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자
장영랑
세상은 처음부터 흙빛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늘과 땅이 모두 하얗다. 휘날리는 눈송이로 둘러싸인 순백의 공간에는 갈기를 휘날리며 꿋꿋이 서 있는 한 마리의 말이 있다. 긴 속눈썹에 눈송이가 내려앉아도 두 눈을 또렷이 뜨고 고개를 들고 있다. 유명 화가의 천마도 같은 풍경 속에서 눈을 뒤집어쓴 채 말을 마주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큰아들이다. 드넓은 제주목장의 눈보라에 경주마가 걱정되어 홀로 눈 안부를 전하는 중이리라.
경마장에서 경주용 말을 돌보는 아들은 말 수의사이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새벽부터 수십 마리의 말을 오가며 말굽과 몸 상태를 확인하느라 분주하다. 아들은 말의 뒷발에 차여 내동댕이쳐지는 위험을 감수하며 약물 검사를 위해 채혈을 하고, 말과 함께 하루의 첫 바람을 맞이한다.
동네 강아지만 보면 땅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눈높이를 맞추던 어린 아들은 유난히 동물을 좋아했다. 원시적 생명체 공룡은 말할 것도 없이, 개미 한 마리로도 온종일 놀 수 있었다. 동물의 이름이나 습성 등을 달달 외우고 다녀 동네에서는 꼬마 동물 박사로 통했다.
책 읽기를 좋아하던 아들은 제법 영특해서 특목고를 수월하게 합격했다. 선행학습이 없었던 아들은 승부욕에 불타는 급우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었다. 약하면 무시당하는 야수의 세계 같은 남고에서 순한 아들의 휴식처는 학교 뒷산이었다. 혼자 마음을 다독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라니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고라니는 지긋이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 아들은 사람으로부터 위로받을 수 없는 따뜻한 전율을 느끼게 되었다.
고라니의 선하고 두려운 눈망울 속에 자신이 보였으리라. 뛰어난 친구들 사이에서 버티고 이겨내야 하는 여린 자신이 갈 길 잃은 숲속의 고라니 같았으리라. 그날 이후 아들은 어릴 적 동물을 좋아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타고난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다. 동물과 하나가 되어 내가 동물을 도울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한 삶이 되리라.
수의학과 시절 아들은 승마장을 즐겨 다녔다. 말의 잔등에 몸을 맡기고 달리다 보면 말과 친구가 되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친숙한 개나 고양이 보다 고라니나 말의 몸짓에서 영혼의 교감을 느끼며 사람과 동물을 이어주는 로제타석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대부분 친구들이 애완동물 위주의 시내 동물병원을 찾아 의료 실습을 하였을 때 아들은 혼자 이천에 있는 말 목장으로 갔다. 마필관리사들과 함께 말의 갈기를 빗겨주고, 사료를 주고, 말굽을 닦아주며 친구와 정을 쌓아가듯 말의 모든 습성에 애정을 더해 갔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아들의 삶 속으로 말이 완전히 들어 오게 되었다. 편자가 땅에 울려서 나는 말발굽 소리에 기운이 난다는 아들은 수의학과 동기 중 유일하게 말 수의사의 길을 선택했다.
편자는 말발굽을 보호하고 갈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경주마의 발바닥에 못으로 고정한 쇠로 만든 말의 신발이다. 야생마들은 스스로 필요한 만큼 운동하므로 발굽이 심하게 닳거나 손상되는 일이 없다. 승마장에 있는 경주용 말들은 장제사가 말발굽 관리를 해주어야 한다. 닳은 편자를 떼 내고 발굽을 갈아주고 새로운 편자를 신겨 주어야 말이 잘 달릴 수 있게 된다. 경주를 잘하려면 말발굽을 보호할 수 있는 딱 맞는 신발이 필요한 것이다.
고등학교 때 입시에 맞선 아들도 경주마와 같았을 것이다. 더 나은 성적을 위해 수없이 편자를 스스로 갈아 끼우며 수의사라는 꿈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을 것이다.
