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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득황(羅得璜) 연보
나득황(羅得璜, 1205년 고려 희종(熙宗) 원년 생~1268년 고려 원종(元宗) 9년 몰; 향년 64세)
고려 시대 후기 문신
고려 시대 후기 부자(父子) 상서, 고려 부자 2대 상서(정3품 판서; 부 나효전(羅孝全, 예부상서), 자 나득황(羅得璜, 형부상서))
고려 무신정권기 관료
탐라도(제주도) 혼란기 평정에 공헌한 인물
판예빈성사(정3품 예빈성 관직)•제주부사•추밀원부사(정3품, 추밀원 관직)•형부상서(정3품, 형부 최고위직, 판서) 역임
본관 금성(錦城) 금성(錦城) 나(羅) 씨
금성(錦城) 나 씨 9세손(시조 삼한공신 대광 나총례(羅聰禮)의 9세손)
초명 득거(得巨)
호 낙헌(樂軒)
증조부 고려 전기 문신 의종조 도첨의•벽상삼중대광도검의•나주호장 금성부원군 나국영(羅國英, 생몰 연도 미상, 고려 인종조~명종조 인물, 금성 나 씨 6세손; 고려 명종 당시 나라가 어지럽다는 사유로 나주호장을 자청해 낙향한 인물)
조부 고려 명종조 관검교대호군 나인겸(羅仁謙, 명종조 과거 급제, 금성 나 씨 7세손)
숙조부 고려 명종조 관지상장군 금성부원군 나수겸(羅守謙, 명종조 과거 급제, 조부 나인겸의 아우, 금성 나 씨 7세손)
부 한림원직학사•예부상서 나효전(羅孝全, 고려 강종조~고종조 인물)
금성 나 씨 8세손
초명 광취(光就)
고려 강종조 문과 급제, 황태중대부•지도성사•한림원직학사•예부상서 역임
고려의 부자(父子) 상서(부 예부상서 나효전, 자 형부상서 나득황)
형제
형 부정 나득신(羅得臣, 아들 순검사 나철준(羅哲準))
동생 본인 형부상서 낙헌(樂軒) 나득황(羅得璜)
처 나주 정(鄭) 씨
자녀 3남
1남 지밀직사사•장군•대장군 나유(羅裕, 1224년 고려 고종(高宗) 11년 생~1292년 6월 고려 충렬왕(忠烈王) 18년 몰; 향년 69세; 초명 철준(哲準))
2남 첨의정승•동경유수•부사 나윤(羅允, 1300년 고려 충렬왕조 인물, 초명 나인(羅認))
3남 나종(羅宗)
손자 손녀
첫째 아들 나유의 아들 상의평리•첨의참리 금성군 나익희(羅益禧, 1271년 고려 원종(元宗) 12년 생~1344년 고려 충혜왕(忠惠王) 복위 5년 몰; 향년 74세)
첫째 아들 나유의 여식 1녀 고려 왕실 외척 남양 홍 씨 홍융(洪戎)의 처
첫째 아들 나유의 여식 2녀 평양부원군 평양 조 씨 조위(趙瑋)의 처
첫째 아들 나유의 여식 3녀 함풍 이 씨 시조 이광봉(李光逢)의 처 통의군부인
둘째 아들 나윤의 아들 1남 밀직사 상장군∙도승지 나천부(羅天富)
증손
손자 첨의참리 금성군 나익희의 아들 판밀직사사 금성군 나영걸(羅英傑, 1290년 고려 충렬왕 16년 생~1360년 고려 공민왕 9년 몰; 향년 71세)
고손
증손 판밀직사사 금성군 나영걸의 아들 명경박사•서해도안렴사•진도현령 송와 나문규(羅文奎, 1312년 고려 충선왕(忠宣王) 복위 4년 생~1379년 우왕(禑王) 5년 몰; 향년 68세)
1205년 고려 희종(熙宗) 1년 1세 예부상서 나효전(羅孝全)의 둘째 아들로 출생
1215년 고려 고종(高宗) 2년 11세
1224년 고종 11년 20세 1남 지밀직사사•장군•대장군 나유(羅裕) 출생
1225년 고종 12년 21세
1235년 고종 22년 31세
1245년 고종 32년 41세
1251년 고종 38년 47세 예문과 급제
1252년 고종 39년 임자년 48세 8월 선지사용별감 파견(무신정권 최우(崔瑀, 출생 연도 미상~1249년 몰)가 여러 명의 별감을 각 도로 파견했으며, 각 도의 지역민들이 패정(悖政)에 대해 우려감을 표했다. 이 당시에 나득황 별감은 백성들의 재물을 갈취하는 주구(誅求)로 악명이 높았다.); 『고려사절요』 제17 고종조에 무신정권 제7대 집권자 최항이 나득황을 선지사용별감으로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1255년 고종 42년 51세
1257년경 고종 44년 53세 장흥부사, 전라안찰사(6개월 임시직) 역임(무신정권 최우의 아들 최항(崔沆)의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최항은 1257년 사망했다. 최항에게 아첨해서 관직을 얻었다는 설도 있다.)
