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컬럼] ㅡ 마당 - 무대 - TV뮤지컬 ㅡ
☆ 펜데믹(Pandemic) 시대를 맞이하여
그나마 어려운 시기에 마당ㆍ무대ㆍ흑백 TV뮤지컬에 출연하면서 뮤지컬로 밥을 먹었기 때문에 뮤지컬 직장에 근무하다가 한예종교수로 정년퇴임을 했다. 만약 우리 것을 해서 밥을 먹을 수만 있었다면 탈춤(假面劇)만 했을 것이다.
뮤지컬은 가무악극歌舞樂劇의 독립된 하나의 장르로서 종합예술이다.
그동안 교재로 수업만을 했지만,
코로나19(20년~22년)로 인해 대면 수업(강의)을 못하고 비대면시대를 맞이하여 이론적으로 많이 정리가 되었다.
학생 및 국민들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 마스크 쓰고 강의 중에 말문이 막히면 다음과 같은 스토리 수업(역사)을 함께 했기 때문에 참고로 기록했습니다.
(청년들의 일거리창출을 위해)
ㅡ한국 및 서양뮤지컬을 TV뮤지컬 주말 연속극으로ㅡ
☆ 순서
서론ㆍ한국전통문화 예술
1. 한예종 및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 예그린악단(한국뮤지컬협회 설립)
3.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4. 뮤지컬 기획ㆍ제작
5. 연극(演劇)이란 용어
6. 연희극(演戱劇)이란?
7. 세종문화회관
8. 뮤지컬이 뭐냐?
9. MBC 마당놀이
10. 흥사단 희락회
11. 믿음 생활
12. 서울예술단 창단 및 해외공연
☆ 참고자료
☆ 서론
필자는 뮤지컬을 통해 교수와 탈꾼으로서 졸업 후 70년도부터~ 지금까지(군생활 육군본부/삼각지) 현장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생활하며 지내오면서 2020년도 코로나를 보내며 대면 및 비대면 수업을 통해 강의를 정리해 보았다.
3년만에 마스크없는 바깥 세상 출입과
8년만에 White Christmas를 맞이하여 세상을 되돌아 보면서 회상해 봅니다.
그동안 마당에서 무대로 한국전통문화의 원형(源形/原)과 창작(創作)을 터득하게 해주심과 국민을 위해 국민건강 캠페인(탈춤체조, 민속체조, 민속놀이 올림픽 창안)을 벌여 왔음을 하나님께 感謝드립니다.
매년 크리스마스이브 때는 레퍼토리 시스템의 일환으로 현직에 있을 때, 뮤지컬 "지붕위의 바이올린" 공연기획과 IMF 때인데도 불구하고 어린이 뮤지컬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이상한나라엘리스,
머털도사 등으로 세종문화회관 3895석을 매년 유료관객으로 3층까지 꽉찬 만석을 채워 공연한 바 있어 뮤지컬의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했다..
필자는 50여년의 공직생활을 관공서에서 뮤지컬 30여년, 교수 20여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논문발표를 통해 포럼, 좌장, 세미나, 전형위원(심의 및 심사), 축제위원장 및 심사위원장 등 ~ 탈꾼 노릇도 하며 평생 탈춤(假面劇)과 뮤지컬을 함께 하면서 마당과 무대와 TV와 함께 했기 때문에 국제화ㆍ세계화 시대에 한국 무형문화재의 정체성과 신뢰 회복을 위해 나열해 본다.
그러나 만약, 탈춤(假面劇) 분야에서 밥을 먹을 수만 있었다면 우리 것인 탈춤만 했을 것이다.
다행히 예그린이란 직장이 있었기 때문에 외도하지 않고 황해도 봉산에서 월남하신 인간문화재 어른 보유자님들(故 이근성, 양소운, 김용익, 김학실, 윤옥 외), 김금화(무당)선생님과 보유자 어른들의 생존시 봉산탈춤 全과장을 전승전수교육을 직접 개인지도를 받았고, 특히 김선봉(소무), 최경명(취발이) 선생님이 보유자 지정(指定)을 받기 위해 전수회관이 없을 때 중구 광희동에
매일 나오셔서 연습하실 때 저도 함께 뒤에서 따라하면서 개인 지도를 받았다.
이때 취발이와 소무를 원형을 제대로 따라 배웠고 노장과 첫목은 김기수회장께 배웠으며, 양소운 선생님께 미얄할미와 무당은 김금화선생께 직접 배웠다. 윤옥선생은 김금화선생께 배워 미국공연에 다녀 오셨다.
두 분(김선봉, 최경명)께서 70년 7월 연습을 통해 상반기 보유자 응시 시험을 보셨고, 인간문화재로 지정(指定:71년 9월)을 받으셨다. 이때 실무자로서 업무처리를 했다. 그 때 최경명 선생님께서는 무용(舞踊)을 하지말고 춤을 추시라고 하셨다.
그래서 요즘 살풀이, 살푸리에서 살풀이춤이라고 덧붙힌 것 같다.
지금은 故 김진옥(金辰玉: 1909.4~1991.12) 인간문화재의 따님이시고 유일하게 남한에서 생존해 계신 김애선(金愛仙: 1937~) 보유자에게 개인지도를 받았고, 제명도 받았었지만, 현재 전승교육사로서 함께 전승교육을 받고 있다. 지금도 현장에서 지도하시는 모습과 근본을 지키시는 보유자의 위치를 보살펴 드려야 한다.
