이 들고, '내가 왜 이 여행을 하려고 했지' 후회가 되기도 한다. 낯선 땅, 사람, 문화, 동물, 환경, 자연을 만난다는 것은 분명 설레고 기대되는 일이지만, 그러기 위해 겪어야 할 과정이 그리 만만치 않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나이를 먹은 까닭일 수도 있겠다. 게다 이번은 여덟 살 손자와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이니 걱정이 앞서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작년 쿠칭을 갔던 첫 번째 여행은 아이를 잘 어르고 구슬리는 아내와 동행이라 신경 쓸 일이 적었지만, 이번에는 피치못할 사정으로 둘이만 갈 수밖에 없게 되어 아이를 돌보는 일은 오롯이 내 몫으로 남겨졌으니 그만큼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이틀 전쯤부터 여권, 안경, 돈 등 가장 중요한 것부터 가져갈 물건들을 생각나는 대로 내 방 빈 구석에 그냥 던져 놓는다. 그렇게 널브러진 물건들 위에 웹체크인을 해 프린팅한 탑승권이 놓이면, 이제 정말 가는구나(가는 수밖에 없구나) 실감이 들며 다시 기운이 솟기 시작한다.
시바약산 분화구(브라스따기)
코끼리 목욕 시키기 체험(탕카한)
야생 오랑우탄 만나기(부킷 라왕)
이번에 갈 곳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메단으로 들어가 브라스따기, 탕카한, 부킷 라왕을 거치는 여정이다. 지금도 유황 가스를 배출하고 있는 시바약산 등산, 코끼리 목욕 시키기와 트레킹, 정글에서 야생 오랑우탄 만나기와 튜브를 타고 즐기는 레프팅이 각 곳에서 예정한 일정이다. 이어진 동선이 아니라 세 지점이 부채살 모양 각 끝과 가운데 놓인 모양이라 메단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 게다 인도네시아는 열악한 인프라 때문에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걸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다. 부킷 라왕과 브라스따기는 혼자 한번 다녀간 곳이라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다. 2년 전이나 달라진 것은 거의 없으리라.
떠나는 날 아침, 9시 20분 비행기라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남는 세 식구가 함께 집을 나선다. 마침 토요일이라 공항까지 데려다 주겠단다. 단언컨데 나 때문은 아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지만 공항까지 배웅이나 마중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손자 덕에 호강을 한다. 사실 인천공항까지 오간다는 것은 시간과 비용 면에서 모두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어린아이가 부모 배웅을 받으면서 혼자 출국을 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 중 하나일 터이니 굳이 말릴 것도 없다. 그러나 태환은 성의 없는 기념 사진을 남기고 손 한번 흔들고는 쿨하게 검색대로 들어간다. 핫 시즌이 지나서일까, 공항은 대체로 한가하다.
엄마, 아빠만 진지하다(인천공항)
천진무구해 보이는 저 얼굴 뒤에 숨은 것은 과연 천사일까?(인천공항)
검색대를 통과해(걸릴 것이 없다는 것에 극히 만족하며) 출국 심사를 받는 태환은 작년에 비해 훨씬 여유로워 보인다. 탑승구 번호를 알려주자 스스로 가는 방향을 잡는다. 그래도 역시 긴장을 하고 있다. 기내식을 주문하지 않았기에 아침을 먹자니 선뜻 응하지 않는다. 밥 먹다 비행기를 타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시간이 넉넉하다며 안심을 시키고 스넥 종류를 시켰지만 제대로 먹지 못한다. 어른들도 경험이 적은 분들은 긴장하게 되는 곳이 공항이다보니 태환 조바심이 터무니 없지는 않다. 어쨌든 덕분에 남긴 오렌지쥬스는 내몫이 된다. 그래도 화장실 출입이 작년처럼 잦지 않다. 작년에는 거의 삼십 분마다 들락거렸지만 이번에는 쿠왈라룸푸르까지 가는 여섯 시간 동안 한 번도 화장실을 가지 않는다.
환승 시간을 기다리며 먹는 컵라면(쿠왈라룸푸르 공항)
노트북에 담아 간 만화영화, 약간의 잠, 지난 번 여행 때 쓰고 남아 있던 링깃(말레이시아 화폐)으로 산 기내에서 먹는 컵라면, 그리고 거의 오 분마다, 얼마 남았어, 물어보는 태환 끈질김에 지친 할아버지와 싱강이 약간 끝에 여섯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쿠왈라룸푸르 공항에 도착한다. 다행히 환승 대기시간은 길지 않고 메단까지 비행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태환에게 통과여객이 따라가야 할 길과 전광판에서 우리가 타야 할 비행기 게이트 번호를 찾는 방법을 다정하게 알려준다. 탑승구 대기실 바로 앞 잡화점에서 컵라면도 사준다. 이만하면 아주 몹쓸 할아버지는 아니다. 몹쓸 할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좀더 끈기와 참을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직 깨닫기 전이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쿠왈라룸푸르 공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