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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 제일 부농
박용진
나와 집사람은 둘 다 대구시내가 고향이다.
지금은 둘이서 아무 연고도 없는 안면도 깊은 곳 고남면 장곡리에서 열심히 농사 짓는 공부를 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와서 농사 짓느냐고?
그거야 거주이전과 직업선택의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 헌법 덕 이지유 뭐.
우리부부는 딸 아들 하나씩을 낳았는데 취학직전에 서울로 이사를 갔다.
다니던 염색공장이 부도나고 새로 익힌 기술이 막 도입된 <스테인드글라스>라는 유리공예였는데
일감 때문에 서울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애들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애들은 경상도 사투리를 귀신같이 버리고 서울말을 입에 달았다.
나는 하도 신기해서 한동안 애들 입만 쳐다봤다.
아내도 열심히 노력하더니 어느새 사람들은 아내의 말에서 경상도 억양을 눈치 채지 못했다.
우리 집 식구는 그렇게 서울 사람 셋에 경상도 사람 하나가 되어 버렸다.
몇 번째인가, 또 방학이 왔다.
“아빠, 우리 짝꿍은 방학 때 외할머니네 시골 간데요,
염소도 많고 수박도 댓다 많데요,
우리는 그런 친척 없어요? 아빠?”
한참을 생각했다.
내가 서열 19번인 사촌형제들이 모두 38명인데 아무도 시골 살지 않는다.
있었어도 지금은 없고 애들 외가도 마찬가지다.
방학 때 마다 보채도 보낼 시골이 없는 애들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누구 시골 사는 분을 소개 받아서 자매결연 같은 걸 한번 해야겠다.
그러나 그건 생각 뿐,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 했다.
귀농 비슷한 걸 할 기회가 두 번 있었다.
처음 기회는 거래처에서 미수금대신
구파발 꽃집촌에 있는 시유지에 지어진 150평짜리 비닐하우스를 내놨다.
뼈대는 가느다란 다 썩은 각목이고 비닐도 많이 찢어졌고 높이도 낮았다.
그러나 150평, 정말 넓었다.
제조업 하는 이들은 누구나 넓은 공장을 소원하는데
30평 좁은 공장에 세 살던 나로서는 소원 푸는 일이었다.
파이프로 높고 튼튼하게 개축해서 한쪽엔 공방을 하고 꽃도 키워야겠다.
그 하우스 안에 방 두 칸짜리 지붕 없는 집까지 하나 있었다.
집사람더러 이거 동화 속 그림같이 고쳐 놓을 테니 들어와 살자고 했다.
나는 공방하고 당신은 좋아하는 꽃도 키우고 어쩌고 저쩌고,...
한마디로 “노” 였다.
“다 큰 딸이 있는데 이렇게 외진 길로 어떻게 다니라고 해요?”
정말 비행기 격납고 만하게 하우스를 개축 했지만 집사람은 본 척도 않았다.
그때 화원 하던 이웃의 이야기다.
“꽃 사러 가시면요, 예쁘고 깨끗한 물건만 있는 집은 농장 없는 사람이고요,
지저분 한거 많이 있는 집은 자기 농장이 있는 집이야요.“
“왜요?”
“어허, 농장 없는 사람은 남한테 가서 예쁜 것만 골라서 사와서 그런 거고
농장하는 사람은 아까워서 다 갖고 나오니까 그렇지요”
과수원 주인이 좋은 사과는 박스에 담느라 멍든 사과만 먹게 된다나.
그래도 나는 최고 좋은 거 내가 먼저 시식 해보고 출하 할 껴,
사업으로는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리던 중 IMF가 왔다.
전쟁이나 이런 경제 위기에 내가하는 유리 공예 같은 직업이 무슨 소용일까.
수금한 어음은 줄줄이 부도어음으로 변하고 주문은 끊겼다.
아파트시공사들에 대량 납품한다고 일억 가까운 일제 자동기계를 일본계 렌탈회사를 통해 들여 놓고
직원도 늘여 놨으니 직격탄을 맞은 셈이었다.
렌탈? 이름만 렌탈이지 빌려 주는 게 아니고 외상 판매인데
바가지 쓴 고가의 장비는 그동안 낸 할부금은 이자로만 처리되고 원금은 그대로 있었다.
