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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천하제일비무대회.
“드디어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도대체 맹주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황의인(黃衣人)의 말에 적의인(赤衣人)이 덩달아 말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놀랍고도 당황스런 표정이었는데 그들에 비해 언제나처럼 구석에 앉은 노인의 표정은 담담했다.
“맹주가 무림대회를 태호에서 열겠다고 정식으로 공표하고 태호쪽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마교쪽에서는 어떻게 나오겠소?”
“이미 참석의사를 밝힌 것으로 보입니다.”
적의인이 놀란 듯이 말했다.
“설마?”
“그들이 거절했다면…이렇게 강력하게 밀어붙일 순 없겠지요.”
“그렇지만 왜 그들이…?”
“맹주의 딸이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길이었음에도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이 일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황의인의 말에 적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척마회가 실패한 것은 실로 의외였소.”
“도대체 누가 그녀를 도와 준 것일까요?”
"척마회 뿐만 아니라 흑상 역시 실패했습니다. 흑상의 생존자들은 모두 입을 다문 채 그날의 일에 대해 철저히 함구(緘口)하고 있습니다."
“이기어도술!"
“이기어도술?”
“네, 그들에게서 유일하게 얻어낸 단서입니다. 아마도 이기어도술을 사용하는 자가 개입했던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돼는 소리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황의인의 말에 적의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허나 그건 사실입니다.”
“이기어도술을 사용할 수 있는 고수가 과연 강호에 몇이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들이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맹주의 뜻대로 무림대회가 개최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원로원과 구파일방이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아직도 정사가 함께하는 무림대회란 것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이들이 강호의 절반을 차지하고….”
-덜컥.
그때 문이 열리며 금포인이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눈을 감고 있던 노인마저 금포인의 말에 표정이 바뀌었다.
“늦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답답하다는 듯 황의인이 대답을 재촉했다.
“이제 그 누구도 무림대회를 막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금포인의 말에 모두의 표정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방금 맹주가 이번 정사마(正邪魔)가 함께하는 태호무림대회를 기념하는 뜻으로 하나의 큰 행사를 열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행사?”
“천하제일비무대회(天下第一比武大會)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천하제일….”
“비무대회….”
모두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 소식에 모든 강호인들의 시선이 그 비무대회로 집중되었습니다.”
“아아, 천하제일 비무대회라니?”
“이제 아무도 이번 무림대회를 막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림대회가 열리지 않는다면 비무대회도 없는 법.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가는 전 강호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이번 비무대회는 모든 강호인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휘어잡았습니다.”
“이럴 수가.”
황의인과 적의인이 동시에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러한 소식을 가져온 금포인은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잘 된 일입니다.”
그의 말에 적의인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의 맹주는 과연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그 말은 즉 평범한 방법으로 그를 몰아내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지요."
“그렇다면?"
“이번 무림대회를 맹주가 스스로 판 자신의 무덤이 되게 해주면 되지요."
“숨겨둔 비책이라도 있소?"
“본디 어떤 일이라도 그것을 풀 수 있는 비결은 간단한 곳에 있는 법이지요."
“간단한 곳이라면?"
금포인이 비대한 몸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 내며 말을 이었다.
“맹주가 비무대회를 개최하려는 이유는 단순하다고 봅니다. 역시 강호인들은 무인들의 집단. 정치적인 문제들을 떠나 비무대회라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지요. 게다가 천하십대고수가 정해진지도 벌써 십오 년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죽은 이들도 있고…또 당시 상황에서 마교인들은 제외된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천하제일인은 누구인가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지요."
그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 자신들조차 그 결과가 은근히 궁금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무림대회개최는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 무림대회에서…사고가 일어난다면?"
“사고라면?"
“만약에 말입니다…."
금포인의 말에 모두들 침을 꿀꺽 삼켰다.
“소림 장문인이 암살을 당할 수도 있고 당문의 제자가 독살당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일이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금포인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두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의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다가 만약, 만약 말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말씀해 보시오."
