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들> -양승국신부- 아이들이 사는 집에는 언제나 매일 산더미 같은 일거리들이 쌓이게 됩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백여 명 가까이 되는 대식구들이 한 울타리 안에 살아 가다보니 언제나 일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희 집은 언제나 고마우신 분들로 넘쳐납니다. 여러 고마우신 분들 중에 특별히 인상에 남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분들의 특징은 언제 도착했는지 모르게 조용히 오셔서 꼭 필요한 일들만 소리 없이 조용히 해치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실 때보다 더욱 조용히 사라지십니다. 수고했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죽기보다 싫어들 하십니다. 말마디 그대로 천사들이십니다.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는 오늘 복음말씀을 그대로 살고 계시는 분들이시지요. 그분들의 삶 앞에 저 같은 날나리 수도자들은 부끄럽기만 합니다. 말로는 그럴듯하게 "봉사 없는 삶은 무의미한 삶입니다. 봉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가는 의무입니다!"라고 습관처럼 외쳐대지만 공허한 메아리로 제게로 되돌아옵니다. 몇 년 전 성목요일 최후의 만찬 예식 때의 일이었습니다. 여러 신부님들이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했었는데, 강론을 맡으셨던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사제들은 도대체 언제 봉사를 합니까? 우리들은 일년 내내 형제들이나 신자들로부터 봉사만 받다가 1년에 딱 한번 성목요일 세족례 예식 때만 그럴듯한 표정을 지으며 봉사를 합니다. 우리의 사제직은 무엇보다도 봉사하기 위한 직분입니다. 우리 사제들의 봉사는 1년에 한번만이 아니라 365일 지속되어야 하며, 제대 위에서의 성무집행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델 예수님은 섬김의 왕이었지 섬김을 받던 왕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높다란 왕좌에 앉아 백성들 위에 군림하던 왕이 결코 아니셨습니다. 산해진미가 그득한 주안상 앞에 편안히 앉아서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호의호식하던 왕도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왕이셨습니까? 호화찬란한 왕궁은 고사하고 초라한 여인숙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쓰디쓴 고난의 잔을 기꺼이 받아 마셔야 했던 고통의 왕이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눈물을 머금고 차마 가기 싫었던 형극의 길을 걸어가야 했던 슬픈 모습의 왕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어주셨던 섬김의 왕이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제, 모든 수도자,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섬김의 왕으로 살아가도록 마음 모아 기도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 최선의 봉사를 다한 뒤에 조용하고 겸손하게 물러나는 우리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노력, 우리의 수고, 우리의 땀, 우리의 봉사가 인간들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쭐대지 않고 티내지 않고 오버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 속에 묵묵히 참된 봉사를 실천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람들 눈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받는 고통은 후에 받을 큰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양승국신부-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부르시면> 매월 포콜라레(마리아 사업본부)에서 보내오는 "그물"이란 월간 신앙 잡지가 있습니다. 부피가 얇지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생활 말씀으로 가득 찬 보고와도 같은 잡지여서 늘 애독하고 있지요. 이번 호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지난 여름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아버지의 품으로 떠나신 김낙웅 토마스 모어 형제님인 듯 합니다. 의사였던 형제님은 마지막 시간이 다할 때까지 온 정성을 다하여 진료를 계속하며 아픈 이들을 돌보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웃에게 내어주다가 입원한 지 한달 여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입원 중에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찾아온 이들을 맞았으며 남아있는 이들에게 "좋은 뜻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뒤로 미루지 말라"는 유지로 남겼습니다. 형제님이 건강할 때 써놓으셨던 시 한 구절을 통해 그가 얼마나 당당하고 의연했던 신앙인, 초연하고 겸손했던 신앙인인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물처럼 흙처럼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부르시면 소리 없이 가려네. 후회 없이 가려네. 기쁘게 가려네. 