정부가 내용도 잘 모르고 졸속 승인한, 사기나 다름없는 고리대금제도였다.
결국은 장비를 헐값에 넘기고 담보였던 처갓집을 날리고야 사업이 정리됐다.
집사람이 무남독녀가 아니었더라면 처남들에게 맞아 죽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비닐하우스를 쥐고 있었다.
나중에 사슴 한 쌍을 받기로 하고 이웃화원에 세를 놓았다.
집사람이 사슴보다 더 크게 뿔이 났다.
“돈도 없는 사람이 세는 현찰로 받아야지, 사슴 키울 땅도 없으면서 도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거예요?”
그래도 서울시 농촌지도소에서 실시하는 귀농과정인 화훼반도 다니고 방통대 농학과에도 입학 했다.
아내는 나를 돈키호테로 보기 시작하는 모양인데
나는 스스로 자랑스러운 의지의 한국인이라 자부하기 시작했다.
현실은 딸 결혼 날이 정해지자 그 하우스를 손해보고 급하게 팔아야만 했다.
진즉 받아야 했던 사슴도 우선 맡길 곳 찾는 사이 사슴주인이 전업해버렸다.
방통대도 성적미달로 다음 학기로 진급을 못하고 교과서만 남았다.
참으로 마누라가 존경해 마지않을 의지의 한국인 남편이다.
장하다! 자랑스럽다!
두 번째 귀농기회는 초상집 개로부터 시작 됐다.
친한 L형이 부친상을 당해 홍성 갈산 상가엘 갔다.
우리아들이 방학 때 가고 싶어 하던, 모든 시골을 다 갖춘 시골집 이었다.
모친은 노환이 있어 상이 끝나면 서울로 모셔 간단다.
송아지만한 개가 주인을 애도하는지 밥도 먹지 않고 풀이 죽어 있었다.
“형, 쟤 이젠 누가 밥 줘?”
“응 그래서 말인데 삼우날 저녁에 저 녀석 된장 바르게 0형하고 Y형하고 너하고 삼우날 다시와.
내가 할 얘기도 있으니까 마누라들도 데리고 와,”
삼우날밤, 보신탕파티가 무르익었다.
집주인 L형을 대신해 0형이 운을 뗐다.
“개는 해결 했고 이집 이야긴데 말이야, L형이 팔자니 생가라 미련이 많데,
이집에 붙은 논이 4마지기, 돌도 하나 없는 밭이 이천 평이거든,
논은 옆집에 부치면 1년에 쌀 4가마씩 나올꺼고
밭은 주목나무 묘목 심으면 관리하기도 그렇게 어렵진 않을거야, 수익성도 좋아,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어때, 시세보다 훨 싸게 내놓는다니까
넷이서 공동 투자해서 우리 공동주말농장 하고, 바로 옆에 톨게이트인데
서해안 고속도로 개통되면 서울서 두 시간도 안 걸려,
그러면 L형도 이집 남한테 안 버려도 되고 말이야.”
모두 찬성 했다.
“형, 저두 찬성이지만 요새 좀...”
“마, 넌 빠지면 안돼, 아냐, 우리 한 사람도 빠지면 안돼.”
화장실 가면서 내 귀에 대고 “네 몫은 내가 빌려 줄게. 가만있어.”
보신탕 잘 얻어먹다 졸지에 4분지1의 지분을 가진 농장주가 되었다.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언제나 트럭을 끌고 내려와서 즐겨 몸으로 떼웠다.
영농 첫날, 내일 굴삭기가 온다고 혼자 먼저 내려왔다.
논 부친 집에서 예초기를 빌려다 일분 강의를 듣고 이천 평 잡초 우거진 구릉 밭을 열심히 돌렸더니
어느새 근사한 골프장처럼 되었다.
문제는 축이 다 닳은 예초기가 진동이 너무 심해 종일 길들여진 오른 팔이 일이 끝났는데도
수전증이 있는 사람 마냥 계속 덜덜 경련이 일었다.
저녁에 예초기 주인이 따라주는 막걸리를 철철 쏟으며 받을 정도였다.
