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연못과 라흐마니노프
정현수
하루 종일 촉촉한 봄비가 설렘을 주며 차분히 내리고 있다.
몰아치는 울부짖음도 없이 그저 조용히 창밖을 적시고 있다. 이 한 밤 애잔한 봄비는 들릴랑 말랑 소리 소문 없이 나를 낭만으로 포위해 버리고 이어 잔잔하고 그윽하게 내게로 다가온다. 대지의 가득한 조용한 적막이 신선한 공기로 밤비의 울림을 감싸듯 다독이는 것 같다. 마치 우수로 가득 찬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이제 막 설렘이 스며든 얼굴로 내 가슴에 안기는 것 같다.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땐 모든 아쉬움이 은연중 몸속에 배어 있는 몹쓸 습관처럼 지난날을 추억하게 한다. 그냥 지나치면 좋으련만 누군가를 기억하게 하거나 아니면 연민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양심에 찔리는 어떤 일에 속내를 드러나게 해 그 일에 대한 미안함이나 후회가 돼 압박해 온다. 진부한 히스테리일 수도 있다. 이것이 저것에 원인이 돼 듯 후회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결국 하나하나 파헤쳐 저 내 맘을 저미게 한다. 그것은 어떤 추억 안에서 내 생각을 움츠리게 하거나 괴롭힌다.
자정이 넘어버린 이제는 토요일, 비가 내리는 이 한밤에 불현듯 영화 한 편이 보고 싶다. 훈훈하면서 로맨틱한 영화이면 더더욱 좋을 것 같다. 어느 영화 사이트를 열어보니 오래전에 서너 번 보았던 '황금 연못'이 눈에 띈다.
"헨리 폰다"의 지적인 마스크에 깐깐하지만 연륜에 더해진 재치와 유머, 그리고 아직도 아름다움과 상큼함, 여유와 사랑이 물씬한 "캐서린 헵번"의 주연인 이 영화는 이 밤에 나를 애잔하게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피아노 협주곡이 은은하게 흐르는 첫 장면에 이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여러 장면들이 가족들 간의 인간애가 충분히 그려지고 서로를 보듬고 치유해 가는 사랑이 깃든 영화이다. 가족을 끝없이 사랑으로 이끄는 에델(캐서린 헵번)과 궁상맞거나 장난기가 많은 노먼(헨리 폰다)은 아내에게 무엇이던 양보하며 애정이 깊은 행동을 하거나 티격태격하는 평온한 사랑을, 미덥지 않은 딸 첼시(제인 폰다)와 불편하고 원망스러운 아버지와의 갈등, 그 둘의 관계는 요즈음 세태의 흐름을 일찍 예견하는 것 같아 씁쓸함을 더한다. 여기에 딸의 연인의 아들인 빌리까지 합세해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국 화해와 사랑으로 이끌어간다. 가족의 틀 속에 묶여진 그들의 자아를 찾아가는 내내 포근하고 아름다운 정서가 한껏 충만한 수작(秀作)이다.
서로의 불편과 오해를 다독임으로 연결해주는 에델의 깊은 이해와 끊임없는 사랑은 이 영화의 주 핵심이고, 늙어가는 자신을 돌아보며 많은 것을 놓쳐 버렸다는 후회감에 은근한 애정으로 하나둘 양보하며 변화하는 노먼의 큰 사랑은 이 영화 전체의 줄거리다. 마지막 에델의 절규가 큰 감동을 준다. 노먼이 심장병으로 쓰러졌을 때, 에델의 절규다.
"하느님, 이렇게 다 늙어 쓸모없는 인간을 데려가서 무엇에 쓰려합니까? 아직은 내 옆에 놔두시면 안 되나요."
하며 진지하고도 애정 어린 그녀의 호소는 이 영화의 백미가 아닌가 한다. 영화 속의 호수는 대단히 큰 호수였지만 그들 눈에게는 서로의 애틋 달콤함(황금)과 큰 사랑(연못)이 듬뿍 깃든 비교급의 황금 연못이 아닌가 싶다. 영화 속의 부녀는 실지로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와 딸인 부녀 간이다. 그러기에 리얼한 그들의 연기는 이 영화의 재미를 배가한다.
벌써 2시가 가까워진다.
영화의 선선한 여운에 쉬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영화 속 첫 장면에 작곡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피아노 협주곡 때문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클릭해 들어 본다. 낭만파 대가답게 따스하고 감미롭게 서정적으로 스며온다. 조용한 선율이 순화되는듯하면서 격정으로 치닫는 하모니는 마음을 쓸어내리는 여린 이의 하소연만큼 슬프기도 하고, 로맨티시스트의 화려하고 애상적인 조화인 듯 절묘하기도 하다. 리듬에 어울리는 선율이 규칙적이기도 하고 가끔 변화를 주는 환상에 빠지는 것 같고 갑자기 무엇인가 빈 듯한 공명은 전체의 스토리텔링의 한 부분 같다. 나는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한다.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 번은 자주 듣는 편이다. 좋은 스피커를 컴퓨터에 연결해 되도록 원음을 살려 듣는다. 하나하나 그 음에 눈을 감고 내 감정을 삽입하면 그 음악이 오롯이 내 마음에 들어와 또 다르게 진정한 의미로 울려 퍼진다. 잊고 있었던 지난날들이 내 머릿속에서 자유로이 솟구쳐 올라와 나를 찾는 몸부림으로, 때론 미지를 넘어서 아스라이 나를 이끌어 간다. 하나 둘 기억 속에서 빼내오듯 절규를, 또 어는 순간엔 내 영혼을 환상 속으로 스미게 한다. 조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분법적 상상에 빠지는 건 나만 느껴질까?
지금 내 삶이 평범하고 소박하기에, 이 밤에 어울리는 야상적이고 낭만스러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영화 황금 연못은 내 삶에 부합되고 연민과 감성을 불러일으키어 회한에 빠지게 한다. 그윽하고 까다롭지 않은 가슴 뭉클한 봄비 속에 한 편의 영화와 라흐마니노프는 옛날을 추억해 하고 애틋한 감성으로 이 한 밤에 꿈을 꾸듯 이데아의 세계에서 날아가고 있다.
2013. 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