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립 시집 나는 나로 살았으니 책 소개
신은립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나는 나로 살았으니』가 <도서출판 두엄>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4부로 나뉘어 엮어진 71편의 시편들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오랫동안 그가 지은 시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시인의 말
두 번째 시집 『젖은 몸에서 김이 난다』를 내 놓은 지 19년이 지났네요. 돼지 엄마는 농촌을 떠나 아파트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원고를 정리해 보니 오래 전에 쓴 시들이 많이 있네요. 시쓰기는 제 운명이라 앞으로도 자연이 불러주는 시들을 받아 적고 싶습니다.
제겐 1932년생인 어머니가 계십니다. 제 시집을 안겨드리면 장하다 하시겠지요.
차례
1부 마른 꽃/ 경로당/ 후사포 은행나무/ 상처/ 갈대/ 전쟁은 끝나고/ 사과/ 양육세/ 쨍/ 쓰나미/ 까치 2/ 선무당/ 언젠가는 가겠지/ 그리움/ 고희를 앞두고
2부 어머니 2/ 아직은 꽃/ 붕어빵/ 친정/ 내리사랑/ 생일/ 공돌이/ 아버지 2/ 아버지 3/ 이장/ 당산나무/ 봄에/ 줄/ 달력/ 시멘트 틈 사이/ 시낭송 밤에/ 이모/ 기차
3부 목련/ 영남루/ 연리목/ 산수유/ 밀양은/ 밀양 사람/ 나무야/ 안양 아주버님은/ 칠월 하순/ 후사포리/ 눈 오던 날/ 얼음골 사과/ 양림간/ 느티나무 카페/ 나 먼저 가오/ 꽃잎 피기까지/ 지금 여기/ 삼문 솔밭 아리랑/ 무표정과 무표정/ 소전걸/ 해천이여 밀양이여/ 백지 상석
4부 아지매들/ 곡우/ 정순 어르신/ 새치기하지 말고/ 어르신이라 카지 말고/ 같이 살아요/ 적임자/ 명례에서/ 우수 지나고/ 법은 멀고/ 금붕어/ 노다지/ 봄이가 봄이제/ 최소한의/ 빈집 2/ 밧줄
해설
존재의 본질적 사유와 깊이
나문석(시인)
신은립 시인은 자신이 존재해왔던 시간을 3번째 시집에서 『나는 나로 살았으니』라는 제목을 붙여 시인의 본래 모습에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그대로의 존재방식을 시에서 추구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따져보며 상호의존적이고 동시적이라 어느 부분을 불편해하거나 불운해 할 필요가 없기에 시인은 과거를 두리번거리거나 현실을 비판하지도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성찰하여 삶의 주인공이 되어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공자는 나이 70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고희를 바라보는 시인은 살아온 날들의 깊이만큼 스며든 연륜과 타인에 대한 관대함은 그녀만의 물길이 되어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흐르기만 해도 자연에 다다르거나 우주의 일부분이 된다. 그래서 시인은 주변의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시를 쓴다. 그러나 시인의 시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묻지도 말고 보이는 대로 보이는 일상의 보편적인 풍경을 데생하듯 그려보면 된다.
1 꽃집에서 보던/마른 꽃이/경로당에 피었네//고운 색과/고운 향기는/바람결에 주고//바싹 마른/입이/삼팔광땡이/똥광/흔들었다/박 썼다//저 굽은 등을/자식은 모르는데/경로당 보일러는/안다네 -<마른 꽃 전문>
넷이서 펼친 백 원 내기 고스톱/많이 딴 사람이 돌려주는 동전 소리 짤랑//“우리 어릴 적엔 말이야/누룽지에 뜨물 넣고 숭늉 만들면/참 달았었지/가마솥 누룽지 박박 긁어/서로 먹기 바빴지/지붕 밑 참새 집 털어 참새 구웠지”//가스 불 위에서/깨끔한 찌개 끓는 곳/그곳은/바로 바로 참새방앗간 -<경로당 전문>
할매/땅만 보지 말고 하늘도 봐라/하늘도 보고 바람도 보고 달도 별도 다 본다/키 큰 니 얼굴도 보고/저 다리 위에 가는 차들도 본다 -<갈대 전문>
아흔 살 할머니,/경로당에서 놀다가/남편 이야기 나오자/눈물 훔치며 말했답니다// 언제 다시 안겨 보겠노/무정한 사람/나 혼자 두고 간지도/이태나 지났데이//저세상에서/바람난 건 아니겠제/내 가면/뭐 하러 왔노 하면 우짜꼬 -<그리움 전문>
시인의 시선이 늘 마주하는 곳에는 경로당이 있다. 그 공간에는 인생이란 무한 경쟁의 게임을 노련하게 치러낸 노인들이 모여 일상의 희로애락으로 채워진 생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날마다 생성되는 소재들을 시인은 놓치지 않고 시인의 마음으로 들고 들어와 시의 재료로 삼는다.
