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 고되지만 황홀한 기다림
신적 성품에서 절제는, 마치 흙덩어리가 화덕을 거치지 않으면 도자기가 될 수 없듯이, 인내라는 불가마를 통과하지 않으면 경건이라는 작품으로 나오지 못한다. 신적 성품의 성장을 위한 절제는 한두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내(휘포모네)란 문자적으로, 어떤 중압감 곧 짓누르는 무게의 압박 아래서 오래도록 머물려 견디는 것을 가리킨다. 마치 용광로를 거치면서 액체 상태로 흐물흐물해진 철 욕액이 주물틀에 부어져 식을 때까지 그 열을 견디면, 그 틀의 모양대로 되어 나오는 과정을 연상케 한다.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인내는 용맹함과 더불어 '남성다운'덕의 하나로 손꼽혔다. 유대적 전통에서도 적을 격퇴하는 일에 있어 용기 있고 끈기 있는 인내는 칭송할 만한 덕으로 여겨졌다.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 인내는 자주,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에 대한 소망을 견고히 붙들고 참는 신앙에 대한 묘사로 등장한다.
신앙에서 인내는 히브리서나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더욱 전면에 나와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주제이다. 사실 '인내'는 공동서신에 있어서, 시험과 더불어 가장 큰 주제 중에 하나이다. 공동서신이 야고보서를 서문으로 시작해서 유다서에서 결말이 난다고 볼 수 있다면, 공도서신 전체는 인내를 오전히 이루라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자신을 지키라로 끝나는 인내에 관한 책들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만큼 인내는 세상 속에서 세상과 맞딱뜨린 교회가 싸워야 하는 '믿음의 싸움'의 핵심인 영역인 셈인다. 만일, 우리의 신앙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는다'는 '이신칭의'기 중요하다면, 그와 대등한 중요성을 가진 주제가 '인내하라'일 것이다. 인내는 믿음의 삶에 있어서 칭의만큼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신앙은 처음만큼이나 그 '나중'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그 '나중'의 열매가 '처음'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나중이 처음을 결정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내 없이 우리의 믿음은 아무런 가치 있는 열매,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믿음이 있고 덕을 세우고자 하여 지식을 갖추고, 설사 사랑 안에서 그 지식을 절제 있게 활용한다 해도, 지속적으로 밀려오는 유혹과 시험 앞에서 인내하지 못한다면 그런 신앙은 참된 경건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 점이, 베드로후서가 거짓교사들의 처참한 광경을 묘사함으로써 경고하고자 하는 대목이다. 저들은 혹시 신앙고백이라도 하는 믿음으로 시작했을 모르나, 결국 인내하는 일에 실패한 것이다. 처음과 나중이 달랐고, 나중이 그들의 처음 곧 그들의 신앙의 정체가 무었이었는지를 드러냈을 뿐이다.
저들은 '굳세지 못한'(아포떼시스)영혼들을 유혹했는데, 이는 견고한 반석 또는 원래의 자리를 벗어난 모양을 가리킨다. 베드로후서의 문맥에서 볼 때 '굳세지 못하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시고 부르신 믿음의 자리, 성도의 영광스러운 자리, 보배롭고 큰 약속을 받은 그 복된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거짓 교사들은, 그들을 값 주고 사신 그들의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하는 종의 자리를 벗어난 순간부터, 자신도 '성도의 자리'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보배로운 약속을 받은 성도들을 꾀어 함께 멸망의 구덩이로 끌고 가려는 악행을 저지른다. 결국 그들은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는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다시 그 더럽고 썩어지고 허무한 세속에 얾매여 '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심하게' 되는 비참에서 뒹굴게 된다.
이 때문에 베드로는 서신의 시작에서부터 '너희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굳세게 하라'고 권면한다. 다른 길로 벗어나지 말고 부르신 그 자리에 흔들림이 없이 서서 인내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서신의 끝에서 다시 한 번,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경계하고 주의하라고 간곡히 당부한다. 이를 위해서 끊임없이, 말씀의 가르침을 '기억해야'하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감으로써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일에 '모두 부지런함으로 힘써야'한다.
(1:5~11;3:14,18)
-어느 신앙서적에서 하루를 마감하며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