장이 꼬여 복통에 뒹구는 말이 들어오면 아들은 온 몸을 던져 말의 사지를 눌러 마취를 한다. 오백 킬로그램이나 되는 말의 몸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발에 고리를 끼워 크레인으로 수술대로 끌어 올릴 때는 건설현장 노동자보다 더 안간힘을 쓴다. 수술대로 올라간 말의 내장물을 비워 내며 온갖 오물 세례를 뒤집어쓰기도 한다. 코로 솟구치는 시큼하고 지독한 냄새의 분비물을 맨손으로 받아내는 일도 예사이다. 말의 폭포수 같은 누런 콧물도 스윽 자기 콧물 닦듯 한다. 행여 손이 잘려 나갈까 걱정하며 개구기를 벌려 말의 누런 이를 닦아주는 모습은 차마 내 비위로는 견디기 힘든 일이다. 중노동이나 다름없는 일을 하면서도 아들은 헤벌쭉 이다. 달리기 선수가 자신의 발에 최적화된 러닝화를 신듯 아들에게 말 수의사라는 직업은 발에 딱 맞는 편자를 신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경마가 있는 주말 내내 추울 때는 추운 데서, 더울 때는 더운 데서 일하다 말 누린내를 풍기며 돌아오는 아들이 나에게는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아들이 하는 일은 딱 맞는 편자를 신어 편해 보이는 게 아니라, 말굽에 편자를 박는 순간처럼 힘들어 보인다. 편자에 박히는 못처럼 내 가슴을 박는다. 빨갛게 달군 편자를 못으로 박을 때는 소리마저 뜨겁다. 못으로 박히는 아픔이 상상되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찔한다. 아들의 육체적 고통이 쿵쿵 울리며 나에게 전해지는 것 같다. 냉랭한 칼바람에 부르튼 손을 보노라면, 아들에게 바닥조차 광이 반짝반짝 나는 깔끔한 동물병원에서 반려견 전문의를 하는 게 어떠냐고 나는 기어이 어깃장을 놓고 만다.
퇴근한 아들이 말 한 마리를 얻은 것처럼 들뜬 목소리로 경주마의 이름이 적힌 편자 액자를 가져왔다. 장제사가 작아진 편자를 떼어내서 깨끗하게 다듬어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황금 칠을 한 편자는 액자 안에서 ∩모습으로 달리기를 멈추고 누워 있었다. 아들은 말편자를 ∩로 걸면 액운을 막고, ∪로 걸면 복을 담을 수 있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며, 행운을 잡은 사나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편자 4개를 모으면 네 잎 클로버 모양을 만들 수 있어 더 많은 행운이 올 것이라며.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편자 양옆으로 못이 박혔던 7개의 구멍에 눈길이 갔다. 나의 애처로운 눈초리를 느낀 아들은 말굽에 못이 박히는 부분은 우리의 발톱과 같은 부분이라 말은 고통을 못 느낀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마치 자신이 힘든 줄도 모르고 일하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이 시간에도 산통으로 네 시간의 대수술을 마친 경주마가 마취에서 깨어나길 기다리며 아들은 밤을 지새우고 있다. 잠도 서서 잔다는 말이 갈기를 흩트리고 그 큰 몸을 누이고 호흡기로 숨을 들이쉬고 있다. ‘치익 치익’ 호흡기 소리와 아들의 간절한 마음만이 수술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뻣뻣이 굳은 다리 아래로 편자가 박힌 말굽을 바라보며 아들은 주술처럼 읊조리고 있을 것이다. ‘일어나! 다시 달릴 수 있어.’
편자가 부족하면 말을 잃는다고 할 만큼 경주마에게 편자는 소중하다. 아들은 경주마에게 편자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을 것이다. 아마도 편자에 담긴 행운은 경주마가 발굽이 닳도록 훈련하고, 지치도록 달린 노력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부여된 것이리라. 아들의 성실함도 편자의 행운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리라.
경마장 곳곳에 Let`s Run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새하얀 눈발에 더 붉게 나부낀다. 아무도 내딛지 않은 순수의 눈 세상에 굽 자국을 남기며 경주마들이 출발 레인으로 들어가고 있다. 출발대의 문이 열리면 앞다리 근육을 출렁이며 편자가 박힌 말굽을 힘차게 내디뎌야 한다. 말의 곁을 지켜야 하는 아들도 함께 뒤따라 나가야 한다. 우리 모두 자기만의 편자를 신고 쉼 없이 달리는 인생 아니던가. 행운의 편자를 손에 쥔 초보 말 수의사 아들도 앞날을 향해 거침없이 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