더욱 남북통일이 되면 황해도 봉산에 가서 봉산탈춤공연회관(극장) 건립(建立)을 위해 故 김기수 보유자와 함께 기금조성도 시작하여 추진하셨고,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남북통일을 열망하는 상황에서 現 보유자가 생존해 계실 때, 황해도 원형의 봉산탈춤을 살려야 한다고 하시면서 전승전수교육을 열심히 지도하고 계신다.
한편 당시 강령의 오인관(吳仁寬: 1901.9~1971.7) 선생님께서는 강령탈춤을 지정받기 위해 이두현 교수께서 전북 임실(정읍)에서 모셔와 70년도 중구 광희동에 하숙을 하시면서 지정(指定) 조사를 받고 계실 때, 저는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타자(타이프)를ㅡ 치면서 보조했고, 처음으로 강령탈춤 기본 동작도 배웠다.
당시는 지금처럼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이 없었고, 초창기 때, 현재 우리 봉산탈춤회원들이 아무도 없을 때이다.
당시는 전수자 제도가 없을 때이지만 봉산탈춤보존회를 설립해서 운영하셨다.
당시는 회원들이 없어 봉산탈춤 단오 정기공연할 때, 명성여고 학생(장ㅈㅅ, 박ㅅㅈ 등)들이 출연해 주었다.(사진참고)
단오절 정기공연(70년부터 창경원, 명동 국립극장)에도 필자는 인간문화재들과 함께 출연했습니다.(자료)
초창기 보존회는 장충체육관 근방 중구 광희동 봉산탈춤보존회(회장 김기수, 총무 최창주)가 전세로 4층 건물에 있을 때(사진 참고), 우리는 이곳에서 야전침대를 두고 함께 숙식을 하며 저는 예그린악단에 출ㆍ퇴근하면서 봉산탈춤을 했다. 당시는 전수자제도가 없었지만 제가 군입대 후에 이런 제도가 설립되었다. 입대후에도 삼각지 육군본부에 근무하면서 외출하여 출연했다.
또한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사초청을 받아 국군도수체조 대신 [국민건강 탈춤체조]를 지도했기 때문에 육사생들이 졸업 후에 소대장으로 발령받아 전, 후방에 근무할 때 탈춤체조를 지도했다고 자랑하는 것을 들었다.
필자는 10여년간 육군사관학교를 출강(육사 출입증) 하면서 이론적으로 신뢰와 믿음, 권선징악(勸善懲惡: 착한 일은 권장, 악한 일을 징계함), 약육강식(弱肉强食: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지배 당함), 건강 등 육사 강의와는 차이가 나게 이론 강의도 열심히 하였다.(친구인 정재만도 사병으로 근무하면서 나에게 탈춤을 배움)
즉 三綱五倫(임금과신하/父子/남편과 아내 관계/ 父子有親, 君臣有義, 長幼有序, 朋友有信, 夫婦有別)은 삶에서 상하관계 질서확립인 육사의 기본적인 유교적인 교육도 강의했지만, 지금시대 강조하면 춘추전국시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1. 한예종 교수 및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예종 연희학과(학과장)에서 봉산탈춤 1936년 오청 원형본과 1965년 이두현 법적 원본(1967년)을 비교검토 연구를 통해 한예종에서 <논문>을 쓰고 원형본과 법적원본을 <재연>함과 봉산탈춤 全과장을 교재(저서)로 출판ㆍ제작하여 후대들을 위해 교육에 임했기 때문에 탈꾼으로서 탈춤을 지금까지 제대로 할 수 있는 행운을 맞이하게 되었다.(자료 참고)
연희(演戱)와 한국적 뮤지컬도 강의를 했다. 그러나 어느 학교에도 수업하지 않는
우리에게는 비록 가설 무대이지만, 우리의 전통무대인 산대(山臺)와 채붕(綵棚)의 강의도 했다.
정년퇴임 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차관급) 대행으로서 前위원장들의 블랙리스트(blackist: 감시가 필요한 위험 인물들의 명단) 문제를 통해 대국민 사과문의 기자회견을 발표한 바 있다. 따라서 전형위원들을 분야마다 지원제도를 공정한 규례로 재점검 구별하여 시정, 관리하고 정리하였다.
따라서 구조적, 제도적인 모순점과 동ㆍ서양 문화예술 동시 지원방식을 통해 "최창주의 쓴소리" 도 연재하고 [컬럼]과 한예종 재직시 영재원을 설립하여 강의와 현직에 있을 때 영화 "왕의남자"를 자문도 한 바 있다. 한예종 정년 퇴임 후에는 평생교육원에서 강의와 코로나19가 끝날 때까지 비대면 강의를 시도해서 정리했다.
또한 남예종 뮤지컬 석좌교수와 한국예술비평가협회(부회장)의 평론가로서 공연분야에 대해 관극평(觀劇評)을 쓰면서 이런 계기로 단체의 지원금 제공이 문제시 된 단체도 있었지만, 처리를 못하는 단체도 있어 시정시켰다.
특히 단체 보유자를 지정할 때, 1달 예고제가 있어 다행이지만, 비리문제와 예산과 단체 지원금의 문제점 등, 수의계약과 입찰문제, 일반행정과 예술행정을 강조하며 현장행정과 확인행정으로 앞으로도 탁상행정을 하면 아니될 것이다.
오늘날 필자는 단체와 예술가들에게 반복하여 강조하는 용어로 다음과 같은 강의도 했다.