그래도 황토 방 아궁이에 장작 때고 첫 밤을 자고 일어나니 가뿐해졌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 제법 먼데 사는 이웃사람들까지 밤 새 별일 없었냐고 문안 인사(?)들을 와 있다.
참으로 친절하지만 퍽도 한가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갑자기 농담이 하고 싶어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오셨길래 소주 한잔 대접해서 보내드렸다”고 했더니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쩝쩝대다 돌아들 가신다.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가 초상이후 비어있는 이집에 귀신 나온다고 사람들이 밤에는 무서워서
이 집 앞길을 두고 멀리 돌아다녔다는 것이었다.
친절한 동네 사람들이 밤새 뒈지지나 안했나 궁금해서 온 것이었는데
그 후로도 수없이 혼자 잤으니 진정 나는 장하고 자랑스런 한국인이 되어 있었다.
모르는 것이 약이 될 때도 있는 법이다.
덕분에 동네에서는 아무도 내가 하는 부탁을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 귀농 했으면 가장 수월한 기회가 아니었겠나 싶다.
후회해도 지나간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집이 낡아 수리비는 계속 들어가고 Y형이 경기도 모처에 그림 같은 농원을 장만하고
전원생활을 시작하면서 재래식 홍성 빈 집은 찬밥이 되어 버렸다.
결국 그곳을 처분키로 했는데 나는 반대할 목소리를 낼 자격이 아니었다.
그때 눌러 살았으면 분명히 내 것이 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어물어물 도시에서 하던 일에 미련 못 버려 매달리던 사이 차려진 밥상을 놓치면서
두 번째 귀농 기회도 사라졌다.
20여년 하던 업을 폐업한 이후 재기하려고 뛰어 다니던 중
동창을 만나러 간 포스코 본사 로비에서 우연히 포스코 신문 하나를 집어 들었다.
<스틸하우스 시공 교육생 모집> 광고가 눈에 들어 왔다.
그래서 내 나이 쉰하나에 또 새로운 기술을 배워 직업전환을 하게 된다.
오랫동안 건설현장 주변에서 단편적으로 듣고 보던 것들이 총정리가 되었다.
수료 후 실전경험을 쌓으려 보수가 적건 많건 전국의 현장으로 따라다녔다.
튼튼한 집, 아름다운 집, 쓸모 있는 집, 하자는 왜 생기나, 열심히 공부했다.
나중엔 건축수주는 주부의 의견을 잘 반영해야하는 것이 관건임을 알았다.
드디어 나에게도 건축의뢰가 들어왔고 그러다 태안에서 주문이 오게 된다.
아파트를 월세로 얻어 애들로부터 해방된 집사람을 내려오게 했다.
그때는 집사람이 농사지으러 온 게 아니라 일꾼들 밥해주러 온 거였다.
중학교 동창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부부동반 모임이 있는데 안면도 쪽에 한40명 들어갈 좋은 펜션 하나 잘 아는데 없냐?
인터넷보고는 현장 확인이 안돼서 말이야.”
안면도는 애들 어렸을 때 캠핑 왔다 벼락이 텐트 곁에 계속 떨어지는 바람에 갇혀서
텐트 천정이라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 천지창조 다큐멘터리와 같은
장엄한 하늘의 불꽃 쇼를 밤 새 보았던 추억이 있는 곳인데 이상하게도 연육교 지나면서부터
고향집 안 마당에 들어선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겸해서 내가 살 만한 곳은 없나 하고 안면도에 길이 난 곳은 거의 다녔다.
유럽풍으로 지은 개성 있는 한 농가를 발견하고 집 구경을 부탁했다.
멋있는 집주인은 어린 보리잎으로 만들었다는 차를 대접하며
유럽에서 경험한 샬레(펜션)이야기며 자신도 펜션을 어떻게 짓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60평짜리 건물 3동으로 펜션 짓겠다는 집 옆 언덕위에도 함께 올라갔다.
마침 도면까지 그려 놓고 놓쳤던 집의 모양이 여기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밤새워 그 집 주인이 말한 바를 다 반영해서 도면을 고쳐
쌍둥이 대칭 건물 두 채와 별채 하나로 스케치를 완성 했다.
14개나 되는 어느 방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게 배치했다.
이튿날 무작정 또 찾아가 그림을 디밀었다.
한참을 그림을 뒤지고 또 뒤지고 보더니 입을 열었다.
