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님과 같은 우리 = 한울
하늘님(하나님) = 객관적 외부적 별리적 존재
한울님 = 스스로 하나님을 자각하여 내면화된 하나님 = 강충한 일신 = 하늘 우리 = 큰 우리 = 대아
"무궁한 이 울 속의 무궁한 내 아닌가"
글 : 탁암
2022. 3. 16. 11:51
도올은 용담유사를 해설하며
흥비가 끝의 "무궁한 이 울 속의 무궁한 내 아닌가"를 다음과 같이 보충설명하고 있다.
[보충 설명]
마지막 구절, "무궁한 이울 속의 무궁한 내 아닌가"는 무한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수운사상의 핵심적 표현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이 구절은 천도교에서 수운이 말한 하느님을 "한울"로 개명하여 부르는 근거가 되었다.
야뢰 이돈화에 의하면 "한울" 은 "큰 울"이며 "대아大我"를 의미하며, 개체의 "소아小我"와 대비된다고 한다.
우리 고어에서 "울"은 역시 울타리(울 리), 다시 말해서 "가두리"의 뜻밖에는 없다.
그러나 울은 명백하게 공간적 한정성을 지닌다.
수운은 "무극대도"를 말했고, "하늘님"을 말했지, 하나의 울 즉 가두리를 말한 적이 없다.
하느님은 울 속에 한정될 수 없다.
"하느님"을 기독교적 표현이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우리는 태고적부터 하느님을 말했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느님조차도 수운이 말하는 하느님의 틀 속에서 재인식되어야 할 뿐이다.
하느님은 우리민족 고유의 하느님인 동시에 전 인류의 하느님일 뿐이다.
두 마지막 구문인 "무궁한 이울속의"라는 표현에서
‘이 울 속에’ 라는 식으로 이(this) 울(fence)을 분리시켜,
"이"라는 지시대명사와 "울"이라는 명사를 따로따로 해석하는 것이 매우 어색하다는 의견이 사계의 전문가들이 모인 나의 세미나에서 지적되었다.
수운이 「동경대전」 「용담유사」 전체를 통틀어 "울" 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울"은 시공간연속체(Space-time continuum)인 우주 전체를 표현하는 말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4차원적 세계를 구태여 "울"이라는 개념으로 갑자기 표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울"을 "이것" 이라는 지시대명사로써 지시한 것도 어색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울속의"는 조선시대의 매우 포풀라한 표현인 ‘이울다’의 변양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울다"는 "시들다"라 는 뜻이다.
「훈몽자회」에도 "枯"는 "이울고"로 되어있다.
우리나라의 고어사전에는 "이울다"의 용례가 많고, 현대국어사전에도 나와있다.
그러니까 "무궁한 이울속의"는 "무궁한 시들 속에"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천지대자연의 영고성쇠의 순환리듬을 지칭하는 것이다.
수운은 이 "이울"이라는 말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암시했으며,
동시에 무궁한 시들의 사이클 속에 무궁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말하려 했다는 것이다.
세미나에서 제기된 또하나의 견해는
본 노래에서 "이루다(成)"가 "이울다"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무궁한 이울속에"는 "무궁한 이룸"즉 성취, 지성무식의 삶의 노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단적 주장은 피하겠으나 한번 심각하게 고려해볼 만한 정당한 논의들이라고 생각한다.
****
도올의 이러한 생각은 다양한 생각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한울>을 잘못된 것이라고 강조하다 보니 나온 억지가 아닌가 여겨진다.
한울, 하늘, 하느 등에 대한 남연호 선생의 견해에 나는 찬성한다.
https://m.blog.naver.com/1926nh/222673346560
https://m.blog.naver.com/1926nh/222722850004
동학의 ‘천주天主’를 ‘하늘님’으로 표기하자는 주장에 대하여_남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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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성
ㆍ천도교에서 한울님이라고 신에 대한 명칭을 오랫동안 아무런 이의 없이 사용해 왔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다분히 주관적인 생각으로 종단의 용어에 대해서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해서 더 나아지는 것이 무엇인가? 오히려 혼란만 빚을 뿐이다. 그리고 한울님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자기가 부르는 신에 대한 용어에 자신이 없어지면 신을 부르는 일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면 신앙심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비록 도올이 학자적 관점에서 얘기하는 것이라고 할 지라도 이런 시도는 옳지 않다고 본다. 그가 스승으로 모시는 삼암장에게도 누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ㆍ 제가 청년시절, 한 40년전 일이다. 그 때도 김세권인가 하는 사람이 하날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책을 내고 교회를 시끄럽게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교회에서는 아마도 그 분에게 출교처분 정도의 중징계를 내린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도올의 행동은 김세권씨에 못지 않은 해교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천도교를 선전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성역을 침범하는 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다. 천도교 교세가 강했더라도 이런 행동을 했을까를 한번 생각해 본다. 아마도 그러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랬다간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친놈 소리를 들을 것이 뻔하니까.
ㆍ도올이 '무궁한 이 울'에서 시비를 거는 것은 울이 울타리라는 뜻이기 때문에 우주를 상징하기에는 부족한 표현이라는 것이 논점의 핵심인데... 일반적으로 우주를 표현할 때 타원형의 울타리로 표현하지 않나? 외부 경계선도 없이 우주를 표현하는 것은 아직도 본 적이 없다. 그 울타리가 무궁한 울타리라면 무한대의 크기를 의미하는 것인데 뭐가 문제가 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울이 아니라 무궁한 울이라면 우주를 표현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 도올의 주장은 설득력이 많이 부족하다.