전통 예술단체들은 책임과 의무인 국가 [지원금]과 [월급]과의 차이점을 모르고 있는 조직이 있는가 하면 "직무유기'와 "직권남용'도 혼돈한다. 예술가들도 행정을 터득해야 한다. 예로 ~
☆지원금(책임과 의무를 못했을 경우 환수 조치/ 반납해야 한다)
☆직무유기(職務遺棄: 맡은 일이나 책임을 다하지 않고 방치함),
☆직권남용(職權濫用: 직무상의 불법행위: 자기 권한밖의 행위를 함부로 하여 공무의 공정을 잃음) 이란 용어 이해와 관공서 관계자와 예술단체들은 유념해야 한다. 필자가 임기동안 블랙리스트 수습관계와 지원금 문제를 힘들게 시정 조치시킨 바 있다.
이제 시대적 이데올로기(Ideologie: 행동 따위를 이끄는 관념 체계)의 문제점을 제시해야 하며 아울러 전통문화예술이란
溫故而知新ㆍ法古創新으로 옛 것을 바탕으로 두고 새 것을 오늘에 맞게 재창조하여 잘 지키고 활성화ㆍ대중화로 연구ㆍ운영하면 될 것이다.
2. 예그린악단(한국뮤지컬협회 설립)
예그린악단의 후신으로 국립ㆍ시립가무단 출신들 위주로 한국뮤지컬협회를 설립하면서 TV뮤지컬 주말연속극으로 일거리창출을 위해 예그린악단 때 부터 연구ㆍ노력하였다.
본인이 이사회와 서류를 통해 자료를 준비하면서 최창권 초대협회 회장(이사장)은 이사장으로서 뮤지컬을 활성화ㆍ대중화를 시키면서, 제가 한예종교수(연희학과장)로 가면서 연극분야에 계시는 분들이 한국뮤지컬협회를 담당하게 되었다.
예그린악단은 기관(중정)에서 운영하다가 장충동 국립극장을 건축하여 국립예그린예술단(국립가무단)에서 시민회관의 화재로 세종문화회관이 건축되어 시립가무단, 뮤지컬단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당시 예그린은 1961년도 창단되어 이합집산(7차/離合集産)으로 운영되었다.
제7차로 운영되다가 예그린악단에서 73년도 국립예그린예술단(가무단)이 국립극장으로 이관 되었다.
그래도 대한민국 문화분야에서 최고의 문화예술 단체이었다.(극단들이 있었지만 월급을 제공받지 못했다. 저는 첫월급을 3만원 받았다.. 당시 공무원 월급 1만2천원? 정도 이었다.)
예그린악단의 단장으로서 박용구, 김경옥과 국ㆍ시립으로 이관되면서 김희조, 최창권, 작곡가와 박만규 작가, 지휘자 라영수, 송운길, 황철, 단원으로서 김창섭, 김영자, 조종애, 강대진, 최창주 등 선배, 동료들 모두다 나열할 수 없지만 예그린 멤머로서 활동했다.
예그린악단 때는 6개월에 한번씩 단원 내부 오디션을 해서 탈락되었고, 국립극장 및 세종문화회관에서는 1년에 한번 단원 오디션을 하면 13명 씩의 단원이 탈락될 때도 있어 직장을 잃었다. 이렇게 퇴출(짤린) 단원을 사회에서 보면 서로 민망해서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대학로를 나갈 수가 없었다.
때문에 단장에게 10년이상 경력을 가진 단원들은 오디션을 보지 말자고 제안ㆍ건의를 해서 불법을 합법으로 평생직장을 만들게 되었다.
또한 시립으로 되면서 외부에서 차기 공연 연출자(극단 신시 대표 김ㅅㅇ)를 초빙했을 때, 국립극장 앞 ㅇㅇ호텔에서 방을 얻어 작품을 각색한다고 기획자인 필자를 오라고 해서 갔다.~ 질문했다. 무슨 돈으로 호텔료를 지불하려고 하십니까? 질문하니 연출자께서 왜? 진행비 없어! 돈 많은 시립(市立)인데? ~ 진행비가 부족하여 제 월급으로 충당하고 있다고 하니 ㅡ그 다음날 곧바로 호텔방에서 나오시는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필자는 예그린악단원과 국립극장 및 세종문화회관 뮤지컬단 기획담당(실장)을 맡아 공연한 바 있다. 단원 수석, 총무, 기획 담당(실장) 하다가 단장만 못해보고 한예종 교수(연희학과장)로 위촉(국가 공무원) 되어 정년퇴임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장(차관급) 대행으로서 정책의 경쟁과 일반행정과 예술행정, 현장행정과 확인행정으로 제도적ㆍ구조적 모순점을 제시하면서 임기를 마쳤다.
다시 예그린으로 ~ 흑백 TV시절에 [예그린주말연속극]에 출연하면서 ~ 흑백에서 컬러TV 예그린 "뮤지컬 주말 연속극" 시대가 와야 된다고 주장했었다. 1971년도 TBC-TV(동양방송) 흑백TV 시절에 "예그린 주말 뮤지컬 연속극" 에 필자가 출연할 때, 담당 황PD께서 주인공을 크로즈업하니까 다 좋은데 ~ 쌍까풀이 없어! 필자에게 성형외과를 소개하면서 수술을 하라고 살짝 요구했다.