“계약서는 써 왔습니까?”
그렇게 해서 맘에 두고 있던 안면도에 정착할 계기를 맞는다.
펜션주인은 수십만 평 땅에 여러 해 보리를 키웠었단다.
그 땅의 절반가량이 경지정리가 끝나 금년부터는 논농사를 시작 한다.
나는 공사현장보다 논에 관심이 더 갔다.
“사장님 이제 인테리어만 남았는데 지금부터는 사장님이 직접 하시죠,
사장님 센스가 저보다 더 낫던데요. 끝날 때까지 감리는 그냥 봐 드릴께요.”
실은 이미 거덜이 났지만 집주인의 눈이 너무 높아 계약한 돈으로는 도저히 그 눈에 맞출 수가 없어
협의 하에 두 손을 들고 만 것이다.
그래서 여름이 다 가도록 집짓는 현장보다는 수로문을 여닫는 레바를 쥐고
논 관리인을 따라 다니며 400마지기 넘는 논에서 시간을 더 보냈다.
얼마나 넓은지 논 주인이 모내기 끝나도록 자기 논 인줄 모르고 있은 논이 여러 빼미나 있었다.
트럭이 과열되어 딴뚝에 있는 S카센타를 찾았다.
“아무 이상 없구유, 라지에타가 전부 진흙으로 코팅돼서 보온이 너무 잘돼서 열이 빨리 식지 않아서
그래유, 비포장길로 많이 다니시남?”
자연히 그 논을 관리하는, 끝내주게 힘 잘 쓰는 친구와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와 나는 공통점이 이곳에 자기 땅 한 평 없다는 것이다.
무슨 사연인지 안면도에 자살하러 들어 왔다가 변심해서 살아 있다고 한다.
나보다 조금 젊었지만 <안면도 독거노인>이라고 별명을 붙여 줬다.
별만 잔뜩 뜬 캄캄한 밤 장삼포 바다 속으로 독거노인을 따라 들어갔다.
바다 속은 새파란 빛을 내는 생물들로 발가락까지 보이도록 훤했다.
휘황찬란한 별밤이 바닷물 속에 입체적으로 환상인 듯 펼쳐져 있었다.
“아이고 콧구멍에 물 차온다. 자, 이제 그물을 펴서 돌아 나갑시다, 어푸!”
“하하, 박형이 키가 작아서 항상 손해라니깐,”
해변에 붙어서 나즈막한 산이 하나 평화로이 누워 별들을 이고 있었다.
“박형, 저 산에 말이요, 한 이천평되는 충남 도유지 밭이 있는데 말이요,
지하수도 있고 전기도 있고 경치도 끝내주고 왕벚꽃이 아마 천그루도 더 심겨져 있지요.
지금 경작자가 그 벚나무를 인수하는 조건이면 넘긴다네요.”
안면도는 땅값이 너무 올라서 땅 사서 귀농하기엔 나에겐 무리가 있다.
국유지 임대라면 이미 구파발 화원촌에서 한번 경험 한 바 있다.
-그래, 설악산이 내 앞으로 등기 나서 다녔나, 등기가 없으면 어때,
등기 난 것도 홍성 땅처럼 안 살면 남의 땅이나 다름없는 것,
내가 점유하고 있으면서 내가 좋으면 등기 낸 거나 똑 같은 걸.
이튿날, 날이 밝자 깜깜한 지난밤에 보았던 곳을 물어물어 찾아 나섰다.
더 이상 차가 들어 갈수 없는 곳, 바위섬 몇이 떠 있는 수평선을 안고 황새둥지처럼 아늑하고
기름져 보이는 땅, 숨어있는 안면도 제1경을 발견했다.
귀농은 농사라는 직업 이전에 자연의 품으로 돌아감이 먼저 아니겠는가.
돌아가 바람 쐬러 가자하고 아내를 데리고 왔다.
핀잔에 능한 아내가 아무 말도 없으니 맘에 들었다는 뜻으로 나는 해석했다.
“여보, 이거 등기 난 땅이면 우리 몫으로 오기나 하겠소?”
그 벚나무들 값은 마침 그때 가지고 있던 돈과 거의 맞아 떨어졌다.