1260년 고려 원종(元宗) 원년 56세 1월 제주부사 겸 방호사, 특치방어사 겸임; 장물죄로 파직된 고려의 탐관오리 송소(宋紹)에 이어 제주부사로 부임했고, 제주 백성들이 큰 도둑(大盜賊)을 만났다고 평했다고 한다; 2월 판예빈성사(정3품) 제주부사 겸 방호사 임명(제주 주변이 당시에 송 상인들과 왜구들이 출몰해서 혼란한 때라서 정3품 판예빈성사 나득황을 제주부사 겸 방호사로 임명했다는 후평); 제주 평정 공훈으로 황금자광록대부 사공상서 임명; 좌복야, 판호부사 역임; 중국 원나라 때 여몽 전쟁(麗蒙戰爭)으로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고려 조정이 피신하기 위해 정3품 판예빈상서 나득황을 제주부사로 파견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1263년 원종 4년 59세 12월 20일 추밀원부사 임명, 형부상서 승진
1265년 원종 6년 61세
1268년 원종 9년 서거, 배위 나주 정(鄭) 씨, 향년 64세
배향
전남 나주 용강사(龍岡祠, 금성 나 씨 사당, 나주 문평면 동원 1리 소재)
전남 나주 경모사(景慕祠, 금성 나 씨 사당, 나주 문평면 대도대장길 21-5 소재)
1269년 원종 10년 4월 형부상서 나득황의 맏아들 경선점녹사 나유(羅裕)가 고려 세자 심(諶)을 따라 중국 원나라로 파견되었으며, 7월 귀국 당시 임연(林衍)이 고려 원종을 폐위하고 세자가 귀국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자, 나유가 세자를 설득해서 고려 입국을 만류했다. 임연은 개인적 원한으로 나유의 장인 조문주(趙文柱, 출생 연도 미상~1269년 몰)를 살해하고 나유에게 이혼을 강요했으나 나유가 이혼을 거부했다.
1271년 형부상서 나득황의 손자이자 대장군 나유의 아들 나익희(나익희(羅益禧, 1271년 생~1344년 몰; 향년 74세) 출생; 나유가 전남 진도에서 삼별초 토벌
1272년 나유가 전라도 삼별초의 난 진압에 군사 1,550명 동원
1273년 원종 14년 4월 안동 김 씨 원수 김방경이 군사 1만 명과 전함 160척으로 탐라도(현 제주도)로 진군했고, 장군 나유 등이 삼별초를 공격해 격파시켰다. 이 공훈으로 나유는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탐라를 토벌할 당시에는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일본 정벌 당시에 나유는 응양군 대호군에 봉군되었다.
1274년 고려 충렬왕(忠烈王) 원년 1월 나유는 일본 정벌 중 부부사, 원나라 사신 파견, 10월 지병마사, 고려 귀국 후 응양군 대호군 임명; 나유는 충렬왕조 지신사, 부지밀직사사, 일등공신 명위장군을 역임했고, 지밀직사사 재임 중에 원나라 하정사로 파견되어 원나라 황제가 회원대장군에 임명하기도 했다.