그 날 주님께로 가는 그 날 , 파란 풀밭으로 가는 그 날, 형제님들! 저를 위해 기쁜 노래 부르며 기도해 주십시오. 잔칫집처럼 웃고 떠들며 기도해 주십시오. 연도곡도 흥겹게 신나게 불러주십시오." 그분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 기간은 그야말로 형제님을 향한 찬미가가 울려 퍼지던 축제의 기간이었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약을 주었으며, 한번 진료를 하고 간 환자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다시 못 온다고 생각 될 때에는 필요한 약을 지어 보내주기까지 했답니다. 그에게는 걸인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바쁜 와중에도 직접 문 앞까지 나가 손에 돈을 쥐어주고는 허리 굽혀 인사하여 보내고, 또 병든 걸인들을 고쳐주곤 했으므로 그들 스스로가 미안해하며 같은 시간에 함께 그를 찾아오기도 했답니다. 자신에게 암이 생겼다는 것을 안 형제님은 평생 준비해온 죽음을 담담히 맞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맑은 정신으로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항암치료를 받지 않으며 체력이 허용하는 한 진료를 계속했습니다. 2년여의 투병생활 중에도 언제나 기쁨과 평화로운 모습을 잃지 않았던 그는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모범으로 삼았고, 고통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연금술을 알고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의인들의 고통"일 것입니다. 정말 착한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 갖은 난관 속에서도 묵묵히 제 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 무병장수하며 팔자가 활짝 핀 인생을 사는 것이 상식적인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은 너무나 불공평할 때가 많습니다. 비리란 비리는 다 저지른 사람들, 그토록 파렴치한 사람들,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사람들, 자기만 아는 극단적 이기주의자들은 저리도 떵떵거리며 잘 사는데...왜 하필 저 올곧은 양반, 한평생 한눈 한번 팔지 않는 사람에게 저리 그리 몹쓸 병이 온단 말입니까? 착하기로 따지면 세상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사람, 그 앞길이 구만리 같은 사람을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리도 빨리 불러 가십니까? 오늘 첫 번째 독서와 위에 소개해드린 김낙웅 토마스 모어 형제의 삶은 어렴풋이 나마 "의인의 고통"에 대한 나름대로의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 눈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받는 고통은 후에 받을 큰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 사랑 안에서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라 주님께 뽑힌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상은 시시각각으로 저물어 가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은 잠시지만 주님께서는 영원하십니다. 현재의 십자가를 불평하지 말고 떠벌이지 말고 묵묵히 한번 지고 가 보십시오. 현재의 고통에 아무런 토도 달지 말고 기꺼이 한번 견뎌내 보십시오. 이 세상 그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당신의 얼굴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 순간 현실이 아무리 열악하다하더라고 김낙웅 토마스 모어 형제처럼 기쁜 얼굴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날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만한 글을 인터넷에서 보아서 이 지면을 통해서 소개합니다.
어느 부자가 주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재물도 많이 모았고 사회적으로 성공을 했는데, 이제 제 나이가 80이라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의 재산을 반 뚝 떼어 주님께 바치겠사오니 제 목숨을 조금만 더 연장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섭섭한 표정을 지으시며 이렇게 대답해주셨답니다.
“그래? 네가 전 재산을 다 내게 준다고 했으면 더 오래 살도록 해줬을 텐데, 반을 주겠다고 했으니 내가 1천년만 더 살게 해주마. 마음에 드느냐?”
이 부자는 주님의 이 대답을 듣고서 너무나 기뻤지요. 20년만 더 살게 해 주셔도 감지덕지 할 텐데, 자그마치 천년이나 더 살도록 해주신다고 하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래서 이 부자는 동네방네 사람을 불러 잔치를 벌여서 자신이 기도한 내용과 주님의 응답을 사람들에게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기 재산의 반을 뚝 데어서 성당에 봉헌했지요.
그런데 다음날 이 부자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들은 주님께 기도를 하면서 항의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님과 1천년을 약속하셨다는데, 왜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일찍 돌아가셨습니까?”
이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둘째 서간 3장 8절을 읽어 보렴. 나는 분명히 약속을 지켰다.”