꽃집에서 보던/마른 꽃이/경로당에 피었네// 시인은 나이가 들어 피부가 건조해가는 모습을 마른 꽃으로 비유했다. 딸에서 아내로 또 어머니로서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주고 난 모성의 결정체는 마른 꽃이 되었다. 그러나 말라버린 꽃잎까지도 자식들에게 다 주고 마는 우리들 어머니의 야윈 어깨를 자식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저 굽은 등을/자식은 모르는데/경로당 보일러는/안다네 굽은 등은 한 생애의 과거이다. 노인들의 삶의 핵심을 들여다보며 그 뿌리의 본질을 느낄 수 있다. 저마다의 그리움으로 지진 상처가 주름으로 새겨져 그 어떤 일들도 감당하고 긍정적이다. 비록 자식은 모르지만 경로당 보일러는 알아줄 것이라는 긍정으로 말이다.
넷이서 펼친 백 원 내기 고스톱/많이 딴 사람이 돌려주는 동전 소리 짤랑/ 얼른 들여다보면 경로당은 나이 든 노인들에게 또 다른 안식처가 된다. 하지만 세밀하게 들어가 보면 할머니들의 섬세한 감정들이 모여 있어 여러 가지의 다양한 모습들이 연출된다. 경로당에 모인 할머니들의 일상은 자식 자랑하기, 혹은 백 원짜리 고스톱을 치면서 몇 백 원에 아옹다옹 싸우기도 하다 막걸리 한 잔에 풀리기도 한다. 절박함보다는 단순하고 평안한 모습을 시인은 그려내고 있다.
2 일본에 원폭이 떨어지고/부부는 아홉 살 난/딸아이 손잡고/귀국선 탔습니다/고국으로 향하던 배가/바다에 가라앉아/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수장되었지만/안 탈 수는 없었지요//고국으로 돌아온 얼마 뒤/남편이 아팠습니다/사람들은 한센 병이라 수근거렸습니다/남편이 세상을 등지고 난 뒤/외동딸이 아팠습니다/외동딸이/소록도로 가고/대단한 가문은/족보에서 딸의/이름을 지웠습니다//이제야 말하는데/한센 병인지/방사능 병인지는/세월이 엄청 지나 밝힐 수가 없네요 -<상처 전문>
땅에 묻힌 이들의/인사를 물고/새가/날아/오른다/새가 날아간 자리엔/덤불이 무성하다 -<전쟁은 끝나고 전문>
전쟁은 인간의 모순과 갈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현상 중 하나라고 했다. 그 모순된 가치와 욕망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는 자들은 아이들과 아녀자들과 선량한 시민들이다. 우리 역사 속에 한때는 침략과 전쟁으로 인해 무기력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2차 대전으로 죽음의 재가 히로시마에 흩날리던 날 부부는 아홉 살 딸아이의 손을 잡고 조국으로 돌아오던 날 수많은 영혼이 바다에 수장되어 그들의 울부짖음이 시퍼렇게 바다를 넘실대고 있었다. 그리고 어렵게 목숨 걸고 돌아온 조국에서는 아무 날에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되지 않았고, 조국은 국민을 또 한 번 배신을 하였다. 해방이 되면 모든 것이 잘 되리라, 밥 굶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국민들의 믿음조차 저버리고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아르튀르 랭보는 말했다. 영원은 없다고, 고통이 끝나고 나면 다시 고요가 찾아온다고…. 하지만 전쟁의 피해자들에게 지옥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한센 병이라/수군거렸습니다/남편이 세상을 등지고 난 뒤/외동딸이 아팠습니다/외동딸이/소록도로 가고/대단한 가문은/족보에서 딸의/이름을 지웠습니다/ 원폭 피해를 한센 병이라 수군대는 이웃들과 가족조차 외면하는 전쟁의 피해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갈 곳이 없어졌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이나 지나도록 세상은 좋아지지 않았고 지금도 전쟁은 지구 한쪽에서 진행 중이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굶주림과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시인은 그들의 아픔을 <상처>란 시를 통해 서술하여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전쟁의 과거를 현재로 물고와 전쟁과 방사능의 무서움을 상기시키고 있다.