속으로 남자새끼가 무슨 쌍꺼풀수술을 해야 하나 하고 하지 않았다.(지금시대는 관계없지만~) 쌍꺼풀 수술을 하지 않았다고 다음 작품부터 단역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그 때 쌍꺼풀 수술만 했더라면 교수가 아닌 신성일과 같은 훌륭한 배우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컬러(칼라) TV가 나오면 뮤지컬시대가 온다고 희망과 장담했지만, 현재 수백 개의 TV체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뮤지컬 고정채널]이 없기 때문에 이제 채널을 만들어 청년들에게 직업화로 문화전쟁이 되어 일거리창출을 해주어야 한다.
필자가 뮤지컬을 할 수 있었던 예그린악단에 입단한 계기는 다음과 같다.
1969년 "최초의 전위극" 유덕형 연출로
미국에서 연극학 박사를 받아 "자아비판" (나도인간이 되련다/각색본) 을 공연하게 되어 최고의 뉴스거리였다. 필자는 주인공으로 출연을 했기에 예그린악단에서 스카웃이 되어 뮤지컬을 국립극장 및 세종문화회관에서 직업으로 근무했다가 한예종 교수가 되었지만 스승인 동랑 유치진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배우가 되기 이전에 인간이 되어라!" 라고 제시해 주셨다. 당시 아카데미 1기생으로 신순기(신구), 민승원(민지환), 전무송, 이호재 선배님들이 극단 드라마센터에서 활동하셨고 분장사로서 전예출, 최효성, 박수명 등이 계셨고, 극단 신협(대표 이해랑), 광장(대표 이진순), 실험극장(이낙훈, 이순재), 자유극장(대표 김정옥) 등이 활동했으며, 극단이 부족했기 때문에 명동파, 남산파가 있었다.
아울러 필자는 연극출연을 70년도 명동 국립극장에서 이원경 연출 "원술랑"과 "김대건신부" 연극에 출연을 했지만 ㅡ 필자는 뮤지컬로 밥을 먹었기 때문에 후배ㆍ제자들을 위해 뮤지컬부터 연재ㆍ기록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현재 각 예술대학에 뮤지컬학과가 설립되어 배출된 인재들이 있어 "한국뮤지컬" (최창주 著)은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될 것이다.
오늘날 뮤지컬에 대해 학습을 할 때이고 극본이나 뮤지컬도 10년 간격ㆍ단위로 변하고 발전되고 있는 시기이기에 후배ㆍ제자들에게 뮤지컬의 변천사와 역사에 대해서도 알리고 싶을 뿐이다.
더욱 현직에 있을 때는 전통 한국적 뮤지컬(연희극)을 해외수출을 하여 세계에다 알려야 한다고 해외공연(양반전 및 탈춤/77~87년)으로 순회할 때마다 주장한 바가 있다. 이미 뉴욕타임즈에서 "이렇게 좁은 땅덩어리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렇게 큰 춤사위가 나올 수 있느냐 실로 예술의 극치다" 라고 평론했다. 등등
때문에 저서와 fb에 강의원고 식으로 올려 놓았으니 동ㆍ서양의 문화예술을 비교 검토하여 후배ㆍ제자들은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동안 펜데믹(Pandemic) 시대를 맞이하여 강의와 비대면 무대공연이 주춤하면서 무대공연산업이 영원히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코로나19, 당국의 방역 지침과 관련하여 어려운 시기임에도 마당극과 뮤지컬, 연극, 음악, 무용, 오페라의 무대분야는 동반자와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2.5단계) 지침의 장기화로 힘든 절박하고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공연문화산업의 고통을 딛고 원상회복과 문화강대국으로서 동ㆍ서양의 문화예술을 하는 무대인들이 함께 세계로 뻗어 나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연구ㆍ노력하고 협조한 바 겨우 위기를 넘겼다.(그 외 "한국뮤지컬" 최창주 저서 참고)
3.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ㅡ뮤지컬시대가 온 것인가?
ㅡ아니 벌써 지나간 것 같다?
ㅡ삶의 비리들을 어떻게 할 것아가?
ㅡ대한민국 뮤지컬시대가 이제 또 올 수 있겠는가?
ㅡ흑백 TV시절에 [주말 뮤지컬 연속극]에 필자가 71년도 TBC-TV(동양방송)에 직접 출연하면서 컬러 TV가 나오면 뮤지컬시대가 온다고 장담하고 희망했지만, 지금은 수많은 TV채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뮤지컬 채널이 하나 없어 후배ㆍ제자들에게 일거리창출을 제대로 제시를 못하고 있다.
☆ 이것이 현 시대인 것이다. 이제 중간 점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뮤지컬 시대가 또 올 수 있겠는가? 반문해 본다.~ 올 수 있다.
☆ 그동안 창작뮤지컬과 라이선스 뮤지컬이 볼거리 중심의 대형 뮤지컬로서 행사 중심의 뮤지컬이 뮤지컬시장에 한국적인 해학과 풍자가 깃들어 있는 여건으로~ 출판을 한다고 해서 자료를 요구하는 동료ㆍ후배들이 있었기에 뮤지컬 자료 정보를 제공한 바 있다. 국제화ㆍ세계화 시대에 우리도 지금부터이다!
☆ 한편, 한국전통문화부분에서 예전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현재 "한국민속예술축제' 때 완행열차를
타고 경상도 진주까지 17시간 완행열차를 타고 도착해보니(제주도 등), 심사위원들이 이두현교수 등 교수들이 심사위원 석에 앉아 계셨다. 나는 잔디밭 운동장에 앉자서 언제 저 자리에 않자보나 했었는데 어느덧 심사위원장 및 추진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앉자 있는 것이다.