1282년 충렬왕 8년 5월 나유 2등공신 임명
1286년 충렬왕 12년 6월 나유 부지밀직사사, 8월 나유 지신사, 12월 나유 동지밀직사사 역임
1287년 충렬왕 13년 6월 나유 중익부만호 역임
1288년 충렬왕 14년 5월 나유가 동지밀직사사로 군사를 거느리고 원나라에 원정하여 공훈으로 일등공신 명위장군 임명
1289년 충렬왕 15년 3월 나유 충청도도순문사 역임, 12월 나유가 동계방수군 사열
1290년 충렬왕 16년 5월 나유가 통천 진지 방어
1291년 충렬왕 17년 6월 나유 교주도 파견, 11월 나유 지밀직사사 역임; 나유가 원나라 정조사로 파견되어 원나라에서 회원 대장군 임명
1292년 충렬왕 18년 6월 정축일 나유가 원나라에서 귀국, 지밀직사사•대장군 나유 서거
1300년 충렬왕 복위 2년 경자년 나득황의 2남 첨의정승 나윤(羅允)이 동경유수(경주의 수장) 역임
1454년 조선 단종(端宗) 2년 나득황의 첫째 아들 대장군 나유가 뛰어난 군사적 공훈으로 『고려사』 「열전」 「나유 전」에 기록됨.
1818년 조선 순조(純祖) 18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실학서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고려 시대의 탐관오리 나득황(羅得璜), 송소(宋佋), 정기, 이저 등 4인과 조선 시대 나쁜 수령 박진한 1인 등 총 5인을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걸쳐서 대표적인 탐관오리로 거명
1987년 금성(錦城) 나(羅) 씨 사당 용강사(龍岡祠)를 건립하고, 나국영, 나득황, 나유, 나익희, 나영걸, 나삼 위패를 모셨다. 소재지는 나익희의 낙향 마을인 전남 나주시 문평면 동원 1리이다.
* 문무관을 겸비한 고려 최고의 가문: 문무관을 겸비한 고려 최고의 가문으로서 고려 혼란기와 국난기에 용맹(勇猛)을 떨친 인물들을 다수 배출했다.
* 금성 나 씨 사당 용강사(龍岡祠): 1987년 금성 나 씨 사당 용강사(龍岡祠)를 건립하고, 부자 상서 나효전과 나득황의 선조와 후손들(나국영, 나득황, 나유, 나익희, 나영걸, 나삼)의 위패를 모셨다. 소재지는 나익희의 낙향 마을인 전남 나주시 문평면 동원 1리이다. 용강사 앞에는 1934년 문평면장 학산 나종환이 말년을 보낸 정자 학산정(鶴山亭)이 1978년 중건되어 남아 있다. 위치는 나주 문평면 쌍심길 6(동원리 273-3) 쌍정마을이다.
* 맏아들 지밀직사사•장군•대장군 나유(羅裕): 나유(羅裕, 1224년 고려 고종(高宗) 11년 생~1292년 6월 고려 충렬왕(忠烈王) 18년 몰; 향년 69세)는 예부상서 나효전의 손자이며, 형부상서 나득황의 3형제 가운데 맏아들이다. 고려 시대 중기 무신으로서, 금성 나 씨 10세손이며, 안동(安東) 김(金) 씨 원수 김방경과 진도에서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부친 나득황의 봉직을 이었고, 장군과 대장군에 올랐다. 평소 예의가 밝았으며, 옥사(獄事) 판결에 능했고, 성격이 용맹해서 변방의 전쟁에서 수많은 공훈과 공적을 쌓았다. 관직을 경선점녹사로 시작해서 견룡행수, 장군, 대장군, 전라도부부사, 지병마사, 응양군대호군, 무덕장군관 고려군천호, 지신사, 부지밀직사사, 지밀직사사, 상장군, 명위장군, 충청도도순문사, 세자원빈, 하성절사, 정조사, 회원대장군 등을 역임했다. 자녀는 1남 5녀(족보 1남 2녀)를 두었고, 아들 상의평리•첨의참리 금성군 나익희(羅益禧, 1271년 고려 원종(元宗) 12년 생~1344년 고려 충혜왕(忠惠王) 복위 5년 몰; 향년 74세), 여식 1녀 고려 왕실 외척 남양 홍 씨 홍융(洪戎)의 처, 여식 2녀 평양부원군 평양 조 씨 조위(趙瑋)의 처, 여식 3녀 함풍 이 씨 시조 이광봉(李光逢)의 처 통의군부인 등이 있었다. 또한 나유는 1454년 조선 단종(端宗) 2년 뛰어난 군사적 공훈으로 『고려사』 「열전」 104권 「나유 전」에 기록되었다.