3 나들이에서 돌아온/팔순의 엄마가/꽃무늬 잠옷과/꽃무늬 윗도리/펼쳐 놓으신다//나들이에서 같이 온/화장대 위 울 엄마 틀니와 꽃무늬 옷//꽃무늬 속에 겹쳐지는/어린 내 손을 잡은/꽃처럼 이쁜 울 엄마//혼자 버스 타고/시내 나가/옷도 사고/목욕도 하시고/미장원에도 가시고/아직은 꽃시절이라/화장대 위 틀니도 꽃잎으로 보이는/아직은/아직은 -<아직은 꽃 전문>
오후에 병아리 오는데/가 봐야겠다 나가시더니/물그릇에 물 없다/지금 줘라/미리 줘야 안 차가운 거다/달걀에서 갓 나온 병아리/찬물 먹어선 안 되지//병아리를 내 몸처럼 여겨야/잘 커는 거다 -<어머니 2 전문>
아흔이 넘은 어머니는/나만 보면/뭐 해먹고 사느냐 하신다//일흔을 바라보는 나는/육아휴직 중인 딸에게 갈 때엔/“친정엄마 놀이 하는 거야”라며/국 끓이고/반찬 만들어 두 손 무겁게 들고 간다//어머니에겐/내 걱정 뭐 하러 하시나 하면서/외손자는 귀엽고/딸내미는 한없이 귀하니//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울 어머니,/내 외손자 크는 거 보시며/오래 살면 좋겠다 -<내리사랑 전문>
시의 정황은 낯익은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러나 어머니란 익숙한 단어 속에는 삶의 본질이 다 들어와 있다. 생명의 탄생과 성장의 과정에서 새끼를 세상 밖으로 떠나보내고 남은 빈 둥지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이기고 비로소 여자로 다시 돌아가는 모습을 본다. 그래서 시인은 여자는 죽기 직전까지도 아름다움을 놓지 않는다는 것을 시에서 서술하고 있다. 나들이에서 돌아온/팔순의 엄마가/꽃무늬 잠옷과/꽃무늬 윗도리/펼쳐 놓으신다 엄마와 딸은 나란히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어간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본능의 자아는 아름다운 자신을 그리고 꽃무늬 옷을 입고 꽃이 된다. 꽃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여성성의 상징과 아름다움의 대명사이다. 아직은 꽃시절이라/화장대 위 틀니도 꽃잎으로 보이는/아직은/아직은 그래서 어머니는 틀니를 했지만 꽃무늬 옷을 입고 여자로서 자신만의 절정에 이른다 외손자는 귀엽고/딸내미는 한없이 귀하니//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울 어머니,/내 외손자 크는 거 보시며/오래 살면 좋겠다 어머니가 된 시인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을에 물든 시간 속으로 끌고 들어와 함께 노을이 되어 사랑을 이어가는 모습을 시인은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건/변명이겠지요/아버지 산소를/중산리 종중 묘지로/이장할 수밖에 없었어요/이렇게 해 달라/저렇게 해 달라/할 수 없는 아버지//가파른 산비탈 오른 어머니는/“내 죽기 전에 여 또 오겠나/너거 아버지 혼자 계시는 게 아니라/형님도 있고 조카도 있으니/외롭지는 않겠네”//중산리 새 집에서/후사포 옛집 바라보시진 마세요/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을 테니까요 아버지 -<아버지 2 전문>
아버지 가시기 전에/서향집에 해 넘어가는데/환상일까/아버지, 서 계시는 거야/저녁 햇살로/맏딸 걱정 안고 가셨을 아버지/생일도 여름/기일도 여름/유골함 묻히던 때에/능소화 뚝 떨어졌지//아버지 기일 돌아오면/능소화는 내 맘에 피네 -<아버지 3 전문>
종중 묘지에 아버지 모시고/월연 한 바퀴 둘러보다/재래종 밤나무 밑에 소복소복 밤톨들/비닐봉지에 소복소복 담으며/사람 좋아하고/장난기도 있던 아버지/나이 많거나 나이 적은 사람 가리지 않고/좋으면 친구 하시던 아버지,/새집 집들이 선물 토종밤/오늘 밤엔 아버지 머리맡에도/어머니 머리맡에도/밤톨 같은 별빛 쏟아지리라 -<이장 전문>
쉽게 잊히지 않고 가슴 어딘가에 얹혀있는 아버지란 세 글자, 내 신체의 수많은 분자들이 일치하여 결합을 이루는 유전자는 자식들에게 끝없는 사유의 존재이다. 아버지에 관한 시는 난해할 수도 없고 조작될 수도 없다. 그것은 온몸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가시기 전에/서향집에 해 넘어가는데/환상일까/아버지, 서 계시는 거야/ 아버지의 부재는 흐르지 않는 전류처럼 시인의 정서적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어 환상 속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다니고 간절함은 능소화로 화자의 마음에 피어난다. 아버지 기일 돌아오면/능소화는 내 맘에 피네 오늘 밤엔 아버지 머리맡에도/어머니 머리맡에도/밤톨 같은 별빛 쏟아지리라 <이장 전문>에서 아버지의 묘지 이장을 두고 시인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관한 추억을 떠올린다. 사람을 좋아하고 장난기 많던 아버지가 꿈에라도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오기를 희망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이루어지기를 밤톨만큼 빌어본다.
