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그리스도인 시리즈 (6)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참고: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
창 1:27~28 / 2:15
I. 서론
지난 주간에 신기한 경험을 하나 했습니다. 오래 전에 아마존에서 책을 하나 구입했는데, 오랫동안 보지 않고 있다가 지난 주일에 우연히 책장에서 발견하고 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신학책이 아니라 Magic Eye라는 책인데 이 책을 구입한 동기는 “Improve Your Vision”이라는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시력 향상”이라는 제목 때문에 구입을 하기는 했지만, 이 책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책을 책장에 꽂아 놓고만 있다가 지난 주에 우연히 발견하고 이 책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설명서를 다시 읽어 보고, 지시하는 대로 따라 해 봤는데, 신기하게도 그림 안에 3D 형상이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보에 실려 있는 그림도 이런 종류의 그림입니다. 한번 이 그림에 안에 담겨 있는 3D 형상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눈을 그림에 가까이 댔다가 떨어지면서 보면, 3D 형상이 보입니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찾으신 분은 나중에 제게 이메일이나 문자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미 있는 것은 그림 안에 있는 3D 형상을 한 번 보게 되면, Magic Eye 그림에 나오는 다른 3D 형상들도 쉽게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작가가 원래 의도한대로 그림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문화”인데, 이것을 “문화”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문화를 잘 보면서 살고 계십니까? 처음에는 문화가 잘 안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화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시각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Magic Eye를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국의 리처드 니버라고 불리는 신국원 교수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화는 제2의 환경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살아야 하듯이 사람은 문화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고기는 항상 물에서 살아갑니다. 물에서 벗어나는 순간, 물고기는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고기는 자신이 물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물고기와 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항상 땅을 밟고, 매 순간 공기를 마시면서 살지만,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것들을 잘 인식하며 살지 못할까요? 아마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땅과 공기가 너무나 가까이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 2의 환경이 된 것입니다.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모든 것이 문화입니다. 우리가 입은 옷, 교회 올 때 타고 온 자동차, 우리가 예배 드리고 있는 이 교회 건물, 아침에 먹은 음식, 등등. 너무나 가까이 있는 것은 잘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땅과 공기가 깨끗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살고 있는 솔리비타의 땅과 공기가 오염되어, 많은 사람들이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면, 땅과 공기의 존재와 중요성을 인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접하는 대중 문화는 어떨까요? 텔레비전, 유튜브, 미국에서는 온 디멘드. 이런 대중 매체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우리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요? 만약,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문화의 존재와 중요성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나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솔리비타의 땅과 공기가 오염되어 많은 사람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세 가지 유형이 있을 것입니다. 1번 유형은 솔리비타를 떠나는 분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2번 유형은 그런 현상이 있어도 그대로 사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3번 유형은 나와 이웃을 위해 그 곳을 깨끗하게 바꾸려고 노력하는 분이 나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자세라고 생각하십니까? 답은 3번입니다. 방금 답을 맞추신 분은 오늘 설교를 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 나가셔서 그렇게 사시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참고하는 책,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는 문화에 대해서 이런 세 가지 유형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책에는 정확히 다섯 가지 유형이 나오지만, 간단하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은 문화 중에서도 우리가 매일 접하는 대중 매체, 그리고 리처드 니버가 말하는 문화에 반응하는 세 가지 유형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첫째, 대중 매체
우리는 우리가 매일 접하는 대중 매체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1) 커뮤니케이션 방식
장경철 교수님은 커뮤니케이션에는 네 가지 방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Interpersonal communication. 이것은 일대일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와 카페에서 만나서 단 둘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둘째, Group communication. 이것은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솔리비타에 모여서 소그룹으로 성경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셋째, Public communication.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생각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배 때 목사가 성도님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넷째, Mass communication. 이것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 유튜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대중 매체 정보의 양
오늘 우리가 조금 깊이 생각하고자 하는 주제는 마지막 Mass Communication 을 주로 사용하는 대중 매체(Mass Media) 에 대한 것입니다. 대니얼 스트레인지(Daniel Strange) 교수님은 현대 대중 매체의 정보양이 얼마나 어마 어마 한지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첨단기술 전문가들은 인류의 탄생부터 2003년까지 발생한 정보의 양은 대략 5엑사바이트로 추정했습니다. 그런데 2003년부터 2010년까지 8년 동안만 추가된 정보의 양이 5 엑사바이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2018년에 조사했을 때는 인류의 탄생부터 2017년까지 전 세계에 축적된 정보 양의 90 퍼센트가 불과 2년 안에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유튜브에는 1분에 400시간 분량의 동영상이 계속해서 새롭게 올라온다고 합니다.” 400시간이란 약 17일을 쉬지 않고 계속 보는 분량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한 마디로, 대중 매체로부터 정보의 소나기를 맞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중 매체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소낙비를 그냥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대중 매체의 문제점
