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정도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정견인 바르게 본다는 것은 세상에서 바르게 보는 것과 출세간에서 바르게 보는 두 가지가 있다.
둘의 차이는 전자는 내[유아]가 바르게 보는 것이요, 후자는 무아를 바르게 보려는 것과 무아로 바르게 보는 것.
무아를 바르게 보려는 것이 중도요, 무아로 바르게 보는 것은 중이라고도 하나 흔히 둘 다 중도라 한다.
석가모니 수행자가 최고의 명상 수행에 이르고 6년 고행을 했음에도 완전 열반이 이르지 못한 것은 무아를 모르고 유아에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무아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 고행림에서 벗어나..
보리수 아래에서 무아를 보는 수행으로 무아 깨침이 생겨..
무아인 깨침으로 세상을 관찰하니 일체 괴로움에서 벗어나 드디어
부처님이 되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어떠한가?.
자기처럼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나고자 출가 수행하는 자가 있지만, 괴로움의 근본인 유아 안에서 괴로움을 벗어나려는 게 아닌가.
그 뿐인가 출가 목적은 자기는 물론 일체중생을 편안케 하리라 하였는데.. 깨치고 보니 중생들이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무아를 깨쳐야만 하는 것인데, 무아를 깨치기가 하늘의 별따기일 뿐이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다.
무아를 깨치려는 자에게는 그에 마땅한 법을,
그러지 못하고 유아 안에서 행복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그에 마땅한 법을 설하니..
8정도를 두 가지 입장에서 설하게 된 이유다.
불교는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가 있다고 가르친다.
정법 시대는 무아를 이해하고 무아를 깨치려 수행하는 시대요,
상법 시대는 무아를 이해하고 수행하지만 무아에 이르는 자가 거의 없는 시대요,
말법 시대는 무아라고 배우지만 유아로 이해하는 시대로 12처라 말하지만 6근6경으로 알아듣는다.
말법 시대는 8정도를 무아의 가르침이라고 배워도 유아로 이해한다.
곧 출세간의 8정도는 말로만 있을 뿐, 현실에서는 사라진 게 된다.
불교 역사를 보면..
한 통의 줄기로 자라던 나무가 두 가지로 나뉘어 자르듯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뉘었고, 그 두가지는 각각 더 많은 가지로 나뉘었다고..
나뉘어진 이유는 계율에 대한 해석이 지역에 따라 달리 해석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예를 들면
어촌에서는 물고기를 잡아 먹는 일이 생업이다. 그런 곳에서 불살생이니 물고기를 잡으면 아니 된다고 하면 되겠는가.
종종 사막 길을 건너야만 하는 지역에서 출가자는 몸에 아무 것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며 소금 소지 금지를 지키라 하면 어찌 되겠는가.
승려는 머니를 소지하면 아니되므로 21세기에 차나 비행기를 타지 못하도록 하고 걸어가기만을 고집할 수 있느냐 말이다.
저와같은 계율 해석 문제로 인해 부파가 갈리진 것이라면..
계율이 사람보다 먼저 있다는 오류에 빠진 게 된다.
불교에서 계율은 사람이 있은 후에 사람이 만든 것이지.. 하늘에서 명령된 계율이 있어 그것을 지키는 게 불교의 계율이 아닌데..
어느 순간 계율이 선험적인 것처럼 둔갑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계율이 선험적으로 받아들이지고 있다는 것은 경직된 불교로 무아와 무상을 벗어난 불교가 된다.