“…제 삼차 정사대전이라도 일어나게 된다면?"
그 말에 황의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삼차 정사대전!"
그러나 금포인은 그러한 적의인의 말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설마 당신은?"
“큰일을 하는데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지."
대답은 다른 곳에서 흘러 나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노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던 것이다.
“물론 전쟁이 그리 쉽게 일어나지는 않겠지. 허나 만약 맹주의 독주(獨走)를 막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 정사대전보다 더 좋지 못한 일이지.”
노인의 말에 모두들 머리를 조아렸다.
아마 노인은 맹주를 실각(失脚)시키기 위해서라면 정사대전조차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모두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이번 무림대회는 모두에게 악몽으로 기억될 거야.”
* * *
무림맹을 나서는 천룡단의 선발부대를 보며 맹주가 말했다.
“드디어 시작이네.”
맹주 옆에 정중하게 선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혁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맹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마교쪽에서 정말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겁니까?”
“왜, 아직도 믿기지 않는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마교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선입관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맹주의 말에 혁월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마교니까요'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맹주의 물음은 그 이전의 근원적인 부분을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맹주가 그런 혁월을 보며 말했다.
“그들 역시 강호의 평화를 바라고 있네. 다만 그 방식이 다를 뿐이지.”
‘과연 그것이 같은 평화일까요?’
혁월은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을 맹주에게 묻지는 않았다.
이윽고 선발부대가 모두 맹을 빠져나갔다.
청룡단을 이끌고 태호로 향한 것은 청룡단주 사군룡이었다.
그의 임무는 태호에 평화로운 무림대회를 위한 전략적인 거점을 마련함과 동시에 비무대회를 위한 비무대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무림대회가 열리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될 것이다.
강호의 가장 중요한 인물부터 뜨내기 삼류무사에 이르기까지. 무림맹 창설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행사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파일방에서도 제자들을 하산시키기 시작했다는 보고입니다.”
“그렇겠지.”
담담한 맹주의 표정을 보며 혁월은 도대체 맹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천하제일비무대회’라니?
단 여덟 자의 새로운 소식은 강호를 발칵 뒤집기에 충분했다. 처음 그 말을 듣는 순간 혁월조차 심장이 멈출 듯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이다.
새 맹주의 정사가 함께하는 무림대회라는 일차적인 소식이 사뭇 정치적인 소식이었다면 그 무림대회의 가장 큰 중심행사로 비무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은 모든 강호인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게다가 그 비무대회의 앞에는 천하제일 이라는 네 글자가 당당하게 붙어 있지 않는가? 강호에 발을 들인 이라면 그 말을 듣고 심장이 터져 버린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번 무림대회를 반대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소식에 자신의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강호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정사마(正邪魔) 최고의 고수를 뽑는 비무대회란 일생에 한 번 볼까 말까한 기연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오래전 옛날에는 정파 사파를 가리지 않는 비무대회가 간혹 열렸었다.
그러나 팔십년 전 일어난 일차 정사대전과 칠년 전의 이차 정사대전으로 인해 비무대회 자체가 열리지 않았다.
설령 열린다고 해도 각 지역문파가 주최하는 작은 규모의 비무대회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도 보통 큰 행사의 구색 맞추기 정도에 불과한 비무대회가 전부였기에 이 오랜만에 열리는 비무대회 소식은 모든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맹주는 이번 비무대회 개최를 통해 수많은 반대의 여론을 한순간에 잠재워버린 것이다.
“강호를 살아가는 이라면 이번 태호행이 평생에 다시 올까 말까한 일이 될 것입니다.”
혁월의 말에 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될 것이네. 심지어 나나 자네에게도.”
“언제 출발하실 작정이십니까?”
“곧 가야겠지?”
“원로원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혁월의 걱정스런 말에 맹주가 여유롭게 말했다.