장경철 교수님은 대중 매체에 노출됨으로 우리의 정신이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개구리를 삶은 과정과 비슷하다고 말했습니다. “대중 매체에 노출됨으로써 우리의 정신이 동화되는 과정은 개구리를 삶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개구리를 삶는 방법은 뜨거운 물에 곧바로 개구리를 넣는 것이 아닙니다. 개구리를 처음부터 뜨거운 물에 넣으면 물에서 즉시 뛰쳐나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미지근한 물에 개구리를 넣어둡니다. 그러면 물 속에서 편안하게 헤엄을 칩니다. 그때 개구리가 헤엄치는 물의 온도를 조금씩 높입니다. 그러면 개구리는 뜨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곰탕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장교수님은 대중 매체에 빠진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고자 시편 23편을 ‘텔레비전’으로 패러디한 시를 소개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텔레비전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는 나로 하여금 평안한 자세로 앉게 하시고, 가벼운 오락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육신을 기름지게 하시며, 그의 이름을 위하여 아무 할 일이 없게 하시는도다. 내가 비록 여가 시간을 보낼지라도 일어나 애쓸 필요가 없음은 모든 일들을 잊게 하시고, 모든 재미 거리를 안겨 주심이라. 이 세상의 잡다한 것들을 무수히 알게 하시며, 모든 자극으로부터 무디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시며, 기도의 시간을 빼앗아 가시니, 내 잔이 텅텅 비어 가나이다. 그런대로 재미있고 흥미 있는 일들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텔레비전 옆에 영원토록 거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거하게 되는 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대중 매체는 어떤 것입니까? 텔레비전입니까? 유튜브입니까? 아니면 온디맨드입니까? 우리는 대중 매체가 전하는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역사를 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대중 문화의 문제점을 알았기 때문에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반응을 해왔습니다.
2. 둘째, 대중 문화에 대한 세 가지 반응
1) 첫째, 도피 (책: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세상 문화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 문화로부터 도피합니다. 쉬운 예를 들면, TV, 인터넷, 유튜브가 나오지 않는 곳에 가서 사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중세 시대에는 수도원에 가서 일생을 보내는 수도승들과 종교 개혁 시대에는 재세례파 신자들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터툴리안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는데, 세상 문화로부터 오염된다. 그래서 세상 문화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 나의 영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이런 유형의 좋은 점은 주님만을 섬기려는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칭찬해 줘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해결책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세상 문화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따로 세우지만, 그 공동체를 세울 때, 그 공동체는 또 하나의 세상 문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수도원도 이 땅에 있는 문화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세우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 공동체 안에서도 수많은 문제가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 글 중에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프레 몽트르 수도원의 재정이 마침내 바닥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수도원의 뾰족탑이 무너져 내리고 창문들은 깨어져 나갔지만, 그런 것을 손볼 여유가 전혀 없을 정도였습니다. 수도원의 재정 상태를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하던 고셰 수도사는, 수도원장의 허가 아래 본인의 임무인 젖소 돌보던 일을 중단하고 ‘불로장생주’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어릴 때 자신을 키워 준 양부모가 불로장생주의 전문가였기에, 그때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을 기억해 가면서 6개월 동안 밤낮으로 애쓴 결과, 마침내 고셰 수도사는 불로장생주를 빚는 데 성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고셰 수도사가 빚은 불로장생주는 프랑스 전역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가게 되었고, 가난에 찌들었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의 건물은 웅장하게 고쳐졌고, 뾰족탑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습니다. 그 모든 것이 고셰 수도사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신부들이 모두 모여 경건하게 저녁미사를 드리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뛰어들어 괴성을 지르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다름아닌 고셰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불로장생주가 잘 빚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매일 그 술을 시음해 보다가, 그만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경건하게 미사를 드리던 다른 신부들은 술주정하는 고셰 수도사를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면서 그를 밖으로 끌어내어 버렸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 수도원 원장은 고셰 수도사에게 앞으로는 성당 출입을 삼가고, 주조장에서 불로장생주만 빚으면서 거기에서 혼자 기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물론 마음씨 착한 고셰 수도사는 수도원장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원장이 주조장을 찾아왔을 때, 고셰 수도사는 수도원장에게 눈물로 간청했습니다. 이제 술을 그만 만들겠으니 예전처럼 젖소 돌보는 일을 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고셰 수도사의 간청을 단칼에 거절하며, 수도원을 위해 열심히 불로장생주만 빚으라고 말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셰 수도사는 계속해서 술을 빚었고, 그 술은 날마다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습니다. 그 결과, 수도원은 쉴 틈 없이 돈을 긁어 모았고 매일 미사가 끝날 때에 수도원장은 ‘우리 수도원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사랑하는 고셰 신부를 위해 기도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고셰 수도사를 위하여 간절히 축복기도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간에 고셰 수도사의 영혼과 육체는 주조장 안에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문제일까요? 수도원이라는 환경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문화로부터 도피하여 새로운 환경으로 바꾼다고, 그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둘째, 동화 (책: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성경을 기준으로 대중 문화를 바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를 기준으로 성경을 보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문화와 맞지 않는 성경 내용은 과감하게 삭제해 버리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입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현대 이성주의의 관점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초이성적인 부분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좋은 예는 지난 번에 설명 드린 레슬리 뉴비긴 선교사님이 인도에서 겪은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님이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힌두교 한 사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 예수님의 초상화가 다른 종교의 신들과 나란히 전시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탄절이 되면, 예수님의 초상화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도가 힌두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그들의 힌두 문화(즉, 범신론의) 일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진리가 힌두교의 세계관에 동화된 (혹은 흡수된) 것입니다.
