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제1장 중관학파 수행론/대11
2.금강경의 수행론 (10)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초기경전의 무위의 진제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초기 경전을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열반의 상태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반은 사유의 영역도,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의 유위의 진제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초기 경전에서는 오직 고통의 원인이면서 열반에 장애가 되는 ‘번뇌’와 ‘번뇌의 소멸’만을 말한다. 번뇌와 선업은 유위의 진제이기에 인과가 성립되고, 그것은 언어의 영역이다. 그러나 열반의 상태인 무위의 진제는 언어의 영역도 아니고 인과를 말할 수도 없다.
♧대승 중관학파의 무위의 진제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중관학파 역시 진제인 열반과 해체를 다루는 학파이기에 무위의 진제만을 강조한다. 그래서 열반 이외의 모든 것, 유위의 진제마저도 모두 속제로 여긴다. 그러나 초기불교, 설일체유부, 유식학파, 경량부 등은 중생의 번뇌와 번뇌의 소멸을 다루기 때문에 유위의 진제를 다루어야만 하고, 이는 인과의 영역이다. 이 때문에 중관학파와 여파 학파의 인식론과 수행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다. 유위의 진제는 자체적 성질은 있으나 탐. 진의 인연 따라 변화는 것이고, 무위의 진제는 형태 이전의 것이다. 이로 인해 인과설에서 이 둘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이 둘이 유위의 진제와 무위의 진제라는 서로 다른 차원을 다루기 때문이다.
♧"무릇 32상과 오온은 허망하고 32상과 오온을 떠난[법신]형상을 떠났기에 허망하지 않나니 .[그렇다고]허망한 32상,오온과 형상을 여읜[법신을]떠나서[다시]여래를 말할 수 없느나라" 라는 인용문의 속 뜻을 설명해보세요
→『금강경』 5장에 여래께서 수보리에게 질문하신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32상과 오온을 칭하여 여래라 할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대답한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32상과 오온을 칭하여 여래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32상과 오온은 무상하기 때문이고 여래를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의 대답에 흡족해 하시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신다.
“무릇 32상과 오온은 허망하고, 32상과 오온을 떠난 [법신은] 형상을 떠났기에 허망하지 않나니, [그렇다고] 허망한 32상, 오온과 형상을 여윈 [법신을] 떠나서 [다시] 여래를 말할 수 없느니라.”
♧"오온이 흩어지면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
는 인용문을 사리불과 야마까의 대화를 인용해서 설명해 보세요
→초기 경전 중 이러한 이치를 자세히 설명한 『야마까경』이 있다. 야마까라는 비구는 여래의 사후 상태가 ‘단멸(斷滅)의 무(無)’라고 믿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벗들이여, 나는 ‘번뇌를 소멸시킨 수행승은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세존의 가르침을 이해합니다.”
사리불 존자가 이 말을 듣고 여래는 그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면서 야마까를 꾸짖었다. 그리고 야마까에게 무엇을 칭하여 여래라 하는지에 대해 순차적으로 질문했다. 먼저 몸이 여래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몸은 사후에 소멸하므로 몸 밖에 여래가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느낌. 생각. 의도. 의식의 안에 여래가 있는지, 밖에 여래가 있는지를 계속해서 순서대로 물었다. 더 나아가서 이들 오온의 합을 여래라고 할 수 있는지, 이들 오온을 떠나서 여래가 존재하는지를 물었다. 그 모든 질문에 야마까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사리불은 그러므로 여래는 어떠한 언어나 사념으로도 파악될 수 없고, 그러기에 여래의 사후를 단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결론지었다.
♧"오온은 무상한 것이고 ,무상한 것에 집착하면 괴로움이 따르며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소멸하여 사라지는 것이다 "라는 인용문의 속 뜻을 설명해 보세요
→야마까는 “오온이 흩어지면 다음 생을 받는 않는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여래의 사후 단멸’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래의 사후에 대해 어떤 표현도 할 수 없는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만일 여래의 사후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면 “오온은 무상한 것이고, 무상한 것에 집착하면 괴로움이 따르며,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소멸하여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주어를 오온으로 바꾸어 대답하면 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이다.
♧여래의 해탈된 법신의 상태는 유무를 초월하였다는 속 뜻을 설명해보세요
→오온은 형성된 유위법이고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래’라는 이름의 개념과 모든 형상이 해체된 법신의 상태는 유무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라는 이름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개념이기에 대상의 유무를 논할 수 없고, 여래의 해탈된 법신의 상태는 모든 조건[유위有爲]이 해체된 상태[無爲]이기에 더욱 유무를 논할 수 없다. 즉 무와 유무를 초월함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금강경 제10장 장엄정토분을 구마라습,현장,현진, 강미농의 금강경 강의 본 가운데 한 가지를 사경하세요
제10 장엄정토분 莊嚴淨土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옛날 연등불의 처소에 있으면서 얻은 바 법이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불의 처소에 계시면서 실로 얻은 바 법이 없습니다.”
“수보리여!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보살이 불토를 장엄한다고 하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런가 하면,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고 이 이름이 장엄일 뿐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색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며, 마땅히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며,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 수보리여!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과 같이 크다고 말한다면 그대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이 몸은 크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께서 몸이 아니고 이 이름이 큰 몸이라고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2> 왕래의 인因을 잡아 증득을 얻음이 없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옛날 연등불의 처소에 있으면서 얻은 바 법이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불의 처소에 계시면서 실로 얻은 바 법이 없습니다.”