“이제 이 일은 나의 손도 그들의 손도 모두 벗어났네. 이일은…."
맹주가 몸을 돌려 집무실을 향해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이일은 이제 모든 강호인의 일이 되었네."
그때 주작단주 사연랑이 다급한 얼굴로 달려왔다.
“긴급상황입니다."
주작단주의 그러한 표정은 쉽게 볼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또한 그러한 표정은 결코 무림맹에 도움이 될 일이 아니었기에 맹주와 혁월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권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맹주와 혁월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권왕께서?”
“네.”
“사인(死因)은?”
“아직 자세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같은 시기에 권왕이 죽었다? 이 일은 결코 우연이라 볼 수 없었다.
“권왕은 길가다 시비 따위가 붙었다고 죽을 사람이 아니지.”
맹주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씀은?”
맹주는 대답 대신 황급히 또 다른 사람을 찾았다.
“검왕 어르신의 소재를 파악하게.”
“이미 지시해 두었습니다.”
치밀한 사연랑이 전대맹주의 안위(安危)를 놓칠 리가 없었다.
“우리도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겠네.”
말을 마친 맹주가 집무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는 혁월의 귀로 사연랑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소호위로부터 우호위의 소재를 최대한 빨리 찾아달라는 부탁을 해왔습니다.’
‘소향이?’
‘…공적(公的)인 일이랍니다.’
맹주의 뒤를 따르는 혁월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우이를 사적으로 찾는 것은 단지 소향의 슬픈 개인사에 불과한 일이지만 만약 공적으로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큰 일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그가 필요해서는 안 돼.’
* * *
그 시각 연무장 한 옆에서는 무림대회의 열기를 쏟아지는 땀방울로 잊고 있는 젊은 청춘들이 있었다.
바로 현무단의 신입대원들이었다.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연무장을 내달리는 그들을 보며 고함을 지르며 독려(督勵)하는 이는 바로 이제 부상에서 거의 나은 철무였다.
제갈혜가 납치되었다는 소식과 그녀를 찾으러 소향과 담린 남궁소천이 태호로 갔다는 말에 그는 그날 바로 태호로 떠나려고 했었다.
그러나 마치 미친 소처럼 설쳐대는 그를 혁월이 진정시켰다.
“소호위를 믿어보세."
“절 보내 주십시오."
“안되네. 공사(公私)구분도 못하는 무분별한 정(情)은 도리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는 법."
혁월의 따끔한 말에 철무는 한 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철무는 그날 밤늦도록 술을 마셔댔다.
다음 날 아침, 채 술이 깨지도 않은 철무에게 귀환한 신입대원들이 찾아왔다.
“뭐냐?"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부탁?"
“저희들의 훈련을 맡아 주십시오."
그들의 눈빛을 보며 철무는 이 철부지 신입대원들이 전보다 한 단계 성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희들은 더욱 강해지고 싶습니다.”
“싫다."
“이유가 뭡니까?"
“너희들은 틀림없이 후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희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틀림없이 후회한다."
“아닙니다."
“죽을 각오가 되었나?"
“네. 그렇습니다."
“좋다.”
그렇게 훈련이 시작되었다.
죽을 각오까지 하고 나선 그들이었지만 의외로 철무가 시킨 것은 단 한가지였다.
무작정 모두를 달리게 한 것이었다. 그것도 심법이나 내공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그냥 기본 체력만으로 달리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훈련의 강도는 지난번 주점에서 난투극 이후 받은 벌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쏟아지는 한낮의 햇살아래 이미 두 시진 이상을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난 무식해서 어떤 훈련을 해야 강해지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다."
-헉헉!
대원들의 숨소리가 연무장 옆 건물 뒤쪽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무공의 기본은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에서 시작되는 법. 몸이 튼튼하지 못하면 천하의 둘도 없는 절기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또한 그 몸에 강인한 정신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역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철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연무장을 울렸다.