당장 다음달부터 생활비가 없어도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장삼포>와 근처 <운여>해수욕장을 합해 <장여>라고 땅이름부터 지었다.
귀농도 세분해서 나처럼 브라질 이민 가듯 신천지로 농업 입문하면
입농(入農)이라고 살던 곳으로 되돌아오는 귀농과 좀 차별되어야 맞다 고 생각한다.
그 땅을 개간하신 J형님내외분도 입농 해서 멋지게 사시는 분들인데
그 땅을 이어 받는 인연으로 만나 이젠 우리 부부가 가장 의지하는 이웃이 되었다.
장여 땅 가장 가까운 농가에 P씨 형님이 산다.
아주 정책적인 외교를 나서서 형님집 근처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졸라댔다.
결국 P씨 형님이 나서서 좀 떨어졌지만 방 여섯 있는 집을 세를 얻게 된다.
큰 기와집, 지하수가 얼마나 잘 나오는지 이웃집들 논에 물대주고도 남았다.
건방지게 동네 종가집이 된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에헴,
바다가 가까워 주말이면 민박 손님이 찾아와 생활비도 조금씩 보태 주었다.
그러고도 돈이 필요 할 만 하면 벚나무도 조금씩 팔렸다.
밀식해서 키가 너무 커진 벚나무는 상품 가치가 없었지만 싸니까 팔렸다.
나무 실어놓고 도망치는 친구도 있긴 했지만.
그렇게 귀농인지 입농인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핑계 김에 서울 구경한다고 자식들, 친구들은 물론 평소 잘 안 보던 사람들도 자주 오고
오히려 인파 속에 휩쓸려 다니던 서울에 있을 때 보다 실질적인 대인 관계는 더 많아져
시골 살면 외롭지 않을까 하던 걱정은 기우였다.
동네 사람들은 좋은 기술 갖고 집이나 짓지 왜 농사 하려는가 의아해 했다.
이곳에도 집수리 하는 분, 식당이나 철물점 하는 분, 오토바이 농기계 수리 하는 분,
공무원 하시는 분, 참으로 많지만 모두 농사를 크게 짓고 있다.
그 분들은 당연히 겸업 하는데 나는 왜 안 된다는 말인가?
좋은 기술이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농촌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말인가?
이렇듯 귀농을 막는 것 중의 하나가 나 자신과 이웃의 고정관념일수도 있다.
처음 해 본 농사는 단호박 이다.
호박이 제일 수월하고 손이 안 간다는 말에 솔깃한 것이다.
장여 밭은 벚나무로 가득 차서 실제 경작 할 곳이 별로 없었다.
P씨 형님이 볕 잘 드는 밭도 알아주셨다. 로타리까지 쳐 놓으시고,
계약재배라고 종자를 주며 물방울 같이 생긴 씨앗의 뾰쪽한 쪽을 아래로 향하게 심고,
신랑역할 할 조선호박도 4포기에 하나씩 심으라고만 일러준
태안 읍내 사는 K사장은 농사 끝날 때까지 아무리 불러도 와 보질 않았다.
수박 비닐이라고 180센티 폭의 검정비닐로 온 밭을 덮었는데도
몇 안돼는 고랑은 물론 나중엔 비닐을 뚫고 풀이 나오더니 아주 밀림이 되어 버렸다.
밭주인 할머니가 씨 맺혀 떨어지면 내년엔 더 큰일 이라고 걱정이 대단했다.
이미 호박 넝쿨이 바닥을 뒤 덮어 발 들여 놓을 자리도 없었다.
K 사장은 와서 수확해 간다고 했었는데 말이 싹 바뀌었다.
무슨 소리냐고, 따서 꼭지 바짝 자르고 그늘에 꼭지 딴 자리 꾸들꾸들하도록 말린 다음에
잘 선별해서 망에 담아서 갖고 오라고 분명히 말했다고 우긴다.
아마도 단호박이 대풍이었나 보다.
풀에 가려 단호박이 보이지 않으니 발에 밟혀 찾아지는 놈도 많았다.
밟아 터뜨린 놈이 수도 없는데 표면 전체가 매끈한 상품은 보기 드물었다.
도저히 개갈이 나지않아 예초기로 풀을 잘라가며 수확 했다.
