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에세이 그녀를 생각하며
그 집 앞
손진숙
그녀가 이사를 왔다. 그녀는 아파트 102동 동쪽 끝 48평에 살고, 나는 113동 서쪽 끄트머리 33평에 산다. 나는 평소 산호목욕탕이나 북부시장, 육거리 쪽으로 갈 때 그녀가 사는 집 앞을 지난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는 자연히 눈길이 그 집 창문에 머문다. 창문이 열려 있으면 그녀가 집 안에 있겠거니, 눈에 보이는 듯 반갑다. 요즘 와서 그녀 정情을 각별하게 느낀다.
여고 시절 한 반이던 그녀는 샘이 좀 많은 편이 아니었나 싶다. 위층이나 아래층으로 오르내릴 때 계단 벽에 걸린 커다란 거울 앞에 서면 혼자 거울을 보는 게 아니라 나더러도 옆에 서라고 하고는 미소를 짓곤 했다.
시골집에서 무료하게 지낼 때였다. 항구도시 P시에 사는 그녀는 가끔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했다. 어느 해 추운 겨울이었다. 우리 집 자동펌프가 동파되어 물이 나오지 않아 며칠째 머리조차 감을 수 없었다. 그걸 안 친구가 자기 집에 와서 머리를 감으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연탄불 위에 찜통을 올려 물을 데워서 썼다. 그녀 집에서 하룻밤 자고 머리를 감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결혼한 후 나도 P시에서 살게 되었다. 그녀는 풍족한 집안에서 귀하게 자라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고 싶어 할 것 같은데 의외로 부지런하고 솜씨도 좋았다. 손이 많이 가 성가신 된장과 고추장을 직접 담가 마트에서 사 먹는 나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김장김치를 담거나 동지팥죽을 쑤어 추운 날 방한복과 방한모를 쓰고 가져다주기도 했다.
한 번은 내가 불러 우리 집 근처에서 굴국밥을 먹게 되었다. 먹던 도중 자리를 뜨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계산대 앞에 가 있었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이 낫다고 했던가. 그녀는 가까이 있는 이웃이나 친구 이상이었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었던 적도 있었다. 그녀가 삶은 국수를 맛보기도 하고, 내가 국수를 삶아 내놓기도 했다. 국수 가락처럼 길게 이어져온 우정의 세월이었다.
일전, 육거리 ‘중앙아트홀’에서 모처럼 예술영화 한 편을 관람했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며 북부시장에 들러 채 썬 다시마를 샀다. 물가가 올라 천 원어치는 주지 않을 것 같아 이천 원어치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인심이 후해서인지 엄청 많은 양을 주었다.
우리 아파트 가까이 다다랐다. 때마침 저녁밥 지을 무렵이었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너 집에 있니?
“응, 왜?”
“나 다시마 2,000원어치를 샀는데 많아서 너 반 주려고….”
“너 먹어래이.”
“아니야. 많아도 너무 많아. 곧 네 집 앞을 지날 텐데 잠시 나와.”
“그래, 알았어.”
빨래를 하다가 나왔다는데도 빈손이 아니었다. 가래떡이 든 봉지를 내게 건넸다.
나중에 카톡을 보냈다.
“너를 나오라고 귀찮게만 했구나! 월요일 우리 점심 같이 먹자. 아침에 전화할게.”
“별소리를 다한다. 다시마 맛나게 무쳐서 밥 한 그릇 반 뚝딱 잘 먹었데이~~니 정성이 고마웠데이~~♡”
주말과 휴일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을 맞았다. 그녀를 만나 점심 먹을 기대에 전화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고 했다면서 작은어머니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가 있었단다. 집에 와서 자고 또 가야 한다며 어제 정월대보름이라 만든 나물무침이 맛있는지 모르겠지만 가져다주겠다는 것이었다. 정 주려면 지금 목욕탕에 가는데 네 집 앞을 지나갈 거라고 했다.
조금 뒤 그 집 앞에 이르자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천 가방에는 오곡밥과 오색 나물이 담겨 있었다. 콩나물은 다듬을 시간이 없었다며 사서 포장된 대로이고 샛노란 천혜향 두 알도 있다. 과일은 뭐 하러 넣었냐니까 “동생이 사 와서 많다.”라며 어서 가라고 등을 토닥였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었다.
우리에게 앞날은 또 있다. 오늘도 시장 가는 길에 그 집 앞을 지난다. 내 눈동자는 지남철에 끌리듯 그녀가 사는 창문으로 향한다. 창문 틈 사이로 그녀의 정다움이 새어 나오는 듯하다.
창문 아래 화단에는 한 그루 홍매화가 봄을 재촉하며 피어 있다.
격월간 《그린에세이》 2024년 5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