“그리고 그 체력과 정신력을 기르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이 길러질 때 까지 달리는 것이다."
처음 그들이 들어왔을 때 이러한 훈련을 강요받았다면 모두들 불만을 표하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 첫 임무에서 강호에서 호위무사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 일인지 뼈저리게 경험할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의 심정으로는 ‘똥통에 머리를 쳐 박고 있는 것이 내공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더라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강해지는 것만이 자신과 나아가 호위대상까지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것을 모두들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금 달리고 있는 너희 앞에 너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려 달려가는 살수가 있다고 생각해라."
가장 앞서 달리는 것은 심한진이었고 가장 뒤쳐진 사람은 하윤덕이었다.
“네 발걸음이 멈추면 네 사랑도 죽는다."
그러나 철무의 그러한 말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윤덕이 체력의 한계에 도달했다.
-덜썩.
바닥에 쓰러진 하윤덕이 마치 내던져진 나무토막처럼 꼼짝도 못한 채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일어나라!”
철무의 호령이 연무장을 흔들었다.
지나가던 다른 부서의 무인들이 철무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철무의 지독함은 이미 무림맹 내에 익히 소문이 난 바였고 모두들 신입대원들을 위로할 뿐이었다.
무시무시한 철무의 호통에도 하윤덕은 일어나지 못했다.
“네가 멈추면 모든 훈련은 이대로 끝이다.”
그 말에 하윤덕이 힘겹게 두 눈을 떴다. 자신 때문에 동료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윤덕은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의 의지력만큼 그의 몸은 강하지 못했다.
달리던 동기들이 모두 멈춰 섰다.
오령이 달려가 그를 업으려 했다.
"안돼. 혼자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
철무의 말에 오령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저희 동료입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안 된다.”
“왜 입니까?”
그 말에 철무가 잠시 오령의 눈을 뚫어지게 보았다. 오령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동료를 생각하는 순수한 눈빛이었다. 소심한 오령의 성격상 지금 엄청난 무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 오령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지만 철무가 냉정하게 말했다.
철무가 손을 쳐들어 그들이 달려가야 할 연무장의 빈 공간을 가르쳤다.
“네 동료는 여기서 죽어가지만…네가 지켜야 할 이는 저곳에서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철무의 비정한 말에 오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하지만 동료가 죽어 가는데….”
그때 심한진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하윤덕을 내려다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고작 이정도야?”
그의 싸늘한 말투에 오령이 놀라 말했다.
“자네 그게 무슨 소린가?"
오령의 말은 아랑곳 않고 심한진이 차갑게 말했다.
“겨우 이 정도로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멍청한 놈.”
심한진을 올려다보는 하윤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냉하연이 그런 심한진을 보며 말했다.
“한진, 너무해."
“닥쳐. 네까짓 게 뭔데 자꾸 참견이야?"
심한진이 신경질적으로 냉하연을 향해 소리쳤다.
그 말에 냉하연의 큰 눈에 눈물이 대롱대롱 맺혔다.
“…한진."
“평생가도 넌 날 따라잡을 수 없어."
그 소리에 하윤덕이 몸을 꿈틀거리며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고 애썼다.
그런 하윤덕을 보며 이번에는 오령이 소리쳤다.
“일어나. 일어나서 한 방 날려버려."
참으로 오령답지 않은 말이었다. 어쩌면 오령은 하윤덕의 그러한 모습에서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떠올렸는지도 몰랐다.
언제나 소외받고 언제나 지기만 하는. 모든 것을 빼앗기기만 하는 약자의 모습을.
철무는 그런 그들의 충돌을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모두 그만해!"
냉하연이 발악하듯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가 끝나기 전 하윤덕이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심한진에게 다가갔다.
심한진은 그런 하윤덕을 비웃으며 말했다.
“멍청한 놈. 할 수 있으면 뺏어봐."