5 다섯 아이의 아빠가 매달린 줄을 끊어버린 이에게는/아이들이 없었을까//내가 매달린 줄이 철사로 꼰 줄이기를//하여 누가 끊어버릴 수 없는 줄이기를//인형이 아닌 사람이/한 가정의 대들보가 매달려 있음을 안다면//인형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온전치 못함을 안다면 -<줄 전문>
어머니의 뱃속에서 산소와 영양분을 태아에게 보내주고 노폐물을 내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은 탯줄이다. 인간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태초의 줄을 만나고 태어나서도 우리는 많은 줄로 연결된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식솔들의 밥줄을 책임지던 아버지의 존재 속에서 자라고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여 자녀들이 생겨 가족의 밥줄을 책임지는 가장이 된다. 다섯 아이의 아빠가 매달린 줄을 끊어버린 이에게는/아이들이 없었을까/ 다섯 자녀를 둔 가장은 줄 하나에 몸을 의지하여 고층 아파트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술에 취한 인간이 장난으로 끊어버린 줄은 한 가장을 사망에 이르게 한다. 시인은 뉴스로 마주한 상황에 대한 사실적 서술을 통해 누구나 줄은 끊어질 수 있다는 불안한 심리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내가 매달린 줄이 철사로 꼰 줄이기를//하여 누가 끊어버릴 수 없는 줄이기를/ 시인의 내면은 이미 너와 나 라는 경계를 지우고 우리들의 밥줄은 끊어지지 못하는 질긴 줄이기를 염원하고 있다.
여주이 씨 금시당파 후손인/이모는/내 죽으면/화장해 뼈 가루/금시당 앞 강물에 뿌려다오 하셨지//이모의 유골은/홍수로 불어난 강물 때문에/금시당 건너편 강기슭에 흩어졌다//옛날 옛적에/집안끼리 혼인하던 때/시골처녀와 개화총각//개화 총각은 대학교수 되어/신여성과 재혼하고//이모는 아이도 못 낳고//금시당 앞 강물은 오늘도 흐르는데/이모 얼굴은/내 마음 속 연못이다 -<이모 전문>
이모의 일생은 외롭고 슬프게 살다간 전형적인 근대 한국여인의 비극적 유형이다. 여주이 씨 금시당파 후손으로 양반가문의 품위 있는 규수는 집안의 어른들이 만든 혼사로 얼굴도 모르는 낯선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지만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신교육을 받은 남편은 도시여자와 살게 되고 시골에 남겨진 이모는 아이도 낳지 못하고 홀로 살아간다. 화자는 이모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지켜보면서 같은 여자로서 공감해온 이모의 상처를 품어 화자의 상처로 끌어안는다. 그러나 화자는 이모의 비애를 기억하고 슬퍼하기보다는 자신의 내적 공간에 연못을 만들어 그곳에 이모의 영혼을 살게 한다. 그것은 죽은 이모의 영혼이 연못처럼 고요하고 평온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대나무가 돈이 되던 시절에/눈 맞으며/눈길 걸어가/대나무 후둑 후두둑 털었지//눈 오던 날/아궁이에선 장작 타고/아랫목에서 먹던/삶은 고구마와/얼음 둥둥 동치미//사촌 언니랑 시를 읽는 밤에는/큰집 대문 밖 은행나무에서/부엉 부엉 부엉이 눈 맞으며 울었지 -<눈 오던 날 전문>
시인의 장점은 추상적 묘사보다는 실감나는 사물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오는 방식이다. 눈이 내린다. 눈은 사람과 한 몸이 되어 길을 걷는다. 눈과 더불어 대나무를 털어내고 눈과 함께 서정의 풍경을 이룬다. 아궁이에선 장작 타고/아랫목에서 먹던/삶은 고구마와/얼음 둥둥 동치미/ 시가 단순한 풍경을 그려낸 듯하지만 그 너머에 사라진 과거를 이미지로 끌고 와 현재를 그리움에 젖게 만든다.