3) 셋째, 개혁 (책: 문화를 개혁하는 그리스도)
마지막으로, 이 부분만 설명해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문화를 개혁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문화로부터 도피하지도 않고, 그 시대의 문화에 동화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문화를 바라봅니다. 성경적 세계관이란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관점으로 문화를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a. 창조
성경을 한 구절 보겠습니다. 창 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이 두 구절은 신학자들이 문화 명령이라고 해석을 하는 본문입니다. 이 구절들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양승훈 교수님의 설명입니다. “어디까지나 소유주는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청지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청지기라는 사실은 피조 세계를 소극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를 조작하고 개발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세계를 인간이 조작하고 개발하는 것이 바로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문화를 만드는 것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타락이 있기 전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신국원 교수님과 장경철 교수님의 설명도 들어 보겠습니다. 중요한 말을 합니다. “문화는 인간의 지능이 발달하면서 스스로 발전시켜 온 자율적 기획의 산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화는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 대해 품으신 계획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은 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영적인 존재로 지으시고 문화 창조의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성경은 문화를 적대시하지 않습니다. 창조 세계에 대해서 문화 명령을 주시면서 문화를 경작하도록 명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문화 명령을 통해서 문화의 재료와 재능을 주시면서 문화를 경작하기 원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의 문화를 올바로 가꾸고, 개선하고, 즐기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이 세상이 보존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인간의 문화 활동을 통하여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재료와 함께 재능까지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주부는 가정에서 음식 재료를 가지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음식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단순히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직업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건축가는 공사장에서 나무와 흙과 쇠라는 재료들을 가지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멋진 건물을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과학자들는 연구실에서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그들의 재능을 발휘하여 코로나 백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b. 타락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타락으로 이러한 인간의 문화 활동이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 문화 활동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이후의 문화 활동은 하나님의 명령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 되고만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내용은 인간의 타락 이후의 역사가 말해 줍니다.
하르트무트 로사(Hartmut Rosa) 교수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물으면, 선생님, 친구들, 가족들은 분명 조언해 주겠지만, 하나같이 서둘러 이렇게 덧붙일 것입니다. ‘스스로 답을 찾아.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너의 재능과 열망을 알아내렴.’” 무슨 말입니까? 타락한 세상의 사람들은 아이에게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에 따라 아이의 재능과 열망을 발휘하도록 조언하지 않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 인생에 대한 답을 찾고, 그 답에 따라 아이의 재능과 열망을 사용하라고 조언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생각이고, 타락한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c. 구속
그렇다면,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상은 어떻게 원래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이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구속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인간의 영혼이 새롭게 거듭남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국원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목적은 소극적으로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인이 되게 하시어 인간 본래의 사명을 회복시키는데 있습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문화는 제2의 환경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문화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올 한 해 동안에도 우리는 수많은 대중 문화를 접하고 살 것입니다. 우리는 대중 문화를 접하면서 이 한 가지 질문을 꼭 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정으로 좋은 문화일까요?” 저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 문화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하면, 그 문화는 좋은 문화입니다. 하지만, 그 문화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면, 그 문화는 나쁜 문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 해 동안, 대중 문화를 보고 접할 때마다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그 문화들을 바라 봅시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과 문화 생활은 주님 안에서 더욱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