오령은 심한진의 뺏어보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하윤덕은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바로 냉하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하윤덕이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날려 주먹을 휘둘렀지만 냉정하게도 심한진은 그의 주먹을 피했다.
하윤덕이 볼썽사나운 꼴로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냉하연이 하윤덕을 향해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그리고 심한진을 향해 소리쳤다.
“잔인해!"
“흥! 멍청한 것들끼리 잘 어울리는군."
심한진이 다시 홀로 달리기 시작했다.
“기다려!"
다시는 못 일어 날 것 같았던 하윤덕이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심한진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심한진은 기다리지 않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오령과 냉하연의 부축을 뿌리치며 하윤덕이 미친 듯이 심한진의 뒤를 쫒아갔다.
“날 욕해도 좋아. 하지만 그녀는….”
하윤덕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고 거의 본능적으로 두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거리는 점차 벌어졌지만 하윤덕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냉하연과 오령이 그런 그들의 뒤를 따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심한진이 연무장을 반 바퀴 돌아 철무 앞을 지나쳐 달릴 때 철무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심한진의 차가운 눈에 한 방울 눈물이 매달려 있는 것을. 순간 그 눈물은 땀방울에 섞여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좋은 청춘들이군."
철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 본 철무은 구름사이로 한 친구의 얼굴을 떠 올렸다.
춘삼(春三)이라는 너무나 촌스런 이름의 동기였다.
그는 겁 많고 느릿느릿 소심한 성격이었다.
매사 자신의 성격과 맞지 않아 숱하게 충돌했었다.
그의 그러한 성격을 어지간히 놀려대기도 했다. 그때의 철무는 그러한 모습이 모두에게 호탕하게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던 철부지 시절이었으니까. 그때는 고작…열여덟이었으니까.
그의 한 팔이 잘려나가던 그날.
그가 아니었다면 대신 목이 잘려나갔을 지도 모를 이가 바로 철무 자신이었다.
왜 구했냐고 욕설을 퍼부어댔었다. 네가 그러지 않았어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고 고함을 질렀었다. 춘삼은 그런 철무를 보며 그저 쓸쓸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혀.’
그때는 왜 그랬을까?
시간이 지나갈수록 지난 철없던 시절에 대한 후회와 함께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고향에 내려가 무슨 철물점을 운영한다고 했던가?
‘젠장, 팔 하나로 무슨 철물점이야.’
철무는 당장 내려가서 그 엉터리 철물점 주인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내려가면 술 한 잔 사주려나?’
그때 저 멀리서 매화조 정달이 한달음에 달려와 말했다.
“단주님의 긴급호출입니다.”
철무가 신입대원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오늘은 그만. 모두 해산.”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하윤덕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냉하연이 그러한 하윤덕을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본 심한진이 말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문득 오령은 그런 심한진의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들은 무림맹 일차 선발대가 태호로 떠나던 바로 그날 연무장의 한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동시에 그들 신입대원들이 태호를 향해 떠나기 바로 열흘전의 일이기도 했다.
막 오줌을 누고 천막 안으로 들어서려던 만수는 다리 위를 지나는 몇 명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독특한 행색을 한 여섯 명의 사내들.
태호의 하촌과 상촌을 이어주는 오랜 전통의 덕운교(德?橋) 아래의 이제 막 열 살이 되는 신참거지 만수는 그들이 다리를 건너는 것을 무심히 보고만 있었다.
그때 누군가 갑자기 만수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
“쉿. 조용해.”
바로 고참 거지 왕삼(王三)이었다.
만수는 지난 삼년간 물 한번 담가보지 않은 왕삼의 손에 입이 틀어 막힌 채 이리저리 버둥거렸다. 숨을 쉬지 못해서가 아니라 지독한 냄새 때문이었다.
“쿠에엑.”
만수의 버둥거림에 더욱 힘차게 입을 틀어막으며 왕삼이 은밀하게 말했다.
“조금만 참아.”