☆ 근무중 이런 일도 있었다. 예를 든다면 ㅡ
세종문화회관에서 근무중, 회관에 비리가 있다고 10년만에 감사원에서 감사가 나왔는데ㅡ 비리가 있는 공무원 감사는 아름답게 끝내고 감사의 대상도 아닌 예술단 감사를 했다.
무용, 음악, 연극의 대본 원고료 2백자 원고지 1매가 250원이었으나 뮤지컬 원고료는 500원이었다.
가무악극(歌舞樂劇)이 독립된 하나의 장르로 종합예술이기에 500원을 제공했다고, 감사원 감사(김ㅇ민)로부터 기획자인 본인과는 관계가 없는 예산분야 조항인데 파면ㆍ별정직 해임을 당했다.
뮤지컬단원들은 감사가 잘못되었다고 전체 서명(싸인)을 해서 감사원에 제출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탈춤 원형에서 67년도 법적 원본을 보존회에서 하고 있는데, 최교수가 36년도 오청 원본인 논물을 쓰고 학생들과 공연을 재연한 공연을 보고 온 회원(김ㅈㅎ. 후일 사무국장 됨)의 보고를 받은 보유자(회장)에게 호출 당해 귀싸데기를 맞고 "제명"을 당했다.
그러나 조직의 비리 문제가 있기 때문에 소송을 통해 이 모든 사항을 재판을 통해 무효(무협의)확정판결(변호사 전ㅎㅊ, 정ㅈㅎ)을 받았다. 비리문제가 있었지만 행정소송은 보류했다. 세종문화회관에
재복직하여 국립대 교수로 정년 퇴임을 했다.(36년 오청원본은 조선총독부에서 해방되면서 일본 천리대학 보관된 자료를 고려대 서ㅇㅎ교수에 의해 찾아온 극본을 재연함) 극본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요구했고, 비디오 자료는 보관 중임.
지난 일들이지만 거짓과 허영으로는 삶을 살아가는 관계자들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즉 예로 비상사태 직무담당인 梧里 李元翼(1547~1634) 같은 문무백관(200명) 199대 1의 발언하여 이순신을 살려낸 담당관이 있었다.
지금시대에도 옳고 바른 판단하는 이사회의 이사가 없었다. "굳이 복수하지 말라 썩은 과일은 알아서 떨어진다"고 했다.
위에 과분한 예를 들었지만 인기를 누리는 뮤지컬 작업 기획자로서 수많은 외침을 받고 인생살이를 한 것 같지만, 199대 1로 승리자가 되었다.
이제 대면 및 비대면시대가 지나기고 교육용 원고를 [컬럼]의 연재로 작성한 바 있어 필자의 fb원고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공했으니 후배ㆍ제자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4. 뮤지컬 기획, 제작이란?
ㅡ1차 뮤지컬 기획(企劃)이란 무엇인가?
ㅡ2차 예술적 기획과 사회적 기획
ㅡ3차 국내ㆍ외 기획ㆍ제작
따라서 우리는 서양에서 들어 온 문화예술 보다 우리는 종합예술로서 이미 유무형(有無形) 제도가 있다. 유형(有形)은 불타 없어지기 때문에 도면이 있지만, 무형(無形)은 보이지 않는 근본인 뿌리의 원형(源形/原)으로 사람이 연구ㆍ노력하여 계승 발전을 시켜 온 것이다.
그러나 뮤지컬은 그 반대로 創作이다. 뮤지컬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오페라의 공연물로 성립되었으나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삶에 지친 대중(국민)들을 위해 연희적 작품과 예술분야로 뮤지컬을 찾게 되었다.
필자는 77년도 미국 30개 주립대학 순회 중에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시카고" 란 작품을 觀劇하게 되었고 일반대중이 무대에서 편히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이 90분 정도라는 것을 배워서 이해하게 되어 귀국해서 기획ㆍ제작자로서 교육도 하였다.
5, 연극(演劇)이란 용어
우리는 연극이라는 용어는 없었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5월20일 시사평론 실린 글을 보면 ㅡ
"이인직씨 들어보소 연희(연극을 의미함) 개량한다고 일본까지 건너가서 여러 달을 유전타가 근일에야 나왔더니 무슨 연희 배워왔나 연희개량고사하고 동분서주 출몰하는 공의 형상 볼작시면 연희보다 재미있네. 공의 일도 가탄하다". 등 문화예술 분야가 정립이 아니 되었을 때 ㅡ 동경유학생들에 의해 정리되었다.
우리는 62년대 예그린악단에서 정부행사를 위해 옴니버스 형태의 공연예술을 하다가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공연이 종합예술적인 드라마가 뮤지컬 시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6, 연희극(演戱劇)
그러나 종합예술은 우리의 전통문화이기 때문에 필자는 한국말로 오페라가 [음악극]이라면, 뮤지컬을 [연희극]이라고 제시한 바 있으며 "창작연희극 지저스 ~ 슈퍼스타" 를 한예종 연희학과장으로서 정년퇴임 기념으로 공연을 올린 바도 있다.
(사진 자료 참고)
당시 우리는 62년도 예그린악단 창단(61년도 설립)이 되면서 "살짜기 옵서예"(66년 10월 공연) 대북관계를 시도하며 북한과 비교되면서 북한의 "피바다, 꽃파는 처녀" 등이 500명씩 출연한다고 하니 극적으로 경쟁이 되었지만 예그린악단부터도 300명씩 시민회관에서 "바다여 말하라"(白成珪 연출 1971년 장보고전: 바다를 내품에 1988) 공연하였으나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옮기면서 예그린악단이 국립극장 국립예그린예술단(가무단)이 되면서 국립극장 시절에는 소속단체가 7~8개 단체가 있어 한 단체가 출연하면 의무적으로 그 단체에 출연해주는 것으로 우리 단체가 한 작품을 공연할 때 보통 520명씩 출연하게 되었다. 필자는 그 현장에 늘 있었지만, 그 때가 뮤지컬의 황금시기였던 것이다(?)