조심했건만 예초기에 잘린 놈들이 임진왜란에 목 잘린 왜병만큼 많았다.
집안이 호박창고로 변하고 여름내 호박 냄새에 취해서 잤다.
좋은 놈들만 추려서 망에 담아 한 트럭 넘칠 듯 싣고 갔다.
반 지하창고에 아내와 뻘뻘대며 다 내려놓자 몇 망만 재껴 놓더니
저울도 없으면서 110키로, 500원씩, 5만5천원, 하더니 만원짜리 6장을 내민다.
5천원 더 선심 쓴단다, 집사람과 둘이 어안이 없어 서로 멀거니 보았다.
나머지는 두고 가면 폐기처분 해 준다나.
호박농사에 든 돈만 100만원이 넘는데 억울하다며 아내가 잠을 못 이룬다.
이튿날 다시 갔다.
돈 되돌려 줄 테니 우리 호박 도로 내 놓으라고 했다.
웬걸, 우리 호박은 간데없고 폐기처분 한다는 놈들만 망에서 풀려져 남의 것들과 섞여 차곡차곡 쌓여 있다.
결국 망에 담지 못해서 아무거나 기껏 반 트럭만 싣고 돌아 와야만 했다.
집사람이 밟히고 잘린 부상병부터 호박죽을 끓이기 시작 했다.
검정콩, 빨강콩, 색깔도 좋고 뭉글뭉글 찹쌀가루 범벅에 제대로 끓였다.
이름만 호박죽이지 찹쌀가루값이 훨씬 더 들어가는데도 아내는 손이 컸다.
그동안 고마웠던 이웃에 한 들통씩 끓여 돌렸다.
먹는 데는 지장 없는 놈들을 조개망에 또 담았다.
면사무소에 직원 숫자만큼, 안면도 도유림 사무소에 직원 숫자만큼,
내가 직접 농사지었다는 걸 강조하며 퇴근 할 때 한 망씩 가져가시라고 내려놨다.
덕분에 그동안 벚나무가 있다는 이유로 안 해주던 도유지 경작계약도
나무를 없애겠다는 조건부로 이뤄지고
따라서 농지 원부도 나오고 농협에 조합원으로 가입도 할 수 있었다.
건강보험부터 농업인으로 분류된, 서류상의 귀농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왔다 갔다 하는 중에 해변의 횟집에도 무차별 집집이 단호박을 나눠 주었다.
지금도 나를 호박사장이라고 부르면서 특별서비스가 나오는 집들이 있다.
겨울이 되고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갔는데 아내가 살 것도 아니면서 단호박 코너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매끈한 것도 아닌데, 정가 4,000원.
다음해 농사는 담배였다.
아내가 고남면 김치나눔 봉사회에 들었다.
회비들 걷어서 김치 담아 불우한 노인네들께 드리는 모임인데 (내 친구 독거노인도 해당 되려나?)
하루는 거길 다녀오더니 담배농사가 괜찮다고 하잔다.
호박에 맞은 충격이 너무 커서 이 여자가 미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농삿일이 서툴러 이웃의 품앗이에도 끼이지 못 하는데
그분들이 어렵다고 설레설레하는 담배농사를 하겠다니, 그래도 반대를 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내가 못 마땅할 때마다 서울로 가 버려야지 하고 푸념을 했다.
그러면 나도 독거노인이 되는데 공짜 김치도 싫고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귀농이 뭔데, 사랑하는 님과 함께, 남진씨 노래가 원조 귀농가 아니냐.
건축수주 할 때 터득 한 것처럼 귀농의 열쇠도 주부에게 있다.
“그려, 당신이 담배 농사짓고 나면 농업사관학교 졸업한 폭 될껴, 해보자고.”
겁도 없이 빌린 밭으로 6단이라는 규모로 담배를 시작하고
KT&G에서 절반 지원해서 장여 땅에 담배 건조용 튼튼한 비닐하우스도 두 채 들어선다.
약통 짊어지고 담배 밭 한가운데서 내가 여기 이렇게 서있게 되리라고 꿈엔들 생각이나 했나하고
한동안 멍하니 서있기도 했다.
담배 밭에 나가 있을 때 빈 집으로 단호박 K사장이 왔다 갔다.