박길수
ㆍ화암장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게다가 "학자적 관점"의 얘기 중에서도 이런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는 학술 영역(학술발표 - 동등(?)한 입장에서 반론의 기회가 보장되는)에서 풀어내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빅마우스를 보유한 분이, 그 이름으로 신앙하고 있는 사람이 다수인 한 종단의 신의 명칭에 대하여, 일방적인 주장-그것도 거친 표현과 어조로-을 계속하는 것은, 참 민망한 일입니다.
윤철현
첨부파일
윤철현 무궁한이울속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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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내 아닌가”에 대한 해석에 대해 철학을 연구할 때는 기본적으로 그 전체적인 사상이 무언지 알아야 하고, 용어에 대해서도 그 사상에서 쓰여진 뜻과 그 용어가 사용된 문단 전체 또는 문장 전체를 생각하면서 어떤 뜻 으로 쓰였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천도교 경전을 공부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유교 의 경전은 그렇게들 공부하면서 왜 천도교 경전은 그렇게 공부하지 않는지 아쉽다. 그리고 대신사편을 공부하면서 해월신사법설, 의암성사법설, 춘암상사편을 참고하면 서 공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함에도 어찌된 일인지 도올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하 지 않고 있는 듯하다. 이는 를 공부하면서 를 참고로 하는 것과 같은 이치 이다. 참고로 춘암상사「식고문」에는 ‘시천주’를 "모신 내 한울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경전에서 '무궁'이라는 단어는 「논학문」에 처음 나오는 단어이다.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 니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 너는 무궁 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 게 하리라.」 ~ 무릇 천지의 무궁한 수와 도의 무극한 이치가 다 이 글에 실려 있으니, 오 직 그대들은 공경히 이 글을 받으라.” 즉, 대신사께서 ‘무궁 무궁한 도’ 즉 무극대도에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무궁’이 라는 용어는 「교훈가」, 「안심가」, 「몽중노소문답가」, 「흥비가」 등에 반복적으로 나온다. 특히, 「흥비가」에는 “그말저말 다하자니 말도많고 글도많아 약간약간 기록하니 여차여차 우여차라 이글보고 저글보고 무궁한 그이치를 불연기연 살펴내어 부야흥야 비해보면 글도역시 무궁하고 말도 역시 무궁이라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아닌가” 이 인용문은 한 문단이다. 그러므로 이 문단의 전체적인 의미 파악도 중요할 것이다. 도올 은 ‘이울다’는 ‘시들다’라 는 뜻으로 보아 ‘무궁한 이울 속의’를 ‘무궁한 시들 속에’로 해석되 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천지 대자연의 영고성쇠의 순환 리듬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도올은 「흥비가」의 인용문에서 수운은 이 ’이울‘이라는 말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암시’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궁’이라는 말과 ‘시들다’라는 말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다음 해월신사법설「의암성사법설의 주요 내용들과 함께 ‘이 울’의 의미가 ‘우주’를 의미하는지, 도올처럼 ‘죽음’을 암시하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해월신사법설 「천지인·귀신·음양」 “천지는 한 기운 울타리니라. 기운은 혼원이요, 마음은 허령이니 조화가 무궁한 것이니라.” ※ 「논학문」 "지기는 허령창창 ~ 혼원지일기" 비교 가능
「영부주문」 “마음이란 것은 내게 있는 본연의 한울이니 천지만물이 본래 한마음이니라. 마음은 선천 후천 의 마음이 있고 기운도 또한 선천 후천의 기운이 있느니라. 천지의 마음은 신신영령하고 천지 의 기운은 호호창창하여 천지에 가득차고 우주에 뻗쳐 있느니라.” 「수심정기」 “심령으로 그 심령을 밝히면 현묘한 이치와 무궁한 조화를 가히 얻어 쓸 수 있으니, 쓰면 우주 사이에 차고 폐하면 한 쌀알 가운데도 감추어 지느니라.” 「천도와 유불선」 “우리 도는 무극에 근원하여 태극에 나타났으니 뿌리는 천상지하에 뻗었고, 이치는 혼원일기 에 잠기었고, 현묘한 조화는 천지일월과 더불어 한 몸으로 무궁하니라.” 「개벽운수」 “황하수가 천년에 한번 맑음에 성인이 다시 나는 것은 천도와 인도의 무궁한 운이니라.” 「강서」 “만물의 조화여, 무극하고 무궁하도다. 놀라워라, 이 세상에 우리 도의 되어 나감이여, 어두울 때도 있고 밝을 때도 있도다.” 의암성사법설 「무체법경」 “성품을 주체로 보고 닦는 사람은 성품의 권능으로써 비고 고요한 경지를 무궁히 하고 그 원 소를 확충하여 불생불멸을 도라 말하고” 「수수명실록」 “그러므로 생령의 앞에 공경히 정성드리는 사람은 사람으로 더불어 만물이 각각 시천주의 근 본이 있음을 파혹하고, 능히 천지 무궁변화의 적실한 것을 얻어서, 빠르게 만사지에 달하여 한울님을 받들고 한울님의 덕에 합하는 실상이라. ~ 「도는 바로 대선생님의 무극대도라」한 것 은 시․정․지 세 글자로써 천지무궁의 근본을 밝히어 덕을 천하에 펴고, 사람마다 덕에 합하고 도를 이루어 한평생 잊지 않게 한다는 것이니,” 「권도문」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여 변화가 무궁하고,” => 한울님이 사람에 의지한다는 것은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함. 「무하사」 일지매(一枝梅) 한가지가 편답강산(遍踏江山) 아니하고 일천지하(一天之下) 넓은천지(天地) 화 개소식(花開消息) 전(傳)했으니 오만년지(五萬年之) 무궁(無窮)이라 ~ 정상(庭上)을 살펴보니 대서특필(大書特筆) 붙인선판(宣板) 오만년지(五萬年之) 무궁(無窮)이라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_「흥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