7. 세종문화회관
필자는 기획자로서 맨처음 세종문화회관 3895석의 객석을 어떻게 꽉 채울 것인가?
고민을 했다.
더욱 서울시민회관의 화재로 인해 세종문화회관이 3895석이 건립되면서 IMF 시절에 "어린이 뮤지컬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이상한 나라 엘리스, 머털도사" 등, 유료관객으로 3895석을 꽉 채운 만석의 기적을 만들어 뮤지컬의 활성화ㆍ대중화를 시켰다.
당시 MBC 후원이었지만 필자는 기획자로서 맨처음 세종문화회관 3895석의 객석을 어떻게 꽉 채울 것인지?
늘 걱정하고 고민했었다.
IMF 때인데도 불구하고 포니1을 타고 유치원을 순회하며 PR과 홍보를 했지만 MBC에서 후원으로 매년마다 티켓이 판매 매진되었다.
좋은 조건의 장소인 세종문화회관이 있었지만 시민의 세금을 받아 운영하는 뮤지컬단체를 어떻게 객석을 채울 것인가? 공연할 때마다 ~ 늘 고민과 걱정을 하면서 1회×3895석×3배수=1만2천 매를 인쇄하여 각 동사무소마다 순회하면서 전단지와 티켓을 배포ㆍ배분, 홍보할 때이다. 뮤지컬을 활성화ㆍ대중화를 시킨 바 있다.
8. 그럼 뮤지컬이 뭐냐?
당시 시민들은 ~ [뮤지컬이 뭐냐?] ~ 고 질문할 때 ~
뮤지컬은 가무악극(歌舞樂劇)이 독립된 하나의 장르로서 종합예술입니다! 라고 기획ㆍ제작자로서 강의와 홍보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IMF 등, 어려운 기간을 거쳐오면서 외롭게 발로 뛰면서 당시는 필자가 평론가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었다. 그저 맨발로 뛰는 단원출신 세종문화회관
기획담당 이었다. 공연지원도 부족하여 공연제작시 힘들 때이었다. 그때는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한다고 기업체에서 지원제도가 없었다.
때문에 외부에서는 市立인데~ 市에서 돈많이 나오 잖아! 왜이래! ~ 생각할 때이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혼자 맨발로 방황하면서 예산이 부족하여 이곳ㆍ저곳
으로 도와 달라고 요구했지만 단장, 안무, 작곡자, 단원들은 공연만 하면 되고 관계자들은 사무만 보면 되지만 기획자인 저는 일반행정과 예술행정 현장행정과 확인행정을 하며 열심히 발로 뛰어 다녔다.
월급을 집에 갔다주지 못하고 외부강의로
보충했다(삼성, 현대, 대우, 포스코 등)
당시만 해도 우리 국민들 및 연극인들도 뮤지컬의 가능성을 인식하지도 못했을 때이다.
9. MBC 마당놀이
필자는 71년도 TBC-TV(동양방송) 흑백 TV [뮤지컬 주말연속극]을 방송ㆍ출연했고, 81년도 MBC 마당놀이 작품으로 연극과 상관성이 있는 문화체육관에서 마당놀이 "허생전" 공연을 뮤지컬 풍으로 기획 제작되어 우리는 출연만 했다. 당시 관객들이 너무 많아 경찰관들이 경비, 관리를 했다.
그래도 그 때 공연 제작비가 3천 6백만윈이었다. 또한 뮤지컬로 "시집가는 날"을 1980년도에 공연하였지만, 얼마전(23년 9월20~ 24일까지 한국생활연극협회 정중헌 이사장) 마당극 "맹진사댁 경사"에서 맹노인 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
우리 뮤지컬단(前 시립가무단)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창작 뮤지컬 춘향전, 양반전, 이춘풍전, 태양처럼, 상록수, 시집가는날(1980년), 달빛나그네, 나는야 호랑나비, 즐거운 한국인, 땅 짚고 무너지시다, 고향의 민들레, 돈키호테, 지붕위의 바이올린, 지저스~슈퍼스타,
어린이 뮤지컬 등 등 창작 뮤지컬 공연을 총무와 기획을 담당하며 힘들게 대한민국의 뮤지컬을 활성화ㆍ대중화를 시켰다.
10. 흥사단 희락회
따라서 필자는 퇴근 후에 대학로에서 흥사단(1882번) 대학로 지부를 만들어 도산선생의 희락회(喜樂會)! 를 조직하여 "항상 훈훈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얼굴을 갖자!" 등, 국가관으로서는 "힘을 기르소서! 힘이 있으면 살고 힘이 없으면 죽는다"는. 희락회와 레크리에이션 개념과 비교 검토해서 "대학로 문화교실"을 만들었다.