아들은 얼른 성경을 펴서 베드로의 둘째 서간 3장 8장을 읽었습니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주님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사실 이 부자처럼 우리들은 주님께 참으로 많은 것을 청합니다. 그런데 내가 청하는 그것들이 과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셨지요. 왜냐하면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철저히 나의 영광만을 떠올립니다. 그 과정 안에서 다툼과 분쟁이 떠날 수가 없으며, 내 안에 욕심과 이기심을 버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행복과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따라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욕심에서 벗어나 보다 더 겸손된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러한 겸손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전할 수 있으며, 그 결과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증거하는 제자의 모습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영광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을 향해서 나아갑시다.
우리가 남인가요? - 임영인 신부- 우리 센터가 운영하는 식당 조리원들은 헌신적입니다. 그들은 다른 실무자들이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수저를 들지 않습니다.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공동체란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여러 차례 권했습니다만 그들은 그때마다 웃으면서 거절했습니다. 다른 이들의 식사를 챙기는 것이 자신의 몫이고, 맛있게 먹는 것을 보는 것이 자신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외근을 나갔던 실무자가 식사시간이 끝난 뒤 식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조리원들은 수저를 들다가는 내려놓고 그 실무자의 식사를 먼저 챙겼습니다. 식사를 마친 실무자가 “고맙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조리원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남인가요, 고맙다는 말을 하게.” 이런 모습이 우리 센터의 분위기를 한결 따뜻하게 만드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서로가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이 성숙한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정이 넘치는 따뜻한 사회일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종이 되는 사회일 테니까요. 그런데 제가 사회복지 현장에서 경험하면서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을 준 뒤 굳이 감사의 인사를 받지 않아도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느끼는 세상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돕는 일이 내세울 일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 아닐까요? .
새벽을 열며 우리가 살다보면, 나에게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빨리 시간이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또한 내가 빨리 도달하고 싶은 어떤 일들이 있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내일 모레 있을 수능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들과 그 가족들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시험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생각, 그리고 이 수능을 더 이상 체험하고 싶지 않은 생각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득 제가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가 하나 생각납니다.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자기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연인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자기의 연인이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초조했지요. 바로 그 때 어떤 회색의 난쟁이 노인이 갑자기 나타나서 이 젊은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묻는 것이었어요. 이 젊은이는 자기의 연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이 노인이 단추를 하나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단추를 옷에 붙여서 오른쪽으로 돌리면, 당신은 시간을 먼저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사라졌어요. 이 젊은이는 너무나도 신기했고 꿈같았지만, 혹시나 하고서 자신의 옷에 단추를 붙이고는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사랑하는 연인이여, 빨리 와다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고대하던 연인이 웃는 얼굴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너무나도 신기했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단추를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사랑하는 연인과 빨리 결혼하고 싶다.”라고 말했더니, 말하기가 무섭게 성대한 결혼식 장면이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집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면 집이 세워졌고, “아이를 원한다.”라고 하면 몇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 또 “포도밭이 있었으면...”하면 포도밭이 생겨났습니다. 이 젊은이는 너무나도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 희망의 단추를 돌렸지요.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는 이미 백발노인이 되어서 자기 무덤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요.
성급하게 미래를 먼저 가진 그 동화 속의 젊은이는 처음에는 행운인 줄 알았지만, 죽음까지도 먼저 얻게 되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미래에 빨리 다가가고 싶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원 같은 곳에 가서 점을 보기도 합니다. 아마 내일 모레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도 희망의 단추를 가지고서 이렇게 미래에 빨리 다가가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그 동화의 이야기를 볼 때, 우리에게 희망의 단추가 없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큰 행운이 아닐까요?