더 잘 자라고 맛도 더 좋다는 죽호박 종자까지 두고 갔다.
우리 먹을 거만 심는다는 게 포트를 많이 하는 바람에 또 땅을 조금 빌렸다.
큰 한정식집이 연결돼 반 트럭 남짓에 55만원 받고 한상 잘 얻어먹고 왔다.
K사장이 수확하러 언제 사람들 데려가면 되겠냐고 전화가 왔다.
상태가 작년 꼴이라 동네방네 다 나눠주고 말았으니 올 필요 없다고 했다.
호박금이 좋아서 다 돈 되는데 왜 공짜로 주었냐고 바보 같은 짓을 했단다.
바보? 나는 네가 바보라고 생각한다, 이 바보야.
이렇듯 유통과 보관문제만 잘 해결하면 농촌이 좀 살 만한 곳이 될 것이다.
동창 하나가 힘들여 농사짓지 말고 저온창고 지어 유통 쪽으로 하라 길래 돈 좀 투자하라 했더니
여직 대답이 없다만.
담배 이파리 말리는 비닐하우스가 턱 없이 모자랐다.
고추 딸 때가 멀었으니 그때 까지 공짜로 빌릴 수 있는 하우스는 많았지만
많이 찢어진 하우스는 우리가 비닐을 교체하고 담배 무게를 못 이겨 주저앉을 하우스는
일일이 보강해야 했으니 그 돈도 만만찮았다.
사람사서 많이 따 놓으면 미처 엮지 못해 밑에 깔린 잎은 뜨겁게 열이나고 걸레처럼 치이고 했지만
비 온다 하면 미리 안 따놓을 수가 없었다.
급기야 빠른 손으로 담배를 엮어나가던 섬섬옥수 곱던 아내의 손가락마디가 조금씩 굵어지더니
류마치스 관절염으로 진단이 났다.
밤이면 아파서 울고 병원에서는 손을 쓰지 말라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담배 엮는 기계가 있다는 걸 알고 누가 쳐 박아 놓은 놈을 찾아냈다.
양쪽에서 둘이서도 할 수 있는 건데 마주보고 하니 심심하지도 않겠다.
그런데 너무 닳아서 오작동을 계속하는데 부속을 구할 수 없단다.
그래서 사람들이 점점 쓰지 않게 되었나 보다.
물어 물어 제작사를 찾아 김제 만경까지 가서 딱2개 남았다는 윗 몸통을 찾아내
돈 들여 통 째 갈아 오고서야 아내의 손가락 무리를 조금 덜었다.
겨울엔 J형님의 충고로 가시덤불로 방치 됐던 600평 숲 속 밭을 옛 상태로 개간 하여
이듬해엔 땅을 빌리지 않고 담배 농사를 장여 밭에서만 했다.
규모를 줄였더니 사람을 쓰지 않고 둘의 힘만으로 농사를 끝낼 수 있었다.
고생 좀 덜하고도 순 수익은 작년과 거의 마찬가지였다.
겨울가고 그렇게 미련 많던 남은 벚나무들을 굴삭기로 죄 뽑아버렸다.
뻥! 하고 햇빛이 마구 쏟아지는 엄청나게 시원스런 넓은 하늘이 생겼다.
금년은 마누라 손도 완치 할 겸 담배농사를 않고 호박 고구마를 심었다.
한쪽에 뼈대만 있는 하우스를 세우고 그물 덮어 단호박을 몇 주 올렸더니
여드름자국 하나 없는 특 상품들이 대롱대롱 매달린다. 한 풀었다.
담배 말리던 하우스 하나는 신야리 K형의 지도로 비가림 고추 재배를 한다.
힘들게 고쳐온 담배 엮는 기계는 그냥 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담배농사 할 땐 여름내 담배냄새에 취해 자야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고추농사하는 P형은 자식많고 형제많아 마른고추 200근이 그냥 없어진단다.
그런데 담배는 달라는 사람도 없고 한 잎 안 나눠도 아무도 뭐라고 않는다.
광이 열렸어도 쥐도 파먹지 않는다.
전혀 축나지 않아서 환금률 100%인데 - 웃자고 하는 소리다.
농사의 묘미는 바리바리 싸서 풍서엉 하게 나눠 줄 수 있는데 있다.