잠시 후 만수가 거의 혼절하기 직전 다행히도 그의 입을 막았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헉헉…왜?”
숨을 헐떡이며 만수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넌 방금 내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조금 전 지나간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
“누군데요?”
아직도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살피는 왕삼의 행동에 만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들은 바로….”
만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살수들이야.”
“헉! 살수요?”
“그래…단칼에 목표물의 목을 뎅강 잘라내는 살수들.”
왕삼이 손으로 날을 세워 만수의 목을 그으려하자 만수가 자신의 목을 부여 쥐며 놀라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 모습을 보며 왕삼이 더욱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릴 봤다면…목격자를 없애기 위해 처치해버렸을 거야. 살인멸구(殺人滅口)라고 들어봤지?”
“헉, 살인멸구.”
“그 뒷줄 중간에 서 있던 인상 좋은 놈 봤지?”
“네? 그 팔자걸음 걷던?”
“그래, 그 놈, 바로 그놈이 두목이야.”
“헉, 그건 또 어떻게 아세요?”
만수가 다시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놈 걸음걸이가 범상치 않았지. 놈의 팔자걸음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걸음. 게다가 그놈의 위치는 일행들의 정중앙. 가장 안전한 위치이자 빠른 명령전달이 가능한 위치, 바로 두목의 위치지.”
“오, 두목의 위치도 있나요?”
만수의 눈에 드디어 존경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왕삼 밑에 들어 온지 이제 겨우 닷새가 된 만수가 아닌가? 자고로 거지들도 왕초를 잘 만나야 거지팔자가 피는 법. 만수의 그러한 눈빛에 미소를 지으며 왕삼이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기왕 말을 꺼낸 김에 다 말해주지. 선두에 선 두 놈 봤지?”
“아, 네. 그 인상 더러운 놈들 말인가요?”
“그래, 그놈들. 그 놈들을 살수계(殺手系)에서는 뭐라 부르는지 아냐? 바로 바람잡이 살수라고 부르지.”
만수의 얼굴은 이제 감탄 그 자체였다.
“오! 바람잡이 살수?”
“상대를 만나면 일단 그들이 상대의 시선을 끌지. 놈들 인상 봤지? 상대의 시선이 놈들에게 집중될 때…그 뒤에 서있던 노인들 봤지?”
“네.”
“그 노인들이 슬그머니 다가가…팍 해치우는 거지.”
왕삼이 갑자기 고함을 빽 질렀고 그 소리에 놀란 만수가 뒤로 자빠졌다. 그 모습에 왕삼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노인이란 점을 이용해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는 것이지. 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고도 하지.”
“와…근데 두목님. 어떻게 이런 걸 아세요?”
두목이란 말에 왕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지난 며칠간 눈치만 살피던 녀석이 드디어 두목이라 부르며 자신을 왕초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끼를 문 물고기를 바라보는 흐뭇한 눈빛으로 왕삼이 구슬프게 입을 열었다.
“아, 내가 아직 말 안 해줬던가? 내 슬프고도 어두운 과거에 대해?”
만수의 도리질에 얼굴가득 묻어있던 호기심이 여기저기 마구 튀었다.
“살수들과의 십칠 대 일의 결투를…내 말 안 해줬단 말이지?”
왕삼의 말에 만수의 입에서 또다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우아! 십칠 대 일!”
“한 여인을 구하기 위한 칠주야(七晝夜)의 그 처절한 사투를….”
“오오!”
만수는 이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게 말이지…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나?…십년 전의 일이었지. 그때…참, 너 여기 오면서 혹시 나 몰래 짱 박아 둔거 없어? 그때 그녀를 만난 곳은 바로…이것뿐이야? 숨기면 안 돼. 그때 그 열일곱 살수 놈들도 나한테 거짓말하다 그렇게 된 거니까. 참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 그래, 그녀! 그녀를 만난 것도 다리 밑이었지…."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