이는 세존이 옛날에 보살도를 행할 당시 처음 제팔지八地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이것은 후에 정각을 이루고 바라보면 인지因地가 되며, 초발심인이 바라보면 과위가 된다. 세존은 지금 이 일을 이끌어 무상보리심을 발한 자를 위해 설하는 것이다. 고로 옛날의 인 한 과를 통해 아울러 과를 밝혀 판별하였다.
연등불의 일과 세존이 수기한 본사의 일은 『본행집경本行集經』과 『서응경瑞應經』을 보아야 한다(연등이 아직 출가하지 않았을 때 본명은 정광이다. 발이 있는 것은 정이 되고 발이 없는 것은 등이 되었다. 태어날 때 일체의 신변이 등과 같이 밝은 까닭이다.) 세존은 그때 칠지보살이 되었다(당시 이름은 유동 혹은 선혜라고 했다). 바로 수행하여 제2 아승기겁이 다 될 무렵에 부처님을 만나 법을 듣고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팔지에 올랐다(드디어 제3 아승기에 든 것이다).
연등이 수기해 이르기를 “이후 91겁의 이름이 현겹일 때 마땅히 부처를 지어 호를 석가모니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무생법은 진여실상을 가리킨다. 인忍은 통달하여 장애가 없고 물러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른바 이치와 지혜가 서로 명합함을 이른다. 인忍은 인정해 지닌다는 뜻이다.
대승의 무생법인을 증득함에 종종의 설이 있다. 『지론』에서는 지위에 올라(별교를 잡아 말했다.) 바로 얻는다고 했다. 『인왕』 등의 경에서는 칠지. 팔지. 구지에서 얻는다고 했다. 모름지기 원만히 초주 위에서 이미 나누어 증득했음을 알 수 있다.(이른바 일분의 무명을 파하면 일분의 법신을 증득하는 것이다). 팔지에 이르면 원만히 증득한 고로 무학이라고 칭한다. 바로 등각에 이르러 견성하는 것은 마치 눈을 비단으로 가리고 달을 보는 것과 같다. 오직 구경각이라야 구경을 증득할 수 있다.
어법의 ‘법’은 모든 소에서 다 수기의 말로 설하는데, 이는 적절하지 않다. 오직 우익만이 무생법인으로 설했는데 이것이 매우 옳은 것이다. [모든 소는 ‘미타송’에 빠져 있을 뿐이다. 송에 이르기를 ‘부처님은 연등 부처님의 말[語]에서 실다운 지혜를 취하지 못했다. 진실한 뜻은 설하고 취함이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게송 중의 어 자를 끌어와서 수기의 말로 지정해서 가리킨 것은 아니다. 세존은 옛날에 법을 들음으로 인해 무생을 증득한 고로 수기를 받았다. 즉 게송 중의 어 자는 연등이 설한 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게송의 뜻은 법어를 듣고 이체와 실지에 취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방편의 지혜와 다른 고로 실지라고 한다). 때문에 진실한 뜻을 이룬다. 이로 말미암아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세존을 이른다).
결코 연등 부처님이 설한 취착함이 없다(이 송의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앞서
‘실로 얻은 바가 없다’는 것과 같다). 종합하면 이지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이지와 서로 명합, 무생을 증득한다. 진실한 뜻은 무생을 가리키는 것이다. 무생법은 진여실상인 고로 뜻이라고 말했다.
혹은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들은 법을 가리켜 설하는데, 이 또한 옳다.
유소득이란 것은 얻은 바 있는 것이다. 얻은 바가 있다는 것은 곧 취착을 뜻하며 이는 상에 머무르는 것이다. 세존이 수보리에게 ‘얻은 바가 있는가?’라고 물은 것은 ‘그때 당시 법을 들을 때 능히 상에 머물렀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무생법인을 증득한 것으로 설하면 득 자의 의미가 명료해진다. ‘옛날에 무생법인을 얻을 때 심중에 하나라도 얻은 무생법이 있는가?’ 하고 물은 것이다. 여기에서 ‘염을 짓는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얻은 바가 있다면 그것이 곧 염을 짓는 것이므로 생략한 것이다.
세존이 비록 이를 찾아 물었으나 실은 이미 금침(비법)을 가만히 건네 주어 입을 열면 곧 여래라고 말했다. 성의 차원에서 말하면 법도 형상이 없는데 무엇을 좇아 얻음이 있겠는가?
세존 이하는 장로의 말임을 ‘세존’ 두 자에서 볼 수 있다. 송나라 후의 경본에는 세존 앞에 불야를 두었는데 크게 잘못된 것이다. 무릇 불야 다음 글은 다 활구이다. 다음 글을 관하면 결정의 뜻이 있는데 어찌 활구를 구하겠는가? 장로가 입을 열어 또 여래라 청했는데, 이는 묻는 말과 첨예하게 맞선다. 얻는 바가 없으면 번거로운 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장로가 어떻게 법에 실로 얻은 바가 없음을 알아 이 결정된 말을 하겠는가? 법을 듣고 상에 머무르면 마음 가운데 생멸이 쉬지 못하는데 어찌 곧바로 무생을 증득하겠는가? 고로 그때 설법을 들었으나 실로 얻은 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법을 들음으로 해석하였다. 만약 무생법을 증득함으로 해석하면 이미 무생의 법을 증득했는데
어찌 얻는 바가 있겠는가? 만약 하나의 무생법을 얻었다면 이는 곧 생멸심이다. 오히려 무생법을 증득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고로 비록 무생법을 얻으나 이에 법은 실로 얻은 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하생략
[ 개인 사유 토론 발표 ]
오온이 허망하다는 의미를 자신의 몸과 마음의 예를 들어 대승 중관의 입장에서 이야기 나누어 보세요
——-2568년 1월 16일 혜연 무구행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