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모님 하면 맨 첫 번에 생각나는 것이 가난이다. 두 번째는 비록 가난했지만 자녀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형제자매가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었다. 가난은 극복되어야 할 유산이었으며, 부모님 세대가 살아 온 모습을 보며 나이 든 사람이 존경받고 여러 세대가 어울려 사는 모습은 우리가 계승해야 할 유산이다.
내가 어릴 때는 가난해서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고, 설사 때운다 하여도 쑥죽, 보리떡, 칡뿌리 또는 산나물로 해결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릴 때 수제비를 자주 먹어서 지금도 수제비를 싫어한다. 명절이나 제사 때가 되어서야 쌀밥과 고깃국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큰집에 가서. 어린 시절 강변에 누워 눈을 감으면 머리가 어지러우며 별이 번쩍 번쩍 하는 것을 느끼곤 했는데, 이는 영락없는 영양실조 상태였던 것이다.
시골에 살고 있었지만 농사를 지을 줄도 모르고 농토도 거의 없었던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머니가 재봉틀로 우리 7남매를 먹여 살리셨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쯤 되었을 때인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영주에서 조그만 국수 가게를 하려고 돈을 마련해서 가방에 넣고 집에서 30리 떨어진 영주 시내로 계약하러 나가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 뒤에서 말했다.
“여보시오. 당신 옷에 똥이 묻었네요.”
그 말에 아버지는 놀라서 옷을 벗고 똥을 닦아내느라 정신없었다. 그때 그 사람은 아버지의 돈 가방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가게 계약은 거기서 끝장이 났다.
또 영주 시내에서 하숙을 치고 있을 때였다. 우리 집의 장기 하숙생이 어느 날 짐을 챙겨 나가면서,
“아저씨, 오늘은 일이 있어 못 들어와요.”하면서 나갔다. 그런데 옷가지 몇 벌은 챙겨가지 않았기에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아버지는 “잘 다녀오소”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5개월 정도의 하숙비를 떼어먹은 채로....
지금도 가정에 무신경하셨던 아버지 대신에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 어린 시절은 가족의 생계 해결을 위해 뛰어 다니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히 남아 있다.
어머니는 2006년 돌아가실 때까지 형님이 모시고 살았는데, 나는 어머니를 뵈러 갈 때마다 용돈을 드렸다. 그런데 돌아가신 후 어머니 서랍을 열어 보니 많은 돈이 그냥 남아 있었다. 아까워서 한 푼도 쓰지 못하셨던 것이다. 아마도 나중에 자식들, 손자, 손녀에게 주려고 그랬을 것이다.
어릴 때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은 나 개인의 지상과제였을 뿐 아니라 국가의 지상과제이기도 했다. 그때는 소위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않는 양식이 겨울을 지나면서 쌀독이 이미 바닥을 들어내서 보리 나올 때까지 초근목피로 힘들게 견디어 온 세월을 말한 것이다.
나 개인의 가난 탈출기는 국가의 경제발전과 궤(軌)를 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삶은 정말로 어려웠다. 더구나 6.25를 겪으면서 우리네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1961년 5.16 군사 혁명으로 집권한 군사 정권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이 나라에서 가난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당시의 혁명 공약 제4조를 보면, “절망과 기아선상(飢餓線上)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라고 되어있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최빈국 중의 하나였다. 5.16 군사 정권은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 독일에서 광부와 간호사의 3년치 노동력과 노임을 담보로 1962년 10월 1억5천만 마르크의 상업차관을 도입하였다. 광부는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932명을 파견하였고, 간호사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226명을 파견하였다. 이들의 송금액은 한 때 GDP의 2%에 달할 정도의 규모였다. (1965-1975 송금액 1억 153만 달러) 1968년에는 베트남파병이 시작되어 1973년 철군 때까지 48,000명이 파병되어 참전 국군장병 해외 근무 수당 80% 이상에 달하는 1억 9,511만 달러를 송금하였다. 또한 1970년대는 건설근로자의 중동진출이 이뤄졌다. 이들이 벌어들이는 송금액이 대한민국 경제의 초석을 다듬었다.
1970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 야당의 결사적 반대를 무릅쓰고 1970년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 박대통령이 부총리 2명을 경질하면서까지 1973년 완공된 포항제철(현 포스코) 등 국민과 지도자가 일치단결하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노도처럼 달린 결과 5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가난에서 벗어나 쌀밥과 고깃국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다.
1961년부터 1990년간 우리나라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8%로서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었다. 이때는 소위 인권이 희생된 권위주의 시대로서 차별화에 의한 경제성장을 추구하던 시기였다. 평등주의 이념 하에서는 경제성장을 이루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새마을운동 등은 야당의 극렬한 반대 속에서 차별화의 철학 속에서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2023년 우리나라 1인당 GNI는 36,000 달러로서 5천만 명 이상 국가에서는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은 6위이며 일본(7위)을 앞섰다. 2차 대전 후 독립한 160여 국가 중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달성한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제 가난을 극복하여 부강해졌지만 우리가 소중히 여겨왔던 가치는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본다. 가족 내에서 나이 든 사람이 존경받고 여러 세대가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은 보기가 어렵다. 지금은 전반적으로 정이 없는 이기적인 사회가 돼버린 것 같다. 그토록 원했던 물질적 풍요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했는가? 그건 아닌 것 같다.
20세기 세계적 역사학자인 토인비는 “카르타고의 패배가 고대 로마 제국의 멸망의 시초”라고 주장하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카르타고의 멸망을 로마 번영의 시초”라고 생각하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토인비는 이때부터 로마는 천하의 부가 로마로 집중하자 풍요 속에 젖어 들면서 긴장과 절제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그들 특유의 상무적인 기질과 근면성이 사라지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물질적 풍요 속에서 긴장과 절제를 잃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가는 현상을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부모님을 포함한 기성세대가 가난극복을 위해 온몸을 바쳐 뛴 결과 오늘날 물질적 풍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난 시대의 긴장과 절제가 사라지고 사치와 향락에 빠진 로마 시대를 떠 올리게 된다.
행복은 물질의 풍요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가난했던 옛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부모님 모시고 이웃과 소통하며 살았던 그때를 회상하며 공동체 의식을 살리는 건 緣木求魚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