담배는 농사가 빨리 끝나니까 포트에 콩모종 했다가 담배 끝나기 전에 심을 수가 있는데
해마다 서리태 두 가마 정도 하지만 없어서 더 못 팔았다.
기나 긴 겨울 밤 정답게 마주앉아 짜라락 짜라락 콩 한번 골라 보시겠어요?
몰랐지만 동네 사람들은 담배 시작할 때 우리를 예의 주시 했다한다.
언제 보따리 싸서 서울로 도망치나 하고, 큰소리로 끝난 전례가 많았단다.
농사 실패는 관심 꺼리도 아니다. 그 분들도 농사짓다 자주 실패한다.
귀농 하실 분들은 자존심을 걸고 뭘 하던 실패하더라도 끝을 꼭 볼지어다.
아직 나에게 맞는 주력 작물을 찾지 못했다.
첫해 맛 봤던 수백 마지기 논농사가 좋겠지만 농사에는 로또가 없다.
그래서 열심히 충남 농업 기술원에서 실시하는 농업인 전문교육을 다닌다.
국화교육 다녀와선 이튿날로 바로 밭 만들어 국화묘 1만주를 심었다.
올 가을에 얼마나 상품가치가 있는 국화 꽃송이가 맺힐지, 비가림 하우스에서는
마른 고추가 몇 근이나 나올지 나도 궁금하다.
소나무 숲 그늘에 표고버섯도 잘 될 것 같고 걸은 속 밭엔 약초류도 잘 될 것 같고
인삼 교육 때 만난 태안 인삼 회장님은 인삼이 괜찮다 하시고.
현실은 밭이 너무 작건만 나는 벌써 버섯 따고 인삼 캐고 있다.
이렇게 농업은 매일 매일이 희망이다.
비싸게 산 벚나무를 몽땅 뽑을 때도 그 자리에 생길 새밭이 희망이요,
그 뽑아놓은 벚나무를 농업 시술 센터에서 기계를 빌려와 톱밥을 만들어서 어떻게 할까 도 희망이다.
콩 골라 썩은 콩이 많이 나와도 꼬꼬들 특식 많이 생긴다는 희망이 있다.
심은 콩이 떡잎을 안고 뒹굴면서 솟아오르기를 기다림도 희망이요,
댓다 많이 달린 수박들이 아직 야구공 만 하지만 휴가에 자식들이 와서
금년에 많이 달라진 밭을 보고 얼마나 알아나 볼까? 도 희망이다.
애들 어릴 적엔 소원을 했어도 못 보여준 시골이지만
이제는 손주들과 그 애들이 데려올 친구들에겐 추억을 남겨 줄 시골 아니 멋진 농장이 있다.
희망은 긍정에서 온다.
희망은 이렇게 우리 마음을 한없이 살찌우고 부자로 만든다.
돈 주고 산 집도 땅도 하나 없지만 나는 안면도 제일의 부농이다.
자료 : /blog.daum.net/reru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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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긴 장문 너무나 잘읽었습니다..^^
참 재미있게 쓰셨네요...고단한 삶이어도 희망이 있다면 젤 부자 맞습니다.^^
와~~점심 먹고나서 단숨에 읽었네요. ㅎㅎ 소설가해도 손색이 없겄슈~~ 내고향 홍성옆 안면도에 계시는구먼유.홍고 졸업후 태안에서 한 2년정도 살아선지 많이도 반갑네요. 고등학교 동창들도 안면도 사는 학생들이 많았었는데.... 그놈들 땅 가지고 있던 놈들은 다~ 부자 됬을거구..... 에고 이몸은 머나먼 부산까지 와가지고.... 이제 퇴직할때 되니 부산근교 어데 조그만 값싼 야산 모퉁이나 있음 사가지고 오두막이라도 지어 살고파서 인터넷 서핑하다 어제 이까페를 발견,입회했는뎅..... 박형,대단하십니다.부디 항상 즐겁고 행복한 나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대단히 긍정적인 생각을 하시고 의지가 강한 분인것 같습니다 부인께서도 참 대단한것 같아요~~. 참!! 부인께서는 손은 괜찮은지요? 한해한해 항상 건강하시고 언젠가는 사유지를 소유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