결국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주님께 모두 내어 맡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즉,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순종과 겸손의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 현재에 보다 더 충실할 수 있고, 또한 늘 편한 마음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빠다킹신부
새벽을 열며 어제 부모님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부모님 집 근처에 있는 ‘진흙구이 오리 전문집’을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께서 좋아하시는 곳 중의 한군데이거든요. 그리고 좋아하시는 이유는 맛도 좋지만, 그곳 종업원들이 연세 드신 분들에게 특별히 친절하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종업원들이 부모님께 말합니다. “아니,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저는 그냥 인사치례로 들었는데 부모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요즘에 노인들에게 오랜만에 왔냐면서 반기는 곳이 어디 있냐?”
그리고 계산을 끝내고 갈 때에는 부모님께 또 오시라면서 ‘10,000원 할인 쿠폰’까지 드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 모습에 부모님께서 이 집을 싫어하실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제가 그 주인에게 “어르신들에게 참 잘하시네요.”라고 말하자, 그 주인이 이렇게 말씀하세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우리 삶의 선배님이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잘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 점점 소외받고 있는 분들이 바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어른을 잘 모시는 분들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이 사회의 분위기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설 자리를 점점 줄어들게 합니다. 그러다보니 젊은이가 눈치 보는 것이 아니라 어르신들이 거꾸로 눈치를 보며, 어르신들이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별과 냉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그 가게를 어떻게 싫어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 가게가 너무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음에도, 그렇지 못한 가게가 많기에 이 가게가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가게를 나오면서 문득 주님께 대한 내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기 보다는 나의 이익만을 먼저 추구하려는 모습을 취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또한 어쩌다가 그 계명을 실천했을 때에는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하면서 어떻게든 티를 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도 이렇게 행동한 자신에 대해서 어떤 특별한 보상이 내려지기를 은근히 기대하지요.
그러나 사랑의 계명 실천은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종처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지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그저 주시는 선물인 것이지, 잘한데 대한 반대급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봉사하는 자에게 하늘 나라가 약속된 것이지, 자신의 선행 하나 하나에 대해서 어떤 보상을 받으려는 자에게 하늘 나라는 멀리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 당장 실천하십시오. 그리고 이에 따라는 보상을 원하지 마십시오. 숨은 일도 지켜보시는 주님께서는 알아서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빠다킹신부
제가 무엇을 했길래? -상지종신부- 사제로서 살아가면서 꼭 지녀야 할 태도나 자세가 여러가지 있겠지만,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 중에 한가지를 새삼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바로 "칭찬을 하는 것은 후하게, 그러나 칭찬받는 것에는 인색하자!"는 것입니다. 그다지 잘난 것도 없고, 그렇다고 제대로 하는 것도 별로 없는데, 사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참 많은 칭찬을 받습니다.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경우도 한두번이 아닙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수도 있고, 예의 상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마지못해 하는 인사치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제 자신을 추스리지 못하면 이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제 잘난 맛에 우쭐거릴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본연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전념하기 보다는 그 다음에 올 무엇인가를 은근히 기대하게 되고, 그것이 없으면 섭섭해 하고 푸념을 늘어놓게 됩니다.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꼴이 되고 맙니다. 칭찬받을 때,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때 기분이 참 좋은 것은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솔직히 기왕이면 칭찬도 많이 받고, 고맙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사제로서 저의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낮은 자가 되시었기에 높이 들어높여지셨던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굳이 애를 쓰면서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하다가 땅바닥에 내쳐지는 잘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를 흉내낸다면 그것이 어찌 그리스도의 사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때때로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선뜻 고백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사제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으로서 저의 본질을 잃지 않기 위해서 제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되새겨야 할, 그리고 삶을 통해서 드러내야 할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한번 '칭찬하는 데는 후하고, 칭찬받는 데는 인색한 사제'를 꿈꾸어봅니다.