흥사단 서울지부를 조직하여 밤7시부터 월요일은 포크댄스(박일호), 화요일은 에어로빅(박ㅎㅅ), 수요일은 볼륨댄스(배영), 목요일은 탈춤(최창주)을 퇴근후에 사업부장으로 열심히 프로그램을 실시하니 요일당 인원이 100명 씩이었으나 목요일 탈춤은 2명뿐이 접수가 아니되어 이것을 해야 되나 하고 고민했지만 계속 PR과 홍보하여 100명 정도가 되었는데 흥샤단 원로들이 반대했다. 필자는 국민들이 흥사단을 "흥신소" 인지 잘 모른다고 홍보를 하자고 했지만 왈츠, 차차차, 에어로빅, 싱얼롱, 탈춤 등은
흥사단의 목적이 아니라고 반대할 시기에 필자도 해외출장이 자주있어 강사를 교체하였고 제가 운영을 못했기 때문에 인원이 100~80~50명으로 줄다가 폐강이 되었지만 ㅡ
그동안 대학로에서 "차없는 거리'를 만들어 탈춤체조와 한국적 포크댄스를 안무하여 양산도, 진도아리랑, 까투리 타령, 꼭두각시놀음 등을 개발하여 시민들을 건강을 위해 즐겁게 진행한 바 있다. 아울러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에서 제안하여 한국청소년연맹을 설립하면서 전국교사들에게 전통문화교육을 하며 문화(文化)는 "다르다" "변한다" 의 뜻을 교육과 함께 심어 주었다. 흥사단 외에 YMCA, YWCA, 걸, 보이스카웃, 적십자사. 기업체(현대, 대우, 삼성, 포스코 등) 연수원 에서 강의 초청을 받아 집에 밤 12시 전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아침에는 새벽 5시에 여의도광장에서 탈춤체조 등을 하고 출근했다.
그 후에도 계속 건강캠페인 일환으로 탈춤체조, 민속체조, 민속놀이 올림픽(윷놀이, 제기차기, 땅따먹기, 공기놀이, 줄다리기 등) 짚신과 일제센달, 일제의 박해, 공동체문화(품맞이)등을 비교, 잠실체육관에서 전국유초중고교사 1회 3천명씩 체조와 특강의를 하였다.(사진참고)
11. 믿음 생활
서울예술단을 창단하여 1985.9.22 5시 평양대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 우리가 북(大鼓)을 치고 막(幕)이 올라가면 김동건 아나운서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공연이 시작되었다. 필자가 북을 쳐야하는데 너무 떨려서 북을 칠 수가 없었다.
이 때 나도 모르게 대북(鼓)을 잡고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힘이 없나이다! 힘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를 했다. 세계 극장의 오페라하우스 등 무대와 국내는 국립극장 및 세종문화회관 무대에서도 출연할 때 무대에서 떨어 본 적이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기도(祈禱) 한 후에는 떨리지 않았다.
우리는 누구나 믿든지, 믿지 않던 급하면 "하나님!" 소리하고 외친다. 그래서 귀향해서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 복음 전도를 하고 있다.
그래서 갈보리 교회에 출석했지만, 그곳은 장로, 집사, 권사의 직분ㆍ직책들이 없었다.
박조준 목사님께서 ㅇㅇ교회 계셨다가 우리 동네 강남구 삼성동 [길보리교회]를 설립하시면서 필자가 출판기념행사를 할 때 박조준목사님께서 오셔서 축사ㆍ설교 말씀을 해주셨다.
"너의 양식을 바다에 던져라! 수많은 물고기들이 먹을 것이다." 그래서 교수가 되어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기도하고 일하자!" 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12. 서울예술단 창단 및 해외공연
필자는 38선의 사선(死線)을 넘어 生과 死의 갈림길! 목숨을 걸고 평양을 경의선 철도를 타고 서울예술단을 창단하여 총업무를 담당ㆍ수행하며 85년 9월 22일 평양대극장에서 종합예술 공연과 함께 봉산탈춤도 직접 출연했으며,
제목으로 "2천년대를 향하여" 공연을 했다. 당시 남북통일이 되려면 "남북문화동시교류"로 문화전쟁을 해야한다고 주장한 바 있고 "정치는 적을 만들고 예술은 친구를 만든다" "문화는 보이지 않는 핵폭탄이다!" 라고 제시한 바 있어, 동시교류를 제1회만 끝내면서~ 북한 당국에서는 오고 싶어하는 돈 있는 단체는 오라고 해서 연예인 단체가 왕래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서울예술단의 단원모집은 국립극장 무용단, 세종문화회관 단원과 KBS단원, 현대무용단원 등을 급히 단원으로 모집, 구성되어 출연했다.
이제 제2차 남북한동시문화교류를 해서 남북통일을 이루어야 하겠다.
서울예술단이 창단하여 북한을 방문하게 된 동기는 유럽 및 세계일주를 77년~ 78년과 중앙아시아를 순회 시도가 되었다. 이제 남북통일을 기원하면서 뮤지컬단과 봉산탈춤 보존회에서 우리 것을 했기 때문이다.
예로, 미국공연에서는 이두현교수와 주최측에서 나온 김기자 가이드의 인솔로 보통 3개월을 아시아 소사이어티 초청으로
1977년도 미국 30개 주립대학 순회 공연과 강의를 하는데 한개 주에서 다른 주로 이동하는데 보통 비행기로 1시간씩 걸리는 큰 땅덩어리였고, 하와이 4개섬을 다녔는데 비행기로 20분씩 걸리는데 스튜어디스(Stewardess/안내양)는 모두 할머니들이었다.
또 78년도 유럽일주를 순회할 때는 유럽축제본부(CIOFF)초청으로 3개월 동안을 버스로 국경을 통과할 때마다 기사께서 시가 담배를 한 봉지씩을 준비해서 초소를 지날 때마다 제공하니 무사 통과가 되었다.
