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話頭)의 참구(參究)란 무엇인가?
화두(話頭)는 경험의 문을 열어주는 헷갈리는 열쇠다
看話禪(간화선)에서 화두에 진정한 의심을 일으켜 거기에 몰입해 가는 과정을 일러 ‘화두를 참구한다’고 일컫는다. 들어간다는 뜻의 참(參)자와 궁극에 이른다는 구(究)자가 결합된 말이다.
풀어보면 ‘끝까지 파고 들어간다’, ‘철저하게 살핀다’라는 의미다.
말하자면 화두는 의심해 들어가는데, 그것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분석하여 헤아려보는 것이 아니라, 그 화두속으로 사무치게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화두를 든다고 하는데, 여기서 든다는 의미는 마음속에 명확하게 들어오려 챙기는 것이다.
마음속에 들어가 끝까지 살펴라
내 자신이 본래 성불해 있다는 믿음으로
안타까운 마음 내어 철저히 '화두' 의심
화두를 잡념없이 잘 들기 위해서는 세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이것을 화두참구의 삼요(三要)라고 한다. 원나라때 고승 고봉원묘(1238~ 1295) 선사가 <선요>를 통해 제시한 삼요는 간화선 수행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삼요란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심(大疑心)을 말한다. 대신심이란 내 자신이 본래 성불해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내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큰 긍정이다. 근래 한국선에 큰 발자국을 남긴 성철스님도 자기속에는 모든 진리가 구비돼 있으며, 영원하다고 말한바 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속에 구비돼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 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는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성철스님의 법문 중-
간화선이 이처럼 나는 본래 부처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내가 본래 부처임을 확인시켜 주고 실제로 그것을 보게 해주는 선지식을 확고하게 믿고 따르는 믿음과 화두는 부처님과 역대조사께서 내 본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말임을 확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공부는 믿는만큼 진전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대분심은 크게 분한 마음을 말한다.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역대 선지식께서 자상하게 보여줬음에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중생놀음에 끝이 없는 나 자신에 대한 억울한 마음이며, 안타까운 마음이 바로 대분심이다. 우리 현실을 보자. 마음이 편하고 안락할 때는 비단결같은 마음이지만 그것도 잠시다.
어느새 욕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세상의 유혹에 노출되는 순간 그속으로 들어가 욕심내고 화내고 질투하며, 순간의 환락에 빠져든다.
‘내가 불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왜 이것을 꺼내 쓰지 못하는 것일까?’ 하면서 분한 마음이 올라와야 한다. 그 분한 마음으로 화두를 들어야 화두를 두 동강 내고자 하는 내면의 힘이 길러진다.
대의심이란 화두에 조그마한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의심을 말한다. 의심이 간절해야 어떠한 자국이 강력하게 들어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내면 깊숙이 화두가 끊어지지 않는다.
화두는 말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말이요, 생각이다.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어긋나며, 말하는 순간 집착이다.
화두앞에서 생각의 끈은 여지없이 끊어지고 만다.
수행자는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온 마음과 힘을 기울여 정면 승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화두에 대한 간절한 의심, 큰 의심이다. 이렇게 크게 의심 했을때, 결정적인 계기를 만나 화두를 타파하는 것이다.
화두를 드는데 이 세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만 빠져도 화두에 몰입할 수 없다.
내가 본래 부처님을 확고하게 믿고, 거기서 멀어져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억울한 마음과 화두에 대한 빈틈없는 의심이 있을 때 화두는 저 내면 밑바닥부터 사무치게 된다.
화두 話頭
화두의 사전적 의미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이되, 불교의 근본진리를 묻는 물음에 대한 선사들의 대답이거나, 혹은 제자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언어, 행동을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말은 선불교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삶에서 무언가 지속적인 관심이나 몰입의 대상이라는 의미로도 흔히 쓰이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화두가 갖는 신비의 베일이 완전히 벗겨진 것은 아니다.
'화두'는 여전히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어떤 신성하고 초월적인 수행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화두는 기본적으로 어떤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다. 그 물음이란 '불교의 근본진리', 혹은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대개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인가'하는 물음의 형태를 갖는다. 이것은 불교의 핵심적인 진리를 묻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어긋나서는 안되며, 불교를 수행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넘어야할 관문이다.
그래서 화두를 공안(公案)이라고도 한다. 공안이란 관청의 공문서를 말한다. 관청의 공문서는 철저히 이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화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형태가 "이것이 무엇인가(是什麽)?"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물론 불성이다. 즉 선불교에서 수행의 핵심은 불성을 보는 것, 즉 견성(見性)이기 때문이다. 이 화두의 일반적인 형식은 다음과 같다 :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한 물건'이란 불성을 가리킨다.)
본래부터 밝고 밝으며 신령하고 신령하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나
항상 작용하는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무엇인가?
불교의 근본진리, 즉 불성을 가리키는 언사는 원칙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선불교에서 전승해 온 화두의 예로는 수천 가지가 있다.
그것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면 하나는 일상적 사물을 그대로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논리적인 언사를 구사하는 것이다.
일상적 사물을 가리키는 예로 대표적인 것은 "뜰 앞의 잣나무"이다. 이 말은 곧 "불교의 근본 진리는 '뜰 앞의 잣나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잣나무는 불성이 구현되어 있는 현상이라는 식으로 따지고 분석하는 것은 화두 참구의 본령이 아니다.
도대체 불교의 근본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왜 "뜰 앞의 잣나무"라는 답이 돌아오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답은 답이면서 답이 아니다. 답이기 때문에 그 이치를 알아야 하는 것이고, 답이 아니기 때문에 큰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 의심을 푸는 것이 화두를 참구하는 선불교의 수행이다.
다음으로 비논리적인 예로는 "남산에 비구름이 있는데 북산에 비가 온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도대체 상식적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이다.
이로써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불성의 당체가 우리의 언어와 사유의 법칙에 반하며 그것을 초월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역시 묻는 이로 하여금 강한 의구심을 품게 한다.
만약 이 화두를 깊이 참구하는 중에 홀연히 그 의심이 풀려서 그렇게 말한 스승의 마음에 계합(契合)할 때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이치로 따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직 스승의 그 말 자체를 의심하는 것만이 요체가 된다.
선불교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가르침인 것은 이렇게 화두를 통해 스승의 마음을 전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