신앙인의 겸손 -서현승 신부-
겸손은 상대를 높여주기 위해 무턱대고 자기를 낮추거나 멸시하는 자기 비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스스로 존중할 줄 아는 데서 출발하는 덕목입니다. 또 겸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바탕으로 지위나 위치가 주는 권위를 드러내야 할 때에도 분에 넘치는 충동을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힘입니다. 즉 겸손한 사람은 잘났든 못났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하고 긍정하며 드러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에게 있어서의 겸손한 사람이란 누구일까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겠죠. 이 세상과 내 삶을 창조하시고 섭리해가시는 나의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의 주권을 믿고 기꺼이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참 기쁨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겸손하신 분이셨죠. 왜냐면 철저히 아버지의 뜻을 찾고 따라갔던 삶을 사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철저히 아버지의 뜻을 따랐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시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보잘것없는 종의 비유를 드시면서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라고 말하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 할 때 당신의 마음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어떤 대가나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저 종의 의무로서 주인의 명령을 실행하는 종처럼 행했노라고요. 또한 그 속에는 우리에게 마음을 쓰시는 하느님의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덜 소중해서 혹은 말 그대로 보잘것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참된 기쁨을 누리리라는 초대인 것이죠.
세상에 온 목적 -이인옥-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종처럼, 종일 밭일을 하고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저녁 식사를 마련하고는, 밥상머리에서 온갖 시중을 들고 나서야 남은 것을 먹던 분들이 있었다. 자신보다는 식구들을 위해 종처럼 머슴처럼 일하던 옛날 부모님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다. 어쩌다 맛난 것이 생기면 자식들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감추어 두시고, 어쩌다 좋은 것이 생기면 자식들에게 주려고 고이고이 아껴두셨던 분들. 그렇게 키운 자식이 잘 되면 자신은 정작 해준 것이 없다고 부끄러워하던 어머니들. 누가 물으면 의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자신을 낮추던 아버지들. 그분들은 종처럼 일하면서도 기껍게 정성을 다하셨다. 자신들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바로 그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을 사랑하는 방법이 오직 그것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옛날보다 훨씬 잘살게 된 지금, 종처럼 사는 부모는 거의 없다. 요즘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서도 살지만, 자신의 권리도 당당히 찾고 자기의 몫도 알아서 챙긴다. 부모로서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맞갖은 보상을 요구하게 되었다. 어느새 우리는 꼿꼿하고 당당한 사람들이 되었다.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자세가 종종 하느님 앞에서도 나올 때가 있다. 봉사한 만큼 축복을 받아야 하고 계명을 지킨 만큼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우리 안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것만은 잊지 말자. 자녀를 위해 행하는 헌신에 의해 부모도 부모다워지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로 인해 신앙인도 신앙인다워진다는 것을.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바로 그런 신앙인, 아니 ‘참인간’이 되는 것이거늘, 그 일을 열심히 했다고 해서 무슨 권리를 따로 주장할 것인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이웃을 사랑하는 일밖에 없다고 하거늘, 많이 베풀었다고 해서 누구에게 달리 보상을 받을 것인가? 그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이어야 하지 않을까?
“해야 할 일을 내가 할 수 있었던 모든 조건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홍성만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 속에서 나를 더욱 단단하게 해주시려고 이러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조이 분부대로 하였다고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 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나의 마음이 흐트러질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러한 말씀이 당연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쉽게 교만에 빠지는 '나'임을 나 자신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해 놓고서도 내가 잘나서 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남이 하지 못한 것을 내가 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힘으로 한 것뿐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힘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해야 할 일을 내가 할 수 있었다면, 할 수 있었던 모든 조건이 나에게 마련되었음을 감사드릴 뿐입니다. 봉사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봉사할 마음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면, 봉사할 힘이 솟구쳤다면, 이 모두 감사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생명과 복음과 계명 주셨네. 티끌인 나 무엇 드리리. 감사드릴 뿐이외다. 감사드릴 뿐이외다." (『가톨릭 성가』332번) 오늘도 감사로 시작하여 감사로 끝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을 믿고 받들며’ 살아가느냐(신앙)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창일 신부- "어느 누구도 자기가 이룩한 업적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님께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 암브로시오의 말씀이다.