* 나득황의 손자•나유의 아들 상의평리•첨의참리 금성군 나익희(羅益禧): 나익희(羅益禧, 1271년 고려 원종(元宗) 12년 생~1344년 고려 충혜왕(忠惠王) 복위 5년 몰; 향년 74세)는 1288년 17세에 원나라에서 상천호로 임명되었고, 부친 나유의 관직 관군상만호를 승계했다. 여흥 민(閔) 씨 민지(閔漬)의 사위였으며, 1308년경 충렬왕 말년에 신호위 호군에 임명되었다. 1275년~1325년경 충선왕의 법률 제정에 여러 차례 반대해서 파직된 후, 10년 만에 복권되어 검교상호군에 임명되었고, 상의평리를 역임하고, 금성군에 봉군되었다. 계림윤을 지냈고, 57세에 자신의 아들(나익희의 아들•나득황의 증손 판밀직사사 금성군 나영걸(羅英傑, 1290년 고려 충렬왕 16년 생~1360년 고려 공민왕 9년 몰; 향년 71세)에게 관직을 승계하고, 그 후로 17년간 은거했다. 1344년 충목왕 원년 첨의참리로 복귀한 후 사직하고 며칠 후 서거했다. 향년 74세. 시호 양절(良節). 자녀 1남 1녀. 나득황의 증손•나익희의 아들 판밀직사사 금성군 나영걸(羅英傑), 나득황의 고손•나익희의 손자•나영걸의 아들 서해도안렴사•진도현령 송와 나문규(羅文奎, 1312년~1379년) 등이 있다. 나득황의 증손•나익희의 아들 판밀직사사 금성군 나영걸은 자녀 2남 2녀를 두었다. 나득황의 고손•나익희의 손자•나영걸의 아들 서해도안렴사•진도현령 송와 나문규는 자녀 6남 2녀를 두었다. 금성 나 씨 송와 나문규의 둘째 아들 나위(羅緯)는 분파하여 수성(壽城) 나 씨 1세로 본관했다.
* 나득황의 둘째 아들 첨의정승 나윤(羅允): 나득황의 둘째 아들 첨의정승 나윤(羅允)은 초명이 나인(羅認)이며 나유의 동생이고, 안동 김 씨 김방경의 자녀 3남 3녀의 맏아들 전법판서•상장군 김선(金愃)의 자녀 4남 2녀의 맏사위였다. 김방경의 손녀와 혼인한 맏사위였다. 나윤은 안동 김 씨와 혼인해서 1남 상장군∙도승지 나천부(羅天富)를 두었다. 나천부는 조부 나득황의 손자이다.
* 나득황의 가문: 나득황의 가문은 나득황이 금성 나 씨 9세손으로 형부상서를 지냈고, 부친 금성 나 씨 8세손 나효전이 예부상서를 해서 고려의 부자(父子) 상서가 되었다. 나득황의 자녀 3남은 금성 나 씨 10세손이며, 1남 나유가 대장군이 되었고, 2남 나윤이 첨의정승으로 안동 김 씨 김방경의 맏아들 김선의 맏사위가 되었다. 10세손 나윤과 안동 김 씨 사이에서 1남 도승지 나천부를 두었다. 나득황의 맏아들 나유는 무관으로 대장군이 되었고, 그의 후손들 나익희, 나영걸, 나문규 등이 무관을 이어 여몽 전쟁, 삼별초의 난, 탐라도 정벌, 일본 정벌 등에서 크나큰 공훈과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 나득황의 가문은 고려의 문무관을 겸비한 고려 최고의 가문이었다.
* 나득황에 대한 평가: 나득황 당대의 백성들은 예부상서 나효전의 아들 나득황을 백성들의 세금을 포탈하는 부담스런 관리로 받아들였으며, 백성들을 수탈해서 그 돈으로 제주부사가 되었다고 해서 소도적이 가고 “대도적”(大賊)이 왔다고 제주 백성들이 말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율기」(律己) 제2조 청심(淸心)에서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통틀어 역사상 탐관오리와 나쁜 관리 5인을 지적하면서 나득황을 대표적인 탐관오리처럼 거명했다고도 한다. 고려 때 예부상서 나효전의 아들 나득황이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박탈해서 부자 무신정권 최우의 아들 최항에게 아첨해서 제주부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지방 수령이 청렴치 못해 백성의 원성을 사면 수치라고 했다. 1260년 고려 원종 1년 나득황이 제주부사 부임 당시 “대적”(大賊)으로 불렸다는 『고려사』 「열전」 17 「제신(諸臣)」 「나유(羅裕) 전」 기록도 있다.