따라서 부파가 나뉜 이유는 계율 해석 때문이라는 것은 빈곤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부파가 갈라진 근본 이유 역시 무아에 대한 현실적 해석이 달라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정정[正定]인가? 정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 사람과 세속의 정정으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성인과 출세간의 정정으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정정으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만일 마음이 머물되, 산란하지 않고 동요되지 않으며, 거두어 잡아, 고요히 그치고 삼매에 들어 한마음이 되면, 이것을 세상 사람과 세속의 바른 선정으로서, 번뇌가 있고 취함이 있으면서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정정으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거룩한 제자는 4성제를 바르게 관찰하여, 번뇌가 없는 생각과 서로 호응하며
마음이 머물되, 산란하지 않고 동요되지 않으며, 거두어 잡아, 고요히 그치고 삼매에 들어 한마음이 되면, 이것을 성인과 출세간의 정정으로서,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어, 바로 괴로움을 없애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잡아함. 588경>
<잡. 588경>에서 세간과 출세간의 차이를..
전자는 4성제를 닦는 출가 수행자가 있다고 알 뿐이라 하고, 후자는 4성제를 닦는 출가 수행자로 표현한다.
이때 4성제의 핵심은 두말할 필요없이 무아다.
무아르 모르거나 닦지 않으며 유아에 머물고 있으면, 그 유아로 말미암아 괴로움뿐인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고와 집 세계에서 돌고 돈다.
그러나 무아를 이해하고 고를 벗어나고자 하면 무아를 깨치려는 수행이 시작되는데 그것을 출세간 8정도로 정리했고, 수행 끝에 이르면 괴로움이 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이런 내용이 <초전법륜경>에 모두 나와 있지만
<잡아함경>이란 두터운 경으로 수집정리된 것만 보아도 무아를 행한 수행이 쉽지 않음을 눈치챌 수 있으리라.
어째서 쉽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듯 말하는 것일까..
4성제가 무아의 가르침임을 분명히 이해하려면..
12처는 6근6경 존재가 아닌 마음에서 생긴 심연생임을 분명히 이해해야만 하는데..
우리는 입으론.. 생각으로.. 말로는 12처는 심연생이라 하지만..
12처는 존재인 6근6경임을 의심하지 않기에 깊이 수행을 해도 고와 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곧 대승불교에서는 12처를 아예 6근6경으로 설명하기에 무아를 공이란 애매모호한 말로 가르치고,
부처님 정법을 계승하고 있다고 큰소리치는 남방불교를 보면 심연생인 12처를 존재인 6근6경으로 가르치면서도 수치를 모른다.
8정도 설명은 정견에서 시작해 정정으로 끝이 난다.
하여 정정에 이르면 수행이 끝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물론 그럴 수 있지만.. 그거 아니다.
8정도 수행 역시 12연기법처럼..
정정을 통해 무아임에 한걸음 다가갔으면..
그 힘으로 다시 새롭게 바르게 보는 정견을 하여, 정사유, 정어,.. 정정에 이르고..
그러면 다시 또 그 힘으로 정견을 하는..
잠깐, 평소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수행법으로 사마타[지]와 비파사나[관]를 가르치셨다.
잡념과 망상을 포함한 일상적인 생각을 멈추고 집중하는 마음[지, 사마타].. 그 힘으로 5온을 관찰[관]하는 비파사나를 가르치신 것이다.
그런데 8정도를 보면 비파사나 수행인 정념이 있고, 이어서 사마타인 정정이 나온다.
이때 정정(正定, sammā samādhi)은 사마티 가운데 최고의 사마타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
일반 사마타를 비파사나를 위한 마음 집중으로 본다면
정정인 사마타는 비파사나를 통해 무상과 무아로 관찰된 평온해진 마음으로.. 집중은 틀림없지만
정념에 들어가기 위한 사마타[지]와 정념에서 깨어난 후 드는 사마타[정정]는 차이가 보인다.
석가세존께서는 단박깨침을 가르치지 않는다.
끊임없는 반복 수행으로 점점 더 촘촘히 수행되니..결국 전혀 빈 틈이 없어질 때..
완전한 열반인 무아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그 말은 젊어서 출가하여 노인 수행자[장로]가 되어야만 무아를 깨친다는 게 아니다.
깨침은 수행 햇수가 아닌 용맹정진으로 정념을 통해 무아를 통찰하고 여여하게 있느냐로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