우리를 불러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당신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이 뜻을 잘 헤아려 착하고 거룩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고, 진리와 정의를 따르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살아갈 때가 많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사랑을 베푸는 일에 있어서도 그렇다. 위험이 없는 범위 내에서만 행하려고 한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 한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된다면 어제의 원수와 화해할 수 있고 어떤 일이라도 행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카멜레온처럼 변신할 수 있어야 사회에서 출세도 하고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께 믿음을 두어야 하는 문제만은 결코 이런 변신이 통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하느님을 모른 체하고 신자라는 것을 숨긴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성당에 다녔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실하게 ‘주님을 믿고 받들며’ 살아가느냐(신앙)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중 제 32주일 화요일 - 경훈모 신부-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라는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의 도전입니다. 자기 존재와 업적을 드러내는 것, 남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단순히 교만과 겸손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의 바탕은 겸손입니다. 그분의 삶 전체가 겸손이었습니다. 겸손이 없으면 주님의 이 말씀은 실현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종이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는 종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인 행세를 하려는 것이 항상 문제입니다. 종은 끝까지 종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은 결국 스스로 ‘종’이라는 자각을 갖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각으로 주님께 뿐만 아니라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충실한 종, 겸손한 종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해야 할 바를 다하고 “주님!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 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의 삶과 환경은 변화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을 낮추어 한없이 겸손하게 오신 주님! 허리를 굽혀 제자들 발을 손수 씻겨 주신 주님! 그분을 좀 더 닮아가게 되고, 좀 더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어른이 읽는 동화, 생각하게 만드는 동화로 늘 감동을 주었던 정채봉님의 글에서도 우리는 겸손의 가치와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예화> 주인공 바위는 다른 바위들과 함께 산골짜기에 조용히 엎드려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골짜기에 사람들이 나타나 바위들을 차에 실었습니다. 그 중에는 주인공 바위도 함께 있었습니다. 바위들이 돌 공장에 도착하자 조각가들이 나타나 바위를 하나씩 차지했습니다. 바위 하나는 설익은 조각가의 정에 의해 고스란히 돌 부스러기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서툰 솜씨 때문에 망가진 것입니다. 다른 바위 하나는 해태상이 되어 한 곳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바위를 붙든 조각가는 늘 생각에만 몰두할 뿐 좀처럼 연장을 손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묻자 그 조각가가 대답했습니다. “서투른 내 솜씨로 이 바위를 못 쓰게 만드는 것 보다, 후일 더 나은 주인을 만나도록 그냥 두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주인공 바위는 뒤돌아서 가는 그 조각가의 그림자를 가슴속에 가만히 안아 들였습니다. 세월이 반 백년이나 흘렀습니다. 어느 날 눈에 총기가 서린 젊은 조각가가 나타나서 자기 스승 모습을 남기겠다며 주인공 바위 앞에 앉았습니다.
점차 돌조각들이 정에 의해 떨어져 나가면서 얼굴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얼굴은 오래전에 그냥 뒤돌아 갔던 바로 그 조각가의 얼굴이었습니다. 이렇게 겸손은 진실과 사랑을 열매 맺습니다. 또한 사랑은 겸손을 통해서 그 참 가치가 드러나고, 겸손을 통해서 사랑은 더 안전하고 바르게 전달됩니다. 성모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모님의 겸손과 순명 덕택에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우리가 만나고 알고 사귀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의 겸손과 순명이 주님을 이 세상에 가장 안전하고 바르게 전해 주셨습니다. 성모님은 지금도 여전히 겸손하셔서 티 나지 않게 우리를 가장 확실하고, 가장 안전하게 주님께로 안내하십니다. 겸손이 나를, 우리 가족들과 공동체를 주님과 연결시켜 줍니다. 그래서 겸손이 우리를 서로 사랑하게 하고 겸손이 우리를 참된 행복에로 이끌어 줍니다.