당시 고려는 최우와 최항 부자의 무신정권 집권기였으며, 중국 원나라와 여몽 전쟁 중이었고, 송나라와 왜구의 침입도 만만치 않았으므로 극심한 혼란기였고, 전란을 피해서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고려 조정이 피신을 가려고 한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러나 제주도 주변에서 송 상인들과 왜구들이 빈번하게 출몰해 제주를 혼란에 빠트리던 때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3품 판예빈성사 나득황을 제주부사 겸 방호사로 임명해 내려보낸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나득황은 제주에 부임해 바로 군사를 모으고 군수물자를 조달해서 제주 지역의 안정에 공헌했다. 또한 최 씨 무신정권 당시에 최우와 최항 부자와 친밀히 교유하며 고려의 안정화에 기여해 형부상서에 이르렀던 역사적으로 뛰어난 고려조 인물로 평가된다. 결론적으로, 형부상서 나득황은 위기의 고려 시대에 추밀원부사와 형부상서를 역임한 고려 조정의 고위 관리로서 최 씨 무신정권 집권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 금성(錦城) 나(羅) 씨 이야기: 신라 시대 당나라 태종조(626년~649년) 상서좌복사 나지강(羅至强)이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고 신라 경주(당시 금성(金城))에서 좌승상을 역임하고, 그의 아들 나경(羅璥)이 나주사찬으로 임명되어 나주로 세거해서 나주(금성(錦城) 또는 금산(錦山))를 본관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 시대 전기 삼한벽상 일등공신 나총례가 금성 나 씨 시조가 되었으며, 조선 영조 때 무신흉변으로 본관이 전라 금성으로 변경되었다. 금성 나 씨의 북한 지역 집성촌은 황해도 금천군 동화면 매남리와 매서리, 황해도 옹진군 용천면 용천리 등지이다. 현재 금성 나 씨 분파는 나주파, 강진파, 안정파, 군위파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남 금성(錦城)은 백제 시대 발라현(發羅縣)이었으며 죽군성(竹軍城)이라고도 했다. 백제 멸 후, 당나라에서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했었다. 686년 통일 신라 시대 신문왕 6년 통의군(通義郡)이었으며, 757년 경덕왕 16년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군(錦城君)이라고 했고, 무주(武州, 광주의 옛 지명) 관할이었다. 금산군 부속으로는 회진현(會津縣), 여황현(艅艎縣), 철야현(鐵冶縣)이 있었다. 940년 고려 시대 태조 23년 나주라고 했으며, 983년 고려 시대 성종 2년 나주목이 설치되었다. 995년 고려 시대 성종 14년 나주진이 되었다. 1018년 고려 시대 현종 9년 나주목으로 변경 후에 5속군(무안, 담양, 곡성, 낙안, 남평), 11속현(철야, 반남, 안노, 복룡, 원율, 여황, 창평, 장산, 회진, 진원, 화순)을 두었다. 1310년 고려 시대 충선왕 2년 나주지주사로 강등되었고, 1356년 고려 시대 공민왕 5년 나주목이 되었다. 고려 시대 후기까지 그리고 조선 시대 후기(조선 나주도호부)까지 금성 또는 나주는 전남 지역 행정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조선 시대 후기 고종 32년 나주부 나주군 관할이 되었고, 1981년 대한민국 시대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해서 금성시로 승격되었으며, 나주군과 금성시가 분리되었다. 1985년 금성시가 나주시로 개칭되었고,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개칭되었다.