축제에 각 나라 35개국 이상을 초청했고 호텔이 없는 지역에서는 초등학교 교실에서 야전침대가 숙소이었다,
축제가 큰 행사로서 관객이 3천명 이상이 모였다.(사진자료 참고) 공연은 길놀이 부터 시작되어 순서대로 각 나라들이 사전연습도 없이 요구대로 옵니버스 형태로 렉쳐 데몬스트레이션(Iecture demonstration 입증, 실증 강의) 원형을 컨트롤 하여 3분 내지 30분 씩 공연으로 스태프회의를 통해 출연을 하였다.
그외 아시아 중국은 물론 일본은 매년 25년 동안을 해마다 한예종을 초청 공연을 할 때마다 레퍼토리시스템의 일환으로 쌍사자춤을 안무ㆍ개발하여 일본인들과 세계인들을 즐겁게 해주었다.(사진자료)
일본은 한예종 최창주 연희학과장 주관으로 서연호교수와 함께 순회하는데 여기도 축제는 사전답사가 필요 없었고, 유럽보다 더 세밀한 조직으로 길놀이 부터 시작하여 가이드의 인솔로 큰 예산이 들이지 않고 단체를 인솔하며 다녔다.
우리는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무대장치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조명, 의상, 음향 등 사전 조작의 필요성이 있으나 담당자끼리 이메일로 사전에 서로 주고 받는 완전한 스케줄로 사전답사없이 행사가 진행될 수 있었다. 초보단체들은 사전에 국고의 예산을 들이고 생색을 내고 잘해 보려고 바벨탑을 쌓으려고 노력하는 者들도 있다.
2006년도는 최창주, 김석만교수를 미국UCI 주립대학 교환교수로 초청받고 假面劇(탈춤)과 Birds in DNZ (김석만 연출, 최창주 안무)공연인 연희적(뮤지컬) 종합예술 교육을 통해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전통문화예술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쏘련(러시아)시대 빼째르브르크에 60명의 한예종 학생들을 인솔하여 털털거리는 비행기를 타고 우리의 전통문화 전반의 공연을 보여주었고 일본 및 중국, 대만, 이란, 터키 등 동남아를 순회하면서 탈춤, 풍물, 굿, 민요, 남사당 줄타기 등 가면전시와 한국의 전반적인 전통문화를 공연과 "뮤지컬 양반전" 공연을 87년도 미국, 일본 등에 88올림픽 홍보를 위해 공연을 순회했다.
이제 동료 및 후배ㆍ제자들이 국제화ㆍ세계화 시대에 맞게 힘들게 이루어 논 선배들의 기록을 잘 익히고 이론과 실기를 연구ㆍ노력하여 대한민국의 관계자들이 [TV뮤지컬 주말 연속극] 및 무대화되어 TV와 무대예술이 함께 발전되기를 진심으로 기도(祈禱) 하겠습니다.
따라서 제시한 이 책과 자료는 구매할 수도 없지만, 후배ㆍ제자들에게 자료 교육용으로 제공하고 싶을 뿐이므로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필자의 fb에 검색해보면 자료가 있기 때문에 참고가 될 것입니다.
☆ 참고 자료(資料) ㅡ한국뮤지컬 ㅡ
☆ 영상 참고자료ㅡ첫목, 사자춤, 탈춤체조(천승요 촬영)
1. 한국뮤지컬(최창주 著. 2000년 초판, 2차 앰애드)
1) 한국뮤지컬의 역사
2) 예그린악단 공연과 역사 외
2. 서양 뮤지컬
1) 서양 뮤지컬의 약사
2) 뮤지컬의 특성 외
3. 동ㆍ서양 종합예술 비교
1) 오페라, 2) 연희극, 3) 연극, 4) 마당극, 5) 마당놀이, 6) 공연장
4. 한국 뮤지컬의 역사
1) 단체현황과 방안
2) 한국뮤지컬단체의현황
3) 한국뮤지컬 3주년기념
4) 한국뮤지컬의 특징 외
5. 한국뮤지컬의 현안과 문제점
1) 한국적 뮤지컬의 문제점
2) 한국뮤지컬(연희극)
3) 활성화방안과 단체설립 외
6. 한국뮤지컬 제작과정과 마케팅 외
7. 한국뮤지컬 역사와 작품자료 외
☆ 예그린악단(1961년 설립, 62년 창단) 경력의 역사적인 강의용 자료(資料)와 ~
ㅡ한국뮤지컬 최창주 著 2000초판(학교 교재 사용)
ㅡ봉산가면극본 비교연구 최창주 著, 봉산탈춤 全과장 공연과정을 교재로 출판했다.)
ㅡ여기가 대한민국이다(최창주 著)
ㅡ한국 연희극과 마케팅(최창주 著),
ㅡ탈춤클리닉(최창주 著)
ㅡ유인경 한국뮤지컬의 세계. 초판 2009년(연극과 인간)
ㅡ박만규 著의 뮤지컬사 초판 2010년,
ㅡ차태호 著의 뮤지컬단 연구 등
ㅡ석사 논문들과
예그린악단(1961년 설립, 62년 창단) 경력의 역사적인 강의자료(資料)를 후배ㆍ제자들에게 학교 강의용 교재로 제공하고 싶어 그동안 학계를 되돌아 보며 fb에 올려 놓았으니 참고하시면 합니다.
건강캠페인입니다. 제일의 富는 健康입니다. 건강이 있고 난 다음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건강하셔야 합니다.
飛松 최창주 평론가 석좌교수
전 한예종교수 연희학과장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 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