오늘은 이 이치를 깨닫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겸손하면 천하를 얻는 것이고, 교만하면 천하를 잃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의 기도는 구름을 꿰뚫고, 주님께 도달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주님은 진정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사정없이 물리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자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방심하는 사이에 자신이 올라가 있다면 얼른 내려와야 합니다. 그것이 잘 사는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 - 이기양 신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어디서 많이 듣던 구절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얼마 전 <신심 서적 100권 읽기>중에 선정한 『나가사키의 노래』라는 책 중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자신의 묘비에 썼던 성경 말씀입니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1945년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질 때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 엄청난 비극 앞에서도 의료진과 남은 사람들을 모아 사랑을 실천하며 신앙인으로서의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의과대학에 진학하고 부모로부터 조상 대대로 믿던 신도(神道)를 물려받았지만 나가이 다카시는 과학적 이성주의의 영향으로 신도(神道)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됩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으로 비과학적으로만 생각해온 종교에 눈을 뜨게 되고,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지요. 특히 그 시기에 읽게 된 파스칼의「팡세」는 그리스도교로 입문하게 되는 도화선이 되고, 중국과의 전쟁에 소집당한 후 그는 하느님을 찾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나가사키로 돌아온 그는 영적인 갈망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영세를 받고, 미도리라는 처녀와 결혼을 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의대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방사선학을 가르치고, 그 당시 많았던 결핵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방사선과 씨름했던 13년의 세월은 나가이 다카시에게 방사선의 과다한 노출로 백혈병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합니다. 그는 아내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1945년 8월 미군에 의해 발사된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고, 순식간에 한 도시는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20만 인구 중 80%가 죽었고, 그 중에는 나가이 다카시의 사랑하는 아내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자신도 원폭 피해자가 된 그 절망 속에서도 그는 의료진과 남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신앙인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원폭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지만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그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깊으신 뜻을 읽을 줄 알았던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을 큰 재앙으로 보고 분노하였을 때 그는, 특히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았던 나가시키의 우라카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의미를 2차 대전과 연루된 모든 민족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 희생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쳐진, 하느님의 선택된 희생 제물, 곧 흠 없는 어린 양으로 해석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자신도 많은 방사능에 노출되어 백혈병을 앓았지만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충실한 종이 되었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벗이라 부르시고 당신의 아들로 삼으시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험난한 삶을 살면서도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누구를 원망하지도, 인생을 비관하지도 않았습니다. 죽기까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살았고, 죽어서도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며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 하는 삶으로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주위에서 이런저런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고 겪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나의 주장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고, 내 말을 따라 주기를 바라며 나를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최선을 다하고 겸손하게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는 자세로 산다면 우리 인생에서 대부분의 다툼과 어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작은 노력에도 남이 칭찬해 주고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못하면 섭섭해 하고, 지나치면 화를 내며 다투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주위의 반응에 나를 맡기면 수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지요. 작은 것에 눈치를 살피고, 말 한 마디에 기뻐하거나 절망하여 우울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는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인간의 반응에 민감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반응에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는가에 내 삶을 맡겨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고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17,10)하는 겸손한 자세로 살아간다면 급변하는 주위 여건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음에 평화를 누리고 하느님 안에서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삶을 사려면 인간의 반응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에 중심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흔들림이 있을 수 없으며,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묘비명에 썼던 글과 오늘 복음말씀처럼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절망과 시련에서도 꿋꿋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참나를 찾아서 -강영구신부-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대에게
슬기로운 사람은 내가 누구인가를 압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내가 해야 할 바를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종은 종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종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주인은 주인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주인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 머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팔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 팔다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리가 뒤바뀌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바르게 하지 못하면 혼란과 죽음이 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제 구실을 다하는 것을 수신(修身)이라 합니다. 자신을 바르게 한 사람이 비로소 재가(齋家) 즉 가정을 바르게 하고, 가정을 바르게 한 사람이 치국(治國) 즉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연후에 비로소 평천하(平天下)가 가능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밖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 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진 것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배운 것이 많고 학식이 높은 사람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면 참나(眞我)를 잃고 사는 사람입니다. 참나를 잃고 망아(妄我)와 함께 높은 지위와 재산, 학식과 명예를 누린다한들 그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참나(眞我)를 찾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겸손과 교만