* 금성 나 씨 시조 나총례: 역사상 삼한공신 나총례는 서기 947년 고려 시대 정종(定宗) 2년에 고려에서 관직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나총례의 초휘는 종례(宗禮)이며, 금성 나 씨 시조로서, 삼한 일등공신, 삼중대광보국 금성부원군을 역임했다. 고려 건국 연도가 왕건 즉위년 918년이므로 고려 시대 전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서기 857년경 통일 신라 시대 문창후 최치원의 장인이자 통일 신라의 정승이었던 나천업과 그의 부친 나인이 통일 신라의 부자(父子) 정승으로 존재했으며, 후손 나만갑의 활동을 기준으로 안정 나 씨의 선조로 간주한다. 그보다 더 멀리로 서기 626년경 신라 시대 당 태종조에 상서좌복사 나지강(羅至强)이 신라 경주(당시 금성(金城))에서 좌승상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나경(羅璥)이 나주사찬으로 임명되어 나주로 세거해서 나주(금성(錦城) 또는 금산(錦山))를 본관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전거는 나지강이 신라 경주에서 좌승상을 하던 때가 서기 600년경이며, 나인과 나천업이 통일 신라에서 부자 정승을 하던 때가 서기 800년대임을 알 수 있다.
금성 나 씨 시조 나총례의 활동 연대는 관직을 기준으로 고려 시대 전기 947년경이며, 나주(羅州) 나(羅) 씨 시조 나부(羅富)의 활동 연대는 북송 멸망 기준 고려 시대 중기 1127년경이고, 안정(安定) 나(羅) 씨 시조 나천서(羅天瑞)의 활동 연대는 관직 기준 고려 시대 후기 1370년경이며, 군위(軍威) 나(羅) 씨 시조 나문서(羅文瑞)의 활동 연대도 관직 기준 고려 시대 후기 1370년경이다.
고려 전기에 활동한 시조 나총례는 “소금장수”라는 설이 있어 당시에 해상왕이나 해상 무역왕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금성 나 씨를 “비단나가” 또는 “물찬나가”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사실로 라말여초에 귀중품에 속했던 소금과 비단을 다루던 해상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후대는 추정하기도 한다.
* 인물 “안정인”―나인, 나천업, 나천서: 『교남지』와 『비안향교지』 「인물 편」 등을 전거로 한 대표적인 안정인 또는 안정 출신자들은 통일 신라 시대 서기 800년대 정승 나인(羅認)과 나천업(羅千業) 통일 신라 부자(父子) 정승이 있다. 두 부자 모두 안정인이며, 나인이 부친이고 나천업은 나인의 아들인 부자 관계이다. 나인과 나천업은 최치원의 출생 연도 서기 857년을 기준으로 서기 800년대 통일 신라 시대 통일 신라에서 활동했던 인물들로 추정된다. 나천업은 안정백으로 봉작되었고 문창후 최치원의 장인이기도 하다. 나인의 묘역은 안정 해망산에 위치하며 해망산록 태룡(兌龍) 경좌갑향(庚坐甲向)으로서, 1630년경 후손 안동부사 구포 나만갑(羅萬甲)이 사초와 증축 가분(加墳)을 했다. 나천업의 묘역은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경북 의성군 단밀면 위중1리 저곡마을)에 소재했고, 나천업을 기리는 정자인 나정(羅亭)도 저곡마을 부근에 소재했으며, 나천업유허비는 경북 의성군 단밀면 용곡 1리 도리비마을에 소재했었으나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한다. 고려 시대 문하시중을 역임하고 안정백에 봉작된 나천서는 안정 나 씨 중시조가 되었다. 나천서는 안정인으로 묘역이 해망산(자하산) 남록에 소재한다. <끝> <나종혁 글>
* 참고 자료: 「나득황」, 『민족백과』, 『두산백과』; 「신라왕실 후예의 고려조, 조선전기 왕실과의 혼맥 소략」, 안동김씨대종회, <http://andongkimc.kr>; 나천수, 「안정나씨 측이 밝히는 『금성나씨위보』 사항의 고찰」, 구도의 길, <http://m.cafe.daum.net>; 「금성 나씨」, 성씨정보, <http://surname.info/na/>; 진영일, 「고려조 탐라파견 외관 고찰」, 『탐라문화』, 24호, 1~29; 정약용 지음•다산연구회 역주, 『역주 목민심서 1』, 창비신서 20, 창작과비평사; 「함풍이씨 시조의 배위는 나유(羅裕)의 여(女)이며, 통의군부인(通義郡夫人)이시다.」, 함풍(함평)이씨 뿌리찾는 사람들, <http://cafe.daum.net>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