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세례 (마르코복음 1,9-11)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 외 3인

오래된 성당의 창문이나 제단화를 보면 왜 윗부분은 둥글고 아랫부분은 네모날까요?
둥근 것은 하늘이고 네모난 것은 땅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6-1492)가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는 반원형과 사각형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반원의 중심에는 비둘기가 있고,
사각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배꼽이 있습니다.
그림에는 네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예수님 쪽에 있는 나무에는 잎이 무성하고,
세례자 요한 쪽에 있는 나무에는 잎이 없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메마름과 신약의 풍성함을 나타내며,
예수님의 세례로 말미암아 구약은 점점 사라지고 신약이 가까이 왔음을 암시합니다.
구불구불 흐르는 강은 요르단 강이지만,
배경을 이루는 자연풍관은 화가의 고향 산세폴크로입니다.
이것으로 화가는 성경의 사건을 자기가 살고 있는 곳으로 옮겨놓고 있습니다.
또 요르단 강물을 들여다보면 물의 흐름이 끊어져 있고,
예수님께서는 마른 땅에 서 계시는데,
이것은 모세가 갈대 바다를 갈랐듯이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을 가르셨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모세로 우뚝 서 계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고 계시고,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이마에 물을 붓고 있으며,
한 남자도 세례를 받기 위해 옷을 벗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뒤에 정교회 성직자복장을 하고 있는 네 명의 사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통한 교회의 일치를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세 명의 천사가 세례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데,
왜 천사가 세례의 현장에 있을까요?
천사는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존재이고,
세례 또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또 성령과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줍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코 1,11)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1435-1488)는
그의 제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산드로 보티첼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렸습니다.
베로키오는 세례자 요한을 그렸고,
보티첼리는 오른쪽 천사를 그렸으며,
레오나르도는 그리스도와 왼쪽 천사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미술평론가인 바사리는
스승 베로키오가 레오나르도가 그린 천사를 보고 제자처럼 성스러운 얼굴을 그릴 수 없다고 자각했기 때문에
그만 붓을 꺾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물들의 시선이 너무나 재미있습니다.
보티첼리가 그린 오른쪽의 천사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왼쪽의 천사를 부러운 듯이 쳐다보고 있고,
왼쪽의 천사는 세례자 요한을 올려보고 있으며,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경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시선을 다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신기한 것은 이 그림을 그린 사람들의 운명이 이 그림의 내용과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었지만 레오나르도를 능가할 수 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을 능가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그릴까요?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45-1523)가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는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성부 하느님께서 세상을 축복하고 있으며,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예수님 위에 내려앉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머리에 물을 붓고 있고,
예수님은 합장한 채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 뒤로는 세 천사가 있고,
세례자 요한 뒤로는 세례를 받기 위해 한 남자가 옷을 벗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화가가 살던 시대의 사제와 귀족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세례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도 그리스도의 세례를 현재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장면입니다.
그리스도의 세례를 경계로 왼쪽배경에는 세례자 요한이 설교를 하고 있고,
오른쪽배경에는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고 계십니다.
구약에서는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예언자들이 설교를 했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설교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받은 모세처럼 산 위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요아킴 파티니르(Joachim Patinir, 1485-1524)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굽은 강과 높은 산이 어우러진 풍경을 세례의 배경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굽은 강과 높은 산은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만드는 것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울타리에 기댄 채 군중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고,
멀리서 다가오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자기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바위 위에서 무릎을 꿇고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 들어가시어 믿음의 색인 흰색 속옷만 걸치고 있고,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관객을 응시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도 세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것 아닐까요?
그러기에 세례를 받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드셨던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처럼 주님의 길이 되고,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종은 겸손해야하고 주님께서 중심을 이뤄야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