-권지호 신부 -
옛날, 불상을 지고 다니는 당나귀가 있었습니다. 이 당나귀는 자기를 보는 사람마다 절을 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잔뜩 교만해졌습니다. 이렇게 당나귀가 오만방자해지자, 주인은 당나귀에게서 불상을 치워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사람들이 자기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당나귀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인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고 다니는 불상에게 절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우화는 교만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교만이란 거짓에 속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당나귀는 속은 것입니다. 착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교만은 거짓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겸손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진리 그대로 인정하는 받아들이는 태도가 바로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이 겸손을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루카복음 17장은 노예제도를 경험하지 못한 현대인에게는 자칫 인권유린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노예제도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던 2천년전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오늘 내용은 겸손에 대한 탁월한 가르침입니다 :
어떤 노예가 하루 종일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밥부터 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주인이 편안하게 저녁식사를 할 수 있도록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다 한다고 해서 주인은 그 종에게 감사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종은 주인에게 “저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2천년전,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소유물이이라면, 물건입니다. 노예는 사고파는 물건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예는 오로지 주인을 위해서 살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예가 하루 종일 노동을 한 후,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주인이 식사를 하도록 먼저 시중을 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 당연한 일을 했다고 해서 주인이 노예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노예가 주인에게,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고 자신은 쓸모없는 종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종의 태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노예로서의 당연한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처신한 것입니다.
이 얘기를 통해 오늘 복음은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보라고 초대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무엇입니까?
우리인간은 이 지구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지구는 태양주위를 돌고 있는 9개의 행성 중 3번째 행성입니다. 9개의 행성을 거느린 태양이란 항성은 우리 은하계에 속해 있고, 우리 은하계에는 태양과 비슷한 항성이 약 2천억 개 이상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우주 안에는 우리 은하계와 비슷한 은하수가 300억 개 이상 있다고 학자들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그것도 100년 정도 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는 무엇입니까? 그 찰라의 삶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말 그대로 먼지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우주적인 시간으로 보면, 우리 삶은 한순간 반짝하는 것보다 더 짧은 인생을 살고 갈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조금은 겸손해 질 것입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본래 내 것이라고는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실을 사실대로 보게 되면 우리는 조금 겸손해 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엄청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먼지만도 못한 우리 인간을 하느님께서 무한히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게 되면, 우리는 참으로 인생을 기쁘게 살수 있습니다. 그리고 옛날 신앙인들이, “하느님, 인간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사랑해 주시나이까?” 하고 부르짖은 이유를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을 참으로 성공적으로, 그리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수 있는 비결은 바로 겸손입니다. 진리를 진리 그대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겸손의 은총을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종들의 세상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를 들려준다. 오늘날 보수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종의 신분"에 관하여 논한다는 것은 전근대적인 발상으로 치부(置簿)될 지도 모른다. 굳이 논한다면 "자원봉사"의 개념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의 신분이 법적으로 인정되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오늘 비유는 쉽게 이해된다. 품꾼이 보수를 요구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종은 무상(無償)으로 일해야 한다. 종은 주인의 법적인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누구를 염두에 두고,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를 들려주시는 것일까? 앞서간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16,1-15)에서 보았듯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잘 준수한 대가로 넉넉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율법준수가 재물을 보상으로 줬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상에 깊이 젖어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사람을 주인이신 하느님에 대한 종의 신분으로 설정하신다. 인간이 하느님의 종이라면, 인간은 하느님께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어떤 보상도 요구할 수 없다. 반대로 하느님만이 인간에게 온전한 섬김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루가 6,13; 마태 6,24) 인간이 하느님께 보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인간은 하느님께 큰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곧 빚이 아닌가? 그 빚을 우리는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 당시 빚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가 채권자의 종으로 귀속되는 이치만 봐도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던 것이다.(필립 2,7) 결국 예수께서는 종의 신분으로 종들인 인간을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자유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착각을 경계로 삼아 예수님의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10절) 하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그저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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