어젯밤 세상에 나온 갓난 돼지들/어미젖 물리고 들어와/뜨거운 차 한 잔/얼음처럼 차가운 손 감싼다/바람 드세고/날씨 가장 변덕스럽다는 곡우/나 왔노라 울다/나뭇등걸 속 웅크린 소쩍새와/드문드문 남은 복사꽃 불러/따뜻한 아랫목 눕고 싶다/곧 여름 드는 입하라지만/된서리에 감자 싹은 얼었다 -<곡우 전문>
24절기 중 여섯 번째 절기이자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는 본격적인 농번기가 시작되어 일 년 농사 준비에 일손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맘때 쯤 이면 봄비가 내리고 봄비의 양이 흡족하면 백곡이 윤택해진다고 하는데 곡우에 가물면 그해 농사를 망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완연한 봄이 왔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한 기운이 남아 따뜻한 아랫목을 찾고 싶어지기도 한다. 시에서 화자의 곡우는 돼지가 새끼를 낳는 날로 곡우가 시작된다. 갓 태어난 새끼들이 어미젖을 물고 있는 모습은 풍요로운 날이 오는 것을 암시한다. 새끼들이 자라나 큰 돼지가 되면 곧 그것이 풍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날씨가 차가워지는 바람에 감자 싹이 얼어 감자 농사를 망치고 만다. 시에서 곡우는 상반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돼지 새끼의 탄생과 차가운 날씨로 인해 얼어버린 감자 싹이 대비되고 있다. 세상은 누군가 잃을 때가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축복의 날이 되기도 한다.
6 재가파견요양센타 목욕차 들어와/어르신들 좋아하는/요양보호사 뽑았다네/어르신들이 좋아한다는 말에/기분 좋은 첫날/무안 신법에서 죽월로, 죽월에서/청도면으로 청도면에서 명례로//퇴근해 집에 오니/머리는 어질어질 천장이 빙글빙글/아픈 거 숨기고/출근하고 퇴근하고/출근하고 퇴근하다 보니/어르신 몸 씻기며/살아온 이야기 듣는 재미로/목욕차엔 내가 딱이야 하니//중환자 어르신들 언니 찾으니/목욕차 그만 타고/방문요양 가라네 -<적임자 전문>
아파트 1층에/할아버지와 할머니 살았습니다/할아버진 가벼운 치매라 했고/할머닌 센바람 불면 넘어지실 것 같았습니다/할머니 집엔 파견 요양보호사가 와/청소도 하고 병원도 모시고 갔습니다//갑자기 두 분이 보이지 않아 알아보니/할머니는 병원에 가셨고/할아버진 요양원에 가셨답니다//그런데요/닫혔던 문이 열리고 상복 입은 사람들이 많이 와/무슨 일인가 했더니/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답니다/울산에 산다는 며느리가 집 정리로 오가고 난 뒤/집은 다시/문이 굳게 닫혔습니다 -<빈집 2 전문>
요양병원에서 거동이 불편한 환자와 고령의 치매환자를 돌보면서 겪어야하는 간병노동은 지치고 힘들다. 신은립 시인은 요양원과 요양병원에서 요양사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시들이 많다. 위의 시 2편도 시인이 보고 겪은 일상이 시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요양병원에 누워계시는 치매노인들의 의식에 담겨진 삶의 흔적들이 아픔이 되어 신음 소리를 낸다. 인간이 태어나 늙어가는 자연 순환의 이치를 우리는 안다. 그렇지만 나약한 인간들은 건강한 죽음보다는 거의가 병이 들어 죽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신의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본래적인 실존을 찾을 수 있다”고 한 하이데거의 말처럼 죽음을 앞둔 이들은 본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면서 생명의 집착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지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모습들을 고스란히 자신의 시에 담고 있다.
이제 필자는 이 글을 마무리하며 오랫동안 그가 지은 시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신은립 시인 약력
1956년 경남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서 태어나 밀양여고, 부산실업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경남 농어촌 주부문학회를 시작으로 밀양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늦게 핀 꽃(도서출판 경남 2002년)』 , 『젖은 몸에서 김이 난다 (갈무리 출판사 2005년)』가 있다. e-mail/most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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